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없음 2017/05/12 07:45

대공장 비정규직운동 20년, 평가와 전망 (3)

 

한국통신계약직노조는 517일 간 투쟁하며 2000~2001년 비정규직투쟁의 구심이 되었다. (사진 출처 : 참세상)

517일 간 투쟁하며 2000~2001년 비정규직 투쟁의 구심이 되었던 한국통신계약직노조 (사진출처 : 참세상)


이태영


1. 대공장 비정규직운동의 등장 (1996~2002년)
(1) 전국비정규직노동자모임의 결성 (1996~1997년)
(2) 한라중공업 하청노조 건설 (1999년)
(3) 전국모임과 한라하청 투쟁의 의미

2. 대공장 비정규직노조 운동의 본격적인 등장
(1) IMF와 구조조정 이후 금속 대공장의 상황
(2) 제조업 비정규직노조 건설을 위한 초기 시도들 (2000~2002)

(3) 대공장 비정규직 투쟁의 본격적인 등장과 확산 (2003~2005)
(4) 정규직운동질서의 방관과 독자노조 건설 
________


 


2. 대공장 비정규직노조 운동의 본격적인 등장


한라하청노조 건설 투쟁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2000·2001년 비정규직노동자들의 투쟁이 처음으로 폭발적으로 벌어졌다. 99년 한라하청노조, 재능교육교사노조, 애니메이션노조 등 비정규 고용형태를 가진 몇몇 노조들의 투쟁이 벌어지고, 통계청 기준으로 임시직과 일용직을 합친 비상용직이 전체 임금노동자의 50%를 넘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비정규직 문제가 마침내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었다.32) 2000년 초부터 서울대시설관리노조, 이랜드비정규직분회, 방송사비정규직노조, 한국통신계약직노조 등 수십 여 개의 비정규직노조들이 잇따라 건설되었다.
 

이 노조들은 대개 수도권과 비제조업에 집중되어 있었다. 비제조업에서도 90년대 중반 외주화가 상당부분 진행되었다. 처음에는 노동조건의 차이가 크지 않았기 때문에 순순히 이를 받아들였던 노동자들은 대부분 IMF 경제위기를 이유로 노동조건의 큰 하락을 경험했다. 99년부터 경기가 뚜렷이 회복세를 보이기 시작했지만 하락한 노동조건은 결코 회복되지 않았다. 재계약 시기를 앞두고 이에 대한 불만이 노조 건설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으며, 여기에 2000년 7월 파견법 제정 만 2년째가 되면서 정규직화 의무를 피하기 위한 집단해고 조짐이 나타나자 이 역시 노조건설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 노조들의 투쟁을 지도·지원한 것은 주로 민주노총 지역본부들이었다. 대부분의 투쟁이 수도권에 집중돼 있었기 때문에 특히 서울본부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초기 서울본부는 재능교육에서 성공의 경험, 비정규직문제에 대한 사회적 이슈화에 고무되어 비정규직 투쟁에 의욕적으로 임했다. 하지만 이 시기 조직된 노조들은 장기투쟁 끝에 대부분 유실되었다. 노조가 건설되면 파업에 나서 이를 통해 간부층을 발굴하고, 파업 동력이 최고점에서 하락하는 시점에 어느 정도 교섭 안이 나오면 파업을 접고 노조를 안정화한다는 민주노총의 신규노조 조직 매뉴얼은 이 사업장들에 통하지 않았다.
 

파업 투쟁이 수십 일을 넘어가고 있는데도 자본은 전혀 타협의 여지를 주지 않는 완강한 태도를 보였다. 당혹한 민주노총 관료들은 많은 곳에서 스스로 요구를 낮추거나 왜곡시켰다. 그러나 대다수의 경우 자본은 이조차 받아들이지 않았고 투쟁은 장기화되었다. 경험이 없는 신규 비정규직노조들은 결국 장기투쟁을 견디지 못하고 하나 둘 스러져 갔다. 2002년 5월 13일, 517일 동안 투쟁하며 비정규직 투쟁들의 구심이 되었던 한국통신계약직노조가 큰 성과 없이 투쟁을 마무리 했다. 이는 2000년 초에 시작된 비정규직노동자들의 투쟁 물결이 일단락되었음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2000·2001년 비정규직 투쟁의 폭발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이 전투적으로 표출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많은 활동가들에게 각인시켰다. 이전까지 비정규직  문제는 조직형식의 문제로 제기되는 경우가 많았다. 민주노총 관료들은 비정규직 조직화는 산별노조로 전환되어야 풀릴 문제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산별노조로의 전환은 요원해 보였다. 또 정규직 중심의 연맹질서가 산별체제로 전환된다 해도 비정규직의 조직화에 적극적으로 나설지는 매우 의심스러웠다. 비슷한 시기 또 다른 대안으로 일반노조나 지역노조가 제기되기도 했지만, 지역노조는 이미 상근자 중심의 캠페인 활동, 다시 말해 노동조합이라기보다 운동단체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무엇보다 비정규직 문제를 조직형식으로 접근하는 경향은 항상 비정규직 문제를 현재의 투쟁이 아니라 미래의 조직화 문제로 돌리는 경향이 있었다.

