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없음 2016/10/04 12:00

브렉시트와 유럽 계급투쟁

홍수천



* 지난 9월 8일 발행된 <붉은글씨> 5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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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렉시트, 즉 영국의 유럽연합 EU 탈퇴는 노동자계급과 계급투쟁에 ‘좋은 일인가, 나쁜 일인가’? 이로운가 해로운가? 혹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계급투쟁과는 상관없는 일, 노동자계급의 쟁점이 아닌 일인가? 이것은 아주 원초적이고 단순한 질문이지만, 이에 대한 분명한 답변을 회피하는 그 어떤 브렉시트 논평이나 해설, 평가도 무가치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 글의 기본 전제이다.


따라서 그 질문에 답변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자. 한 마디로 브렉시트는 노동자계급과 계급투쟁에 해악이다. 브렉시트의 승리로, 즉 국민투표가 ‘탈퇴’로 결정 나면서 영국의, 나아가 전체 유럽의 노동운동과 사회주의운동, 그리고 진보적 운동 전반에 난관이 조성되었다. 브렉시트 승리로 가장 패배를 입은 것은 “잔류” 지지를 호소했던 ‘기성정치권’(보수당과 노동당 양대 정당 중심의 제도정치권)이 아니라 사실상 노동자계급이다. 개별적으로 잔류를 지지했느냐 탈퇴를 지지했느냐와 상관없이 계급으로서 말이다. 생존권과 사회적 권리의 후퇴 등 당면 수준에서도 손실이고 중장기적인 계급투쟁 진로에서도 퇴행적인 길이, 덫과 함정으로 빠지는 길이 닦여졌다.  

 

1. 브렉시트와 노동자계급


우선, 영국의 수백만 노동자들의 정치적 각성과 계급의식에 타격이 되고 있다. 마가릿 대처 총리 이래 계속되어 온 영국 지배계급의 신자유주의 공격으로 황폐화된 구 공업 지역의 노동자들이 특히 이 타격의 제물이 되고 있다. 이 지역의 브렉시트 찬성파 상당수는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허구적 편견과 명백히 연결되어 있다. ‘원주민’ 노동자들의 고용불안과 저임금, 복지 축소를 가져온 주범이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이기 때문에 이민자들의 영국 유입을 막을 수 있도록 유럽연합을 탈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거짓말은 영국판 조중동 찌라시라고 할 수 있는 데일리메일, 더선, 데일리익스프레스 같은 억만장자 소유 일간지들이 수 십 년 동안 줄기차게 퍼트려 온 악선동인데, 이번에 국민투표를 통해 이 거짓이 ‘근거 있는’ 것으로 확인되는 효과를 얻게 되었다. 이미 국민투표 이후 반이민 인종주의적 증오범죄가 거리와 노동현장에서 속출하고 있다. 브렉시트 승리로 극우 영국독립당(UKIP)이 득세하면서 인종주의적 포퓰리즘이 창궐할 기세를 보이고 있고, 이제 고립을 끝낸 소규모 파시스트 그룹들에 의한 폭력도 다시 부활할 조짐이다.


이주 노동,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은 장기적으로 국제적 공감과 연대를 촉진하는 역사적으로 진보적인 경향인데 이제 브렉시트의 승리로 유럽 대륙의 노동자가 일자리를 찾아 영국에 오는 것이나 반대로 영국의 노동자가 다른 유럽 나라들에서 일하는 것이나 모두 결정적으로 가로막힐 상황이다.


국민투표 후 보수당 캐머런 총리가 사임했지만, EU 탈퇴 과정은 철저히 보수당 정부의 수중에서 진행될 것인데, 저들은 브렉시트 이행 과정에서 이민을 제한하는 데 전력을 기울일 것이다. 남유럽이나 동유럽에서 온 이주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전쟁을 피해 온 난민들에 대해서도 공격이 집중될 것이다.


캐머런을 계승해서 테레사 메이나 보리스 존슨이나 누가 총리가 되든 보수당 정부는 ‘기성정치권’에 대한 민중들의 치솟는 반감을 달래기 위해 당장은 발톱을 감추겠지만, 곧 그 동안 영국과 EU의 노동자들이 투쟁으로 쟁취하여 EU 법률과 조례로 명문화시켜 놓은 권리들(노동시간 단축, 야간노동 제한, 임신 출산 유급휴가, 비정규직 고용의제 등)을 폐기시키기 위한 공세에 착수할 것이다. 동시에 교육 및 의료 서비스의 민영화도 박차를 가할 것이다.


적어도 2년은 걸릴 EU 집행위와의 브렉시트 협상 과정이 영국과 EU 양측 간에 적대적인 난타전이 될 것이라는 것은 불을 보듯 빤한데 이 과정에서 영국과 EU 전체의 경제위기 또한 가중될 것이다. 2008년 이래의 공황으로부터 아직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노동자들과 빈민들에게 또 다시 타격이 될 것이다. 또한 현재의 EU에 이르기까지 40여년에 걸쳐 구축된 생산·교환의 국제 연결망이 국경 통제 및 관세 부과가 재개됨으로 인해 뒤흔들리면서 EU가 서로 경쟁하는 정치·경제 단위들로 파편화되고 와해되는 위험성도 대두되고 있다.   


한편, 브렉시트는 유럽의 노동운동을 단일한 공동행동의 틀로 통합하기 위한 기간의 노력들을 분산, 해체시키는 또 하나의 중대한 요인이다. 와해의 위기에 직면한 것은 단지 유럽만이 아니다. 영국(UK, United Kingdom) 자신도 와해될 위기에 처했다. 스코틀랜드의 새로운 분리독립 국민투표 가능성이 다시 제기되고 있고, 이것은 영국 노동계급운동을 파편화 시킬 가능성이 크다.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공화국 사이의 국경 통제가 재개될 조짐이 일고 있고, 이렇게 되면 영국에 절대로 포함되어 있길 원치 않는 북아일랜드의 피억압 민족주의 소수파에게 큰 타격이 아닐 수 없다.


영국의 청년층 또한 브렉시트 국민투표 결과로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안 그래도 임시직 저임금 일자리에 비싼 등록금과 주거비로 인한 평생 채무노예로 굴러 떨어질 위기에 있는 청년들에게 그 동안 유럽으로 자유롭게 이동해서 일할 수 있던 권리마저 위협함으로써 그 나마 남아 있던 처지 개선의 여지도 봉쇄해 버린 것이다.


국민투표 결과가 가져온 당장의 악영향만으로도 ‘탈퇴운동’(Vote Leave) 진영의 핵심 주장이 얼마나 허구적이고 참주선동적인지가 폭로되었다. 탈퇴운동 진영의 장밋빛 선동과는 달리, 브렉시트 국민투표 결과가 발표되자마자 전 세계에 걸쳐 수조 달러에 달하는 주식 가치 증발과 파운드화 급락, ‘네거티브’로 강등된 영국의 신용등급 전망 등은 브렉시트가 가져올 경제적 악영향에 대한 경고가 한낱 유언비어가 아니었음을 가리킨다. 이 상황은 정부 재정에 강력한 부정적 효과를 미칠 것이고, 보수당 정부는 이를 빌미로 올해 말쯤에는 훨씬 더 혹독한 긴축 및 공공서비스 감축 공세에 나설 것이다.


