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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고성 창포리 동진대교 아래의 한 레스토랑에 다녀왔다.
고성이 좋은 이유는 마산창원과 가깝다는 것. 그리고, 통영이나 다른 곳 못지 않게
풍광이 좋다는 것이다.
어릴 때는, 그리고 서울 사람들은 남해안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매력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것 같다. 부산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호수 같은 잔잔함과 거칠지 않은 넉넉함이 있는 바다.
나중에 알고보니 마창의 많은 활동가들도 이 레스토랑(펜션)를
다녀오거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바다를 보면서 고기 구워먹고,
바다에 떠오르는 해를 보면서
잠이 깼다. 환상적인 경험이었다.
하지만, 이런 곳에 레스토랑(실은 숙박업)이 어떻게
이곳에 들어설 수 있었는지 의문이다.
걱정되는 것은 경남 고성은 공룡서식지로 유명한 곳인데
얼마전, 조선특구로 선정되면서 아름다운 남해안에
크고 작은 골리앗크레인이 들어서고 있다.
이제 고성의 잔잔한 바다도 자본의 폭격에 끝장나겠지.
그 다음 차례는 어디일까? 통영일까? 남해일까?
경남 고성 동진대교 건너 내산리 or 외산리?
팬션 앞은 바다
날씨는 화창하고, 단풍은 물들고, 바다는 잔잔하다
바다를 보며 깨는 아침
두 개의 봉우리는 섬이 아닌 육지이며,
그 사이에 옅게 비치는 봉우리도 역시 섬이 아닌 육지임.
방문객
정현종
사람이 온다는 건
사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의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비평 복간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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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차대신 빈집 공격한 돈키호테의 아이들/한학수 문화방송PD 부동산/임대차문제
2007/02/06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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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노숙인 없는 나라' 꿈꾸는 프랑스의 시도 - 한학수/문화방송 PD
프레시안 2007-02-02 오전 9:23:45
공공주택의 보급 확대를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 이미 100년 전부터 공공주택을 널리 보급해 온 프랑스와 같은 나라는 어떤 문제를 안고 있을까? 마침 프랑스는 연말연시에 노숙인, 근로 빈곤층에게 공공주택을 공급하는 문제로 큰 논란에 휩싸였었다.
프랑스 현지에서 이 문제를 직접 취재한 문화방송(MBC) 국제시사 프로그램
프랑스 파리 센 강을 가로지르는 생 마르탱 운하. 2006년 12월 16일부터 이곳에는 300여 개의 텐트가 붉은 물결을 이루고 있다. 텐트 안에 사는 사람은 파리의 노숙인들. 이들의 요구는 단순하다. 가족과 함께 살 수 있는 공공주택에 들어가게 해달라는 것. 지난 한 달 동안 프랑스는 이 문제의 해결을 둘러싸고 격론이 벌어졌다.
현장에서 만난 노숙인 아메드는 "우리는 성을 원하는 것도 저택을 원하는 것도 아니"라며 "아무 곳이든 조그만 방만 있으면 된다"고 자신의 소박한 요구를 밝혔다. 또 다른 노숙인 크리스티앙은 "파리에는 1만300채의 빈 아파트가 있다"며 "우리에게 이 아파트를 한 채씩 달라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들의 텐트촌에는 연일 노숙인을 만나고자 프랑스 현지뿐만 아니라 유럽의 다양한 언론에서 취재 경쟁을 하고 있었다. 그럴 만했다. 파리에서 시작된 시위는 어느덧 리옹, 마르세유, 니스 등 프랑스 주요 도시로 급속히 확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텐트 시위를 주도하는 것은 시민단체 '돈키호테의 아이들(www.lesenfantsdedonquichotte.org)이다.
생 마르탱 운하를 붉은 텐트들이 점령하다
돈키호테의 아이들은 2006년 12월 결성됐다. 영화배우 겸 제작자 오귀스탱 르그랑과 장 밥티스트 르그랑 형제가 산파 역할을 했다. 르그랑 형제는 노숙자 문제를 환기하고자 이 단체를 만들고 활동을 시작했다. 오귀스탕 르그랑은 노숙자 문제에 관심을 두고 이런 단체까지 만든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 파리 생 마르탱 운하, 유명한 관광지인 이곳을 관광객 대신 노숙인의 텐트가 채우기 시작했다. 텐트 시위를 통해 빈곤층의 주거권이 사회문제로 떠오른 현장(왼쪽). 텐트시위를 주도한 시민단체 '돈키호테의 아이들' 대표 오귀스탱 르그랑. 일반 시민도 하룻 밤을 노숙인 텐트에서 지내보라는 그의 제안은 큰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오른쪽). ⓒ문화방송
"자기 집 옆에서 누가 죽어가도 모르는 체 하는 프랑스 사회를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곳을 직접 찾아다녀서 프랑스 사람들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프랑스 사람에게 더 늦기 전에 충격을 줘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이 단체를 만들었다."
