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7월 초쯤,

주요 온/오프라인서점 베스트셀러 상위에 랭크됐다는 책들에 대한 서평 기사.

 

별 기대 없이 썼는데 웬걸,

딴지 시절에 쓴 기사 중에서는 반응이 젤 솔찬했더랬다. 

 

역시나, 뭘 하든 어깨에 힘을 빼야 한다는 걸 새삼 일깨워줬달까. ㅋ;

 

 

***

 

 

뒷모습에 설레였다가도 앞모습에 그만 싸늘하니 진정되는 경험들, 한 두 번씩 있을 줄 안다.

 

허나 비단 헌팅계에서만 이런 경우가 있는 건 아니다. 그야말로, 혹시나와 역시나의 무한순환이 거듭되는 바닥 또 있으니...

 

그렇다. 그 바닥은 바로 독서계, 그 중에서도 처세-실용서 분야라 불리는 바닥이다.

 

대동소이한 내용들을 서로 다른 제목을 붙여가며 어디까지 무한변주할 수 있는지 겨루기라도 하듯, 출판사마다 매혹적 장정으로 뭇시선을 끄는 이러한 책들은, 후두부 보고 설렌 가슴 안면 보고 놀랐던 경우보다 더 심한 심적 타격을 구매자에게 안기기 십상이다.

 

불필요한 시행착오로 허비된 시간도 시간이지만, 그 와중에 발생한 금전적 손실은 가뜩이나 주머니 사정 신통치 않아졌다는 요즘 상황에 비추어 결코 가벼이 넘길 수 없는 일.

 

더욱이 그 바람에 담배 한 모금과 소주 한 잔 등 소박한 즐거움의 여지마저 줄어버렸음을 감안하면, 이는 이중의 낭비로서 실로 묵과해선 아니 될 사회문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본지, 최근 처세-실용서 분야서 상위 랭크된 책들의 급소만 추려 독자제위들로 하여금 한 큐에 꿸 수 있게끔 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이름하여,

 

처세-실용분야 베스트 초간단 다이제스트리뷰 5종세트.

 

이로써 굳이 안 읽고도 읽은 거나 다름없는 효과를 누리면서도, 이렇게 확보한 시간과 돈은 보다 알차게 쓸 수 있게 됐으니 일거양득이 따로 없다.

 

본지에선 주요 온/오프라인 서점(교보, 반디앤루니스, 영풍, 알라딘, 예스24)에 올라있는 인기도서 목록 중, 네 군데 이상 올라 있는 책 다섯 권을 추렸다.

 

그럼, 이들 각각에 대한 다이제스트리뷰 들어가도록 하자.

 

 


 

 

<마시멜로 이야기>

 

이 책에서 '마시멜로'란 인생의 성공을 좌절의 구렁텅이에 빠뜨리는 자질구레한 일상의 유혹들을 상징하다가, 나중에는 성공이 가져온 성취에 따르는 '덤'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결국 이 책에서는 마시멜로 먹고 싶다고 바로바로 먹어치우다간 마시멜로 하나 더 먹을 기회는 영영 오지 않는다는 얘기가 계속된다.

 

이런고로, CEO인 조나단과 이 사람의 전용차 운전기사 찰리 사이에 오고간 대화로 구성된 이 책에서, 조나단은 "눈앞에 펼쳐진 작은 만족과 유혹을 참고 견디면 언젠가 그 보상이 반드시 돌아온다는 굳건한 믿음을 갖는 자세", 그리고 "언젠가 반드시 '성공'의 결실이 돌아온다는 신념"을 누차 강조한다.

 

자신이 이룬 성공은 "가장 유혹에 굴복하기 쉽고, 강렬한 매혹에 빠져들 수 있는 시절에, 마시멜로를 먹지 않고 꾹 참고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이에 찰리를 어엿비 여긴 조나단은 "인내의 미학"이 담겨 있는 이런저런 에피소드들을 친철히 알려준다.

 

그랬더니 "눈앞의 욕구만을 충족시키기에 급급"한 삶을 살아온 자신의 과거를 통절히 반성하며, 급기야 "마시멜로를 먹지 않고 이겨낼 때마다 기분이 참 좋아요"라고 화답하기에 이르는 찰리.

