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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주민증 도입 신중히

“전자주민증 도입 신중히”
 
[한겨레 2006-04-17 20:36]    
 

[한겨레] 인권운동사랑방, 참여연대, 진보네트워크센터 등 시민단체이 17일 오전 서울 정부중앙청사 앞에서 ‘전자주민증 도입 반대와 주민등록제도 개혁을 위한 기자회견’을 열었다. 회견에서 진보네트워크센터 활동가 지음(오른쪽)씨가 “전자주민증이 사생활을 침해할 가능성이 높다”며 개인정보보호법 제정과 개인정보 감독기구의 설립을 촉구하고 있다. 행정자치부는 전자주민증 도입안을 확정하고 입법 수순에 들어갈 예정이다.

박종식 기자ana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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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지부의 요구사항에 관하여.

[050726]12차 지부집단교섭


여름휴가를 앞두고 05년 금속노조 부산양산지부 집단교섭이 일단락되었다. 7월 27일 지부총파업이 예고된 가운데 7월 26일 오후 3시부터 지부회의실에서 열린 12차 교섭은 막바지 타결을 위해 장시간, 잦은 정회로 힘겹게 진행되었다.
사측에서는 대우정밀, 동아스틸, 비엠금속, 진흥철강, 태평양밸브, 한국기전, 한진중공업등 7개사업장과 지부에서는 문영만지부장을 비롯한 11명의 교섭위원이 참가하였으며 15명의 지회간부들이 참관인으로 교섭과정을 지켜봤다.
이날 오후 3시부터 오후 11시까지 개최된 마라톤 협상끝에 노사양측은
▲ 지부총회시간 연4시간(단, 2006년부터 적용) [지부요구안 : 반기별 8시간]
▲ 정년연장 --> 만57세 되는 해의 12월말(2005년 8월 1일부터 적용) [지부요구 : 만60세]
▲ 추가전임자 전임료 임금인상--> 집단교섭참가사업장 임금인상액의 평균으로 한다.
▲ 임금 --> 지회보충교섭에서 논의하고, 집단교섭에서 최종 조인한다는데 잠정합의했다. 대우정밀은 채권단과의 관계로 이번 주내 사측의 내부절차를 거치기로 하였다. 그리고 사업장에서임금에 관한 논의가 마무리되는 시점까지 지부집단교섭은 일시 중단의 형식을 띠게 된다. 만약 임금협상이 사업장에서 논의가 미진할 경우 재차 지부집단교섭이 재개될 여지도 있다.
임금인상은 사업장별 사정과 격차가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여름휴가 시작기간이 달라 지부교섭에서 충분히 다루기 어렵다는 점을 노사상호 인식하여 지회보충교섭에서 다루되, 최종적으로는 지부집단교섭에서 마무리하는 방안으로 가닥을 잡았다.
4월 28일부터 시작된 05년 교섭은 매주 목요일 한차례 개최되었으나 10차교섭이후 막바지 타결을 위해 11차, 12차교섭은 연이어 개최되었다. 그리고 올해에는 지부집단교섭과 관련하여 중앙교섭에 따른 금속노조 총파업과는 별도로 7월 22일 부산양산지부 총파업이 성사되기도 하였다.

지회보충교섭 마무리 -> 조합원 찬반투표 --> 조인식

지회보충교섭이 완료되면 조합원 찬반투표를 거쳐 조인식을 하게 된다. 여름휴가전에 지회보충교섭이 완전 타결될 경우 중앙교섭결과에 대한 조합원찬반투표가 예정된 8월 12일부터 15일 사이에 지부집단교섭 결과에 대한 조합원 찬반투표가 같이 실시될 것으로 보인다.금속부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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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재반론-홍윤기 교수의 반론을 읽고

재반론_홍윤기 교수의 반론(교수신문 제401호)을 읽고
‘표현’ 개념 잘못 이해 … 억측 근거로 비판

2006년 06월 12일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이메일 보내기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처럼 충돌과 갈등을 통해 창조 또한 가능하다. 논쟁이란 이성과 이성의 길항(dia-logos)을 통해서 진리/진실에 한발자국씩 다가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개인적 감정을 노골적으로 표출한다거나 상대방을 이기려는 아집에 사로잡혀 지엽적인 문제에 집착하는 것을 피해야 할 것이다.


지금 핵심적인 문제는 들뢰즈/가타리의 ‘유목주의’가 침략주의인가, 천규석의 주장이 과연 근거 있는가, 아니 최소한의 지적 성실성이라도 갖추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유목주의/노마디즘’이라는 표현으로 들뢰즈/가타리 사유를 지칭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는 논증된 문제가 아니다. 이 표현은 이들의 것이 아니라 이진경의 것이다. 그러나 일단 이 말을 사용하기로 하자)


‘노마디즘’은 이중적으로 패러디되고 있다. 한편으로는 유목민들의 삶을 그리워하는 낭만적 회귀라는 패러디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후기자본주의적 상품논리로서의 ‘유비쿼터스’ 전략이라는 패러디이다. 둘 다 들뢰즈/가타리의 본지와는 한참 떨어진 패러디들이다. 그러나 후자의 패러디가 훨씬 심각하다. 국민국가들을 매개 고리로 하는 후기자본주의적 ‘공리계’(화폐 회로들의 장)에 저항하고자 하는 소수자 윤리학/정치학을 완전히 거꾸로 ‘침략주의’, ‘시장제국주의’로 해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천규석의 책은 ‘천의 고원’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도 없이 그것을 항간에 유행하는 천박한 “유목주의”와 동일시함으로써 “침략주의”라는 극단적인 해석(?)을 내리고 있다.


천규석/홍윤기는 들뢰즈/가타리 사유를 1)개념/이론이 아니라 인상/이미지로 받아들이고 2)그것을 상상/억측한 후 3)그것에 대해 전혀 빗나간 ‘비판’을 가하고 있다. “전쟁기계”라는 말을 듣고서 거기에 “전쟁”이라는 단어가 들어가자 ‘피 냄새가 난다’, ‘칭기즈칸의 정복주의’를 찬양하는 것이다 같은 식의 ‘비판’을 가하는 것이 전형적인 예이다. ‘유목’이라는 말이 들어가자 여기저기 이동하는 것이라고 상상하고, ‘욕망’이라는 말이 들어가자 퇴폐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상상하는 둥, 우스꽝스러운 상상/억측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어떤 개념을 듣고서 그것에 대한 최소한의 성실한 이해도 없이, 그 언어가 연상시키는 이미지/인상을 근거로 상상/억측한 후 다시 그것을 엉뚱하게 비판하는 것, 이것이 천규석/홍윤기의 글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사유’이다.


전쟁기계는 전쟁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것은 1968년(‘68혁명’) 이래 도래한 소수자 운동(여성운동, 학생운동, 새로운 노동운동, 문화운동, 생태운동 등등)을 염두에 둔 개념이며, 국가장치/자본주의로부터 탈주하면서 투쟁하고 사랑하고 창조하는 모든 행위들을 가리키는 말이다.(참으로 얄궂은 것은 천규석 등이 추구하는 생체공동체야말로 다름 아니라 들뢰즈/가타리가 추구하는 전쟁기계의 좋은 예라는 사실이다)


이런 식으로 무책임하게 상상/억측할 때 천규석도 침략주의자이다. 천규석은 ‘농사꾼 철학자’이고 따라서 농사와 철학을 가로지르면서 유목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천규석은 침략주의자가 된다. 이 무슨 기묘한 결과인가. 이런 식의 “연상 고리들”을 끊고서, 최소한의 지적 성실성을 가지고서 누군가를 언급하고 평가하고 비판해야 하지 않을까.


덧붙여 말한다면, 홍윤기는 홈 패인/매끄러운, 유목/정주, 리좀/수목형을 비롯해 들뢰즈/가타리의 구분이 개념적 구분일 뿐 실체적/실재적 구분이 아니라는 내 지적을 논박하기 위해서 내용/표현, 실체/형식을 도식한 그림을 내세웠다. 그러면서 ‘봐라, 들뢰즈/가타리가 실체의 내용과 표현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느냐’는 요지의 반론을 가하고 있다.


그러나 들뢰즈/가타리에게 ‘내용의 실체와 형식’, ‘표현의 실체와 형식’은 있어도 ‘실체의 내용과 표현’, ‘형식의 내용과 표현’ 같은 것은 없다.


첫째, 무엇인가가 있고 그것의 내용과 표현이 있는 것이 아니다.(들뢰즈/가타리의 ‘표현’을 어떤 존재가 있고 그 존재가 무엇인가를 표현한다는 상식적 의미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돌과 조각가가 있을 때 돌이 내용이고 조각가가 표현이다. 일상적 ‘표현’ 개념과는 전혀 다른 개념인 것이다) 내용과 표현이 각각 어떤 것, 무엇이다.

 
둘째, 이들에게 ‘실체’란 어떤 것, 무엇이 아니라 어떤 것의 질료/물질을 뜻한다.(chemical substance를 ‘화학물질’로 번역하는 것을 상기하면 되겠다) ‘형식’은 어떤 것의 구조를 뜻한다. 그러니까 홍윤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철수의 키와 성격’, ‘영희의 키와 성격’이라 해야 할 것을 ‘키의 철수와 영희’, ‘성격의 철수와 영희’라고 말하는 것과도 같다.(‘천의 고원’ 58-60쪽, 한글본 92~95쪽을 숙독할 것을 권한다) 요컨대 홍윤기는 그림의 가로를 먼저 읽고 세로를 읽어야 하는데, 그것을 거꾸로 읽고 있는 것이다.(!)


더 기막힌 것은 이런 실소를 자아내는 “근거”를 제시한 후에, 그는 오히려 내가 “원전 사기극”을 벌이고 있다고 강변한다는 사실이다. 설사 내가 틀렸다 해도 “사기극”이 무슨 말인가. 논적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하지 않을까.


©2006 Kyosu.net
Updated: 2006-06-12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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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우는 운동화, 스니커즈 만세!

싸우는 운동화, 스니커즈 만세!

한겨레21 2006년05월26일 제611호

검정색 구두와 하얀색 운동화의 시대는 가고 형형색색 스니커즈의 시대로 … 세계적 디자이너의 명품에서 구멍가게 옆의 아디칼라까지 그 화려한 스펙트럼

 

▣ 나지언 피처 에디터

 

지난 4월12일 밤 12시, 뉴욕의 한 상점 앞에 일군의 젊은이들과 경찰들이 팽팽한 긴장감으로 둘러싸여 있다. 순찰을 나온 경찰이 말한다. “아니, 도대체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그들이 모여 있는 곳은 나이키 매장 앞이었고, 그로부터 10시간 뒤 그래픽 아티스트 스태시가 디자인한 ‘나이키 에어맥스 스태시 블루 팩’ 리미티드 에디션이 판매될 예정이었다.


△ 디자인과 색감으로 무장한 스니커즈는 여자의 발을 해방시키고 남자를 고민의 즐거움에 빠뜨린다. <위쪽>, 나이키가 ‘에어 조든’ 시리즈를 발표하면서 운동화는 운동장을 벗어났다. (왼쪽아래), ‘아디칼라’ 화이트 시리즈는 아크릴 물감 등과 세트로 판매한다. 만화 스니

 

멀쩡하게 생긴 한 남자는 경찰의 의아함에 화답이라도 하듯 말한다. “만약 저 스니커즈를 구한다면, 집에 가서 울 것만 같아요.” 당신이 보기에 미친 게 분명하다고 생각되는 이 젊은이들은 시카고, 마이애미, 보스턴 등지에서 비행기를 타고 날아왔으며 특별한 스니커즈의 첫 판매를 기다리느라 며칠 밤을 새웠다. 그들이 갈구하던 스니커즈는 25만원에 판매됐으나, 65만원까지 가격이 오르기도 했다.

 

“저걸 손에 넣으면 울어버릴 거야”

 

태초에 운동화가 있었다. 1980년 나이키가 그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 그것은 단지 운동화에 지나지 않았다. 운동화는 새것이 더 촌스럽다고 생각됐으며 해질 때까지 신는 게 그들의 정체성이라 믿었다. 그러나 나이키가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의 도구로 운동화를 불러줬을 때, 그리고 곧이어 형형색색 ‘에어 조단’ 시리즈를 발표했을 때, 운동화는 운동장을 벗어났다. 다 큰 남자들이 나이키 에어 조단을 손에 넣고 펑펑 우는 장면을 쉽게 목격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리고 1990년, 스니커즈는 이제 공간의 제약성을 벗어나 어디든 활보할 수 있게 됐다.

그러니까 1990년, 축구 용품 브랜드로 알려진 푸마는 세계적인 디자이너 질 샌더와 손을 잡았다. 질 샌더는 푸마의 축구화 ‘푸마 킹’을 스니커즈 형태로 변형한 ‘푸마 아반티’를 내놓았다. 나이키와 아디다스의 경쟁에 밀리던 푸마는 푸마 아반티의 슬림하고 날렵한 디자인으로 인해 인기를 한 몸에 받았고, 국내에서는 뒤늦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지난해 명동과 신촌, 압구정 거리를 아반티가 모두 쓸고 다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질 샌더에 질세라, 다른 디자이너들도 스니커즈 디자인에 머리를 싸매기 시작했다. 일단 짭짤한 수입을 낸 푸마는 1999년 ‘블랙 스테이션’이라는 고급 스포츠 캐주얼 라인을 새로 론칭했다. 이후 프라다 디자이너 출신 닐 바렛, 슈퍼모델 크리스티 털링턴, 그리고 일본의 야스히로 미하라 등을 영입한 푸마는 다양하고 신선한 제품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아디다스는 일본의 요지 야마모토, 리복은 폴 스미스와 손잡고 명품 스니커즈를 생산해냈으며, 반스는 디자이너 마크 제이콥스와 함께 ‘마크 제이콥스 슬립온 제트’라는 앙증맞고 귀여운 스니커즈를 만들어냈다.


△ 스니커즈는 신발이 아니라 예술이다. 디자이너들도 스니커즈 디자인에 머리를 싸매기 시작했다.

