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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726]12차 지부집단교섭 |
여름휴가를 앞두고 05년 금속노조 부산양산지부 집단교섭이 일단락되었다. 7월 27일 지부총파업이 예고된 가운데 7월 26일 오후 3시부터 지부회의실에서 열린 12차 교섭은 막바지 타결을 위해 장시간, 잦은 정회로 힘겹게 진행되었다. 사측에서는 대우정밀, 동아스틸, 비엠금속, 진흥철강, 태평양밸브, 한국기전, 한진중공업등 7개사업장과 지부에서는 문영만지부장을 비롯한 11명의 교섭위원이 참가하였으며 15명의 지회간부들이 참관인으로 교섭과정을 지켜봤다. 이날 오후 3시부터 오후 11시까지 개최된 마라톤 협상끝에 노사양측은 ▲ 지부총회시간 연4시간(단, 2006년부터 적용) [지부요구안 : 반기별 8시간] ▲ 정년연장 --> 만57세 되는 해의 12월말(2005년 8월 1일부터 적용) [지부요구 : 만60세] ▲ 추가전임자 전임료 임금인상--> 집단교섭참가사업장 임금인상액의 평균으로 한다. ▲ 임금 --> 지회보충교섭에서 논의하고, 집단교섭에서 최종 조인한다는데 잠정합의했다. 대우정밀은 채권단과의 관계로 이번 주내 사측의 내부절차를 거치기로 하였다. 그리고 사업장에서임금에 관한 논의가 마무리되는 시점까지 지부집단교섭은 일시 중단의 형식을 띠게 된다. 만약 임금협상이 사업장에서 논의가 미진할 경우 재차 지부집단교섭이 재개될 여지도 있다. 임금인상은 사업장별 사정과 격차가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여름휴가 시작기간이 달라 지부교섭에서 충분히 다루기 어렵다는 점을 노사상호 인식하여 지회보충교섭에서 다루되, 최종적으로는 지부집단교섭에서 마무리하는 방안으로 가닥을 잡았다. 4월 28일부터 시작된 05년 교섭은 매주 목요일 한차례 개최되었으나 10차교섭이후 막바지 타결을 위해 11차, 12차교섭은 연이어 개최되었다. 그리고 올해에는 지부집단교섭과 관련하여 중앙교섭에 따른 금속노조 총파업과는 별도로 7월 22일 부산양산지부 총파업이 성사되기도 하였다. 지회보충교섭 마무리 -> 조합원 찬반투표 --> 조인식 지회보충교섭이 완료되면 조합원 찬반투표를 거쳐 조인식을 하게 된다. 여름휴가전에 지회보충교섭이 완전 타결될 경우 중앙교섭결과에 대한 조합원찬반투표가 예정된 8월 12일부터 15일 사이에 지부집단교섭 결과에 대한 조합원 찬반투표가 같이 실시될 것으로 보인다.금속부양 |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처럼 충돌과 갈등을 통해 창조 또한 가능하다. 논쟁이란 이성과 이성의 길항(dia-logos)을 통해서 진리/진실에 한발자국씩 다가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개인적 감정을 노골적으로 표출한다거나 상대방을 이기려는 아집에 사로잡혀 지엽적인 문제에 집착하는 것을 피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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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Kyosu.net Updated: 2006-06-12 09:12 |
싸우는 운동화, 스니커즈 만세!
한겨레21 2006년05월26일 제611호
▣ 나지언
지난 4월12일 밤 12시, 뉴욕의 한 상점 앞에 일군의 젊은이들과 경찰들이 팽팽한 긴장감으로 둘러싸여 있다. 순찰을 나온 경찰이 말한다. “아니, 도대체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그들이 모여 있는 곳은 나이키 매장 앞이었고, 그로부터 10시간 뒤 그래픽 아티스트 스태시가 디자인한 ‘나이키 에어맥스 스태시 블루 팩’ 리미티드 에디션이 판매될 예정이었다.
△ 디자인과 색감으로 무장한 스니커즈는 여자의 발을 해방시키고 남자를 고민의 즐거움에 빠뜨린다. <위쪽>, 나이키가 ‘에어 조든’ 시리즈를 발표하면서 운동화는 운동장을 벗어났다. (왼쪽아래), ‘아디칼라’ 화이트 시리즈는 아크릴 물감 등과 세트로 판매한다. 만화 스니 |
멀쩡하게 생긴 한 남자는 경찰의 의아함에 화답이라도 하듯 말한다. “만약 저 스니커즈를 구한다면, 집에 가서 울 것만 같아요.” 당신이 보기에 미친 게 분명하다고 생각되는 이 젊은이들은 시카고, 마이애미, 보스턴 등지에서 비행기를 타고 날아왔으며 특별한 스니커즈의 첫 판매를 기다리느라 며칠 밤을 새웠다. 그들이 갈구하던 스니커즈는 25만원에 판매됐으나, 65만원까지 가격이 오르기도 했다.
“저걸 손에 넣으면 울어버릴 거야”
태초에 운동화가 있었다. 1980년 나이키가 그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 그것은 단지 운동화에 지나지 않았다. 운동화는 새것이 더 촌스럽다고 생각됐으며 해질 때까지 신는 게 그들의 정체성이라 믿었다. 그러나 나이키가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의 도구로 운동화를 불러줬을 때, 그리고 곧이어 형형색색 ‘에어 조단’ 시리즈를 발표했을 때, 운동화는 운동장을 벗어났다. 다 큰 남자들이 나이키 에어 조단을 손에 넣고 펑펑 우는 장면을 쉽게 목격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리고 1990년, 스니커즈는 이제 공간의 제약성을 벗어나 어디든 활보할 수 있게 됐다.
