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mentary No. 188, July 1, 2006

“주이라크 미 대사의 걱정거리들”





미국 정부가 이라크에 대해 짐짓 용맹한 표정 유지하느라 애쓰고 있다. 자기네가 정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정기적으로 주장하고 있으니 말이다. 최근 언론에 공개된바, 주이라크 대사 잘메이 칼리자드(Zalmay Khalilzad)가 국무부 장관에게 보낸 6월 6일자 메모에 따르면, 당국자들 간에 오고간 토론결과는 훨씬 비관적이었던 모양이다.

메모에는 삼엄한 경비 아래 있는 녹색구역(Green Zone, 미군과 미군에 협조하는 과도통치위 관련 시설이 밀집한 곳으로, 바그다드 중부에 위치. 2005년 4월 이 곳을 미군이 차지하면서 야자수가 무성한 주변 자연환경과 안전지대의 의미가 섞여 이와 같이 불리게 됐다-옮긴이)에서 미 정부지원 업무를 보는 이라크인 직원들과 관련된 여러 가시적이고 잠재적인 문제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달갑지 않은 얘기다. 대사가 이야기하는 이라크인 직원들의 불만은 이렇다―“이슬람주의자들, 혹은 이슬람주의 민병대들이 그들 일상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쳐왔다”는 것이다.

여직원들의 경우 이른바‘단정한’옷차림에 대한 굉장한 압박에 시달리는데, 때론 이란 여성들이 받는 것보다 정도가 훨씬 심하다. 어느 여직원에 따르면, 매일 잡아타는 택시 운전사한테서“차도르를 안 두르면 승차를 거부하겠다”는 얘길 들었다고 한다. 의복과 관련된 여러 가지 압박(이는 남자도 예외가 아닌데, 반바지 착용금지가 그 예다)만이 아니라, 자기네 사는 아파트에 전기가 아예 안들어오고 기름 구입하느라 토요일 하루 12시간을 잡아먹혀야 하는 데 대해서까지, 직원들 불만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상황은 아주 위험천만한 지경에까지 이르러, 직원들은 주변 지인들은 물론 가족들에게까지 자신이 어디서 일하는지를 숨기고 있다. 이들은 녹색구역 밖에서 핸드폰을 안 쓰거나 심지어 갖고 다니지도 않는다. 특히나 여성들에게 그것은, 자신의 정체를 스스로 탄로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집에 있을 땐 대사관에서 전화가 와도 아랍어로만 말한다. 대사관측에선 결국, 직장에서 걸려오는 전화로 그간의“아닌 척”이 들키리라 여기는 직원들한테 아예 통화시도를 안 하게 됐다. 더욱이, 이라크인 직원들을 통역에 활용하는 것 또한 사진기자들이 현장에 있을 땐 불가능하다.

녹색구역에 들어가기 위해 직원들은 검문소를 지나야 한다. 4월 이후, 이들 검문소에 있는 이라크인 수위들은 이전보다 더“민병대 같”고 (이라크 직원들에 대해) “냉소어린”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 직원은 수위들이 자신의 패스를 공개리에 집어올리곤 옆사람들한테 직위를 큰소리로 알리지 못하도록 대사관측에 직원용 패스가 아닌 기자증 발급을 요청했다. 그 직원에게“그런 확인절차는 엉뚱한 이들 귀에 잘못 들어가기라도 하면 사형선고나 다름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상황은, 가난한 구역에 사는 이들한텐 전혀 절박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바그다드에서도 이른바“부유한”구역 거주자들에게 해당하는 문제인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 구역 근방은 이제, 거리에 나다니기가 위험해지고 다른 곳으로 주거지를 옮기는 이라크 중산층들이 점차 늘면서“사람이 살던 곳이었나 싶을 만큼 황량한 유령촌”이 돼버렸다. 이라크인 직원들 얘기에 따르면, 이들의 안전은 결국“무크타(mukhtar, 아랍권에서 촌장을 이르는 말-옮긴이)들의 임면권조차 민병대에게 일임해온”인근의 관할세력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좌우된다. 그 결과,“사람들은 이제 이웃 대부분을 더 이상 믿지 않는다.”

업무능력이 탁월한 이라크인 직원들에 대한 신뢰를 더 이상 견지하기 힘든 건, 미국 대사관측도 마찬가지다.“그들이 (자신들의 나아진?) 상황을 부풀리거나 자기네들의 고유한 세계관에나 어울릴 정보로 우리를 이끌지는 않을지 걱정”이라는 거다. 이러다 보니 업무는 혼선에 빠지기 마련이다. 대사는“인종청소가... 거의 모든 이라크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한 아랍 일간지 편집국장의 시각을 (미국 정부한테-옮긴이) 반드시 알려야 한다고 여겼던 모양이다.