노숙인에게 텐트를 무료로 나눠주는 활동은 돈키호테의 아이들이 처음은 아니다. 이미 '세계의 의사들(www.medecinsdumonde.org)이라는, 의사들이 중심이 된 인권단체가 여러 해 전부터 수백 개의 텐트를 노숙자에게 꾸준히 지원하고 있었다. 이번에 이 단체는 수백 명의 노숙자를 파리의 한복판에 집결시키고, 파리 시민에게 호소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단순히 노숙자에게 텐트를 나눠주는 것을 넘어선 이런 여론 환기에 파리 시민을 비롯한 프랑스인은 바로 화답했다. 텐트 시위를 찍은 사진에 인터넷에 통해 널리 전파된 것도 이런 여론 환기에 큰 도움이 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텐트의 수도 늘고 있다. 이 단체 리옹 지부장 마린은 "1월에 20개로 시작한 리옹의 텐트가 계속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리옹의 벨쿠르 광장에서 만난 노숙인 제리는 텐트를 방문했던 여성으로부터 편지를 받게 된 사실을 소개하며 기뻐했다. 얼마 전 우체부가 '리옹 시 벨꾸르 광장 텐트 번호 41번 제리'라고 적힌 겉봉에 주소가 정확히 적혀 있는 편지를 전해주었다는 것이다. 제리는 "노숙인가 된 이후 처음으로 받아보는 편지"라며 감격스러워했다.
은행 건물을 점거한 노숙인
지난 1월 2일 파리 중심에 서 있는 한 은행 건물도 노숙인의 임시 보금자리가 됐다. 돈키호테의 아이들은 '검은 목요일', 'DAL'이라는 다른 두 시민단체와 함께 노숙인을 지원해 이 건물을 점거한 뒤 '주택 위기 대책부'라고 적힌 상징적 문패를 내걸었다. 8만 명이 넘는 노숙인 문제를 내버려두고 있는 프랑스 정부와 사회에 건물 점거로 항의 표시를 한 것이다.
리오네즈드방크 그룹이 소유한 이 건물은 매수자가 나서지 않아 몇 해째 비어 있는 상태였다. 열린 창을 통해 건물로 들어간 노숙인은 급한 대로 침실, 부엌, 욕실을 꾸며 놓고 총 8가구의 보금자리를 새로 마련했다. 두 아들과 함께 자리를 잡은 할피다는 불법 점거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 새해 이튿날인 1월 2일부터 노숙자와 무주택자들이 점거해 살고 있는 파리 증권가의 빈 건물. 이곳에 3개의 시민단체들이 모여 '주택 위기 대책부'를 꾸리고 8가구가 생활하고 있다(왼쪽). 프랑스 파리 인근의 공공주택. 지난해 프랑스에 건설된 43만 채의 주택건물 중 14만 채가 공공주택이다(오른쪽). ⓒ문화방송
"한 달 전 살던 아파트에서 쫓겨났다. 대부분의 살림은 친구의 창고에 임시 보관돼 있다. 바깥에서 노숙인으로 지내는 것보다는 이렇게 불법 점거라도 해서 사는 게 낫기 때문에 이곳을 선택했다. 물론 나도 아이들을 내 집에서 돌보기를 바란다. 내가 원하는 것은 진짜 집이다."
서유럽에서 이렇게 비어 있는 건물을 점거하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예술가들이 비어 있는 건물을 점거해 작업실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는 '스콰트(squart)'라고 불리는 이런 흐름과는 다르다. 이번 점거는 생 마르탱 운하에서 진행되는 텐트 시위에 맞춰 노숙인 문제에 대한 여론 환기를 목적으로 이뤄졌다.
