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없음 2017/06/02 07:34

대공장 비정규직운동 20년, 평가와 전망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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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금속노조 현대차지부의 현판식 당시 정갑득 금속노조 위원장과 이상욱 현대자동차지부 지부장. 두 사람 모두 현대차노조 위원장을 두 번씩 역임한 실리파와 현장파를 대표하는 인물들이었지만 하청노조 운동에 대한 태도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1. 대공장 비정규직운동의 등장 (1996~2002년)
 
2. 대공장 비정규직노조 운동의 본격적인 등장
 

3. 비정규직노조의 안정화와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 (2004~2005)
 

4. 정규직 운동질서의 반동화와 비정규직노조
(1) 정규직 운동질서의 반동화
(2) 3자 협의체로 변질된 원하청 공동투쟁

 

5. 하청노동자들의 처우개선과 비정규직조합주의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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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정규직 운동질서의 반동화와 비정규직노조



노조 건투와 불법파견 투쟁을 거치면서 많은 비정규직노조들이 현장에 조합원들이 없는 식물노조로 전락했다. 이 속에서 대공장 비정규직 운동은 2006년 이후 수 년 동안 현장 조합원들이 일정정도 이상의 규모로 존재하는 기아차 화성공장과 현대차 울산·전주·아산 공장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는 대공장 하청노조 운동이 완성차 공장 중에서도 현대차 자본을 대상으로 전개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대공장 비정규직 노조건설 투쟁의 출발점이자 하청노동자의 비중이 가장 높은 조선 산업에서 비정규직노조를 조직하려는 시도들은 거의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2000년대 들어서자 조선소에는 어용노조가 속속 들어섰다. 다른 제조업들보다는 건설업에 가까운 개별적인 작업방식과 비정규직의 높은 비중은 실리주의·협조주의 의식이 더 쉽게 침투될 수 있는 여지를 주었을 가능성이 높다. 어용이 장악한 열악한 현장 상황에 불법파견 진정 캠페인에서도 배제되며 조선 산업에서는 오랫동안 새로운 하청노조 건설 시도가 등장하지 않았다. 현중하청노조의 경우에도 2003년 8월 노조건설 투쟁 이후 소지공 투쟁과 박일수 열사 투쟁이 있었지만 조직 확대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2006년 단협체결 투쟁을 마지막으로 현중하청노조는 더 이상 현장 사업을 전개하지 못하고 최근까지 간부들의 공장 밖 활동으로 명맥을 유지했다.
 

운동질서가 상대적으로 약한 편인 철강과 반도체에서도 상황은 비슷했다. 한국노총 소속인 하이닉스매그나칩 정규직노조는 사측에 협조하여 현장에 어용 하청노조를 건설했다. 비정규직지회와 비슷한 시기에 건설된 현대하이스코 정규직노조는 비정규직지회의 투쟁에 대해 전혀 연대투쟁을 하지 않았다. 같은 자동차사업장이지만 2007년 GM대우 부평공장의 비정규직지회도 정규직노조의 엄호와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한 채 현장 밖으로 밀려났다.
 

현대차 3사와 기아차의 경우, 좌파 현장조직의 활동가들은 하청노조에 대해 표면적으로나마 비교적 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정규직노조가 가진 강한 교섭력과 특유의 중층적인 교섭구조에 기인한 중재능력은 하청노동자들에게 때로 최소한의 방어막으로 기능했다. 하지만 현대·기아차에서 강한 교섭력을 가진 정규직운동질서의 존재는 비정규직노조의 성장에 양날의 칼로 작용했다.
 

⑴ 정규직 운동질서의 반동화
 

한라하청노조에서 캐리어하청노조에 이르기까지 정규직운동질서와 하청노동자들의 갈등은 지속적으로 발생해왔다. 구조조정 시기 고용에 대한 불안감은 대공장 정규직 조합원들을 위축시켰으며 공장 내 비정규직 동지들을 투쟁의 동지라기보다 고용의 보호막으로 보는 경향을 강화시켰다.
 

2000년대 초만 해도 해도 금호타이어, 현대차 전주공장, GM대우 창원 공장 등에서 정규직노조가 하청노동자들을 조직하는 사례가 존재했다. 그러나 이런 사례들은 예외적인 경우였다.
 

