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없음 2017/05/18 10:10

대공장 비정규직운동 20년, 평가와 전망 (4)

사용자 삽입 이미지

2003년 사측이 자행한 하청 활동가에 대한 잔혹한 폭행사건은 대공장비정규직노조 건설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이태영


1. 대공장 비정규직운동의 등장 (1996~2002년)
(1) 전국비정규직노동자모임의 결성 (1996~1997년)
(2) 한라중공업 하청노조 건설 (1999년)
(3) 전국모임과 한라하청 투쟁의 의미

2. 대공장 비정규직노조 운동의 본격적인 등장
(1) IMF와 구조조정 이후 금속 대공장의 상황
(2) 제조업 비정규직노조 건설을 위한 초기 시도들 (2000~2002)
(3) 대공장 비정규직 투쟁의 본격적인 등장과 확산 (2003~2005)
(4) 정규직운동질서의 방관과 독자노조 건설 


3. 비정규직노조의 안정화와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 (2004~2005)


------------------

⑶ 대공장 비정규직 투쟁의 본격적인 등장과 확산 (2003~2005)


대공장 하청업체 취업은 2000년대 초반까지도 비교적 용이한 편이었다. 한라하청을 비롯하여 INP중공업, 캐리어, 기아차 광주공장 등에서 건설된 하청노조들은 모두 현장에 취업한 활동가들이 주도하여 건설된 것이었다. 2000년대 초, 상당수의 활동가들이 주요 대공장에 하청노동자로 들어갔으며 이들은 대개 노동운동 기반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좌익 정파들에 소속된 젊은 활동가들이었다. 이들은 현대차 아산·울산공장, 기아차 화성공장과 현대중공업 등에서 하청활동가 모임을 만들었고, 이 모임들은 2003년 이후 대공장 비정규직노조 건설의 주체가 되었다.
 

대개 반(半)공개 모임으로 존재하고 있던 이 모임들은 현장조직 등 정규직 운동질서와 소통을 하고 있었지만 하청 조직화에 대한 정규직 운동질서의 반응은 대부분 미온적이었다. 정규직 운동질서의 싸늘한 반응과 주도적인 현장 활동이 힘든 상황에 처한 하청활동가들은 흔히 ‘뿌리 내리기’라고 불린 장기적이고 점진적인 조직화 사업으로 기울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하청 이직률이 매우 높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비공식적인 하청활동가들의 모임이 하청노동자들을 조직하기는 극히 어려웠다. 하청모임들의 활동은 답보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2003년이 되자 상황은 바뀌기 시작했다. IMF 경제위기 직후 집권한 김대중 정권은 ‘경제 살리기’를 내세워 갓 등장하고 있던 비정규직노동자들의 투쟁을 철저히 탄압했다. 2000년 6월 29일 롯데호텔 비정규직노조의 파업투쟁에 경찰 특공대를 투입한 사건은 요행으로 사상자가 없었을 뿐 자칫 큰 참사를 빚을 수도 있었던 무리한 진압이었다.46) 반면 비정규직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크게 높아진 상황에서 대통령에 당선된 노무현은 취임 전부터 비정규직의 눈물을 닦아 주겠다고 공언했고, 인수위 시절에 벌어진 두산중공업 배달호 열사투쟁에서 노사정 합의를 이끌어 내면서 집권 후 유화적인 노동정책을 펼칠 것을 예고했다. 민주노총 역시 2000·2001년 비정규직 투쟁 이후 비정규직실을 설치하고 실태조사에 나서는 등 산하조직에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고 본격적인 조직사업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런 와중에서 2003년 현대차 아산공장에서 벌어진 하청활동가에 대한 테러 사건은 잠복해 있던 대공장 하청노조 건설 운동이 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2003년 3월 19일, 현대자동차 아산공장 하청노동자모임의 송성훈 활동가가 월차 신청을 했다가 관리자에게 폭행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진단서를 끊기 위해 인근 병원에 간 송성훈 활동가를 관리자와 폭력배 2명이 병원까지 쫓아와 식칼로 두 다리의 아킬레스건을 자르는 테러를 자행했다. 사측의 만행은 하청노동자들의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다음 날 송성훈 활동가가 속한 업체 노동자들이 작업을 거부했고, 정규직 대의원의 연대로 아산공장 라인이 전면 중단되었다. 당황한 사측은 업체 폐업 시 고용승계, 정규직 신규채용 시 40% 하청에서 충원을 골자로 한 합의서를 작성했다. 하청모임 활동가들은 3월 28일 서둘러 노조를 설립했고 설립 두 달 만에 조합원 수는 300명을 넘어섰다.
 