 

 

전세계가 스니커즈 열풍이다. MTV는 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스니커즈 마니아들을 찾아나섰으며, ESPN은 라는 프로그램으로 스니커즈 탐방을 시작했다. 이제 스니커즈는 운동장을 벗어나 TV에 침투했으며, 사무실과 고급 레스토랑에까지 발을 뻗었다. 파워워킹할 때 신는 허여멀건 운동화와 달리 눈이 번쩍 뜨일 만한 디자인과 색감으로 무장한 스니커즈는 슈트에다 신어도 손가락질 받지 않는 게 장점이다. 이제 여자들은 일과를 마치고 집에 들어가 냄새 나는 스타킹과 퉁퉁 부은 발과 싸우는 대신, 그냥 양말을 벗어던지면 된다. 고무신의 여성 평등 기조에까지는 못 미치지만, 스니커즈는 여자의 발을 옥죄던 하이힐에서 일주일에 단 며칠 만이라도 해방될 수 있는 숨구멍을 부여했다. 미국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에서 캐리가 소리쳐 불렀던 ‘마놀로 블라닉’ 구두 대신 이제 ‘스니커즈 만세’를 외칠 일이다. 그 대가로 우리가 얻는 것은, 키가 조금 작아진 것뿐이다. 남자들은 또 어떤가. 그들이야말로 수많은 종류의 스니커즈 앞에서 뭘 골라 신어야 할지 고민하는 즐거움에 빠졌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검정색 구두와 하얀색 운동화가 전부인 줄 알던 시절은 이제 지나갔다. 평소에는 나이키 에어 맥스를 신어도, 중요한 약속이 있는 날에는 슈트에 캔버스 스니커즈를 신고 넥타이 하나만 매주면 되는 시대인 것이다.

 

돈을 숨기는 포켓과 안창의 국경 지도

 

모든 사람을 평소의 키 그대로 가감 없이 보여주는 스니커즈는 평등한 신발이다. 이렇게 평등을 외치는 신발이다 보니, 목까지 단추를 채워야 하는 레스토랑보다는 아무렇게나 입어도 되는 거리에서 더 빛이 난다. 격식이나 형식 대신 자유와 평등을 입은 스니커즈는 제품 제작에서도 그 믿음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최근 스니커즈 열풍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현상은 ‘커스터마이징’, 자주 쓰는 용어로 ‘튜닝’이다. 커스터마이징은 소량 생산되는 비싼 디자이너의 스니커즈를 사느라 돈을 모으거나 유명한 예술가들이 만든 스니커즈를 사느라 밤새워 충혈된 눈을 하고서 줄을 서야 하는 번거로움을 모두 없애주는 편리한 마케팅이다. 이제 소비자들은 스니커즈에 마음대로 그림을 그려넣고 색을 칠하고 장식하는 ‘나만의 스니커즈’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 마케팅의 가장 선봉에 있는 아디다스는 1983년 시작했다가 시대를 앞서갔다는 이유로 외면받은 ‘아디칼라’ 시리즈를 다시 내놓았다. 아디칼라 화이트 시리즈는 흰색 운동화와 아크릴 물감과 사인펜, 스프레이 등이 하나의 세트로 판매된다. 디자인에 따라 레벨 1에서 6까지 여섯 종류가 있는데, 레벨이 높아질수록 가격이 싸지고 판매 수량도 많아진다. 명동에 있는 아디칼라 매장에 가면 배우 이천희가 만든 ‘도시’ 스니커즈, 만화 <츄리닝> 만화가들이 만든 ‘츄리다스’ 등 다양하고 재미있는 스니커즈를 만나볼 수 있다. 나이키의 ‘ID’, 퓨마의 ‘몽골리안 바베큐’ 프로젝트 역시 같은 맥락이다.


△ 스니커즈는 젊으니이들의 열광을 등에 업고, 소비와 생산의 개념을 바꿔놓았다. 매장에서 스니커즈를 고르는 젊은이들.

 

덕분에 커스터마이징 아티스트들도 뜨고 있다. 나이키 튜닝으로 유명한 에드슨의 튜닝화는 그 자체가 하나의 예술이다. 이렇게 스니커즈는 소비의 개념을 바꿔놓고, 더 크게는 시대가 고수하는 라이프 스타일의 변화까지도 가져왔다.

앞에서 말한 거리의 예술가 스태시의 스니커즈처럼 각 스니커즈 브랜드는 좀더 자유롭고 다양한 예술의 형태를 스니커즈와 접목시키는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리복의 바스키아 스니커즈는 요절한 천재 화가 바스키아의 작품과 사인을 활용한 제품이며, 아디다스는 팝 아티스트 키스 해링의 작품을 스니커즈에 도입했다. 우마 서먼이 영화 <킬 빌>에 신고 나온 매끈한 스니커즈는 일본의 오니쓰카 타이거 제품이었지만, 나이키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타란티노 감독의 <킬 빌>에 대한 오마주를 바치기 위해 신발 앞에 일어로 ‘빌을 죽여라’(Kill Bill)라고 써 있는 킬빌 슈즈를 따로 제작했다. 이제 스니커즈는 단순히 신발이 아니라 하나의 예술이다. 젊음과 자유를 상징하는 스니커즈를 전선에 매다는 등 다양한 스니커즈 아티스트들도 생겨났다. 컨버스나 나이키가 체 게바라를 광고나 제품에 자주 도입하는 게 우연의 일치만은 아닐 것이다.

스니커즈는 돈 많은 패션 피플의 소장품이나 할 일 없는 젊은이들의 수집품만은 아니다. 스니커즈를 보면 사회가 읽힌다. 소비와 생산의 개념을 바꿔놓은 스니커즈는 다양한 정치·사회적 이슈를 반영하기도 한다. 브루클린 아티스트 주디스 워다인은 미국에 밀입국하는 멕시코인들을 위한 상징적인 스니커즈, 즉 ‘보더 스니커즈’(Border Sneakers)를 만들었다. 일명 ‘브링코’(Brinco·스페인어로 ‘도약’이라는 의미)라 불리는 이 스니커즈는 신발끈에는 라이트와 나침반을 붙였으며, 안쪽에는 돈이나 진통제를 숨길 수 있는 포켓이 있다. 그리고 발 안창에는 국경 지도가 그려져 있다. 주디스 워다인은 1천 개의 보더 스니커즈를 통해 미국 사회에서 이민자들의 문제를 이슈화했다. 한편, 아디다스는 아디칼라 시리즈 중 디자이너 베리 맥기가 디자인한 스니커즈 때문에 미국 내 아시아 커뮤니티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그가 그린 아시아인들이 뻐드렁니와 찢어진 눈이라는 정형화된 이미지를 갖고 있었던 게 반발의 이유였다.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들어간다

 

FEIT(Fight) 스니커즈는 이 세상의 모든 부조리와 부패, 그리고 부정과 싸운다는 의미에서 제품명과 회사명이 ‘파이트’며, 대량생산이 아니라 전문가들이 일일이 수작업으로 섬세하게 만들어낸 명품이다. 나이키 ID는 ‘덩크 7 자선 컬렉션 스니커즈’로, 판매 금액을 전액 비영리단체에 기부하는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제품 역시 전세계에서 30명 정도만 가질 수 있는 희귀 소장품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소비와 생산의 개념을 바꿔놓은 스니커즈 마케팅만이 할 수 있는 운동일 것이다.

스니커즈는 이미 우리 일상 속으로 깊숙이 들어왔으며, 생산과 소비 그리고 예술에 대한 많은 개념들을 바꿔놓았다. 최근 아디칼라 마케팅을 보면, 그들은 스니커즈가 사회·문화적 맥락 안에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제대로 파악한 게 분명하다. 그들은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스니커즈가 들어간다는 취지 아래 뉴욕에 있는 7개의 작은 구멍가게에 아디칼라를 전시하기 시작했다. 골목길 코너에 있는 작은 상점 안 음료수 냉장고 등지에 놓여 있는 아디칼라 스니커즈는, 스니커즈가 얼마나 우리 일상에 가까이 들어왔는지를 방증하는 사례다. 물론 이렇게 스니커즈 하나에 거창하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기자나 하는 일이고, 당신들이 할 일은 지금 당장 달려가 마음에 드는 스니커즈를 하나 사서 하루 종일 일하느라 지친 발에게 위로를 건네는 것이다. 그게 스니커즈의 가장 큰 미덕일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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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 그 의자에 앉고 싶다

의자, 그 의자에 앉고 싶다
<2006년04월04일 제604호 한겨레21>
디자이너가 사랑하는 소품, 건축가의 아이콘, 가구 양식사의 표준모델… 인테리어를 일관된 스타일로 꾸미려 한다면 이제 의자에 눈을 떠라

 

▣ 김신 월간 <디자인> 편집장

 

지금 서울시립미술관에서는 ‘위대한 의자 20세기의 디자인’전이 열리고 있다. 이 전시에는 20세기를 대표하는 100개의 의자가 전시되고 있다. 또 분당 코리아디자인센터와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각각 열리고 있는 핀란드의 세계적인 건축가 알바르 알토 전과 일본의 거장 디자이너 우치다 시게루 전은 의자를 중심으로 한 가구 전시회다. 동숭동의 쇳대박물관에서 열리는 ‘건축가의 가구’전에서는 국내 건축계에서 잘 알려진 13명의 건축가가 디자인한 의자와 소파를 만날 수 있다. 이렇듯 의자 전시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열린 것은 처음인 것 같다. 전시회가 아니더라도 최근 세계적인 건축가와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유명 의자들이 대중잡지에 부쩍 많이 노출되고 있으며, 고급 식당과 사무실, 집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인간이 의자에 앉도록 진보한 역사

 

옛날부터 의자는 다른 물건과 달리 아주 특별한 것이었다. 즉, 의자는 아무나 소유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한자의 ‘권좌’(權座), 영어의 ‘체어맨’(chairman)이라는 단어가 보여주듯 의자는 권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즉, 최고 권력자만이 의자에 앉을 수 있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자에 앉기는커녕 구경도 못했다.


△ WW 스툴 디자이너: 필리프 스타르크, 1990. 이 의자의 모티브는 인삼이다. 인삼은 서양에서도 인간의 모습을 닮은 두 갈래의 뿌리 모양 때문에 성욕을 촉진하는 정력제로 알려졌는데, 이런 인삼의 성질을 모티브로 한 에로틱한 의자다.

 

의자란 몸을 수고롭게 움직이지 않은 채 앉아서 세상을 통치하는 자들의 상징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사가 권력이 점차 더 많은 사람에게 분산되는 쪽으로 흘렀듯이 의자도 마찬가지 길을 걸었다. 절대 권력자만이 앉을 수 있었던 의자는 시대가 흐르면서 귀족에게로, 다시 자본가로, 그리고 일반 시민에게까지 보급됐다. 오늘날에는 어느 누구도 의자를 소유하고 거기에 앉는 것을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헤겔은 “역사는 인간이 자유를 쟁취해가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의자 역사가의 눈으로 볼 때, 역사는 인간이 의자에 앉도록 진보해왔다.

특히 기계의 등장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기계의 등장과 대량생산 시스템은 노예를 노동자로 바꾸고 수많은 육체노동자들을 의자에 앉도록 했다. 힘든 육체노동을 기계가 대신해주었기 때문에 앉아서 일하는 사무실 근로자가 대거 등장했다. 이에 따라 이들에게 오랫동안 앉아서 일할 수 있는 의자가 필요해졌다. 20세기 초의 모더니스트들은 어떻게 하면 튼튼하면서도 조형적으로 아름다운 의자를 대량으로 생산해 더 많은 사람에게 보급할 수 있을까를 연구했다. 그러한 연구가 오늘날 단지 앉는다는 기능을 만족시키기 위한 수백 가지의 디자인을 낳은 원동력이 됐다.


△ 토네트 의자

 

 

왜 뛰어난 건축가와 디자이너는 의자를 디자인하고 싶어 안달일까. 왜 많은 인테리어 품목 가운데 의자에 집착할까. 의자는 조형적인 표현 가능성이 가장 풍부하기 때문이다. 의자는 머리 받침대, 등 받침대, 팔걸이, 엉덩이 받침대, 다리로 구성돼 있다. 다른 가구들과 견주어볼 때 의자는 그 구조가 대단히 입체적이다. 재료도 어떤 물건보다 많이 사용된다. 나무, 금속, 섬유, 플라스틱, 여기에 돌까지. 우리 주변에서 이렇게 다양한 재료가 한꺼번에 쓰인 물건을 찾기란 쉽지 않다. 따라서 의자는 형태 변형이 무궁무진한 것이다. ‘100개의 의자’전을 보면 바로 그 조형과 재료의 다양성에 감탄하게 된다.

또 의자는 어떤 가구보다 개인적이다. 대부분의 가구는 두 사람 이상이 함께 쓰는 경우가 많지만, 의자는 대개 한 사람의 것이다. 따라서 의자는 그것을 소유한 개인의 인격과 동일시되기도 한다. 구성 요소도 사람의 몸과 많이 닮았다. 우리가 사무실에서 함부로 남의 의자에 앉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 의자는 그것을 소유한 사람의 권력의 정도나 지위를 보여준다.

 

아직도 파리 카페의 의자는 150년전 모델

 

이런 특별한 의자를 디자이너들이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특히 건축가들은 자신의 건축적 이상을 의자에 압축해서 표현하길 좋아한다. 건축가들은 건축과 함께 그 건물의 내부에 쓰이는 물건들도 통일된 스타일로 디자인하고 싶어한다. 그 대표적인 물건이 바로 의자인 것이다. 근대 건축을 탄생시킨 4명의 대가인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발터 그로피우스, 르코르뷔지에, 미스 반데어로에는 저마다 자기 건축의 아이콘 같은 의자를 이 세상에 남겼고, 수십 년이 흐른 지금도 생산되며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 개미 의자 디자이너: 아르네 야콥센, 1955. 야콥센이 디자인한 여러 개미 의자 시리즈 가운데 한국인에게 가장 친숙한 의자.

 

 

4명의 거장이 디자인한 의자와 함께 오늘날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의자들은 유행에 따라 스타일이 수시로 바뀌는 가전제품이나 패션, 자동차와 달리 그 디자인이 바뀌지 않은 채 수십 년 동안 똑같은 재료와 모양으로 생산되고 있다. 아직도 파리의 카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우아한 곡선의 토네트 의자는 무려 150년 전부터 생산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사무실을 뭔가 지적이고 남다르게 꾸미려는 사람들이 꼭 갖고 싶어하는 초기 모더니즘 의자들은 대개 1920~30년대에 디자인된 것들이다. 바실리 의자, 바로셀로나 의자 등이 그것이다.

비트라 디자인 미술관이 엄선한 100개의 의자에 포함된 이 의자들은 우리나라에서도 쉽게 구입할 수 있다. 단 가격이 좀 세다. 적게는 30만~40만원대부터 비싼 것은 수백만원이 넘는다. 물론 한 개의 가격이 그렇다. 마니아들을 위한 손바닥만 한 크기의 미니어처도 10만원대 안팎이다. 의자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고 볼 수 있는 이 의자들이 적게는 10년, 많게는 80여 년 동안 똑같은 디자인으로 생산되고 인기를 잃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는 혁신성이다. 모던 의자가 나오기 전의 의자들은 천편일률적이었다. 재료는 거의가 나무, 또는 나무와 천을 혼합한 것이었다. 그리고 한결같은 과다한 장식. 우리가 예식장에 가면 볼 수 있는 그런 의자들 말이다. 그런데 모더니스트들은 강철관이라는 재료를 처음으로 사용했고, 다리도 4개가 아니라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는, 당시로서는 처음 보는 희한한 구조를 창조했다. 무엇보다 일체의 장식을 배제한 채 재료와 구조만이 의자의 외관을 결정짓게 디자인했다. 아주 단순하고 거추장스럽지 않다는 점에서 과거의 의자들과 완전히 결별하고 있다. 아마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외계에서 온 의자처럼 보였을 것이다. 수십 년 전의 혁신적인 디자인이지만 21세기를 사는 우리 눈에도 촌스럽지 않고 세련돼 보인다는 점이 의자의 명품으로서 가치를 인정받은 이유다.