 

뿐인가. 찰리는 "'인내는 쓰다, 그러나 열매는 달다'라는 마시멜로의 정직한 교훈"을 되풀이하는 자신의 고용주한테 마시멜로 이야기를 들은 날이 "제 삶에 있어 결코 잊을 수 없는 특별한 하루"였다는 수줍은 고백도 덧붙인다. 여기에 탄력받은 조나단은 몹시 흡족해 하며 했던 얘기, 하고 또 하고...

 

하여간 찰리가 대학에 진학했다며 운전기사를 관두고 조나단과 작별을 고할 때까지, 어떻게든 참는 이에게 복이 있을 거라는, 대체 언제적부터 회자됐는지도 모를 메시지를, 마치 전에 없던 금언인 양 반복하고 있다.

 

이게 스스로도 캥기는지, 책쓴이는 이 책에서 다룰 내용이 "아주 특별하고 경이로운 성공의 비결"에 관한 것임을 강조한다. "정말 믿을 수 없는", "뒤통수를 얻어맞는 듯한", "획기적", "빛나는", "깜짝 놀라며"와 같은 표현들 또한 어찌나 수시로 등장하는지.

 

그래서일까.

 

메시지의 고리타분함을 새끈한 장정과 시원시원한 크기의 활자로 카바해보려는 노력은 가상하나, 그래도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뒤통수를 얻어맞는 듯한 기분이 엄습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끌리는 사람은 1%가 다르다>

 

어째서 '남다른 사람'과 같은 행동을 할 수 없는지는 제껴두고, 하여간 남다른 사람처럼 하기만 하면 남다르게 사는 건 순식간이라는 것.

바로 이것이 이 책의 요지다.

 

여기서 말하는 남다름의 면면이란, 읽고 나서도 기억이 잘 안 날 만큼 훌륭한 내용들이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이렇다.

 

"좋은 인상을 유지하려면 좋은 행동을 하기보다 나쁜 행동을 하지 않으려 애써야" 한다거나

 

"한 번 나쁜 인상을 주었다면 몇 배의 좋은 행동을 보여"줘야 하고,

 

"유머감각을 가지면 인기도 좋고, 잘못을 해도 용서받기 쉬우며 위기에 유연히 대처할 수 있"으며,

 

"빈틈을 숨기지 않으면 경계심을 풀고 마음의 문을 열게 된다",

 

"기꺼이 모른다고 말하면 솔직하고 당당하다는 인상을 주며 겸손한 사람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

 

"함께 밥을 먹고 싶은 사람이 되라",

 

"옷차림은 때와 장소, 그리고 상황에 유의해야 한다" 등등등등.

 

대인관계 유지에 하나 같이 중요한 지침들인 건 틀림없을지 모르나, "인간관계가 술술 풀리는 사람의 비결"이라고까지 할 만한 것인진 의문 그 자체가 아닐 수 없다.

 

달리 말해 지금껏 몰라서 못하는 건 하나도 없는 셈인데, 그래선지 “‘아는’ 것이 ‘힘’은 아니”란 말을 친절하게도 책 말미에 덧붙여 뒀다.

 

실제로 그러기가 왜 어려운지에 대해선 아무 언급이 없는 점이야말로, 이 책의 99%가 부족한 까닭이다.

 

<행복한 이기주의자>

 

이 책의 핵심논지인즉슨, 자기를 사랑하고 행복한 미래를 개척하는 데 방해가 되는 온갖 장애들을 걷어내는 건 다 각자 하기 나름인지라, 남이나 환경 탓할 시간 있으면 눈치 볼 것 없이 이기적으로 제 갈 길 찾는 게 행복의 지름길이라는 거다.

 

헌데 이 길을 내는 데 방해가 되는 관습적 행동원칙들이 있으니, 이름하야 '오류지대'.

 

여기에 발을 안 들이려면 먼저 "자신의 선택에 너그러워"져야 한다. 무엇보다 자기를 사랑하고, "내가 나 자신의 기준이 되겠다는 결심만 한다면" "현재는 나의 것"이 될 수 있다.

 

이런 이들한테 세상에 대한 불평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아니 끼어들어선 안 된다. "불평은 자기신뢰가 없는 사람들의 피난처"일 뿐이며, "아무리 징징거려도 긍정적인 자기변화는 이룰 수 없"으므로.