이번 운동의 중심에 있는 생 마르탱 텐트촌에는 프랑스인 노숙인만 있는 것이 아니다. 프랑스인 노숙인이 텐트 시위를 벌이는 한 쪽에서는 이주 노동자 노숙인이 주거권 보장을 요구하며 단식 농성을 하고 있었다. 프랑스 국적도 없고 일정한 주거지도 없는 이들은 "사회로부터 두 번 소외된 것이나 다름없다"고 호소했다.
알제리인 노숙인 하산은 9일째 단식 농성을 하고 있었다. "8년 동안이나 가족을 못 보고 이렇게 지내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잠도 못 자고 울기도 한 게 하루 이틀이 아니다. 나는 정말 참혹한 삶을 보내고 있다." 하산에게 굶주림은 큰 고통이 아니었다. 주거권을 확보하는 것이야말로 그의 삶을 실질적으로 개선하는 첫걸음이었다.
프랑스가 노숙인 문제에 답을 하다
가난한 이들의 주거권을 인정해 달라고 요구하는 노숙인의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하여 나가자 극우정당 국민전선(FN)은 "노숙인에게 국가가 살 집을 제공한 것은 비현실적"이라며 반대 뜻을 분명히 했다. 국민전선 파리지부장 마셜 빌드는 "노숙인 중에는 동유럽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온 이민자들이 있다"며 "프랑스가 이들 모두를 감당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극우정당의 이런 주장에도 1월 한 달 동안 프랑스 여론은 노숙인 시위를 지지하는 쪽으로 점점 변해갔다. 먹을거리, 옷가지, 생필품을 모아서 노숙자에게 전해주는 시민의 발길은 끊이지 않고 있었다. 취재 중에도 많은 시민이 옷과 먹을거리를 노숙인의 텐트촌에 전해주고 있었다.
▲ 생 마르탱 운하 텐트 시위 현장에서 생활하고 있는 여성 노숙인(왼쪽). 각국의 이민자들이 모여 사는 프랑스 사회, 이주 노동자도 주거권 보장을 요구하며 텐트 안에서 단식 농성을 벌이고 있다(오른쪽). ⓒ문화방송
부인과 함께 옷과 담요를 준비해 온 뒤바르브는 정부의 대책 마련을 거듭 촉구했다. "노숙인은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집이 없으니 일자리를 얻을 수 없고 그러면 공공주택에도 들어갈 수 없다. 이런 악순환을 끊으려면 정부가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 이들이 지금 이렇게 시위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오는 4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는 정치권도 더는 여론을 외면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시위가 17일째이던 지난 1월 3일, 우파 정부의 총리 도미니크 드 빌팽은 노숙인의 주거 문제에 대한 법률적 보장을 약속했다. 빌팽은 "이 법안이 채택되면 2008년 말부터 노숙인, 가난한 노동자, 모자 가정에 주거권을 보장해 줄 것"이라고 밝혔다.
프랑스 정부는 중대한 결단을 내렸다. 또 하나의 혁명이 출발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취재가 진행되던 지난 1월 17일 프랑스 국무회의는 '주거권 보장 법안'을 의결했다. 이 법안은 2008년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된다. 이 법을 보면 2012년부터는 집 없는 사람은 국가를 상대로 고소를 할 수도 있다.
공공주택 17%가 있어서 가능했다
프랑스에서 공공주택은 전체 주택의 17%를 차지하고 있다. 지난 2000년부터 도시마다 20%에 해당하는 주택을 공공주택으로 짓도록 하는 도시재건법이 도입되기도 했다. 2006년에도 14만 채의 공공주택이 공급되었다. 공공주택은 같은 크기의 민영주택보다 절반 이하의 낮은 가격에 공급된다.
그간 노숙인의 경우는 일자리가 없다는 이유로 공공주택에 들어가는 게 사실상 불가능했다. 바로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가 지난 한 달 동안 프랑스 사회를 뜨겁게 달궜던 것인데, 정부가 마침내 해답을 내놓은 것이다. 프랑스 정부는 현재 1억 유로(약 1200억 원)의 예산을 책정하고 있다.
