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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실>2004.12월 : 선로를 복구하라!《탈선》,《네비게이터》

 

제목: 탈선
지은이: 앤드루 머리
가격: 12000원
발간일: 2003년 2월
출판사: 이소출판사


리뷰 출처 : 영남노동운동연구소 <연대와실천> 2004년 12월호 통권 126호
http://www.ynlabor.net

선로를 복구하라!《탈선》,《네비게이터》


양솔규 영남노동운동연구소 사무국장
redstar@jinbo.net


2000년대 거세게 몰아친 신자유주의가 단지 경제적인 궁핍만을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세상을 자기의 뜻대로 창조하는 인간의 의지를 거세시키고, 모든 행위의 주체, 논리의 출발점을 자본으로 단일화시키는 것. 이것이 신자유주의 위험성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 사회는 합리성을 중요한 작동논리로 상정하지만, 이상하게도 사람들의 삶은 점점 더 비합리적인 위험에 직면하고 만다. 따라서 우리는 합리성 자체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어떤 합리성인가? 경제적 수익을 우선시하는 합리성인가? 사람들의 삶을 중심에 둔 합리성인가?



신자유주의를 이끌었던 나라 중 하나인 영국에서는 이러한 잘못된 합리성에 기초해 진행된 철도 사유화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고 결국 철도를 다시 국유화시키는 쾌거를 거두었다. 물론 아무런 대가 없이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영국 국민들은 연이은 열차사고로 인한 불안감을 감내해야만 했고, 자신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데 사용되어야 할 막대한 부가 사유화의 혜택을 입은 소수의 자본가에게 공적 보조금이라는 이름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또한 안전은 고려하지 않은 채 달리는 열차는 결국 고통을 묵묵히 감내하던 승객들에게 죽음을 선사했다. 죽음의 질주, 위험의 증대 속에서 사람들은 뭔가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영국 철도 기관사 노조(ASLEF)의 공보담당관인 앤드루 머리가 쓴 <탈선>(이소출판사, 오건호 옮김, 2003년)은 영국 철도 사유화의 참혹한 결과와 해법을 모색하고 있다. 영국의 우익 연구소들이 내놓은 철도 사유화 방안은 효율과 경쟁이라는 미명하에 보수당 대처 정부의 광신적인 믿음을 배경으로 추진되었다. 노동당이 ‘집권 후 재 국유화’를 주장하는 가운데, 신속하게 추진된 철도 사유화는 영국 철도를 100여 개의 수많은 기업으로 분할시켰다. 화물 철도는 세 개의 기업으로 분할(이후 다국적기업 EWS의 민간독점으로 귀착), 열차운행은 25개의 기업으로, 여객 차량 임대회사는 3개의 기업으로, 선로유지 보수 회사는 3개의 기업으로, 선로, 역, 다리 등 시설은 레일트랙(Rail Track)의 독점으로 귀결되었고, 그 밑에 하청관계에 있는 수많은 분할 구조가 존재하게 된다. 철도산별노조(RMT) 위원장 지미 냅은 철도 안전성 심의 컬런 조사위원회에서 재하청 계약으로 ‘철도와 연계된 기업이 적어도 1,000개는 될 것’이라고 답변했다.



<민영 철도의 구조>




이러한 분할 체계 하에서 기존 고용과 노동조건에 대한 협상을 보장받았던 노동자들의 근로조건은 악화되었고, 기업 간 수많은 계약관계들 속에서 그 누구도 철도 운행과 안전과 관련한 총체적인 책임 속에 있지 않게 되었다.
사유화의 강력한 논리를 살펴보자. 영국 정부와 자본 측은 사유화를 토해 승객 수와 화물 운송량이 증가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이 과연 사유화를 통해 이루어진 것인지, 아니면 자연증가분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오히려 철도의 강력한 경쟁자인 도로운송과의 경쟁에서 밀리고 있었다. 더군다나 경쟁력 없는 노선의 경우 공공적 이익에 반함에도 불구하고 폐쇄되었고 이는 ‘수익성’의 논리 하에 운송량의 억제를 자본 측이 조장했음을 나타낸다. 또 다른 사유화 신앙의 주장은 납세자인 국민의 부담이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납세자들의 보조금은 주식 보유자의 은행 계좌로 흘러 들어가고, 레일트랙 등에 대한 보조금의 주요 부담자는 국민들이다.

