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없음 2017/04/27 16:19

대공장 비정규직 운동 20년, 평가와 전망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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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영 


1996년 광주·마창·울산 등지에서 벌어졌던 사내하청노동자들의 투쟁들과 그것을 계기로 결성된 전국비정규직노동자모임을 출발점으로 본다면 대공장 비정규직 운동의 역사는 어느새 20년을 훌쩍 넘어섰다. 다른 나라들과 달리 처음부터 ‘비정규직 운동’이라는 일반적 운동을 지향하며 등장한 한국의 비정규직 운동은 금속대공장 하청노동자들의 전투적 운동에서 시작되었다. 90년대 후반 대공장의 전투적 현장주의 전통 속에서 등장한 최초의 하청활동가들은 자신들을 전체 비정규직 운동의 일부로 인식했으며 이 운동의 전위가 되고자 했다.
 

그러나 대공장 비정규직 운동은 어느 사이엔가 부터 완성차 대공장 1차 하청노동자들의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이하 ‘불파투쟁’)과 동일시되기 시작했다. 특히 2010년 7월 22일 현대차 울산공장 하청해고자 최병승 활동가에게 하청업체가 아닌 현대차가 실사용주라는 대법원 판결이 내려진 이후, 현대차 울산·아산·전주공장에서 벌어진 비정규직노조들의 불파투쟁은 지난 몇 년 간 대공장 비정규직 운동을 규정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대차 비정규직노조들의 수년에 걸친 치열한 투쟁의 결과로 불법파견 판정 범위는 크게 확대되었다.1) 또한 큰 논란을 불러일으키긴 했지만 2014년과 2016년 두 차례의 불파 합의를 통해 비정규직노조 조합원들을 포함한 총 6000명의 현대차 하청노동자들이 정규직으로 ‘신규 채용’ 되는 성과도 얻었다.2) 이로 인해 다른 사업장과 다른 산업에서 다시 본격적으로 불파투쟁을 준비하는 주체들이 속속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십여 년의 투쟁을 통해 그 성과만큼이나 많은 약점과 한계를 노출한 불파투쟁이 과연 대공장 비정규직 운동의 새로운 전망을 열어줄 수 있을지는 미지수로 보인다. 
 

불법판정 범위가 확대되면서 대공장에서 사내하청 고용이 줄어들 것은 분명하다. 이미 촉탁계약직 같은 다른 형태의 비정규직 고용형태가 나타나고 있으며 제조업에서 기존의 하청노조 형태와 다른 새로운 비정규직 투쟁들도 벌어지고 있다. 이 글을 통해 지난 20년 동안 대공장 비정규직 운동을 평가하고 전망을 고민해보고자 한다.

 

1. 대공장 비정규직 운동의 등장 (1996~2002)


흔히 비정규직 문제를 신자유주의의 산물이라고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역사 전체를 볼 때 정규직이라고 불리는 특정 기한을 정하지 않는 전일제 고용이 중심이 된 시기는 상대적으로 짧은 시기에 불과했다. 산업 자본주의 초기에 노동자에 대한 고용보장 개념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20세기로 넘어와서야 중공업과 대규모 공장제도의 발전, 노동조합의 성장 등의 요인이 결합하여 이른바 ‘정규직’이 비로소 중심적인 고용관계로 확립되었다.3)


금속 대공장의 발전이 정규직 고용관계가 안착되는 계기가 된 서구와 달리 한국에서 대공장의 비정규 고용은 1970년대 중공업과 대규모 공장제가 도입될 때부터 상당한 비중으로 존재했고 이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특히 철강과 조선 산업에서는 현재의 사내하청과 거의 동일한 형태의 간접고용이 널리 활용되었다. 1973년 포항제철(현 포스코) 고로가 처음으로 가동을 시작했을 때 이미 ‘협력업체’라고 불리는 사내하청업체 16개에 2,700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고용되어 있었다.4) 현대중공업의 전신인 현대조선소에서는 설립 다음 해인 1974년 ‘위임관리제’라는 이름으로 사내하청화가 추진되는 것에 반발하여 직영 노동자들의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5)


이처럼 한국의 대공장에서 가장 오래되고 일반적인 비정규직 고용 형태는 사내하청이다. 원래 하청 혹은 하도급이란 생산과정 일부를 다른 업체에 위탁하는 계약 관계를 가리킨다. 따라서 원칙상 하청업체는 독자적인 생산시설 혹은 노동과정을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 자동차·조선·철강·반도체 등 한국의 주요 제조업에서 광범위하게 활용되고 있는 사내하청은 대공장 생산과정에 노동력만 공급하는 단순 인력파견 형태를 띠고 있다.