또한 탈퇴운동 진영은 광신적으로 ‘영국 주권 회수’ 캠페인을 펼쳤다. 그러나 자본주의 역사의 최근 단계에 와서는 어떤 민족국가도 경제적으로 독립적일 수 없으며 경제 ‘주권’을 사실상 가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 엄연한 객관적 현실이다. 모든 국가가 상호의존적이고 경제적으로 뗄 수 없이 얽혀 있다. 브렉시트 국민투표 결과에 뒤이어 나타난 경제적 대혼란이 보여주는 것처럼 세계경제야말로 독립적이고 절대적인 글로벌 실체로서 민족국가에 우선하며 민족국가 위에 군림하고 있다. 금융 시장, 증권 채권 시장은 그 어떤 주권국가에 대해서도 자신의 의지를 강요할 수 있다는 사실은 탈퇴운동의 지도적 이데올로그들 스스로도 과거에 거듭 주장해 온 바이다. 

 

이들 탈퇴운동 진영과는 다른 각도에서지만, ‘좌파적 탈퇴’(Left Exit ; Lexit)를 주장한 일부 반자본주의 좌파들의 경우 영국의 탈퇴와 EU의 해체는 기업주들과 금융자본가들이 강력히 반대하는 걸로 봐서 좋은 일임에 틀림없다는 식으로 주장한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들, 그리고 노동자계급은 대기업을 해체해서 소기업들로 쪼개는 것을 요구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이것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뒷걸음질 치는 것으로, 당장의 득실에서 보더라도 일자리를 잃게 하고 재화와 서비스에 대한 접근권을 축소시키며 물가 상승을 가져오는 등 당면 수준에서도 노동자 민중들에게 생존권적 손실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사회주의자와 노동자계급은 거대기업들의 사회화를 요구한다. 이들 모두를 단일한 단위로 통합시켜 이윤이 아닌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킬 민주적 계획이 가능하도록 대기업의 몰수 국유화를 위해 투쟁한다.


EU가 고립된 자본주의 민족국가들로 해체 또는 와해되는 것은 국제 노동자계급의 입장에서 전진이 아니라 후퇴일 수밖에 없으며 결코 ‘좋은 일’일 수가 없다. 토대에서 진행되고 있는 경제통합 과정은 전진적인 추동력이다. 비민주적인 EU 정치기구들에 대해 반대하는 것과 통합된 초민족적 경제단위의 해체를 환영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노동자계급은 사회주의 유럽합중국의 기치 아래 정치 · 경제적 통합 과정의 선두에 서서 싸워야 하는 입장이다.


대자본은 세계화를 선호하지만 결코 민족국가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 때문에 탈퇴운동 진영의 정치인 보리스 존슨이나 미국 대통령 후보 도널드 트럼프 같은, 당장의 정치적 이득을 노리고 민족주의와 배외주의에 호소하는 극우 포퓰리스트 정치인들에게도 줄을 댄다. 오늘 전 세계적으로 반동적 참주선동가들이 대중의 불신과 원망의 대상이 되고 있는 기성정치권 엘리트들을 두들기면서 기세를 올리고 있다. 내수 지향 중소 사업주들 및 하층 중간계급 대중이 국제경제의 발전과 반대로 가고 있는 원초적 민족주의나 외국인 혐오 사상들이 널리 전파될 수 있는 대중적 기반을 이루고 있다. EU 탈퇴 캠페인을 주도해 온 영국독립당 같은 극우 세력의 경우도 바로 이 같은 사상에 체계적으로 호소하여 노동당의 주요 근거지인 북부 공업지역에 파고 들어가 이 당의 노동계급 기반을 공략한 사례이다.

 

2. 브렉시트 국민투표 결과 : ‘탈퇴’ 승리의 요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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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브렉시트가 노동자계급에 ‘좋은 일’일 수가 없고 계급투쟁에 매우 부정적인 효과를 가져 오는 반동적인 해악이라면 어째서 상당수 노동자들이 ‘탈퇴’에 찬성한 것인가? 습관적으로 보수당에 표를 찍고 노조에도 가입하지 않는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통상적으로 노동당에 표를 찍는 노동자들 중에서도 브렉시트에 찬성한 비율이 작지 않다. 이를 근거로 브렉시트 국민투표 결과를 대도시의 코스모폴리탄(세계시민주의) 엘리트에 대한 노동자 서민들의 반란으로 묘사하는 논평들이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노동당의 핵심 기반인 잉글랜드 내륙 구 공업지대의 노동자들과 영세 소도시 서민들이 그 동안 런던 등 대도시의 세계화 지향 엘리트에 대해 품고 있던 반감과 분노가 이번에 ‘반란’으로 표출되었다는 평가이다. 그러나 이것은 탈퇴파 진영의 선봉대를 이루었던 극우 영국독립당과 반이민·반난민 인종주의적 증오를 부채질하는 데 앞장 선 억만장자 소유 일간지들의 데마고그에 놀아나는 평가이다. 실제 투표 구성을 보더라도 이러한 평가는 현실에 대한 총체적 왜곡이다. 양대 정당인 노동당과 보수당 모두 EU 잔류가 공식 입장인데, 노동당 투표자들은 약 65%가,  보수당 투표자들은 40%가 당의 공식 입장을 지지했다. 잔류 찬성 비율이 보수당 지지자들 보다 노동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훨씬 더 많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계급 투표자들의 유의미한 수가 이 반동적인 브렉시트 정책을 지지했다는 사실은 여전히 남는다. 여기에는 영국공산당(CPB)과 사회주의노동자당(SWP), 사회주의당(SP) 등이 렉시트 캠페인을 통해 브렉시트에 ‘좌파적’ 포장을 입혀준 것도 한 몫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CPB와 SP는 심지어 이민이 정말로 문제이고 폴란드 노동자들과의 경쟁이 실제로 임금을 끌어내리는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주장하는 위험한 불장난에 발을 들이기도 했다. CPB는 모종의 이민 통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SP의 국제 조직인 ‘노동자 인터내셔널 위원회’ CWI 는 국민투표 결과를 놓고 노동자계급의 위대한 승리를 선포하면서, 이 승리가 제레미 코빈의 총선 승리로 이어질 수 있게 하자고 제안하기까지 했다. SWP는 올바르게 ‘국경 개방’(Open Border) 요구를 내걸고 있었지만, 이제 열려 있던 국경을 폐쇄하는 브렉시트에 찬성하라고 노동자들에게 촉구했다! 국민투표 결과가 가져온 파장 속에서 SWP는 그들 “승리”의 자명한 결과(?) 때문에 반인종주의 캠페인을 새롭게 갱신해서 해야 할 필요를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탈퇴’에 투표한 것은 EU에 남아 있는 것이 그들의 진정한 이익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나? 아니다. 또는 이민에 대한 그들의 공포가 정당한 것이었기 때문에 탈퇴에 투표한 것인가? 아니다. 공포는 현실인 것이 맞지만, 그 공포의 원인은 전적으로 상상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브렉시트 국민투표 과정에서 유행했던 “우리 조국의 자주성 되찾기”, “주권”, “독립” 같은 담론들에 설득력을 부여했는가? 한 마디로 주체적 힘의 상실, 즉 내 주변의 세상을 내가 만들어 가는 권능을 잃어버린 상황이 그러한 담론들에 중독성을 부여했다. 많은 노동자들이 한 때 가졌던 힘, 내가 내 삶의 주인이라는 생각을 지니게 해 준 그 힘은 살아갈 만한 월급의 안정된 일자리, 주거에 대한 사회적 보장, 확대되는 공공서비스 같은 것으로부터 나왔다. 이 모든 것을 파괴한 것은 “유럽”이 아니라 영국 자본가계급이다. 민영화, 외주화, 구조조정, 신자유주의 등 그 모든 것의 선두에 서서 자본의 위기 전가를 위한 ‘노동자 죽이기’의 최첨단 기법을 개척한 영국 지배계급 말이다.


