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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지 기본 활동

 

각성에는 세 가지 기본 활동이 있다. 우리는 이 활동들을 이용해서 이 용어의 기능적인 측면을 정의할 수 있다. (a) 각성은 우리가 하기로 되어 있는 것을 일깨워준다. (b) 그것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 그리고 (c) 각성은 모든 현상의 본질을 본다. 이하에서 이들 정의를 좀더 자세히 검토해보자.

 

(a) 각성은 우리가 하기로 되어 있는 것을 일깨워준다. 명상 중에 당신은 한 가지 대상에만 주의를 기울인다. 마음이 이 초점에서 벗어나 방황할 때, 당신의 마음이 헤매고 있고 당신이 무엇을 하기로 되어 있는지 일깨워주는 것이 각성이다. 마음을 명상 대상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각성인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즉석에서, 내면의 대화 없이 일어난다. 각성은 생각하지 않는다.

 

명상 수련을 되풀이하다 보면 이런 기능이 심리적 습관으로 자리잡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그것은 나머지 생활 영역들에도 옮아간다. 진지한 명상가는 정식으로 명상 자세를 취하고 있든 아니든 간에, 늘상 사건들에 온전히 집중한다. 물론 이 상태는 몇 년 혹은 몇 십년간 명상을 해야 도달할 수 있는 대단히 고원한 상태이지만 말이다. 생각에 빠지는 우리의 습성은 워낙 오래된 것이어서 집요하게 들러붙기 마련이다. 거기서 벗어나는 길은 항상적인 각성 상태를 연마하는 데 똑같이 집요해지는 것이다. 각성 상태에 있으면 자신이 자신의 사고 유형에 붙들려 있다는 걸 알아챌 수 있다. 그 사고과정에서 손을 떼게 해주고 그것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 바로 이 알아차림이다. 그러고 나면 각성은 당신의 주의가 본래의 초점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만일 당신이 명상 중이라면 그때의 초점은 명상의 공식 대상일 것이고, 정식으로 명상하는 중이 아니라면 그것은 그냥 열린 집중 자체의 순수한 적용, 즉 그냥 '아, 이것이 일어나고... 이번에는 이것, 그리고 이제 이것... 또 지금은 이것' 하는 식으로 말려들지 않고 일어나는 일을 순수하게 알아차리기만 하는 것일 것이다.

 

각성은 열린 집중 자체인 동시에, 우리가 열린 집중을 중단하고 있을 경우에는 그렇게 하도록 일깨우는 작용이기도 하다. 열린 집중이란 알아차림이다. 그것은 그런 상태로 있지 않음을 알아차리는 것으로 간단히 자신을 회복한다. 당신이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걸 알아차리는 것은, 정의상 당신이 알아차리고 있다는 것이기에, 그러고 나면 당신은 다시 열린 집중 상태로 되돌아간다.

 

각성은 의식면에서 나름의 독특한 느낌을 만들어낸다. 거기에는 가볍고, 명료하고, 활기찬 맛이 있다. 이에 비해 의식적 사고는 무겁고, 답답하고, 깐깐하다. 하지만 이 또한 말일 뿐이다. 그 차이를 느끼려면 직접 수련을 해봐야 한다. 그러고 나면 당신은 자신의 말로 그것을 표현하게 될 것이며, 따라서 여기서 쓰인 말들은 불필요해질 것이다. 잊지 마라. 중요한 건 수련이라는 사실을.

 

(b) 각성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 각성은 인식에 어떤 것도 더하거나 빼지 안흔ㄴ다. 그것은 아무것도 왜곡하지 않는다. 그것은 열린 집중이어서 무엇이 나타나든 그냥 그것을 바라보기만 한다. 반면에 의식적 사고는 사물들에 우리의 경험을 덧바르고, 개념과 관념으로 우리를 짐 지우며, 계획과 걱정, 두려움과 상상의 거센 소용돌이 속에 우리를 빠져들게 한다. 각성 상태일 때 당신은 그런 놀이를 하지 않는다. 당신은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그대로를 그냥 정확히 알아차리고 다시 다음 번 일을 알아차린다. '아, 이것... 그리고 이것... 지금은 이것' 하는 식으로. 그건 정말로 아주 간단하다.

