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를 만났다. 약속시간 직전에 일어난 나는 택시를 탔지만 십분쯤 늦었다. J는 탓하지 않았다. 소 내장을 제한 없이 먹을 수 있는 식당에 갔다. 우리처럼 남의 장기를 씹어먹기를 즐기는 사람이 많아 사십여분쯤 기다린 뒤에야 빈 자리가 생겼다.

 

J는 남자 이야기를 했다. 이년여째 J가 놀아났던 어떤 남자가 나중에 결혼하자며 농담을 던지자마자 J는 한달쯤 잘 사귀던 고급공무원에게 바로 전화를 걸어 공부를 해야 하니 오빠를 더 만날 수 없다고 말했다. 이 멍청한 년, 이라고 욕했지만 나는 J의 그런 점을 좋아한다. J는 그 남자는 습관일 뿐이며 이제 연을 끊었다고 했지만 다 믿지는 않았다.

 

수년 전 J가 학생회 출마 권유를 뿌리치고 나왔을 때, 자신은 배신자가 됐다고 그녀가 말했다. 나는 남에게 배신자라는 이상한 딱지를 붙이는 이들에 대해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여러 차례 말했다. J가 그저 스스로가 비겁했던 기억이라길래 더는  말하지 않았다. 나는 내게 실망스럽다고 말했던 후배가 있었으나 전혀 죄스럽지 않다고 말해줬다. 모두 반십년 전 일이라는 걸 짚으면서 실없이 웃었다.

 

J와 나는 그밖에 여러 사람을 험담했고 메말라가는 성욕을 개탄했다. J의 추궁 끝에 나도 이성애잔데 남자에 관심이 있지 아무것도 없겠냐 하자 J가 많이 기뻐했다. 살이 찐 나는 별로 기쁘지 않았다. J는 너는 모든 면에서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경향이 있다고 핀잔했다. 그 말에 동의하진 않지만, 스스로 추켜세우는 것처럼 보이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들어 안도했다. 주위에 그런 이들이 많아졌는데 좀 질렸기 때문이다.

 

J는 내가 만든 멜로 드라마를 보고 싶다고 세 번 말했다. 그때마다 눈물이 나서 왠지 담배를 꺼내 피우게 됐다. 라이터가 없어서 테이블 위 버너로 주둥이를 내미는 우스운 꼴을 하고 불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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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19 15:53 2012/02/19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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