그러니까 1990년, 축구 용품 브랜드로 알려진 푸마는 세계적인 디자이너 질 샌더와 손을 잡았다. 질 샌더는 푸마의 축구화 ‘푸마 킹’을 스니커즈 형태로 변형한 ‘푸마 아반티’를 내놓았다. 나이키와 아디다스의 경쟁에 밀리던 푸마는 푸마 아반티의 슬림하고 날렵한 디자인으로 인해 인기를 한 몸에 받았고, 국내에서는 뒤늦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지난해 명동과 신촌, 압구정 거리를 아반티가 모두 쓸고 다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질 샌더에 질세라, 다른 디자이너들도 스니커즈 디자인에 머리를 싸매기 시작했다. 일단 짭짤한 수입을 낸 푸마는 1999년 ‘블랙 스테이션’이라는 고급 스포츠 캐주얼 라인을 새로 론칭했다. 이후 프라다 디자이너 출신 닐 바렛, 슈퍼모델 크리스티 털링턴, 그리고 일본의 야스히로 미하라 등을 영입한 푸마는 다양하고 신선한 제품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아디다스는 일본의 요지 야마모토, 리복은 폴 스미스와 손잡고 명품 스니커즈를 생산해냈으며, 반스는 디자이너 마크 제이콥스와 함께 ‘마크 제이콥스 슬립온 제트’라는 앙증맞고 귀여운 스니커즈를 만들어냈다.
△ 스니커즈는 신발이 아니라 예술이다. 디자이너들도 스니커즈 디자인에 머리를 싸매기 시작했다. |
전세계가 스니커즈 열풍이다. MTV는
돈을 숨기는 포켓과 안창의 국경 지도
모든 사람을 평소의 키 그대로 가감 없이 보여주는 스니커즈는 평등한 신발이다. 이렇게 평등을 외치는 신발이다 보니, 목까지 단추를 채워야 하는 레스토랑보다는 아무렇게나 입어도 되는 거리에서 더 빛이 난다. 격식이나 형식 대신 자유와 평등을 입은 스니커즈는 제품 제작에서도 그 믿음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최근 스니커즈 열풍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현상은 ‘커스터마이징’, 자주 쓰는 용어로 ‘튜닝’이다. 커스터마이징은 소량 생산되는 비싼 디자이너의 스니커즈를 사느라 돈을 모으거나 유명한 예술가들이 만든 스니커즈를 사느라 밤새워 충혈된 눈을 하고서 줄을 서야 하는 번거로움을 모두 없애주는 편리한 마케팅이다. 이제 소비자들은 스니커즈에 마음대로 그림을 그려넣고 색을 칠하고 장식하는 ‘나만의 스니커즈’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 마케팅의 가장 선봉에 있는 아디다스는 1983년 시작했다가 시대를 앞서갔다는 이유로 외면받은 ‘아디칼라’ 시리즈를 다시 내놓았다. 아디칼라 화이트 시리즈는 흰색 운동화와 아크릴 물감과 사인펜, 스프레이 등이 하나의 세트로 판매된다. 디자인에 따라 레벨 1에서 6까지 여섯 종류가 있는데, 레벨이 높아질수록 가격이 싸지고 판매 수량도 많아진다. 명동에 있는 아디칼라 매장에 가면 배우 이천희가 만든 ‘도시’ 스니커즈, 만화 <츄리닝> 만화가들이 만든 ‘츄리다스’ 등 다양하고 재미있는 스니커즈를 만나볼 수 있다. 나이키의 ‘ID’, 퓨마의 ‘몽골리안 바베큐’ 프로젝트 역시 같은 맥락이다.
△ 스니커즈는 젊으니이들의 열광을 등에 업고, 소비와 생산의 개념을 바꿔놓았다. 매장에서 스니커즈를 고르는 젊은이들. |
덕분에 커스터마이징 아티스트들도 뜨고 있다. 나이키 튜닝으로 유명한 에드슨의 튜닝화는 그 자체가 하나의 예술이다. 이렇게 스니커즈는 소비의 개념을 바꿔놓고, 더 크게는 시대가 고수하는 라이프 스타일의 변화까지도 가져왔다.
앞에서 말한 거리의 예술가 스태시의 스니커즈처럼 각 스니커즈 브랜드는 좀더 자유롭고 다양한 예술의 형태를 스니커즈와 접목시키는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리복의 바스키아 스니커즈는 요절한 천재 화가 바스키아의 작품과 사인을 활용한 제품이며, 아디다스는 팝 아티스트 키스 해링의 작품을 스니커즈에 도입했다. 우마 서먼이 영화 <킬 빌>에 신고 나온 매끈한 스니커즈는 일본의 오니쓰카 타이거 제품이었지만, 나이키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타란티노 감독의 <킬 빌>에 대한 오마주를 바치기 위해 신발 앞에 일어로 ‘빌을 죽여라’(Kill Bill)라고 써 있는 킬빌 슈즈를 따로 제작했다. 이제 스니커즈는 단순히 신발이 아니라 하나의 예술이다. 젊음과 자유를 상징하는 스니커즈를 전선에 매다는 등 다양한 스니커즈 아티스트들도 생겨났다. 컨버스나 나이키가 체 게바라를 광고나 제품에 자주 도입하는 게 우연의 일치만은 아닐 것이다.
