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없음 2017/04/10 21:25

[국제] 피델 카스트로의 정치적 유산

(null)빌 밴 오큰(Bill Van Auken)
옮긴이|이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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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밤(11월 25일), 20세기의 주요 인물들 중 하나인 피델 카스트로가 죽었다. 이 소식은 그가 남긴 모순적인 역사적 유산을 둘러싼 격렬한 논쟁들만큼이나 폭넓은 대중의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카스트로는 권좌에서 물러난 지 10년 만에 9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반세기 가까이 그는 “종신대통령”이자 집권 공산당의 제1 서기 및 쿠바군 총사령관이었다. 카스트로는 권력의 많은 부분을 현재 85세인 동생 라울 카스트로에게 이양했다.
 

카스트로의 통치는 그의 체제를 무너뜨리려고 골몰했던 아이젠하워에서 조지 W. 부시에 이르는 미국 대통령 10인의 임기를 합친 것보다 오래 지속되었다. 미국 정부는 카스트로 정권의 전복을 위해 1961년 CIA가 조종한 피그만 침공을 비롯하여 수백 번이 넘는 암살 시도와 사상 최장기 경제 봉쇄 등 갖은 수단을 다 썼지만 실패했다.
 

카스트로의 기나긴 정치이력은 많은 면에서 놀라운 것이었다. 그의 통치에 라틴아메리카에 전형적인 군사 독재의 성격이 있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는 정치적인 경쟁자와 반대세력들에게 무자비한 면을 보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부정하기 어려운 개인적 카리스마와 인간적인 면모를 겸비한 인물이었다. 이 때문에 쿠바의 억압받는 대중들 뿐 아니라 국제적으로 넓은 층의 지식인들과 급진적인 청년들의 지지를 얻었다.
 

카스트로의 죽음에 대한 미국 언론의 반응은 예측 가능한 것이었다. 신문들은 “잔혹한 독재자”라는 비난 사설을 실었다. 방송들은 쿠바 국민 대부분이 보인 침울하고 진지한 추모 분위기보다 마이애미에 있는 리틀 아바나 거리에서 쿠바 우익 망명자 수 백 명이 춤을 추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권좌에서 내려온 지 십년이 지났음에도 카스트로는 쿠바에서 예전보단 덜 하지만 여전히 큰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이는 카스트로가 주도한 1959년 쿠바 혁명이 이 나라의 극빈층에게 명백한 사회 환경의 개선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이는 쿠바와 인구 및 국내총생산 규모가 비슷한 이웃나라 도미니카를 비교해보면 명확히 드러난다. 쿠바의 살인사건 발생률은 도미니카의 4분의 1에 불과하다. 쿠바의 평균 수명은 79세로 도미니카의 73세보다 6세 많고, 영아 사망률은 도미니카의 약 6분의 1이다. 쿠바의 문맹률과 영아 사망률은 미국보다도 낮다.
 

카스트로의 정치적 억압성을 강조하는 미국 언론의 논평들은 역사적 맥락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미국은 한 세기 내내 무수히 많은 독재정권들을 지원했다. 라틴아메리카에서만 이런 정권들은 수 십 만 명의 죽음을 불러왔다. 카스트로와 카스트로주의는 이런 참담한 유혈의 역사가 빚은 산물이었다.
 

카스트로의 정치적 성공은 1898년 스페인-미국전쟁의 승리로 쿠바가 스페인 식민지에서 미국의 반식민지가 된 이래 미국 제국주의가 수십 년 동안 자행한 수탈과 억압의 결과였다. 미국은 이른바 플랫수정조항을 통해 쿠바 내정에 간섭 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고, 관티나모 만을 점령하여 군사기지로 사용했다.

 

미국이 지원한 바티스타 독재정권

 

쿠바 혁명 전, 미국은 풀헨시오 바티스타 정권을 적극 지원했다. 바티스타는 외국 기업, 국내 토착 지배층 및 마피아의 이해를 대변하는 흉폭한 독재정권을 이끌었다. 이 세력들은 쿠바를 도박과 성매매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고문은 일상이었고,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조차 바티스타 정부가 20,000명 이상의 쿠바인을 정치적으로 살해했다고 말했다.
 

악랄한 정권이었지만 이 나라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비슷한 시기에 미국 정부는 도미니카의 트루히요, 아이티의 뒤발리에, 니카라과의 소모사 등이 저지른 유사한 범죄행위를 지지했다.
 