 

늘 식탁이나 책상에 딸려오는 부수품?

 

둘째는 세계적인 스타 디자이너의 작품이라는 점이다. 대부분의 대량생산품들은 익명성으로 만들어진다. 즉, 그걸 누가 디자인했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명예의 전당에 오른 의자들은 반드시 제조사와 함께 디자이너의 이름도 밝힌다. 왜냐하면 대부분 의자는 디자이너 개인의 아이디어고, 또 디자이너의 이름을 밝히는 것이 판매에 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알레산드로 멘디니, 필리프 스타르크, 론 아라드, 재스퍼 모리슨, 마크 뉴슨 등의 스타 디자이너들은 대중에게도 많이 알려져 있어 그들이 디자인했다고 하는 것이 큰 프로모션이 된다. 아르네 야콥센, 찰스 레이 임스, 베르네르 판톤 등 이미 고인이 된 거장들의 의자는 말할 것도 없다.


△ 록히드 라운지 의자 디자이너: 마크 뉴슨, 1986. 차가운 금속과 거친 이음새가 독특한 것을 좋아하는 마니아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의자.

 

 

서구의 가구 디자인 역사를 볼 때, 의자는 분명 그 중심에 서 있다. 바로크, 로코코, 신고전주의, 그리고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이어지는 가구 양식사에서 표준 모델은 장이나 테이블, 침대가 아닌 바로 의자다. 그러나 좌식 생활을 한 한국인에게 의자는 그렇게 대수로운 물건이 아니다. 우리의 생활양식이 서구화돼 식탁과 책상이 보편화된 뒤에도 여전히 의자는 욕망이 대상이 되지 못했다. 의자를 단독으로 구입하는 경우가 별로 없다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다. 의자는 늘 식탁이나 책상에 딸려오는 부수품이다. 또 우리 기억 속의 의자들이란 학교의 나무 책상, 사무실의 철제 의자, 구멍가게 앞의 널빤지 의자, 식당에서 막 쓰는 동그란 의자 등으로 고급스럽거나 애지중지하는 물건이 아니다. 고급스런 의자에 속하는 것이래야 부잣집 거실이나 사장님 방에 놓이는 가죽 소파 정도인데, 장식적이거나 비싼 재료를 썼을 뿐 세련된 디자인과는 거리가 멀다.

좌식 생활을 한 문화여서 우리에게는 의자의 전통 같은 것도 없다. 그러다 보니 돈이 있어도 의자를 고르는 안목이 부족해 구조나 기능, 디자인보다 그저 가죽 같은 비싼 재료로 껍데기를 씌운 의자를 선호했다. 1990년대 이후 명품 열풍이 불었지만 의자에만은 소극적이었는데, 이는 의류나 가방, 구두, 시계, 자동차와 달리 집 안에 있는 가구나 의자는 남들에게 자랑할 기회가 적기 때문이다.


△ 바르셀로나 의자 디자이너: 미스 반데어로에, 1929. 모더니즘 건축의 아버지인 미스 반데어로에가 1929년 바르셀로나 박람회의 독일 전시장 인테리어를 위해 디자인한 의자인데, 오늘날에도 꾸준히 사랑받아 많은 사무실의 로비를 장식하고 있다.

 

 

 

패션·자동차처럼 욕망의 대상으로 떠오를 것

 

그러나 고급 인테리어 정보가 꾸준히 보급되면서 거장들의 의자도 점차 한국에 소개됐다. 특히 디자인 감각이 뛰어난 젊은 세대는 집안 인테리어를 일관된 스타일로 꾸미는 데 눈뜨기 시작했는데, 대부분 모던한 스타일로 집안을 장식하므로 이들 의자에 대한 수요가 조금씩 일어나기 시작했다. 부유층도 이제는 원목이나 앤티크 가구에만 열광하지 않고 산뜻하고 세련된 모던 가구에 눈을 돌리고 있다. 또 고급 식당에도 이런 의자들이 많이 보급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덴마크의 거장 디자이너 아르네 야콥센이 디자인한 개미 의자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의자가 됐다. 그러나 아직까지 국내에서 이런 세계적인 모던 의자들을 쉽게 볼 수 있는 곳은 건축설계사무소, 디자인 스튜디오, 사진 스튜디오 등으로 한정돼 있다. 그러나 머지않아 패션이나 시계, 자동차에 열광하듯 의자가 소유하고픈 주요 욕망의 대상이 될 것임은 분명하다.

 


△ 애론 의자 디자이너: 빌 스텀프·돈 채드윅, 1992. 애론 의자는 미술 이념의 수단이나 창작자의 조형 의지를 분출하는 대상이 아닌 진정 사람의 몸을 생각하는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의자의 전형을 제시했다. 사용자의 편리성을 위해 인간공학을 접목한 의자 가운데 최고의

 

 


△ 바실리 의자 디자이너: 마르셀 브로이어, 1925. 의자 역사상 최초로 강철관이라는 소재를 사용했다. 강철관은 부드러우면서도 강해서 네 개의 다리 없이도 이처럼 우아하면서도 튼튼한 의자 조형을 가능케 했다. 이후 강철관은 단순함을 이상으로 여기는 모더니스트의 가장

 

 


△ 짧은 다리 의자, 버드나무 의자, 소파가 있어도 바닥에 앉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한 등받이(왼쪽부터 시계 방향)목수 김씨(김진송)는 어쩌다 생긴 나무들로 의자 만들기를 즐긴다.

 

 


△ 라 셰즈 의자 디자이너: 찰스 & 레이 임스, 1948. 유기적인 형태의 독창적인 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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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경 소설집「속된 인생」…'우물 안' 활동가들에게 들려주는 충고

'우물 안' 활동가들에게 들려주는 충고
김하경 소설집「속된 인생」…"총연맹위원장 되는 게 성공?"
 
 
 

「내 사랑 마창노련」의 저자 김하경 씨가 소설가로 돌아왔다. 소설집 「속된 인생」(삶이 보이는 창)을 들고 다시 작가의 길에 발을 내딛은 그는 이 소설집에서 철거민과 노동운동가, 그리고 서민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구현하면서 이 시대의 운동을 향해 화두를 던진다.

   
 
 ▲ 김하경 씨의 소설집 「속된 인생」
 

운동을 하면 할수록 인간관계나 이해의 폭이 넓어지는 게 아니라 좁아지는 것 같았다. 조급해지고, 각박해져갔다. 심지어는 노동조합이 세상 전부인 것 같고, 세상이 노동조합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착각 속에 빠져 살았다.

그래서 노동조합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것을 모르거나 부정하면 화가 났고 그런 사람들을 원망하고 비난했다. 노동조합 이외의 것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노동조합 하나에만 빠져 산 것이다. 이런 걸 우물 안의 개구리라고 하는 걸까? (「젊은 날의 선택」, 151쪽)

노동운동이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외면 받는 지금의 현실에서 한 노동운동가의 자기 고백이다. 창원의 ‘일산중공업’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소설은 오직 노동조합만을 위해 앞으로 달려온 건이가 해고되고, 주위의 동료들과 반목과 갈등이 심화되는 과정을 드러내고 있다.

‘동지의 정’보다 ‘차이의 벽’을 더욱 선명하게 느끼는 주인공들은 노동조합의 전망을 찾지 못하고 방황한다. 믿었던 동료에게서는 하청업체 사장을 시켜준다는 회사의 유인책에 넘어가 회사 부품을 몰래 빼내는 배신마저 당한다.

운동하지도 않으면서 그렇다고 보통 사람들처럼 평범한 일상에 빠져 살지도 않으니 말이다. 아니 그 둘 사이를 왔다갔다하며 산다고나 할까? (「젊은 날의 선택」,150쪽)

“확실하게 살란 말이다! 운동도, 사랑도 어쩌다 하게 된 식으로 떠밀려서 억지로 하듯 하지 말고, 제발 확실하게 자신이 결단 내리고 자신이 책임지며 살란 말이다!” (「청비리」181쪽)

노동운동가의 내면의 심경을 깊숙이 꿰뚫고 있는 소설 속 인물들의 대화를 접할 때면 마치 자신의 마음을 들킨 듯한 착각마저 들게 만든다. 그가 르뽀집에 이어 소설이라는 장르를 택하게 된 연유도 이와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닐까. 지난 4일 소설가 김하경 씨(62)를 홍대부근에서 만났다.

마산에 거주하며 마산과 창원지역에서「내 사랑 마창노련」(갈무리, 1999)을 텍스트 삼아 노동조합 강연과 교육을 틈틈이 하며 소설쓰기 작업을 하고 있다고 그는 자신의 근황을 소개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 마창노련을 중심으로 한국노동운동의 역사를 생생한 보고문학적 필치로 그려낸 ‘문학적 역사서’인 이 책은 여전히 노동운동가들의 ‘필독서’로 자리잡고 있다. 마창노련이 사무실을 정리한 돈으로 1년의 기간동안 취재하고 기록을 남기고자 시작했던 작업은 5년이 훌쩍 넘어서야 작품의 탄생을 보게 됐다. 이후에 그는 경남도민일보의 논설주간으로 일하며 분주하게 1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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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사실의 서술이 문학작품이 되지는 않는 것처럼, 그에게는 내내 소설로 말하고자하는 욕망이 늘 떠나지 않았다. 리얼리즘으로 노동자와 민중, 운동을 그려내고자 했던 그는 다시 펜을 들기로 마음을 먹었다. 서울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한 그는 1988년 <실천문학> 봄호로 등단하고, 장편소설 「그 해 여름 」(1991), 「눈 뜨는 사람」(1994)을 출간한 바 있다. 이후에 쓴「내 사랑 마창노련」의 취재와 신문사 논설주간의 경험은 그에게 ‘지시적 언어’ 서술의 한계를 절감하게 했다. 내면의 목소리인 문학적 언어의 목소리를 잃었다는 것이다.

“집에 들어앉아 처음부터 다시 문학공부를 하기 시작했어요. 리얼리즘이었죠. 사회주의 리얼리즘부터 마르께스, 보르헤스의 환상적 리얼리즘까지 읽었어요.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스탈린 시대의 문학적 형식이라고 정의내릴 수 있다면, 그 때의 리얼리즘은 폐기되었을지 몰라도, 리얼리즘 자체는 여전히 유효하고, 사라질 수 없는 없는 문학의 형식이죠.”

그가 리얼리즘을 자신의 문학적 글쓰기의 한 축으로 잡고 놓지 않았다면, 내용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지난 수십년동안 경험한 철거민, 노동, 교육운동의 현장과 경험이 그에게 녹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문학적 말 트기를 서서히 익혀갔고,「속된 인생」이 나왔다.

그의 소설의 주된 소재는 운동 속에도 운동의 길을 묻는 이들이다. 그것은 때로는 전망을 찾지 못하는 운동가들의 내적 고민에서 비롯되기도 하고, 지도부의 무능, 부패 그리고 운동가들의 이기심에 비롯되기도 한다.

나는 왜 당에 뛰어들었는가. 과연 원칙과 기본방향에 동의하는 걸까. 단순히 인간적 안면에 이끌려온 건가. 남이 하니까 따라하는 식으로 따라다닌 건가. 그도 저도 아니면 단순히 우쭐하고 싶은 영웅심 때문인가. 그러나 지난 선거 과정에서 벌어진 경쟁과 싸움을 보면서 이게 아니다 생각했다. 선거가 끝난 후에는 더욱 심해서 당은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부침했다. 운일은 당의 오류를 지적하고 동지의 불순한 탐욕을 비판했다. 그리고 당과 동지에 대한 실망과 후회가 쌓이고 쌓이면서 결국 당을 떠났다. (「청비리」, 226쪽)

주인공 운일은 노동조합 지도부의 비리에 실망하고, 당을 선택했지만 당에서도 조직 내부의 분열과 경쟁을 참지 못하고 떠난다. 이제 그에게는 ‘왜 운동을 하는가’라는 원점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주인공은 다시 ‘공장의 노동자’로 돌아가는 것으로 결론을 맺고 있지만, 그의 문제의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것은 개인의 갈등에서 나아가 운동 전체의 전망의 부재와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노동운동 내에서도 우리는 계급을 만들어 경쟁하고 있습니다. 부장 되면 국장되고, 실장 되면 위원장 돼야 하고, 총연맹 위원장까지 가면 성공한 운동가로 평가받는 우리 내의 위계질서 말입니다. 공장으로 돌아가면 퇴보한다고 생각하는 ‘선진 운동가’는 그래서 점점 대중과 섞이지 못하고 고립돼 갑니다. 운동과 삶은 유리되지 않고 자기 삶에서 운동을 해나가는 것인데, 운동의 울타리에 갇히게 되는 것이죠.”

갈등은 때로 운동의 바라보는 근본적인 시각의 차이에서도 온다. 지금 당장에 이뤄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단계적으로 조금씩 이뤄나가야 하는가. 철거민 투쟁에서 보상비를 더 올려 받아 현재 직면한 문제부터 해결하자는 철거촌 주민 수녕과 임대주택을 얻을 때까지 한 사람이라도 남아 싸워야 한다는 운동권 대학생 보배의 대화는 이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이 벽창호야! 그건 당장 될 일이 아니니까. 주민들이 요구하는 건 당장 어떻게 할 거냐야. 내년이나 10년 뒤가 아니라 지금 당장 여기서 나가면 어떻게 살 거냐 이거야.”

“그게 바로 기회주의라는 거야. 현실이니 대중의 요구니 하는 건 다 핑계고 변명이야. 사실은 싸우는 게 무섭고 싫은 거지. 돈 더 많이 받고 싶고 편하고 싶은 거 아냐? 적당히 싸우다 보상비나 타고 나가자 그거지. 핑계는 그럴 듯하지만 그게 다 기만이란 말이야.” (「속된 인생」40쪽)

작가는 두 사람의 주장에 어느 쪽에도 손을 들지 않는다. 임대주택이라는 ‘꿈’과 보상비라는 ‘현실’적 타협 가운데서 두 주인공은 끝내 의견의 일치를 보내 못하고 결별하게 된다. 두 주인공이 “혼자 꿈을 꾸면 몽상에 불과하지만 함께 꿈을 꾸면 현실이 됩니다”라는 대사를 함께 읊조리며 과거를 회상하는 것으로 소설은 끝을 맺는다. 작가는 차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함께 꿈꾸기’를 강조한다.

