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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사회로 전진하는 활동가연대> 4월호 기고.
‘에릭 the Red’을 위하여, ‘USA the Red’를 위하여
양솔규(전진부산 회원)
에릭 포너(Eric Foner), 『에릭 포너의 역사란 무엇인가?』, 알마, 2006년 11월
가만히 ‘역사’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세상이 내 마음대로 굴러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는 것 같다. 내가 원하는 대로 또는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세상이 만들어지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렇게만 된다면야 ‘운동’이니 ‘혁명’이니 하는 말은 사전에서 사라지고 말 것이다.
맑스는 ‘브뤼메르 18일’에서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가지만, 그들이 바라는 꼭 그대로 역사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스스로 선택한 환경에서가 아니라 과거로부터 넘겨받아 직접 맞닥뜨리게 되는 환경에서 역사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라고 썼다. 내 안에 ‘역사’가 있는 것이며 ‘애미애비’를 전제하고 태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맑스나 엥겔스, 그람시와 같은 고전적 맑스주의의 흐름에서 ‘미국’이라는 사회는 매우 특이한 조건을 가진 사회로 보였나보다. 이들 사회는 전(前) 자본주의적 요소들이 없는, 봉건적 조건이 거세된 순수한 의미의 자본주의로 여겨졌다. 말하자면 위대한 ‘역사적 전통’은 없는 대신에 선조로부터 내려온 ‘납덩어리’ 같은 부담도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의식과 계급전선이 왜곡되지 않고 투명하게 드러날 것으로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그 시대에 있어서는 영국과 독일 등이 혁명의 도화선이 될 것으로 보였는지 모르겠으나, 조만간 미국의 시대가 올 것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였다. 예컨대 새로운 시대의 준거점은 유럽이 아니라 미국으로 보였다.
하지만, 20세기 많은 학자들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이러한 미국 자본주의의 ‘순결함’은 사회주의 이행의 모범정답을 제시해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미국 사회주의의 발전을 가로막은 한계로 작용했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매우 아이러니하다.
과연 미국은 ‘사회주의’를 거부하는가? 사회주의로 가기에는 너무나 편안한 사회인가? 아니면, ‘실천의 동력’이 없는 것인가? 생산력이 아직도 불충분한 것일까? 최종적인 질문을 던져보자면 ‘왜 미국에는 사회주의가 없을까?’
여기 이와 관련한 ‘글’이 있다. <에릭 포너, 『에릭 포너의 역사란 무엇인가?』, 알마, 2006년 11월> 사실 ‘서평’란에 ‘책’이 아니라 ‘글’이라고 한 이유는 이 책의 모든 내용이 ‘미국 사회주의’와 관련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책은 2002년 미국에서 출판되었고 한국에는 2006년에 번역되었다. 이 책에는 ‘왜 미국에는 사회주의가 없을까?’에 대한 글뿐만 아니라, 역사가의 의미, 남아공에 대한 에세이, 러시아에 대한 글, 미국 흑인과 헌법 등 다양한 역사학자로서의 고뇌가 담긴 수필들이 담겨져 있다. 따라서 미국의 역사에 대해 쉽게 그리고 고급 해석을 바라는 독자들이 읽기에는 더없이 좋은 책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실의 운동과 관련해서는 ‘왜 미국에는 사회주의가 없는가’를 제외하고는 약간은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책만이 아니라, 미국의 역사, 저항의 역사에 대해서는 다른 책들 역시 필요로 한다는 것을 전제로 소개를 하고자 한다.