이러한 분위기의 영향을 받아 2003년 4월 28일 현대차 울산공장에서는 하청노동자로 취업한 안기호 활동가가 “비정규직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살아보자!”라는 유인물을 현장에 배포했다.47) 나중에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인간선언>이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진 이 유인물은 하청노동자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4일 뒤인 5월 2일 현자노조 임단투 출정식에 하청노동자 100여 명이 참여하여 이 유인물에서 제기한 대로 현대자동차비정규직투쟁위원회(이하 ‘비투위’)를 결성했다. 억눌려 있던 하청노동자들의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비투위는 여러 곳에서 하청노동자들의 투쟁을 조직하고 부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비투위 활동가들은 정규직노조로 직접 가입을 원했지만, 노조와 현장조직 등 정규직 운동질서는 “조합원 정서”를 구실로 난색을 표했다. 결국 비투위는 조직 발전전망을 놓고 내부적으로 격론을 벌인 끝에 6월 27일 독자 노조건설을 결정하고, 7월 8일 비정규직노조를 설립했다. 비투위 시기에 2백 명이 채 안 됐던 숫자는 노조 설립 이틀 만에 500명으로 늘어났다.
 

8월에는 97년 외주노동자모임의 결성에서부터 하청활동가 모임이 오랫동안 유지되어 오던 현대중공업에서 마침내 하청노조가 건설되었다. 그러나 회사는 하청노조가 결성되자 즉시 공개 조합원이 소속된 업체들을 대부분 폐업하여 노조 확대의 싹을 잘랐다. 하지만 노조 건설 투쟁 이후에도 2인의 조합원이 현장에 남아 이후 활동의 여지를 남겼다. 기아차 화성공장에서도 2003년 4월 임단협을 앞두고 정규직 활동가들과 하청 활동가들이 현장투쟁단을 결성하여 하청노조 건설을 향한 첫걸음 떼었다.
 

2003년 11월에 건설된 금호타이어비정규직노조는 최초로 조합원들의 집단적인 불법파견 정규직화를 쟁취하여 제조업 비정규직 투쟁에서 또 하나의 기폭제가 되었다. 노조 설립과 함께 집단적으로 조합원들의 불법파견 진정을 제출한 금호타이어비정규직지회는 2004년 4월 28일 불법파견으로 판정된 조합원 282명을 정규직으로 전환시키는 데 성공했다.
 

금호타이어의 성과에 고무되어 금속노조가 주도한 불법파견 진정 캠페인은 하청노동자들의 열렬한 호응 속에 현대차 등에서 대규모 불법파견 판정을 받아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는 하청노조 건설 운동을 더욱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불법파견 판정을 받은 기존 하청노조들은 불파투쟁에 나섰고, 미조직 사업장에서는 새로운 하청노조들의 건설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흐름은 자동차·조선에 비해 하청 운동이 미약했던 반도체·철강 등 사내하청을 사용하는 제조업 전반으로 확산되었다. 2004년 10월에는 반도체공장인 하이닉스매그나칩에서 104명의 노동자들이 불법파견 판정을 받는 것을 계기로 사내하청지회가 건설되었다. 2005년 2월 23일 현대차 전주공장, 4월 10일 GM대우 창원공장, 6월 13일 철강사업장인 현대하이스코 순천공장에서 불법파견 진정캠페인과 불법파견 판정의 결과로 사내하청노동자들의 노조가 세워졌다.
 

이밖에 기아차 화성공장의 현장투쟁단도 2005년 6월 4일 비정규직지회로 전환했으며, 서울의 전자업체 기륭전자와 생산직 노동자가 전부 사내하청노동자로 구성된 기아차 모닝을 생산하는 충북 서산의 동희오토 공장에서도 하청노동자들의 노조가 건설되었다.
 

⑷ 정규직운동질서의 방관과 독자노조 건설
 

하청노동자들의 노조건설은 대부분 격렬한 투쟁의 양상을 띠었다. 자본은 노조가 건설되면 바로 주력 업체를 폐업시키는 등 강력한 탄압을 가했다. 정규직 운동질서는 대부분 이런 탄압들을 방조했다. 금호타이어와 GM대우 창원공장 등에서처럼 정규직노조가 하청노동자들을 조직한 경우도 있었다. 이런 사례들은 대개 좌파 성향의 정규직노조 집행부가 불법파견 진정 캠페인을 벌리는 과정에서 하청노조가 조직되었다.
 