민주적 수단을 통해 기존 체제를 변화시키고자 한 사람들은 폭력으로 제거되었다. 예를 들어 1954년 과테말라의 아르벤스 정권이 CIA에 의해 전복되었다. 그 결과 중남미 전역에서 대중적인 반미정서가 들끓었다.
 

스페인계 지주 가정에서 태어난 카스트로는 민족주의적 학생운동의 온상인 아바나 대학에서 정치의식에 눈을 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청년 카스트로는 스페인의 파시스트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Jose Antonio Primo de Rivera)와 이탈리아 총통 베네디토 무솔리니를 숭배했다고 한다.
 

학생시절인 1948년 콜롬비아 보고타를 여행한 것도 그의 정치의식을 형성시킨 중요한 경험이었다. 당시 미국은 이 지역에서의 헤게모니 유지를 위해 보고타에서 미대륙 국가들의 회의를 소집하여 ‘미주기구’를 건설하고자 했다. 카스트로의 보고타 여행 동안 벌어진 자유당 대통령 후보 호르헤 가이탄 암살 사건은 ‘보고타 폭동(Bogatazo)’으로 알려진 대중 봉기를 불러왔다. 이로 인해 이 콜롬비아 수도의 상당부분이 파괴되고 사망자는 3000명에 이르렀다.
 

카스트로 스스로 인정하듯이 장교출신의 아르헨티나 권력자 후안 페론도 그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그는 페론의 포퓰리즘과 반미주의, 빈민 복지 정책을 찬양했다.
 

카스트로는 20대부터 쿠바 소부르주아에 기반 한 반공산주의 경향의 민족주의 정당 인민정통당(Partido Ortodoxo)에 가입하여 바티스타 독재정권에 대한 투쟁을 시작했다. 1952년 인민정통당 후보로 하원의원에 출마했던 카스트로는 1년 뒤 무장투쟁 노선으로 방향을 바꾸어 몬카다 군병영에 대한 공격을 이끌었다. 비참한 실패로 끝난 이 봉기로 200여 명의 참가자들이 죽거나 체포되었다.
 

짧은 수감생활 이후 망명을 떠난 카스트로는 1956년 말 무장한 소수의 지지자들과 함께 쿠바로 돌아왔다. 정부군과 첫 교전에서 다수의 병력을 잃었지만, 쿠바 부르주아와 미국 정부는 이미 바티스트의 통치 능력을 의심하고 있었다. 불과 2년 만에 권력은 카스트로의 게릴라 조직 <7월 26일 운동>의 수중에 떨어졌다.
 

봉기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으로 보였을 때 카스트로는 폭넓은 국제적 지지를 받았다. 새로운 정권에 대해 지지를 표명한 사람들 중에는 미국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도 있었다. 그는 바티스타 정권의 전복이 “기뻤다”고 썼다.
 

본래 카스트로는 공산주의에 대한 어떠한 공감대도 부정했다. 카스트로 정부는 해외 자본을 보호하고 새로운 민간 투자를 환영할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미 제국주의와 합의를 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쿠바 노동자와 농민들은 혁명에서 성과를 바라고 있었다. 미국 정부는 자국 해안에서 90마일 떨어진 나라에 가장 온건한 사회 개량조차 허용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명확히 했다. 미국의 지배그룹은 바티스타의 실각을 짧게 축하한 뒤 새 정부가 예전 방식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들은 카스트로가 진정으로 쿠바 사회를 변화시키고 가난한 대중의 생활수준을 높이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고 겁에 질렸다. 미국은 기존 질서를 변화시키려는 어떠한 시도에 대해서도 비타협적인 태도로 나왔다.
 

제한된 수준의 토지 개혁에 대한 응답으로 미국 정부는 쿠바로부터 설탕 수입을 줄이고 석유 수입을 금지하여 쿠바 경제의 숨통을 졸랐다.
 

카스트로는 이에 대해 먼저 미국 재산을, 그 다음에 쿠바인 소유 기업들을 국유화하는 것으로 응답했다. 그는 소련에 지원을 요청하는 동시에 쿠바의 스탈린주의 정당 인민사회당(PSP)의 힘을 빌렸다. 이 당은 바티스타를 지지하며 카스트로의 게릴라 운동을 탄압한 전력으로 불신을 받고 있었다. 스탈린주의자들은 카스트로가 갖지 못한 정치 조직적 기반을 제공해주었다.
 