2000·2001년의 수도권 비제조업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은 많은 활동가들에게 조직형식 논의를 넘어 비정규직 투쟁의 현실적 가능성을 확인하게 만든 중요한 계기였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비제조업 투쟁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 제조업 특히 대공장 비정규직 투쟁으로 파급시키지 않으면 비정규직 투쟁은 전망이 없다는 인식을 만들었다. 그러나 비정규직 투쟁을 대공장으로 확대시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과제였다.


⑴ IMF와 구조조정 이후 금속 대공장의 상황

 

80년대 이후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은 조직노동과 협약을 통해 노동유연화를 확대시키는 경향을 보였다. 1982년 체결된 네덜란드의 바세나르 협약을 필두로 90년대 들어 많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고용보장·노동시간 단축 등 조직노동의 이해와 노동유연화의 확대가 맞교환 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한국에서도 97년 노동법 개악을 통해 민주노총은 복수노조 허용, 노조의 정치참여 허용 등 조직노동에 유리한 집단적 노사관계법의 개선과 정리해고제·파견법·변형근로제 등 노동유연화 악법 도입을 맞교환했다.
 

98·99년 많은 대공장에서 정리해고·희망퇴직 같은 인원 구조조정이 추진되었다. 대공장 정규직노조들은 격렬하게 투쟁했지만 패배했다. 정리해고의 기억은 정규직 조합원들에게 깊은 상처로 남았으며, 고용안정이 노동조합의 가장 우선적인 과제로 떠올랐다. 이를 틈타 비정규직의 이해와 정규직의 이해를 맞바꾼 사회적 합의는 사업장 차원으로 내려왔다. 2000년 당시 현대자동차노조 위원장 정갑득은 반대하는 조합원들에게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비정규직을 받겠다”고 강변하며 이른바 ‘완전고용합의서’에 서명했다. 이는 정규직 조합원들의 총고용을 보장 받는 대신 사측의 사내하청 사용을 묵인하겠다는 합의였다.
 

이 합의는 1998년 기준인 정규직 대비 16.9%까지 하청노동자의 사용을 제한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2000년 당시에도 현대자동차에서 하청비율은 이미 24%를 넘어서고 있었다. 완전고용 합의는 정규직노조가 하청노동자들을 고용보장의 방패로 공식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합의 이후 현대차 울산공장에서 1차 하청노동자들은 2004년까지 가파르게 증가하여 한때 거의 10000명에 육박하게 된다. 이후 많은 대공장에서 유사한 합의들이 이루어졌다.
 

96~06년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1차 하청 인원 및 직영대비 비율(%) 추이

 

96

98

99

00

01

02

03

04

05

06

인원

4,700

4,034

5,249

6,315

7,381

8,581

9,246

9,571

7,620

6,244

비율

 

16.9

20

24.2

28.3

31.8

33.2

33

-

27.4

「금속노조 비정규 노동자 조직화 전략에 대한 진단과 대안 연구 (2011. 9)」에서 인용)


노조 상층부 차원의 고용합의는 현장단위에서의 일상적 합의구조가 형성되며 더욱 아래로 내려왔다. 구조조정 이후 2000년대 들어 완성차 공장에는 근로자참가제33)에 기초한 노사공동위원회나 고용안정위원회 같은 노사협의체가 등장했다. 이런 노사협의체들은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상시적·부분적 구조조정에 대한 합의권을 현장 대의원 체계까지로 내리는 것을 제도화했다. 정규직 중심의 시야에 갇힌 전투적 현장주의자들은 완성차 공장의 맨아워 협상34) 같은 현장 합의구조를 현장권력의 맹아라고 보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 역할은 매우 이중적이었다.