그렇지만 대사가 타전한 소식 중 가장 각별한 주목을 요하는 대목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최근 들어, 우리는 현지 직원들의 성이 들어가 있는 문서들을 분쇄 조치하기 시작했다. 3월에는 몇 명의 직원들이 오더니, 우리가 빠져나갈 경우, 자신들을 위해 마련된 대책은 있는지 물었다.”

문서를 분쇄한다? 미 합중국이 빠져나갈 경우? 이라크인 직원들은 1975년, 이륙중인 헬리콥터에 타려 안간힘을 쓰던, 미국 대사관 및 미군부대에서 근무한 베트남인 직원들을 떠올리고 있는 게 분명하다. (이라크도) 벌써 그 같은 시점에 이른 걸까? 보건대, 미 대사관에 근무하는 이라크인 직원 중 일부는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다. 대사가 워싱턴에 보고를 했던 건 이래서다.



이매뉴얼 월러스틴
/예일대 석좌교수, 사회학




영문칼럼보기:http://fbc.binghamton.edu/188en.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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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02 22:14 2008/03/02 22:14

장벽과 세계

월옹논평 2008/03/02 22:12

Commentary No. 185, May 15, 2006

"장벽과 세계"
(Walls and the World)




장벽들이 다시금 언론에서 논란의 도마 위에 올랐다. 미국-멕시코 간 국경선에 설치된 장벽들, 서안지구(the West Bank, 가자지구와 함께 중동의 대표적 분쟁지역으로 알려진 팔레스타인인 거주지역. 1967년 이 지역에 대한 이스라엘의 군사적 강점 이후 지속된 이스라엘인들의 유입은 분쟁의 도화선이 됐다. ― 옮긴이)의 이스라엘 정착촌을 에워싼 장벽들 말이다. 권력과 통제권을 행사할 이들에게 이들 장벽은 지지의 대상이다. 하지만 고작 20년 전만 해도 로널드 레이건은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 서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발언을 남겼다―“고르바쵸프, 이런 장벽 따윈 이제 허물어버리라고!”

장벽은 왜 만들어지는가? 기본적으로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사람들을 밖으로 내치기 위해서, 그리고 사람들을 안으로 들이기 위해서다. 장벽들은 보통 사법권이 미치는 테두리에 세워지는데, 이 때 사법권이란 통치권한 및 사적 소유의 관할과 관련을 맺는다. 이들 장벽을 두고 던져야만 하는 질문 두 가지. 그런 장벽의 구축은 도덕적으로 온당한 일인가? 또한 그것은 효과적인가? 이들 물음에 대한 답변 사이엔 넓고 깊은 어긋남이 가로놓여 있다.

먼저, 사람들을 밖으로 내치고자 세워진 장벽부터 이야기해 보자. 그들을 밖으로 내치려는 건 왜일까? 생각건대, 그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에겐, 저들이 원하지만 우리로선 함께 나누길 원치 않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워낙이 경계들이란 그저 땅 위에다 그어놓은 금일 뿐인지라, 그어질 때부터 구멍나 있기 마련이다. 그 해결책으로는, 이 경계(국가 또는 소유의 경계)를 쉽사리 넘나들지 못하도록 장벽을 설치하는 방법이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 것'이라 여기는 것들에 대한, (우리가 보기에) 변칙적이고 불법적인 침범/진입/획득을 봉쇄하겠다는 것이다.

멕시코와 이웃한 국경선을 따라 미국이 세워온 장벽의 경우, 이 장벽 덕분에 멕시코와 남미 쪽 사람들한테 특별한 허가(즉, 비자) 없이 미국에 들어가기란 훨씬 더 어려워졌다. 그들이 미국으로 가려는 이유는 물론, 일자리를 찾거나 가족과 재회하기 위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장벽을 정당화하는 논리는 이렇다. 즉, 비자 없이도 국경을 넘나들 수 있게 되면 부유한 나라로의 이민이 봇물 터지듯 진행될 것이며, 사람들이 가고자 하는 나라에서 누리던 삶의 표준은 위협받게 되리라는 것. 비자는 들어오고 싶어 하는 이들 수를 제한(하는 것은 물론, 입국해도 될 만한 이들의 유형까지 선별)하는 제도적 장치이고, 장벽은 이 비자라는 체로 걸러지지 않은 외부자를 막고자 거기에 세워졌던 셈이다.

개인적 수준에서 보자면, 이와 동일한 논리를 따라 만들어진 것으로 이른바 빗장 공동체(gated community)라는 게 있다. 특정 지역의 재산 소유자들 중심으로 모인 이 집단에서는, 불청객을 내쫒고자 장벽을 만들고 그 경계의 강화를 목적으로 청원경찰을 고용한다. 부유한 나라에서 등장했던 이같은 빗장 공동체는 이제, 가난한 나라에 소재한 도심권에서도 곧잘 볼 수 있게 됐다. 이 권역에서 고급주택 거주자들 중심으로 형성된 공동체들은, 대부분의 경우 침입자를 막겠다며 경계벽을 세우는 것으로도 모자라, 철조망을 둘러치고 사나운 개들과 청원경찰을 두기까지 한다. 그 곳 정부의 치안유지 능력이 인명과 재산의 보호라는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기엔 부적합하다는 게 그 이유다.

