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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장 비정규직운동 20년, 평가와 전망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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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과 2006년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은 제조업 전반으로 퍼져나갔지만 대부분 패배로 결과했다. 


이태영


1. 대공장 비정규직운동의 등장 (1996~2002년)
 

2. 대공장 비정규직노조 운동의 본격적인 등장


3. 비정규직노조의 안정화와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 (2004~2005)

(1) 실패한 비정규직노조의 안정화
(2)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으로 전환
(3) 불법파견 투쟁의 한계


4. 정규직 운동질서의 반동화와 비정규직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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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비정규직노조의 안정화와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 (2004~2005년)


2003년에 건설된 대공장 비정규직노조들은 건설과 동시에 자본의 엄청난 탄압에 직면했다. 노무현 정권의 친노동 행보는 채 반년도 못 가서 끝났다. 2003년 6월 30일 철도노조 파업에 대한 공권력 투입은 정권이 노동탄압 정책으로 회귀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정부는 이전 정권과 마찬가지로 비정규직노조에 대한 자본의 불법 탄압을 방관했다. 정규직 운동질서도 손 놓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현대중공업과 현대차 아산·울산공장에서 건설된 비정규직노조들은 이전의 하청활동가 모임보다는 확대된 형태로 살아남았다. 2000·2001년에 벌어진 비제조업 비정규직노동자들의 투쟁과 달리 이 시기 하청노조 건설 운동을 주도한 것은 좌익 정파들에 소속된 직업 활동가들이었다. 이들은 현장에서 밀려나 생계에 곤란을 겪으면서도 노조를 유지하며 활동을 지속했다. 중소규모 사업장과 달리 대공장에 존재하는 수천 명에서 수만 명에 이르는 엄청난 수의 하청노동자들은 일시적 패배에도 불구하고 미래의 가능성으로 보였다.
 

⑴ 실패한 비정규직 노조의 안정화
 

노조 건설투쟁을 거치며 살아남은 대공장 비정규직노조들에서는 내부로부터 노조 안정화 계획이 등장했다. 가장 대표적으로 2003년 노조 건설투쟁 이후 현자비정규직노조 1기 집행부가 제출한 조직 계획이었다. 맥락은 다르지만 현중하청노조에서도 2004년 초 일용직이던 소지공들이 노조에 집단 가입하여 투쟁에 나서자 교섭권 확보라는 문제의식이 등장했다. 이러한 문제의식들은 대개 노조체계를 안정화시켜 정상적인 노조 활동을 통해 조합원 확대를 꾀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상적 조합 활동을 통해 노조를 대중적으로 안정시키겠다는 계획은 사측의 탄압과 정규직 운동질서의 방관으로 쉽지 않았다.
 

현자울산비정규직노조는 열사투쟁 국면에 열린 2003년 노동자대회에서 투쟁의 선봉에 선 결과, 위원장과 부위원장 등 핵심지도부에 체포영장이 발부되었다.51) 이런 상황에서 울산비정규직지회는 2004년 상반기를 대중적 조직화를 위한 준비기로 설정했다. 약화된 노조 조직을 추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무모한” 현장투쟁은 자제하고 조합원 확대에 집중해야한다는 집행부의 기조는 또 다시 정규직노조로의 직가입만 바라보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2004년 2월 정규직대의원 대회에서 직가입은 또 다시 무산되었다. 찬반투표에 많은 노동자들이 참여하면서 기대를 모았던 7월 임단투 역시 정규직의 빠른 임단투 종료와 관리자들의 통제로 인해 독자 파업이 사실상 실패하면서 노조체계의 안정화를 통한 대중적 확대는 사실상 실패했다. 오히려 업체의 자생적인 현장투쟁으로 소규모 나마 조합원들이 늘어났고, 정규직의 대리교섭 관행으로 인해 1차 하청 조합원들의 파업 참여가 저조했던 반면 현대세신 등 2·3차 업체 노동자들의 투쟁이 커다란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가장 먼저 노조를 설립한 현대차 아산공장은 테러 사건으로 서둘러 노조를 설립한 뒤, 미처 체계를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청소 용역업체인 동서다이너스티를 비롯한 자생적인 투쟁들이 잇따라 터져 나왔다. 비정규직노조는 뒤늦게 찬반투표를 거쳐 합법적인 쟁의행위를 선언했지만 이미 노조 간부들과 조합원들에 대한 해고·손배소 등 탄압이 들어오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정규직노조가 특별임단협을 통해 하청노동자들의 기본급을 인상하고 정규직 신규채용 시 40% 이상을 하청에서 채용한다는 합의를 체결하자 조합원 규모는 백 명 대로 급감했다.
 