그것은 상시적인 구조조정에서 정규직 조합원들의 고용과 노동조건을 방어하는 강력한 보루로 기능한 반면, 정규직의 고용보장을 위해 하청노동자들을 투입과 해고를 용인하는 비정규직 배제 메커니즘의 핵심을 이루었다. 완성차 공장처럼 제도화된 합의구조가 형성되진 않았다 하더라도 철강, 조선 등 다른 산업에서도 정규직노조와 조합원들은 암암리에 비정규직 투입을 묵인해왔다. 대공장의 정규직 활동가들은 겉으로는 비정규직 투쟁들에 노골적으로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진 못했지만 실제로는 조합원들의 정서를 핑계 삼아 방관하는 태도를 취했다.



⑵ 제조업 비정규직노조 건설을 위한 초기 시도들 (2000~2002)
 


전국모임은 한라하청노조 건설 이후 99년 말 창원의 볼보건설기계코리아비정규직노조 건설을 지원했고, 2000년 10월에는 울산모임 회원들이 지역의 중소 조선사업장 INP중공업35)에서 사내하청노조를 건설했다. 그러나 업체폐업 등을 내세운 극심한 탄압에 밀려 모두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2000년 여름에는 거제도 대우조선소에서 부당해고를 당한 하청노동자 두 사람이 투쟁에 나섰다. 투쟁 주체들이 잇따라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해 활동이 어려워진 가운데 투쟁에 연대하던 정규직 현장조직이 노조 선거에서 당선되었으나, 이후 하청노동자들의 투쟁은 더 확대되거나 조직화로 이어지진 못했다.36)
 

2001년 광주에서 벌어진 두 개의 하청노조 건설 투쟁은 조금 다른 모습을 보였다. 당시 사회당과 전국노동자회 활동가들이 주도한 캐리어사내하청노동조합(이하 ‘캐리어하청노조’) 건설 투쟁은 이전의 사례들과 달리 노조 건설 전부터 정규직노조 집행부와 소통하며 협조를 받아 건설되었다. 광주에 자리 잡은 대우캐리어는 당시 정규직 조합원 800여 명과 하청노동자 650여 명이 일하고 있던 에어컨 제조업체였다. 대규모 사업장은 아니지만 캐리어노조는 지역에서 가장 건실하고 투쟁적인 노조로 평판이 높았다.
 

2001년 2월 18일 캐리어하청노조 활동가들은 정규직노조 간부들 및 대의원들과 함께 현장을 순회하며 하청노동자들로부터 가입원서를 받았다. “그 결과 노조설립 보고대회 3시간 만에 350명이, 일주일 만에 전체 하청노동자 650명 중 70%인 450명이 노조에 가입”했다.37) 그러나 하청노조가 예상외의 조직성과를 보이자 정규직노조는 점차 하청노조에 대한 경계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3월 9일 민주노총이 조직한 비정규직 전국순회 투쟁단이 캐리어 공장 진입을 시도하다가 정문을 크게 파손시키는 사건이 발생했다. 정규직노조 집행부는 이를 문제 삼아 하청노조에 연대 단절을 선언했다. 
 

4월 들어 하청노조가 전면파업에 들어가 생산을 중단시키고 사측이 공장이전계획과 매각설을 흘리며 고용불안 정서를 자극하자 정규직 조합원들의 하청노조에 대한 감정은 급속히 악화되었다. 정규직노조 집행부의 태도는 완전히 적대적으로 돌변했다. 급기야 2001년 메이데이 새벽 정규직 조합원들이 하청노조 농성장을 폭력 침탈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지역에서 가장 모범적인 민주노조로 꼽혔던 캐리어노조는 결국 민주노총에서 제명되었다. 캐리어하청노조는 현장에서 밀려나 공장 밖에서 농성 투쟁을 이어갔다.
 