 

따라서 "상대방에게 내지르는 보편적인 자기파괴적 한탄"에 불과한 불공평함을 문제삼을 바엔 차라리 "자신이 진실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결정하고 그걸 달성하기 위해 전략을 짜보라"는 게 이 책의 주문이다.

 

이 때 특히 유념할 것은 "행복을 택하고 불행을 택하는 건 정의의 부재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점이다. "옳은 선택은 없다. 다른 선택만 있을 뿐."

 

이 책에 따르면, "비가 오든 푹푹 찌든 투덜대는 법" 없이 "일상을 사랑"할 줄 아는 이들 치고 이 점 모르는 이들은 없단다. 요컨대, '행복한 이기주의'를 몸소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거다.

 

다 좋은데, 막상 이런 실천이 하나가 아닌 여럿 됐을 때 어떤 상황 초래될지에 대해선 말이 없다. 그런 건 '보이지 않는 행복의 손'이 다 알아서 교통정리 해줄테니, 각자는 이기적 행복이나 열심히 좆으란 식이다.

 

그럴 거면 적어도 이런 행복의 길이란 결국 아무나 못 누리는 특권이 되기 십상이더라는 얘기까지 과감히 덧붙였어야 했다.

 

더욱이 주어진 것을 무턱대고 따르는 건 바보짓이라면서 불공평함에 대한 문제제기도, 심지어 불평도 금물이라니.

 

큰 소리로 속삭이거나 손 안 쓰고 혼자 머리 감는 일도 "결심만 한다면" 충분히 실현가능하니, 딴 소리 하면 그건 다 니 탓이라는 얘기랑 뭐가 다른지 모를 일이다.

 

<힐러리처럼 일하고 콘디처럼 승리하라>

 

어느 전 워싱턴 특파원의 미국체류기.

 

책쓴이가 미국서 겪은 온갖 에피소드들과 이에 관한 단상들이 두서 없이 망라돼 있다. 이 책이 얼마나 두서 없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 하나.

 

"왜 예일대학에서 대통령이 많이 나올까?"란 소제목이 달린 글이 있는데, 여기선 언젠가 예일대학에 들렀던 적이 있다는 걸 언급하며 최근 10여 년간 미국 대통령들이 왜 죄다 예일대학 출신이었는지를 짚는다.

 

그건 첫째, 예일 출신들이 "다양성과 막강한 네트워크, 창의성, 공익을 위하는 태도" 면에서 돋보였기 때문. 그런데 이런 게 딱히 예일 출신들만 그런 건 또 아니라며, 앞서 던진 질문을 제 발로 미궁에 빠뜨린다.

 

그리고선 생뚱맞게도 "'인재' 소리 듣기 어려운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말로 글을 맺는 책쓴이.

 

그냥 미국 체류 중에 예일대학 가본 적 있다는, 자랑 빼곤 알맹이 하나 없는 셈이다.

 

이처럼 없어도 마치 있는 듯, 또는 굳이 미국 아니 가보고도 충분히 할 만한 내용들 쥐어짜내려다 보니 이 책이 말하려는 요지에 대해선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것 마냥 종잡기가 힘들다.

 

그러니 제목에 꽂혀 책을 집어든 사람들인 경우, 기대 배반 지수는 더더욱 높을 수밖에 없을 터.

 

책쓴이도 그걸 모르진 않는지, 서두와 후기에 짐짓 이런 얘길 한다. 우리는 어떤 그릇이며, 또 "'하고 싶은 일'이 '해야 하는 일'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고.

 

외려, 본 기자는 책쓴이에게 반문하고 싶다. 이 책, 실은 정말 쓰고 싶지 않았는데 써야 하는 일이었던 거 아니냐고.

 

<페페로니 전략>

 

제목이 암시하듯, 회사에서 제대로 살아남아 치고 올라가려면 페페로니처럼 "매운 맛"이 있어야 한다는 게 이 책의 핵심이다.

 

따라서 우리 안에 내재한 공격성을 마냥 억제하기만 할 게 아니라 적절히 조절할 줄 아는 게 중요하다. 왜냐, 안 그러면 결국 팽당하는 건 당신이니까.