산업별 하청노동자 현황 (2010년)

업종

점검대상

원청

노동자 수

하청

업체 수

하청

노동자 수

원청대비 비율

자동차

기아, 르노삼성, 현대, 타타대우, GM대우

56,682

146

10,221

18%

조선

대우조선, 삼성중공업, 한진중공업, 현대중공업, STX조선

53,780

504

51,427

97%

철강

동국제강(포항), 동부제철(아산), 세아베스틸, 포스코, 현대제철

11,924

57

4,677

39%

전자

노키아TMC, 동우화인켐, 삼성전자(탕정), 하이닉스반도체

59,560

40

7,676

13%

정보

통신

동부CNI, 동양시스템즈, 삼성SDS, 한국휴렛팩커드, SK C&C

16,023

40

5,297

33%

합계

29개 기업

197,969

787

79,298

40%

자료: 고용노동부(2010년), 한겨레신문 2011년 4월 20일자에서 재인용


유럽에서 사내하청제도와 유사한 간접고용은 공장제 형성 초기에 널리 나타났다. 노동력을 통제·관리하고 생산과정을 단일하게 조직하는 자본의 능력이 아직 미비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규모 공장제의 확립과 함께 한편으로 자본의 노동력 관리 능력이 발전하고 다른 한편으로 노동조합이 발전하면서 이런 고용관행은 점차 소멸되었다. 이와 더불어 20세기에 들어서자 대부분의 산업 국가에서 인력파견을 법적으로 규제하기 시작했다. 과도한 중간착취, 업체들 사이의 뇌물과 협잡, 지역 사회에서 범죄 등 여러 사회 문제들을 빚었기 때문이다. 특히 노동조합의 힘이 강한 제조업에서 단순 인력파견은 많은 나라들에서 법적으로 금지되었다.6)
 

후발 산업국가인 일본 역시 2차 대전 이후 간접고용을 전근대적인 고용관계로 규정하고 간접고용을 통한 중간착취를 금지하는 노동기준법 및 직업안정법을 제정했다. 선발 자본주의 국가들의 법제도를 모방한 한국도 97년 이전까지 원칙적으로는 인력파견을 불법으로 규정했고, 제조업에서는 지금도 금지하고 있다.7) 하지만 일자리를 알선·소개하는 인력 파견 및 용역업은 어느 나라에서도 완전히 근절되지 않았고, 인력파견의 필요성이 관습적으로 널리 인정된 건설·항만 및 일부 서비스 산업 등을 통해 존속되었다. 노동조합 운동의 전통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후발 산업국의 경우 제조업에서도 이를 활용하는 사례가 나타나기도 했는데, 특히 일본에서는 5~60년대의 고도 성장기에 ‘구내하청’이나 ‘사외공’으로 불리는 한국의 사내하청과 유사한 위장 인력파견이 조선 및 철강 산업을 중심으로 널리 활용되었다.8)
 

한국은 1973년 박정희의 ‘중화학공업화 선언’ 이래 국가 정책으로 중화학 공업화를 추진하면서 일본을 벤치마킹했고, 설비 운용 기술은 물론 노동력 편제와 관리·운용까지 일본의 방식을 그대로 도입했다. 따라서 사내하청제도 같은 하도급으로 위장된 인력파견 방식은 이 과정에서 한국의 철강 및 조선업에 도입되었으리라 추측된다. 한국의 사내하청 제도에 대해 연구한 손정순에 따르면 한국에서 70년대 대공장의 도입과 함께 등장한 “사내하청노동은 과거 산업화 이전시기부터 존재해 왔던 일용 청부공제 노동이 산업화 과정에서 변용된 것이라기보다 단절적으로 외부로부터 도입, 형성된 측면이” 큰데, “이 시기 중화학 공업의 대공장 내에서 나타나고 있는 사내하청 노동은 여타 부분에 널리 활용되어 왔던 임시공과도 다르며, 건설업종이나 부두 하역 업무에서 활용되어 왔던 청부제와도 다른, 현재 금속산업 부문의 사내하청 노동과 거의 유사한 형태로 등장한 것이다.”9) 한편 70년대 말 경제위기에 대한 대응으로 80년대 한국의 대공업에서 하청계열화가 정책적으로 적극 추진되며 당시 막 대규모 제조업으로 도약하고 있던 자동차 산업10)에서도 하청업체로부터 파견되어 완성차 작업장에 상주하면서 부품의 납품 및 서열11)을 전담하는 노동자들이 생겨났다. 이는 완성차 공장에서도 사내하청이 도입·확대될 수 있는 단초가 되었다.
 

