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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7/16
    예언자의 생은 상징이다.(3)
    장산곶매
  2. 2005/03/27
    "우리의 왕은 카이사르 밖에는 없습니다."(요한 복음 19, 15).
    장산곶매

예언자의 생은 상징이다.

  • 등록일
    2005/07/16 16:45
  • 수정일
    2005/07/16 16:45
예레미아서 16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예언자의 생은 상징이다."

예언자의 삶이 상징이라는 사실은
그가 선포한 하느님의 말씀을 증명하는 것은
그의 목숨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 유일한 증거는
예수의 낙인(갈라디아 6,17)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골로사이 1,24)을
이렇게 온 몸으로 감당하려는 마음가짐일 것이다.

예수의 제자로 살려는 이들에게 이토록 고달픈 삶만이 허락된 것은
실상 "너희 사이에서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마태오 20,26)는 교훈의 말씀 때문이다.

섬김의 역리는, 복음적 지도력과 세상을 향한 교회의 복음 증거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세상에 휘둘리는 것도 교회의 길일 수 없지만, 세상을 지배하는 것 또한
교회의 사명일 수는 없는 것이다.

봉사하는 것,
자발적 포기와 낮은 삶을 선택하는 것,
그 역설이 불러 일으키는 경이로움...
그것이 십자가로 부활을 드러내신,
그 분의 길을 따르는 모습일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의 교회는 섬기는 대신 가르치려 하고,
비우는 대신, 채움으로 세상과 맞서려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6월 18일자로 주교회의 생명 윤리위원회로 임명된 이들 중
어느 교수님의 경우, 과연 그의 신학적 태도와 신앙이
주교회의 생명 윤리위원으로서 타당한 정도에 이르렀는지 전혀 납득할 수 없다.

모 신부님이 자신의 저서에서 실명을 거론하며 비판했을 정도로
그의 신앙과 교회관은 극단적이다.
교회와 사회 안밖의 소수자들에 대한 저주와 증오에 가까운
비난을 고려해 볼 때, 그러한 사람을 생명 윤리위원으로 임명했다는 것은
상식을 벗어난 처사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단지 교수라는 이유만으로,
그저, 교황청에까지 지명도가 있는 유력한 평신도라는 이유만으로
주교회의 의사 결정에 참여 할 수 있게 된 것이라면 더욱 비극이라 할 밖에...

최근 들어 교회가 세상을 향해 점점 더 권위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교수나, 변호사라는 까닭에 주교회의로 불려 들어가고
연예인을 내세운 마케팅 전략이 선교라고 소개되는가 하면
저출산의 사회 구조적 요인을 등한시 한 채
무조건 많이 낳으라는 식의 활동만을 벌인다면
그것은 결코 섬기는 이의 자세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세상을 향한 교회의 선포를 뒷받침 하는 것은 신자들의 머릿수도 아니고
유력하고 똑똑한 엘리트 계층의 조언이나 협력도 아니며
무슨 무슨 위원회를 만들어 치밀한 대 언론 활동을 벌이는 일일 수도 없다.

말의 진정성은 삶에서 나온다.
유아와 임산부들을 위해 그 어떤 구체적 활동도 하지 않는 교회가
저출산을 홀로 근심하는 양, 매스컴을 타는 행위는 위선일 뿐이다.

야훼의 뜻을 받들어 온 생애를 걸고 조국의 멸망을 경고했던 예레미야의 최후는
머나먼 이집트 땅에서의 외로운 죽음이었다.

예레미야의 길, 바오로의 길
십자가의 복음과는 남다른 길은 복음과는 무관한
전략적이고 전술적인 선택일 뿐이다.

예언자의 생, 교회의 삶은
이미 정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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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왕은 카이사르 밖에는 없습니다."(요한 복음 19, 15).

  • 등록일
    2005/03/27 02:37
  • 수정일
    2005/03/27 02:37


오늘 우리는 요한 복음 사가를 통해 예수님의 최후를 접하게 됩니다. 요한 복음의 저자는 18, 1-19, 42까지의 기록을 통해 마지막 시련 앞에 직면한 예수님과 그 주변 사람들의 움직임을 아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성서의 이 대목은 다시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즉, 첫 대목은 대사제 예수님의 체포와 가야파의 집에서 일어난 일들이고 두 번째 대목은 빌라도의 심문과정,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십자가형과 그 직후에 일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복음서의 순서에 따르면 이미 예수님은 제자로부터 배반을 당하신 후였지만, 실제로 그분에 대한 거부는 가야파의 심문과정에서 이루어집니다. "너희의 왕을 십자가형에 처한 말이냐?"고 묻는 가야파 앞에서 군중은...사실은 우리 모두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우리의 왕은 카이사르 밖에는 없습니다."

"우리의 왕은 카이사르 밖에는 없습니다."라고 고백함으로써 그들은 스스로 목숨처럼 여긴다던 율법을 어겼습니다. 신명기는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하고 자리를 잡으면, 이내 주변에 있는 모든 민족들처럼 왕을 세우고 싶은 생각이 들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면 너희는 반드시 너희 하느님께서 골라 주시는 사람을 왕으로 세워야 한다. 같은 동족을 왕으로 세워야지, 동족이 아닌 사람을 왕으로 세워서는 안 된다."(신명기 17, 14-15)

과월절의 부정을 피하기 위해 빌라도를 밖으로 끌어냈던 이들이(요한 18, 28) 이번에는 예수님을 못박기 위해 율법을 짖밟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율법이란 무엇이었을까요?

우리는 흔히 유대인들이 율법을 위해 예수님을 박해였다고 생각합니다만, "우리의 왕은 카이사르 뿐입니다"라고 말하는 군중 속에서 율법에 대한 사랑 같은 것을 찾아 볼 수는 없습니다.

이 말은 그들이 예수님을 박해한 동기가 율법에 대한 사랑 때문이 아님을 극적으로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율법은 어디까지나 거룩하고 정당하고 좋은 것이며(로마 7, 12), 죄가 무엇인지 일깨워 주는 구실을 합니다.(갈라 3, 19) 그러나 율법의 이 모든 올바름을 이루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으니 바로 우리가 율법을 정당하게 다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갈라 3, 19)

그렇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유대인들은 율법을 정당하게 다루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알며 지키노라 했지만 결국 그들이 지켰던 것은 자기 삶의 질서였을 뿐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과월절 음식에는 주목할 수 있었지만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질
해방은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본래 율법의 목적은 자유와 해방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을 전제 군주의 압제 밑에 신음하던 다른 모든 백성으로부터 구별되는 계약 공동체로 만들어 주는 약속이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이 정해주신 왕만을 섬겨야 한다는 신명기의 율법은 주권은 하느님께 있으며 지상의 통치자들은 모두 그분의 도구일 뿐임을 선언하는 규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 백성은 선택의 순간에 이르러 그 자유의 법을 빌려 예수님을 배척하고 카이사르로 대변되는 식민지의 현실에 안주하는 길을 선택해 버렸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과연 그러한 실패로부터 자유롭습니까?

우리의 믿음이,
우리 교회의 제도와 계율이,
사람들과 세상을 자유롭게 해 주는 힘이
되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 모든 것을 통해
우리만의 거짓된 평화를 구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의 왕은 카이사르 밖에는 없습니다."(요한 복음 19,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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