현대차 전주공장과 GM대우 창원공장은 불법파견 캠페인을 통해 노조를 설립했고 건설 초기 상당수의 조합원을 조직했다. 그러나 불파투쟁이 사측의 탄압과 정부의 방관으로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나자 노조의 조직력은 급속히 해체되었다. 전주공장에서는 그나마 현장 사업이 가능할 정도로 조합원들이 유지되었지만 창원의 경우는 현장 조합원을 거의 다 잃고 활동가들은 해고되었다.
 

대중적인 노조로 안정화에 가장 성공한 것은 2005년 기아차 화성공장에서 건설된 기아비정규직지회였다. 2003년 4월에 건설된 기아비정규직지회의 전신인 ‘비정규직 합의권‧교섭권 쟁취를 위한 투쟁단’은 공장에 들어온 하청 활동가 두 사람과 정규직 활동가 두 사람이 초동주체로 참가했다. 투쟁단은 정규직노조가 임투에서 비정규직 특별요구안을 상정하는 국면을 앞두고 하청노동자에 의한 교섭권·합의권 쟁취를 내걸고 활동에 들어갔다. 그러나 투쟁단의 캠페인은 정규직 임협이 관료적·형식적으로 진행되면서 별다른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이에 투쟁단은 자기 기반을 만들기 위해 업체 조직화에 들어가 몇 군데 업체에서 처우개선을 위한 투쟁이 벌어졌다. 이 투쟁들은 정규직 활동가들의 중재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어 투쟁단의 대중적 기초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투쟁단은 현장조직 정규직 활동가들과 공동투쟁체를 결성하고 사실상 준 노조 질서로 발전해 들어갔다.
 

임투 말미에 상시 투쟁체로 전환한 현장투쟁단은 2003년과 2004년 투쟁의 성과로 노조 결성 전에 이미 350여 명을 회원으로 조직했다. 직가입 추진사업이 거듭 실패하면서 독자노조 건설로 방향을 결정한 현장투쟁단은 정규직 대의원들과 함께 업체를 순회하며 비교적 순조롭게 노조 가입사업을 진행했고, 2005년 6월 4일 450여 명의 조합원으로 창립총회를 진행했다. 창립총회 직후 19개 하청업체들에서 대규모 조합가입이 이루지면서 조합원 수는 1000여 명으로 급격히 증가했다.
 

그러나 새로 설립된 기아차비정규직지회가 단협체결 투쟁에 들어가고 그 과정에서 정규직 운동질서와 연대가 이완되는 모습을 보이자 사측은 본격적으로 탄압에 나섰다. 비정규직지회는 8월 26일 금속연맹 파업에 정규직노조와 공동파업을 성사시키려 했지만 정규직노조가 불참을 선언하면서 무산되었다. 9월 중순 정규직노조가 임투 종료를 선언하자 파업을 지속하던 비정규직지회는 사측의 탄압에 홀로 노출되었다. 추석 연휴 동안 비정규직지회 간부들과 투쟁에 적극 연대하던 정규직 활동가들에 대한 고소고발이 자행되고, 9월 28일 급기야 파업 대오를 깨기 위해 공장 안으로 용역깡패 4백 여 명이 난입해 들어왔다. 그러나 이 사건은 오히려 정규직 운동질서의 위기의식을 자극하여 원하청 연대투쟁이 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규직 조합원들과 하청 조합원들은 함께 공장 안으로 들어온 구사대들을 격퇴했고, 이는 결국 하청노조 최초의 단협 체결로 이어져 비정규직노조가 대중적 노조로 성장하는 발판이 되었다.
 