 

(c) 각성은 모든 현상의 본질을 본다. 각성은, 아니 각성만이 불교에서 가르치는 세 가지 주요 특질이 존재의 가장 심원한 진리임을 인식시킬 수 있다. 팔리어로 이 셋을 아니카(무상, 無常), 두카(불만족, 苦), 아나타(무아-영혼 혹은 자아라 불리는 불변의 영원한 실체는 없다는 뜻이다. 無我)라고 한다. 이 진리들이 불교의 가르침에서 맹목적인 믿음을 요구하는 교리로 제시되는 건 아니다. 불교도들은 적절한 방법으로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진리의 보편성과 자명성을 알게 된다고 믿는다. 이때의 탐구 방법이 각성이다. 각성만이 인간 관찰에 유용한, 가장 깊은 수준의 실체를 드러낼 힘을 가진다. 이 최심부의 수준에서 관찰해보면, 누구나 (a) 조건지워진 것은 모두가 본디 무상하고, (b) 세속의 모든 것이 결국에는 불만족스럽고, (c) 정말로 불변하거나 영원한 실체란 없으며, 오직 과정만이 존재할 뿐이라는 걸 알게 된다.

 

각성은 전자 현미경처럼 작동한다. 말하자면 그것은 너무나 정밀한 수준에서 작동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기껏해야 의식적 사고과정에 따른 이론적 구성물 정도만 실제로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사실 각성은 모든 인식의 덧없음을 본다. 그것은 인식되는 모든 것들에서 덧없음과 가변성을 보고, 조건지워진 모든 것들에 내재된 불만족성을 본다. 그것은 이 스쳐가는 쇼들에서 뭔가를 움켜쥐어봤자 아무 의미가 없음을 본다. 평화와 행복은 그런 식으로 찾아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각성은 모든 현상에 내재된 무아성(無我性)을 본다. 우리가 어떤 식으로 특정 인식 묶음을 임의로 선택하여 굽이쳐 밀려오는 체험의 물결에서 그것을 떼어낸 다음, 지속적인 개별 실체로 개념화하는지 보는 것이다. 실제로 각성은 이런 것들을 본다. 그것은 그것들에 관해 생각하지 않고 직접 그것들을 본다.

 

각성을 완전히 연마하고 나면, 그것은 존재의 이 세 가지 속성을 의식적 사고의 매개 없이 즉석에서, 직접적으로 본다. 사실 우리가 막 언급한 그 속성들조차 본래는 통합되어 있다. 실제로 그 속성들은 개별 항목들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순전히 각성이라 불리는 근본적으로 단순한 이 과정을 잡아서, 성가시고 부적절한 의식적 사고 기호인 언어로 표현하려 한 우리 노력의 결과일 뿐이다. 각성은 하나의 과정이지만, 단계별로 일어나진 않는다. 그것은 한 단위로 일어나는 통합적 과정이다.

 

예를 들어 당신은 자신이 각성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데, 이 알아차림 자체가 각성의 결과이다. 그리고 각성이란 열린 집중이고, 열린 집중은 곧 상황을 왜곡 없이 있는 그대로, 무상하고 불만족스럽고 무아적인 것으로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 모두가 마음 속에서 잠깐 사이에 일어나는 것이다. 그렇다고 당신이 각성한 첫 순간에 즉시 해탈(온갖 인간적 나약함에서 자유로워지는 것)하게 되리란 이야기는 아니다. 이 자료들을 당신의 의식적 삶 속에 통합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전혀 다른 과정이다. 그리고 이 깨달은 상태를 연장하는 법을 배우는 것 역시 또 하나의 다른 과정이다. 하지만 그 과정들은 기쁨을 가져다주고, 노력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과정들이다.

 

각성(사티)과 통찰(위빠사나) 명상

 

각성은 위빠사나 명상의 중심이고 그 과정 전체의 열쇠다. 그것은 명상의 목표인 동시에 이 목표에 이르는 수단이다. 당신은 한층 더 각성하는 것으로 각성에 이른다. 흔히 각성이라고 번역되는 또다른 팔리어 아파마다(Appamada)는 태만하지 않음(non-negligence, 不放逸), 혹은 미혹되지 않음을 뜻한다. 자기 마음 속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끊임없이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이라야 제대로 된 정신 상태를 이룰 수 있다는 뜻이다.

 

또 팔리어 사티는 기억함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다. 이는 과거를 생각하거나 그려본다는 의미에서의 기억이 아니라, 유(有)와 무(無), 정(正)과 부정(不正), 행(行)과 당위(當爲)에 대한 명료하고 직접적이며 말없는 앎을 뜻한다. 각성은 적절한 때에 적절한 대상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 일을 해내는 데 딱 필요한 만큼의 에너지만을 쏟도록 명상가를 일깨운다. 이렇게 에너지가 적절하게 사용되면, 명상가는 항상 고요하면서도 경계하는 상태로 있게 된다. 이 상태가 유지되는 한, '장애' 내지 '심리 불안' 같은 마음 상태는 일어날 수가 없다. 탐욕도 증오도 없고, 욕정이나 태만함도 없다.