하지만, 작가가 던지는 ‘운동의 길’에 관한 물음의 답은 작품 속에서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주인공들은 현실처럼 고민하고, 방황하고, 갈등할 뿐이다. 그래서 수녕과 보배는 끝내 만나지 못하고, 조합활동으로 해고된 상기는 자신의 진정한 적성이 무엇인지를 내내 고민한다. 운일은 십여년 가까이 운동을 해왔지만, 자신이 운동의 흉내만 냈다고 생각한다. 작가는 독자에게 이것은 ‘속된 인생’을 살아가는 인간이 풀어야 할 숙제이기에 마주하라고 말하고 있다.

“이 혼탁한 세상에서 맑고 깨끗한 복을 누리는 것은 가당치도 않다. 너는 함부로 그런 것을 달라고 하지 말라.” ( 「속된 인생」, <서유구> 10쪽 인용부분)

 
2006년 06월 06일 (화) 23:03:08 문선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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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선거에서 왜 졌을까? 울산, 지방선거 후(전편)

   

“그들”은 선거에서 왜 졌을까?
울산, 지방선거 후(전편)

 
5·31 지방선거에서 울산의 진보정치 세력은 졌다. 기반이 약했던 남구와 중구 등에서 작지 않은 성과를 거두기도 했지만, 동구와 북구청장의 수성 실패와 반토막 난 시장후보의 득표는 ‘참패’라는 표현이 과하지 않은 결과다. <매일노동뉴스>가 선거가 끝난 후인 5일과 6일 양일간의 울산의 모습을 담았다.<편집자 주>


울산 북구 호계동은 경주 방향과 북구청쪽 방향으로 양분돼 있다. 북구청 방향의 절반은 재래시장이 들어서 있고, 논밭이 적지 않게 자리잡고 있다. 울산 북구 어느곳보다, 노인들이 눈에 많이 보이는 지역이기도 하다.

방앗간, 농기구점, 비료가게, 장독가게 등 시골장터에서만 보이는 가게들이 적지 않게 눈에 들어 왔다.

▲ 울산에는 당선자들의 감사인사를 담은 플래카드가 곳곳에 걸려 있었다. 울산의 진보세력은 동구와 북구에서 실권했다. ⓒ 매일노동뉴스 정기훈 객원사진기자

'그놈들' 혹은 '저놈들'


농협 하나로마트 옆쪽 대폿집에서 낮술을 한잔 하고 나서는 노인들에게 말을 걸었다. 버스를 기다리는 노인들의 손에는 새로 산 농기구 몇개가 들려져 있었다.

“그래도 이상범 구청장이 일은 잘한다고 평가받았던 것으로 아는데요, 이번엔 한나라당 구청장이 당선됐네요.”

“그 사람 계속 법원이나 들락거렸지, 일할 시간이나 있었나. 하자가 있으니까 법원 들락거렸지. 저놈들이 뭐, 법 지키면서 사나.”

“누가 됐는지 몰라. 나이 먹은 사람들이 뭐 아나. 그놈들은 떨어졌다고 하대?”

할아버지들은 몇마디 더 묻기 전에, “됐다, 됐다” 하면서 기자를 물렸다. 노인들은 민주노동당 후보들, 현대차 노조를 기반으로 한 세력을 ‘그놈들’이라고 불렀다.

▲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퇴근길. 이들은 ‘선거’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다. 
ⓒ 매일노동뉴스 정기훈 객원사진기자

“선거는 모릅니다”

현대중공업 퇴근시간 풍경은 언제 봐도 독특하다. 정문쪽에 노동자들이 탄 오토바이가 한 무더기 서 있다가, 신호등에 파란불이 들어오면 한꺼번에 나온다. 이들은 지난 1998년과 2002년, 재보궐선거까지 포함하면 3명의 진보정당 구청장을 만들어 준 힘이었다. 그러나 2002년 현대중공업 ‘민주파’ 노조가 무너진 후, 동구에선 더이상 민주노동당 출신 단체장과 국회의원이 배출되기 어려운 상황이다.

1998년 김창현 동구청장이 당선될 때, 3등인 정천석 당시 국민회의 후보를 8천여표 차이로 이겼다. 2인인 변재규 무소속 후보보다 2천표 정도 앞섰다. 김 구청장이 소위 ‘영남위’ 사건으로 구속된 후 치러진 재보궐선거에서도, 노동자들은 그의 부인인 이영순 후보를 선택했다.

2000년 이갑용 동구청장이 당선될 때에는 2등 정천석 후보를 6천표 이상 차이로 눌렀다. 이번 5·31 지방선거에서 정천석 후보의 선거공보에는 ‘정몽준 의원 지지후보’라고 써 있었다. 현대중공업의 민주노조는 몰락했고, 대주주인 정몽준 후보는 자신의 지지후보를 낙점하고 지원했다. 정천석 후보는 민주노동당 김종훈 후보를 1만2천표 차이로 누르고 당선됐다.

김 후보의 득표율은 24.8%, 3등인 한나라당 박정주 후보(23.3%)를 어렵게 따돌렸다. 1998년, 김창현 후보는 28,436표를 받았지만, 김종훈 후보는 18,622표를 받는데 그쳤다. 민주노동당 표가 1만표 줄어드는 동안 동구 유권자 수는 1만8천명 가량 늘었다. 세번 민주노동당을 선택해 준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은 이번 선거에서 ‘회장님의 후보’를 택했다. 어떤 생각일까.

“서울서 온 기잔데요….” 서울말씨 쓰는 기자가 길이라도 물을 것으로 생각했는지, 잠시 쳐다보다가, ‘선거’ 이야기를 꺼내면 바로 고개를 돌리고, 갈 길을 갔다. “우린 선거 모릅니다.”, “바빠서요.”, “할 말 없습니다.”, “선거하러 안 갔습니다.” 등등.

드물게 냉랭한 반응이었다. 퇴근시간, 현대중공업 정문 맞은편, 현대백화점과 현대호텔 사이에 있는 현대문화공원 쪽으로 해가 지고 있었다. “성원에 감사한다”는 박맹우 한나라당 울산시장 당선자와 정천석 당선자의 당선사례가 그 앞으로 걸려 있었다.

▲ 현대자동차 정문 앞 양정동 골목길에서 어린아이가 혼자 놀고 있다. 한때 양정동에 모여 살았던 현대차 노동자들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 자리에는 더 가난한 노동자들이 다시 정책했다 .양정동 일대는 곧 아파트 단지로 개발될 예정이다. ⓒ 매일노동뉴스 정기훈 객원사진기자

염포 아파트는 ‘상떼빌’로


현대자동차 사택을 기점으로 나뉘는 울산 북구 양정동과 염포동. 길게 늘어선 현대자동차 공장 담벼락을 마주본 동네다. 1997년 대선에서 ‘계급투표’ 전략이 활용된 이후로 이 지역은 민주노동당 표심이 흔들린 적이 없다. 양정동 새마을 아파트와 염포 아파트를 중심으로 뭉쳐진 표심은 민주노동당이 기댈 든든한 언덕이었다.

2002년 양정동에서 이상범 구청장 후보는 3,308표를 얻어 1,339표를 얻은 김수헌 한나라당 후보를 눌렀다. 염포동에서 이상범 후보는 2,273표를 얻어서, 1,320표를 얻은 김수헌 후보를 눌렀다. 2~3배 차이로 누른 것이다.

2006년 5·31 지방선거에서도 민주노동당은 이 두 곳에서 이겼다. 그러나 표 차이는 현격히 줄었다. 양정동에서 민주노동당은 2,093표를 얻었고, 한나라당은 1,107표를 얻었다. 염포동에서 민주노동당은 2,985표를 얻었고, 한나라당은 2,187표를 얻었다.

양정동의 유권자는 2002년 7,526명이었지만 2006년에는 6,143명으로 줄었다. 염포동의 유권자는 2002년 6,663명이었지만, 2006년에는 10,247명으로 늘었다. 늘고 준 이유는 가보면 바로 알 수 있다.

과거 현대차 노동자들이 주로 살았던 염포 아파트는 ‘성원 상떼빌’ 아파트로 재건축 됐다. 구 거주지 사이로, 하얀 새 아파트가 들어섰다. 아파트 단지는 옆으로 펴져가고 있는 중이다. 인구는 늘었다.

▲ 양정동, ‘문화류씨’ 재실과 아파트 공사현장. 한때, 민주노동당 득표의 허파 구실을 했던 이곳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 매일노동뉴스 정기훈 객원사진기자

'갑'이 떠난 그 집을 '을'이 채운다


양정동 초입에는 한창 아파트가 올라가고 있다. 양정동 부근이 전부 재개발 될 예정이다. 아직 다 짓지 못했고, 당연히 입주자도 없다. 인구는 줄었다.

아직 남아 있는 구시가지에는 현대차 정규직 노동자들이 거의 살고 있지 않다. 작은 방에서 젊은 시절 갓난 아이를 키우며 지냈던 노동자들은, 중소형 아파트로 이사갔다. 현대자동차 공장에서 차로 15분 거리에 매곡 현대아파트에는 한때 입주자의 70%가 현대차 노동자였다고 한다. 2006년 현재 매곡 현대아파트에 살던 현대차 노동자들의 절반 가량은 다시 떠났다.

그들은 남구와 중구쪽 중형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커가는 아이들의 ‘교육 문제’가 그 이유였다(교육 문제가 뭘 의미하는지는 다음 회에 다룬다). 새로 생기고 있는 아파트에는 ‘외지’ 사람들도 많이 들어오고 있다. 이전처럼 결집된 표심을 발휘할 수 없는 지역으로 바뀌고 있다.

현대차 노동자들이 떠난 양정동과 염포동에는 더 가난한 노동자들이 살고 있다. 유권자 79만명 중 40만명이 노동자인 도시 울산. 이 도시에서 더 벌고, 더 못 벌고를 가르는 기준은 복잡하지 않다.

완성차(또는 현대중공업) 정규직 노동자-1차 사내하청 노동자-1차 협력업체 정규직 노동자-2차 협력업체 노동자-3차 협력업체 노동자…. 사용자들의 계약관계에서 원청이냐 하청이냐에 따라, ‘갑’이냐 ‘을’이냐에 따라, 별수 없이 노동자들의 임금도 결정된다. 그에 따라 그들의 주거지도 결정된다.

▲ 울산 북구 중산동 풍경. 음식물 자원화 시설 옆으로 아파트 단지가 보인다. 앞으로 동천이 흐르고 있다. ⓒ 매일노동뉴스 정기훈 객원사진기자

계급투표와 ‘우리가 남이가’의 차이는?


이번 5·31 지방선거엔선 고질적이던 울산 진보진영의 정파 갈등이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각 정파와 현장조직들은 ‘포지티브’한 방식으로 이를 해결했다.
서른명이 넘는 단체장, 기초·광역의원 후보, 그 중에는 좌파도 있고, 자민통도 있었다. 현대차 안의 현장조직 중 선거에 관심을 가진 현장조직들은 모두 자신의 후보를 냈다. 각 내부 권력들은 자기 조직 출신의 후보를 지원하고 지지했다. 그를 중심으로 선거를 치렀으니, 비토는 있을 수 없다. 각개약진했고, 그 결과는 성공도 있었고 실패도 있었다.

그러나 “선거본부의 집중력은 ‘개판’이 됐다”는 게 선거에 참여했던 한 관계자의 말이다. 울산 북구의 진보진영은 무슨 슬로건을 내걸었을까. 한나라당의 독주를 막아달라고 유권자에게 호소했다. 조직 노동자들에게 ‘자기 후보’를 지지해 달라고 부탁했다.

“지난해 10·26 재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은 현장에서 해선 안 될 방식으로 선거운동을 했다.” 당시 정갑득 후보 선본에서 노동팀장을 했던 하부영 민주노총 울산본부장의 말이다.

당시를 기억해 보면 대략 이런 식이었다. 대세가 ‘저쪽’으로 기울었다는 징후가 굳어질 때 즈음인 10월20일.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상실해, 선거운동을 할 수 없었던 조승수 전 의원은 현대차 공장 앞에서 석고대죄를 했다. ‘용서’를 구했다. 선거 이틀 전인 24일 선본은 이소선 여사(전태일 열사의 어머니)를 모셔서 공장 안으로 들어갔다. 여사께선 눈물을 찍어내며 “노동자가 하나 돼야 한다”고 호소했다.

이번 5·31 선거에서도 그랬다. 선거를 일주일도 안 남긴 상태에서 이상범 북구청장과 이갑용 동구청장이 퇴임하고, 선거운동에 전격 투입됐다. 이미 두 구청장은 공무원노조 파업자를 재대로 징계하지 않은 ‘직무유기’를 범한 죄로 직무가 정지된 상태였다.

두 사람은 각각 현대차와 현대중공업 노조의 위원장 출신이다. 그들이 주로 유세한 곳은 현장이었다. “노동자는 노동자 찍어야 한다”고 호소하면 다 계급투표일까. 차라리 “우리가 남이가” “영도다리 빠져죽자”고 호소했던 그것과 닮아 있는 것은 아닐까.

하부영 본부장과 정창윤 전 울산시당 위원장은 닮아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현장의 표를 쥐어짠 것”이며 “표를 구걸한 것”이라고 말했다. ‘현장은 마지막 보루’라는 말은 자랑스런 노동자의 자부심을 표현한 것일까.

▲ 일터와 쉼터, 그 사이에 우뚝 들어선 대형마트. 퇴근길 집으로 돌아가는 노동자의 양손이 무거워 질만도 하다. 울산에 진보정치가 넘어서지 못한 건 눈앞에 이 풍경이었다 .어쩌면 진보정치는 이 풍경을 넘어서기 위해 시작한 것인지도 모른다. ⓒ 매일노동뉴스 정기훈 객원사진기자

“건물 하나가 여럿 잡았다”


많은 사람들이 꼭 수성했어야 할, 수성할 만한 북구의 패배를 중산동 음식물자원화 시설의 탓으로 돌린다. 5·31 지방선거 개표날 밤, 울산을 잘 아는 민주노동당의 한 보좌관은 “건물 하나가 여러 사람 잡는다”며 장탄식을 하기도 했다.

표수만 살펴보면 그렇다. 음식물자원화 시설로 표심이 급격히 이반했던 농소1, 2동은 2002년의 경우 민주노동당이 크게 밀리지 않는 지역이었다. 2002년 당시 이상범 구청장 후보는 이 지역에서 6,963표를 얻었고, 김수현 한나라당 후보는 7,358표를 얻었다. 농지가 넓게 분포한 지역에서, 몇몇 아파트 단지의 표심을 기반으로 박빙의 싸움을 하던 지역이었다.