그럼 이제 장벽이 세워진 또다른 동기, 즉 내적 결속이라는 측면을 살펴보자. 1961년, 동독에서 베를린 장벽을 설치했던 이유는 정치적인 것이었다. 베를린 지하철을 통해 서독으로 탈출하려는 시도가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동독 행정부에게 정치적으로 당혹스런 일이었다. 그래서 설치됐던 장벽은, 1989년까지 그렇게 있었다. 이 장벽의 철폐를 레이건이 요구했을 때, 그것은 이주권, 다시 말해 그 누구라도 어떤 이유로든 자기가 살던 데를 떠날 수 있어야 한다는 데 대한 강력한 호소였다.

그 장벽은 정말로 무너져내렸다. 그 때, 그 장벽 뒤켠에 있던 이들(상징적으로, 동중유럽 및 소련 공산주의 체제하에 있던 모든 이들)은 떠날 권리를 얻었을진 몰라도 정착할 권리를 얻은 건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됐다. 정착하려는 이들에겐, 여전히 비자가 필요했다. 그리고 지금껏 이 비자를 발급받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들 중 상당수가 떠날 땐 법적 하자 없이 떠나도, 정착 와중에 불법의 굴레를 써야 하는 건 이 때문이다.

서안지구에 설치된 장벽의 경우, 다음과 같은 설명이 뒤따른다. 즉, 그 장벽의 설치는 그 곳에서 있을지 모를 팔레스타인인들의 폭력적 개입 소지를 차단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장벽은 사법권역을 보호하고자 설치됐던 게 아니다. 그것은 사법권역을 창출하고자, 달리 말해 실질적인 국경선을 만들어내려는 방편으로 설치됐다.

그러면, 앞서 던졌던 두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이들 장벽은 도적적으로 온당한가? 또한 그것들은 효과적인가? 사람들을 내치고자 세워진 장벽이 도덕적으로 과연 온당한 일이냔 물음은 결국, 각종 소유권(또는 재산권)이 과연 도덕적으로 온당한 것이냔 물음으로 귀착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소유/재산권이 도덕적으로 온당한지 여부는 그 권리가 어떻게 획득된 것이냔 문제와 맞닿아 있다.

자신들이 행사하는 소유/재산권은 열심히 일해서 획득한 것이라는 이들의 주장을 놓고, 다른 한켠에선 그것이 절도나 침탈, 또는 여러 (불법적이진 않더라도) 변칙적 몰수의 산물이었다며 맞서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한 포괄적인 해답은 그 어디에도 없으며, 실제로 해답이 나왔다 해도 각각의 경우 그것은 정치적인 협상과 타협의 산물이다.

물론, 혹자는 자유시장 신봉자들이 개개인의 거주이전 문제가 독점(예를 들면, 비자에 의한 접근권 제한과 같은)이 아닌 시장 원리로 풀려야 한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 자유시장에 지지를 보내는 이들 치고,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상품과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이라면 모를까, 이같은 원리를 사람들의 이동이라는 사안으로까지 확장하려고는 안 하는 게 보통이다.

또다른 혹자는 사회적 평등을 신봉하는 이들이 그 어떤 누구와도 함께 (사회적 잉여를) 나누는 데 호의적인 모습을 보여야 한다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실제로 사회적 평등을 지지하는 많은 이들, 그 중에서도 특히 부유한 나라에 있는 이들의 경우, 이미 자국 내에 거주하는 이민자들에 대해 사회적 평등 원칙을 제한하고, 그 원칙을 전 세계로 확산시키는 데 미온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들이 내세우는 슬로건이란 세계 모든 이들의 제반 권리와 재산 및 일자리를 지키자는 게 아니라, 자기네들(만)의 권리와 재산, 일자리를 지키자는 것으로 비친다.

장벽은 (그 설치의도에 비추어; 옮긴이) 얼마나 효과적일까. 단기적으로 그것은, (비록 모두는 아니더라도) 많은 이들을 내치는 동시에 (이 역시 모두는 아니래도) 많은 이들을 내적으로 결속시키는 데 효과적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그것은 정치적 부담이 되어 부정의한 상황을 증폭시킨 결과, 보다 더 많은 협상의 계기를 강제하는 경향을 보일 것이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장벽들이 결코 우애롭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자애롭지도 않으며, 자유의 징표는 더더군다나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매뉴얼 월러스틴
/예일대 석좌교수, 사회학



영문칼럼보기http://fbc.binghamton.edu/185en.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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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02 22:12 2008/03/02 2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