카스트로는 2차 대전 이후 식민지와 피억업 국가들을 휩쓴 광범위한 부르주아 민족주의 및 반제국주의 운동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이 운동은 알제리의 벤 벨라, 이집트의 나세르, 가나의 은크루마, 콩고의 루뭄바 같은 주요 인물들을 낳았다. 카스트로와 마찬가지로 그들 대부분은 자기 이익을 위해 미국과 소련의 냉전을 이용했다. 자신이 “마르크스-레닌주의자”라는 카스트로의 선언과 친소련 정책은 확실히 기회주의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비록 소련 관료체제가 혁명 지도자들을 말살하고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와 무관하게 된 지 오래되었다고는 하지만, 이는 또한 러시아 10월 혁명이 43년이나 지난 1960년에도 국제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결과이기도 하다.
 

쿠바 민중들의 치솟는 기대와 미국 제국주의의 완강한 반응은 카스트로를 왼쪽으로 밀어갔다. 하지만 그는 결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었다. 쿠바 사회의 개혁에 힘쓰던 초기에 그의 정치지향은 항상 실용적이었다.
 

결국 카스트로는 소련 스탈린주의와 파우스트적인 거래를 맺게 되었다. 소련 정부는 막대한 원조와 무역 보조금을 제공하는 대신, 미국 제국주의와 “평화 공존”을 추구하는데 쿠바를 협상카드로 이용했다.
 

1991년 스탈린주의 관료체제의 최종적 배신인 소련의 해체는 쿠바를 절망적인 사회·경제적인 위기 속으로 떨어뜨렸다. 카스트로 정부는 해외자본 투자를 점차 개방하고 베네수엘라로부터 보조금을 받아서 이를 벌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베네수엘라 경제 위기로 원조는 점차 줄어들고 있다.

 

미국과 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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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상황은 아바나에 미국 대사관이 다시 설치되고 올해(2016년) 3월 오바마가 쿠바를 방문하는 등 미국과 쿠바 사이의 화해를 위한 기초를 놓았다. 쿠바의 값싼 노동력과 전망 좋은 시장을 이용해야 하는 미국 자본주의의 입장에서는 이 나라에 중국 및 유럽의 라이벌들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 

 

쿠바 지배층은 미국 자본의 유입을 중국과 유사한 길을 가는 동안 자신들의 지배를 유지할 수단으로 보고 있다. 쿠바 엘리트는 사회 불평등이 급속히 심화되는 상황 아래 쿠바 노동계급을 희생양으로 자신의 특권과 권력을 보장받기를 원한다.
 

이 모든 것이 생애 마지막 십년 동안 카스트로를 괴롭힌 것은 분명하다. 이 시기 동안, 카스트로는 쿠바 언론에 “피델의 성찰”이라는 칼럼을 통해 정기적으로 발언을 계속해왔다. 이론적인 통찰은 거의 제시하지 못하는 이 글들은 성실한 소부르주아 급진주의자의 사고방식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칭찬할 만한 일은 카스트로가 죽을 때까지 미국 제국주의가 대표하는 모든 것을 경멸했다는 것이다. 그는 “인권” 수사학을 구사하면서도 제국주의 전쟁과 무인폭격기에 의한 암살 프로그램을 수행하는 버락 오바마의 위선을 격렬하게 비난했다.
 

오바마의 쿠바 방문 직후, 카스트로는 자신이 쓴 마지막 칼럼들 중 하나에서 미국 대통령이 아바나에서 한 연설을 맹렬히 비난했다. 그는 “…… 우리는 민중의 노력과 지성을 통해 우리에게 필요한 식량과 물질적인 부를 생산할 수 있다. 아무것이나 던져주는 제국은 필요 없다”고 단호하게 썼다.
 

하지만 오바마의 쿠바 방문과 미국 제국주의와 관계를 “정상화”하려는 움직임은 중간계급 세력이 주도한 다른 모든 부르주아 민족주의 운동 및 민족해방 투쟁처럼 카스트로 혁명이 최종적인 죽음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결국 카스트로 혁명은 제국주의적인 억압에서 생겨난 쿠바의 역사적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실패했으며, 예전에 그것이 반대했던 신식민주의적인 관계를 부활시키고 있다.
 