7월 13일 캐리어하청노조가 석 달 전에 제기한 불법파견 진정의 결과로 캐리어 관리이사와 하청업체 대표가 법규 위반으로 구속되는 예상치 못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는 하청노동자 102명이 정규직으로 채용되는 성과로 이어졌다. 하지만 정작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조합원들은 정규직화에서 배제되는 등 하청노조가 확대되는 계기는 되지 못했다.38) 캐리어하청노조는 이후에도 2년 넘게 투쟁을 이어갔지만 결국 2004년 1월 4일 회사와 “10억 손배 취소, 정규직 입사 후 집행유예를 받아 해고된 4인의 복직, 끝까지 투쟁한 조합원에게 일부 위로급 지급”에 합의하고 투쟁을 마무리했다. 그러나 캐리어 투쟁은 하청노조 건설 초기에 정규직 운동질서의 지원이 중요하며 그러한 지원이 있을 때 하청노동자들의 대규모 조직화가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해준 사례로 받아들여졌다.
 

2001년 12월, 기아차 광주공장에서 하청노조가 건설되었다. 광주공장은 아시아자동차 시절 하청노동자 1,400여 명 전원을 해고했으나 기아차로 통합되고 물량이 늘어나면서 다시 비정규직을 투입하기 시작했다.39) 광주공장에서 하청노동자가 급속히 늘어나자 2000년경부터 지역 활동가들이 사내하청으로 현장에 취업하여 비밀리에 모임을 구성하고 노조 건설을 준비했다.
 

2001년 초, 같은 지역에서 벌어진 캐리어하청노조의 투쟁을 목도한 회사는 하청노조 건설을 사전에 봉쇄하기 위해 하청 활동가 2인을 적발하여 해고했다. 그리고 하청계약 기간을 1년에서 3개월로 변경하고 문제의 소지가 있는 업체들을 미리 계약해지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동안 비정규직 투입을 용인하며 하청 증가에 공헌해 온 정규직노조는 이런 상황에도 아무런 대응조치를 하지 않았다.40) 7월 캐리어에서 2년 이상 근무자들이 정규직화 되자 회사는 사내하청에 대한 대량해고 방침을 세웠고, 이를 접한 하청 활동가들은 노조 건설을 결의했다. 11월 말 회사는 7개 하청업체 소속 하청노동자 401명에게 계약해지를 통보한다. 12월 1일 민주노총 광주전남지역본부 사무실에서 기아자동차사내하청노동조합이 창립되었다.
 

하청노조는 설립 직후 정규직노조에 “사무실 공동사용, 하청노조 현장 순회 시 보호, 투쟁기금 지원, 하청 조직화” 등의 요구를 전달했다. 10월에 정규직노조 집행부가 현장파로 교체되었지만, 하청노조의 요구는 12월 7일 개최된 정규직 임시대의원대회에서 모두 부결되었다.41) 반면 회사는 정규직 조합원들의 고용불안 정서를 이용해 하청 해고는 정규직 고용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라고 선동하여 정규직노조의 연대를 봉쇄하는데 성공했다. 이런 상황에서 하청노조의 초기 조직화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12월 31일부로 하청노동자 401명은 전원 정리해고 되어 공장을 떠났다.
 

하지만 이것이 무리한 조치였다는 것은 곧 드러났다. 인원부족으로 조립라인이 중단되는 상황이 발생하면서 1월 3일 회사와 정규직 노조는 인력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하청을 더 늘리지 않는 대신 정규직을 50명 추가 채용하고 이중 절반을 정리해고자들로 충원할 것을 합의했다. 하청노조는 정리해고자 401명의 전원 복직 등을 요구하며 1월 9일 ‘기만적인 정리해고 규탄 및 고용보장을 위한 천막농성’에 돌입했다. 이는 지역연대 투쟁으로 확대되었다. 4월 12일 회사와 정규직노조는 남은 하청노동자 526명 가운데 130명을 정규직화하고 300명을 계약직으로 직접고용하며 남은 96명은 직접 생산라인에서 간접부서로 전환배치 하는 합의를 도출했다. 그러나 대신 6개월 계약직과 실습생 도입을 합의해 280명의 비정규직이 새로 충원되었다.
 

하청노조는 4.12 합의에서 정규직이나 계약직으로 전환되지 못한 하청노동자 96명의 고용보장과 해고 조합원 6인의 복직, 신규 투입된 비정규직에 대한 대책마련 등을 걸고 천막농성을 계속했다. 하청노조는 임단협 시기에 간부 2인이 무기한 단식농성에 들어가는 등 헌신적으로 투쟁했지만, 비정규직 관련 단협 합의에 대한 하청노조의 공개적인 비판, 불법사찰 문건 폭로시기에 대한 이견 등으로 정규직노조와 갈등을 빚었다. 하지만 하청노조가 불법파견 판정을 받아내고 비정규직에 대한 불법 사찰 문건42)을 폭로하면서 회사에 대한 여론은 악화되었으며, 8월 사내하청 문제 해결을 위해 회사·정규직노조·하청노조의 3자 대표자회의가 구성되었다.
 