위의 질문은 예전부터 오래된 질문이기도 했다. 또한 나름 많은 학자들이 대답을 내놓기도 했다. 또한, ‘미국의 사회주의’의 ‘형성’이라는 실천적 문제는 ‘전진’ 동지들의 역사적 임무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미국의 (사회주의의 역사를 포함한) 역사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미국의 미래가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 하는 점은 단지 미국에만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다. 수출주도 개방경제 체제인 한국이 외부의 조건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현실이며, 더군다나 역사적,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미국이라는 나라는 (남미가 미국의 앞마당이라면) 한국을 자신의 ‘베란다’ 정도로 여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네그리 식 표현대로라면 미국 신자유주의의 확산의 결과 ‘제국주의에서 제국’으로 변화했고, (제국=미국은 아니지만) 미국의 미래는 어쩌면 제국의 흥망성쇠를 가늠하는 결정적 열쇠일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네그리는 지구 어느 곳이든 자신이 존재하는 곳이 곧 제국의 중심이라고 말했지만(실천의 의미를 부여해준다는 점에서는 고맙고 고무적인 발언이기는 하나), 내가 보기에, 또는 초국적 자본의 경영자가 보기에 그렇다고 본사를 부산이나 칸쿤에 가져다 놓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두 번째 이유는, 이게 더 중요한 이유일 수 있는데, 미국으로의 길이 어쩌면 우리의 앞날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맑스는 “자본”에서 “더 발전된 국가는 덜 발전된 국가들에게 그들의 미래상을 보여 준다”라고 했다. 물론 이러한 언급을 기계적으로 해석할 필요는 당연히 없지만 말이다. 우리가 미국식의 사회로 변할 것이라는 사실은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지는 일이기도 하다. 미국 이외의 나라에게는, 그리고 초국적 자본의 지배블록 밖의 노동자계급에게는 이것은 하나의 재앙이 될 터인데, 그러한 재앙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미국이 제시하는 강력한 궤적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미국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이 아닐까 생각한다. 바로 이러한 점이 에릭 포너가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내용이기도 하다.
저자인 ‘에릭 포너(Eric Foner)’는 말하자면 미국의 ‘에릭 홉스봄’ 같은 역사학자인 것 같다. 미국의 진보적 지식인이면서 존경받는 역사학자라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하지만 또한 미국의 전통에 비추어 볼 때 꽤나 정치적 보수주의자들로부터 민감한 인물인 것 같다. 마치 ‘강정구 교수’에 대해 한국 우파들이 난리를 치는 꼴이라고나 할까? 그에 대한 별칭이 ‘빨갱이 에릭 Eric the Red’ 이라고 불리워지는 것을 보면 에릭 포너가 단순한 학자라기보다는 정치적으로 실천적인 지식인이라는 점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뉴레프트 리뷰나 먼슬리 리뷰 같은 잡지에 글을 실어 오기도 했다.
그에게 쏟아졌던 비판, 아니 언어폭력을 들어보자면,
“미국을 망치고 있는 1백인 가운데 75번째 인물”(버나드 골드버그, 언론인)
“소련 체제의 노골적인 옹호자이며 미국에 대해서는 앙심을 품은 역사학자”(존 패트릭 디긴스, 뉴욕시립대)
“단연 눈에 띄는 역사가이며 급진 분파 및 여론의 빨치산”(시어도어 드레이퍼, 역사학자)
또한 그에 대한 찬사를 들어보자면
“지난 20년 사이 가장 많은 저술을 발표한, 독창적이면서 영향력 있는 미국 역사가”(워싱턴 포스트)
“에릭 포너의 책은 미국의 모든 학교에서 읽어야 하는 필수적인 저작”(냇 헨토프, 언론인)
“에릭 포너는 다른 역사가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쳐왔다.”(스티븐 한, 펜실베니아대 교수)
그는 미국 역사학자 단체인 미국역사학자기구(OAH), 미국역사학회(AHA), 미국역사가협회(SAH), 세 단체의 회장을 모두 지낸 단 두 명 중 한 명이다. 그만큼 미국 역사학계와 미국 사람들에게 학문적으로 인정을 받는 사람인 것 같다.
실제 에릭 포너의 글을 읽어보면 그다지 급진적이거나 위험한 사람 같지는 않다. 설마 이 사람이 권총이나 석궁을 들고 부시 대통령이나 대법관을 공격할 것 같지는 않다. 물론, 한 권의 책이 지배계급에게는 더 위험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한국에는 이 사람의 책이 처음으로 번역되었을 뿐만 아니라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마크 C. 칸즈가 쓴 “영화로 본 새로운 역사 2(소나무 출판사, 1998)”에 ‘역사학자 에릭 포너와 영화감독 존 세일즈와의 대화’라는 글이 번역되어 있다. 또한, 이 책을 번역한 손세호(현 평택대 미국학과 교수) 선생이 87년 ‘서양사론’에 쓴, 에릭 포너의 책인 “Nothing But Freedom(1983)”에 대한 서평이 4쪽 적혀 있을 뿐이다. 이 책에서 에릭 포너는 자신의 전공분야인 남북전쟁 이후 재건시대(Reconstruction Era)에 경제적 자원획득, 노동력 통제, 토지분배 등등의 문제에 있어 흑인노예와 농장주들의 투쟁 과정에 천착했다. 그리고 이들 간의 관계를 맑스주의적인 계급론에 입각해서 분석하고 있다.