스니커즈는 돈 많은 패션 피플의 소장품이나 할 일 없는 젊은이들의 수집품만은 아니다. 스니커즈를 보면 사회가 읽힌다. 소비와 생산의 개념을 바꿔놓은 스니커즈는 다양한 정치·사회적 이슈를 반영하기도 한다. 브루클린 아티스트 주디스 워다인은 미국에 밀입국하는 멕시코인들을 위한 상징적인 스니커즈, 즉 ‘보더 스니커즈’(Border Sneakers)를 만들었다. 일명 ‘브링코’(Brinco·스페인어로 ‘도약’이라는 의미)라 불리는 이 스니커즈는 신발끈에는 라이트와 나침반을 붙였으며, 안쪽에는 돈이나 진통제를 숨길 수 있는 포켓이 있다. 그리고 발 안창에는 국경 지도가 그려져 있다. 주디스 워다인은 1천 개의 보더 스니커즈를 통해 미국 사회에서 이민자들의 문제를 이슈화했다. 한편, 아디다스는 아디칼라 시리즈 중 디자이너 베리 맥기가 디자인한 스니커즈 때문에 미국 내 아시아 커뮤니티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그가 그린 아시아인들이 뻐드렁니와 찢어진 눈이라는 정형화된 이미지를 갖고 있었던 게 반발의 이유였다.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들어간다
FEIT(Fight) 스니커즈는 이 세상의 모든 부조리와 부패, 그리고 부정과 싸운다는 의미에서 제품명과 회사명이 ‘파이트’며, 대량생산이 아니라 전문가들이 일일이 수작업으로 섬세하게 만들어낸 명품이다. 나이키 ID는 ‘덩크 7 자선 컬렉션 스니커즈’로, 판매 금액을 전액 비영리단체에 기부하는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제품 역시 전세계에서 30명 정도만 가질 수 있는 희귀 소장품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소비와 생산의 개념을 바꿔놓은 스니커즈 마케팅만이 할 수 있는 운동일 것이다.
스니커즈는 이미 우리 일상 속으로 깊숙이 들어왔으며, 생산과 소비 그리고 예술에 대한 많은 개념들을 바꿔놓았다. 최근 아디칼라 마케팅을 보면, 그들은 스니커즈가 사회·문화적 맥락 안에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제대로 파악한 게 분명하다. 그들은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스니커즈가 들어간다는 취지 아래 뉴욕에 있는 7개의 작은 구멍가게에 아디칼라를 전시하기 시작했다. 골목길 코너에 있는 작은 상점 안 음료수 냉장고 등지에 놓여 있는 아디칼라 스니커즈는, 스니커즈가 얼마나 우리 일상에 가까이 들어왔는지를 방증하는 사례다. 물론 이렇게 스니커즈 하나에 거창하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기자나 하는 일이고, 당신들이 할 일은 지금 당장 달려가 마음에 드는 스니커즈를 하나 사서 하루 종일 일하느라 지친 발에게 위로를 건네는 것이다. 그게 스니커즈의 가장 큰 미덕일 테니까 말이다.
▣ 김신 월간 <디자인> 편집장
지금 서울시립미술관에서는 ‘위대한 의자 20세기의 디자인’전이 열리고 있다. 이 전시에는 20세기를 대표하는 100개의 의자가 전시되고 있다. 또 분당 코리아디자인센터와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각각 열리고 있는 핀란드의 세계적인 건축가 알바르 알토 전과 일본의 거장 디자이너 우치다 시게루 전은 의자를 중심으로 한 가구 전시회다. 동숭동의 쇳대박물관에서 열리는 ‘건축가의 가구’전에서는 국내 건축계에서 잘 알려진 13명의 건축가가 디자인한 의자와 소파를 만날 수 있다. 이렇듯 의자 전시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열린 것은 처음인 것 같다. 전시회가 아니더라도 최근 세계적인 건축가와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유명 의자들이 대중잡지에 부쩍 많이 노출되고 있으며, 고급 식당과 사무실, 집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인간이 의자에 앉도록 진보한 역사
옛날부터 의자는 다른 물건과 달리 아주 특별한 것이었다. 즉, 의자는 아무나 소유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한자의 ‘권좌’(權座), 영어의 ‘체어맨’(chairman)이라는 단어가 보여주듯 의자는 권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즉, 최고 권력자만이 의자에 앉을 수 있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자에 앉기는커녕 구경도 못했다.
△ WW 스툴 디자이너: 필리프 스타르크, 1990. 이 의자의 모티브는 인삼이다. 인삼은 서양에서도 인간의 모습을 닮은 두 갈래의 뿌리 모양 때문에 성욕을 촉진하는 정력제로 알려졌는데, 이런 인삼의 성질을 모티브로 한 에로틱한 의자다. |
의자란 몸을 수고롭게 움직이지 않은 채 앉아서 세상을 통치하는 자들의 상징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사가 권력이 점차 더 많은 사람에게 분산되는 쪽으로 흘렀듯이 의자도 마찬가지 길을 걸었다. 절대 권력자만이 앉을 수 있었던 의자는 시대가 흐르면서 귀족에게로, 다시 자본가로, 그리고 일반 시민에게까지 보급됐다. 오늘날에는 어느 누구도 의자를 소유하고 거기에 앉는 것을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헤겔은 “역사는 인간이 자유를 쟁취해가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의자 역사가의 눈으로 볼 때, 역사는 인간이 의자에 앉도록 진보해왔다.
특히 기계의 등장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기계의 등장과 대량생산 시스템은 노예를 노동자로 바꾸고 수많은 육체노동자들을 의자에 앉도록 했다. 힘든 육체노동을 기계가 대신해주었기 때문에 앉아서 일하는 사무실 근로자가 대거 등장했다. 이에 따라 이들에게 오랫동안 앉아서 일할 수 있는 의자가 필요해졌다. 20세기 초의 모더니스트들은 어떻게 하면 튼튼하면서도 조형적으로 아름다운 의자를 대량으로 생산해 더 많은 사람에게 보급할 수 있을까를 연구했다. 그러한 연구가 오늘날 단지 앉는다는 기능을 만족시키기 위한 수백 가지의 디자인을 낳은 원동력이 됐다.
△ 토네트 의자 |
왜 뛰어난 건축가와 디자이너는 의자를 디자인하고 싶어 안달일까. 왜 많은 인테리어 품목 가운데 의자에 집착할까. 의자는 조형적인 표현 가능성이 가장 풍부하기 때문이다. 의자는 머리 받침대, 등 받침대, 팔걸이, 엉덩이 받침대, 다리로 구성돼 있다. 다른 가구들과 견주어볼 때 의자는 그 구조가 대단히 입체적이다. 재료도 어떤 물건보다 많이 사용된다. 나무, 금속, 섬유, 플라스틱, 여기에 돌까지. 우리 주변에서 이렇게 다양한 재료가 한꺼번에 쓰인 물건을 찾기란 쉽지 않다. 따라서 의자는 형태 변형이 무궁무진한 것이다. ‘100개의 의자’전을 보면 바로 그 조형과 재료의 다양성에 감탄하게 된다.