단지 냉소적인 사람만이 카스트로의 생애에서 영웅성과 비극성을, 무엇보다 쿠바 민중들의 오랜 투쟁을 부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카스트로의 유산은 쿠바 내로만 한정해서 평가할 수 없고, 그의 정치가 국제적으로, 특히 라틴 아메리카에 미친 영향을 고려해야만 한다.
 

유럽과 북미의 소부르주아 급진주의자와 라틴아메리카의 좌파 민족주의자들은 소규모 게릴라부대의 우두머리에서 국가의 권력을 잡은 카스트로를 노동계급의 의식적이고 독립적인 정치적 개입도, 마르크스주의 혁명정당의 건설도 필요 없는 사회주의로 가는 새로운 길을 열었다고 치켜세웠다. 카스트로 혁명의 신화와 특히 그의 정치적 동료 체 게바라가 전파한 게릴라 이론은 모든 주변부 지역에서 혁명의 모델로 떠받들어졌다.

 

파블로 수정주의의 역할

 

이러한 잘못된 관점의 가장 눈에 띄는 지지자들로 제 4인터내셔널에 등장한 파블로 수정주의 경향이 있다. 이 조직은 유럽의 에른스트 만델과 미국의 조지프 핸슨이 주도했고, 이후 아르헨티나의 나후엘 모레노가 결합했다. 이들은 카스트로의 성공은 소부르주아가 이끄는 소농에 기반을 둔 무장 게릴라들이 “태생적으로 마르크스주의자(natural Marxists)”가 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고 주장했다. 객관적 상황은 수동적인 방관자로 위축된 노동계급과 함께 이들을 사회주의 혁명으로 몰아갈 것이다.
 

나아가 그들은 노동자 권력기관이 전혀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카스트로의 국유화가 쿠바에 “노동자국가”를 건설했다고 주장했다.
 

쿠바 혁명 훨씬 이전에 레온 트로츠키는 소부르주아 세력에 의해 시도되는 손쉬운 국유화와 사회주의 혁명을 동일시하는 관점을 명확히 거부했다. 1938년에 작성된 제 4인터내셔널 설립 문서 「이행강령」은 “지극히 예외적 상황(전쟁, 전쟁에서의 패배, 금융붕괴, 대중의 혁명적 압력 등) 하에서 스탈린주의자들을 포함한 소부르주아 정당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정도보다 더 나아가 자본가계급과 단절할 이론적 가능성을 미리 단정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건을 진정한 프롤레타리아의 독재와 구분했다.
 

1939년 (히틀러와 협정을 맺은) 폴란드 침공 과정에서 스탈린 체제가 수행한 몰수조치에 대해 트로츠키는 이렇게 썼다 . “우리의 주요한 정치적 기준은 이 지역 저 지역에서 소유관계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만이 아니다. 이것도 중요하긴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세계노동계급의 의식과 조직의 변화이다. 그리고 이들이 과거의 투쟁성과를 보존하고 새로운 성과를 쟁취할 능력을 증대시키는 것이다.”
 

제 4인터내셔널 국제위원회는 파블로주의에 맞서 완강히 투쟁하면서, 카스트로주의는 사회주의로 가는 새로운 길이 아니라, 옛 식민지 세계의 많은 곳들에서 권력을 잡은 부르주아 민족주의 운동의 보다 급진적 변형의 하나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것은 카스트로주의에 대한 파블로의 미화가 마르크스로부터 기원한 사회주의 혁명의 역사적·이론적 개념 전체에 대한 부정이며, 또한 트로츠키주의 운동에 의해 국제적으로 집결된 혁명적 중핵을 부르주아 민족주의와 스탈린주의 진영 속으로 해소시킬 것이라고 경고했다.


제 4인터내셔널 국제위원회는 원칙적으로 제국주의 침략에 대해 쿠바를 지지하면서도 쿠바에 대한 분석을 제국주의 시대에 부르주아 민족주의의 역할에 대한 더 큰 틀의 평가 속에 위치 지웠다.