2006년의 경우 김진영 민주노동당 북구청장 후보는 이 두 지역에서 5,233표를 얻었고, 강석구 한나라당 북구청장 당선자는 8,626표를 얻었다. 395표를 지다가 3,393표를 진 것이다. 이번 선거에서 김진영 후보는 3,898표 차이로 졌다.

행정 미숙과 시설에서 나는 냄새 때문에 표심이 돌아선 것일까. 믿었던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신감 때문이었나. 급격한 주거환경의 하락으로 표심이 돌아선 것일까. 자원화 시설에 가보면,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이 부분 역시 다음회에 자세히 다룬다).

민심의 '심판', 무엇을 심판했을까

‘심판’. 동구와 북구는 8년간 민주노동당이 여당이었다. 그러나 이번 지방선거에서 완패했다. 표 차이도 컸다. 한나라당의 바람과 ‘자상 정국’을 감안해야 했을까. 계급정치가 시작되면 지역정치는 멸종할 것이라고 주장해 온 것은 민주노동당 자신이었다. 최소한 북구와 동구에선 자신의 말을 증명할 ‘의무’도 있었다.

안으론 내부정치에 집중했으며, 밖으로는 새로운 대안세력으로 자리잡지 못했던 것. 대기업노조가 공장 안 동료이나 사용자만 다른 노동자의 삶을 돌보지 않았던 것. 담장 바깥이지만 같은 노동자인 협력업체 노동자들을 위해 함께 싸우지 않았던 것. 회자되는 모순과 난맥은 많다. ‘귀족’이라 ‘욕’을 먹는 자들의 만든 정당이 유권자에게 심판당했다는 ‘심판론’을 전면 부인하는 울산의 진보정치인은 없다.

6월5일 울산에 도착했던 기자는 6월6일 현충일 휴일의 울산 풍경을 보며, 심판당한 그들 역시 연민해야 할 대상이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울산 진보진영의 잘못은, 1998년 이후 10년간 광풍처럼 몰아닥친 그것과의 싸움에서 진 것이라는 것을 휴일을 즐기는 울산의 노동자를 보면서 알았다.

한나라당 선거참모 눈에 비친 민주노동당
“정파 갈등만 심각하고 대중 위한 연구는 없더라” 
“선거를 준비하면서, (민주노동당 부설) '진보정치연구소' 같은 데서 나온 자료들을 다 검토했다. 정파연합 세력의 한계가 여실히 보이더라. 울산시당과 공직자 간의 연계도 잘 안 되는 것 같고, 체계도 문제가 많아 보였다. 많이 좀 바꾸지 않으면 안 될 상태더라.”


이 말은 한나라당 강석구 울산 북구청장 당선자의 한 선거참모가 한 말이다. 5일, 강석구 당선자의 사무실에서 만난 이 선거참모는 “민주노동당은 내부 분열을 해결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활동가와 조합원의 괴리, 정파 갈등, 공직자와 당부의 괴리 등 민주노동당 내부의 문제를 이번 선거전에서 적극 활용했다고 말했다.


“민주노총이나 민주노동당이 처음 출범할 때 의도가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런데 정파 연합으로 시작하면서 발생한 갈등이 심각한 것 같더라. 울산시당의 경우도, 몇몇이 시당을 장악했고, 순수한 노동자들은 그 사정을 잘 모르거나, 알아도 침묵해야 하는 상황인 것으로 보인다.”


이어진 말이다. “울산의 대기업 노동자 세력이 선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문제 삼을 수 없다. 그런데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하는데, 어폐가 있는 것 아니냐. 민주노동당 선본에 비정규직을 대표하는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했다. 비정규직 분과위원회 하나 없더라. 다 고임금 노동자들이다. 임금만도, 3~4배 격차가 나게 더 버는 사람들이 ‘대신해 해결하겠다’고 주장하는 게 맞는 것이냐? 그래서 우리는 마지막 TV토론에서 민주노동당쪽을 ‘로얄패밀리’라고 표현했다.”


이상범 전임 구청장의 구정에 대한 평가는 이랬다. “인정한다. 잘하셨다. 특히 시민 참여와 투명성 확보의 계기를 만드신 부분은 우리도 충분히 평가한다. 다만 (교부금 확보를 통한) 예산 확보에 어려움이 있었던 것 같고, 지나치게 개발을 억제한 것도 문제라고 본다. 이 전 청장의 성과는 계속 이어가되, 실책이 있는 부분은 바꿔가겠다. 종합적인 계획이 있다.”


기자는 ‘만약 민주노동당 내부가 단결이 잘 된다면 (한나라당이) 질수도 있는 선거였다고 평가하는지를 물었다. 그러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내가 민주노동당에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은 세력을 확장하고 나서, 대중적 지지를 받기 위해 노력하고 연구한 흔적이 없다는 점이다. 왜 안 하는지 모르겠다. 자기들끼리 선명성 경쟁하고, 내부 정파싸움만 한 것 같다.”
 
정용상 기자  ysjung@labortoday.co.kr
2006-06-08 오후 3:32:00  입력    ⓒ매일노동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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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정/시각-5.31이후]당내 정파 미래비전 중심 재편돼야…대선 인물중심 접근하면 뼈아픈 패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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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정당 정체성 분명히 해야, 대선 후보 조기 가시화 위험하다
[시각-5.31이후]당내 정파 미래비전 중심 재편돼야…대선 인물중심 접근하면 뼈아픈 패배
 
2006년 06월 08일 (목) 13:17:46 정제혁 기자
 

<레디앙>은 5.31 선거 이후 [시각-5.31평가]라는 제목으로 몇 차례 글을 실은 바 있습니다. 후속 기획으로 [시각-5.31이후] 시리즈를 마련해 5.31 선거 이후 유일한 좌파 진보정당을 자임하는 민주노동당이 가야 할 방향, 해야 할 일 등에 대해 진보정당 안팎 인사들의 인터뷰와 기고 등을 실을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주>

열린우리당 참패, 한나라당 압승으로 끝난 이번 지방선거는 정치사적 의미도 큰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이번 선거를 이른바 민주파의 역사적 패배로 보기도 한다. 민주노동당은 이 거대한 정치적 지각변동의 한 가운데서 그러나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아직 갈 갈이 멀다는 사실을 깨달은 셈인데, 민주노동당은 이번 지방선거의 성과와 한계를 딛고 내년 대선으로 나아가야 한다.

심상정 민주노동당 의원은 <레디앙>과의 인터뷰에서 이번 선거를 "도덕적 주관주의로 무장한 신자유주의 세력에 대한 심판"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여당의 패배를 "민주화운동 세력의 도덕적 주관주의의 궤멸"이라고 평하고 "그들의 존재는 이미 역사적 시효를 다했다"고 했다.

국민정당론 vs 계급정당론 논쟁 진로 설정에 도움

심 의원은 여당의 직접적인 선거 패인을 '종합부동산세'에서 찾았다. 그는 "열린우리당은 보수화되어 있는 집단"이라며 "그 정체성에 비춰보면 종부세는 많이 나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주거안정 실현으로 연결되지 못하면서 그 누구도 지지하지 않는 대책이 되어 버렸다"고 지적하고 "종부세는 이미 실패한 정책"이라고 지적했다.

심 의원은 민주노동당의 이번 선거 결과에 대해 "많은 당원들이 패배했다고 보고 있다"며 "그러나 민주노동당은 실력대로 받은 것"이라고 했다. 그는 "중요한 건 득표율 자체보다는 전략적 지지층으로부터의 득표율이 얼마나 신장됐느냐"라며 "거대정당의 정쟁이나 정치공학의 틈바구니에서 얻는 표보다는 우리의 전략적 지지층으로부터 얻는 표가 중요하다"고 했다.

심 의원은 '진보개혁세력 대표주자 교체론'에 대해 "국민정당론식 사고가 반영된 대표적인 슬로건"이라고 규정하고 "민주노동당은 좌파정당으로서 과연 누구를 대변해야 하는지 구체적이고 분명한 전략이 충분치 않다"고 지적했다. 그는 "국민정당론과 계급정당론의 논쟁이 우리 당의 진로를 밝히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여당과 상대적 차별성 노리는 건 공학적 접근, 독자적 전략이 중요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의 차별성 부족을 지적하는 견해에 대해 심 의원은 "열린우리당과의 차별성을 노리는 정치공학적 접근 자체가 문제"라고 지적하고 "중요한 건 기존 정당과의 상대적인 차별성이 아니라 진보정당, 서민정당으로서의 독자적 전략과 마스터플랜"이라고 했다.

심 의원은 인터뷰 내내 민주노동당의 정체성과 비전, 주요 전략 계층, 그에 맞는 활동방식을 수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당의 이탈표를 끌어오지 못했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여당에서 한나라당으로 이탈한 표는 중산층 이상의 유권자로 당초 민주노동당이 흡수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고 지적하고 "이번에 투표에 참여하지 않은 49%, 정치에 절망한 이들" 가운데서 전략적 지지층을 얼마나 확보하느냐가 관건이라고 했다.

오는 대선과 관련, 민주노동당도 대권 후보를 가시화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심 의원은 "대선공간에 대한 전망과 목표가 없는 상태에서 후보만 조기 가시화할 경우 거대 정당의 틈바구니에서 조기 고착화될 가능성이 크다"며 "후보 조기 가시화 이전에 대선 공간을 어떻게 활용하고 대선을 통해 무엇을 남길 건지에 대한 전당적 토론이 필요하다"고 반대 입장을 보였다.

열린우리당 이탈표보다 절망에 빠진 불참자들 가운데 지지 획득이 중요

그는 오는 대선의 당 내부적 의미를 "민주노동당이 대안정당으로서 평가 받는 스타트라인"이라고 규정하고 "서민들을 어떻게 설득할 거냐는 자기 청사진이 구체적으로 있어야 함은 물론 진보적 가치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과 이를 서민들과 나누기 위한 실천적 방법론이 모색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보수정당처럼 인물 중심으로 대선을 치르게 되면 되돌리기 어려운 패배를 맞이할 것"이라며 "단순한 지지율의 패배가 아니라 대안세력으로서 성장할 수 있는 조직적 성과를 실종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심 의원은 일각에서 거론되는 국민참여 경선제에 대해 "국민경선제의 경우 민주노동당의 전략층인 다수 서민은 배제되고 있다"고 지적하고 "국민정당을 내세우는 정당에는 부합하는 전략일 수 있지만 민주노동당같은 서민정당은 경계해야 할 전략"이라고 부정적인 입장을 분명히 했다.

심 의원은 자신의 대선 후보 출마 가능성에 대해 "대선을 위한 당의 발전전략 속에서 함께 고민되고 검토돼야 할 문제"라고 가능성을 열어놨다.

"여당 패인은 종부세"

- 먼저 여당의 참패와 관련해 질문드린다. 이번 선거에서 여당이 참패한 원인은 뭐라고 보나. 

= 직접적인 영향은 열린우리당 내에서 진단하고 있는 것처럼 종합부동산세라고 본다. 열린우리당은 보수화되어 있는 집단이다. 그 정체성에 비춰보면 종부세는 많이 나간 것이다. 내가 수도권을 다녀보면 아파트 한 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느끼는 부담이 엄청나더라.

종부세 대상이 되는 집단의 이탈과 반발, 이게 여당 지지자가 한나라당으로 옮아 간 가장 큰 이유다. 특히 부담도 부담이지만 종부세를 통해 서민경제가 나아지거나 조세형평성이 실현되거나 하는 대의적 측면에서도 승복할 수 없는데 나만 당하기는 억울하다, 이런 인식도 깔려 있다.

- 여당은 부동산세의 완화를 검토하고 있다.

= 그러다 집 한채도 갖고 있지 못한 나머지 50%, 종부세 대상이 되지 않는 절대다수의 국민들로부터 치명타를 맞을 수 있다.

정부여당은 지금 운신의 폭이 전혀 없다. 왜 그런가. 지금 정부가 내놓은 부동산 정책이란 것이 주택공개념이 전제되지 않은 단순한 투기대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투기 잡는 목적이 주거안정 실현으로 연결됐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보니 누구도 지지하지 않는 대책이 되어 버렸다. 현 정부는 종부세를 생명처럼 얘기하지만 이미 실패한 정책이다.

"투기대책, 주거안정 실현으로 연결돼야 성공"

- 열린우리당이 밀어붙일 수 있는 개혁의 최대치는 어디까지라고 보나. 그리고 그것이 우리사회의 발전 과정에서 의미있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나.

= 열린우리당의 정체성은 신자유주의다. 신자유주의를 기본으로 시장에서 탈락한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하자는 게 현 정부와 여당의 정책이다. 여당 내에는 신자유주의를 돌파할 철학이나 신념, 의지가 없다. 여당 의원들 면면을 보면 오히려 청와대 정도의 시장보완책 조차도 수용하지 못할 만큼 보수화되어 있다.

이번 지방선거는 386 민주화운동 세력의 도덕적 주관주의로 무장한 신자유주의 세력에 대한 심판이었다. 여당 내부에서 왼쪽이라고 하는 분들,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 여당 내 우파는 신자유주의로 단단히 무장해있고, 여당 내 좌파로 불리는 사람들은 경제사회 영역에 대해서는 아무런 자기철학이 없다. 오로지 도덕적 주관주의만 있는 것이 여당의 이른바 좌파다.

열린우리당에서 신자유주의의 한계를 부분적으로나마 돌파할 수 있는 동력은 없다.

"신자유주의 극복 철학없는 민주화세력 역사적 시효 끝났다"

- 부동산 정책과 세금 문제를 두고 여권 내에서 다른 목소리가 나온다. 이것이 정계개편의 내용적 근거로 작용할 가능성은 없을까.

= 정책을 중심으로 한 정계개편은 힘들다. 여당 의원들은 선거에서 유리한 지형을 만들기 위한 정략적 정계개편을 하려고 할 것이다. 대통령은 자기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정치적 기반을 이미 상실했다. 여당조차도 전일적 협조관계에서 상대적 긴장관계로 돌아선 것 아닌가.

   
    ▲사진=심상정 의원실
때문에 개혁적 방향의 의제가 실현되기 어려운 것은 물론이고 그나마 마지막 잔영이라도 갖고 있는 개혁적 조치들을 말끔히 씻어내는 방향으로 후퇴할 가능성이 크다. 재벌개혁 후퇴나 한미FTA처럼 신자유주의 정책에 충실히 부합하는 방향의, 열린우리당 뿐만 아니라 한나라당도 동의하는 그런 정책을 펼칠 것이다.

