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로 쓰기

[주간울교협통신] 68호 97.6.7

 

[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를 읽고

  70년대 하면 뭔가 지사(志士)다운 투쟁과 낭만 따위가 떠오른다. 박정희와 유신 그리고 새마을운동이 거기 있고, 전태일과 원풍모방, 인혁당과 남민전이 김지하의 시편들과 김민기의 노랫가락에 실려 다가온다. 한국전쟁 끝나고 우리나라 첫 정치 망명자라 할 홍세화씨가 쓴 [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라는 책은 이 70년대를 육성(肉聲)으로 전해준다. [암장]이 60년대의 그것이라면 이 책은 70년대의 숨결을 가장 가까이서 느끼게 해주는 조용조용한 증언(證言)이다.

  1975년 4월 9일이 무슨 날인지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듯 싶다. 인혁당의 여덟 사람이 처형된 날이다. 선고가 있은 지 스물네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의 깃발은 지독한 고문을 받아 이른바 '인민혁명당'(인혁당) 재건사건에 엮여져 처형된 이 여덟 사람이 마지막 입은 수의를 모아 짜서 만든 것이었다. 이재문 선생으로부터 이 깃발 애기를 듣고 남민전의 전사가 되기로 결심한 홍세화씨는 전사로서의 자기 활동을 이렇게 정리한다.

  "남민전이 너무 무모했었다고들 말한다. 그렇다. 무모했다. 하지만 나처럼 수학은 잘했지만 계산을 잘못하는 사람에게는 무모하지 않았다. 나는 계산에 어두웠고 또 계산을 싫어했다. 나는 바보였다. 증오의 사회에 무모하게 저항했던 바보였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실존이었고 삶이었다. 나는 내가 바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바보였고 또 그 바보스러움을 자랑스럽게 껴안고 있었던 바보였다.

  나는 투철한 혁명가도 아니었다. 이론가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 어떤 정치적 욕구도 나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나는 내 삶의 의미를 되새겼고 그에 충실하고자 했다. 나를 사랑하고 나 아닌 모든 나를 사랑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분열에 저항하여 하나로 살고 싶었다. 그것은 바로 내 가슴의 요구였다. 그뿐이었다."

  전태일이 떠오른다. 스스로 바보라는 걸 아는 바보들로 바보회를 만들었고 '나 아닌 모든 나'를 사랑하고자 자기 몸을 불태웠던 그 전태일……

  "……두고 온 나의 벗들이, 땅이, 그리고 가족이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나는 더욱더 안간힘을 쓰며 붙들었다. 그래야만 살아남을 것 같았다. 그것은 나처럼 현재가 없었던, 그리하여 미래도 없었던 사람에게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따라서 나는 과거를 살았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해 두해도 아니고, 1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과거를 살아왔다.

  과거를 살아야 했던 나는 철이 들지 않았다. 나이를 먹을 수 없었고, 헛되거나 헛되지 않거나 욕심도 가질 수 없었다. 그러므로 나는 계속 청년으로 남아 있었다……

  그리하여, 몸이 못가니 대신 말이 가겠노라고 글을 쓰기 시작하였는데, 이렇게 나 자신을 돌이켜보며 정리한 글로 한권의 책이 된 것이다. 우선 과거로부터 나 자신을 해방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실제 이 글을 쓰고 나니 그렇게 후련할 수가 없다. 이젠 조금은 나이를 먹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청년 홍세화'가 머나먼 빠리에서 이방인으로 살며 50줄 문턱에 서서 과거로부터 자기 자신을 해방시킨 결론이 '청년 전태일'의 그것과 같다는 데서 나는 70년대를 '느낀다'. 망명자 홍세화의 그 '15년'을 나는 '돌파하듯' 허우적 허우적 살아왔다. 고비마다 [전태일 평전]이 내게 힘을 주었듯 80년대와 90년대는 70년대로부터 빚지고 있다.

  과거로부터 나 자신을 해방시키는 고통스런 과정을 온전하게 되살려 70년대의 심장소리를 듣게 해준 홍세화씨의 이 책을 동지들이 꼭 읽어봤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자기의 80년대와 90년대를 '해방'시켜 온전히 나이 먹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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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14 10:14 2005/02/14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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