 

하여 이 책은 "단 한 번의 사악한 행동이면 정신과 의사가 필요없어진다"면서, "향후 성공을 저해하는 요소들이 나타났을 때 이를 좀더 빨리 간파하고 제거할 수 있"는 여덟 가지 원칙을 제시한다.

① 목표를 위해 힘있게 밀어붙여라,
② 가망없는 힘겨루기는 포기하라, 
③ 입장표명을 분명히 하라,            
④ 불평꾼, 패배자, 회의주의자를 멀리 하라,
⑤ 맷집을 길러라,                         
⑥ 방어용 화법을 익혀라,              
⑦ 나쁜 소문에 즉각 대응하라,       
⑧ 정기적으로 적을 분석하라.        

이 원칙들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이익을 공공(=기업)의 이익과 결합시키는 방법을 찾아내는" 데 있는 만큼, "물불 가리지 않는 출세지향주의를 장려하는 것"과는 무관하다.

 

오히려 "거시적 이기주의"라 부를 만한 이 원칙들을 통해, "재미없던 직장생활에 활력을 얻게 될 것"이라는 게 책쓴이 주장이다.

 

직장의 모든 잠재적 적들과 티 안 내고 맞장 떠 이기는 법을 말하면서도, 끝끝내 성공적 직장생활에 없어선 안 될 화끈한 행동 전략을 얘기하는 거라고 거듭 밝히는 책쓴이의 맷집이야, 방어용 화법에 익숙해지라 했던 원칙에 충실한 결과라 치자.

 

그러면서도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는 얘기를, 너 자신을 사랑하라 같은 말로 에두르지 않는 것 또한 화끈해서 좋다.

 

허나 이런다고 이 원칙들에 '하면 된다 했으니 안 되면 전부 다 니 탓'이란 떠넘기기 전략이 낑궈져 있다는 것마저 감출 순 없는 노릇이다.

 

페페로니로 직장생활이라는 음식에다 감칠맛을 내라지만, 음식이 언제 상할지 모르는 판국에 감칠맛을 낸다 한들 무슨 소용이냔 말이다.

 

 


 

 

지금까지, 요즘 잘 나간다는 처세-실용서 베스트 5에 대한 다이제스트리뷰였다.

각 리뷰로 드러난 처세의 메시지는 크게

 

첫째, 국민학교 도덕교과서에나 나왔었음직한 내용을 산뜻한 감각으로 포장, 매우 새삼스러운 듯 중언부언하거나(<마시멜로 이야기>)

 

둘째, 어찌 해야 현 상황이 달라지는지에 대한 처방은 조목조목 제시되지만, 가령 이빨로 자물쇠가 안 끊기는 걸 의지와 결단력 부족 탓이라 전제하거나(<끌리는 사람은 1%가 다르다>, <행복한 이기주의자>, <페페로니 전략>)

 

셋째, 정리되지 않은 느낌과 인상을 보따리 풀듯 쏟아내기만 해놓고선, 무언가 할 얘기가 있었던 듯 페인트를 구사하다 결국 그게 무엇인지 도리어 묻는(<힐러리처럼 일하고 콘디처럼 승리하라>)

 

이상의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뉠 수 있었으며, 각각의 메시지들을 종합한 결과는 이를테면 아래와 같은바,

 

“오늘 잘 참으면 내일은 이빨로 자물쇠를 끊어낼 수 있을텐데, 내가 지금 도대체 무슨 얘길 하려는 건지 대신 좀 알아맞춰 보라”

 

는 얘기 되겠다.

 

이상의 분석을 통하여 소문난 잔치 먹을 것 없다고, 베스트셀러 치고 영양가 있는 게 없다는 통설, 이번 리뷰를 계기로 다시 한 번 확인되었다. 식당에 갔건만 주린 배를 채우긴커녕 밥도 혼자 못해 여기까지 왔느냐는 핀잔만 잔뜩 듣을 뿐이니 말이다.

 

더구나 다 같은 책이라고 무턱대고 읽었다간 헛배만 부를 뿐, 지적 영양실조에 빠지기만 할 공산 크다는 점 또한 이번 조사로 확연히 드러난 대목이라 하겠다. 이런 책 열 권을 읽느니, 친구들과 삽겹살 거하게 구워먹는 쪽이 훨씬 영양가와 격조를 겸비한 일일 터.