하지만 원하청 공동투쟁으로 사측의 탄압을 방어한 기아차 비정규직노조의 사례는 매우 예외적인 케이스였다. 대부분의 사업장에서 하청노조의 안착은 실패했다. 사측의 탄압에 대해 정규직운동질서는 방관으로 일관했고 오히려 노조 확대에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 현자 울산정규직노조는 노조설립 이후 빠르게 조합원이 확대되었으나 정규직노조에서 하청노조 건설에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찬물을 끼얹었다. 현대차 울산공장 비정규직노조는 이후 상황과 조건에 따라 조합원 수가 5, 6백에서 2천 명 정도까지 큰 폭으로 오르내렸다. 그러나 노조 설립 무렵 가입대상이 9,000여 명에 이르렀던 것을 고려하면 조직화 성과가 결코 좋은 편은 아니었다. 기아비정규직노조를 제외한 대부분의 하청노조들은 조직대상의 10~30% 정도를 조직하는 소수노조로 살아남았다.
 

⑵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으로 전환
 

조직 확대의 벽에 부딪친 대공장 비정규직 운동에 돌파구로 떠오른 것은 2004년 금속노조의 불법파견 집단 진정 캠페인으로 시작된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이었다.
 

2003년 SK 물류센터에서 용역회사 인사이트 소속으로 시설관리 업무를 했던 화섬연맹 소속 SK인사이트코리아노조52) 조합원 4명이 불법파견 판정을 받은 지 3년 만에 대법원에서 최종 판결을 받아내고 정규직화를 쟁취했다. 2001년 캐리어에서도 불법파견 시정요구 덕분에 총 102명이 정규직으로 전환되었다. 이 두 사례는 노조 운동에서 불법파견 진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민주노총과 각 연맹 차원의 실태조사로 이어졌다.
 

2003년 3월, 좌파 성향의 집행부가 당선된 광주 금호타이어노조는 비정규직 조직화 사업을 기획하여 비정규직 주체를 발굴하는 한편 불법파견 진정을 위한 증거수집에 들어갔다. 정규직노조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2003년 11월 22일 건설된 금호타이어비정규직노조는 조직 대상 대부분을 조직하고 노조 결성과 함께 불법파견 진정을 집단적으로 제출했다. 그 결과 2004년 4월 28일 금호타이어비정규직노조 조합원 282명이 정규직으로 전환되었다.
 

이런 성과를 목격한 금속노조 경주지부는 2004년 여름 임단협을 앞두고 지역에서 불법파견 진정 캠페인을 준비했다. 이는 곧 금속노조 차원의 전국적 캠페인 사업으로 확대되었다. 초기에는 사내하청운동 주체들 사이에서 불법파견 정규직화 요구에 대해 부정적인 문제의식이 있었다. 이전 사례를 봤을 때, 정규직이 된 비정규직 출신 조합원들이 활동을 지속하지 않는 등 부작용이 많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금호타이어의 경우에도 282명이 우선 정규직화 되면서 80여 명의 조합원들은 오히려 합법도급으로 판정받고 정규직화의 길이 막히는 부작용이 있었다. 또, 미화·경비·운수·식당 조합원들의 처우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면서 이후 비정규직노조의 존속이 어려워지는 상황에 처했다.
 