또한, ‘진보저널 읽기모임(http://journal.jinbo.net/)’에서 먼슬리 리뷰에 실린 특집글을 번역했는데 (미국의 세기의 사회주의 잡지: 먼슬리 리뷰) 여기에 에릭 포너에 대한 언급이 딱 한 단어로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외국의 이론, 책, 주장들을 수입해서 매우 잘 버무리는 한국의 극성스러운 지식사회의 풍토를 생각해보면, 왜 ‘에릭’ 홉스봄이 알려진 만큼 ‘에릭’ 포너는 잘 안 알려졌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전진’이 꼭 ‘에릭’을 좋아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긴 요즘 ‘전진’과 ‘에릭’의 가는 길이 다르기는 하다.) 홉스봄이 영국에 국한되지 않는 세계사적 또는 유럽다국적 역사를 정리했다면, (영토로 보면 비슷하지만) 포너는 공간적으로 미국에 한정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또 다르게 보자면, 한국의 진보적 서양사학자들이 게으르며, 특히 미국사 교수들이 너무나 ‘미국적’ 시각을 가져서인지도 모르겠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한국의 역사는 영국보다는 미국과의 상호작용이 너무나도 많았음에도 말이다. 오히려 김동춘 선생의 책(『미국의 엔진, 전쟁과 시장』, 창비, 2004)이나 백승욱 선생(『미국의 세기는 끝났는가?』, 그린비, 2005) 같이 사회학자들의 분석들이 좀 더 대중적이거나 진지한 것 같다.
독일의 사회학자 좀바르트가 똑같은 질문을 던진 지 80년이 지났다고 한다. 그런데 에릭 포너가 보기에는 “왜 미국에는 사회주의가 없을까?” 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은 지금도 역시 그때나 지금이나 별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들이 있다고 한다.
첫째로 ‘사회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분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회주의를 너무 탈역사적으로, 추상적으로 취급하거나 상대방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마치 사회구성체 논쟁이 떠오르지 않는가?
둘째로, ‘부정의문문’에서 탐구를 시작했으니 대답이 탈역사적인 대답밖에는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바로, ‘질문’이 정확치 않은 바는, 유럽의 ‘사민당, 혹은 노동당’이 사회주의 정당 혹은 사회주의 정치라고 할 수 있는가와 관련이 된다. 사실은 이 질문은 미국에는 ‘사민당’, ‘노동당’이 없는 현실, 민주당과 공화당의 양당제라는 현실을 함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점에서 에릭 포너가 보기에는 ‘왜 미국에는 사회주의가 없을까?’ 라는 질문보다는 ‘왜 미국에서 사회주의가 한때 세력을 얻었다가 퇴장했느냐’ 혹은 ‘왜 유럽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회주의적 전환이 일어나지 않았을까’라는 질문이 역사적 질문이며, 해답 가능한 질문이라는 것이다. 서유럽 사민주의는 포너가 보기에는 ‘마르크스주의 원론과 근본적으로 배치’되고 있다는 것이다. 유럽의 좌파 정당들은 사회주의보다는 자유주의와 평등주의를 퍼뜨리는데 더 많이 이바지했으며, 사회의 혁명적 변화를 추구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미국 예외론’적 질문, ‘왜 미국에는 사회주의는 없는가?’라는 질문은 흔들리고 만다. 그렇다고 ‘미국 예외론’을 버리는 것이 자본주의 국가는 모두 똑같다는 것(사회과학적으로는 수렴론)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공통적 양상을 가지고 ‘미국 예외론’을 설명하는 근거로 삼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노동계급운동이 노조 중심의 경제주의나 사회민주주의적 개량주의의 한계 안에 갇혀 있는 현상’은 미국에서 뚜렷한 바와 똑같이 유럽도 그렇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세이무어 마틴 립셋의 “미국 예외주의(후마니타스, 2006)”와 비교해볼 수도 있다. (트로츠키주의에서 네오콘의 1세대로 전향한) 립셋의 ‘미국 예외주의’는 뛰어난 저작이기는 하지만, ‘미국인들의 자민족 중심주의 혹은 노골적인 우월주의 정치선전’에 빠져들게 만든다는 비판이 있다. ‘우리는 다르다’라는 것이 한편으로는 자만심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튀는 행동(예를 들어 전쟁수행)의 알리바이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 사회주의의 운명과 관련해 여러 가지 해석을 살펴보자.