 

모쪼록 독자제위들은 이상의 내용을 숙지함으로써, 적어도 상기 서적들에 대한 예기치 않은 관심과 재정지출로 초래될 삶의 질 저하를 미연에 예방하길 재차 상기하기 바란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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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02 06:32 2008/03/02 06:32

 

 

2005년 12월 당시,

노동부 장관이던 김대환 씨가 대한항공 조종사노조의 파업에 대해 긴급조정권을 발동한 걸 두고, 항간에서 "진보적" 경제학자로 분류돼온 김씨의 "배신, 변절" 운운하는 평가가 나돌곤 했는데..

 

내가 보기엔, "과연 그럴까?" 싶었다.

 

 

***

 

 

1.

 

하이퍼리얼타임바이오SF미스테리미디어블록버스터 <황우석 쓰나미>로 온 나라가 출렁대는 듯싶던 지난 12월 12일. 대한항공 조종사 노동조합의 파업을 소재로 김대환 노동부장관 주연의 파일럿프로그램 <사랑해요, 긴급조정권>이 대중을 찾았다.

 

그러나, 쓰나미 앞의 물보라였던 걸까. 김장관의 대담하고 선굵은 연기에도 불구, <긴조권>은 <쓰나미>에 결국 TKO패했다. 이미 '글로벌 스캔들'로 선정성과 극적 구성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쓰나미>의 흥행잠재력을 감안할 때, 저주받은 걸작 <긴조권>의 초라한 흥행실적은 사실상 예정된 수순이기도 했다.

 


2.

 

정작 문제는 김장관의 긴조권 발동, '황우석 스캔들'에 파묻혀도 그만일 사안이 아녔다는 데 있다. 국민 대다수가 좋든 싫든 노동자인 오늘날 삶의 조건에 당장 끼칠 파급효과를 놓고 보자면, 황우석 스캔들에 대한 대중적 관심은 솔직히 공갈빵 만큼이나 과도하게 부풀려져 있었다. 이런 점에서도 하여간 황우석 스캔들은 사안 자체로 끝날 수 없는, 명백한 사회적 민폐다. 물론 이렇게 된 데야, 거의 시청각공해라 할 만큼 갈필 못잡고 우왕좌왕했던 조악한 언론 및 방송환경 탓이 컸다 치자.


정말로 이상한 건, 군사독재 시절에도 단 2번뿐이던 긴급조정권 발동, '포스트군사독재'의 진정한 시발점이라 평가받던 노무현정부 들어서만 벌써 2번째라는 사실이다.

 

자 그럼, 긴조권이 뭐냐고? 운송, 철도, 항공업 등 공공적 성격이 강한 부문이나 대규모 작업장에서 노동자들 파업 들어갔다 치자. 그런데 사측에서 미기적댔건 노동자들이 생떼를 썼건, 성과가 후줄근한 건 말할 것도 없고 여타 부문 노동자들의 민생에까지 막대한 지장을 끼칠 정도로 협상전망이 암울한 거다. 그야말로 사회 전체가 아비규환의 나락으로 떨어질락 말락할 참이다. 이 경우 노동부장관 직권으로 "파업그만!"을 선언하며 판을 깰 수 있도록 한 법적 조치.


그렇다, 이게 바로 긴조권 되겠다. 의료행위에 빗대자면 몰핀주사에 해당하는 극약처방이다. 아찔할 만큼 즉효를 발휘하지만 번번히 쓰지 않는 이유야, 나중엔 몸 자체가 망가져버리기 때문이다. 당장 앓는 소리 성가시다고 왜 그리 몸이 찌뿌둥한지에 대한 진단 없이 몰핀만 쓰는 건, 상해행위나 다름없다.

 

아프단 소리 나오는 입을 아예 꿰메버렸던 '직권중재'의 전성기, 그니까 군사독재 시절에 비하면야, 파업 자체가 불가능한 건 아니지 않냐고? 물론 그렇다. 하지만 노동자들 파업이 무슨 국정홍보용 쇼도 아닌데, 그렇다면 직권중재 철폐조치가 결국 참여정부의 전시용 쇼였다는 얘긴가? 그때나 지금이나, 몸 망가지는 데 신경 안쓰는 건 매일반이니.