대공장 형성 초기부터 상당한 비중으로 존재하던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87년 노동자대투쟁을 통해 크게 줄어들었다. 87년 당시 사내하청 직영화·사내하도급제 개선·일용직 처우개선 등이 현대중공업 등 대공장 노동자들의 주요 요구였다는 것은 분명 기억해야 할 사실이다. 이러한 투쟁의 결과 사내하청은 정규직화 되어 일시적으로 없어지거나 하청업체들에도 노조가 건설되어 노동조건이 개선되는 효과가 나타났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많은 대공장들에 이른바 ‘신경영 전략’이 시행되면서 사내하청노동자들이 다시 늘어나기 시작했다.
 

신경영 전략은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대공장에 등장한 민주노조에 대한 탄압 및 파괴 전략에서 벗어나 노조를 인정하는 한편, 아래로부터 조합원들을 포섭하고 장기적으로 노조의 투쟁성을 약화시키기 위한 정책이었다. 정부와 자본은 89년 무렵부터 민주노조 운동에 대한 본격적인 탄압에 들어갔다. 중소영세사업장 중심으로 조직된 전노협의 경우, 이러한 탄압에 의해 많은 사업장에서 노조가 무너지는 등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대공장에서도 정부와 자본의 강경한 노동탄압은 90년 현대중공업의 골리앗 투쟁 등 격렬한 저항을 불러왔다. 그러나 정부와 자본의 탄압은 대공장에서 민주노조의 기세를 꺾어놓기는 했지만 완전히 몰아내는 데는 실패했다.
 

이에 자본은 방향을 선회하여 대공장 민주노조의 존재를 인정하고 단협을 정례화 하는 등 정규직 조합원들에 대한 물질적·정신적 포섭을 시도하는 한편, 소사장제 등을 통해 직접 관리하던 생산·라인 공정을 분리하여 하도급화 하는 방식으로 사내하청노동자들을 다시 늘리기 시작했다.12) “이처럼 89~90년부터 소사장제로 시작된 자본의 신경영 전략의 확산 속에서 … 현대중공업 및 현대자동차 등에서도 작업장 내 사내하청 노동이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현대중공업을 포함한 조선업종의 경우 90~96년 기간 동안 전체 조선업종 생산 기능직의 34%를 사내하청 노동이 차지할 정도로 증가하면서, 조선업종의 직영 기능직을 대체해 갔으며, 대부분의 금속 대공장에서 신경영 전략이 본격화한 93년도 이후부터 급증했음을 알 수 있다.”13)
 

때문에 흔히 비정규직 확산의 계기가 되었다고 이야기 되는 IMF 사태와 98·99년의 구조조정 공격 이전에도 조선·철강·자동차 등 금속대공장에는 상당한 규모의 하청노동자들이 일하고 있었다. 조선소에서는 90년대 말 하청노동자들의 비율이 전체 현장 노동자의 40%를 넘어섰다. 완성차 공장에서도 현재 기아차 광주공장인 아시아자동차에서 97년 16개 업체에 하청노동자 1400명이 일하고 있었던 것으로 집계되었다. 현대자동차도 구조조정 시기이던 98·99년에 정규직에 대비한 하청노동자들의 비율이 이미 20%에 육박하고 있었다.
 

⑴ 전국비정규직노동자모임의 결성 (1996~1997년)
 

90년대 중반을 거치며 금속대공장의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늘어났을 뿐 아니라 정규직과 노동조건의 격차가 크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87년 이전에도 정규직과 하청노동자들은 물론 처우의 차이가 있긴 했지만 그렇게 큰 차이는 아니었다.14) 일의 종류에 따라 하청의 임금이 더 높은 경우도 꽤 있었다. 90년대 이후 정규직과 하청의 노동조건이 벌어지게 된 것은 노동조합의 존재 여부에서 기인한 면이 컸다.
 