첫째, 미국 노동자들이 현재의 조건이 만족스럽지 않을 때 투쟁에 나서기보다는, 서부 이주 등 노동이동을 택한다는 이른바 ‘변경 테제’가 있다.(프레드릭 잭슨 터너) 일리가 있는 설명이기는 하나, 포너가 보기에는 ‘사회적 유동성은 정치적 안정성을 높이기보다는 해치는 교란 요인’일 수도 있기 때문에 위의 테제는 설명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둘째, 미국인들의 국민성 자체가 계급의식이나 사회주의는 물론 다른 급진주의에도 적대적이었다는 설명이다.(루이스 하츠, ‘일치’학파) 미국인들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따라서 로크식 개인주의 관점이 지배하게 되었고, 따라서 ‘봉건주의가 없으면 사회주의도 없다’는 식의 설명이다. 하지만 이러한 정식화에는 흑인이나 여성 등의 집단은 아예 분석대상에서 제외되어 있다. 이러한 미국의 ‘통합성’에 대한 서술은 신노동사가 등장하면서 깨지게 되었다. 또한, 남부지역은 ‘봉건적’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여러 면에서 ‘전부르주아적’이었다는 것이다. 하츠의 논리대로라면 미국 남부는 사회주의의 온상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또한 미국 독립전쟁은 로크식 개인주의보다는 공화주의에 기초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포너가 보기에는 비자유주의적 사고방식 때문에 사회주의로 가지 않은 것이 아니라, 특정 형태의 급진적 관점이 끈질기게 살아남으면서 사회주의가 해야 할 역할을 대신했다는 것이다.
셋째, 미국 노동계급의 분열로 인해 사회주의 가능성이 없어졌다는 분석이 있다. 이 분석은 라이히, 고든 등의 분석인데 한국에도 번역되어 있다.(『분절된 노동, 분할된 노동자』, 신서원, 1998년. 노동시장론 등에서는 매우 중요한 저작이다.) 이들을 사회적 축적구조론자라고 일컫는데, 이들이 보기에는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하나의 거대한 단일 계급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인종에 따라, 종족에 따라, 성별에 따라, 숙련에 따라 점차 여러 ‘노동계급들’로 분열되고 있다는 것이다.1) 한국 또한 이러한 분열이 노동시장 내 분절로 표현된다는 것이다. 또한 다양한 인종적 배경이 계급의식을 약화시켰다는 것이다. 하지만 포너가 보기에는 이러한 사실은 분명 존재하지만, 다른 나라에서도 나타나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보편적인 원인을 가지고 ‘미국 예외론’의 증거로 삼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또한 종족적 소속감이 특정 상황에서는 강력한 저항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점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넷째, 어쩌면 이 질문은 기각 여부와 상관없이 매우 중요할 수 있는데, AFL-CIO(미국노총)의 문제이다. 현재 미국의 총연맹은 ‘역사적인 분열’을 거쳐 두 개로 나눠져 있지만, 어쨌든 간에 미국노총은 그동안 흑인, 여성, 신이민자들 등이 노동운동에 참여할 수 없는 구조였거나, 노조 지도부가 계급투쟁보다는 자본과 타협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한국의 현실을 봐도 중요한 문제이기는 하다. 말하자면 좌파들의 전통적인 주장이기도 한데, 에릭 포너가 보기에는 그렇다면 ‘잘못된 지도부’를 왜 조합원들이 선택하는 것인가? 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사고에는 지도부를 제외한 나머지 조합원이나 미국 노동자들은 한결같이 단결돼 있고 전투적이라는 점을 전제하고 있는데 이를 뒤엎는 사례도 얼마든지 많다는 것이다. 예전 98년 당시 한국에서도 이런 식의 주장이 떠돌 때, 상당히 진위가 의심스러웠던 기억이 떠오르기도 한다.