일자리와 노동조건을 지키기 위한 제대로 된 투쟁이 부재한 상황, 노동조합과 노동당이 이러한 투쟁을 만들 의지가 이미 오래 전부터 없다는 것이 확인된 상황, 이런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 특히 실업자와 노년층 그리고 쇠락한 옛 공업도시의 노동자들, 주민들이 자신들의 황폐화된 공동체를 가져온 주범으로 지목한 “기성정치권(Establishment)", 즉 중앙 정치인들과 ‘전문가들’과 관료들에게 분개한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노동조합의 쇠락도 관련된 주요 요인이다. 현재 조합원 수는 1980년대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노동조합의 전투성 상실과 함께 이 문제는 점점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이 일자리 축소, 노동조건 저하, 복지 감축에 맞선 효과적인 단체행동의 경험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이절 패라지가 이끄는 영국 독립당의 극우 포퓰리즘 선동이 사람들에게 먹혀든 것도 이런 상황에서였다.


존슨 같은 엘리트 보수당 정치인이 할 수 없었던 것을 이들 패라지 같은 데마고그들은 할 수 있었다. 국민건강보험 기금의 고갈 위기, 아무리 기다려도 차례가 돌아오지 않는 공공주택 배정, 문 닫는 학교들, 저임금의 만연 등의 사회적 고통에 대해 이들이 좌파적으로 들리는 참주선동을 사용하여 이 모든 책임을 이주노동자들의 탓으로 돌리는 데 성공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번 브렉시트 국민투표로 확인된 셈이다.


또 하나의 요인은 EU에서 잇달아 터져 나온 위기들이다. 먼저 금융위기, 이어서 회원국들의 재정위기, 부채위기, 유로존의 약소 회원국들한테 강요된 긴축위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난해의 ‘난민위기’ 등, 이러한 EU의 위기들이 “유럽”에 대한 대중적 불신과 의혹을 가중시키는 데 기여했다. 유럽에 대해 스트레스를 느끼고 유럽을 멀리하고 싶은 이 같은 충동에 인종주의, 배외주의의 기름을 퍼붓고 불을 지른 것이 브렉시트 국민투표 과정에서 극우 포퓰리스트 참주선동이 한 일이다. 물론, 브렉시트 찬반 양 진영의 정치인들도 영국 자본주의가 2008년의 그 혹독한 위기를 발생시킨 주범이라는 사실을 투표자 대중들이 잊게 하는 데 일조했다. 위기 와중에서 임금과 복지를 대폭 삭감하고 긴축을 강요, 실시한 것은 EU가 아니라 영국 사장들이고 영국 정부들(보수당 정부와 노동당 정부 모두)이었다. 브뤼셀로부터의 어떠한 압력에도 완전히 자유로웠던 영국의 자본가계급, 영국의 자본가 국가가 바로 자본의 위기 전가를 위한 노동자 민중 죽이기의 주범이었다는 사실이 지금 망각되고 있는 것이다.

 

3. 유럽에서 일국적 운동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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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독립당 당수 나이젤 패라지


브렉시트가 이제 현실화 되는 상황에서 노동자계급은 어떠한 대안을 가지고 싸울 것인가? 2007-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뒤이은 장기 불황 속에서 유럽 각국의 지배계급은 ‘긴축’을 내걸고 과거 노동자들이 쟁취한 성과물들을 되빼앗기 위한 공격을 대대적으로 펼쳤다. 유럽의 노동자들은 이 공격에 그냥 앉아서 당하지 않았다.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스페인에서 강력한 저항운동이 전개되었고, 그리스에서 이 운동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유럽연합은 자본의 유럽이자 주요 제국주의 블록이면서, 동시에 가장 강력하고 가장 전투적인 노동자운동이 존재하는 계급투쟁 무대이기도 했다. 이 계급투쟁 무대는 고립된 영국에서와 비할 때 역관계가 확실히 노동자계급에게 유리한 무대이다.


영국을 비롯하여 전체 유럽에서 개량주의자들은 이미 오래 전에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을 포기했다. 그러나 ‘혁명적 좌파’를 자처했던 세력들, ‘반자본주의 좌파’는 다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개량주의자들이 지배계급 분파들의 꽁무니를 좇고 그들의 정책을 추수하는 것처럼 ‘반자본주의 좌파’는 개량주의자들의 꽁무니를 좇고 있다. 누구의 꽁무니를, 어느 경향의 개량주의 꽁무니를 좇을 것인가를 선택하는 데서만 다를 뿐이다. ‘사회적 유럽’을 주창하는 개량주의자들을 추수하는 좌파들은 개량주의 프로그램에 기초하여 평화공존 상태로 모든 조류들을 포함하는 ‘범좌파 정당’ 건설을 지지했다.


유럽 좌파당들과 민중주의 세력들이 이러한 범좌파 정당 건설을 포기하자 다수의 ‘반자본주의 좌파’ 그룹들은 EU 탈퇴 쪽으로 이동했다. 개량주의자들이 EU 탈퇴가 케인스주의 경제정책을 통한 개량주의 프로그램의 실현을 용이하게 해줄 것이라고 주장하자 ‘반자본주의 좌파들’은 EU 탈퇴가 “사회주의로 가는 보다 용이한 길”이 되어 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에게 자본주의는 국제적 시스템이 아니라 민족국가들의 집합이며, 따라서 국제주의는 결국 일국 계급투쟁들의 집합일 뿐이다.


‘사회적 유럽’ 주창자들과 EU 탈퇴 주창자들은 두 가지 핵심 문제에서 많은 부분 일치를 보이고 있다. 양측 다 현실에서 개량주의 프로그램을 추수하고 있다. 또한 혁명적 권력 장악 프로그램을 위한 투쟁, 사회주의 유럽합중국 수립을 위한 투쟁은 현재로선 아직 일정에 오르지 않았다고 양측 다 똑같이 주장한다. 그들이 그러한 투쟁을 노골적으로 거부하지 않을 경우에조차도 사회주의 유럽을 위한 투쟁은 다소간에 먼 미래의 과제로 바라본다. 오직 EU를 개혁하는 프로그램만이, 또는 일국적 지형 위에서 더 나은 조건으로 투쟁하는 것만이 “현실적”이라고 주장한다.