11월 20일, 3자 회의를 통해 해고 조합원 2인을 직접 고용하고 남은 3인의 조합원에 대해서는 2004년 5월에 다시 논의한다는 합의에 도달하면서 하청노조는 1년 가까이 유지하던 천막농성을 마무리했다. 2004년 7월, 생산부문의 남은 계약직을 모두 정규직으로 전환시키기로 하는 노사 합의가 이루어졌고,43) 9월 해고자 2인의 정규직 채용이 합의되면서 기아차 광주공장에서 사내하청 문제는 사실상 종결되었다.44)
 

기아차광주사내하청노조의 투쟁은 상당수의 하청노동자들을 정규직이나 직접고용으로 전환시켜 공장 내 비정규직 확대를 크게 제한하는 성과를 거두었다.45) 그러나 하청노조가 대중적 기반을 잡는데 실패하면서 노숙농성, 단식농성 등 활동가들의 헌신적인 투쟁을 통해 정규직노조를 강제하는 역할 이상을 하지 못하며 비정규직 주체를 강화하는 데는 한계를 보였다. 그 결과 일부 정규직화 이후에도 광주공장에서 비정규직은 다양한 형태로 존속되었지만 하청노조는 더 이상 활동을 이어가지 못했다. 이는 향후 보다 대중적인 하청노조 투쟁이 전개되는 시기에 나타날 문제들을 선행해서 보여주는 것이었다.


<각주> -------------
 

32) 상용직·일용직·임시직은 통계청에서 사용하는 고용기간을 기준으로 한 고용분류로 상용직은 1년 이상, 임시직은 1년 미만 1개월 이상, 일용직은 1개월 미만의 고용관계를 가리키는 용어였다. 99년 4월 말 통계청에서 상용직이 처음으로 50% 이하로 떨어졌다고 발표하자 많은 언론들이 상용직을 정규직과 동일한 개념으로 인식하여 비정규직이 전체 임금노동자의 절반을 넘었다고 보도했다. (99년 6월 1일자 한겨레신문 기사 “정규직노동자 절반 이하로”) 이후 정부는 고용기간이 아니라 실제 근무 계속 가능성을 기준으로 독자적인 비정규직 통계를 도입하여 임시·일용직에서 상당부분을 비정규직 수치에서 덜어내 통계상 비정규직 수치를 크게 줄였다. 2016년 8월 현재 통계청은 비정규직노동자를 전체 임금노동자 1,963만 명 가운데 32.8%인 644만 명(32.8%)이라고 발표했다. 

33) 98년 노동법 개정을 통해 기존의 노사협의회법이 근로자참가제(‘근로자의 참여 및 협력증진에 대한 법률’)로 강화되었다. 이 법은 30이상 사업장에 노사협의회 설치를 의무화하고 협의권을 부여했는데, 대공장에서 고용안정위원회나 노사공동위원회의 같은 회의체의 구성 근거는 바로 이것에 근거하고 있다. 현대차 단협은 “신기술 도입, 신차종 개발, 작업공정 개선, 사업의 확장, 합병, 공장이전” 등의 사안을 노사공동위원회를 구성하여 심의 의결하도록 하고 있다. 

34) 맨아워(M/H) 협상은 노사공동위원회 같은 노사협의체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대표적인 협상이다. 맨아워(Man Hour)란 3년 이상의 숙련자가 한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작업분량을 뜻하는데, 자동차 산업에서 생산인력과 생산시간·임금수준을 결정하는 기준으로 사용된다. 때문에 “신기술 도입, 신차종 개발, 작업공정 개선, 사업의 확장, 합병, 공장이전” 등의 변화는 대부분 맨아워 협상을 수반한다. 노사공동위원회는 통상 공장·부서 단위로 구성되고 분기별로 열리는데, 최종합의는 노동조합 집행부가 참여한 가운데 이루어져야 하지만 실질적인 협상권은 공장·부서별 대의원회에서 선임된 대의원들이 갖고 있다. 

35) 생산직 노동자 300여명 전원이 사내하청으로 채워진 사업장이었다. 