또 의자는 어떤 가구보다 개인적이다. 대부분의 가구는 두 사람 이상이 함께 쓰는 경우가 많지만, 의자는 대개 한 사람의 것이다. 따라서 의자는 그것을 소유한 개인의 인격과 동일시되기도 한다. 구성 요소도 사람의 몸과 많이 닮았다. 우리가 사무실에서 함부로 남의 의자에 앉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 의자는 그것을 소유한 사람의 권력의 정도나 지위를 보여준다.
아직도 파리 카페의 의자는 150년전 모델
이런 특별한 의자를 디자이너들이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특히 건축가들은 자신의 건축적 이상을 의자에 압축해서 표현하길 좋아한다. 건축가들은 건축과 함께 그 건물의 내부에 쓰이는 물건들도 통일된 스타일로 디자인하고 싶어한다. 그 대표적인 물건이 바로 의자인 것이다. 근대 건축을 탄생시킨 4명의 대가인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발터 그로피우스, 르코르뷔지에, 미스 반데어로에는 저마다 자기 건축의 아이콘 같은 의자를 이 세상에 남겼고, 수십 년이 흐른 지금도 생산되며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 개미 의자 디자이너: 아르네 야콥센, 1955. 야콥센이 디자인한 여러 개미 의자 시리즈 가운데 한국인에게 가장 친숙한 의자. |
4명의 거장이 디자인한 의자와 함께 오늘날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의자들은 유행에 따라 스타일이 수시로 바뀌는 가전제품이나 패션, 자동차와 달리 그 디자인이 바뀌지 않은 채 수십 년 동안 똑같은 재료와 모양으로 생산되고 있다. 아직도 파리의 카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우아한 곡선의 토네트 의자는 무려 150년 전부터 생산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사무실을 뭔가 지적이고 남다르게 꾸미려는 사람들이 꼭 갖고 싶어하는 초기 모더니즘 의자들은 대개 1920~30년대에 디자인된 것들이다. 바실리 의자, 바로셀로나 의자 등이 그것이다.
비트라 디자인 미술관이 엄선한 100개의 의자에 포함된 이 의자들은 우리나라에서도 쉽게 구입할 수 있다. 단 가격이 좀 세다. 적게는 30만~40만원대부터 비싼 것은 수백만원이 넘는다. 물론 한 개의 가격이 그렇다. 마니아들을 위한 손바닥만 한 크기의 미니어처도 10만원대 안팎이다. 의자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고 볼 수 있는 이 의자들이 적게는 10년, 많게는 80여 년 동안 똑같은 디자인으로 생산되고 인기를 잃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는 혁신성이다. 모던 의자가 나오기 전의 의자들은 천편일률적이었다. 재료는 거의가 나무, 또는 나무와 천을 혼합한 것이었다. 그리고 한결같은 과다한 장식. 우리가 예식장에 가면 볼 수 있는 그런 의자들 말이다. 그런데 모더니스트들은 강철관이라는 재료를 처음으로 사용했고, 다리도 4개가 아니라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는, 당시로서는 처음 보는 희한한 구조를 창조했다. 무엇보다 일체의 장식을 배제한 채 재료와 구조만이 의자의 외관을 결정짓게 디자인했다. 아주 단순하고 거추장스럽지 않다는 점에서 과거의 의자들과 완전히 결별하고 있다. 아마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외계에서 온 의자처럼 보였을 것이다. 수십 년 전의 혁신적인 디자인이지만 21세기를 사는 우리 눈에도 촌스럽지 않고 세련돼 보인다는 점이 의자의 명품으로서 가치를 인정받은 이유다.
늘 식탁이나 책상에 딸려오는 부수품?
둘째는 세계적인 스타 디자이너의 작품이라는 점이다. 대부분의 대량생산품들은 익명성으로 만들어진다. 즉, 그걸 누가 디자인했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명예의 전당에 오른 의자들은 반드시 제조사와 함께 디자이너의 이름도 밝힌다. 왜냐하면 대부분 의자는 디자이너 개인의 아이디어고, 또 디자이너의 이름을 밝히는 것이 판매에 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알레산드로 멘디니, 필리프 스타르크, 론 아라드, 재스퍼 모리슨, 마크 뉴슨 등의 스타 디자이너들은 대중에게도 많이 알려져 있어 그들이 디자인했다고 하는 것이 큰 프로모션이 된다. 아르네 야콥센, 찰스 레이 임스, 베르네르 판톤 등 이미 고인이 된 거장들의 의자는 말할 것도 없다.
△ 록히드 라운지 의자 디자이너: 마크 뉴슨, 1986. 차가운 금속과 거친 이음새가 독특한 것을 좋아하는 마니아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의자. |
서구의 가구 디자인 역사를 볼 때, 의자는 분명 그 중심에 서 있다. 바로크, 로코코, 신고전주의, 그리고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이어지는 가구 양식사에서 표준 모델은 장이나 테이블, 침대가 아닌 바로 의자다. 그러나 좌식 생활을 한 한국인에게 의자는 그렇게 대수로운 물건이 아니다. 우리의 생활양식이 서구화돼 식탁과 책상이 보편화된 뒤에도 여전히 의자는 욕망이 대상이 되지 못했다. 의자를 단독으로 구입하는 경우가 별로 없다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다. 의자는 늘 식탁이나 책상에 딸려오는 부수품이다. 또 우리 기억 속의 의자들이란 학교의 나무 책상, 사무실의 철제 의자, 구멍가게 앞의 널빤지 의자, 식당에서 막 쓰는 동그란 의자 등으로 고급스럽거나 애지중지하는 물건이 아니다. 고급스런 의자에 속하는 것이래야 부잣집 거실이나 사장님 방에 놓이는 가죽 소파 정도인데, 장식적이거나 비싼 재료를 썼을 뿐 세련된 디자인과는 거리가 멀다.