지금 영국에서처럼 유럽 전체에서 반동적 민족주의의 성장을 허용하고 있는 최대의 요인은, 긴축을 끝장내고 반이민·반난민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일국 단위 노동자운동들이 보여 온 취약함과 무기력함이다. 자본주의가 2차 대전 이래 그 가장 심각한 공황과 침체의 시기로 들어간 상황에서 유럽의 노동자운동·좌파운동이 오히려 각국의 국경 내 일국적 운동으로 후퇴하다니 이 무슨 아이러니인가.


이러한 약점에 대한 예외가, 특히 그리스, 프랑스, 벨기에, 스페인, 포르투갈 등에서 중요하게 있었지만, 여기서들조차 일국적 한계로 인해 투쟁이 손상 받고, 전진하고 못하고 주저앉곤 했다. 필요한 것은 단순한 연대의 표시가 아니라, 각국 정부들이 강요하고 있는 긴축과 노동 ‘개혁’을 중단시키기 위한 전 유럽 노동자들의 통일된 공동투쟁이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EU 당국, 즉 EU 집행위원회, 중앙은행 등이 타격 받을 수 있지, 민족별 분할을 조장하는 것은 이것들과 투쟁하는 데서 절대적으로 틀린 방식이다.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 그리고 끝으로 독일 정부들이 강행하고 있는 사회복지 삭감, 임금 감축, 의료·안전·노동시간에 대한 규제 ‘개혁’, 교육 및 의료 공공서비스 민영화 등을 중단시킬 수 있다면, 단지 ‘사회적’ 유럽이 아니라 사회주의 유럽을 위한 전체 대륙 규모 투쟁이 열릴 수 있다. 그러므로 영국에서 긴축과 반이민·반난민 공격, 그리고 브렉시트 이행 과정에서 노동권을 비롯한 사회적 권리들에 대한 공격 등에 맞선 반격뿐만 아니라 전 유럽에 걸친 노동자 공동행동이 필요하다.


이 통일적인 공동행동은 단일한 ‘노동자 유럽’의 깃발을, 즉 난민들을 비롯하여 거기서 일하고 싶어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 국경이 활짝 열려 있는 사회주의 유럽합중국의 깃발을 들어 올려야 한다. 그러한 유럽은 일자리와 학교와 병원의 부족으로 청년들이 바다를 건너 유럽으로 가기 위해 목숨을 걸고 탈출해야 했던 나라들과 지역들에 모든 지원을 다할 것이다. 그 때 사람들의 자유로운 이동은 더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해 서로 만나서 돕고 싶은 진정으로 자발적인 소망이 될 것이다. 


모든 유럽 국가의 노동자들 간에 능동적인 연대는 긴축과 인종주의, 착취와 전쟁 없는 대륙을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프랑스, 그리스에서와 같은 투쟁을 일국 단위의 국경을 넘어 전 유럽 혁명으로 확산시킴으로써 그러한 목표를 이룰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영국에서 사회주의자들과 노동자계급이 브렉시트에 반대해야 하는 근본 이유이다.

 

 4. 브렉시트와 노동당 · 노동운동


이러한 대안적인 투쟁 목표와 과제에 대해서는 뒤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다루기로 하고, 그 전에 먼저 브렉시트를 둘러싼 논쟁에서 노동운동 및 좌파 제 세력이 취한 입장과 논리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41년 전에도 영국에서는 이번과 같은 브렉시트 국민투표가 있었다. 1975년 당시에 보수당은 압도적으로 유럽 잔류에 찬성하는 ‘유럽’ 당이었고, 노동당은 그 평당원들 대다수가 ‘유럽’에 적대적이었다. 당시 영국의 강력한 전투적 노조운동은 ‘유럽공동시장’에 대해서도 당연히 반대했다. 영국공산당(CPGB)과 노동당 트리뷴그룹 같은 사회주의적 좌파들과 노동조합 좌파 지도부들 모두가 이와 같은 입장을 취했다. 1200만 조합원과 전국적 규모의 전투적 현장위원회 운동이 있는 영국이, 더욱이 막 보수당 정부를 권좌에서 끌어내린 참인데 그런 영국이 무슨 유럽으로부터의 교훈 같은 게 필요하겠냐는 대단한 확신이 노동운동과 좌파들 사이에 퍼져 있었다. 반유럽주의는 이러한 확신의 일부였다. 게다가 당시 영국의 ‘1등 독식(First Past the Post)’ 선거제도로 인해 의회 다수파로서 노동당 정부가 (당시 대륙의 프랑스나 독일에서는 통례였던) 연립정부 구성의 필요를 느끼지 않고 단독으로 계속 연임할 수 있을 거라는 전망이 대세처럼 보였던 상황도 그러한 확신에 한몫 했다. 이러한 전망과 확신은 노동당을 비롯한 영국 노동운동 ‘주류’의 개량주의 전략을 강력히 뒷받침하는 근거로 동원되곤 했다.


오늘, 상황은 완전히 역전되어 노동당과 모든 주요 노동조합들은 확고히 EU 잔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제 세가 극히 쪼그라든 공산당과 사회주의노동자당, 사회주의당, 그리고 철도해상운송노조 RMT 만이 과거 1975년 입장을 고수하여 ‘좌파적 탈퇴’ 캠페인을 전개하고 있다.


1975년 이래 영국은 (그 빅브라더 미국과 함께) 신자유주의의 본산이었다. 영국 지배계급은 민영화와 긴축정책의 개척자이자 선도적 실행자였다. 1975년에는 잔류든 탈퇴든 어느 쪽이 계급투쟁에 유리한 무대일 것이냐는 관점에서 볼 때 둘 사이에 아무 차이가 없는 동일한 조건이었다. 오늘 그 무대는 훨씬 넓고, 보다 강력한 동맹군들이 존재한다. 프랑스의 2016년 운동, 즉 프랑스 사회당 정부의 노동 ‘개혁’ 시도에 맞선 대대적인 노동자 민중의 저항운동이 오늘의 조건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이 노동법 개악안은 설사 그것이 수정 완화 없이 통으로 통과된다 하더라도 영국의 현행 노동법과 비교한다면 그것의 가장 온건한 버전을 넘지 않을 것이다. 1980년대에 영국 노동운동이 겪은 전략적 패배 이후로 프랑스의 2016년 운동과 같은 대대적인 정치파업 운동은 영국 노조 지도부들한테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되어 있다.