다섯째, 미국의 정치적 민주주의가 공짜로 주워졌기 때문에, 즉 미국 정치체제의 성격으로 인해 사회주의가 성공하지 못했다는 설명이 있다.(셀리그 펄먼) 하위적 요소로는 승자독식 대통령선거 제도 등이 양당제를 고착화시킨 점도 들 수 있다. 또한 미국 정치는 뉴딜 정책에서 보듯이 개혁 요구에 상당히 수용적이었으며 따라서 노동자들이 사회주의라는 정치적 ‘오버’를 할 필요가 없었다는 설명도 가능하다. 또한 사회당과 IWW에 대한 탄압에서 보듯이 직접적 탄압도 하나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설명들을 모두 묶어서 포너는 다른 나라에서도 볼 수 있는 양상을 가지고 설명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미국보다 더한 탄압들도 있었으며(독일이나 스페인), 다른 설명들도 너무 지엽적이라는 것이다.
위와 같은 설명들이 대체로 ‘외재적’이었다면 사회주의 운동 ‘내재적’으로 실패의 요인을 따져볼 수도 있겠다. 여기에는 IWW, 사회당, 공산당 등의 역사적 분석이 필요하다. 재미있는 것은 미국 사회당의 노동계급과의 상대적 거리감과, 원칙성이(유럽과 다른 반전의 원칙을 고수) 미국 사회당을 몰락시켰다는 점. 미국 공산당은 유럽 사민주의 정당처럼 전시 국가 방위에 협조했다가 노동계급으로부터도 멀어지고 탄압에도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원칙이냐, 생존이냐 하는 점이 중요할 수 있다. 일종의 선택이 필요한 시기가 있는 것이다. ‘역사적 인정투쟁’을 선택하고 장렬하게 전사할 것이냐, 현실의 운동과 대중을 지키기 위해 잠시 ‘유연과 눈가림’을 할 것이냐? 언제나 투쟁에 있어서 다가오는 딜레마인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 대해서는 설사 다소 주관적인 영웅심이나 다소 패배적인 느낌이 들지도 모르지만 두 개의 탁월한 저서 마이크 데이비스의 『미국의 꿈에 갇힌 사람들』(창비)와 리차드 O 보이어, 모레이스의 『알려지지 않은 미국 노동운동이야기』(책갈피)를 볼 필요가 있다. 또는 아주 최근에 나온 존 리드 평전(아고라, 2007)이나 워렌 비티가 주연한 영와 ‘레즈’를 참고할 수도 있다.
마지막 결론을 보자. ‘왜 미국에는 사회주의가 없을까?’ 하는 질문에는 바로 시간적으로 운명이 결정되어 있다는 식의 논리가 깔려 있다. 유럽이 걸어간 사회주의 정당(사실은 사회주의를 포기한 사민주의)길을 미국이 따라와야 하는데 왜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마치 토끼가 지나간 길을 거북이가 따라와야 하는데 왜 거북이는 그 길로 안지나 갔을까? 묻는 것이다.