전체 주택 시장에서 20% 가까운 공공주택을 갖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공공주택이 확고하게 주택가격의 중심을 잡고 있으니, 민영주택의 부동산 가격이 천정부지로 솟구칠 수가 없다. 부동산 투기가 발붙이지 못하도록 공공주택이 확고한 '버팀목'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물론 지난 100년간 공공주택 정책을 펴 온 프랑스에도 헤쳐나가야 할 과제는 있다. 1960~70년대에 늘어난 공공주택 수요를 감당하고자 일부 지역에 집중적으로 지어놓은 공공주택 지역이 슬럼으로 변한 것이다. 물론 이것은 주택만의 문제가 아니라 실업과 차별 등 사회의 구조적 문제와 복잡하게 얽혀 있다.
▲ 파리 시내를 뜨겁게 달군 노숙인의 텐트 시위는 프랑스 주요 대도시로 확산하고 있다. 프랑스 남동부 도시 리옹 벨쿠르 광장도 붉은 텐트들이 채우고 있다. ⓒ문화방송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자 현재 프랑스는 공공주택 지역을 재개발하면서 저밀도의 낮은 아파트를 짓고 있다. 또 근본적으로는 공공주택 지역의 계층적 특성을 다변화시키거나 혹은 차별적 요소를 없애기 위한 '사회적 혼합(social mix)'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이런 고민도 공공주택이 전체 주택의 3%도 안 되는 한국의 상황을 염두에 두면 '행복한' 것이다.
프랑스 공공주택 영역의 모든 단체와 협회를 대표하는 '주거를 위한 사회연합'의 폴 루이스 사무총장은 이렇게 말했다. "영국이나 미국식 정치의 관점에서 보면 공공주택 정책은 일종의 자선사업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프랑스의 개념이 아닙니다. 우리는 공공주택 정책이 사회를 통합시키고 나라를 연대할 수 있게 하는 하나의 도구라고 생각한다."
한학수/문화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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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서울 독립영화제 대상을 수상한 이현정 감독의 <192-399 더불어 사는 집 이야기>은 한국에서 최초로 시도된 노숙인들의 빈집 점거 운동을 다룬 영화다.
주된 내용은 청계천 8가 삼일 아파트 노숙인 단체 '더불어 사는 집'의 삶과 노숙인들의 얼굴을 담고 있다. 그와 함께 노숙인들이 자활적으로 생계유지와 점거운동(squat)을 시도하였다는 기념비적인 사건을 기록한 영화다. 우리의 생계가 위협받는 이야기를 보고 듣는 것은 가슴 아프다. 서울역 및 청량리 일대의 노숙자들이 한 겨울 시린 바닥에서 동사하는 사건들이 빈번하게 일어나며, 배를 곯아가면서 가난과 싸워나가고 있다. 동시에 그 가난보다 동정의 시선과 냉대는 그들을 더 버겁게 만든다. <더불어 사는 집>은 그런 노숙인들의 소외된 모습과 척박한 환경에서의 자활의지를 다룬 영화이다. 출발은 그렇다.
영화가 시작되고 30분이 넘어서면서 삼일 아파트가 철거되려 하고, 성북구 정릉의 비어있는 임대아파트를 새벽에 기습점거한다. 그리고 성공적으로 혁명을 완성하면서 새로운 역사를 썼다는 축제 분위기로 일변한다. 아마도 여타의 감독들이라면 그 부분에서 극적 연출을 조장하거나 혹은 그 부분만으로도 한국 노동사와 운동사에 역사를 썼다며 자축하면서 이들의 앞날에 희망의 빛을 보냈을 것이다. 헌데 이현정 감독은 그 역사적 시도를 지켜보았는데도 카메라를 공간에서 이탈시키지 않는다. 카메라는 여전히 청계천 8가와 정릉에 있는 '더불어 사는 집' 구성원들을 담는다. 이현정 감독은 '그래도 삶은 지속 된다'는 의지와 시선으로 그들을 걱정스럽게 쳐다본다. 카메라가 떠나지 못하는 것은 감독 스스로 그들에게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 마음과 동시에 노숙인들에 대한 애정과 걱정의 시선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 부분에서 영화를 끝마친다면 영화는 기록의 의의를 가진 다큐가 되었을 것이다. 감독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이 영화가 끝나면 노숙인 아저씨들의 다음 생은 어떻게 될까란 의문을 가지게 된다. 그것이 감독이 떠나지 못하는 이유이며 기록을 멈추지 않는 이유가 된다. 영화 후반부는 외부와의 투쟁이 아니다. 공권력이나 사회집단 혹은 복지시설과의 대화와 타협보다는 내부적인 문제로 나아간다. '더불어 사는 집'을 조직하고 이끌어나가는 양고문은 전형적인 민중투사이며 다혈질적인 사람이다. 그는 모든 것에 공격적이고 급하게 일을 처리하며 입버릇처럼 "각을 세우라"고 말한다. 그의 눈에는 자기 일이 가장 급하고,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어야 했다. 그런 양고문은 민노당의 승인과 지원 없이도 시청 앞에서 난동을 부리며 조직력 없는 시위를 벌이게 된다. 모든 것을 독단적으로 대처하는 그에게 과연 노동의 진정성이 무엇인지를 묻게 된다. 