하지만 하청노동자들의 노조 건설에 대해 정규직 운동질서의 반응은 대체로 냉담했다. 대공장 하청활동가들은 이전의 하청노조 건설 경험들을 통해 정규직 운동질서의 변화 없이 하청노조의 건설 전망이 어둡다는 데 누구나 동의하고 있었다. 그래서 대개 섣부른 노조 건설보다 한편으로 정규직 운동질서와 소통의 끈을 놓지 않는 가운데 다른 한편으로 ‘뿌리내리기’처럼 점진적으로 기반을 형성 해나가는 방향을 취했다.
 

하지만 아산 공장의 예에서처럼 시간이 흐를수록 활동가들이 사측에 노출되어 탄압의 표적이 되는 등 무작정 기다릴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오랫동안 하청활동가 모임이 존재하며 반공개적으로 활동해왔던 현대중공업의 경우에도 정규직 운동질서의 어용화가 심해지면서 노조 설립을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되었다.48) 특히 어용노조가 2003년 초 별다른 저항 없이 해고자들을 청산하며 장기집권의 가능성이 높아지자, 하청모임은 일부 활동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본격적으로 노조 건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49)
 

현대차 울산공장의 경우에도 하청활동가들의 현장기반이 미약한 상황에서 몇몇 활동가들이 비투위 투쟁으로 치고 나간데 대해 기존 하청활동가들의 태도는 엇갈렸다. 그러나 비투위가 기대 이상으로 대중적 호응을 얻자 비투위 초기에 참여를 주저하던 하청활동가들도 빠르게 합류하여 대다수의 공장에 모임이 형성되고 대표자가 선출되었다.
 

비투위 활동가들은 가장 우선적으로 정규직노조 직가입을 원했다. 아산과 달리 노조가 아니라 투쟁체를 먼저 건설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비투위는 독자적인 요구를 내걸지 않고 정규직노조가 임단협에 제시한 사내하청 처우개선 요구의 “100% 쟁취”를 핵심 요구로 내걸었다. 이 역시 독자적인 요구를 내세울 경우 정규직노조와 관계가 틀어질 수 있다는 우려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사측은 비투위 동력의 핵심인 5공장 하청업체들을 7월 11일 부로 계약해지를 하겠다고 위협했다. 위기에 몰린 비투위는 정규직노조에 집단 가입을 요청했으나 노조와 정규직 운동질서는 “조합원 정서”를 이유로 직가입 추진을 외면했다. 정규직운동질서의 이런 태도는 비투위에 긴급하게 조직발전 전망에 대한 논의를 불러일으켰다.
 

초기 비투위의 주요한 현장기반은 5공장과 1공장과 3공장이었다. 비투위 건설을 주도한 5공장과 다른 공장들은 각기 주도 활동가들의 정파가 달라 초기부터 서로에게 서로 불신감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불신은 고비마다 투쟁 방향에 대한 갈등으로 드러났고, 2008년 무렵까지 고질적인 문제로 꼽혔던 공장별 연방제적 운영의 한 원인이기도 했다. 조직발전 전망을 둘러싼 논쟁에서도 내부의 차이는 극명하게 드러났다.
 

탄압에 직면한 5공장 활동가들은 즉각적인 독자노조 건설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1공장 활동가들은 비투위 체제를 유지하며 계속 직가입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3공장에서는 5공장 계약해지가 확실시 되면 노조를 건설하되 그렇지 않을 경우 임단투 시기에 최대한 각 공장별로 원하청 공동투쟁을 만들어내며 노조를 건설하자는 입장을 제출했다. 1안과 2안은 명확히 대립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각기 기반하고 있는 공장에서 정규직 운동질서와 맺고 있는 관계에 따른 상황 판단의 차이가 있었을 뿐, 둘 다 정규직 질서와 직가입 가능성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6월 27일 열린 비투위 총회에서 투표 결과, 즉각적인 노조건설 안이 152표 중 105표를 획득했다.50) 이에 따라 비투위는 7월 8일 독자노조로 전환하여 <비정규직 인간선언>을 제안하고 비투위 대표를 지낸 5공장 하청노동자 안기호 활동가를 초대 위원장으로 선출했다. 독자노조 건설했던 반대했던 활동가들의 이탈에도 불구하고 새로 건설된 비정규직노조의 조합원은 이틀 만에 500명을 돌파할 정도로 빠르게 증가했다. 조직전환 논의의 단초가 되었던 5공장 계약해지 건도 정규직노조와 사측이 전환배치를 통한 고용보장을 합의하면서 최악의 사태는 일단 막아내는 형국이 되었다.
 