정책을 중심으로 놓고 볼 때 노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의 위상은 완전히 소멸됐다. 그 소멸의 방향은 자유주의로 출발해서 결국 신자유주의로 전일화되는 패턴을 통해 분해되어 나가는 것이다. 이걸 민주화운동 세력의 도덕적 주관주의의 궤멸이라고 봐도 좋다. 반독재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성과는 과거사가 됐다. 신자유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철학과 비전이 그들에겐 없다. 그들의 존재는 이미 역사적 시효를 다했다.

- 여당 내에서는 범민주세력대연합론이 나온다.

= 퇴행적이다. 아직도 과거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몽상에 불과하다.

민주세력 대연합론, 과거를 사는 사람들의 몽상

- 실현가능성은.

= 없다. 이번 지방선거가 실현가능성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번 지방선거는 서민경제 파탄과 민생실종에 대한 심판이라는 게 공통적인 평가다. 이는 독재대 민주니 하는 화두가 더 이상 잔영도 남지 않았다는 걸 의미한다.

- 여당내의 이른바 민주파는 '평화통일세력 대 수구냉전세력'의 구도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다. 이런 구도의 유효성은 있다고 보나. 또 실현가능성은.

= 그들의 마지막 남은 지푸라기가 결국 평화통일세력론이다. 그러나 미국과의 관계를 중심에 놓고 형성되는 평화통일의 비전은 불가능하다. 정부와 여당은 미국을 상수로 놓고 있다. 때문에 이들이 말하는 평화통일세력론이란 정계개편을 위한 정치적 수사 이상의 의미를 갖기 어렵다.

또 수구냉전세력이라고 하지만 한나라당도 집권전략으로서 호남문제, 북한문제, 민생문제 같은 것들에서 기존과는 다른 포즈를 취할 가능성이 크다. 보수 정치권 내에서 평화세력과 수구냉전 세력을 구분하는 것은 선거전략의 일환으로 선택할 수 있는 전술적인 의미 이상이 아니다.

신자유주의가 과거의 정치군사적 측면과 경제사회적 국면이 통합 단계로 나가고 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신자유주의 극복을 목표로 하는 진보세력만이 진정한 의미의 평화통일 세력이 될 수 있다.

노대통령 한미 FTA강행 배경, 남북관련 미국이 뭔가 보장있나 추측

- 예를 들어, 김대중 전 대통령과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화해하면 '평화통일 대 수구냉전' 구도는 일거에 무너질 가능성이 크다.

= 박근혜 대표의 대선 전략의 핵심이 호남과의 화해고 그 정치적 상징인 DJ와의 화해다. 그러나 그 실현가능성 여부와는 상관없이 한나라당이 수구냉전 이미지를 벗어나는 것을 기본전략으로 갖고 있는 한 과거 냉전시절의 '평화통일/수구냉전' 구도는 형성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양측 공히 미국을 상수로 놓고 있는데, 이런 기본 전제를 공유하고 있는 세력을 구분하는 건 무의미하다.

- 대통령이 한미FTA에 그렇게 집착하는 이유는 도무지 합리적이지 않다. 우리가 모르는 다른 노림수가 있을까.

= 그게 불가사의하다. 무망한 얘기지만, 한미FTA를 통해 경제 발전의 토대를 세운다고 해도 노대통령 임기 중에 효과를 내긴 힘들다. 그럼 미래를 위해서 용단을 내린 거다? 난 대통령이 그렇게 순진한 사람이 아니라고 본다. 아마 둘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현 정부 내의 개방론자들에게 휘둘리고 있거나, 임기 내에 얻을 수 있는 다른 가능성에 대한 정보가 있거나. 남북경제공동체를 지향할 수 있는 조건을 미국이 보장하는 것과 관련있지 않겠나 막연히 추측하고 있다.

- 민주노동당에 대한 선거 평가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다. 민주노동당은 이번 지방선거에서 패배했나.

= 선거를 평가할 때마다 느끼는 건데 두렵고 부담스럽다. 선거 평가 방식부터 진보정당으로서의 자기 틀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보니 표심과 여론에 대한 상대적인 평가를 하게 된다. 이번에도 그렇다. 민주노동당은 이번 선거에서 12% 득표했다. 이게 낮은 것인가. 많은 당원들은 패배했다고 보고 있다.

나는 생각이 다르다. 중요한 건 득표율 자체보다 전략적 지지층으로부터의 득표율이 얼마나 신장됐느냐다. 그걸 평가해야 한다. 거대정당의 정쟁이나 정치공학의 틈바구니에서 얻는 표보다는 우리의 전략적 지지층으로부터 얻는 표가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이번에 민주노동당은 실력대로 받은 것이라고 본다.

열린우리당 이탈표 민주노동당이 흡수하기 어렵다

열린우리당의 이탈표를 민주노동당이 흡수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 얘기를 하기 전에 열린우리당 이탈표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분석해봐야 한다. 이번 선거에서 열린우리당 지지표의 31%는 한나라당으로 갔다. 대부분 종합부동산세 때문이다. 열린우리당 지지자 가운데 집 한채라도 있는, 중산층 이상 계층이 움직였다는 얘기다. 그 표를 민주노동당이 흡수할 수는 없는 거다.

민주노동당으로서는 실력만큼 받은 것이고, 바로 이 지점에서 앞으로 민주노동당이 나가야 할 방향을 고민해야 한다.

- 열린우리당과 차별성을 드러내지 못했다는 평가를 많이 한다.

= 열린우리당과의 차별성을 노리는 정치공학적 접근 자체가 문제다. 차별성을 위한 차별성은 원칙적으로도 맞지 않고 효과적이지도 않다. 민주노동당이 진보정당으로서의 가치를 확고히 세우고 그를 실현하기 위한 독자적인 정치전략, 조직전략을 쌓아올리면 열린우리당과의 차별성은 저절로 생긴다.

중요한 건 기존 정당과의 상대적인 차별성이 아니라 진보정당, 서민정당으로서의 독자적 전략과 마스터플랜이다. 이런 것들이 중심을 이루는 가운데 정세적인 요인을 결합해서 선거 평가가 이뤄져야 하는데 그 방향으로 가고 있지 않다.

- 민주노동당은 선거 중반 이후 '진보개혁세력 대표주자교체론'을 내걸었다.

= 좀 진부한 얘길지 모르겠지만 나는 국민정당론과 계급정당론의 논쟁이 우리 당의 진로를 밝히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본다. 민주노동당은 좌파정당, 서민정당, 진보정당이다. 그러나 좌파정당으로서 과연 누구를 대변해야 하는지 구체적이고 분명한 자기 전략이 있는가. 난 충분치 않다고 본다. 좌파정당으로서의 조직전략이 구체화되어 있지 않은 상태다.

'진보개혁세력 대표주자 교체론'은 국민정당론 반영된 대표적 슬로건

그러다보니 말은 진보정당이라고 하면서 실천은 포괄적 국민정당과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진보개혁세력대표주자론이 국민정당론식 사고가 반영된 대표적인 슬로건이다. 민주노동당은 자신이 지향해야 하는 전략적 주체를 대상으로 한 일상적인 조직활동, 그리고 이것을 뒷받침하는 정치활동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다. 이게 가장 큰 문제다.

- 계급정당론을 주장하는가.

=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계급정당론을 주장하는 건 아니다. 민주노동당이 서민정당을 표방한다면 그 서민이 과연 누구고, 무엇을 요구하는지, 그리고 그에 맞는 정책은 무엇인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얘기다.

서민정당이 추구하는 표적집단과 그에 대한 실천방법이 단단하게 깔려 있는 토대 위에서 외연을 어떻게 확대할거냐 하는 문제가 검토돼야 하는데, 지금은 기초가 닦여있지 않은 상태에서 포괄적인 외연 확대 중심으로 가고 있다. 그러다보니 기성정당, 보수정당 내의 개혁 범위 이상을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

- 민주노동당의 선거운동 방식을 평가해달라. 민주노동당다움을 잃었다는 평가도 있다.

= 보수정치에 절망한 서민들에 접근하는 구체적인 정치의 모범을 보였어야 했다. 선거전략도 그런 방향으로 수립됐어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TV 광고만 봐도 비정규직이든, 재래시장이든, 영세상인이든, 이들 전략적 계층에게 민주노동당의 정책과 활동의 성과물을 가지고 접근했어야 했는데 포괄적 국민을 대상으로 한 광고를 만들어서 내보냈다.

TV 광고 전략적 계층 없이 포괄적 국민 대상 곤란

- 300만표 득표, 300명 공직자 배출이라는 목표가 과도한 것은 아니었나. 또 그런 목표치를 잡았던 현실 인식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나.

= 선거라는 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조직활동, 정치활동의 성과물을 시장에 내다 파는 것이다. 일상적인 정치활동을 검증받는다는 관점에서 선거에 임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선거 그 자체에 대한 평가보다는 선거에서 검증받을 일상적인 정치활동이 어땠느냐를 평가해야 한다. 선거의 목표가 일상적인 정치활동에 근거해서 설정된다면 선거 평가를 통해 일상적인 정치활동에 대한 방향점검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당에서 설정한 300만표 득표, 300명 공직자 배출은 다분히 정치공학적 셈법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당내에 패배감만 팽배할 뿐 앞으로 어떤 노력을 해야하는지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정치적 교훈을 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 일상적인 정치활동이 이뤄지는 공간은 지역이다. 민주노동당의 지역활동이 취약하다는 비판이 많다.

= 지역의 정치활동을 지원하는 패턴으로 당이 전환해야 한다. 이를테면, 중앙에서 자영업자나 장애인을 위한 법안을 만들 때 이런 것들이 지역의 조직전략에 밀도있게 결합되고 활용되고 또 거기서 검증되고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거다.

- 이번 지방선거 투표율은 51%였다. 나머지 49%는 투표를 하지 않았다. 득표율을 높이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51%의 투표자 가운데서 지금 보다 많이 득표하는 것, 투표하지 않은 49% 가운데서 새롭게 득표하는 것. 민주노동당은 둘 중 어느 것에 주목해야 한다고 보나.

투표하지 않은 49%에 주목해야 한다

= 이번 선거에서 전체 51% 투표율 가운데 한나라당 지지표가 53%였다. 백분위로 환산하면 한나라당이 전체 유권자의 25%를 차지한 셈이 된다. 수십 년 동안 오로지 수구정치의 학습 효과밖에 없는 우리 현실에서 한나라당이 25% 득표한 것은 불가사의하고 과도한 일이 아니다.

투표하지 않은 나머지 49%는 다르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정치에 절망한 사람들이다. 시쳇말로 '정치가 밥 먹여주느냐'는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 가운데서 얼마나 전략적 지지층을 확보하느냐가 관건이다.

- 결과적으로는 전체적인 투표율을 높여야 한다는 얘긴데, 그게 가능한가.

= 서민주체들을 중심에 놓고 선거 전략을 운용하고 일상적인 정치조직활동의 집중적으로 강화하면 투표율을 높이는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이제 대선에 관한 질문이다. 민주노동당도 대권 후보를 가시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 민주노동당 당원으로서 불만이 하나 있다. 우리 당이 정치공학적 변수에 대해서는 기정 정치권 못지 않게 민감하고 빠르다는 거다. 대선후보 조기 가시화는 총선 이전부터 나온 얘기다. 물론 득표 전략 면에서 대권후보가 있으면 유리한 점이 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게 있다. 대권후보가 가시화돼서 무슨 얘기를 할 거냐다. 서민경제 발전에 대한 자기확신이 있느냐는 거다. 후보가시화 문제는 대선전략의 한 부분이다. 진보정당으로서 대선공간을 어떻게 활용할 건지 전략적 판단이 전제되어야 한다.

대선공간에 대한 전망과 목표가 없는 상태에서 후보만 조기 가시화할 경우 거대정당의 대선 후보들 틈바구니에서 조기 고착화될 가능성이 크다. 이번 서울시장 선거에서 김종철 후보가 그랬다. 후보 조기 가시화 이전에 대선 공간을 어떻게 활용하고 대선을 통해 무엇을 남길 건지에 대한 전당적 토론이 필요하다.

대선공간 활용 전략적 판단이 먼저, 후보 조기 가시화 서두를 필요없다

- 민주노동당에게 이번 대선의 의미는.

= 오는 대선이 대안정당의 비전을 가시화하는 전환점이 될 것이다. 창당 이후 2004년까지가 창당기의 연장선에 있다면, 2007년 대선은 대안정당으로서 평가를 받는 스타트라인이다. 때문에 민주노동당이 진보정당으로서 서민들을 어떻게 설득할거냐는 자기 청사진이 구체적으로 있어야 하는 거다. 진보적 가치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과 이를 서민들과 나누기 위한 실천적 방법론이 모색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걸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후보를 선정하면 되는 것이다.

당 내부적으로는 창당 전사에 뿌리를 두고 있는 각 정파나 분파가 미래 비전을 중심으로 한 실천적 흐름으로 재편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만일 보수정당처럼 인물 중심으로 대선을 치르게 되면 민주노동당으로서는 되돌리기 어려운 패배를 맞이할 것이다. 단순한 지지율의 패배가 아니라 대안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는 조직적 성과를 실종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후보의 조기 가시화가 위험하다고 보는 것이다.

오는 대선의 전 과정은 진보정당의 내용을 중심으로 당 안팎의 인프라를 광범위하게 조직하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노동운동 등 전통적인 기반세력과의 관계재정립을 포함해 당 안팎의 세력을 광범위하게 재조직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 일각에서는 국민참여 경선제의 도입 필요성을 말하기도 한다.

= 지금 우리 당은 창당기를 넘어서 성장기로 접어들고 있다.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일종의 성장통이라고 본다. 집권기에나 검토할 수 있는 전략, 말하자면 튼실하게 성장한 토대 위에서나 검토할 수 있는 전략이다. 이런 것들이 많은 당원들을 불안하게 한다.

국민경선제는 국민정당에서, 민주노동당엔 안 맞는다

국민경선제는 지금 민주노동당에서 거론될 성격의 것이 아니다. 국민경선의 참여 대상은 결국 여론주도층이다. 민주노동당이 주목하는 다수 서민은 배제되고 있다. 그것은 국민정당을 내세우는 정당에는 부합하는 전략일 수 있지만 민주노동당 같은 서민정당은 경계해야 할 전략이다. 이런 이유에서 국민정당론과 계급정당론의 논점을 되새겨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던 것이다.

- 일각에서는 열린우리당 내 개혁파와 민주노동당이 손 잡을 가능성도 점치는 모양이다.

= 민주노동당은 자기 길을 간다. 그 과정에서 여당 사람들이 제 발로 걸어와서 들어오는 거야 말리지 않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본다. 열린우리당 내 이른바 좌파라는 사람들은 사회경제 노선을 포함한 좌파와는 너무 거리가 멀다.

- 심 의원께서도 대선 후보로 거론된다.