90년대를 거치며 자동차·조선 산업의 거의 모든 대공장에 민주노조가 확고히 자리 잡았다. 그러나 하청노동자들은 기업별로 조직된 정규직노조에 가입할 수 없었다. 87년 투쟁의 여파로 포항제철 등 몇 군데에서 사내하청업체 노조가 만들어졌지만, 전노협 소속이었던 이 노조들은 90년대 초 대대적인 탄압으로 존속되지 못했다. 반면 금속대공장의 정규직 노동자들은 임금협상과 단체협상의 제도화를 통해 노동조건을 착실하게 개선해나갔다. 하청노동자들은 이러한 노조의 울타리에서 배제되어 있었으며, 이는 고스란히 노동조건의 격차로 나타났다. 이러한 차별에 대한 불만으로부터 90년대 중반 몇몇 대공장에서 하청노동자들의 투쟁이 벌어졌다.
 

96년 6월 마산의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에서 같은 하청업체 소속 하청노동자 60여 명이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투쟁을 진행했다. 두 달 동안 투쟁했으나 투쟁에 나섰던 노동자 거의 전부가 해고되며 패배로 끝났다.
 

같은 해 10·11월에는 현대중공업에서 상선이라는 하청업체 노동자 70명이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면서 파업 투쟁에 나섰다. 하청노동자에게도 단협을 적용하라는 요구에서 출발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정규직과 차별적 노동조건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된 투쟁이었다. 10일 파업 끝에 시급 인상, 격려금 등의 성과를 냈으나 노조 건설이나 가입 같은 조직적인 성과로 이어지진 못했다.
 

97년 8월 광주 아시아자동차(현 기아차 광주공장) 용역하청노동자 200여명이 집단 해고되었다. 이들은 체불 임금과 용역문제 해결을 위해 아시아자동차 용역노동자 대책위원회(이하 ‘아시아용역대책위’)를 구성해서 투쟁에 나섰다. 하지만 당시 정규직노조와 지역 노동·시민 단체들이 “회사 살리기 운동”을 하고 있었고, 정규직 조합원들 사이에 하청노동자들에 대한 우선 해고와 체불임금에 대해 “회사가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다”는 정서가 팽배해 있었다.15) 이런 상황에서 아시아용역대책위는 노조 설립을 포기하고 퇴직금과 체불임금을 받아내는 선에서 투쟁을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16)
 

한국중공업 투쟁과 아시아용역대책위의 투쟁은 공장에 위장 취업한 활동가들이 주도했다. 현대중공업 투쟁은 자생적으로 일어난 투쟁이었지만, 이를 계기로 현장에 하청노동자로 취업해 있던 활동가들이 현대중공업 외주노동자모임을 조직했다.
 

최초의 하청 활동가들은 대부분 급진적 정파운동과 연결된 전투적인 활동가들이었다. 96·97년 하청노동자들의 투쟁은 현장에 잠복하고 있던 이들이 스스로를 하청 활동가로 규정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17) 이 시기 형성되고 있던 대공장의 선진노동자 운동질서는 이들에게 결집의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97년 9월 대전 가톨릭 농민회관에서 진행된 전국현장조직대표자회의에서 울산 현대중공업 외주노동자모임과 아시아자동차 용역노동자 대책위원회 활동가들이 만나 상호교류를 약속했다. 그 결과 97년 11월 9일 전국노동자대회에서 <사내하청·파견노동자가 전국의 노동형제에게 드리는 긴급제안서>라는 유인물을 공동으로 발행하여 배포했다.
 

