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가 곧 죽는다.

 삼년 전부터 곧이라고 했다.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시험 하루 이틀 전 같은 때 할아버지가 죽으면 시험을 치르고 가야할까 바로 가야할까, 시험을 치르고 가면 너무 자책하게 될까 긴 생각을 했다. 엄마가 무너질지 모르겠단 생각도 했다. 할아버지가 곧 죽지 않아서 그런 고민은 곧 잊었다.

 

 삼년 전 여름 외가가 있는 섬을 찾아갔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분들이 조금 놀랐다고 생각했다.
 할아버지의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갔다. 할아버지가 던진 낚싯대로 내 팔뚝보다 큰 삼치 다섯 마리를 잡았다. 팽팽하다는 단어는 그 삼치들을 설명하는 데 쓰일 때 원래 그러기 위해 만들어진 것 같이 아름다워졌다. 바다에서 반나절을 떠돌다 뭍에 돌아왔다. 팽팽한 삼치를 바닥에 던지니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한 마리당 십만원이 훌쩍 넘었다. 두 마리를 팔고 나머지는 동네 사람들과 나눠 먹었다.
 할아버지의 자전거를 타고 항구에서 조기를 널고 파는 할머니를 찾아갔다. 할아버지의 자전거를 타고 술을 마시느라 늦은 밤까지 돌아오지 않는 할아버지를 찾으러 갔다. 할아버지의 자전거를 타고 어두운 방파제가 이어지는 데까지 달렸다.
 그 여름이 지나고 겨울이 오니 할아버지가 곧 죽게 됐다고 했다.

 

 두달 전 엄마는 할아버지에게 내복을 보내라고 했다. 잊은 듯 미룬 사이 봄이 와서 내복은 쓸모없겠지 싶어 아무것도 보내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봄은 오래 찼다.
 이틀 전 엄마는 할아버지에게 런닝과 팬티를 보내라고 다시 말했다. 할아버지가 곧 돌아가실 거라고 했다. 할아버지가 3년전부터 죽을 병에 걸려 있는 건 알았지만 엄마가 직접 할아버지가 곧 죽을 거라고 말한 건 처음이었다.
 최근 십년 간 친구의 아버지와 어머니 대여섯명이 죽었고 아버지 형제의 배우자가 둘 죽었고 할머니 형제가 죽었고 작가가 셋 죽었고 수십 명의 열사가 죽었다. 언젠가부터 아무렇지 않았다. 그런데 아직 죽지 않은 할아버지가 나를 아무렇지 않지 못하게 한다.

 

계단을 오르다가 할아버지가 곧 죽는다

낄낄대다가 할아버지가 곧 죽는다 다시 낄낄대고 할아버지는 곧 죽는다

페이스북에 의미없는 소리를 끄적이다가 할아버지가 곧 죽는다
이유없이 얻어먹는 볶음밥에 얹힌 새우를 씹다가 할아버지가 곧 죽는다
말하기를 멈출 수 없다가 할아버지가 곧 죽는다 그래서 멈출 수가 없다
농담이 끝없이 이어지길 바라다가 할아버지가 곧 죽는다
생전 처음 남자 런닝과 팬티를 고르다가 할아버지가 곧 죽는다
내가 사 보낼 런닝과 팬티가 할아버지가 죽는다

할아버지가 곧 죽는다는 말을 해보고 싶다가 할아버지가 곧 죽는다
 

 

 엄마는 할아버지가 좋아할 거라고 전화를 걸어보라고 했다. 이틀이 더 지났다.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똥을 쌀 시간은 있는데 전화할 시간이 없었다. 올해 설에 엄마는 할아버지를 보러가지 않았다. 할머니가 재촉했지만 귀찮아했다. 엄마는 그저 하루쯤 종일 푹 자고 싶어했다. 엄마를 데리고 할아버지의 섬에 가고 싶다.

 

 결국 내가 하는 생각은 이 글이 너무 감상적으로 쓰여진 건 아닐까, 그조차 판단하기가 어렵구나, 이런 식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2/04/16 22:39 2012/04/16 22:39

Trackback URL : http://blog.jinbo.net/peel/trackback/373

« Previous : 1 : ... 34 : 35 : 36 : 37 : 38 : 39 : 40 : 41 : 42 : ... 222 : Nex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