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없음 2017/04/12 10:37

[쟁점] 기본 소득 : 진보의 꿈이 신자유주의의 현실을 충족시키다

존 클라크 | 유월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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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인 존 클라크는 온타리오 반빈곤 연합(Ontario Coalition Against Poverty, OCAP)에서 오랫동안 빈곤퇴치 운동을 해온 활동가이다. 


지금까지 기본소득 개념의 역사를 보면 제안은 많이 됐지만 현실화되는 것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이제 변화의 시기에 다가서고 있다. 온타리오 주정부는 기본소득 시범사업을 협의 중이다. 캐나다의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 주의회는 기본소득을 시험해보기로 합의했다. 핀란드, 네덜란드, 스코틀랜드에서도 시범사업이 임박했다.

 

제안되고 있는 기본소득의 형태들은 그 폭이 매우 넓으며, 보통 서로 완전히 다른 목적을 염두에 두고 있다. 실제로도, 삶을 개선하고 생활수준을 높이는 데 관심이 있는 모델들과 자본주의의 착취 능력을 강화하는 데 초점을 맞춘 모델들을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진보적’ 범주에 속하는 모델들 사이에도 상당한 차이가 있다. 모든 사람에게 소득을 제공하는 ‘보편적 보조금‘이 있고, 어느 정도의 자산수입조사를 수반하는 ‘네거티브 소득세‘ 개념도 있다. 재분배를 지향하는 자유주의 진영에서 나온 기본소득 제안들은 빈곤과 불평등을 줄이며, 관료주의의 침투를 완화하고자 한다. 위의 온타리오 시범사업 제안은 여기에 속한다. 더욱 급진적이고 개혁적인 목표를 염두에 둔 모델들도 있다. 이 모델들은 기본소득을 통해 일과 소득 사이의 연관성을 끊고 고용주들이 가진 경제적 강제력을 빼앗을 수 있다고 말한다. 보통 이러한 아이디어는 아무 조건 없이 안정적이고 적절한 소득을 제공함으로써 급격한 기술변화 및 ‘노동 없는 미래’를 준비한다는 생각과 연결되어 있다. 이 사회에서 여성이 광범위한 무급노동을 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페미니스트들의 논의가 있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진보적 기본소득 개념들의 공통점은 그 제도가 얼마나 훌륭한지를 설명하는 데 큰 관심을 기울이는데 비해 구체적인 실현 가능성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보적 기본소득 개념들의 결점들을 더 살펴보고 대안적인 방식을 제시하기 전에, 우리 모두의 머리 위에 매달린 칼과 같은 기본소득의 신자유주의 버전을 더 진지하게 고찰해보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

 

신자유주의 버전
 

찰스 머레이의 매우 반동적 아이디어는 기본소득에 대한 매우 불길한 제안으로 확장되었다. 그의 기본소득 제도는 두 가지 기본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의무적으로 민간 의료보험에 가입해야 하는 대신 연 1만 달러라는 대단찮은 금액이 보편적으로 지급된다. 둘째, 그는 기본소득이 시행되면 다른 모든 복지성 급여제도가 해체돼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캐나다의 우익 기관인 프레이저 연구소(Fraser Institute)는 최근 블로그를 통해 복지성 급여의 수준이 저임금 노동력의 공급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면서 머레이와 동일한 지점을 강조했다.


신자유주의 의제를 강화하는 오늘날의 정부들이 기본소득의 가능성을 고려하기 시작했다면, 나는 여기에 세 가지 요인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첫째, 정당성이라는 결코 사소하지 않은 문제가 있다. 특히 기본소득은 ‘진보적‘으로 보이는 포장에 싸여 제공되기 때문에, 기본소득에 대한 생각들을 곧 공통선의 양을 재는 것으로 제시할 수 있다. 이 점에 있어서 온타리오 자유당은 국제적으로 가장 눈에 띈다. 이 당이 사람들을 더 심한 빈곤으로 내모는 동안 기본소득 시범사업 협의는 “보다 나은 방법”이라는 헛된 약속으로 관심을 돌리게 하는 거짓 논의를 시행할 수 있게 했다 세계은행과 IMF는 긴축 정책과 그 충격에 대한 반발에 대해 크게 우려하고 있다. 이 점에서 IMF의 경제학자들이 기본소득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건 의미심장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의제를 발전시키면서도 진보적인 모습으로 포장할 수 있다. ‘빈곤 감소’라는 신화 이래 세계 자본주의 정책에 있어 가장 좋은 방법 일 수 있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설계자들이 관심을 두는 것으로 생각되는 기본소득의 두 번째 요소는 가장 불안정한 고용 형태를 기반으로 더욱 탄력적인 노동력을 창출하면서 경제적 압력을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빈곤법의 전통에서 나온 소득지원제도는 엄격한 규제와 도덕적인 통제를 강조했다. 끔찍한 수준의 부작용과 함께, 이는 전례 없는 규모로 사람들을 저임금 노동으로 몰아넣는 데 매우 유용했다. 이에 대해 다시 깊이 생각할 때다. 불안정한 고용시장에서 사람들이 빈약한 임금과 빈약한 복지 사이를 오락가락 하는 경우가 더 잦아질수록, 보다 얌전한 복지제도는 그들을 가장 나쁜 일자리로 더욱 효과적으로 밀어낼 수 있을 것이다. 주택을 유지할 수 있을만한 빈약한 소득을 제공하는 사소한 법률 하나가 사람들이 항시 일자리를 찾아 나서게 하는데 필요한 것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일종의 추가 임금(wage top up)으로 주어질 기본소득이 고용주들에게 굉장한 지원이 되는 것은 당연히 이 점과 연결되어 있다. 지급액이 빈약하다면 저임금 노동자의 공급은 줄어들지 않겠지만, 이는 고용주들에게 생활임금을 지급하거나 임금을 올려줘야 할 의무를 면해주는 보조금으로 기능할 것이다.
 