양고문은 노동운동에서 필요한 리더십이 결여되어 보이며 스스로 혁명가의 꿈에 도취되어 있는 인물이다. 양고문과의 갈등은 양고문이 구성원들을 동지가 아니라 혁명의 소모품이자 전리품 정도로만 취급해 왔기 때문이다. 노숙인들을 위하는 행동과 실천의 의의는 인정할 수 있지만 양고문의 무소불위, 독단성은 눈뜨고 지켜볼 수가 없다. 구성원들은 양고문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양고문으로 인해 오히려 주거공간이 불편해지게 된다. 운동권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동시대적 고민을 이 영화가 담고 있는 것이다. 이현정 감독은 최근 독립영화 다큐멘터리의 도식과도 같은 일인칭 작가주의를 피했다. 이 영화는 감독이 개입하는 부분을 최소화하고 있으며, 의도적인 인터뷰를 기피한다. 그리고 집요한 추적보다는 집요한 '머무름' 쪽을 선택한다. 영화는 여타의 다큐멘터리가 시간을 추적하거나 인물을 추적하는 방식을 택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는 다큐에서 맛볼 수 있는 카메라의 진정성을 몸소 느끼기 어렵다. 손에 들고 있는 카메라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점점 고정되어 있다는 의식이 들기 시작한다. 그런 지점에서 카메라는 눈이 아니라 공간 그 자체에 동화되어 간다. 카메라가 공간이 된다는 것은 이 카메라가 노숙인들의 생활 터전인 청계천의 한 아파트가 되고 정릉의 다세대 주택이 되어간다는 것이다. 카메라는 그곳을 떠나지 않고 있으며 또 빈번히 드나드는 노숙자들에 질문을 던지거나 그들의 터전 밖에서 삶을 추적하지 않는다. 영화는 눈물이 메말라 있다. 이현정 감독은 비극적 요소를 추적하고 촬영할 수 있음에도 과감히 그 방식을 거부한다. 현숙이 집을 나갔을 때 현숙의 처지를 궁금해하지 않는 카메라, 아들이 죽어가고 있어 병원에 내려간 아저씨를 뒤쫓지 않는 카메라, 집을 떠나가는 사람들의 근황은 내래이션으로만 처리될 뿐이다.
감독 스스로 고민을 하였다고 하는 이 부분은 사실 가장 중요한 대목이다. 대한민국의 노숙자들의 경향은 유럽과 다르게 가족 단위가 아니라(가족 단위의 노숙인을 다룬 영화는 근작으로 다른덴 형제의 <더 차일드>가 대표적이다) 단신인 경우가 많다. 남성들의 경우는 대부분 그 가정으로 돌아갈 목표가 있거나 가장 최후의 보루이다. 그래서 남은 자들은 이미 예상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최후의 안식처는 가정이기에 떠나는 자들을 말리지도 않으며 떠나는 것을 묻지도 않는다. 이현정 감독은 후반부로 갈수록 노숙인들과 하나가 되거나 동화되어간다. 어쩌면 다른 다큐에서 볼 수 없는 다큐멘터리의 진정성을 이 영화에서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결국 이 영화는 두 가지를 모두 잡는다. 내용적인 측면에서 최초의 점거시도를 기록한 영화이자, 형식적인 측면에서 최근의 한국 다큐멘터리들이 고집스럽게 주관적이고 감성적인 기록영화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면서 반대편에 선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이현정 감독의 걱정스러운 시선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현정 감독은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는 화두를 던진다. 동시에 우리의 시선에서 배제된 사람들이 세상과 다투고 그들 안에서 불협화음을 가지는 것을 불안하게 지켜본다. 그녀의 고민은 최초 공개된 영화 마지막에 에니메이션을 통해 자신의 의지를 통해 담아내었다. 에니메이션이 요구하는 것은 사회적 시선을 가져달라는 요구와 그래도 희망을 놓지 않겠다는 감독 스스로의 따뜻한 다짐이었다. 비록 그 부분은 재편집 과정에서 철저히 객관적 거리 두기로 제외되었지만, 기록은 끝났으나 삶은 계속되고 있으며 아직도 희망을 위한 날갯짓은 이어지고 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사회의 따뜻한 시선과 관심이며 감독이 바라는 것은 그들의 자활적 운동이 하나의 연대를 통하여 동일한 목소리를 갖는 것이다. 노숙자들의 진심과 감독의 진심이 세상과 소통하는 그날이 왔으면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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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인들의 반란, 빈집점거 Agado(행동)
2005/05/12 0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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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지난 12월 3일 에릭 포너 교수가 워싱톤 포스트에 기고한 글을 번약한 것입니다.