이 유인물을 본 몇몇 지역 활동가들이 더 결합하고 몇 차례의 논의를 거쳐 98년 1월 ‘비정규직노동자 조직화를 위한 준비모임’이 발족했다. 이후 이 모임은 ‘비정규직노동자전국모임’으로 명칭을 개정했다가 다시 ‘전국비정규직노동자모임’(이하 ‘전국모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당초 전국모임의 설립 목적은 민주노총으로 대표되는 조직 노동운동이 비정규직 문제를 받아 안도록 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전국모임의 초기 활동은 조직 노동자들과 민주노총 및 그 산하 연맹들에 비정규직노동자의 조직화의 중요성을 알리고 이에 대해 공동의 대안을 마련할 것을 요구하는 이슈 파이팅 활동이 중심이었다.18) 98년 이갑용 전 현대중공업노조위원장이 민주노총 위원장으로 당선되면서 비정규·미조직 조직화를 전담할 조직 2국이 설립되고, 민주노총에서도 비정규직 조직화 사업이 공식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애초의 목적이 어느 정도 달성되자 98년 말 전국모임은 향후 모임의 전망에 대한 논의에 들어갔다. 이 논의에 제출된 한 입장은 전국모임은 비정규직노동자들을 직접 조직하는 비정규직노조 건설을 자기 전망으로 잡아야 하며, 비정규직노동자들의 특수한 조건, 즉 고립성·분산성·유동성 때문에 초기업적인 비정규직일반노조 건설을 목표로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각 지역에서 지역 비정규직노조를 만들고 이를 기초로 전국적인 비정규직노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전국모임의 회원 다수는 이런 주장이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분리를 심화시키는 형식주의·조합주의로 빠질 우려가 있으며 현장에서 원하청 공동투쟁을 우선적으로 제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논의 결과 비정규직노조 안은 철회되었고, 대신 전국모임이 비정규직노동자들을 직접 조직하는 사업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에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로부터 전남 목포‧영암 지역에 소재한 조선사업장인 한라중공업(현 삼호중공업)에서 하청노조의 건설이 추진되었다.
 

이 사업은 비정규직노동자의 투쟁이 정규직노동자들과 함께 대공장 자본을 타격하는 공동투쟁을 지향해야 한다는 전국모임 회원 다수의 경향에 의해 추진되었다. 그 결과 전국모임의 첫 번째 비정규직노조 건설 사업은 목포‧영암지역비정규직노조가 아니라 최초의 대공장 비정규직노조인 한라중공업하청노동조합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계속)

 

<각주>----

 

1) 2014년 9월 18·19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현대차 하청노동자 1,247명이 제기한 근로자지위확인소송 선고는 2010년의 대법원 판결보다 더욱 확대된 사실상 현대차에 근무하는 모든 하청노동자가 불법파견이라는 취지의 판결을 내렸다. 이어 9월 25일 기아차 하청노동자 499명이 제기한 근로자지위확인소송 선고에서도 비슷한 취지의 판결이 내려졌다. 이후 동일한 취지의 후속 판례가 계속 등장하고 있어 적어도 자동차산업에서 사내하청의 불법화는 돌이킬 수 없는 대세가 되고 있다. 

2) 2014년 8월 18일 현대차와 정규직노조, 현대차 아산공장사내하청지회, 전주공장사내하청지회가 맺은 불파 합의(소위 ‘8·18 합의’)는 현대차가 여전히 ‘불법파견’을 인정하지 않은 채, 이미 채용된 2000명을 포함 4000명의 하청노동자들만을 정규직 ‘전환’이 아닌 정규직으로 신규채용 하는 것을 정당화함으로써 서울중앙지법의 근로자지위확인소송 판결을 앞두고 현대차에 면죄부를 주었다는 논란을 일으켰다. 또 체결권자인 금속노조가 빠진 상태에서 합의가 이루어져 합법적 효력도 논란이 되었다. 2016년 3월 21일 현대차와 현대차비정규직지회(울산공장)이 체결한 불파합의 역시 ‘8·18 합의’의 문제점들이 극복되지 않은데다 합의 체결을 앞두고 비정규직지회가 신규 조합원 가입을 거부하면서 많은 논란을 낳았다. 

 

3) 이태영, 「비정규직 운동 : 조합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사회주의노동자> 4호 (2006.8)

4) 당시 사무직을 포함한 포항제철 전체 정규직의 수는 3,793명으로 정규직 대비 하청노동자의 비율은 이미 69%에 이르렀다. (손정순, 「비정규직 형성 과정 고찰 - 금속산업 부문의 산업화와 사내하청 노동의 도입과 전개」 (2009. 9. 9))

 

5) 손정순, 「금속산업 비정규 노동의 역사적 구조변화」, 고려대학교 경제학과 박사학위 논문(2009. 6) 