셋째, 신자유주의적 기본소득의 가장 큰 장점은, 불충분하며 점점 줄어드는 화폐지급을 받는 이 사람들을 시장 고객으로 전환시킨다는 점이다. 내 생각에 기본소득은 언제나 사회기반시설을 강화하는 최선의 방법은 결코 되지 못할 것이지만, 긴축과 민영화 의제를 강화한다는 맥락에서 재앙적인 처방이다. 이는 사회복지의 상품화에 관한 것이다. 기본소득 지급에 정말 조건이 붙지 않고 그 액수가 꽤 클 수도 있지만, 불충분한 수단과 아주 적은 권리를 가지고 민영화된 옛 사회기반시설에서 상품을 구입해야 한다면 훨씬 더 가난해질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기본소득의 진보적 지지자들이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과 대조적으로 실제로 기본소득 제도와 그 희망을 실현할 사람들이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진보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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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 말했듯이, 대개 기본소득의 재분배 혹은 개혁적 모델들의 제안은 그 실현가능성에 대해 관심을 덜 두는 반면, 호감을 키우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으로 나타났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진보적인 기본소득의 길에서 무엇을 마주하게 될 것인지,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진지한  판단을 본 적이 없다. 어떤 특정한 기본소득 모델이 채택된다면 그것이 얼마나 정의롭고 공정할 것인지에 대해 설명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기본소득을 신뢰할 수 있는 해법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몇 가지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한다.


첫째, 고용주들은 그들의 협상력을 끌어올릴 수 있는 노동자 과잉공급을 반가워하지만 실업문제에 대한 총체적 방기는 사회불안을 가져오기 때문에 소득지원제도가 생겨났다. 고용주들의 마지못한 양보로 제공되었지만, 소득지원 정책들의 필요성은 입증되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시행되어온 복지성 급여제도는 항상 고용주의 힘이 약화되는 걸 최소화하도록 가능한 한 불충분하게 만들어졌다. 폭넓게 제공되는, 혹은 심지어 보편적이고 적당한 화폐지급은 그 균형을 다른 편으로 크게 기울일 것이다. 이것이 실현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둘째, 전후 지난 수십 년 동안 얻어낸 양보가 철회되었다. 노동조합은 약해졌고 노동자의 권리가 침해되었으며 저임금 노동이 크게 증가했다. 소득지원제도의 약화는 상황이 이렇게 되도록 필요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실업자를 위한 혜택뿐만 아니라 다른 제도도, 특히 장애인을 위한 제도들이 악화되어 가장 나쁜 일자리를 위해 서로 경쟁하게 만들었다. 이는 사회에서 힘의 균형을 바꾸었고, 우리는 대대적인 방어적 투쟁을 하게 되었다. 노동조합과 운동이 우위에 있지 않은 매우 불리한 현 상황을 감안할 때, 현 상황에서 이득을 얻는 자들이 전후 경제호황 시대에 시행된 것만큼이나 전면적인 재분배 사회개혁 제도를 수용할 것이라고 어떻게 가정할 수 있나? 이것을 실현할 계획은 과연 무엇인가?


셋째, 가장 반동적인 사업 이익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우파 정부와 정당들이 기본소득을 고려하고 있으며, 사회복지 혜택을 받는 사람들이 저임금 노동자가 되도록 하는 방식에 중점을 두면서 빈약한 금액을 지급하는 시범사업을 수립하고 있는데, 신자유주의의 변종이 아닌 진보적 기본소득이라는 상상을 날조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러한 문제들에 관계없이, “노동 없는 미래”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에 충분한 복지성 급여제도가 갖추어져 있어야한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런 사회에서 일자리에서 쫓겨난 대중들은 급여를 제공받아야 할 것이며, 자본가들은 테슬라 자동차 사장 엘론 머스크처럼 분별 있고 유일하게 합리적인 해결책인 기본소득을 지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미래를 위한 책임 있는 준비를 상상하는 것은 이윤 창출을 기반으로 하는 체제에 부당한 신념을 부여하는 것이다. 환경재앙에 직면해도 송유관 건설을 중단하지 않는 자본가들이 기술대체에 대한 합리적인 해결책을 깊이 고민할 것이라고 기대할 이유가 없다. 포스트-자본주의적 자본주의는 없고 이를 유발할 사회 정책의 혁신도 없다.