By Eric Foner (콜롬비아 대학의 역사학 교수) 번역 윤희경(본지 칼럼니스트) 1948년 하버드 대학의 슐레징거 교수가 55명의 역사학자에게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을 "위대한 대통령"에서 부터 최하위의 "실패한 대통령"까지로 그 순위를 매겨 달라고 요청한 이후, 미국의 역사학자들에게는 역대 대통령에 대한 이런 평가 순위조사는 흥미로운 화제가 되었다. 대통령에 대한 평가순위가 바뀌어 진다는 것은 우리가 역사를 어떤 관점에서 보는가를 반영한다. 첫 여론조사 당시에는, 미국의 남북전쟁직후의 재건 사업 기간에는 흑인에게 투표권을 주었기 때문에 부정부패가 생겼고 부실한 행정을 하였던 것으로 판단하였다. 따라서 열렬한 백인우월권자로서 노예에게 기본권을 주는 것을 반대하였던 Andrew Johnson 대통령 (역자 주: 17대 대통령, 1865-1869)은 "준 위대한"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와 반대로 학자들은 이 재건사업이 노예제도의 잔재로 부터 인종화합에 의한 민주주의를 세우려는 숭고한 노력임에도 불구하고 결함을 갖고 있었기에 Johnson 대통령은 "완전히 실패한" 대통령으로 평가가 바뀌어 졌다. 그렇지만 흔히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세월이 지나가도 놀라울 정도로 크게 바뀌지 않는다. Abraham Lincoln, George Washington 그리고 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은 항상 "위대한" 대통령의 평가를 받았다. 대부분의 대통령은 “중간" 혹은 좀 격하하면 "2류"의 평가를 받는다. Johnson, Franklin Pierce (역자 주: 14대, 1853-1857), James Buchanan (15대 1857-1861), Warren G. Harding (29대 1921-1923), Calvin Coolidge (30대, 1923-1929), 그리고 Richard Nixon (37대, 1969-1974)은 꼴찌 그룹에 속하고 있고 현 대통령인 부시가 이 그룹에 들어갈 영순위 후보자이다. 그 이유는 이들의 역사를 돌이켜 보고 부시의 정책을 비교하면 알 수 있다. 국가가 위기에 처하였을 때인 남북전쟁 전의 Pierce 와 Buchanan의 두 대통령, 전쟁 직후의 Johnson은 그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였다. 고집통이고, 편협하고, 비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결정적인 실수에 대한 대응책을 고려하지 않으려고 하였고, 이 대통령들은 아첨꾼들 속에 둘려싸였고, 퇴보적인 정치세력 (그 당시에는 노예제도와 인종차별주의에 찬동하는)에 영합하는 정책을 수립하였다. 1854년, 1858년, 그리고 1866년에 있은 중간선거(역자 주: 금년 11월 의 선거와 같이 국회위원만을 선출하는 선거)에서 패배까지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대통령들은 국민의 힘찬 여론을 무시하고 결함 있는 정책을 고집하였다. 부시 집권은 바로 이들 대통령을 상기하게 만든다. Harding 과 Coolidge 대통령은 임기 중 (각각 1921-1923 그리고 1923-1929) 부패하였고, 돈과 특혜를 큰 기업으로 빼돌린 것으로 뚜렷히 기억되고 있다. 이 두 대통령은 자신의 소득과 기업의 세금을 절감하고 노동조합을 제거하기위한 기업주의 노력을 지원하였다. 행정부의 관리들은 로비이스트와 기업주로 부터 킥백과 뇌물을 받았다. 월스트리트신문은 "정부가 기업과 이처럼 밀착된 적은 사상 전무하고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라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이 신문은 이들보다도 더 심하게 연줄을 따지고, 더 부패하고 더욱 친기업적인 부시정부를 미처 예견하지는 못했다. Nixon은 국내적으로 그리고 외교정책에서 몇 가지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룩하였지만, 그는 오늘날 헌법을 무시하고 대통령의 권한을 남용한 것을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철저한 비밀을 지키는 것과 언론에 새어나가는 것에 대한 근심에 사로잡혀 있어, 그는 모든 비판들을 국가안보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였고 미국시민에 대하여 불법적인 스파이 행위를 하였다. Nixon 자신은 법위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부시는 한 술 더 떠 법을 무시하였다. 