구조조정 투쟁 이후 금속대공장 현장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갈수록 보수화되고 있었다. 전투적 대공장 활동가들의 구심 역할을 하던 전국현장조직대표자회의는 2002년 무렵 사실상 해체되었다. 민주노총 소속의 조선사업장에는 경우 대부분 어용노조가 들어섰다. 대공장의 임단협 투쟁은 점차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것으로 변질되었다. 그 마저도 많은 경우 무쟁의로 들어섰다. 노동운동 활동가들은 이러한 정규직 조합원들의 보수화를 우려했지만 대개 구조조정의 패배가 불러온 고용불안 정서에 의한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믿었다. 예를 들어 당시에 작성된 어느 비합법 사회주의 조직의 문서는 정규직 조합원들의 보수화는 “미래의 고용에 대한 불안감”에 기한 것이며 아직 물질적인 개량의 여지는 충분치 않다고 주장했다.56) 하지만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대공장 정규직 조합원들의 정서가 갈수록 보수화·원자화되고 있는 것은 누구의 눈에도 분명한 사실이었다.
 

비정규직 운동을 고민하는 전투적 현장주의자들 사이에서 하청투쟁을 통해 정규직 운동질서를 혁신해야 한다는 생각이 나타나기도 했다. 2003년 대공장 비정규직노조 건설투쟁이 본격화되기 직전에 나온 「비정규직운동을 넘어 계급투쟁으로, 대공장운동의 혁명적 전진으로 - 남한 비정규직운동에 대한 평가와 전망」라는 문서는 대공장에 비정규직 투쟁을 도입함을 통해 해체되고 있는 선진노동자 운동을 재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57) 이 글은 대공장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공통의 이해는 적어도 노동조합 차원에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전제한다. 따라서 대공장에서 비정규직 투쟁이 벌어질 때 이에 연대하는 정규직 조합원들은 실천적으로 가장 계급적인 의식을 가진 부위일 것이며, 하청노조 건설을 통해 이들을 결집하고 대공장에 새로운 계급적 기지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58)
 

그러나 현실에서 등장한 하청노동자들의 투쟁은 대공장에서 자본과 정규직운동질서의 적대적 공생관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냈을 뿐, 노조 차원은 고사하고 현장조직 같은 활동가 조직 차원에서도 비정규직노조에 대한 연대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청노조 건설이 추진된 대공장들에서 형식적인 연대를 넘어 그 투쟁에 계급적으로 연대하는 활동가들의 수는 그야말로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현대중공업에서, 현대차에서, 기아차에서 이른바 가장 전투적이라는 정규직 활동가들조차 대부분 하청노조의 투쟁을 회피했다. 따라서 하청 투쟁을 통해 정규직 운동질서를 혁신하겠다는 전략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대공장에서 비정규직 투쟁들은 정규직운동질서의 탈계급화가 얼마나 깊이 진행되어 있는지 확인사살 하는 역할을 했다.
 

구조조정 이후 최근에 이르기까지 대공장노조의 정규직 조합원들에 대한 포섭은 미래의 고용보장을 기제로 한 포섭을 넘어 회사와 실질적으로 이윤을 나누는 형태로 발전했다. 2000년대 들어 한국의 주요한 수출제조업인 조선·자동차·철강·전자 산업은 초국적 독과점체제의 최상층부에 편입되었고, 지난 15년 동안 이들 산업에서 대공장 정규직 조합원들의 임금은 2배 가까이 올랐다. 현대차와 기아차 정규직 조합원들은 수년 전 평균연봉 1억을 넘었으며 다른 주요제조업의 정규직도 그에 버금가는 상당한 임금 수준에 올랐다. 비록 장시간 노동에 기초한 것이긴 했지만 2000년대 이후 전반적인 저임금·불안정 노동의 확대에 이러한 고임금은 제조업 정규직노동자들에게 중산층적인 생활양식과 의식을 확산시키는 기제로 작용했다. 이것은 한편으로 성과급과 잔업·특근 수당이 총임금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기형적인 임금체계에 의한 것이었지만,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임금은 기형적 임금체계와 그에 기초한 장시간 노동에 대한 문제의식을 차단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성과급과 우리사주 등 회사의 이윤과 연동된 임금구조는 정규직 조합원들의 이해와 회사의 이해를 밀착되게 만들었다.
 