좌식 생활을 한 문화여서 우리에게는 의자의 전통 같은 것도 없다. 그러다 보니 돈이 있어도 의자를 고르는 안목이 부족해 구조나 기능, 디자인보다 그저 가죽 같은 비싼 재료로 껍데기를 씌운 의자를 선호했다. 1990년대 이후 명품 열풍이 불었지만 의자에만은 소극적이었는데, 이는 의류나 가방, 구두, 시계, 자동차와 달리 집 안에 있는 가구나 의자는 남들에게 자랑할 기회가 적기 때문이다.
△ 바르셀로나 의자 디자이너: 미스 반데어로에, 1929. 모더니즘 건축의 아버지인 미스 반데어로에가 1929년 바르셀로나 박람회의 독일 전시장 인테리어를 위해 디자인한 의자인데, 오늘날에도 꾸준히 사랑받아 많은 사무실의 로비를 장식하고 있다. |
패션·자동차처럼 욕망의 대상으로 떠오를 것
그러나 고급 인테리어 정보가 꾸준히 보급되면서 거장들의 의자도 점차 한국에 소개됐다. 특히 디자인 감각이 뛰어난 젊은 세대는 집안 인테리어를 일관된 스타일로 꾸미는 데 눈뜨기 시작했는데, 대부분 모던한 스타일로 집안을 장식하므로 이들 의자에 대한 수요가 조금씩 일어나기 시작했다. 부유층도 이제는 원목이나 앤티크 가구에만 열광하지 않고 산뜻하고 세련된 모던 가구에 눈을 돌리고 있다. 또 고급 식당에도 이런 의자들이 많이 보급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덴마크의 거장 디자이너 아르네 야콥센이 디자인한 개미 의자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의자가 됐다. 그러나 아직까지 국내에서 이런 세계적인 모던 의자들을 쉽게 볼 수 있는 곳은 건축설계사무소, 디자인 스튜디오, 사진 스튜디오 등으로 한정돼 있다. 그러나 머지않아 패션이나 시계, 자동차에 열광하듯 의자가 소유하고픈 주요 욕망의 대상이 될 것임은 분명하다.
△ 애론 의자 디자이너: 빌 스텀프·돈 채드윅, 1992. 애론 의자는 미술 이념의 수단이나 창작자의 조형 의지를 분출하는 대상이 아닌 진정 사람의 몸을 생각하는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의자의 전형을 제시했다. 사용자의 편리성을 위해 인간공학을 접목한 의자 가운데 최고의 |
△ 바실리 의자 디자이너: 마르셀 브로이어, 1925. 의자 역사상 최초로 강철관이라는 소재를 사용했다. 강철관은 부드러우면서도 강해서 네 개의 다리 없이도 이처럼 우아하면서도 튼튼한 의자 조형을 가능케 했다. 이후 강철관은 단순함을 이상으로 여기는 모더니스트의 가장 |
△ 짧은 다리 의자, 버드나무 의자, 소파가 있어도 바닥에 앉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한 등받이(왼쪽부터 시계 방향)목수 김씨(김진송)는 어쩌다 생긴 나무들로 의자 만들기를 즐긴다. |
△ 라 셰즈 의자 디자이너: 찰스 & 레이 임스, 1948. 유기적인 형태의 독창적인 의자. |
'우물 안' 활동가들에게 들려주는 충고 | ||||||||||||
김하경 소설집「속된 인생」…"총연맹위원장 되는 게 성공?" | ||||||||||||
「내 사랑 마창노련」의 저자 김하경 씨가 소설가로 돌아왔다. 소설집 「속된 인생」(삶이 보이는 창)을 들고 다시 작가의 길에 발을 내딛은 그는 이 소설집에서 철거민과 노동운동가, 그리고 서민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구현하면서 이 시대의 운동을 향해 화두를 던진다.
운동을 하면 할수록 인간관계나 이해의 폭이 넓어지는 게 아니라 좁아지는 것 같았다. 조급해지고, 각박해져갔다. 심지어는 노동조합이 세상 전부인 것 같고, 세상이 노동조합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착각 속에 빠져 살았다. 그래서 노동조합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것을 모르거나 부정하면 화가 났고 그런 사람들을 원망하고 비난했다. 노동조합 이외의 것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노동조합 하나에만 빠져 산 것이다. 이런 걸 우물 안의 개구리라고 하는 걸까? (「젊은 날의 선택」, 151쪽) 하지만 사실의 서술이 문학작품이 되지는 않는 것처럼, 그에게는 내내 소설로 말하고자하는 욕망이 늘 떠나지 않았다. 리얼리즘으로 노동자와 민중, 운동을 그려내고자 했던 그는 다시 펜을 들기로 마음을 먹었다. 서울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한 그는 1988년 <실천문학> 봄호로 등단하고, 장편소설 「그 해 여름 」(1991), 「눈 뜨는 사람」(1994)을 출간한 바 있다. 이후에 쓴「내 사랑 마창노련」의 취재와 신문사 논설주간의 경험은 그에게 ‘지시적 언어’ 서술의 한계를 절감하게 했다. 내면의 목소리인 문학적 언어의 목소리를 잃었다는 것이다. “노동운동 내에서도 우리는 계급을 만들어 경쟁하고 있습니다. 부장 되면 국장되고, 실장 되면 위원장 돼야 하고, 총연맹 위원장까지 가면 성공한 운동가로 평가받는 우리 내의 위계질서 말입니다. 공장으로 돌아가면 퇴보한다고 생각하는 ‘선진 운동가’는 그래서 점점 대중과 섞이지 못하고 고립돼 갑니다. 운동과 삶은 유리되지 않고 자기 삶에서 운동을 해나가는 것인데, 운동의 울타리에 갇히게 되는 것이죠.” “그게 바로 기회주의라는 거야. 현실이니 대중의 요구니 하는 건 다 핑계고 변명이야. 사실은 싸우는 게 무섭고 싫은 거지. 돈 더 많이 받고 싶고 편하고 싶은 거 아냐? 적당히 싸우다 보상비나 타고 나가자 그거지. 핑계는 그럴 듯하지만 그게 다 기만이란 말이야.” (「속된 인생」40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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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과 조선일보는 '오버' 하지마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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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 지지표 가운데 사표는 단 한표도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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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가까운 한나라당이 당선되면 안 된다. 열린우리당을 선택해야 한나라당을 이길 수 있다. 민주노동당을 찍으면 사표가 되기 때문에 민노당원이라도 열린우리당을 찍어야 한다”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 지지자들이 했던 말이다. 급기야 정몽준의 지지철회 이후에는 당시 민주당 당원들과 노사모 회원들이 민주노동당 사이트에 와서 구걸하다시피 했었다. 이회창이나 노무현이나 종속적 신자유주의 정권이기는 마찬가지고, 노동자 민중이 힘들기는 마찬가지라는 주장은 조금씩 무너졌다. 민주노동당 지지표 중 일부는 ‘비판적 지지’와 ‘민주노동당 사표’론에 휩쓸려 나갔다. 나는 당시의 권영길 대표의 심정을 가늠할 수 없다.