노동당을 비롯한 영국 노동운동 ‘주류’가 친(親) EU 입장으로 바뀐 것은 1980년대 초중반의 노동자 투쟁들(자동차 노동자들, 철강 노동자들, 탄광 노동자들, 인쇄 노동자들, 항만 부두 노동자들의 투쟁들)이 패배하고서였다. 이때부터 그들에게 EU는 달리 보이기 시작했는데, 이전에 ‘사회주의’를 향한 영국 노동운동의 전진을 막아설 ‘사장들의 클럽’처럼 보이던 것이 이제는 대처의 신자유주의 공격 이전의 노동조건이 거기서는 아직 펄펄 살아 있는 곳으로, 나아가 그러한 대처리즘 이전 상태로 영국을 되돌려 줄 수도 있을 근거지 같은 것으로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1997년 토니 블레어가 총리가 되면서 보수당의 18년 집권을 끝내고 정권 교체를 이뤘지만, ‘제3의 길, 뉴 레이버(New Labour)’라는 이름으로 사실상 대처리즘을 계승, 지속했다. 토니 블레어와 그 후임 뉴 레이버 총리들 하에서 노동당의 친 EU 입장은 바뀌지 않고 지속되어 왔지만, 더 이상 EU는 대처리즘 이전의 노동조건을 복구시키기 위한 거점으로서가 아니라 자본 세계화의 무대로서 의미가 부여되었다. 따라서 EU의 노동권 관련 일부 진보적 법조항들을 영국에 적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노동당 정부도 대처 이래의 보수당 정부가 하던 대로 영국 기업주들의 편에 서서 강경한 반대 입장을 취함으로써 영국은 계속 이 노동권 조항이 ‘면제’ 되는 국가로 남아 있었다.


수 만 명의 평당원과 지지자들의 열정적인 선거운동에 힘입어 예상을 깨고 노동당 대표로 지난해 선출된 노동당 좌파 제레미 코빈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EU 탈퇴 노선을 고수했는데 이제 ‘잔류’를 비판적으로 지지하는 입장으로 선회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노동당의 ‘유럽 안의 영국’ 캠페인(잔류 캠페인)을 지지하게 되어서 “자랑스럽다”고 말했지만, 동시에 비판적 입장을 밝히는 것 또한 빼놓지 않았다.


“우리는 EU가 노동인민을 위해 작동할 수 있도록 진보적 개혁을 위한 전 유럽에 걸친 연대 연합 건설에 나설 결의가 되어 있다. 노동당은 EU가 21세기 유럽에서 무역과 협력을 위한 최상의 틀이라고 보고, 영국이 EU 회원국으로 계속 남아 있는 것을 지지한다. 또한 유럽의회의 일관된 인권 옹호 입장에 대해서도 물론 지지한다. 그러나 우리는 EU의 의사결정 체계가 EU 인민들에게 보다 더 책임지는 체계로 되도록 만들고, 일자리와 성장을 EU 정책의 핵심 의제로 올려놓음으로써 진정한 사회적 유럽 속에서 노동자의 권리를 강화하고 민영화 압력을 끝장내기 위한 노력에 나서야 한다.”


코빈이 노동당 다수 우파의 친 EU 입장으로 빠져버리지 않으면서 기존 노동당 좌파의 브렉시트 노선을 폐기한 것은 올바른 방향이다. EU 탈퇴가 영국에서나 여타 유럽 나라들에서나 노동자들에게 전혀 득이 되지 않을 것으로 본 것도 옳다. 또한 그가 EU에 급진적인 사회적 변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한 것도 옳다. 그러나 EU의 정치 기구가 개혁될 수 있다고 믿는 것, 합리적이고 민주적으로 유럽 경제의 올바른 발전을 계획할 수 있는 기구로, 노동자의 권리 보장과 환경 보호를 위한 기구로, 노동자계급이 이러한 과제들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기구로 탈바꿈할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일국 개량주의 프로그램 못지않게 공상적이다.


이 과제들을 위해서는 혁명적 변화가 요구된다. 목표와 수단 모두에서 혁명적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그냥 ‘사회적’ 유럽(Social Europe)이 아니라 사회주의 유럽이라는 목표를 명확히 해야 한다. 또한 이 목표를 이룰 수단, 즉 전 유럽의 노동자들이 금융자본가들과 기업주들의 정치권력을 분쇄하기 위해 사용해야 할 수단이 무엇인지도 명확히 해야 한다.

 

5. 브렉시트와 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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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혁명적 좌파를 자임하는 세력들은 이러한 과제에 얼마나 부합하는가? 좌파의 양대 조직인 사회주의노동자당(SWP)과 사회주의당(SP)은 40여 년 전에 채택한 입장을 지금까지도 철석 같이 고수하고 있다. 두 조직의 탈퇴 입장은 그 내용에서 큰 차이가 없으므로 대표적으로 SWP의 탈퇴 입장을 검토해보자.


SWP는 조직의 리더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긴 논설로 브렉시트 찬성 캠페인에 착수했다. 그 글로 표현된 SWP 입장의 결정적인 문제점은 영국 지배계급의 문제가 모두 EU의 문제로 환원되고 있는 점이다. EU의 자본주의적·제국주의적 특징이라고 기술되어 있는 내용은 다 정확하며 틀린 지점 하나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 제시된 특징들 모두가 다름 아닌 영국에도 그대로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점에 대해서는 일절 무시하고 있다. 정말이지, 공공서비스 민영화와 사회복지 감축 같은 정책을 EU가 채택하기 훨씬 전에 이미 선도적으로 실시한 것이 바로 마가릿 대처의 영국 아닌가. 대처 당시만 해도 아직 EU 기구들은 사회헌장(Social Charter) 통과에 애쓰던 중이었다. 대처 총리 하에서 영국은 그 헌장의 사회적 권리 조항들을 대부분 빼고 최소화시키기 위해 최대한의 압력을 행사하다가 나중에는 사회헌장 조인에서 빠져버렸다.


물론 EU도 자신의 사회적 ‘약속’을 2008년 대불황 이후 단계적으로 감축시켰다. 그럼에도 영국에 비해 유럽 대륙의 노동운동이 가진 더 큰 조직력과 투쟁력, 더 확대된 노동조합 권리들과 더 높은 전투성 때문에 아직은 EU 어느 나라에서도 영국에서처럼 사회적 권리들이 철저히 잠식당하지는 않았다. 영국의 자본가들이 지금도 계속해서 유럽의 사회적 권리들을 비난하고 있는 것이나, 탈퇴운동(Vote Leave) 진영이 이 사회적 권리들의 폐지를 자신의 요구조항 일순위에 올려놓은 것이나 다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더욱이 EU와 그 기구들은 국제 자본의 유일 집행기관이 아니다. 세계은행(World Bank)과 IMF, WTO 등은 모두 국제 자본의 집행기관으로서 동일한 목적을 위해 복무하며, 영국이 EU에 남아 있든 떠나든 자본의 경호실장으로서 제 역할들을 멈추지 않고 계속 할 것이다. 그렇다면 브렉시트는 과연 어떤 방법으로 노동자계급을 위해 투쟁 조건을 더 낫게 해 줄 것인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자들에게는 이것이 잔류냐 탈퇴냐를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이다.


SWP는 브렉시트 캠페인이 이민자들을 겨냥한 인종주의와 배외주의를 확산시킬 위험이 있다는 것을 한편으로 인정하면서도 결국 대책 없이 이 위험을 부채질하고 있다. EU를 “그 출발부터 자본주의적인 프로젝트로서 미국 제국주의의 강력한 후원을 받고 있고, 문제 많은 그 자신의 신자유주의적 제국주의 버전을 발전시키고 있다”고 비난한다. 그리고 이어서 “이로부터 명백한 결론은 EU를 거부하는 것이다. 잔류 지지자들은 이러한 분석을 논박하든지 아니면 자신의 입장을 폐기해야 한다”고 일갈한다.