그러나 정규직노조는 비정규직노조 건설 직후 이를 직접적으로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여 비정규직노조의 확대 흐름에 찬물을 끼얹었다. 정규직노조는 “적정한 때”가 되면 비정규직노동자들을 직가입으로 대거 조직화할 계획이라고 밝히며 비투위의 “성급한” 독자노조 건설을 비판했지만, 이후에도 비정규직노조의 거듭된 직가입 요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단순히 비정규직노조의 확대를 막기 위한 여론플레이에 불과했다는 것을 역사를 통해 스스로 입증해 보였다. 독자노조 건설을 반대하며 비정규직노조에 가입하지 않았던 1공장 하청 활동가들도 다음 해 2월 정규직노조 대의원대회에서 직가입이 무산되자 결국 하청노조에 합류했다.
 

기아차 화성공장과 현대차 전주공장, GM대우 창원공장의 하청노동자들도 울산공장처럼 투쟁체 형태로 먼저 조직을 띄웠지만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기아차 화성공장에서도 현장투쟁단이 노조 설립 이전 정규직노조로 직가입 캠페인을 추진했었지만 정규직운동질서의 별다른 호응을 끌어내지 못했다. 정규직운동질서의 이러한 태도는 하청노조의 형태를 독자노조로 만든 가장 큰 원인이었다. 금호타이어, 현대차 전주공장, GM대우 창원공장처럼 정규직노조의 적극적 지원 속에 불법파견 진정 캠페인을 펼친 사업장에서도 당장 기존 노조로 가입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하청노동자들의 호응을 담아내기 위해 독자적인 비정규직노조를 건설할 수밖에 없었다.


각주> ---------------

 

46) 당시 경찰특공대는 고층인 36층과 37층에 모여 있는 조합원들을 연행하기 위해 장애인과 임산부가 포함되어 있는 농성대오에 연막탄을 쏘며 진입해 강제 진압했다. 

47) 안기호 활동가는 90년대 초반 울산 효성금속 위원장을 역임하고 해고된 중견 활동가였다. 

48) 현중하청모임은 2001년 1월부터 정규직노조 노보 한 면을 할당받아 하청 문제를 다루는 내용을 싣고, 이를 통해 비정규직노동자를 조직화 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계획은 2002년 6월 비리문제로 정규직노조 집행부가 중도 사퇴하고 보궐 선거로 당선된 어용 집행부가 하청모임과 연대 단절을 결정하면서 벽에 부딪쳤다.

49) 보궐선거를 통해 당선된 어용 최윤석 집행부는 11월 8일 조합원 총회를 통해 ‘해고자 문제 정리 합의서’를 59%의 찬성으로 가결시켰다. 해고자 13명 가운데 오종쇄 등 4명을 복직시키고 김대환, 이갑용, 조돈희 등 나머지 9명은 3년분 임금을 받고 현대중공업과의 관계를 완전 ‘정리’한다는 내용이었다. 매년 해고자 문제 때문에 임단협 협상이 늦어져 조합원들이 불만이 크다는 이유였다. 이 합의서는 “불복하는 해고자에 대해 노조는 생계비를 지급할 수 없으며 추후 회사에 어떤 요구도 거론하지 않는다”고 명문화해 재론의 여지마저 봉쇄했다. 투쟁과정에서 해고된 조합원들의 복직투쟁을 포기한다는 것은 결국 현대중공업에서 민주노조 운동이 사망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최윤석 집행부 이후 현대중공업은 12년 동안 어용노조가 장악했다. 

50) 노조건투 시기 이후 울산공장 비정규직노조의 조합원 수는 700여 명까지 늘어났지만, 실제로 조합비를 내는 진성 조합원은 2~300명 선에 머물렀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7/05/18 10:10 2017/05/18 10:10

트랙백

http://blog.jinbo.net/redletters/trackback/47

댓글

1 2 3 4 5 ... 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