이러한 고임금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제조업은 전반적으로 자동화와 탈숙련화의 길로 넘어갔다. 한국의 제조업은 국제적으로도 자동화의 첨병이었으며, 자동차 산업의 경우는 특히 더 그러했다. 자동화로 인한 숙련의 해체는 동시에 제조업에서 비정규직을 대규모로 고용할 수 있는 기술적 토대가 되었다. 대부분의 제조업 현장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숙련의 차이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정규직 조합원의 고용을 지켜주는 것은 오직 회사의 호황과 노사 간의 협약뿐이었다. 그리고 이 협약은 비정규직에 대한 희생 요구 위에서 이루어졌다. 자동차산업에서 자본은 정규직 조합원들을 고임금으로 길들이는 한편, 소위 “단가 후려치기”를 통해 하청 및 부품사 노동자들의 저임금을 강제하여 가격경쟁력을 제고했다. 정규직노조는 대개 이러한 회사의 정책에 협조했으며, 대공장의 정규직노조들은 원청 자본에 대해 산업 전체 노동자들의 노사관계를 조정하는 브로커 역할을 맡으며 이른바 “담합적 노사관계”의 한 축을 담당했다.
 

이 속에서 정규직 조합원들은 사실상 비정규직노동자들에 대한 관리자 역할을 맡기 시작했다. 완성차 공장의 맨아워 협상은 사실상 정규직노조 대의원들이 조합원들의 해고를 방어하기 위해 하청노동자들의 투입과 해고를 결정하는 체계였다. 생산직 전원이 비정규직인 현대모비스에서는 실제로 현대자동차에서 파견된 정규직 조합원들이 관리자 역할을 하고 있다. 조선소에서 정규직 조합원들은 사실상 하청노동자들에 대한 관리·감독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성과급에 연동된 고임금과 주식보유자로서 정체성은 정규직 조합원들 사이에 자산보유계층과 유사한 개인주의 정서를 확산시켰으며, 연대성이 핵심인 계급의식은 사라졌다.
 

이런 상황에서 2000년대 중반에 건설된 대공장 하청노조들은 매우 적대적인 환경에 있는 자신들을 발견했다. 노조 같은 공식적 차원이든 현장조직 같은 비공식 차원이든 정규직 운동질서로부터 아무런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절실히 통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청노조 건설 초기에 나타난 정규직 운동질서의 방관적인 태도는 하청노동자들의 투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될수록 아예 노골적인 적대로 바뀌어 갔다.
 

2004년 2월 16일 현대중공업에서 하청노동자 박일수 열사가 분신 자결했다. 하청노조 조합원 3인이 지프크레인을 점거하고 고공농성을 시도했으나 수 시간 만에 경비대에 의해 폭력적으로 끌려 내려왔다. 정규직노조 어용 집행부는 열사 대책위 참여를 거부하고 오히려 하청노조의 투쟁을 탄압했다. 2월 25일 어용 대의원 100여 명이 열사의 시신이 있는 병원에 쳐들어와서 행패를 벌이는 만행을 저질렀다.59) 이후 민주노총은 결국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상징이었던 현대중공업노조를 제명했으나, 현대중공업에서 어용의 집권은 2013년까지 계속되었다. 하청노조는 열사투쟁 직후 소지공 투쟁을, 2006년 토요일 무급방침 때문에 나타난 대중적 불만을 바탕으로 단협체결 투쟁 등을 벌이며 대중적 조직화를 꾀했지만 고립 속에서 사측의 극심한 탄압에 의해 패배했다.
 

GM대우 창원공장은 김학철 집행부가 사퇴한 이후 어려움을 겪던 비정규직지회가 2006년 3월 고공농성에 들어갔지만, 새로 들어선 정규직 집행부는 비정규직 투쟁에 대해 연대중단을 선언했다.
 