그런데 이 얘기는 EU 이전에 영국 얘기 아닌가. 정확히 같은 내용이 다름 아닌 영국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이 점을 지적하는 것이 아마 가장 빠른 논박이리라! 영국은 그 출발부터 잉글랜드·스코틀랜드 자본가들의 프로젝트였고, 미국의 후원 덕에 세계 강대국으로 살아남았으며, 미국 지배계급과 더불어 신자유주의를 고안해낸 원조이다. 그리고 의심할 바 없이 사회주의자들은 모두 그러한 영국을 ‘거부’한다. 그러나 지금 문제가 EU든 영국이든 자본가 국가를 ‘수락할 것인가 아니면 거부할 것인가’가 아니다. 지금 쟁점은 EU 잔류냐 탈퇴냐 중에 어느 쪽이 국내외의 계급투쟁에 상대적으로 더 유리할 것이냐 이다.


SWP는 영국이 EU에서 떨어져 나가야 하는 논리 근거를 전 유럽에 걸쳐 계급투쟁이 불균등하게 전개되고 있다는 것에서 찾는다.


“전략적으로 볼 때 문제는 1980년대 이래, 특히 유로존 위기의 결과로 전 유럽 차원의 신자유주의 체제가 건설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분쇄하는 것은 일국적 수준에서 이루어질 가능성이 가장 높다. 전체 EU 수준에서 통합 조정된 운동에 의존하여 성공적인 저항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것은 이 저항을 무한정 지연시키는 것이 될 것이다. 불균등·결합 발전 과정을 놓고 볼 때 투쟁은 일국적 수준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가장 높고, 그러고 나서 일반화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변증법적으로 볼 때 국제주의가 전진하기 위해서는 일국적 수준에서 돌파가 먼저 있어야 한다.”


여기에 변증법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전체 EU 수준에서 통합 조정된 운동에 의존하여 성공적인 저항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전략이 선도적 일국 투쟁을 배제하는 전 유럽 동시다발 투쟁을 상정하는 전략인가? SWP는 마치 그 전략이 어느 일국에서 무언가가 성취될 수 있으려면 그 전에 먼저 전 유럽 수준의 운동이 동시적으로, 그리고 자생적으로 터져 나오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구도를 그리는 전략인 것처럼 몰아간다. 반면에 일국 수준에서의 성공은 “일반화 될 수 있다”고 쉽게 단언한다.


물론, 예컨대 긴축에 맞선 투쟁이 다른 나라들에 앞서 한 나라에서 먼저 시작할 수 있다. 이것은 또한 한 나라 내에서도 그러한 투쟁이 다른 지역에 앞서 어느 한 지역에서 먼저 시작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러나 지금 걸려 있는 문제는, 그러한 투쟁이 다른 나라들로 보다 쉽게 확산되고 일반화 될 수 있기 위해서는 이 나라들이 모두 같은 경제적·법제도적 틀 안에 있는 것이 더 유리한지, 아니면 각 나라들이 투표를 해서 그러한 틀에서 분리해 나오는 것이 더 유리한지의 문제이다. 


SWP는 이 점을 깨닫지 못하고 ‘일국에서의’ 계급투쟁을 위한 전략적 처방을 내놓는다. 영국 노동자들은 EU에서보다 “독립적인” 영국에서 더 잘 그들의 이익을 증진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가정이다. 그러나 계급투쟁의 최근 역사는 반대 방향을 가리킨다. 지난 세기에 계급투쟁의 고조기들(1917~21년, 1930년대 중반,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은 거의 한 결 같이 투쟁의 이념과 방법들이 국제적으로 교차하면서 서로를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방식으로 일어났다. 한편, 영국의 거대한 계급투쟁들(1926년, 1984~85년)은 대륙과 별개로 떨어져서 일어났다. 이것은 맞다. 그러나 그 투쟁들은 또한 거대한 패배를 가져왔다.


SWP는 2012~15년에 그리스가 EU 트로이카에 반기를 들고 대항한 사례를 인용하면서 이것이 EU 탈퇴와 필연적으로 결부되어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고의적인 혼동이다. 시리자(급진좌파연합) 정부가 좌파 반긴축 정부로서 국가부채 지불 중단, 복지 삭감 중단을 밀고 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절박한 필요를 마치 브렉시트처럼 ‘자발적으로’ 스스로 원해서 하는, 협상을 통한 탈퇴의 과정인 양 멋대로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확실히 시리자 정부는 트로이카에 반항했어야 하지만, 그러나 이 반항은 EU로부터 그리스를 축출하려는 기도에 대한 능동적인 반대 투쟁과 병행하는 것이었어야 했다. 그리스의 축출은 사실상 그리스를 경제봉쇄 하에 몰아넣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반대로 그리스가 ‘그렉시트’를 단행했다면, 이 경제봉쇄의 정치적 책임을 EU 지배자들한테가 아닌 다른 애먼 데로 돌려놓는, 그리스가 스스로 책임을 옴팡 뒤집어쓰는 꼴이 될 것이었다.


단지 그리스에서만이 아니라 EU 전역에서 긴축을 종식시키는 데 초점을 맞춰 전 유럽 노동자들로부터의 연대를 호소하는 투쟁으로 나아갔어야 했고, 이것은 그리스 노동운동을 전 대륙 규모 저항운동의 선봉에 가져다 놓았을 것이다. 이러한 국제적 연대를 위한 슬로건에는 자본가들이 이 위기에 대한 책임을 지게 하는 요구가 포함되어야 한다. 국제적으로 통합 조정되고 상호 상승하는 노동자 행동에 의해 이 요구가 실행되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국제적 노동자 공동행동 속에서라면 보다 강력하고 전투적인 노동운동이 성취한 사례가 보다 약한 노동운동 쪽으로 급속히 확산되는 것이 능히 가능했을 것이다.


SWP는 EU가 그리스 인민들을 협박하고 고통으로 내몬 것을 두고 EU의 제국주의적 본질이 드러난 증거라고 지적한다. 이것 또한 맞는 얘기이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EU를 지배하는 국가들은 어떠한가? 영국을 포함하여 독일, 프랑스 제국주의들은 EU 제국주의와 별개인가? 갚을 수 없는 부채의 덫 속으로 그리스를 몰아넣은 것이 바로 이들 국가의 은행들, 금융자본가들, 신용평가기관들이 아닌가. 남유럽에 대한 이들 착취자들의 지배는 만약 EU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덜 제국주의적이었을까? 영국 제국주의, 독일 제국주의, 프랑스 제국주의는 EU 이전에도 존재했고, 앞으로도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마찬가지 경우로, 신자유주의는 EU가 없었다면 보다 질적으로 약했을까? 


EU를 탈퇴해도 미국과 초국적 기구들과 글로벌 금융시장은 제 자리에서 그대로 변함없이 동일하게 움직일 것이다. 이러한 조건에서 민족국가들의 현실적 독자성은 ‘탈퇴’를 통해 조금도 나아질 것이 없으며 민족국가 내에서의 계급투쟁을 위한 조건도 더 나아질 게 없다.