 

그런데도 김장관, 지난 아시아나항공 노조 파업 때에 이어 또다시 긴조권을 발동했다. 몰핀주사를 치료로 착각하는 돌팔이의사처럼. "노조 파업으로 직·간접적인 피해액이 1,894억 원에 달하는 등 국민경제에 막대한 피해를 주고 있는데다 (회사측과의) 자율교섭 가능성이 없"었다는 게 그 이유다.

 

그런데, 피해액 규모 불려서 기선제압하려는 게 군사독재 때와 어쩜 그리 한결 같나도 싶지만, 긴조권 발동 시점, 파업 들어간 지 40일도 아니고, 고작 나흘째 되던 날이었다. 이 정도면, '속전속결'이 마치 삶의 미덕이라도 되는 양 굴며, 노동자들 의기투합을 무슨 돌림병 창궐한 듯 질색하던 군바리정권하의 역대 노동부장관들도 꼬리를 내릴 경지다.

 

사실 지난 8월 아시아나항공 노조 파업 때도 그랬지만, 워낙 이번 일 있기 전부터 그랬다. 군정세력 및 이들을 후견인으로 뒀던 자본가들조차 쉽지 않았을 김장관의 저런 '강단'은 대체 어디서 연유하는 건지, 줄곧 궁금했던 것이다.

 

 

 

이 중 어느 쪽이 '진짜'냐는 물음으로 풀릴 수 있을까..?

 


3.

 

<자본주의 이행논쟁>이란 책이 있다. 역사적 자본주의 체제의 탄생을 둘러싸고 해외 경제사가들 간에 벌어졌던 논쟁을 한 데 묶어낸 것으로, 1980년대 비판 사회과학 분야의 필독서로 자리잡았더랬다. 이 책에서 취급한 쟁점들은 현재 새로운 논의 국면을 맞이하면서 상당 부분 '극복'됐다고는 하지만, 근대 유럽의 자본주의 형성사가 궁금한 이들에겐 여전히 중요한 참고문헌으로 평가받는다.


 

 

이게 책 표지 되겠다. 기억나시는가들..?

 

 

이 책의 편역자가 바로, 김대환 장관이었다. 군정이 막바지던 1980년대는 물론, 1990년대 중반 들어서까지 한국경제의 난맥상을 저격하는 데 앞장섰던 '진보적 비판경제학자'.

 

그렇게 '김대환'이란 이름 석 자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이번 긴조권 발동을 포함하여 김장관이 그간 보여준 모습은 "제대로 맛이 갔다"는 중론을 이끌어내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그가 취임할 무렵 애써 태연하니 관망 모드를 취하던 전경련 등 친자본가 그룹에서조차 이내 흡족한 듯 표정관리 모드 들어갔을 정도니.

 

근데 재밌는 건, 이런 평가에 대해 김장관 본인은 정색을 하며 부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김장관은 장관취임 이후 변절한 거 아니냔 질타가 들끓자, 자신이 예전과 달라진 바 없음을 누차 천명한 바 있다. 하도 낯짝이 두껍기에 가능한 걸까?

 

물론, 그럴 수 있다. 차라리 그렇게 정리하는 게 속 편할지도 모른다.

 

허나, 그렇게 결론짓기엔 여러 국면마다 그가 내리는 정책적 판단의 일관성, 너무나 또렷해 보인다. 그에게 노동부 장관이란 직위, 개인적 영달을 누릴 안락의자이기 이전에 그간 쌓아온 지적 연륜을 발휘할 경세의 무대인 게다. 파업 이틀 전 긴급조정권 발동이 시급하다며 김장관을 찾아온 대한항공 임원들에 대해 "그렇게 하는 건 정도가 아니"라며 호통을 쳤다는 사실 또한 김장관의 정색을 그저 두꺼운 낯짝 덕으로 보기 어렵게 하는 대목이다. 오히려 김장관은 이렇게 항변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군정 때야 지들 자격지심 탓에 사회 분위기나 노동자들 눈치 보느라 쭈뼛거렸다지만, 명실상부한 민주화세력이 정권을 잡은 지금, 노조활동에 대한 단호한 조치는 설사 그게 '탄압'처럼 비친다 한들 주저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카이. 한마디로 내는 마, 노조한테 꿀릴 게 없는기라. 내는 외려 국민소득 2만 불 시대를 앞당기는 데 앞장은 못설 망정 단기적 이익에 급급할 뿐인 노조의 철없음을 마, 매를 드는 아비의 심정으로 꾸짖고만 싶다 아이가.