이러한 점들을 종합해 볼 때 이번 사건의 배후가 있을 가능성은 매우 높아진다...따라서 이번 사건의 조직적 배후가 있다면...역설적이게도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한나라당이다...자해소동을 벌일 만큼 한나라당에게 절박한 상황이 있었냐...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향후 남북관계와 대선구도를 고려하여 상황을 판단해 보면...미국과 한나라당에게 필요한 것은 그냥 승리가 아닌 압도적 승리이며, 향후 남북관계의 발전을 차단할 수 있는 압도적인 정국 주도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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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실업률, 최저 출산률 "부산 내게 맡겨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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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진보우공(進步愚公) 김석준 부산시장 후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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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5월 15일, 부산에 유세 지원을 위해 내려온 노회찬 의원은 부산 남구로 향했다. 한참 시민들과 대화를 하고 있는데, 칠순의 한 할매가 노의원에게 말을 걸었다. 김후보의 할아버지는 약주 한잔 걸치시면 어린 손자를 불러놓고 “세 봉우리가 보이는 집에서는 정승이 난다”고 하시면서 ‘가문을 일으키고 큰 인물이 되라’고 하셨단다. 그 소리를 또 하시고, 또 하시고 했단다. 하지만, 인생에는 평탄대로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감만동 신동은 감만동 출신으로는 최초로 부산중학교에 붙겠다고 자신했지만 입학시험에서 낙방했다. 2차로 동아중학교에 입학한 그는 절치부심을 거듭하여 부산고등학교에 수석 입학하겠다는 ‘원대한’ 꿈을 꾸었다. 적을 알면 백전백승. 라이벌로 여기는 부산중학교 학생들 중 누가 공부를 잘하나 알아봤다. 그의 라이벌은 네 명으로 압축되었다. 부산중학교의 라이벌 중 하나가 지금은 의원이 되어 자신의 선거운동을 지원하러 내려온 노회찬 의원이었다. 그러나 이 네 명의 경쟁자는 다들 서울에 있는 경기고등학교에 진학을 했다. 김석준의 부전승으로 끝났다. 네 명 중 세 명은 대학에서 만났지만, 고대에 입학한 노회찬은 만나지 못했다. 다시 김석준에게 노회찬이라는 이름이 들려온 것은 바로 ‘인민노련’이 등장한 그때. 이후 민주노동당에서 김석준 후보는 ‘얼굴 없는 라이벌’이었던 노회찬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는 김석준 후보의 선대위원장을 맡고 있다. 둘의 관계는 맞수(?)에서 동지로 바뀌었다. 우공(寓公)의 선택, 진보정당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신동(神童) 김석준의 자호(自號)는 우공(寓公), 어리석은 늙은이다. 우공이산(愚公移山)은 그의 인터넷 필명이다. 전국 최연소 교수가 되었고, 촉망받는 연구자의 길을 박차고 민주노동당이라는 길로 들어선 것만 보아도 그의 호는 잘 지은 듯도 하다. 하지만 민주노동당의 성공을 바라는 그와 필자의 견해로 봐서는 민주노동당은 ‘남는 장사’이기도 한데, 그리 보면 우공(寓公)인지 현공(賢公)인지 헛갈린다. 그는 당의 해결사 역할을 자처한다. “2년 남은 2002년 지방선거를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장에 걸맞게 지방선거 준비팀을 꾸렸고. 당시에는 획기적이었던 두툼한 지방선거 공약집도 만들었고. 부산지역의 힘으로. 그러다가 부산시장 후보까지 나가게 되었고 지부장까지 하게 된 거지.” 당시 그는 16.8%라는 높은 지지율로 민주노동당의 최대 승부처였던 부산, 울산, 경남 ‘진보벨트’의 중심에 우뚝 서 있었다. 김석준 후보가 진보정당에 대한 관심을 가진 것은 대학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당시 학생운동을 하던 동료들과 당시 김철이 이끌던 ‘사회당’의 강령을 구해 학습하기도 했다. 본격적으로 그가 진보정당에 대해 고민하던 시절은 ‘국민승리 21’이 만들어지던, 민주노총이 정치세력화를 본격화하던 그 시기이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그는 노동자, 민중이 중심이 되는 진보정당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97년, 민주노총의 개량화에 대한 우려들이 조금씩 싹트고는 있었고 정치세력화에 대해 수많은 문제제기들이 있었지만, 그는 “대중조직인 민주노총이 결의를 했다. 입맛 맞는 거 찾으려면 어느 세월에 되겠나. 부족하더라도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국회의원 노무현을 향한 일갈, “진보정당을 만들자” 때는 1990년 1월 22일, 노동자 대중운동이 전노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던 순간 민정당, 민주당, 공화당은 3당 합당을 통해 보수대연합을 공표했다. 