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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IMF 경제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한국 경제를 급속하게 영미식 신자유주의 모델로 변화시켰다. 이전 한국 경제의 주요 축, 추격모델의 축이었던 ‘국가-은행-재벌’ 시스템은 해체되었다. 이를 통해 ‘주식회사 한국’으로 표현되는 한국 시스템의 강점은 사라졌고, 해외자본의 급속한 유입, 통제하지 못하는 정부, 성장 동력 형성을 위한 장기투자에 인색한 은행 및 금융권으로 변모했다. 재벌은 이전에 자원을 집중시키던 내부거래 관행들(무기들)을 빼앗겼다. 따라서 저자들이 보기에는 ‘제2의 추격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전 모델의 강점을 살리는 방식, 즉 국가의 재활성화, 기업그룹의 강점 활용, 해외 자본 통제 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책은 한국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 즉 해외자본의 급속한 유입으로 인해 한국 경제를 제어할 방법과 주체가 없는 현재의 신자유주의경제에 대한 비판적 해석을 가능하게 해주는 풍부한 사례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일면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다. 반성없이 일방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의 일련의 흐름들에 대해 비판적 재고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제2의 추격 시스템’의 구축을 위해서는 국가의 재활성화를 통해 해외자본을 견제하고, 산업정책 등의 재가동이 필요하다는 점 역시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저자들의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결론은 재벌에 이르게 된다. 왜 하필 재벌인가? 마치 ‘자유기업센터’가 신자유주의로 무장한 전경련의 오른팔이라면 이들과 대안연대회의는 제도주의 경제학으로 무장한 전경련의 비주류 왼팔쯤 되는 것이다.
먼저 비판할 점은, 저자들은 재벌의 합리성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합리성을 강제하는 요소는 전지구화된 상품시장과 금융시장이며 이 구조 속에서 재벌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합리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선험적인 전제는 역사적으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대우그룹의 엄청난 규모의 분식회계는 어떻게 설명할 것이며, 중소기업과의 원하청 불공정거래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기업총수와 그 가족의 비정상적인 기업지배구조는 재벌을 여타의 기업그룹들과는 차별적이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저자들은 마치 재벌을 보편적인 기업그룹의 한 형태로 강조하고 있다. 그동안 비난받아 왔던 재벌의 문어발식 확장에 대해서도, 다각화가 부정적이었다는 실증은 없으며, 이는 강점으로 봐야 하며, 최적의 다각화란 없고 과도한 다각화가 있었다면 재벌이 알아서 줄였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재벌이 재벌일 수 있는 이유는 단지 다각화뿐만 아니라, 극소수의 주식소유를 가지고 총수와 가족들이 수많은 기업을 좌지우지하는 행태이다. 정부가 재벌에게 또다른 (재벌)기업을 헐값으로 넘기던 수많은 은밀한 거래들도 과연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저자들은 기업의 투명성 제고와 비민주성 제고를 재벌의 강점인 ‘고위험부담과 시장확대 능력’을 훼손하는 것으로 본다. 저자들이 우려하는 집중투표제는 의무화되지 않았으며, 정관을 통해 배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실상 의미가 없다. 저자들이 재벌의 강점으로 보는 고위험부담과 시장확대 능력은 그에 걸맞는 위험 감시 시스템과 합리적 투자를 전제로 하는데, 재벌이 합리적이라면 왜 대우부도와 같은 사태가 발생했는가?
저자들은 중소기업과 재벌과의 관계가 상호대립적이지 않으며, 협력적인 관계라고 강변하고 있지만, 이는 전경련의 중소기업인 조사나, 민주노동당의 중소기업인과의 대화 과정에서도 사실이 아닌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내부 거래 메커니즘이 크게 약화된 재벌은 해외자본의 공세에 무기력하게 대응하는 ‘힘 없는’, ‘불쌍한’ 상태로 보인단다. 과연 재벌에게 다시 힘을 실어주면 이들이 해외자본과 피터지는 싸움을 할 것인가? 그 결과 승리의 전리품들을 노동자 민중에게 나누어 줄 것인가? 저자들이 주장하듯이 재벌과 중소기업의 관계가 협력적인 것이라면, 해외자본과 재벌과의 관계는 협력을 넘은 연합의 상태 아닌가?