트로츠키의 연속혁명 이론을 옹호하며, 제 4인터내셔널 국제위원회는 1961년 이렇게 썼다. “이런 민족주의 지도자들을 추켜세우는 것은 트로츠키주의자가 할 일이 아니다. 그들이 대중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사민주의와 스탈린주의가 보인 배신행위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제국주의와 노동자 농민 사이에 완충막이 되었다. 소련으로부터 경제 원조를 받을 가능성은 제국주의자들과 더 공정하게 거래할 수 있게 해 주었고, 심지어 부르주아 및 소부르주아 지도자들 중 보다 급진적인 부위들이 제국주의 국가의 재산을 공격하고 더 많은 대중의 지지를 얻을 수 있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는 이들 나라에서 노동계급이 마르크스주의 정당을 통해 정치적 독립성을 획득하고 가난한 농민들을 소비에트 건설로 이끌며, 국제적인 사회주의 혁명과 연결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의견으로는 트로츠키주의자는 어떤 경우에도 이 문제들을 민족주의 지도부를 사회주의자로 만드는 희망과 바꿔치기해서는 안 된다.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자 자신의 과제이다.”
 

이러한 경고들은 라틴아메리카에서 비극적으로 입증되었다. 여기서 파블로주의자들이 고취한 이론들은 급진적인 청년과 젊은 노동자들의 한 세대를 자본주의에 맞서 노동계급을 조직하는 투쟁에서 수천 명의 희생을 요구한 자멸적인 무장투쟁으로 방향을 바꾸게 만들었다. 이는 노동자 운동을 잘못된 방향으로 오도하고, 파시스트적인 군사 독재로 가는 길을 닦도록 도왔다.
 

그 첫 번째 예로 이러한 이론들은 볼리비아에서 게바라 본인의 생명을 앗아갔다. 광부들 및 여타 볼리비아 노동계급의 전투적인 투쟁들을 무시하고 농민들의 가장 낙후하고 억압받는 층에서 게릴라를 모집하려는 헛된 노력의 결과 그는 고립되고 굶주리다 1967년 10월 CIA와 볼리비아 군에게 붙잡혀 처형되었다.
 

게바라의 운명은 카스트로주의와 파블로 수정주의가 주변부 전체에서 불러올 재앙적 결과들에 대한 비극적인 전조였다. 아르헨티나에서도 게릴라주의에 대한 숭배는 1969년 코르도바의 대규모 파업으로 폭발한 혁명적 노동계급 운동을 약화시키고 혼란을 주는 역할을 했다.
 

카스트로는 소비에트 블록의 고객이자 자국 체제를 안정시키려고 애쓰는 현실정치가로 행세하면서 다른 라틴아메리카 부르주아 정부들과 우호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했다. 이 정부들은 그를 모방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전복시키려는 대상이었다. 1971년 카스트로는 칠레를 방문해 아옌데의 “사회주의로 의회적인 길 (parliamentary road to socialism)”을 찬양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도 그 나라의 파시스트들과 군대는 노동계급을 분쇄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카스트로는 페루와 에콰도르의 군사정부를 반제국주의자로 칭찬했으며, 심지어 1968년 학생들을 학살한 멕시코의 부패한 집권정당 제도혁명당도 끌어안았다.
 

카스트로 정책과 그를 미화한 정치적 경향들이 미친 전반적인 영향은 주변부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억제하는 것이었다.
 

지금 제국주의 강대국들, 그 중에서도 특히 미국은 쿠바와 다른 나라들에서 자신의 이익을 증진시키는데 카스트로의 죽음을 어디까지 이용할 수 있을지 계산하고 있다.
 

버락 오바마는 “역사는 그 나라 민중과 세계에 이 한 사람의 개인이 미친 거대한 영향을 기록하고 판단할 것”이라는 위선적인 성명을 발표하며, “쿠바 국민은 미국이 우방이자 협력자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큰소리쳤다.
 

반면 대통령 선출자 트럼프는 “거의 60년 동안 자국 국민을 억압해온 잔혹한 독재자의 죽음”을 축하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미국 은행과 기업들이 쿠바에 쉽게 쿠바에 침투할 수 있도록 오바마가 제정한 법안들을 폐지하겠다는 트럼프의 위협이 실제로 실행될지에 대해서는 추측이 분분하다.
 

제국주의의 대표자들이 반동적 목적으로 카스트로의 죽음을 이용하려 하는 동안, 노동자들과 청년의 새로운 세대에게 카스트로주의의 역사적 경험과 제 4인터내셔널 국제 위원회가 발전시킨 선견지명적인 비판에 대한 연구는 미래의 혁명 투쟁과 그것을 지도할 정당을 건설하기 위해 노동계급을 준비시키는 데 중요한 과제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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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10 21:25 2017/04/10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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