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아이를 봤다. 아름답고 감동적인 영화다. 이 뻔한 수식이 참 잘 어울리는 영화를 근래에 본 적이 없어서 기쁘게 적어봤다. 

 

최인훈의 <화두> 중, 기억이 어렴풋해서 다소 틀릴 것 같지만 강렬하게 남은 장면이 있다. 북한으로 간 소년이 학교에서 어떤 일로 인민재판 류의 교조적인 잣대가 들이치는 심판을 받게 된다. 그 때 소년은 이같은 단두대 앞에서 끝까지 제 편을 들어줄 사람이 없음을 깨닫고 몸서리쳤던가. 그 어린시절을 술회하면서 이후로 언제나 그같은 기준으로 사람을 재보게 되버린, 그러나 당연하게도 누구도 선뜻 그 기준에 맞지 않아 누구도 믿기가 어렵게 된 스스로를 씁쓸하게 바라보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그때 나는 거기에 수긍이 아닌 공감을 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내 편을 들어줄 사람, 같은 기준으로 사람에게 마음을 주려고 들면 누구도 믿을 수 없다. 비슷한 맥락에서 사람은 상황에 따라 누구든 비겁하고 비열해질 수 있다. 아닌 경우도 있지만, 거의 모든 이가 추악함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다. 만나는 사람들에 대해 어떤 상황에서 그 씨앗이 발아할까, 하지 않을까를 적용해보곤 하는 게 솔직한 내 습관이다.

 

인간의 선의를 믿으면서도 동시에 약하고 악함을 인정할 수 있는 것이지만, 무엇이 세상의 진실이냐고 따져 묻기 시작하면 답은 더러운 쪽으로만 계속 기울었다. 진실을 쓴다는 것, 진실을 보여준다는 것.. 내 글이 진실을 미화하느냐 폄훼하느냐, 같잖은 기사나 써내더라도 매일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질문이니.

 

얼마 전에야 생각이 들었는데,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가정된 상황에서의 진실을 지금 보이는 것보다 중시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물론 보이는 대로 믿는 일이야 말로 미련한 짓이겠지만, 쉽게 수그러들지 몰라도 다양한 환경에 쉽게 싹이 트고 전염이 빠르고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선의의 씨앗들 또한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고 진실인데.. 나쁜 씨앗은 발아되지 않도록 상황을 만들려는 게 수많은 이들이 애쓰고 있는 것인데. 사실 위같은 견해는 현실에 대해서라기보다 문학과 영상의 이야기 장르에 대해서 타진됐던 물음이었는데, 어느새 섞여들었다.

 

엄마를 부탁해나 기타 몇 개는 굉장히 좋으면서도 신경숙의 소설이 왠지 불편했던 건 미화한다는 인상 때문이었다. 어느 강연 후 누군가 내 생각과 비슷한 질문을 했는데, 작가가 이런 식으로 말했었다. 세상은 참 추악하고 처절하고 문제가 많잖아요. 내 소설 안에서라도 그렇지 않은 사람들, 아름답고 맑은 사람들을 그려 넣음으로써 세상에 균형을 맞춰야 겠다는 생각을 해요. 그 말 또한 인상 깊었다.

 

섣불리 선과 희망을 거짓이고 환상이라고, 극한 상황 인간의 몸부림만이 세상 진실이라고 말할 수 있겠나. 피에타와 늑대아이에 대한 소감이다. 둘 다 진실된 좋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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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07 21:35 2012/10/07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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