소유구조든 자본동원이든 저자들이 전제하는 이러한 재벌의 합리성은 그러나 수많은 재벌 기업과 하청 중소기업의 노동자들에게는 비합리적이고 전근대적인 노동자 통제와, 권리박탈의 물질적 조건일 뿐이다.
두 번째로, 저자들은 재벌의 책임 문제를 거론하지 않는다. 삼성자동차, 대우 구조조정 과정에서 든 막대한 비용, 금융구조조정 과정에 투여된 막대한 돈은 누구의 돈인가? 단지 정부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보여준 관리에 있어서의 무능력만을 지적하지만, 일차적 책임은 재벌에게 있음을 저자들은 지적하지 않는다. 저자들은 재벌의 실책은 정부의 무능력에 비하면 미미한 정도일 뿐이며, 구조조정의 성과는 재벌의 강점에 비하면 미미할 뿐으로 본다. 저자들에게 남은 것은 재벌의 부활뿐이다.
세 번째로, 저자들의 재벌 옹호 관점은 반신자유주의적일 수는 있으나, 노동배제적 관점이기도 하다. 해외 자본과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비판한다고 해서 곧 우리가 무조건 차용할 수 있는 관점은 아닌 것이다. 저자들은 성장동력 신장을 얘기하고 있지만 노동자, 서민 경제가 파탄나고, 거시 경제 성장과 서민 경제 부문의 연관이 파탄난 지금 이 시점에서 노동자, 서민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저자들이 98년말부터 시작된 경제위기의 극복의 진정한 원인으로 얘기하는 케인즈주의적 거시경제정책 패키지는 그러나, 노동자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몫으로 자신의 목을 겨누는 칼날에 불과했다. 저자들은 말한다. 재벌을 약화시킨다고 해서 중소기업이 잘된다는 보장이 있는가? 바꿔 말할 수 있다. 재벌의 확장능력이 강화된다고 해서 국민경제가 건강해지고 노동자 서민이 행복해지는가?
네 번째로, 저자들은 여전히 성장 중심주의적 사고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제2의 추격시스템? 무엇 때문에? 왜? 라는 질문은 없다. 저자들에게 재벌 체제의 복구는 목적 없는, 이유 없는 자본의 이윤 추구와 마찬가지로, 확장, 추격을 위한 것이다. 이왕 ‘체제 이행’이 필요하다면 어떤 이행인지에 대한 성찰을 제공하는 것이 배운 사람의 기본적인 소양이어야 되지 않은가?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은 그동안 서로 논쟁을 벌이며 대립각을 세우던 <참여연대>와 <대안연대회의>의 담론들을 광범위하게 수용해 왔다. 두 단체의 논자들은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 각급 조직의 각종 토론회에 참석해 왔다. 이러한 어정쩡한 상태를 벗어나는 것이 필요하다. 한편으론 이들이 제공하던 담론들의 강점이 존재했다. 이 두 단체간의 논쟁은 한국 경제의 장기적 전망과 관련된 시스템의 구축을 둘러싸고 진행되었다. 즉, 현재의 시점을 넘어 미래를 바라보는 정치한 주장들을 제기했다는 점이다.
현재의 ‘분배요구’에 머물러 있는 민주노동당의 담론은 그 자체로 의미가 없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비전을 제시하는 측면에서는 한계가 있다. 자금 동원 및 장기 투자, 성장과 관련한 입장과 전망, 재벌 구조 개혁 및 기업지배구조, 산업의 재편, 노사관계 변동 등에 대해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은 시스템적인 담론 구축이 필요하다. 여기에 더해 이러한 시스템적인 담론은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이행 전략과 맥을 같이 해야 한다는 점을 덧붙일 필요가 있다. 쉽지는 않겠지만, 따라서 순식간에 마련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반드시 필요한 것임에는 분명하다. 언제까지나 주류담론과 비주류담론의 격돌에서 비껴나 있을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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