당시 민주당 국회의원이던 노무현 의원은 부산 신선성당 주임신부였던 송기인 신부에게 부산지역 재야 세력을 모아달라고 요청한다. 당시 전교조 교사들, 민교협 교수들, 민변 소속 변호사들, 청년학생들이 모여 비공식 연석회의 또는 간담회 형식으로 모였다. 민주당 잔류를 선언한 노무현, 김광일, 김정길 의원도 참석했다. 이날 발제를 한 노무현 당시 의원은 “국민이 만들어준 여소야대 지형을 배신하고 3당이 합당했다. 야당하라고 했는데 여당으로 간 것은 시민을 배신한 것이다. 현재 민주당은 무주공산이다. 변호사, 교수, 교사, 청년학생 모두 민주당에 들어와서 지구당 하나씩 차지하자. 그러면 다음 선거에 모두 당선된다”고 말했다. “87년 대선 당시도 YS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산에서 노태우가 31%를 득표했다. 31%는 골수 보수층이다. YS 찍은 55%는 YS가 배신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다. 30%가 따라간다. 지금부터 정치지형이 바뀌는 거다. 부산은 이제 야당도시가 아니고 여당도시, 보수도시가 되는 거다. 노무현 의원이 정말로 노동자들을 위해서 싸운 국회의원이라면 민주당 같이 하자고 할 게 아니다. 기왕 3당 합당에 들어가지 않았으니 이참에 노동자 민중과 함께 진보정당 만들자고 제안하는 게 맞는 거다.” 그날로 노무현 의원은 ‘삐껴서’ “교수, 재야하고는 다시는 같이 일 안 한다”고 선언했으며 판은 깨졌다. 어쩌면 노무현 후보에 대한 일갈이 아니라, 자신에게 그리고 운동진영 전체에게 가한 일갈일지도 모른다. 거창에서 일어난 민주노동당 후보의 돈봉투 사건은 진보정당운동의 도덕성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김석준 후보는 노무현 정부의 허점을 “사회 전체를 경영하고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이 모자란다.”고 비판했다. 민주노동당에게도 해당된다고 그는 강조한다. 복지 예산 30% 확대…임산부와 12세 이하 무상의료 실시 민주노동당 김석준 부산시장 후보의 선거 슬로건은 ‘서민행복특별시’이다. 지난 선거 때의 ‘4번타자 김석준, 부산을 바꾸자’의 슬로건에서 진일보한 느낌이다. 그만큼 민주노동당은 4년 전에 비해 부산에 대해 많이 연구했고 정책을 생산했다. “지난 선거 때 공약 중 많은 부분은 부산시나 중앙정부에서 상당 부분은 이미 시행하거나 시행을 계획하고 있다. 따라서 이번 선거 준비 과정에서는 빠진 부분과 업그레이드 시켜야 할 부분에 신경을 많이 썼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복지예산 30% 확대와 이를 기반으로 한 부산시 차원의 ‘임산부와 12세 이하 아동에 대한 무상의료 실시’이다. 한나라당 허남식 후보는 2020년 부산 인구를 450만으로 예상했지만, 김석준 후보는 이러한 과도한 인구 예측이 난개발과 재정 낭비를 부추긴다고 비판했다. 또한 그는 고용평등과 노동권리 확보를 위한 지자체의 계약준수제, 공공기관의 비정규직 단계적 철폐, 중소기업 취업보조금을 통한 1만 명 청년 일자리 창출, 대형할인점 진입규제와 영업시간 제한 등도 내세우고 있다. 부산시의 가용예산 8,000억 원 중 60%가 길 닦는데 들어가는 조건, 이것을 포기해야만 부산시민들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중앙정부의 실업대책 예산 중 1/10만 부산에서 쓰면 청년실업을 상당히 해소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민주노동당 부산시당의 돋보이는 점은 부산시 ‘자체 예산 확보’가 ‘가능하다’, ‘대안이 있다’는 점을 밝힌 것이다. 여기에는 김석준 후보와 함께 1년 이상을 함께 해 온 부산시당 정책위원회의 역할이 매우 컸다. 김석준 후보는 ‘부산박사’라는 별칭답게 1년 넘게 정책위원회 활동에 빠짐없이 결합해 왔다. 민주노동당, 정파 구도 운동권적 선민의식 벗어나야 사실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참여정부로 많이 흡수되었고, 지식인운동의 양적인 노력도 상당히 줄어들었다. 학생운동도 거의 소멸했다. 해야 할 일은 많은데 할 사람은 없다고 말한다. 김석준 후보 역시 이런 부분에 고민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처방을 제시한다. “이제 대학에 기댈 수 있는 시기는 지났다. 대학의 교수들에게 일정한 역할을 기대왔지만 이제는 할 사람도, 하고자 하는 사람도 없다. 다른 ‘진지’를 고민해야 한다. 당과 노동조합에서 일정하게 경험이 축적된 사람들, 검증받은 사람들을 우리는 당이라는 진지를 통해서 실력을 쌓도록 해야 한다. 20년 앞을 내다보고 운동사회와 당의 인적자원의 능력을 향상시키고, 인적망을 마련해 나가는 것을 지금 당장 시작해야 한다.” 일할 사람도 없지만, 그나마 있는 사람들조차 정파와 이해관계 속에서 소통이 어렵거나 아예 없다. “인력을 공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방선거 이후에는 이런 상황이 온다. 사회 내에서 민주노동당에게 자기내적 한계, 예를 들어 정파구조나 운동권적 선민의식 등을 깨뜨려야 한다는 것은 싫건 좋건 요구받게 되어 있다. “실력 있는 대중정치 지도자는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다. 민주노동당에 대한 지지도 언제든 뒤집어질 수 있다. 아닌 말로 ‘봉기’를 통해 집권한다고 해서 국민들이 인정해 주는 게 아니다. 