 

결국, 아무리 노동자라 한들 '국민경제'의 일원인 이상, 이들의 집합적 이익은 국부증진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다. 노동자들의 투쟁이 의미를 갖는 것도 이 테두리를 튼실히 하는 한에서일 뿐.

 

김장관 행동에서 엿보이는 이같은 자본주의관을 비웃는 일이야, 물론 어렵지 않다. 이를테면 노동자들의 역사적 투쟁이란 , 온갖 것들을 무한한 자본의 몸불리기 수단으로 내모는, 그런 독특한 사회체제의 발전에 맞서는 가운데 생성된 자기방어적 움직임이라는 시각을 보자. 이 시각에 따르자면, 김장관은 대들보 없이 서까래 올릴 수 있다고 우기는 것으로밖엔 달리 평가할 여지가 없다.

 

더구나 포스트군사독재 시대, 시장의 전능함을 시사하며 대한민국 21세기 발전매뉴얼로 추앙받았던 세계화 담론 안에서 이같은 움직임은 철저히 백안시됐다. 그럴 만했던 게, 그것은 본디 노동자들의 연대가 장차 무력화하길 바라는 세계 자본가그룹의 전지구적 연대이론 같은 것이었으니까. 그런데도 노동자들의 투쟁에 힘을 실어주진 못할망정 파업 나흘만에 긴조권을 발동했으니, 김장관을 보며 '맛이 갔다'고 하는 건 충분히 일리가 있다.

 

그러나 이것이 김장관을 따라다니던 진보적·비판적 경제학자라는 꼬리표를 떼낼 결정적 증거일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글쎄올시다 되겠다. 이른바 '진보적 지식인'이라 해서 지구상의 모든 걸 이윤의 재료로 으깨고 변형해온 자본주의 시장기제의 제어와 궁극적 극복까지 염두에 두진 않으니 말이다. 다만 김장관은 이를 몸소 보여준 셈이다.

 

어디까지나 그는 자본주의 시장기제의 '창조적 파괴성'과 고도의 생산력을 찬미한다는 점에서 진보적이며, 오랜 군사독재체제가 이런 속성의 발현을 얼마나 '지체'시켰는지를 말하려 했다는 점에서 비판적이었을 뿐.

 

이리 보면 포스트군사독재 이후 자본주의 시장의 '창조적 파괴성'에 큰 무게를 싣는 그의 정책적 행보, 이상하게도, 전혀 어색하지가 않다. 변절 의혹에 대한 김장관의 정색을 비겁한 면피가 아니라, '진보적 경제학자'로서 연마해온 오랜 소신의 재천명으로 볼 수 있는 이유가 여기 있다.

 


4.

 

이번 김 장관의 긴급조정권 발동은 참여정부 출범으로 상징되던 실질적인 포스트군사독재 상황이, 노동자들의 자기방어적 행동반경을 더욱 좁히는 정치적 조건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그것은 더더욱 경제적·문화적  한계상황에 내몰릴 노동자들의 집단적 대응 자체를 아예 봉쇄하려 한다는 점에서, '법치의 폭력'이 무엇인질 보여주는 의미심장한 사례이기도 하다. 정치적 독재에 의한 학살[politicide]의 시대가 이내 종언을 고하나 싶더니, 시장독재에 의한 학살[econocide]의 시대가 전면화하고 있다는 얘기, 이래서 나온다.

 

흥미로운 건 어떤 식으로든 '반독재-민주화투쟁'에 관여했다는, 현재의 소신과 맞물린 김 장관의 개인적 이력이 이같은 폭력을 부추기는 알리바이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군사독재 때와 판박이 같은 이유와 논리를 내세우면서도 노조의 파업에 대해 추상같은 철퇴를 내리는 김 장관의 도저한 자신감, 이 점 빼놓고는 쉽게 설명이 안된다.

 

여기에, 김장관이 놀던 바닥에서 통용되는 세계관 또한 크게 한 몫 하고 있을 게다. 노동자들을 '투입요소'로만 취급하려는 자본가들의 욕망과, 이같은 처우에 모멸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임금)노동자들의 자기방어적 욕망 사이에 가로놓인 근원적 갈등의 골을, '국부'의 증진 와중에 메워질 한시적 성장통 쯤으로 보는 경제학적 세계관.