포너가 보기에는 토끼는 그 길로 가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세히 보면 신자유주의 시대에 미국화가 진행되면서 유럽이 미국의 길을 뒤따라오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은 거북이가 저 앞에 있고, 토끼가 거꾸로 따라오는 형국이라는 것이다. 대중정치, 대중문화, 대량소비가 유럽보다 미국에서 먼저 시작되었고,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아래서 사회주의적 정치를 어떻게 정의해야 하느냐 하는 딜레마를 미국 사회주의자들이 가장 먼저 부딪쳤다는 것이다. 계급이념 소멸에 관해 유럽은 미국의 사례를 보고 타산지석으로 삼으라는 메시지다. 그렇게 본다면, 미국에는 사회주의가 왜 없는지 따지기 전에 너네들은 있었는지, 그리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미국처럼 되지 않으려면 뭘 해야 하는지 잘난 척 하지 말고 따져봐야 할 일인 것이다. 예전 90년대 초반 신경영전략이 대우조선을 뒤덮으면서 노동조합 활동이 힘들어졌을 때, 현대중공업 활동가들에게 대우조선 활동가들이 ‘너네들도 준비해라, 곧 닥친다’고 경고했다고 한다. 한 공장에서 어쩐다고 될 일인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어쩌면 중공업 활동가들은 당시 내부 준비를 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현재의 ‘세계혁명’의 출발이자 완성은 ‘미국혁명’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직된 미국 노동계급에게 이를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고, 미국 내 다양한 내부 식민지들의 노동계급의 새로운 흐름으로 등장하고 있는 인종, 계급, 성, 정체성에 착목해야 할지도 모른다. 또는 포너의 기대처럼 유럽과 미국의 새로운 급진적 흐름이 부상할 지도 모른다. 또한 이러한 흐름이 미국 역사에서 되풀이 되는 그저그런 흐름으로 끝날 수도 있다.
우리의 상황은 어떨까? 아니, 우리는 유럽이 미국에게 던지는 약간은 오만한 역사적 경험을 가지지도 못했다. 계급의 조건만을 보자면야 미국이나 한국이나 매한가지이며, 역사적 전통으로 따져 봐도 미국보다 나은 상황은 아닌 것 같다. 한국의 노동계급은 형성되었는가? 어쩌면 그럴 수도, 어쩌면 아닐 수도 있다. 한국의 노동계급은 단일한가? 이 질문도 난해하기는 마찬가지이다.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이러한 질문, ‘미국의 사회주의’를 따져보는 것은 우리에게는 학문적 관심이 아니다. 이미 이러한 제목을 가진 책들이, 논문이, 연구서들이 한국에도 나와 있고, 외국에도 나와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에릭’의 힘을 빌려 ‘전진’의 지렛대는 무엇이어야 하며, ‘전진’이 피해가야 할 것은 무엇인지 진지하게 따져봐야 하는 점이다.
과연 ‘전진’이 부르는 사회주의는, 그 애매하기 짝이 없는 ‘민주적 사회주의’는 사민주의인가? 그 이상인가? 우리의 사회주의는 역사적 조건을 충족시켜 가고 있는 중인가? 우리를 옥죄고 있는 노동시장과 정치제도는 어떻게 바꾸어야 하며, 한국 노동계급(들)의 역사적 배경인 한국전쟁, 북한, 기업별 노동조합, 계급정치와 의식의 후진성을 어떻게 할 것인가? 미국 노동계급, 또는 사회주의에 대한 질문에 순진한 호기심을 머금기에는 현실의 과제는 너무나 크기만 하다.
역사적 법칙을 그야말로 법칙으로 인식하고 있는 자는 단지 ‘열심히’만 살면 될지 모르지만, 법칙이 ‘실천’을 매개로 한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또한 그 ‘실천’의 귀결은 ‘승리의 필연성’ 못지않게 ‘실천의 패배’로 역사화되어 나타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악몽처럼 인식해야만 한다. 필연성이 가능성으로 전환되지 못하면 ‘승리의 필연성’은 ‘실패의 가능성’이 될 것이다. 봄에도 눈이 올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패배의 가능성을 인식하는 것은 실천적으로 매우 중요할 것 같다. 그 악몽이 현실화되었을 때는 주체와 역사에게 치명적인 상황이 될 것이다. 이는 맑스가 가르쳐 준 무서운 잠언이기도 하지만, 미국 역사가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 책의 원제는 Who Owns History?, 누가 역사를 소유하는가 이다. 노동계급이 역사를 소유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곧 부르주아지가 역사를 소유한다는 것이다.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가 같이 사이좋게 역사를 소유할 수는 없다. 중간은 없다. ‘전진’은 이 먹고 먹히는 길에서 작은 일을 할 수 있을 뿐이다. 한국의 노동계급이, 운동이, 얼마나 많은 성취를 이룰 지는 우리 같이 힘을 합쳐보아야 할 것이다. 포너는 미국의 사회주의의 운명에 대해 좀 더 기다려봐야 한다고 했다. 결정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소심할 필요도 없지만, 잘난 척 할 필요도 없다. 가보는 것이다. 나는 ‘R’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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