36) 당시 외부적으로 정규직 운동에서 비정규직 투쟁에 연대한 모범사례로 널리 알려졌으나 노조 선거 국면에서 하청노동자들의 문제를 이슈화하는데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37) 기아자동차노동조합 광주지부, 「기아자동차 광주공장 비정규직 투쟁 평가 자료집」

38) 구속 사태가 벌어지자 캐리어 사측은 7월 18일 “2년 이상 근무한 74명을 정규직으로 채용하겠다”고 전격 발표했지만 하청노조와 대화는 전혀 없었다. 이후 한 달 정도 기간 동안 102명의 하청노동자들이 정규직으로 채용됐지만, 모두 2년 이상 근무자로 하청노조 투쟁에 적극 참여한 2년 미만 하청노동자들은 배제되었다. (조돈문, <비정규직 주체형성과 전략적 선택>, 매일노동뉴스)

39) 2001년 후반, 광주공장에는 18개 하청업체에 소속된 사내하청노동자 920여 명이 근무하고 있었다. “이들 하청노동자들은 2001년 기준으로 평균 기본금 56만원(시급 2,366원), 상여금 400%의 임금수준으로 잔업, 특근을 포함하여 월 평균 75만원을 넘어서지 못하는 저임금에 시달렸다. 이는 연봉을 기준으로 정규직 대비 약 3배가 차이나는 액수였다. 또한 평균 근속기간도 1년이 넘지 못할 정도로 이직률이 높았다.”(기아자동차노동조합 광주지부, 「기아자동차 광주공장 비정규직 투쟁 평가 자료집」)

40) 2000년 11월 광주공장에서는 비정규직 투입을 정규직 대비 15%로 상한선을 두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는 같은 해 7월 현대차의 16.9% ‘완전고용합의’처럼 비정규직 확산을 오히려 묵인하는 결과를 불러왔다. 비정규직 탄압에 대한 침묵에 비판이 일자 정규직노조 집행부는 캐리어 투쟁을 반면교사 삼아 무리한 비정규직 사업보다는 하청노동자에 대한 “처우개선투쟁”을 우선 전개해야한다고 주장했다. 

41) 이전 기아차노조 15대 집행부는 NL 성향의 현장조직 기노회(기아자동차노동자회)였고, 2001년 10월 1일 임기를 시작한 16대 집행부는 전국현장조직대표자회의 소속 현장추(이후 화성·소하리의 현장조직과 ‘현장의 힘’으로 통합)였다.

42) 회사는 2001년 2월 비정규직 조직화 원천 봉쇄를 위해 “비정규직 노조 설립 관련 관리 방안”이라는 문건을 작성했다. 문건에 따르면 회사는 각 용역업체에 프락치를 2명 씩 침투, 하청노동자들의 동향을 파악하고, 문제 인물을 퇴출시키는 등 노조 건설을 최대한 사전에 차단하고 하려고 했다. 이 문건은 5월에 입수되었으나 발표 시기를 놓고 임단협 중에 공개를 부담스러워 한 정규직노조와 갈등이 표출되었다. 이 문건은 임단협이 거의 마무리 단계에 이른 7월 22일 시민대책위를 통해 발표되었다. 

43) 2004년 7월 회사가 노조의 비정규직 관련별도 요구사항을 수용하면서 생산부문의 계약직에 대해서는 계약만료 시점에서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모두 정규직으로 전환하고 이후 계약직 채용을 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그 결과 1000여 명의 계약직이 정규직으로 전환되고 광주공장에서는 생산부문 계약직이 사라지게 되었다. 

44) 2004년 5월이 되자 처음에 회사는 약속과 달리 3인에 대한 복직협의를 거부했다. 그러나 하청노조가 다시 노숙, 천막농성, 단식농성 등 투쟁에 나서자, 결국 2004년 9월 24일 남은 해고 조합원 3인 중 2인을 정규직으로 채용하고 “사내하청 문제는 모두 종결된 것으로 한다”는 최종합의를 했다. 

45) 기아차 광주공장에서는 2004년 7월 회사가 노조의 비정규직 관련별도 요구사항을 수용하면서 생산부문의 계약직에 대해서는 계약만료 시점에서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모두 정규직으로 전환하고 이후 계약직 채용을 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그 결과 1000여 명의 계약직이 정규직으로 전환되고 광주공장에서는 생산부문 계약직이 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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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2 07:45 2017/05/12 0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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