최근에 내가 ‘기본소득’ 토론의 패널로 나갔을 때 사회자가 내게 반론을 제기했다. 그녀는 기본소득이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길이 아니라고 수긍했지만, 그렇다면 어떻게 “대담한 전망”을 발전시킬 수 있을지 물었다. 정당한 질문이지만, 우리가 반대하는 것에 대해 현실적인 평가를 하는 것은 여전히 꼭 필요한 일이다. 아무리 그것에 일부 진지한 측면들이 있다 해도 말이다. 문제는 신자유주의 시기가 많은 타격을 주었다는 것이다. 착취 수준은 높아졌으며 노동계급 운동이 약해졌다. 우리의 요구와 열망은 매우 중요하지만, 더 큰 문제는 우리가 무엇을 쟁취할 수 있는가이다. 기본소득으로 경도하고 있는 좌익들의 경향에서 불안한 점은 그들이 신자유주의의 현실과 그것에 저항할 필요성을 우회하는 사회 정책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건 없다.

 

영국 노동당과 기본소득


영국 노동당의 제레미 코빈를 둘러싸고 국제적으로 좋은 의미에서 상당한 흥분이 일어났다. 그의 가까운 동맹자이자 노동당의 예비 재무장관 후보인 존 맥도넬은 긴축 합의 파기를 담은 정책의 일환으로 기본소득 채택에 관심을 기울였다. 좌파 사민주의자인 맥도넬은 진보적 기본소득을 위한 ‘최상의 시나리오’의 가능성을 제기한다. 바로 그 때문에, 내가 말한 ‘대담한 전망’이 보편적인 화폐지급 개념을 중심으로 구성되어야하는지 혹은 다른 목적에 헌신해야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된다.


신자유주의에 직면하여 우리가 노동자들과 지역사회의 필요에 기초하고 자본주의 자체에 대항하는 조건들을 창출하는 목적과 요구들을 생각해서 제기해야 한다고 해보자. 내 생각에 그 때 만일 우리가 보편적인 화폐지급처럼 제한적이며 본질적으로 보수적인 것에 만족한다면 그것은 목표에 도달하기 훨씬 전에 스스로를 팔아넘기는 짓이다. 기본소득이라는 전망은 뭐든지 팔아먹으려고 하는 부정한 사회의 고객이 되는 것 이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엄청나게 확장된 무상 의료와 교통 제도를 위해 싸우는 것은 얼마나 대담하고 의미 있는 일인가? 가장 가난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노동계급 대부분이 누릴 수 있는 사회적 주택을 창출하고 확장해나가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얼마나 좋은가? 보편적 보육과 많은 종류의 지역사회 서비스처럼 관심을 기울여야할 것들이 있다. 게다가, 우리는 국가 관료제의 고위관료로부터 가능한 한 많은 힘을 빼앗고, 노동계급이 의존하고 있는 공공서비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일을 할 수 있다. 기존 소득지원에 있어서 우리는 빈약한 수준의 혜택, 관료주의적 방해,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에 찌든 도덕적 통제를 잠깐이라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지금처럼 실업자․빈민․장애인이 ‘수치심의 절차’를 통과해야하는 것과는 반대로 그들의 실제 요구에 부합하는 최대한의 재정지원혜택과 프로그램, 생활임금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 있다. 이처럼 확장된 서비스에 필요한 비용은 다른 노동계급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기업과 은행 그리고 그 소유주들의 세금 부담을 늘리고 부유세를 징수하도록 압박해서 마련해야 한다.


공공 서비스를 확대하고 개선하려는 투쟁은 생활임금, 노동현장의 권리, 산업재해 노동자를 위한 실질적인 보상을 요구하는 노동자 투쟁과 연결되어야한다. 이 외에도 자원 고갈, 오염, 생태적 재앙을 불러오는 ‘기업의 결정들’에 맞서보자.


나는 우리 운동이 신자유주의 질서와 이를 창출한 자본주의 체제와 타협하려고 애쓰지 말고 그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본소득이 전면적인 개혁 수단이라는 그 모든 주장에도 불구하고 진보적 기본소득 개념은 체제와 화해하려는 헛된 시도에 불과하다. 현실에서는 타협조차 불가능하다. 정부가 사회정책연구소에서 연구하고 있는 기본소득 모델은 ‘노동시장의 폭정‘을 끝내기는커녕 더 끔찍한 것으로 만들 것이다. 긴축과 민영화 의제는 착취 앞에서 가능한 한 사람들을 힘없고 절망에 빠지게 하는 소득지원제도를 필요로 한다. 그 이름을 ‘기본소득’이라고 바꿔 부른다 한들 변하는 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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