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인간을 널리 일없게 하"는 게 건학 이념이냐는 대중의 힐난을 자초하며 명성을 떨치고 있다는 홍익대학교. 그 홍대에서 점거농성 중인 청소경비노동자분들에게 지난 주 수요일 서울서부비정규노동센터 회원들과 함께 연대 방문을 갔습니다. 가서는, 통성명하고 난 뒤 노동자분들한테 심경에 관해 듣고, 궁금한 거 주고받고, 같이 <늙은 노동자의 노래> 부르고 집에 왔네요. 끝까지 남진 못했지만, 모듬전이 안주로 나오는 홍대역 인근 술집에서 뒷풀이도 했고요.

새삼 놀랍고 인상적이었던 건, 홍대에서 청소일 시작한 지 일주일 만에 해고(계약해지) 조치 당하고서 점거 농성에 동참하게 됐다는 청소노동자분의 발언이었는데요.

지금 진행중인 상황 맥락과 파업 과정을 통해 갖게 된 연대의식에 대해 변변한 개념어 같은 거 없이도 빼어나게 이야기를 해 주시더라구요. 일테면 "연대" 같은 개념을 딱히 몰라도 연대가 어떤 거고, 어째서 필요할 수밖에 없는지, 그런데 자신은 이제껏 왜 연대를 외면했는지 등에 관해 어찌나 말씀을 잘 하시던지..'외부세력'의 선동 같은 건 가당치도 않겠다 싶을 정도로 말이죠.ㅎ

제가 느끼기엔 예수처럼 쉽게 말한다는 게 저런 거구나 싶어, 가뜩이나 말이나 글이 어렵다고 욕먹곤 하는 저로선 배운 바가 남달랐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ㅋ;;

어떤 상황이나 과정을 소위 글 깨나 봤다는 이들이 "이론화"한다는 건 어쩌면, 대중이 이미 알거나 감각적으로 발견해낸 실천적 진리치들을 무언가 다른 방식과 용도로 추상화한 데 불과한 게 아닌지 싶은 생각도 한편으론 들더라구요. 그렇다고 이론화 작업은 딱히 필요없다거나, 감각적 발견이면 족하단 얘긴 아니지만요.ㅎ

여하간 그 청소노동자분 얘길 듣고 있노라니, 대의 정치의 불가피성에 대한 근거로 곧잘 거론되는 소위 대중의 "무지"란 게 어떤 능력의 부재를 뜻하기보단 이미 잠재하는 능력의 발휘를 체계적으로 막는 구조적 폭력 효과에 가깝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할까요.

연대의 미덕이라는 게 정말이지 이렇게 함께 만나는 이들이 교학상장하고 평상시 억눌려 있던 것들을 펴는 과정에 있는갑다,, 하고 새삼 배웠더랬네요. 이 과정이 좀더 원활해질 (필시 "전문적인" 정치인들은 탐탁찮아 할ㅋ) 정치란 어떤 것일라나 싶은 생각도 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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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17 15:57 2011/01/17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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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행인 2011/01/18 13: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선 새해 복 많이 받으시구요. ㅎㅎ

    "어떤 능력의 부재를 뜻하기보단 이미 잠재하는 능력의 발휘를 체계적으로 막는 구조적 폭력 효과"라는 것이 어디 대의제에서만 발현되는 것은 아니겠죠. 권력의지라는 것은 이미 그 내면에 이런 목적의식적 기술들을 간직하고 있는듯 합니다.

    간혹 소위 '진보좌파'들에게서 강하게 느껴지는 일종의 혐의 역시 이런 것이 아닌가 해요. 적들과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실제 그들의 심상에는 역시 적들과 마찬가지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 계도해야 하고 선도해야 하는 대중의 그림...

    제가 요 몇 년 간 부딪쳐 있는 벽이라는 것이 여기서 출발하더군요. 님의 표현대로라면 "교학상장"이라는 그것, 이것이 배제된 상태에서 운동을 고민하던 과거의 관성이 오늘날 발목을 잡고 있다는... 촛불 과정에서 너무 강하게 받은 그 충격(촛불 자체는 그닥 충격적이지 않았지만요)의 정체이기도 하구요.

    아무튼 논문이고 뭐고 간에 이 화두가 길을 찾지 못하는 한, 한 발 더 내디디기가 좀처럼 쉽지 않을 듯 합니다. 간만에 찾아와서 넋두리만 하고 가다니...