이런 행태들은 이른바 ‘어용’ 세력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2005년 9월 4일 공장 앞 골목 비정규직노동조합 사무실 건물 옥상에서 비정규직 해고자인 류기혁 조합원이 목을 매 자결했다. 소위 ‘현장파’로 분류되는 현장조직 민투위 출신 이상욱 집행부는 다음 날 꾸려진 대책위 회의에서 류기혁 조합원을 열사로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60) 정규직노조와 비정규직노조가 소모적인 열사논란을 벌이는 사이 사측의 회유에 넘어간 유족들은 시신을 화장했다. 이상욱 집행부는 불법파견 문제에 아무 진전이 없는데도 임단협 종결을 선언했고, 혼란 속에서 열사투쟁은 흐지부지되었다. 이상욱은 당시 좌파 정치조직 <노동자의 힘> 회원이었으나 소속 조직은 이런 행보에 대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민투위는 많은 비판을 받았으나 현재까지 이에 대한 공식적인 평가나 사과를 제출한 적이 없다. 적어도 하청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해서는 어용 및 노사협조주의 세력과 좌파나 전투파가 별반 구별이 되지 않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반동화 된 공장의 운동질서를 조직력이 취약한 하청노조의 힘으로 뚫고 나가기는 극히 어려웠다.
 

⑵ 3자 협의체로 변질된 원하청 공동투쟁
 

이런 금속대공장 정규직 운동의 상황에서 초기 하청활동가들이 제기했던 계급의식적인 원하청 공동투쟁61)이 현실화 되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예를 들어 기아차 화성공장의 “현장공투”는 원하청연대의 모범적 사례로 꼽혔으나, 이 역시 고비마다 한계를 드러내며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오히려 원하청 공동투쟁이라는 구호는 하청노조 투쟁에 대한 정규직노조의 개입과 통제, 관리에 악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2005년 불파투쟁 과정에서 등장한 원하청 연대회의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2005년 1월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에서 불법파견 정규직화 농성투쟁이 시작되었지만 정규직노조 집행부의 지원과 연대는 거의 없었다. 1월 24일 현자비정규직노조 한 조합원이 정규직노조 화장실에서 분신을 시도하자 정규직노조는 비정규직노조에 비로소 원하청연대회의를 제기했다. 그러나 이 기구는 사실 ‘원하청연대’라는 말이 무색한 통제기제에 불과했다.
 

정규직노조는 원하청연대회의에서 “공동합의, 공동투쟁, 공동결정”이라는 3원칙을 내세웠다. 이는 정규직노조의 허락 없이 비정규직노조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원하청 공동투쟁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비정규직노조의 독자적인 투쟁을 가로막고 사측과 중재하는 브로커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비정규직노조 내부에서 제안을 놓고 논쟁이 벌어졌지만 당장 정규직노조의 연대가 아쉬운 처지에서 원하청연대회의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원하청연대회의는 본사와 노동부 항의 방문 등 사회여론화 활동에 치중하며 공동투쟁 기관으로서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흔히 원하청연대회의의 성과라고 이야기되는 2005년 6월의 비정규직노조 집단가입 캠페인도 알려진 것과 달리 노조차원에서가 아니라 공장별 대의원회와 비정규직노조가 추진한 것이었다. 정규직노조 집행부는 비정규직노조의 조직화 사업이 원하청연대회의 결정에 어긋난다며 반대했다. 불파교섭의 성과가 없음에도 임단협을 일방적으로 마무리 지은 이상욱 집행부는 비정규직노조의 독자파업 시도가 “3원칙”에 대한 위반이라며 비정규직노조에 오히려 사과를 요구했다.
 

2005년 9월 기아 화성공장에서도 비정규직노조의 독자적인 파업투쟁에 대해 정규직 노조는 원하청 연대회의를 통해 현대차노조가 제기한 것과 동일한 3원칙을 내세워 통제에 나섰다. 9월 28일 구사대 침탈을 자발적인 원하청 공동투쟁으로 격퇴하고 비정규직 투쟁이 다시 상승세를 타기 시작하자 정규직노조 집행부는 긴급대의원 대회를 열어 정규직 연대 대오를 해산시켜버렸다. 뿐만 아니라 비정규직지회의 투쟁을 중단시키기 위해 조합원 총회를 소집하여 쟁의행위 찬반을 묻는 총투표를 추진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청노조와 전투적 활동가들은 총회 개최를 반대했지만 정규직노조는 총회를 강행했다. 집행부는 비정규직노조의 독자 파업을 비난하며 부결을 유도했고, 그 결과 10월 7일 총회와 함께 진행된 ‘노동탄압 분쇄와 원하청 공동투쟁 승리를 위한 쟁의행위 찬반투표’는 투표 대비 39.75%의 찬성률로 부결되었다.
 