앵글로-아메리카의 법제도의 근본인 마그나 카타 (역자 주: Magna Carta는 대헌장이라는 뜻으로 1215년 영국의 왕 King John이 누구나 법 앞에서는 평등하고,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고, 재판 없이는 투옥되거나 처벌되지 않는다는 인간의 기본권을 선언한 것) 시대에도 범죄혐의자가 가졌던 권리까지 빼앗으려고 하였다. 즉 공정치 못한 배심원에 의한 재판, 변호사를 고용할 권리와 혐의자들에게 불리하게 적용되는 증거물에 대하여 혐의자가 이를 알 수 있는 권리를 허용하지 않은 것이다. 부시는 제정된 법에 서명하면서 언급한 수십 번에 걸친 발언에서 그는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법조항을 무시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부시행정부는 전쟁포로에 대한 정책을 수립하면서 미국을 수치스럽게 하였고 사실상 전 세계로부터 따돌림을 받았다. 통상적으로 전쟁시에는, 대법원은 국방에 관계되는 대통령의 정책에 대한 판결을 내리는 것을 자제하여 왔다. 그러나 전례 없이 부시의 전쟁포로에 대한 정책을 대법원이 힐책한 것은 부시행정부가 준법정신에서 얼마나 멀리 이탈되었는가를 증명하는 것이다. 부시와 비견되는 또 다른 대통령은 James K. Polk 이다. 몇 역사학자들은 Polk 대통령을 존경한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Polk 대통령은 멕시코와 미국과의 전쟁 (1846-1848)을 치루면서 재임기간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남겨 역사학자들로 하여금 쉽게 연구할 수 있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Polk 대통령은 미국에 도발하지 않은 멕시코에 침공을 개시하여 멕시코 영토의 1/3을 미국영토로 바꾼 대통령으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당시 일리노이 주 출신 연방하원인 Lincoln은 Polk 대통령이 전쟁의 발단원인을 -멕시코가 미국을 침입하였다고- 국회와 국민에게 오도한다고 비난하였다. "대통령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언제나" 다른 나라를 침공할 권리를 가진 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전쟁을 시작할 수 있는 대통령의 권한에 대하여 "어떤 제재"를 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Lincoln은 언급하였다. 오늘날, 우리는 미국이 Lincoln의 경고에 귀를 기울였으면 하고 바란다. 역사가들은 미래를 예측하는 것을 꺼린다. 부시가 예를 들면 2050 년에는 어떻게 평가될 것인지 확실하게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어찌되었든지 부시의 첫 6년 재임 기간 동안에 그는 "실패" 판정을 받은 전임 대통령들이 가졌던 ( 역자 주: 위에 열거한 다섯 대통령을 칭함) 리더십의 결여, 잘못된 정책과 권력 남용을 모두 종합적으로 사용하여 집무하였다. 따라서 나로서는 부시를 미국 역사상 최하위의 대통령이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
동래에서 남마산으로 가는 버스 시간표(노포동,동래 경유,진동,배둔,고성,통영)
(20분을 빼면 노포동 출발 시간임)
동래->남마산
오전>
8:00
8:45
9:45
10:15
11:25
오후>
12:15
1:15
3:00
4:30
5:25
6:00
6:30
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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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포동->창원
(20분을 더하면 동래정류장->창원 가는 시간이 된다)
06:40
07:00
08:30
09:10
09:50
10:50
12:30
13:50
15:50
16:50
18:10
19:10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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