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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실>2004.8월 - 해석의 정치 속으로 - 누구의 기회인가

출처: 영남노동운동연구소 <연대와실천> 2004년 8월호(122호)

해석의 정치 속으로

- 누구의 기회인가




양솔규 / 영남노동운동연구소 사무국장

 

 

딱따구리의 운명?


2003년에 출간된 책이 헌책방에서 골라 낸 책처럼 철지난 책으로 느껴지는 건 왜일까? 곰곰이 시간을 따져보니 노무현 정부가 출범한 지 불과 1년 6개월 정도밖에는 되지 않았단다. 많은 일을 겪고 나면, 그만큼 성숙해지기 마련이라는데, 그렇다면 나와 우리 사회는 ‘성숙한 느낌’을 받고 있는 것일까? 오히려 ‘성숙한 느낌’보다는 ‘국방부 시계’에 몸을 맡긴 것 마냥 뻐근하고 쉬고 싶고, ‘소모전의 훈련’을 거친 패잔병 같은 느낌뿐이다. 마침 오늘 아침 태풍 ‘메기’까지 부산을 지나갔다.

어쨌든 많은 일이 일어나긴 일어났나 보다. 새벽 편의점을 보고 있는 아줌마도, 출근길을 서두르는 직장인도, 현장에서 투쟁하고 있는 노동자들도 (노무현을 포함한) 참여정부의 주요 인사들의 면면을 이해했을 뿐만 아니라 분위기 파악까지 마스터한 것 같다. 전두환을 거쳐 김영삼까지 오로지 대필, 대독에 익숙했던 리더들이 이끌던 시대는 갔고, 바야흐로 ‘그 잘난 입’으로 ‘말발’ 세우는 DJ와 노무현 정부의 시대가 왔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노무현 정부의 주둥아리들은 오늘도, 어제도, 1년 전에도 떠들고 떠들었다. 시도 때도 없이 떠드는 딱따구리처럼. 금속 조합원들에게 ‘귀마개’라도 얻어야 되는 건 아닌지 모를 정도다.

‘친일진상규명, 과거사 청산’을 내세우던 열린우리당 신기남 의장은 월간 신동아의 부친 친일부역 행위 폭로로 인해 의장직을 사퇴했다. 자신의 거취와 상관없이 과거사를 청산해야 한다고 했지만, 그는 친일 부역 부친과 상관없이 자신의 거짓과 뻔뻔함에 대해서는 반성하지 않았다. 그는 왜 ‘의장직’만 사퇴했을까? ‘국회의원직’도 내놓고 친일파의 후손으로서, 국민을 기만한 책임을 지고 ‘자진귀양’이라도 가야 하지 않을까? 어쨌든 이리하여 1년 6개월 전, 노무현 정부 출범 후 일찌감치 대권을 노리던 유력한 주자가 이렇게 떨어져 나가게 되었다. 전혀 신선하지 않은 이름이 된 김민석, 추미애와 더불어 ‘날개없는 추락’ 리스트에 또 한 명이 더해진 것이다.

신기남의 우스꽝스러운 사퇴 과정보다 더 희한한 것은 과거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 침략에 부역한 ‘씻을 수 없는 역사적 범죄’를 바로 잡겠다는 ‘대한민국 국가’ 전체가 제국주의 미국의 이라크 침략에 부역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30년 또는 40년이 지난 어느 날, 노무현의 자식이, 김근태의 자식이, 정동영의 자식이 또다시 우기고, 사퇴하고, 미화하는 되풀이가 예정되어 있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훗날 열린우리당의 무덤에서는 죽은 박정희의 ‘진시황병마용(秦始皇兵馬俑)’이 발굴될 것이다.


한나라닭대가리들의 반역(反歷)


참여정부라는 나무 위에서 딱따구리들이 짜증나게 떠들고 있을 때, 이에 질세라 ‘닭장’에서 떠들고 있는 날지 못하는 ‘계두(鷄頭)’들이 있었는데, 일명 ‘한나라닭’들이다. 어제도, 오늘도 조중동과 경제신문을 확성기 삼아 얼토당토 않는 ‘3류 코미디 믿거나 말거나’ 떠들고 있는 이들은 얼마 전 중앙일보 선공하에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소속 ‘간첩과 사노맹 출신 조사관들’이 나라를 망치고, 한풀이를 하고 있다고 떠들었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의문사의 진상’을 규명하는 것이 아니었다. 소위 ‘참여정부의 정체성’을 가지고 논란을 벌이기 위한 ‘꺼리’였을 뿐이다.