6) “본질적으로 ‘사람을 사고 파는’ 이러한 인력공급업 성격의 간접고용에 대한 법·제도적 규제는 이후 1919년 ILO 설립 당시의 핵심적 원칙이 되었다.” (손정순, 「비정규직 형성 과정 고찰 - 금속산업 부문의 산업화와 사내하청 노동의 도입과 전개」)

7) 따라서 제조업에서 사용되고 있는 모든 사내하청은 산업과 업종을 불문하고 원칙적으로 불법이다. 이는 실제로 불법파견 진정 이후 대다수의 판례가 증명하고 있다. 불법파견 입증이 어렵다는 조선 산업에서도 2010년 3월 노조 활동으로 해고당한 현대중공업하청노조 이승열 전 사무국장에 대해 “현대중공업은 사내하청 노동자의 사용자”라는 대법원 판결이 내려진 바 있다. 

 

8) 이하 사내하청의 역사와 한국에서 도입과정에 대한 서술은 손정순의 논문들(「비정규직 형성 과정 고찰 - 금속산업 부문의 산업화와 사내하청 노동의 도입과 전개」, 「비정규직 형성 과정 고찰 - 금속산업 부문의 산업화와 사내하청 노동의 도입과 전개」)을 요약한 것이다. 

 

9) 손정순, 「금속산업 비정규 노동의 역사적 구조변화」, p.88

 

10) 손정순, 「금속산업 비정규 노동의 역사적 구조변화」, p.88손정순, 「금속산업 비정규 노동의 역사적 구조변화」, p.88

 

11) 서열이란 부품사로부터 공급된 부품들을 완성차 라인에서 조립하기 용이하게 배치해 주는 작업을 말한다. 

 

12) “90년대 초에 주로 활용된 (소사장제의 — 인용자) 방식은 ‘기존 공정을 분리 → 기존 공정(라인)의 책임자인 조·반장 퇴사 후 신규 사업주로 등록 → 하도급화’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 경우 기존 공정(라인)의 생산 기능직까지도 해당 사업주 소속으로 이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이러한 소사장제의 경우, 대부분 원래 담당하던 업무를 소속 사업체만 변경된 채 수행하기에 전형적인 노무 용역만을 제공하는 사내하청 업체화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손정순, 같은 글, p.145)

 

13) 손정순, 같은 글, p.148

 

14) 현대중공업의 경우에도 87년 이전에는 “내주하청, 임시일용공 등으로 통칭되는 비정규직노동자와 정규직노동자의 노동조건, 작업장 내 지위 등에 있어서 거의 차이가 없었”다. (손정순, 같은 글, p.141) “그때(87년 이전 시기)는 다른 거라고는 월급봉투 색깔밖에 없었어요. 작업 지시도 현중에서 했고, 승진, 근태 모든 게 직영하고 똑같았고, 다 현중에서 했죠. … 실제로 내주 사람들(사내하청 소속 노동자)하고 직영하고 지금처럼 거리감이라든가 그런 거도 전혀 없었고요. 그냥 다 현중 사람이라고 생각했죠.” (‘02. 10월 현대중공업 정규직노동자 인터뷰 자료, 같은 글, p.111에서 재인용)

 

15) 당시 아시아차 노조와 지역 노동·시민단체들은 대부분 ‘아시아자동차 살리기 범시민대책위’에 참여하고 있었다. 

 

16) 기아자동차노동조합 광주지부, 「기아자동차 광주공장 비정규직 투쟁 평가 자료집」

 

17) 대략 95년경부터 금속대공장에 정규직으로 취업하는 길이 극히 좁아지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이전에 안정적인 정규직 취업 루트로 여겨졌던 공장 부속 직업훈련원이 더 이상 정규직 입사로 직결되지 않게 되었다. 직업훈련원을 수료해도 직영이 아닌 하청으로 채용되는 경우가 생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때문에 90년대 중반 이후 금속대공장에 취업하고자 하는 활동가들은 하청으로 취업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대개 당시 대공장에 형성돼 있던 현장조직 같은 선진노동자 운동질서에 개입하거나 활동을 드러낼 계기를 엿보며 잠복하고 있었을 뿐, 아직 스스로를 ‘하청 활동가’로 자각하진 못하고 있었다.

 

18) 사회진보연대, <신자유주의와 노동의 위기: 불안정노동 연구>, p.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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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27 16:19 2017/04/27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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