 

이 세계관을 떠받치는 건? 현대사회에 늘상 잠재하기 마련인 이런 갈등이 자본주의 시장에 의해 '창조적으로 파괴'되리라는, 또 하나의 유토피아다. 김장관의 깡따구는, '진보적 시장주의'라는 자신의 판타지적 유토피아가 고작 '경제학적 균형'에 기댄 또다른 유토피아적 판타지로 지탱될 뿐이라는 데 대한 두려움의 표출 아닐까?

 

결국, 김장관한테 변절자란 딱지를 붙이고 그가 내린 정책적 판단에 대해 온갖 조롱을 퍼붓는다 해서 그의 소신에 균열이 생길 것 같진 않다. '소신'이라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그에 대한 도덕적 공격은 거기에 또아리틀고 있는 불안과 두려움을 자극, 도리어 그의 소신을 강화할 공산만 더 커 보인다.

 

 

5.

 

학술단체협의회 같은 '정통' 진보지식인그룹에서는 그의 '제명'을 해법으로 삼으려 했던 모양인데, 명색이 지적 성찰을 업으로 삼는 이들의 대처라 하기엔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진보적 지식인'이라는 알량한 체면을 지키려 자신들의 '지적 게으름'을 감추려 한 데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김장관 퇴출시켜, 진보적 지식인이라는 '정체성'이 어떻게든 유지될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래갖고선 김대환의 '소신'이 발현될 내적인 계기가 바로 '진보적 지식인'이 되고자 한 지적 훈련과정에 또아리틀고 있는 거 아니냔 의문을 결코 잠재울 수 없다. 긴조권 발동으로 김장관이 또다시 드러낸 '소신', 진보적 지식인 그룹 전반에 걸친 문제일 수 있다는 거다.

 

김대환이란 한 개인의 귀책사유일 수만은 없는 '그 무엇'이 진보적 지식인그룹의 사고회로를 장악하고 있는 건 아닌지, 낱낱이 파헤쳐봐야 할 시점이란 얘기 되겠다.

 

그러니까 욕하면서 배운다고, '사회질서 유지'와 '국부증진'을 금과옥조로 여겼던 근대 지식인들의 체제옹호적 전통, 진보적 지식인들도 이내 공유해버린 건지. 그도 아니면 근대 (부르주아)지식인들이 떠받들던 저 금과옥조, 심지어 진보적 지식인들한테조차 신성불가침의 지적 대전제였던 건지.

 

어느 쪽이건 분명한 건, 진보적 지식인들이 바깥을 겨냥하며 쓰던 '비판'이라는 도구, 이젠 자신들의 출생과 내력을 겨냥해 쓰여야 할 상황이 됐다는 사실이다.

 

스스로 못하면 때려서라도 그렇게 해야 하나 싶은 것이, 이런 상황을 소 닭 보듯 하다가는 또다른 김대환들의 올곧은 소신 덕에 대다수 민초들의 살림살이가 법치의 폭력 아래 창조적으로 파괴되는 걸 막기 힘들겠기에 그렇다.

 

대한민국의 이른바 보수주의자들이나 '뉴라이트' 같은 별로 새로울 것도 없는 체제옹호 그룹은 말할 것도 없지만, 심지어 진보적 지식인들 얘기조차 곧이곧대로 따르기에 세상은 크게 변했다. 진보적 지식인, 이제 불필요하다는 게 아니다. 최소한 세상이 변한 만큼 스스로 반추해볼 수는 있어야 한다는 거다.

 

근데 중한테 제머리 깍으라는 소리라 그런가? 김장관의 소신을 자기 안에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를 문제로 반추해 내려는 '진보적 지식인', 정말 찾아보기 어려웠더랬다. 정작 김장관의 소신을 허무는 데 필요한 건 도적적 성토가 아니라 날선 지성인데도 말이다. 대체, 언제까지 그러구 있을 참인지. '대중지성'이 나서 진보적 지식인의 쓸모없음을 고한 다음에야 부산하니 움직인들, 때는 이미 늦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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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02 05:44 2008/03/02 05: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