    다시 한 번 새해에는 소원성취하시길.

    • 들사람 2011/01/18 17: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네네..^^: 사실상 두 번이나 복 받으라 해주신 셈이라, 손 둘 바를 모르겠군요. 안 그래도 제 신상이 요즘 좀 박복한 게 아닌가 싶어 내심 소침해 있었더랬는데, 행인님의 덕담이 그래서 더 반갑게 다가오는 것 같네욤. 고맙슴다.

      그죠.. 저는 행인님께서 말씀하신 "권력의지" 혹은 통치의 기술을 그 내부로부터 동요, 난파시키곤 하는 집합적인 능력 내지 힘을 가령 "민중(혹은 노동자)권력"이라고 불러도 되겠는지 새삼 따져물어야 한다는 쪽이에요."민중권력"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제가 보기엔 잘못 명명된 대중적 형성의 힘/능력은 권력과는 판이한 양상으로 권력(의 통치술)을 창피할 만큼 무력화하거나 적어도 곰삭히는 활동양식에 가까워 보이거든요.

      가령 앞서 언급한 청소노동자 분들이 자주 모여 주눅듦 없이 생각하고, 이야기하고, 주어진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활동의 판을 (다시, 새로?) 짜는 쪽이 명망 있는 지식인들의 "책임방기"에 핏대 올리는 쪽보다는 훨씬 더 영양가 있겠다고 할까요.

      그래서 말씀입니다만, 저는 행인님 같이 "법학 전공"인 분들께서 헌정적 통치술(혹은 주권 국가 형식)의 근본 모순을, 자기조직화하는 "대중"의 형성 능력을 전적으로 수용할 수도 그렇다고 전적으로 내칠 수도 없는 근대 권력양식 특유의 자기속박이라는 측면에서 규명해 주시면 좋겠다 싶던데요.. 뭐, 이랬을 때 헌정적 권력 형식 안에서 그 형식을 바깥을 이야기하고, 이내 그 형식 자체를 '내파'시킬 정치적 싸움의 기술, 혹은 이런 기술에 바탕한 다른 정치의 문법을 이야기할 수 있잖으까 싶어서요.


      사실 저는 여러 뼈아프고 안타까운 한계와 제약에도 불구하고, 지난 20세기 동안 여러 갈래의 반체제 운동들이 어떤 실천적 영감의 원천이자 의미심장한 변화의 동력이 될 수 있었던 건, 운동을 조직하고 지지했던 주체들이 스스로 느꼈든 아니든 간에 바로 이런 측면들이 살아 있었기 때문 아녔나 합니다. 앞으로도 이 측면을 어떻게 살릴지가 새로운 시작의 싹수를 될 성 부른 떡잎으로 만드는 관건이겠다 싶고요.

      작금의 사회운동판에서 사실상 황폐화돼 있다시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교학상장"의 미덕/능력을 말처럼 "다시금" 활성화한다는 게 물론 당장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꽤 지리하게 진행될지 모를 이런 갈무리 과정 없이는 다른 세계가 가능할는지는 일단 접어두고서라도, 진정한 의미의 반체제 운동 자체가 생성될 것 같지가 않아 보입니다. 그렇다고 이게 비관하는 건 아닌 것이, 다만 정직하게 절망할 건 절망하잔 뜻이니까요.ㅎ

      넋두리라셨는데, 그런 것 같지도 않거니와 넋두리면 또 어떤가요.ㅎ 이런 데가 원래 이런저런 온갖 얘기가 오가는 마실 같은 곳인데요 뭐. 좋은 말씀 계속 남겨주시길.

      제 경우 새해 인사는 설날 즈음에야 하는 편인데, 새해 인사를 주셨으니 곧죽어도 그때 하겠다고 하긴 저으기하군여.ㅎ 행인님도 하시는 일, 가시는 곳마다 행운이 폭풍처럼 들이치셨으면 좋겄습니다.^^

    • 행인 2011/01/19 13:55  댓글주소  수정/삭제

      실은 저도 설날에 인사하는 축인데, 올해는 우째 이리 급하게 되네요. ㅋㅋ

      던져주신 주제는 기꺼이 고민토록 하겠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껏 고민하고 있으나 별무 신통한 방향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긴 한데, 들사람님의 채찍질로 여길랍니다.