확고부동한 지지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당을 ‘우공훈련소’로 만들어 한국사회 방향을 바꾼다 지방에서 대중적인 지지를 마련하고, 지방정부에서의 당선과 집권을 통해서 자기 역량을 축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시민들에게 인정을 받아야 한다. 진보가 과격하고, 어설프고, 촌스러운 게 아니라 세련되고, 능력 있는 게 진보라는 이미지를 심어줘야 한다. 정책도 제일 낫네, 사람도 제일 낫네 라는 인식을 심어줘야 한다.” 예를 들어 울산이나 부산 또는 광역단체가 아니라도 거제와 같은 기초단체 등에서 단체장이나 의원으로서 검증받고 실험하고 공유하고 실천해 나가는 진보적 지역정치의 광범위한 실천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김석준 후보는 지난 2000년 이후 지방선거 이전에는 정책위원회를 중심으로 지방선거팀을 준비했었고, 2002년 지방선거 이후에는 ‘진보를 위한 부산정책연구소’를 만들었다. 현재 여러 조건 때문에 연구소 활동이 도중 중단되기는 했지만, 그는 지역의 집권 토대를 구축하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그야말로 선두에서 고민하고 실천해 왔다. 그와 함께 한 사람들은 외국 진보세력의 지방전략에 대한 책을 번역 작업하기도 했다. 만약 이 책이 조금 더 일찍 출간되었더라면 얼마 전 출간된 진보정치연구소의 『런던 플랜』과 함께 당원들의 필독서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김석준 후보의 눈에는 민주노동당이 명실상부한 ‘당’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할 일이 너무나도 많다. 우공훈련소(寓公訓練所)로서의 당을 만드는 것, 이 훈련소가 한국사회의 경로를 ‘역사적인 회군’을 통해 수정하는 꿈을 그는 지금도, 예전에도 꿈꾸고 있는 것이다. 자기관리와 겸손의 대명사 김석준 김석준 후보를 아는 사람들은 그의 겸손함에 놀란다. 어디서든 얼굴 붉히는 일이 없다. 점잖게 얘기를 하는 그의 모습을 보노라면, ‘진보의 겸손이 이런 것이구나’ 하고 느끼게 된다. 어떻게 보면 돌아가신 故 김진균 선생님의 풍모가 느껴지기도 한다. 본인 스스로는 설레설레 손사래를 치겠지만. 자기 스스로를 우공(寓公)으로 낮추는 것, 그 능력이 그를 노동자 민중의 지도자로 붙잡아 두는 힘일 것이다. 노동자 민중에게 민주노동당은 확실한 대안이고, 그는 민주노동당의 확실한 대안이다. 그는 자기관리에 철저한 사람이다. 세 번의 선거를 치러내면서 부산의 당원들은 그의 체력에 혀를 내둘렀다. 어릴 때부터 운동을 좋아하여, 부산에서 김해까지 축구 원정경기를 다니고, 탁구, 달리기 등 못하는 운동이 없는 그다. 등산도 즐겨하고 운동도 즐겨한다. 얼마 전 지명(知命, 50세)에 이른 그가 아직도 민주노동당 체육대회에서 각종 종목의 ‘대표선수’로 선발되는 것을 보면 당으로서는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아직 당은 그를 부릴 수 있다. 그의 체력은 곧 부산당원들의 자존심이다. 부산시당 소식지에 실릴 예정인 어느 당원의 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지난 2003년 민주노동당에는 ‘진사달’이라는 모임이 있었다. 이름 하여 ‘진보사랑 달리기 모임’. 김석준 후보와 더불어 음주가무로 상태 안 좋은 몇 명의 당원들이 주요 회원이었다. 마라톤 1시간 하고 뒷풀이 술을 몇 곱절 시간으로 마셨다. 술 마시기를 철인마라톤대회 수준으로 했으니 살이 빠질 이유가 완벽히 없다. 결국 ‘진사달’ 모임도 반년 정도 유지되다 흐지부지 됐다. 하지만 김석준 후보는 매년 주요 마라톤대회에 참가해 달리기를 계속했다. 마지막 남은 ‘진사달’ 회원이었다. 지난 5월 7일 노동절기념 마라톤대회가 다대포 해안도로에서 있었다. 김석준 후보도 10km 코스에 참가했다. 김석준 후보의 전력을 잘 모르는 참모들은 대회가 있기 전부터 5km만 뛸 것을 권했다고 한다. 하지만 김석준 후보는 이날 10km코스를 59분34초99의 기록으로 완주해 참모들의 우려를 잠재웠다. 이 날 열린우리당 오거돈 후보도 참석해 눈길을 끌었지만 500미터 정도 뛰고 말았다고 한다. 김석준 후보는 매년 노동절기념 마라톤대회와 각종 대회에 참가해 노동자, 서민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했다. 마지막 남은 ‘진보사랑달리기’ 회원 김석준 후보, 그가 진짜 노동자, 서민 후보다.” (민주노총 부산본부 박진현 부장) “어제는 밀린 거 이틀 치 쓰는데 정말 졸려가지고, 자판 두드리는데 눈이 감기더라고.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다시 봤어요. 횡설수설한 거 같아서. 보니까 문장은 되더라고. 그래서 놔뒀어.” 그의 세심함. 그의 자상함. 그의 겸손함. 그의 굳건함. 70년대 긴급조치 9호 세대인 그가 노동운동과 진보정당에 투신한지 30년이 흘렀다. 하지만 그의 이력과 성품으로 봐서는 여전히 그에게 한국사회와 부산은 애증의 교착점이며 변화의 대상이다. 하지만 그는 오랜 세월을 탓하지 않는다. 무릇 우공에게 산을 옮기는 일은 단시간에 끝날 일이 아니었다. 그에게 한국 사회의 변화는 애초부터 자신의 평생의 과업이었다. 업보다. 그 업보를 모두가 함께 나누어 짊어지는 것, 세대를 이어 해 나가는 것, 이것이 우공의 꿈이 아닐까? 더 많은 우공들, 젊은 우공들을 그와 내가, 우리 모두가 기대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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