결국 ‘브렉시트’는 유럽 노동자들의 통일된 공동투쟁을 위한 객관적 토대(서로 연동된 경제, 낮아진 국경 장벽, 공통의 법제도적 틀)를 축소시키는 결과만 가져올 것이다. “전 유럽 규모의 신자유주의 체제”는 그에 대한 전 유럽 규모의 저항운동을 요구하는 것이지, 이러한 저항을 위한 기회를 끊어놓을 일국 국경 뒤로의 후퇴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6. 유럽 계급투쟁 : 전망과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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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위기와 함께 서로 경쟁하는 독일·영국·프랑스 제국주의들 간의 끊임없는 긴장과 대립 갈등으로 EU 위기, 유럽 위기는 더욱 심화할 것이고, 유럽의 불안정은 더 커질 것이며, EU 국가들 간에 뿐만 아니라 국가 내부의 모순도 첨예화할 것이다.


이른바 ‘유럽 프로젝트의 위기’, 즉 모든 나라에서 긴축의 지속과 정치·경제적으로 EU 지배를 강화하기 위한 독일의 공세적 행보로 인해 유럽 각 지배계급들 내에 민족주의적 해결책을 택하는 분파들이 발생하고 있다. 그것을 통해 이들 지배계급 분파는 소부르주아지와 중간층의 지지를 끌어내고 있다. 많은 나라에서 민족주의 세력, 우익 포퓰리즘 세력, 인종주의 세력, 극우 또는 파시스트 세력이 부상하고 있다. 이들은 난민들이나 그리스 등 남유럽 인민들을 위해서는 한 푼도 내 줄 수 없다고 한다. 프랑스의 국민전선 같은 세력은 스스로를 ‘프랑스 노동자’의 수호자로 자처하는 데마고그를 펼친다. 이민자들, 특히 무슬림 인들에 대한 인종주의적 공격이 이 모든 세력들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핵심 특징이다. 이들 정당 및 운동들 다수가 유럽 이민자들을 공격하는 선봉대로 나서고 있는데, 언제든 노동자계급에 대해서도 경제위기의 희생양으로 삼기 위한 공격 선봉대로 나설 것이다.


EU에서의 현 정치 위기는 유럽의 만성적 정체, 불균등의 증대, 불황의 도래 등으로 인해 훨씬 더 첨예해질 것이다. 독일 및 독일의 경제 사이클에 매여 있는 나라들은 EU/유로존에서 경제적 지위를 강화시킬 수 있었는데 이 반대급부로 남유럽 및 동유럽의 많은 나라들에서 만성적인 사회적·경제적 쇠퇴를 가져왔다.


독일 제국주의와 영국 제국주의는 산업 또는 금융에서 아직 국제적 우위를 유지하고 있지만, 역사적 강대국들 중 프랑스 제국주의(이탈리아와 스페인은 말할 것도 없고)는 EU의 경제위기에 의해 가장 큰 타격을 받았다. 수 십 년 동안 프랑스 정부는 독일의 대등한 ‘파트너’로 행세했지만, 이제는 ‘대등함’을 주장하는 것조차 어렵다고 보고 있다. 이제 프랑스 지배계급은 잃어버린 지반을 벌충하고자 프랑스 노동자들에게 독일의 ‘어젠다 2010’ 같은 노동 ‘개혁’을 강요하고 있다. 만일 이 노동 개악안을 막지 못하면, 프랑스 노동자계급에게 전략적 패배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프랑스 자본주의를 부활시킬지는 의문이다.


현 위기는 유럽 사민주의 당들이 주로 내걸었던 ‘사회적 유럽’ 계획이 공허한 깃발로 전락했음을 드러냈다. 이른바 유럽연합의 ‘가치들’도 마찬가지다. 난민 위기 동안 메르켈, 융커, 슐츠가 저 ‘유럽적 가치’라는 이름으로 다른 나라 지도자들에게 호소한 것들은 모두 노골적인 경멸로 거부당했다. 독일의 힘의 한계뿐만 아니라 유럽연합의 이데올로기적 위기를 또한 드러낸 것이다.


정치위기가 얼마나 첨예한 상황인지 이제 경제위기에 의해 한층 더 부각될 것이다. 최근에 경제위기는 남유럽을 타격하여 대대적인 저항과 격변을 낳았다. 이제 그것은 또한 프랑스, 독일, 영국 등 핵심 유럽 나라들에 도달하고 있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지만. 다가오는 경제적 대혼란은 유럽 위기에 기름을 부을 것이다.


명백하게도 유럽 정부들 간의 분열 및 각국 지배계급 내의 모순의 발현으로 인해 노동자계급과 피억압 인민에 의한 공동의 반격이 일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관료 주도의 노동조합 및 대중적 개량주의 정당들(사민주의나 스탈린주의 전통의 정당들)이 부르주아 지배를 위한 안정화 요소로 기능하면서 이러한 반격의 기회가 계속 유실되고 있다.  


따라서 2007-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의 기간과는 달리, 현재의 위기로부터 득세하고 있는 것은 이제 반동적, 민족주의적, 인종주의적 세력들이다. 이것은 지난 시기에 겪은 중요한 패배들의 결과이다. 또한 ‘전통적’ 노동운동의 지속적인 쇠퇴의 결과이자, 노동조합운동의 약화 및 권위 실추의 결과이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역사적으로 노동자계급에 의존하고 있는 당들, 대중적 개량주의 당들의 퇴락의 결과이다.


이로써 유럽 노동자계급은 약화된 지위로 그리고 ‘유럽 세력’으로서는 거의 마비된 상태에서 현 위기를 맞고 있다. 물론, 그리스에서 연금 개혁에 맞선 방어적 투쟁이 지속되고 있지만, 그 투쟁은 옥시 Oxi 의 배신 및 제2차 시리자 정부의 취임으로 그리스 노동자계급이 겪은 전략적 패배 속에서 수행되고 있는 한계를 안고 있다.


이 그리스에서의 패배는 유럽의 현 노동자계급 지도부들이 벌인 일련의 배신의 고점이었다. 시리자 지도부가 다른 나라 개량주의자들보다 특히 더 나빠서가 아니라, 시리자의 부상, 그리고 그와 함께 열렸던 준혁명적 정세가 권력의 문제, 노동자정부의 문제를 제기했고, 위기에 대한 혁명적 해결을 제기했기 때문이었다. 이 패배는 그리스에서만이 아니라 유럽 전체적으로 대대적인 반동적 귀결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 패배는 새로운 계급투쟁 분출이 다음 시기에 배제된다는 뜻은 아니다. 예를 들어 프랑스에서는 노동자계급에 대한 새로운 공격 물결이 2017년 대선 후에 예상되고 있는데, 이것은 다시 대규모 저항운동을 촉발시킬 것이다. 이것은 이미 현재 올랑드 정부의 노동 ‘개혁’에 맞선 운동 속에서 부분적으로 현실이 되고 있다. 이 운동은 계속 확대되고 있고, 청년층과 노동자계급 간의 공동투쟁의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동시에 개량주의 지도부들에 의한 배신과 사보타지가 다시 노동자계급의 자신감과 투쟁력을 갉아먹을 수도 있다.