 

그러나 인간인 우리는 우구나 오류를 범하기 마련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반복적으로 오류를 범한다. 명상가 또한 진솔한 노력에도 때때로 각성을 놓치고, 유감이지만 흔한 인간적 실패에 붙들려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런 변화를 알아채는 것이 각성이고, 거기서 빠져 나오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쏟도록 일깨워주는 것 역시 각성이다. 이렇게 옆길로 새는 일은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일어나지만, 수련이 거듭될수록 그 빈도가 서서히 줄어든다. 일단 각성이 이런 정신적 불순물들을 밀어제치고 나면 좀더 온전한 마음 상태가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증오심은 자비심에 길을 비켜주고 욕망은 초연함으로 대치된다. 이런 변화를 알아차리는 것 역시 각성이고, 위빠사나 명상가가 이 좀더 바람직한 마음 상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가외의 예민성을 유지하도록 일깨우는 것도 각성이다. 각성은 지혜와 연민이 자랄 수 있게 해준다. 각성 없이는 지혜도 연민도 충분히 익어갈 수 없다.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는 마음이 아름답고 유쾌한 경험으로 인식하는 것은 받아들이고, 추하고 고통스럽게 인식하는 경험은 거부하는 심리적 메커니즘이 자리잡고 있다. 이 메커니즘은 탐욕과 욕정과 증오와 혐오, 질투심 같은 것들을 불러일으킨다. 우리가 수련을 쌓는 것은 이런 것들을 피하기 위해서다. 우리가 이 장애물들을 피하고자 하는 이유는 그것들이 그 단어상의 의미에서처럼 악해서가 아니라, 강박적으로 마음을 차지해 주의를 완전히 붙잡아놓고, 꽉 짜인 좁은 생각의 울타리 안에서 빙글빙글 맴돌기만 하면서 살아 있는 실재로부터 우리를 떼어내기 때문이다.

 

각성 상태일 때는 이런 장애들이 생길 수 없다. 각성은 현재 실재에 대한 주의 집중이어서 이들 장애물들을 특징짓는 멍한 마음 상태와는 정반대이다. 우리 마음 속 깊이 자리잡고 잇는 움켜쥐고, 매달리고, 거부하는 메커니즘이 우세해지는 것은 명상가로서의 우리가 각성을 놓칠 때뿐이다. 그렇게 되면 저항이 생겨나 우리의 자각을 흐려놓는다(迷惑). 우리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복수나 탐욕 따위를 생각하느라 너무 바쁘기 때문이다. 수련이 안 된 사람이라면 무한정 이런 상태에 머물겠지만 숙력된 명상가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곧 깨달을 것이다. 그 변화를 알아차리는 것이 각성이다. 지금까지 받아온 수련을 상기하고 미혹이 사라지도록 주의를 모으는 것이 각성이다. 그런 다음, 그 저항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하도록 무한정 그 상태를 유지하려고 시도하는 것도 각성이다. 따라서 각성은 장애물에 특효약이다. 그것은 치료제인 동시에 예방책이다.

 

각성을 완전히 닦게 되면 절대적 무집착의 상태(non-attachment), 세상 어떤 것에도 전혀 집착하지 않는 상태가 된다. 이 상태를 계속 유지할 수 있다면, 우리 자신을 장애물에서 벗어나게 하고, 우리의 인간적 약점들에서 해방되게 하는 데 어떤 다른 수단이나 장치는 필요 없어진다. 각성은 피상적인 자각이 아니다. 그것은 사물 깊은 곳, 개념과 견해 저 밑을 본다. 이런 종류의 심오한 관찰은 절대적 확실성, 전혀 미혹되지 않는 상태를 가져다준다. 그것은 무엇보다 절대 시들지 않고, 절대 외면하지도 않는, 지속적이고 흔들림 없는 주의 집중으로 나타난다.

 

이 순수하고 결함 없는 탐구적 자각은 심리적 장애물들을 놓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메커니즘 자체를 벌거벗기고 무너뜨린다. 각성은 마음의 불순물들을 무력화시킨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인생의 부침에 전혀 영향받지 않고 남아 있는 순결하고 흔들림 없는 마음이다.

 

<가장 손쉬운 깨달음의 길>(헤네폴라 구나라타나 지음, 손혜숙 옮김. 아름드리미디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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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31 23:28 2009/10/31 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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