      번외의 이야기가 될지 아니면 연결되는 맥락일지 잘 모르겠지만, 제 고민은 주로 구체성을 어떻게 끌어낼 것인가에 집중됩니다. 거대담론이 가지고 있는 대의에는 그다지 반론을 제기할 주제가 못되기도 하려니와, 궁극에 있어서는 구름처럼 떠도는 추상적 상상을 어떻게 실물로 만들어낼 것인지가 운동의 귀결이 될 테니까요.

      예컨대 이런 거죠. 미묘한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공화주의와 민주주의가 하나의 연결된 가치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상황, 우리 헌법같으면 "민주공화국"이라는 국체의 선언이 아무런 의심 없이 당연가치로 인정되는 상황에서, 그렇다면 이 두 가치가 실질적으로 하나의 몸과 하나의 가치로 합일될 수 있도록 하는 구체적 방식은 무엇인가? 같은 것.

      비록 헌법을 전공하지만, 가끔 드는 의문이 그건데요, 왜 헌법재판을 몇몇 재판관들이 중심이 되어 진행하는가? 혹은 왜 그들의 의견이 결정의 요체가 되어야 하는가? 헌법재판을 민중(혹은 대중, 또는 인민이나 시민)이 하면 안 되는가? 오히려 그게 더 추상적인 헌법적 가치를 실존의 가치로 승화시키는 방식이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어떻게 민중(등)이 직접 헌법재판을 할 수 있도록 그 장치를 마련할 수 있을까?

      다른 법학전공자들이 본다면 아마도 이단적 발상 혹은 사파의 신공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이것이 가능하고 또 가능해야 한다고 봅니다. 헌법재판 뿐만 아니라 전문성이라는 것이 강조되는 여타의 어떤 분야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죠.

      그런데 왜 이런 논의가 불가능성이라는 전제에 의하여 사파의 이야기로 치부되는가 하면, 바로 님이 지적하신 어떤 통치술, 즉 "근대 권력양식 특유의 자기속박"에서 기인합니다. 위의 논의를 가능하다고 하는 순간 근대 이후에 형성된 정치권력이라는 것은 자기실존의 기반 자체를 상실하게 되거든요. 반대로 이걸 불가능하다고 계속 주장하더라도 역시 그렇다면 "민주주의"라는 어떤 기제에 자신들이 근거하고 있다는 정당성이 희석되죠.

      구체성이 담보되지 않는 추상은 언제나 당연하지만 언제나 상상이 될 뿐이라고 보기에, 개량이니 뭐니 핀잔을 듣고 욕을 먹더라도 그걸 계속 찾으려 합니다. 뭐 사는 동안 찾으면 다행이고 아님 어쩔 수 없고...

      넋두리를 제 블로그에 올리지 못하는 건 게으른 탓도 있지만, 말을 어디서부터 풀어나갈지 이젠 감이 잡히지 않는 이유도 있네요. 그러다보니 님의 글에서 언뜻 잡아낸 실마리가 고마워 이렇게 자꾸 덧글을 답니다. 또 좋은 글로 제 말문을 열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ㅎ

    • 들사람 2011/01/19 21: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네.. 아마 학인으로서 정말 쉽지 않은 길을 내시려는 셈이 되겠지요. 한편에선 보수/개혁을 막론한 자유주의 계통의 (헌)법학 연구자들한테 까이랴, 다른 한편에선 법률적, 제도적 개입에 관한 논의를 죄다 "부르주아 정치놀음"의 일환으로 간주하는 소위 "급진"좌파들한테 까이랴..ㅎ

      물론 저야, 헌정적 통치술에 고유한 부르주아적 지배의 속성들을 무력화할 각종 정치적 개입과 형성의 힘/기예가 어떻게 헌정적 통치술 자체의 자기구속(내지 자가당착) 원리 속에서 이미 긴장, 길항하고 있는지 행인님께서 탐색해 보시겠다는데, "개량이니 뭐니 핀잔을 듣고 욕을 먹더라도 그걸 계속 찾으"셨음 좋겠지만요.