유럽 위기가 지속하는 동안 내내 관료적으로 통제된 노동조합과 대중적 개량주의 사민당들은 계속 우향우 해왔다. 프랑스에서 올랑드 사회당 정부처럼 모종의 도전을 약속하고 출범했을 때조차도 그들은 급속히 지배계급에 투항하여 자신의 노동계급 기반을 배신했다.


현 위기 하에서 개량주의 지도부들은 ‘자국’ 정부, 자국 부르주아지와의 동맹을 추구했다. 모든 주요 정치 문제들에서 그들은 반대투쟁을 수행하길 거절했다. 증대되고 있는 제국주의적 개입과 군사주의에 직면하여 그들은 잘해야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들 대부분은 나토를 지지했고, 중동, 아프리카, 우크라이나에 대한 ‘자국’ 국가의 개입을 지지했다. 그들의 소수파는 평화주의적 반대 입장을 취했지만, 어떠한 대중운동 조직화도 없었다. 정말이지 ‘테러와의 전쟁’ 당시 그들은 민주적 권리의 유린을 지지했고, 반무슬림 인종주의에 공모했으며, 자국 지배계급과의 ‘신성’ 동맹을 체결했다. 심지어는 최근 프랑스에서처럼 테러 사태를 빌미로 한 계엄령 선포를 지지하기까지 했다. ‘난민 위기’ 동안 그들은 모든 이민자들, 모든 난민들과의 연대에 나서서 유럽 국경 장벽을 허물어야 할 판에 오히려 메르켈의 ‘통제된’ 이민 정책을 지지했고 심지어 오스트리아 사민당 정부처럼 국경 봉쇄의 선봉으로 나서기까지 했다.


노동운동과 사민주의 당들의 사회배외주의가 노동자계급과 피억압 인민을 더 한층 분열시키고 있다. 난민들, 이주 노동자들, 청년들이 그 첫 희생자이다. 영국 정부, 또는 독일 정부, 또는 프랑스 정부가 ‘먼 곳에 있는’ EU의 브뤼셀 관료들에 비해 어쨌든 차악이라는 착각에 빠져 자기 운명을 ‘자국’ 자본의 운명에 붙들어 매어놓은 민족주의적 해결책으로 노동대중들이 빠져들도록 사실상 부추기는 역할을 하고 있다.


제레미 코빈이 영국 노동당의 대표로 선출된 것은 이러한 추세를 거스르는 중요한 예외였다. 수 십 만 명의 당원 및 지지자들이 당을 좌지우지해 온 우파 당관료들 및 의원들을 패퇴시켰다. 그러나 이조차도 당의 우파 및 영국 부르주아지와의 단호한 단절 없이는, 그리고 당 관료 기구의 지배를 극복하지 못하고서는 단지 일시적인 승리로 그칠 것이다.


시리자의 배신, 스페인에서 좌파 민중주의 정당 포데모스의 우향우, 그리고 유럽 좌파당들의 갈지자 행보는 개량주의와 케인스주의가 어디서나 노동자계급에게 답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들의 핵심 슬로건은 ‘사회적 유럽, 민주적 유럽, 생태적 유럽, 페미니즘적 유럽, 반인종주의적 유럽’이다. 달리 말하면, 금융자본의 지배를 소위 ‘봉쇄’할 것이라는 사회적 시장에 기초하여 개혁된 유럽연합이 그들의 기치이다. 이 정책의 파산은 최근에 수백만 사람들이 목도했다. 오직 소수의 개량주의자들, 또는 시리자정부의 바루파키스 같은 ‘괴짜 마르크스주의자들’만이 이 프로그램을 부활시켜 죽은 시체에 새 생명을 불어넣으려 한다.


역설적으로 유럽 개량주의의 주류는 다른 시체, 이미 오래 전에 매장된 ‘독립적인 민족국가’라는 시체에서 구원을 찾고 있다. “자본주의 EU를 개혁하는 것이 유효하지 않다면, 왜 우리가 우리 ‘자국 국가’를 재장악해선 안 된다는 것인가?” 사회주의 노동자계급은 어느 민족이든 유럽연합을 탈퇴할 권리를 인정하고 방어할 것이지만(주창하지는 않더라도), 또 EU가 개혁될 수 없음을 인정하지만, 다수의 ‘독립적인’ 자본주의 국가들로 회귀하는 것이 대안이라는 공상적이고 반동적인 생각을 거부한다. ‘독립적인’ 민족국가 하에 ‘독립적인’ 민족 통화와 은행을 갖는, 그리고 국경 통제를 하고 대륙 전체적으로 이동의 자유를 폐지하는 이 모든 조치들은 철저히 반동적이고, 전 유럽에 걸쳐 노동자계급과 피억압 인민의 통일된 공동투쟁에 더 한 층의 장애물을 놓을 것이다.


자본주의 EU에 대한 이러한 반동적인 대답에 대응하여 노동자계급은 유럽 전역에 민주적·사회적 권리의 확장을 위한, 국경 개방과 긴축 폐기를 위한 공동의 투쟁으로, 전쟁과 제국주의적 개입에 반대하는 투쟁으로 맞불을 놓아야 한다. 통일된 전 유럽 규모의 행동을 촉구하고, 노동조합과 노동자 대중정당들에게 ‘자국’ 부르주아지와 단절하고, 위와 같은 투쟁들에 수백만 조합원, 당원들을 동원하도록 요구해야 한다.


일단 그 같은 투쟁이 대중파업과 점거 등의 형태로 대중적 성격을 띠게 되면 그 투쟁들은 권력의 문제를 다시 일정에 올려놓을 것이다. 2015년 중반까지 그리스에서처럼 다시 한 번 노동자정부 문제를 제기할 것이다. 2014~15년 그리스의 준혁명적 상황은 지배계급과 단절하여 노동자 민중들을 위한 비상 프로그램에 나서는 정부를 요구하였다. 노동자 통제 하에 대기업과 은행에 대한 몰수 국유화를 단행하고 인민의 필요에 부응하는 민주적 계획을 실시하는 등 비상 프로그램의 실행에 나서는 정부 말이다. 이러한 노동자정부는 오직 노동자평의회 같은 소비에트 유형의 투쟁기관들에 바탕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그리스 계급투쟁은 분명히 보여주었다.


이 같은 혁명적 프로그램은 한 나라에서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독일 경제도 다른 유럽 나라들과의 고리가 끊어진다면 엄청난 경제 파탄과 혼란이 상황을 압도해 버릴 것이다. 이 상황에서 고립되고 봉쇄된 일국 노동자정부는 지속될 수 없을 것이다. 유럽 노동자계급은 대륙을 크고 작은 자본주의 민족국가들을 얼기설기 엮어놓은 모자이크 같은 것으로 돌려놓는 것에서는 어떠한 대안도 찾을 수 없다. 반대로 노동자계급은, 그리고 한 나라에서 수립되는 그 어느 노동자정부든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전체 유럽을 재조직하는 투쟁에 나서야 한다. 이것은 전체 대륙을 ‘노동자 유럽’의 깃발 아래 하나로 단결시키고 사회주의 유럽합중국을 위한 투쟁으로 나아가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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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04 12:00 2016/10/04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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