이러한 부정적인 인식은 현대차비정규직노조 지도부와 하청 활동가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노조 안정화 사업에 실패한 현대차비정규직노조 집행부는 불법파견 진정 캠페인이 시작되자 태도를 바꾸었다. 불법파견 진정에 예상보다 많은 노동자들이 호응했을 뿐 아니라, 9월 불법파견 울산 공장에서만 8000명, 전주·아산공장을 합치면 만여 명의 하청노동자들에게 불법파견 판정이 내려지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고무된 현대차 비정규직노조 1기 집행부는 2005년 1월 15일 주력기반인 5공장에서 잔업거부 투쟁에 들어갔다. 당시만 해도 많은 활동가들은 불법 판정이 떨어지면 금호타이어처럼 대규모 정규직 전환이 가능할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생각했다.
 

노동조합

불법파견 진정시기

불법파견 판정인원

노조 대응 및 결과

금속노조 경주지부

2004년

195명

▪ 단계적 정규직화

현대자동차 비정규직노조 (울산)

8,000여 명

▪ 원하청연대회의 구성하여 대응.

▪ 2006년 9월 3자교섭. 불파 문제는 성과 없음.

현대자동차 아산 사내하청지회

1,200명

현대자동차 전주 비정규직지회

8,00명

GM대우 창원 비정규직지회

2005년

850명

▪ 노조와해. 불파문제는 성과 없음.

기아자동차 화성 비정규직지회

42명

▪ 임단협에 집중. 불파 대응 안 함.

타타대우상용차

130명

▪ 단계적 정규직화


그러나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은 시작하자마자 자본의 강력한 탄압에 부딪쳤다. 회사는 투쟁에 동참한 다른 공장 하청노동자들에게 징계 경고장을 발송하는 등 강력하게 대처했고 5공장 조합원들의 투쟁은 고립되었다. 절박한 상황에서 1월 22일 비정규직노조 최남선 조합원이 “탄압중단, 원하청 단결투쟁”을 요구하며 분신을 시도했고, 이를 계기로 정규직노조와 원하청연대회의가 꾸려졌다. 하지만 정규직노조는 “공동논의, 공동교섭, 공동투쟁”이라는 이른바 3원칙을 내세우며 비정규직노조의 활동을 통제하려 했을 뿐 탄압받는 하청노동자들을 적극적으로 엄호하지 않았다. 비정규직노조 간부들이 무더기로 해고당하고 수십 억대의 손해배상과 고소소발, 징계가 떨어졌다. 투쟁에 연대하던 정규직 활동가들에게까지 탄압이 퍼부어졌다.6월 하순 현대차 비정규직노조들은 정규직 활동가들과 함께 흔히 “부흥회”라고 불린 대대적인 집단가입 캠페인에 들어갔다. 이 결과 울산공장 비정규직지회 조합원은 2000명에 육박할 정도로 증가했다. 전주·아산공장까지 합치면 노조로 조직된 현대차 하청노동자들은 3000명을 넘어섰다. 7월 20일 울산공장 비정규직노조 집행부는 2005년 임단투에서 불법파견 투쟁에 ‘올인’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임단투 시기를 불파투쟁 단일전선으로 돌파한다는 집행부의 계획은 2·3차 업체 투쟁 등 다른 현안 투쟁 사안들과 충돌하며 실제화 되지 못했다. 비정규직노조 조합원들의 파업에 대해 현대차는 관리자들을 현장에 투입하여 작업자들을 감시하고 대체인력을 투입했다. 비정규직노조 간부들의 현장 출입은 통제됐고 주요 간부들에 대한 체포영장이 발부되었다.
 

