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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안락사에 반대한다. 안락사란 존재할 수 없으며 그것은 사실상의 살인에 불과하다는 것이 교회의 견해다. 생명을 지키는 교회는 생명을 통해 그 주인되시는 하느님을 섬긴다. 그렇다면 인간의 존엄은 어떻게 되는가? 그 어떠한 상태에서도 생명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라면 그 삶의 무게에 철저히 파괴될 지도 모르는 인생의 의미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행복하고 사랑하기 위해 사는 것이지 살기 위해 행복과 사랑을 쫒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하지만 인간의 삶에서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 교회는 일시적인 것들 대신에 영원을 바라보라고 요구한다. 영원을 향한 믿음이야 말로 고통에 대한 참된 해결책이라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교회는 오로지 '치료 중지'만을 허락하고 있다. 되돌릴 수 없는 죽음의 임박이라는 전제 하에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어떤 측면으로는 고통을 가중 시킬 뿐인 그런 종류의 치료를 거절할 권리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말기암으로 죽음을 몇 일 앞둔 사람이나 그 가족이 심폐 소생술을 거절하는 것은 안락사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다.
진보적이라고 평가되는 가톨릭 신자들의 일반적 경향과는 반대로 내가 안락사에 대한 교회의 믿음을 지지하는 것을 알게되면 놀라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죽음이 일상화 되고 손쉬운 해결책에 대한 유혹이 만연한 이때에 고통의 가치와 어차피 사멸할 수 밖에 없는 피조물의 숙명을 겸허히 받아 들이라고 가르치는 교회의 자세는 마땅히 존경을 받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태도의 연장 선상에서 나는 교황의 조기 퇴진론에 동의하지 않는다. 대체로 여러가지 불확실한 소문들(연로한 교황을 제쳐 놓고 교황청 관료들이 교회 정책을 지배하고 있다는)에 근거한 교황 퇴진론을 지지하기 보다는 차라리 몸소 겪는 노화와 질병을 통해 하느님을 증거하겠노라는 그분의 말씀에 더 크게 공감하기 때문이다.
늙었다는 것이 불편함을 너머 죄로 여겨지고, 병들었다는 것이 태만의 탓으로 받아 들여지는 이 때에 고통의 기나긴 터널을 지냐야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 있슴을 고백하는 교회의 태도는 참으로 신앙의 열매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만일 이 모든 것이 나와 내 가족의 일이 된다면 어떨까....끔찍한 통증과 싸우며 마지막 순간을 향해 걸어가야 한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정말 그때도 나는 믿음대로 살 수 있을까?
언젠가 그분을 뵙게 되면 먼저 묻고 싶다.
왜 사랑의 하느님께서 십자가 없는 부활은 허락치 않으셨는지....
(기고문)
1. 처음에는 환청이거나, 소문에 듣던 휴거가 일어난 줄 알았습니다. 새벽 5시, 귀청을 찢으며 울리는 찬송소리에....중후한 중저음 베이스임에도, 거의 100m 가까이 떨어진 대로를 지나 제 창문을 흔드는 찬송가 소리에 할 말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 원흉은 길 건너 상가에 있는 모 교회에서 올리는 새벽 찬송이라더군요. 잠결에 그 소리를 듣고 얼마나 어이가 없던지....더구나 밤새 도록 휘황하게 빛나는 네온 사인이란~^^; 그 불빛에 도저히 잠을 이루지 못하신 저희 어머님께서 전화를 드리자, 자매님도 '예수 믿고 구원 받으실 생각이 없으시냐'고 물었다더군요.
상식이 없는 교회, 오로지 복음만을 앞세우고 시민 상식은 결여한 교회가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잠시 고민을 해 봤습니다. 하긴,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보이지 않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는 말씀을 생각해 볼 때, 그 교회의 복음이란 것도 조금은 의심스럽기는 하지만요.
2. 우연찮게 관여하게 된 단체에 자매님이 한 분 계십니다. 한 눈에 그 선한 품성을 알아챌 정도로 다정다감하고 예의 바른 그 자매님이 얼마전에 구원의 길을 제게 알려주시겠다고 장담을 하시더군요.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눠 보다 그곳이 이른바 '구원파'라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습니다. 그마나 저야 가톨릭 신자에 나름대로 신학 전공자라는 사실이 아셨기 때문에 그 권유가 더 계속 되지는 않았지만 같이 일하던 몇몇 개신교 신자분들은 그 자매님과 함께 성서 세미나에 몇 차례 다녀오시더군요.
쩝....가톨릭 신자인 제가 나서서 그걸 막는 다는게 왠지 주제 넘은 짓인 듯 하여 그냥 지켜만 봤는데 뭐라 말할 수 없는 착찹한 마음이 들더군요. 만약에 제가 저 자매님을 따라가는 사람들에게 그 곳은 이단이니 성당을 가라거나 아니면 개신교회를 찾아가라고 권유했다면, 공부만 아니라 신앙 생활에도 지름길은 없으니 그저 여러분이 속한 교회를 더 열심히 섬기라고 충고를 했다면 과연 몇 사람이나 제 말에 귀를 기울였을까요?
그곳이 구원파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도 차마 그 자매님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뭐 씹은 표정으로 사무실을 나서던 분들을 떠올려 보면 이 물음이 더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과연 '증인'으로 불리웠고 그 사명을 감당하겠다고 자원한 나는 어떤 종류의 징표를 드러내고 있었을까요?
3. 감히 시민 상식이란 것을 복음에 견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구원은 상식의 이름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렇지만 상식이 없는 복음이란 이빨빠진 호랑이에 불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름대로 가톨릭에 정통하셨을(그 자매님 무슨 신학교를 나오셨다더군요. 신학교에서 붙잡고 씨름하던 성서학 책들을 통해서도 발견하지 못했던 구원의 확신을 박옥수 목사를 통해 체험하셨답니다...^^;) 분이 목에까지 차올랐을 가톨릭 논박을 가까스로 참아내는 모습을 재밌게 지켜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통의 이름으로 복음주의의 깃발을 들고 저를 칼빈의 법정에 세우려던 분들을 하도 많이 겪어서 인지 그 분의 '힘겨운' 예의 바름이 훨씬 아름답게 다가 왔다는 말입니다.
4. 교의적 정통성과 실천의 올바름을 겸비한 교회와 그리스도인....
힘들지만 늘상 꿈꿔야 할 미래일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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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 마음에 듭니다. 서울인가요? 옛 봉천동의 모습인 것같기도 하고 무척 정겹게 와닿네요.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