= 그런가. 대선을 위한 당의 발전전략 속에서 함께 고민되고 검토되어야 할 문제다.

- 끝으로, 이번 지방선거를 앞두고 북한 조평통에서 당선가능성 있는 진보 후보에게 표를 몰아줘야 한다는 성명을 냈다.

= 내용 여부를 떠나 주제넘은 처신이고 실질적인 영향력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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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2006.5.26]북한과 조선일보는 '오버'하지마세요

북한과 조선일보는 '오버' 하지마세요

민주노동당 지지표 가운데 사표는 단 한표도 없다

 
 
 

“미국과 가까운 한나라당이 당선되면 안 된다. 열린우리당을 선택해야 한나라당을 이길 수 있다. 민주노동당을 찍으면 사표가 되기 때문에 민노당원이라도 열린우리당을 찍어야 한다”
(6·15 공동선언 남북 대학생 대표자회의에서 북측 대표들이 한 말, 경향신문, 5월 17일)


북에서 불어온 민주노동당 사표론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다.

“보수세력 이회창이 당선되면 안 된다. 노무현을 선택해야 이회창을 이길 수 있다. 권영길을 찍으면 사표가 되기 때문에 민노당원이라도 열린우리당을 찍어야 한다”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 지지자들이 했던 말이다. 급기야 정몽준의 지지철회 이후에는 당시 민주당 당원들과 노사모 회원들이 민주노동당 사이트에 와서 구걸하다시피 했었다.

이회창이나 노무현이나 종속적 신자유주의 정권이기는 마찬가지고, 노동자 민중이 힘들기는 마찬가지라는 주장은 조금씩 무너졌다.

민주노동당 지지표 중 일부는 ‘비판적 지지’와 ‘민주노동당 사표’론에 휩쓸려 나갔다. 나는 당시의 권영길 대표의 심정을 가늠할 수 없다.

“친미보수세력을 규합...기(期) 정권탈취에 나서도록 사촉했다. 미국이 남한 정치에 개입해 감 놓아라, 배 놓아라 하면서 마음대로 주무르던 '주종관계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친미정권 부활 망상은 남한 주민들의 더 큰 반미항거에 부닥치게 될 것"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연합뉴스, 4월 30일)

“한나라당이 승리하면 미국에 추종하는 ‘전쟁머슴 정권’이 들어설 것, 가장 올바른 판단과 선택은 제일 당선 가능한 6·15 평화세력 후보에게 지지표, 평화표를 찍어주는 것. 다음해 대통령 선거에서 더 큰 것을 잃게 되고 결국 친미전쟁머슴 정권이 독버섯처럼 돋아나 당신(남한 국민)들은 전쟁의 제물로 될 것”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5월 18일 성명, 문화일보, 5월 19일)


나는 바꿔 말하고 싶다.

“북한 정권이 반평화, 신자유주의세력인 열린우리당 규합...기(期) 정권탈취에 나서도록 사촉했다. 북한이 남한 정치에 개입해 감 놓아라, 배 놓아라 하면서 마음대로 주무르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신자유주의정권, 열린우리당과 노무현 정권 부활 망상은 남한 민중들의 더 큰 반신자유주의 반세계화운동의 항거에 부닥치게 될 것”

북의 끊임없는 내정간섭성 발언들이 과연 한국의 진보적 세력과 ‘집권’에 도움이 되었는지 의구심이 든다. 남한 정치판을 그토록 꿰뚫고 있다면 한국 사회에 아직도 팽배한 ‘레드 콤플렉스’를 잘 알 것이고, 그걸 알면서도 그렇게 제사지내듯이 주기적으로 ‘지령’ 비슷한 걸 발표하는 것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열린우리당의 ‘사표론 제기’야 경쟁하는 당으로서 이해가 가지만, 휴전선 건너에서 선무방송 하듯이 하는 것은 민주노동당에 대한 정치적 테러다. 자신의 ‘체제 생존’이 중요하다면 사표심리에 휩쓸리지 말고, 민주노동당과 교류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민주노동당 역시 조선사민당이나 만나면서 ‘남북정당교류’ 자랑하지 말기 바란다. 그러니 조선일보가 ‘사표론’과 ‘조선사민당과의 교류’를 연결시키는 것이다.(5월 25일자) 민주노동당 역시 이런 사표론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자신이 정당임을 망각하고 당당하게 자신의 입장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여전히 다른 정치세력들은 민주노동당을 만만하게 볼 것이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당이면 당당하게 독자노선을 밝히는 것이 정도다.

민주노동당은 이미 사표 방지를 위한 해결책을 가지고 있다. 독일식 정당명부 비례대표제가 그것이다. 괜히 사표심리에 흔들릴 것이 아니라 정치개혁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민주노동당이 다음 대선과 총선에서 북한과 열린우리당의 사표론과 비판적 지지에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는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를 관철시키는데 모든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

조선일보의 정치적 오버

여기 또 하나의 ‘정치적 오버’가 있다.

불과 10여일 사이에 남북정상회담, 체제변동, 남북교류기금, 남북관계 도약 등 엄청난 과제와 선심(?)을 쏟아낸 것이다. 남북 장성급 회담에서는 북측이 드디어 서해안 북방한계선인 NLL의 무효화를 들고 나왔다. 그 과정에서 우리측이 NLL의 대안을 모색하는 듯 ‘양보의 기미’가 엿보였다.

느닷없이 민단과 조총련 대표가 끌어안는 사태가 일어나더니 민단이 탈북자 돕기를 포기한다는 보도도 나왔다. 평택의 시위에서는 대한민국의 군대가 매 맞고 다치고 밀리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 과정에서 총리와 국방장관, 그리고 여당의원들이 보인 행태와 발언은 국민들 사이에 ‘여기가 대한민국 맞는가?’라는 장탄식을 짓게 만들었다. DJ의 때맞춘 방북도 예사롭지 않다. 대한민국의 마지노선(線)이 무너지는 듯한 비감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조선일보, 김대중 고문, 5월 22일)


평택의 시위에서 국민들이 매 맞고 다치는 사태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인권이 압살당하고 농민이 포박당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나보다. 군(軍)이 민(民)보다 위에 있나보다. 북한의 선군정치가 떠오른다.

요컨대 김대중 조선일보 고문의 글과 북한의 성명서를 보고 있자면, 대한민국에서 살기가 무섭다. 한편으로는 미국이 쳐들어올 것 같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북한이 쳐들어올 것 같기도 하다. 언제나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이다. 이 두 부류의 정치적 오버 때문에 대한민국의 불안은 심화된다.

박근혜 피습 배후, 북한 아니면 한나라당? 고약한 음모론들

이번 지방선거의 판을 흔든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에 대한 테러에 대해서도 조선일보와 통일운동세력은 동일한 논리를 갖추고 있다. 일명 상대를 달리하는 음모론이다. 시절이 하수상하면 등장하는 음모론이 지난 ‘탄핵사태’ 이후 오랜만에 등장했다.

   
 

이러한 점들을 종합해 볼 때 이번 사건의 배후가 있을 가능성은 매우 높아진다...따라서 이번 사건의 조직적 배후가 있다면...역설적이게도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한나라당이다...자해소동을 벌일 만큼 한나라당에게 절박한 상황이 있었냐...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향후 남북관계와 대선구도를 고려하여 상황을 판단해 보면...미국과 한나라당에게 필요한 것은 그냥 승리가 아닌 압도적 승리이며, 향후 남북관계의 발전을 차단할 수 있는 압도적인 정국 주도권이기 때문이다.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 3대 애국운동의 해(2006년) 5월 24일)

그 기조와 기류가 바뀌어 남쪽에 보수정권이 들어서고 게다가 부시 미국정부와 일본내각의 우경화 내지 반북적 드라이브가 당분간 계속 유지된다면 김정일 정권으로서는 지금 손놓고 있을 처지가 아닐 것이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에 대한 테러도 그의 대선 욕망을 꺾어 궁극적으로 현재 예상되는 대선 구도를 바꾸려는 기도로 보는 음모 이론도 가능하다.
(조선일보, 김대중 고문, 5월 22일)

누가 박근혜의 얼굴에 칼을 대었는가? 북한인가? 한나라당인가? 이런 논리를 보고 있어야 하는 것 자체가 고
역이다.

북한과, 조선일보, 일부 통일운동 진영은 자신들의 시각을 21세기에 맞게 ‘이노베이션’하기 바란다. 폐쇄적인 자기 울타리에 갇혀 광범위한 국민을, 대중을, 민중을 좌지우지하겠다고 한다면, 예컨대 ‘혼란을 부추기고 지령 때리기’에 골몰한다면 누가 편안하게 정책과 후보 면면을 살펴볼 수 있겠는가? 우리 민족의 운명은 어떻게 되겠는가?

열린우리당 지지가 ‘역사적 사표(死票)’ 된다

2002년 대선 당시도 표를 구걸했던 열린우리당, 탄핵사태 때도 표를 구걸했던 열린우리당은 또다시 표를 구걸하고 있다. 부산에서는 ‘부산정권’이라고 강변하고, 광주에서는 ‘민주당과의 통합’ 운운했다. 25일에는 “싹쓸이는 풀뿌리 민주주의를 썩게 하고 와해시킬 것”이라며 “며칠만 매를 거둬 달라고” 했다. 선거 전에 또다시 민주노동당을 가리키며 구걸을 해올지 모른다.

국민들이 자신들에게 등을 돌리는 이유를 정말 모르겠다면, 정말 표를 ‘긁어오고’ 싶다면 자신들이 무엇을 해왔는지 뒤돌아보는 자세가 먼저일 것이다. ‘구걸’도 ‘반성’이 전제 되어야 퍼줄 마음이 생기는 법이다.

최초로 과반수를 넘겼을 때 열린우리당이 개혁은 하지 않고 노동자, 농민, 서민의 목줄을 조아 대었다. 아침 출근길, 열린우리당의 후보들을 보아라. 삼성맨 진대제 전 장관, 염홍철 전 한나라당 출신 대전시장, 부동산업자와 학원장이 태반이다. 이들이 ‘당선 가능한 평화개혁세력’이라면 그 평화개혁은 포기할 것이다.

“정권 재창출이 최고의 개혁, 중도개혁세력 대통합”
(임종석 열린우리당 의원, 2월 전당대회 발언, 데일리 서프라이즈)


정권 재창출이 최고의 개혁이라고 강변하는 데는 할 말을 잃는다. 정권 재창출을 위해 지지를 하고 싶어도 개혁한 게 있어야 하고, 평화 실현한 게 있어야 표를 줄 것이다. 기껏 한 것이라고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감옥에 가두고, 비정규직 개악안 통과시키고, 삼성 X파일에는 면죄부를 주며, 삼성에 항거한 김성환 삼성일반노조 위원장에게는 3년 2개월을 때리는 정권에게 무엇이 예뻐서 표를 주겠는가.

어찌 “계급이나 계층의 이익을 넘어 민족공동의 이익과 평화를 추구합시다!”라고 외치는가? 국민들은 ‘지방선거 본연의 위상’을 바라는데 한국의 정치세력들은 아니, 남북한의 정치세력들은 너무나도 고민들이 많다. 바야흐로 ‘대선 전초전’이라 본다.

통일운동 관련 인사 역시 임종석 의원과 비슷한 발언을 한다.

“정권재창출이 곧 개혁·진보세력이 힘을 모아야... 대선에 적극 개입해 정권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내야 한다”
(민경우 전 통일연대 사무처장. 민족21, 창간 5주년 기획 기사 2006년 4월 1일)

개혁세력은 어떤 개혁세력을 말하는 것일까?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은 신자유주의 개혁의 선두에 있었다. 노동자, 민중, 자연, 여성, 공공성, 복지에 대한 과감한 공세를 통해 한국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꿔 놓았다. 이 개혁은 서민들의 삶을 곤궁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장기적으로 ‘아래로부터의 통일의 가능성’조차 가둬 놓는다. ‘퍼주기’ 논란에 대한 빈곤층의 반발은 이를 증명한다. 한국의 평화와 통일, 개혁과 진보 정치세력은 민주노동당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진정 민족의 통일과 빈곤사회를 극복하고자 한다면, 비정규직 없는 세상, 평화가 넘치는 세상을 원한다면 대안은 민주노동당이다.

*이 글은 영남노동운동연구소 <연대와실천> 6월호(144호)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2006년 05월 26일 (금) 09:58:33 양솔규 현장기자 / 영남노동운동연구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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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2006.5.22][인터뷰]진보우공(進步愚公) 김석준 부산시장 후보

최고 실업률, 최저 출산률 "부산 내게 맡겨라"

[인터뷰]진보우공(進步愚公) 김석준 부산시장 후보

 

 
 

2006년 5월 15일, 부산에 유세 지원을 위해 내려온 노회찬 의원은 부산 남구로 향했다. 한참 시민들과 대화를 하고 있는데, 칠순의 한 할매가 노의원에게 말을 걸었다.
“어이, 요새 김석준이 잘 있나?”

민주노동당 대표 선수된 신동 김석준

아니, 부산의 칠순 할매가 ‘노회찬’을 알아보고, ‘김석준’ 안부를 묻다니. 뭔가가 있다고 생각한 노 의원은 그 할매에게 “우째 잘 아시냐”고 물었다.
할매, 과거를 회상하듯 먼 산을 바라보며 하는 말씀.
“내 김석준이 어릴 때부터 잘 안다. 우리 동네 ‘신동(神童)’이었지”

   
 
아닌 게 아니라 5대 종손인 그는 경북 봉화에서 부산 우암동, 감만동 양철지붕 ‘뜨거운 집’에 터를 잡은 어린 시절 이후 가족들과 주변의 지대한 관심을 온몸으로 받으며 커왔다. 가난한 노동자들이 살던 동네. 대문에서 바라보던 북항과 영도 봉래산의 세 봉우리.

김후보의 할아버지는 약주 한잔 걸치시면 어린 손자를 불러놓고 “세 봉우리가 보이는 집에서는 정승이 난다”고 하시면서 ‘가문을 일으키고 큰 인물이 되라’고 하셨단다. 그 소리를 또 하시고, 또 하시고 했단다. 하지만, 인생에는 평탄대로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감만동 신동은 감만동 출신으로는 최초로 부산중학교에 붙겠다고 자신했지만 입학시험에서 낙방했다. 2차로 동아중학교에 입학한 그는 절치부심을 거듭하여 부산고등학교에 수석 입학하겠다는 ‘원대한’ 꿈을 꾸었다.

적을 알면 백전백승. 라이벌로 여기는 부산중학교 학생들 중 누가 공부를 잘하나 알아봤다. 그의 라이벌은 네 명으로 압축되었다. 부산중학교의 라이벌 중 하나가 지금은 의원이 되어 자신의 선거운동을 지원하러 내려온 노회찬 의원이었다.

