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mentary No. 312, September 1, 2011
자코뱅주의의 종말? 소수자와 국가, 그리고 폭력
(The End of Jacobinism? Minorities, States, and Violence)
근대 세계에서 굴러가는 국가 치고 “소수자들” 없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또는 다르게 말하자면, 모든 국가에는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누리는 것으로 규정되는 모종의 집단이 있다. 이 집단(성)은 인종이나 종교, 언어, 종족성, 아니면 이들 속성들의 여러 조합에 따라 규정되곤 한다. 그리고 이들 속성을 공유하지 못하는 타자들이 늘 있게 마련이다. “소수자들”은 거의 항상 경제적·정치적·사회문화적 권리에 대한 접근이 상대적으로 가로막혀 있다. 이런 기초적인 측면에서 이들은 억압돼 있고, 자신들이 억압돼 있다고 느낀다. 이들은 보통 이런저런 경로를 거쳐 그들 스스로 해당 국가의 시민으로 불리게 됐다고 여길 만한, 그런 동등한 지위를 얻으려 애쓴다. 소수자(혹은 소수성이)라고 하는 건 수량적인 개념이 아니다. 시민이란 이름 아래 구성된 다수성은 모종의 “소수자/소수성들”에 기초해 있는 셈이다.
세계의 언론을 접하는 독자들이라면 유명한 사례들을 알고 있을 게다. 터키의 쿠르드족, 얼스터(잉글랜드 식민통치기에 유입된 개신교도들이 밀집해 있는 아일랜드 북부지역)의 가톨릭계 주민들, 스페인의 바스크족, 안데스 권역 국가들에 속한 선주민들, 미국의 아프리카계 주민들, 인도의 불가촉(천)민들, 중국의 티벳족, 수단의 남수단인들, 모로코의 사하라인(베르베르족). 목록은 끝나지 않는다.
아주 빈번히, 특히 지난 40년에 걸쳐 더 많은 권리, 그러니까 더 나은 일자리를 구하고, 자기네 언어를 쓰거나 종교를 누리며, 자율·자치적인 여러 제도를 갖추거나 입법기구 내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적절히 대의할 권리를 획득하는 데 좌절을 겪으면서, 이들 소수자는 폭력에 기대왔다. 이렇게 좌절을 겪은 소수자 집단이 지리적으로 특정 지대에 비교적 몰려 있을 경우, 그들은 분리·독립을 꾀하곤 해왔다.
각국 정부에선 일반적으로 “소수자” 집단들한테 집합적인 권리를 부여한다는 발상에 반발하기 마련이다. 대다수 국가는 그 기질상 자코뱅의 화신이다. 자코뱅주의 국가에선 도덕적으로, 개별성원 각각을, 매개하는 집단이나 제도를 거치지 않고서 직접 다룰 권리를 주창한다. 문제는 이 국가가, 폭력적인 봉기를 통해 자기네 목표를 이루고자 정치적으로 조직된 “소수자들”과 마주했을 때 그 국가는 무엇을 하겠냐는 거다.
당장 본능적으로 이뤄지는 대응은 보통 들고일어난 집단을 찍어누르고자 국가의 물리력을 사용하는 일이겠다. 그리고 이게 처음엔 곧잘 먹힌다. 국가들한텐 대체로 제 맘대로 써먹을 다량의 물리력이 있고, 이 힘을 국가“질서”의 유지 차 써먹는 데 좀체로 주저함이 없다. 그러나 상당수 사례에서 볼 수 있다시피, 일단 봉기에 나선 집단은 지속 가능할 만큼 충분한 응집력을 발휘할 수가 있다. 그럴 경우, 우리는 아주 오랜 기간 이어질 수 있는 내전 상황을 맞이하게 되는 셈이다.
궁극적으로, (내전으로 가냐 마냐를 둘러싼) 선택의 향방은 국가 쪽의 대응 여하에 달려 있다. 국가는 관련 갈등을 정치적으로 풀고자 애쓰거나, 그러지 않을 수 있다. 갈등을 정치적으로 푼다는 건, 본질적으로 모종의 타협이 이뤄진다는 뜻이다. 즉, 소수자들이 내건 분리독립이라는 발상을 그들 스스로 접게 하는 대신, 그들이 요구한 권리들을 종종 지역 자치(권)까지 포함해 충분할 정도로 부여하는 타협 말이다.
이와 같은 “타협”에 이르는 데는 몇몇 변수들의 조합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군사적 분쟁의 소지가 비교적 사그라들고, 지정학적으로 문제의 “소수자”한테 상당 정도 외부 지원이 이뤄지면서, 양측 모두가 비교적 진이 빠진 상태여야 한다. 얼스터의 상황이 바로 이 경우에 해당하는 듯싶다. 터키와 스페인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질지 모른다. 수단에선 수단 정부는 자신의 패를 과신했고 그래서 남수단 지역(의 소수자들)은 분리독립할 수 있었다. 이 일을 놓고 중국 정부는 결연히 다짐하기를, 자기네 나라에선 생기지 않을 일이라고 한다.
정치적 상황은 어디고 간에 저마다 중요한 방식으로 차이를 보인다고 하지만, 더 많은 집합적 권리를 앞세운 “소수자” 집단들의 요구가 현존 세계체제의 지정문화[geoculture, 자본주의 세계경제에서 ‘보편적인 것’으로 곧잘 가정·전제되곤 하는 지배적 담화양식] 속에서 전지구적으로 그 힘을 계속 불려가고 있는 건 분명해 보인다.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서, 자코뱅주의는 이제 끝물이다. 국가들로선 이들 쟁점을 둘러싼 정치적 “타협”에 이를 수 있는 틀거리는 뭘지 숙고하는 쪽이 현명한 일일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