9월 8일 이상욱 집행부는 불파 문제에 아무런 성과가 없었음에도 임단협을 종결시켰다. 그 직전인 9월 4일 2공장 비정규직 조합원인 류기혁 열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벌어졌지만, 비정규직노조 내부 사정이 혼란한 와중에 노조 차원의 대응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53) 이미 6월부터 향후 투쟁 전망을 놓고 벌어지던 비정규직노조의 내부 논쟁은 9월 9일 쟁대위에서 불파투쟁을 계속 이어나가야 한다는 집행부의 입장과 현장을 추스르면서 다음 투쟁을 준비하자는 입장의 충돌로 표출되었다. 결국 후자가 쟁대위 다수 입장으로 확인되자, 비정규직지회 1기 집행부는 곧바로 사퇴를 표명하고 차기 집행부 선거 준비에 들어가게 되었다. 10월 새로운 집행부가 선출되어 현장을 추스르는 쪽으로 방향을 잡으면서 울산공장의 불파투쟁은 막을 내렸다. 현대차 비정규직노조는 불파투쟁이 시작된 1월부터 9월 4일까지 101명이 해고되고, 100여 명 이상이 징계를 받았다.54) 1기 집행부는 해고자들을 중심으로 장외투쟁을 이어갔지만 초기 노조건설과 불법파견 투쟁을 주도한 5공장 현장 기반은 사실상 붕괴되었다.
 

상황은 불법파견 투쟁을 주요 사업으로 받아들이거나 혹은 불법파견 투쟁을 계기로 노조를 건설한 다른 사업장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현대자동차 아산공장과 전주공장도 부흥회로 조합원이 크게 증가했지만 불법파견 교섭이 성과 없이 마무리되며 조직은 급속히 해체되었다. GM대우 창원공장도 한때 조직대상의 과반이 넘는 600여 명을 조직했지만, 사측의 악선동과 정규직노조가 불파투쟁에만 신경 쓴다는 정규직조합원들의 불만이 고조되며 9월 30일 정규직 집행부가 중도 사퇴하자 급격히 붕괴하게 된다. 비정규직노조를 옹호하던 김학철 집행부가 물러나자 사측은 대대적인 탄압에 나섰고 중심 활동가들은 해고되었다.

2004년 10월 설립된 반도체 업체 하이닉스매그나칩 하청노조는 노조설립 후 조합원들이 집단 해고되면서 해고자 복직을 내건 장기투쟁으로 전화되었다. 하이닉스매그나칩사내하청지회는 2년 6개월 동안 고공농성 두 차례를 비롯한 처절한 투쟁을 벌였으나 결국 복직을 쟁취하지 못했다. 결국 2007년 4월 26일 금속노조가 위로금을 받는 것으로 직권조인 합의를 하면서 투쟁은 허무하게 끝났다. 2005년 6월 설립된 현대하이스코비정규직지회 역시 노조 설립 후 조합원 120여 명이 집단 해고를 당하고 2년 간 고공농성을 세 차례나 단행한 끝에 간신히 복직을 쟁취할 수 있었다.
 

⑶ 불법파견 투쟁의 한계
 

2005년 불파투쟁은 금속대공장·제조업 비정규직 운동의 중심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이 투쟁은 자동차 뿐 아니라 철강, 반도체 등 다른 업종으로 확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디에서도 금호타이어 같은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오히려 사측의 거센 탄압으로 새로 조직된 노조들은 조직력이 붕괴되며 빈사상태에 몰렸다. 2006년에도 불파투쟁을 이어가는 사업장들이 존재했지만 그해 하반기가 되자 이 투쟁의 패배는 확실해졌다.
 

당초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에 부정적이던 비정규직 활동가들이 불파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은 대중의 열띤 호응 때문이었다. 하청노조가 실질적인 교섭권을 쥐지 못한 현실에서 국가기관이 내린 불법파견 판정은 정규직화를 비정규직 철폐 같은 머나먼 전망이 아니라 손에 쥘 수 있는 현실적인 요구로 보이게 했다. 그러나 불파투쟁이란 본질적으로 국가기관의 판정을 자본에게 강제하는 것이었고 이로 인해 불가피하게 투쟁의 전망 자체가 법률적 판정에 의존하는 양상을 보였다. 당연히 자본의 편일 수밖에 없는 국가기관은 최종 판결을 유예함으로써 사측에게 시간을 확보해주었고, 그 사이 자본은 가차 없이 투쟁 주체를 탄압했다. 불법파견 정규직화가 당장의 목표라는 것은 오판이었다.
 