결국 국유화 시절보다 더 많은 자금이 보조금으로 지급되고 있는데, 국유화 시절에는 보조금이 그나마 철도 부문에 머물면서 쓰이고 있었던 반면, 사유화 이후에는 주주들과 사기업의 금고에 쌓이고 있는 것이다. 레일트랙은 매년 10억 파운드의 보조금을 받아, 주주들에게 3억 5천만 파운드를 배당금 명목으로 지급하고 있다. ‘경쟁’ 속에서 서비스의 질을 향상시킨다는 정부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철도 각 부문은 경쟁 없는 독과점 체제로 출발했으며, 독점 이윤은 안전을 갉아 먹었다.


97년 런던 서부 사우스올 사고(7명 사망), 99년 10월 래드브로크 그로브 열차 충돌(31명 사망), 2000년 10월 햇필드 사고(4명 사망) 등 연이은 사고들을 거치면서 사건의 진상은 드러나게 된다. 선로의 균열 또는 자동 보호 장치 미설치와 노동강도 강화로 인한 기관사들의 신호 무시 무단 통과는 바로 이윤을 우선시하는 사유화의 예정된 결말이었던 것이다. 승객과 철도 노동자의 안전은 결박당했다. 유럽의 자동 보호 장치는 재정 문제와 경제성 논리에 따라 도입되지 않았다. 또한, 서비스의 질은 저하되었다. 열차 정시성은 하락하였고, 철도 요금은 물가상승률을 초과했다.



오랫동안 신자유주의 사유화의 폐해에 대해 연구해 왔고 지금은 민주노동당 심상정 의원실에 있는 오건호 씨가 이 책을 번역했다. 역자가 이 책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을 밝히고 있지만, 이는 역자 뿐 아니라 우리 철도 노동자를 비롯해 많은 활동가들에게도 똑같은 기쁨을 선사할 것이다. 출간된 지 2년이 다 되 가지만, 한국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지금부터 읽어야 하는 책임이 분명하다.

<탈선>이 책으로 읽는 영국 철도 사유화 보고서라 한다면, 영화 <네비게이터 the Navigators>는 영화로 보는 사유화의 악몽이라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영국의 좌파 감독 캔 로치(Ken Loach)의 작품으로 철도 노동자들이 비정규직으로 전락하면서 겪는 고통과 사유화의 폐해에 대해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오랫동안 함께 일해 온 동료들은 철도 사유화 이후, 다른 일터로 쪼개지고 에이전시에 등록되어 비정규직의 구렁텅이에 빠져들고 만다. 이들은 서로가 경쟁 상태에 놓여졌고 이전에 보장받았던 휴가나 수당 등은 사라졌다. 인간적인 애정이 가득했던 일터에는 이제 명령과 복종만이 남았고, 비용절감의 미명하에 안전 장치는 사라졌다.

노동자들 역시 일거리를 뺏기지 않기 위해 안전은 뒷전이다. 철도 보수 작업 중 다친 동료는 도로에서 차에 치인 것으로 위장된다.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영화 전반부에는 코믹하고 끈끈한 동료애, 화기애애한 일터의 모습이 나타난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하의 영국 국민들의 팍팍한 일상, 고통스런 난관들이 점차 영화를 지배하게 된다.

11월 16일, 의왕역 근처 경부선 선로 철도 침목 교체 작업 중 한 철도 노동자가 열차에 치여 사망했다. 인력 부족 상태에서 6일간 연속 야간 근무 상태에서 고인은 서행 표지판 철거 작업 중이었다고 한다. 올해만 9명의 노동자가 철도 현장에서 사고로 사망했다. 우리는 한 권의 책과 한 편의 영화를 통해 영국의 경험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신자유주의가 인간다운 삶을, 공동체적 사회를 ‘탈선’시킨다면 노동자의 사명은, 노동운동의 사명은 ‘탈선’된 열차를 제대로 돌려놓고, 부서진 선로를 복구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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