      어쩌면 새삼스런 얘길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전 법률적, 헌정적 통치술도 자본주의적 권력 생산양식의 엄연한 일부로, 소위 "토대-상부구조" 도식으로는 도무지 우겨넣을 수 없는 영토화된 주체생산의 한 영역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보거든요. 이리 본다면 행인님의 작업은 실천적으론 법률적 개입이 좌파정치적으로 지닌 함의와 의미를 새롭게 규정하면서, 법이론적으로도 헌정적 통치술에 대한 역사유물론적 분석의 지평을 마련하게 되잖으까요..?ㅎ;

      저도 사실 "구체성이 담보되지 않는 추상은 언제나 당연하지만 언제나 상상이 될 뿐이라고 보기에" 무언가에 대해 발언한다는 게 늘 조심스럽고 주저되곤 하는데, 한편으론 그렇게라도 무언가 남겨놓는 쪽이 침묵보단 낫잖으까 싶다 보니 자꾸 주절주절하게 되더라구요.- -;

      보니까 법률 분야 이상으로 "전문가주의적 과두제"가 횡행하는 (자연)과학 분야에선, "탈-정상과학"이란 개념을 통해 소위 과학적 활동 자체를, 지적이거나 수행적인 불확실성들의 제거 따위가 아니라, 그같은 불확실성들이 과학적 인지 대상은 물론 인지 형식 자체에도 내재해 있음을 "민주적 참여와 공론화" 속에서 겸허히 드러내는 과정으로 다시 정의하자는 움직임이 있더라구요. 따라서 중요한 건, 전문적 과학자 집단과 (보통 "대중"이나 "지역주민", "시민"이라고 불릴) 비과학자들이 어떻게 이같은 지적, 수행적 불확실성 혹은 불확정성을 "진정 합리적인" 판단의 조건으로 끌어안고 교학상장해가며 문제해결의 실마릴 찾을 것이냐라는 거죠. 생산된 특정 지식의 "전문성" 자체보다도 그 지식들이 만들어지고 유통되는 방식이 그 지식에 대한 신뢰와 유효성을 형성, 판단하는 데 더 결정적인 위상을 지녀야 한다는 말이겠지요. 뭐 이런 변화가 적절한지를 놓고 한바탕 논쟁이나 토론을 치르기도 해야겠고요. 어째거나 "근본적인" 양상을 띠는 이런 과학 패러다임의 변화를, 전문가냐 비전문가냐를 떠나 좋든 싫든 수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인 건 분명하지 싶어요.

      법률 분야도 가치판단의 불확실성/불확정성을 염두에 두자면, 사실 자연과학 분야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분야일 텐데.. 전문적으로 법률적인 판단을 내리는 주체가 누구냐를 떠나 "꼭 그런 식으로, 그런 내용의 법률적 판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는 사실상 없거나, 기껏해야 동어반복적 논리로 정당화될 뿐이잖냐는 거죠. 그래서 저는 구체적 사례를 다루시더라도, 그런 사례가 일반화된 함의를 가지려면 헌정적 통치술이 스스로 정당화하려 들수록 어떻게 그 근본 모순 내지 난점을 자꾸만 드러내는지, 이것이 '정치경제학 비판'의 문제설정과 어떻게 맞닿아 있지도 아울러 밝혔음 좋겠다는 거고요. "지구화 시대의 정의"를 추구하는 데 헌정적 통치술이 겪고 있는 내적 모순의 속살은 무언인지도 아울러 밝혀주셨으면 좋겠다..ㅎ

      덧붙여 "부르주아지 없이 민주주의 없다"는 명제(무어)에 대해, 지정학적으로 (반)주변부에 위치한 한국 같은 국가들에선 "부르주아지 때메 민주주의 없다"는 명제가 더 타당하다고 했던 이들(뤼시마이어)의 논의가 헌정적 법치의 측면에선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도 살펴봐주시면 좋겠지요. 즉, 사례 연구에서 곧잘 보이는 문제점으로, 헌정적 통치술의 "보편성"을 자명한 것으로 상정해 놓고선 비유럽권역 통치술에 내재된 식민성을 되려 강화하고 마는 비교법학적 접근과도 선을 그어주셨으면 좋겠다고 할까요..

      에유, 두서없이 막 지른 감이 좀 있습니다만,, 뭐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알아주시리라 믿습니다..ㅋ;;

  2. NeoPool 2011/01/18 14: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랏, 저번주 수요일이면 저랑 같은 자리에 계실뻔 했었더랬습니다! 저는 밤 늦게 가서 밤새고 나왔는데ㅎㅎ

    • 들사람 2011/01/18 17:47  댓글주소  수정/삭제

      오호, 그러셨군요. 본의 아니긴 했지만, 바통 터치를 한 셈이었나요 그럼? 저는 밤 늦게 나왔으니.ㅎ

      네오풀님도 올 한 해 오르막에 강한 토끼처럼, 이런저런 난관을 모쪼록 잘 넘어서실 수 있길 바라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