더욱이 불파투쟁은 정규직이 될 수 있다는 기대에 대한 즉자적인 호소에 기반 했기 때문에 계급적 단결의식이나 연대의식 보다는 일종의 신분상승 욕구로 왜곡될 소지가 많았다. 이미 불파투쟁에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부터 이 점에 대한 우려는 많았지만, 비정규직노조가 정규직 활동가들과 함께 진행한 조직화 사업인 “부흥회”는 조직 확대를 우선시하여 일단 노조로 들어오면 정규직이 될 수 있다는 쪽에 선동의 방점이 찍혀 있었다. 이것은 신규 조합원들에게 정규직화에 대한 과도한 환상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불법파견 투쟁이 노조 주체들을 형성하는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다. 예컨대 불파 문제가 제기되지 않은 사업장들과 비교해 봤을 때 불파 투쟁은 조합원들을 크게 늘리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불파 투쟁은 노조의 조직력을 강화하기 위한 일상 투쟁, 현안 투쟁과 결합하여 상승효과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충돌되는 양상을 보였다. 불법파견 판정을 받은 노동자들에게 정규직화 이외의 다른 모든 요구는 사소한 것이 되었다. 다른 노동자들에게 정규직화 투쟁은 자신들의 처우개선 요구투쟁을 부차적인 것이 되도록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는 결국 불파투쟁이 패배로 돌아가고 나서 조직력과 노조의 시스템이 붕괴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당연한 일이지만 사법기관에 의한 불법파견 판정은 불법성이 가장 명확한 곳으로 한정되는 경향이 있었다. 하청노동자가 가장 많은 조선소 같은 경우는 처음부터 불법 판정 캠페인에서 배제되었다.55) 같은 사업장의 2·3차 하청노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비정규직노조 초기만 해도 2·3차 하청에 대한 고민을 쥐고 가려는 노력이 있었다. 실제로 울산공장 비정규직노조에서처럼 2·3차 하청노동자들이 투쟁의 선봉에 나서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러나 불파투쟁이 대공장비정규직노조의 중심과제로 등장하며 2·3차 하청노동자에 대한 문제의식은 점차 유실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은 대공장의 비정규직 투쟁을 완성차 공장 1차 하청노동자들의 투쟁으로 협소화시키는 면이 있었다. 이 사안을 전체 비정규직노동자의 투쟁과 연결시키는 프로그램이 부재하거나, 생각은 있더라도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각주> -----------------


51) 격렬한 가두투쟁을 벌였던 2003년 노동자대회에서 총 연행자 113명 중 현대차비정규직노조 조합원들만 16명이었다. 

52) 2000년 3월 20일 노조를 건설했으나 노조 설립 시 40명이던 조합원들은 3일 후 4명만 남고 모두 탈퇴했다. 남은 조합원들은 노조를 해산하라는 회사의 회유를 뿌리치고 2000년 8월 18일 노동부에 불법파견 진정서를 제출했다. 

53) 9월 5일 새벽 4명의 조합원이 철탑에 올라가 열사투쟁의 불씨를 살리려했지만 태풍으로 인해 만 하루 만에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54) 투쟁과정에서 총 4명이 구속됐고, 4명이 3수배를 받았으며, 손배 1억과 400만 원의 가압류가 집행되었다. 

55) 라인 작업을 하는 자동차와 달리 팀제로 운영되는 조선소는 사내하청이 합법적으로 판정될 가능성이 적지 않은데다 이직률이 높아 정규직화 대상이 되는 2년 이상 근속자가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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