이들에게는 한국의 정체성이 민주주의, 자주국가, 인간존엄 등의 가치가 아니라, 반공반북, 시장 자유, 소수독점이다. 과연 이런 집단이 한국에서 생존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박근혜는 배짱 좋게 일제시대 뿐 아니라 ’과거사 전체’를 다루는 ‘과거사 국회 기구’ 구성을 제안했고, 여야는 합의했다. 박근혜는 친일 부역자 뿐 아니라, 해방 후 ‘좌익’들도 다뤄야 하며 ‘중립적 인사’들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과연 ‘편파적’인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이 ‘중립’을 알아볼 수 있을까? 한국의 헌법을 부정하는 세력들이 중립을 운운하며 ‘대한민국의 과거’를 해석하겠다는 것은 그야말로 닭짓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지금의 정치지형은 ‘중립’의 이름 하에 해석의 우선권을 쥐려는 쟁투과정을 요구하는데, 여기서 승리하는 것은 곧 ‘과거’뿐 아니라 현재의 정치적 헤게모니를 선점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박근혜와 한나라당은 승리할 수 있을까?

이것은 한국 사회를 둘러싼 지배이데올로기의 층위 변동을 내포하고 있다. 반공반북 이데올로기를 정점으로 하고 타 이데올로기를 하위수준에 배치했던 기존의 지배이데올로기 체계는 무너졌다. 이 자리에 ‘(경제)성장이데올로기’ 또는 ‘발전이데올로기’가 ‘새로운 군주’로 등장했다. 따라서 한나라당 박근혜가 제안한 내용은 전략적 고지를 선점하는 교묘한 책략이 아닐 수 없다. (중요하기는 하지만) ‘좌익도 검증해야 한다’에 방점이 찍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사 전체’와 ‘공’과(功過)에 방점이 찍힌다. 좌익이라는 과(過)는 민주노동당이나, 열린우리당, 운동세력에게 떠넘길 것이다. 소위 ‘산업화 세대’라 일컬어지는 경제성장기의 역사적 공(功)이 친일을 포함한 과(過)를 능가할 수 있는 자신감은 박근혜식 뒤집기의 토대이다.


개미들의 과거 청산


사실, 민중운동 차원에서 의문사진상규명위에 대한 엄호는 거의 없었다. 어쩌면 우리 머리 속에는 암묵적으로 과거와 현재를 분리시키는 기제가 작동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나라당 박근혜가 ‘신기남 사건’을 돌파해 나가는 과정을 보면 우리의 무능력이 더욱 도드라져 보이기도 한다. 우리의 공(功)은 얼마나 왜소화되었는가? 상대의 과(過)는 얼마나 드러났는가?

이참에 잘 됐다 싶기도 하다. 일제시대를 포함해 과거사를 몽땅 다루겠다고 했고, 공과(功過)를 몽땅 다루겠다니, 그렇게만 된다면 K-1 보다 더 뜨거운 ‘승부’의 격투기 장이 만들어질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은 이러한 과거규명 작업에 ‘성향’을 내세워 소수만이 참여하는 자리로 왜소화시킬 것이다. 이 작업은 실은 대한민국 전체 인민들의 머릿속을 뒤집어 놓는 작업이다. 역사는 소수의 소유물이 아니며, 과거의 유산은 모두가 짊어지고 있다. 박근혜 대표가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유신시대를 사과했지만, 실은 김대중 개인이 사과를 받고 말고 할 입장이 아니었다. 박정희 독재의 ‘억압적 그림자’는 그만큼 넓고 깊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거 청산은 현재를 둘러싼 정치적 투쟁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노동자의 이름으로 박정희 독재를 단죄하고, 민족의 이름으로 친일을 단죄하는 것은 ‘그들의 중립성’이 두려워하는 바이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과거해석을 둘러싼 투쟁은 현 계급역관계의 미래다. ‘정통성 논쟁(?)’ 속에서 누가 미래를 담지할 자로 점지될 것인가? 우리인가? 그들인가?


<2004. 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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