정규직노조는 원하청연대회의를 통해 비정규직지회의 파업 계획을 원하청 공동문화제로 바꾸게 하는 등 투쟁을 통제하면서 사측과 교섭을 중재했다. 그러나 교섭은 진전이 없었고, 오히려 10월 20일 비정규직지회의 핵심기반이었던 신성물류에 대한 계약해지가 예고되고, 다른 6개 업체에 대해서도 계약해지 위협이 확대되면서 조합원들의 탈퇴가 시작되었다. 10월 25일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하청 활동가들과 정규직 활동가들이 기습적인 라인 점거투쟁을 벌인 것에 대해 정규직노조는 3원칙을 위배한 지회의 독자적인 투쟁은 책임지지 못한다고 압박했다. 이미 조직력이 많이 해체된 비정규직노조는 결국 정규직노조의 중재를 받아들여 하청업체와 집단교섭을 체결했다. 대공장 비정규직노조들 중 최초의 단체협상 체결이라는 성과를 남기긴 했지만, 원청을 끌어내지 못한 것은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2·3차 노동자들이 단협에서 배제되고 외주화를 허용하는 등 한계를 남기는 결과였다.
 

대공장 비정규직 투쟁에서 정규직 운동질서의 중재로 교섭이 성사되는 사례는 초기부터 흔히 나타나는 사례였으며, 노동3권의 보장을 받지 못하는 비정규직노동자들의 취약한 상황 때문에 어느 정도 불가피한 면이 있었다. 그러나 원하청연대회의를 시초로 하는 3자 협의체들은 공히 예의 “3원칙”을 내세우며 노골적으로 하청노동자들의 투쟁을 자신들의 통제 하에 종속시키려 했다. 이런 3자 협의체에 비정규직노조는 참여할 수밖에 없었지만 원하청연대회의는 비정규직지회의 무능력과 정규직운동질서에 대한 의존성을 키우는 것으로 결과했다. 정규직운동질서의 방해로 조합원이 늘거나 강화되지도 않았고 하청노동자들로 하여금 정규직 조합주의에 의존하게 하는 역할을 했다.

<각주> ----


56) 「주5일제와 혁명적 노동계급의 투쟁방향」, <노동자권력을 향한 전진> 제 1호 (2002.11.)

57) 90년대 후반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대공장의 현장조직 운동은 구조조정 분쇄 투쟁의 패배 이후 빠르게 변질되기 시작했다. 본래 어용에 맞서는 민주파 활동가들의 결집체라는 모호한 성격을 갖고 있던 현장조직은 구조조정 분쇄 투쟁을 겪으며 급속히 분화하기 시작했다. 전국현장조직대표자회의에서도 경향 상 차이 때문에 회의 자체가 공전되고 아무 결정도 내리지 못하는 일이 점차 잦아졌다. 누구의 눈에도 분화와 재결집은 불가피한 것으로 보였으며, 때문에 2000년 무렵 각 정파별로 전국현장조직대표자회의와 현장조직에 대한 다양한 재편론이 제출되고 있었다. 

58) <노동자권력을 향한 전진> 제2호 (2003. 5)

59) 이를 시작으로 54일간 열사투쟁 기간 동안 7차례나 폭력 침탈을 자행했으며 열사 대책위의 교섭도 방해했다. 하지만 대책위는 투쟁이 장기화 되자 현대중공업노조를 대책위에 참여시켜 교섭 타결을 꾀했다. 당사자인 하청노조는 정규직노조의 대책위 참여에 반대하다가 오히려 대책위에서 배제되었다. 대책위는 4월 7일, 현장에서 투쟁을 조직하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하청노조의 호소에도 합의를 하고 열사투쟁을 끝냈다. 

60) 현대차 노조는 고인의 해고사유가 근태문제이며, 부당해고에 맞선 복직 의사가 있었는지 파악되지 않고 유서가 없다는 점 등을 이유로 들었다. (참세상, 「정권과 자본에 향할 분노의 정방향을 막는 것은 누구인가」, 2005. 9. 13.)

61) 하청활동가들이 제기했던 원하청 공동투쟁은 정규직이 우월한 위치에서 베푸는 시혜적안 지원과 연대가 아니라 같은 계급, 같은 노동자로서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함께 투쟁하는 것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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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02 07:34 2017/06/02 0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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