그러나 이 네 명의 경쟁자는 다들 서울에 있는 경기고등학교에 진학을 했다. 김석준의 부전승으로 끝났다.

네 명 중 세 명은 대학에서 만났지만, 고대에 입학한 노회찬은 만나지 못했다. 다시 김석준에게 노회찬이라는 이름이 들려온 것은 바로 ‘인민노련’이 등장한 그때. 이후 민주노동당에서 김석준 후보는 ‘얼굴 없는 라이벌’이었던 노회찬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는 김석준 후보의 선대위원장을 맡고 있다. 둘의 관계는 맞수(?)에서 동지로 바뀌었다.

우공(寓公)의 선택, 진보정당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신동(神童) 김석준의 자호(自號)는 우공(寓公), 어리석은 늙은이다. 우공이산(愚公移山)은 그의 인터넷 필명이다.

전국 최연소 교수가 되었고, 촉망받는 연구자의 길을 박차고 민주노동당이라는 길로 들어선 것만 보아도 그의 호는 잘 지은 듯도 하다. 하지만 민주노동당의 성공을 바라는 그와 필자의 견해로 봐서는 민주노동당은 ‘남는 장사’이기도 한데, 그리 보면 우공(寓公)인지 현공(賢公)인지 헛갈린다.

   
 
2000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 부산시당 정책위원장의 역할을 하던 그는 박순보 선생에 이어 부산시당의 대표 역할을 맡게 되었다. 당시 연제구에 출마한 박순보 선생이 예상보다 못한 8% 지지에 머물고, 당은 등록해소가 되면서 일정하게 패배감이 엄습하던 시기였다.

그는 당의 해결사 역할을 자처한다. “2년 남은 2002년 지방선거를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장에 걸맞게 지방선거 준비팀을 꾸렸고. 당시에는 획기적이었던 두툼한 지방선거 공약집도 만들었고. 부산지역의 힘으로. 그러다가 부산시장 후보까지 나가게 되었고 지부장까지 하게 된 거지.”

당시 그는 16.8%라는 높은 지지율로 민주노동당의 최대 승부처였던 부산, 울산, 경남 ‘진보벨트’의 중심에 우뚝 서 있었다.

김석준 후보가 진보정당에 대한 관심을 가진 것은 대학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당시 학생운동을 하던 동료들과 당시 김철이 이끌던 ‘사회당’의 강령을 구해 학습하기도 했다. 본격적으로 그가 진보정당에 대해 고민하던 시절은 ‘국민승리 21’이 만들어지던, 민주노총이 정치세력화를 본격화하던 그 시기이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그는 노동자, 민중이 중심이 되는 진보정당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97년, 민주노총의 개량화에 대한 우려들이 조금씩 싹트고는 있었고 정치세력화에 대해 수많은 문제제기들이 있었지만, 그는 “대중조직인 민주노총이 결의를 했다. 입맛 맞는 거 찾으려면 어느 세월에 되겠나. 부족하더라도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국회의원 노무현을 향한 일갈, “진보정당을 만들자”

때는 1990년 1월 22일, 노동자 대중운동이 전노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던 순간 민정당, 민주당, 공화당은 3당 합당을 통해 보수대연합을 공표했다. 당시 민주당 국회의원이던 노무현 의원은 부산 신선성당 주임신부였던 송기인 신부에게 부산지역 재야 세력을 모아달라고 요청한다.

당시 전교조 교사들, 민교협 교수들, 민변 소속 변호사들, 청년학생들이 모여 비공식 연석회의 또는 간담회 형식으로 모였다. 민주당 잔류를 선언한 노무현, 김광일, 김정길 의원도 참석했다.

이날 발제를 한 노무현 당시 의원은 “국민이 만들어준 여소야대 지형을 배신하고 3당이 합당했다. 야당하라고 했는데 여당으로 간 것은 시민을 배신한 것이다. 현재 민주당은 무주공산이다. 변호사, 교수, 교사, 청년학생 모두 민주당에 들어와서 지구당 하나씩 차지하자. 그러면 다음 선거에 모두 당선된다”고 말했다.

   
 
김석준 후보는 노무현 의원을 정면에서 비판한다.
“87년 대선 당시도 YS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산에서 노태우가 31%를 득표했다. 31%는 골수 보수층이다. YS 찍은 55%는 YS가 배신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다. 30%가 따라간다. 지금부터 정치지형이 바뀌는 거다. 부산은 이제 야당도시가 아니고 여당도시, 보수도시가 되는 거다. 노무현 의원이 정말로 노동자들을 위해서 싸운 국회의원이라면 민주당 같이 하자고 할 게 아니다. 기왕 3당 합당에 들어가지 않았으니 이참에 노동자 민중과 함께 진보정당 만들자고 제안하는 게 맞는 거다.”

그날로 노무현 의원은 ‘삐껴서’ “교수, 재야하고는 다시는 같이 일 안 한다”고 선언했으며 판은 깨졌다.

어쩌면 노무현 후보에 대한 일갈이 아니라, 자신에게 그리고 운동진영 전체에게 가한 일갈일지도 모른다. 거창에서 일어난 민주노동당 후보의 돈봉투 사건은 진보정당운동의 도덕성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김석준 후보는 노무현 정부의 허점을 “사회 전체를 경영하고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이 모자란다.”고 비판했다. 민주노동당에게도 해당된다고 그는 강조한다.

복지 예산 30% 확대…임산부와 12세 이하 무상의료 실시

민주노동당 김석준 부산시장 후보의 선거 슬로건은 ‘서민행복특별시’이다. 지난 선거 때의 ‘4번타자 김석준, 부산을 바꾸자’의 슬로건에서 진일보한 느낌이다. 그만큼 민주노동당은 4년 전에 비해 부산에 대해 많이 연구했고 정책을 생산했다.

“지난 선거 때 공약 중 많은 부분은 부산시나 중앙정부에서 상당 부분은 이미 시행하거나 시행을 계획하고 있다. 따라서 이번 선거 준비 과정에서는 빠진 부분과 업그레이드 시켜야 할 부분에 신경을 많이 썼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복지예산 30% 확대와 이를 기반으로 한 부산시 차원의 ‘임산부와 12세 이하 아동에 대한 무상의료 실시’이다.

   
 
흔히 얘기하듯이 지방정부가 할 수 있는 역할이 극히 미미하고 조세의 개혁을 수반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는 게 지역의 현실이다. 전국 최고의 (청년)실업률과 전국 최고의 비정규직율, 전국 최저의 출산율(0.98)을 자랑하는 부산에서는 무엇보다 복지공약이 필요한 조건이다.

한나라당 허남식 후보는 2020년 부산 인구를 450만으로 예상했지만, 김석준 후보는 이러한 과도한 인구 예측이 난개발과 재정 낭비를 부추긴다고 비판했다.

또한 그는 고용평등과 노동권리 확보를 위한 지자체의 계약준수제, 공공기관의 비정규직 단계적 철폐, 중소기업 취업보조금을 통한 1만 명 청년 일자리 창출, 대형할인점 진입규제와 영업시간 제한 등도 내세우고 있다.

부산시의 가용예산 8,000억 원 중 60%가 길 닦는데 들어가는 조건, 이것을 포기해야만 부산시민들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중앙정부의 실업대책 예산 중 1/10만 부산에서 쓰면 청년실업을 상당히 해소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민주노동당 부산시당의 돋보이는 점은 부산시 ‘자체 예산 확보’가 ‘가능하다’, ‘대안이 있다’는 점을 밝힌 것이다.

여기에는 김석준 후보와 함께 1년 이상을 함께 해 온 부산시당 정책위원회의 역할이 매우 컸다. 김석준 후보는 ‘부산박사’라는 별칭답게 1년 넘게 정책위원회 활동에 빠짐없이 결합해 왔다.

민주노동당, 정파 구도 운동권적 선민의식 벗어나야

사실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참여정부로 많이 흡수되었고, 지식인운동의 양적인 노력도 상당히 줄어들었다. 학생운동도 거의 소멸했다. 해야 할 일은 많은데 할 사람은 없다고 말한다. 김석준 후보 역시 이런 부분에 고민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처방을 제시한다.

“이제 대학에 기댈 수 있는 시기는 지났다. 대학의 교수들에게 일정한 역할을 기대왔지만 이제는 할 사람도, 하고자 하는 사람도 없다. 다른 ‘진지’를 고민해야 한다. 당과 노동조합에서 일정하게 경험이 축적된 사람들, 검증받은 사람들을 우리는 당이라는 진지를 통해서 실력을 쌓도록 해야 한다. 20년 앞을 내다보고 운동사회와 당의 인적자원의 능력을 향상시키고, 인적망을 마련해 나가는 것을 지금 당장 시작해야 한다.”

일할 사람도 없지만, 그나마 있는 사람들조차 정파와 이해관계 속에서 소통이 어렵거나 아예 없다.

“인력을 공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방선거 이후에는 이런 상황이 온다. 사회 내에서 민주노동당에게 자기내적 한계, 예를 들어 정파구조나 운동권적 선민의식 등을 깨뜨려야 한다는 것은 싫건 좋건 요구받게 되어 있다.

   
 
당내 대중정치 지도자도 의도적으로라도 키워야 한다. 우리의 이상한 풍토중 하나는 자기보다 크면 눌러 앉히려는 습성이 있는 것 같아. 열린 마음을 가지고 크게 그림을 그리면서 서로를 끌어올려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당의 외연도 넓어지고 실력도 커지는 것이다.”

“실력 있는 대중정치 지도자는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다. 민주노동당에 대한 지지도 언제든 뒤집어질 수 있다. 아닌 말로 ‘봉기’를 통해 집권한다고 해서 국민들이 인정해 주는 게 아니다. 확고부동한 지지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당을 ‘우공훈련소’로 만들어 한국사회 방향을 바꾼다

지방에서 대중적인 지지를 마련하고, 지방정부에서의 당선과 집권을 통해서 자기 역량을 축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시민들에게 인정을 받아야 한다. 진보가 과격하고, 어설프고, 촌스러운 게 아니라 세련되고, 능력 있는 게 진보라는 이미지를 심어줘야 한다. 정책도 제일 낫네, 사람도 제일 낫네 라는 인식을 심어줘야 한다.”

예를 들어 울산이나 부산 또는 광역단체가 아니라도 거제와 같은 기초단체 등에서 단체장이나 의원으로서 검증받고 실험하고 공유하고 실천해 나가는 진보적 지역정치의 광범위한 실천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김석준 후보는 지난 2000년 이후 지방선거 이전에는 정책위원회를 중심으로 지방선거팀을 준비했었고, 2002년 지방선거 이후에는 ‘진보를 위한 부산정책연구소’를 만들었다. 현재 여러 조건 때문에 연구소 활동이 도중 중단되기는 했지만, 그는 지역의 집권 토대를 구축하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그야말로 선두에서 고민하고 실천해 왔다.

그와 함께 한 사람들은 외국 진보세력의 지방전략에 대한 책을 번역 작업하기도 했다. 만약 이 책이 조금 더 일찍 출간되었더라면 얼마 전 출간된 진보정치연구소의 『런던 플랜』과 함께 당원들의 필독서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김석준 후보의 눈에는 민주노동당이 명실상부한 ‘당’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할 일이 너무나도 많다. 우공훈련소(寓公訓練所)로서의 당을 만드는 것, 이 훈련소가 한국사회의 경로를 ‘역사적인 회군’을 통해 수정하는 꿈을 그는 지금도, 예전에도 꿈꾸고 있는 것이다.

자기관리와 겸손의 대명사 김석준

김석준 후보를 아는 사람들은 그의 겸손함에 놀란다. 어디서든 얼굴 붉히는 일이 없다. 점잖게 얘기를 하는 그의 모습을 보노라면, ‘진보의 겸손이 이런 것이구나’ 하고 느끼게 된다. 어떻게 보면 돌아가신 故 김진균 선생님의 풍모가 느껴지기도 한다.

본인 스스로는 설레설레 손사래를 치겠지만. 자기 스스로를 우공(寓公)으로 낮추는 것, 그 능력이 그를 노동자 민중의 지도자로 붙잡아 두는 힘일 것이다. 노동자 민중에게 민주노동당은 확실한 대안이고, 그는 민주노동당의 확실한 대안이다.

그는 자기관리에 철저한 사람이다. 세 번의 선거를 치러내면서 부산의 당원들은 그의 체력에 혀를 내둘렀다. 어릴 때부터 운동을 좋아하여, 부산에서 김해까지 축구 원정경기를 다니고, 탁구, 달리기 등 못하는 운동이 없는 그다.

등산도 즐겨하고 운동도 즐겨한다. 얼마 전 지명(知命, 50세)에 이른 그가 아직도 민주노동당 체육대회에서 각종 종목의 ‘대표선수’로 선발되는 것을 보면 당으로서는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아직 당은 그를 부릴 수 있다. 그의 체력은 곧 부산당원들의 자존심이다. 부산시당 소식지에 실릴 예정인 어느 당원의 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지난 2003년 민주노동당에는 ‘진사달’이라는 모임이 있었다. 이름 하여 ‘진보사랑 달리기 모임’. 김석준 후보와 더불어 음주가무로 상태 안 좋은 몇 명의 당원들이 주요 회원이었다. 마라톤 1시간 하고 뒷풀이 술을 몇 곱절 시간으로 마셨다. 술 마시기를 철인마라톤대회 수준으로 했으니 살이 빠질 이유가 완벽히 없다.

결국 ‘진사달’ 모임도 반년 정도 유지되다 흐지부지 됐다. 하지만 김석준 후보는 매년 주요 마라톤대회에 참가해 달리기를 계속했다. 마지막 남은 ‘진사달’ 회원이었다. 지난 5월 7일 노동절기념 마라톤대회가 다대포 해안도로에서 있었다. 김석준 후보도 10km 코스에 참가했다. 김석준 후보의 전력을 잘 모르는 참모들은 대회가 있기 전부터 5km만 뛸 것을 권했다고 한다.

하지만 김석준 후보는 이날 10km코스를 59분34초99의 기록으로 완주해 참모들의 우려를 잠재웠다. 이 날 열린우리당 오거돈 후보도 참석해 눈길을 끌었지만 500미터 정도 뛰고 말았다고 한다. 김석준 후보는 매년 노동절기념 마라톤대회와 각종 대회에 참가해 노동자, 서민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했다. 마지막 남은 ‘진보사랑달리기’ 회원 김석준 후보, 그가 진짜 노동자, 서민 후보다.” (민주노총 부산본부 박진현 부장)

   
 
그는 오래 전부터 운영하던 자신의 홈페이지에 꾸준히 일기를 써오고 있다. 홈페이지 주소도 부산시장답다. 선거운동 하느라 새벽 한 두시에 귀가를 하지만 자신의 활동을 인터넷 공간에 꾸준히 알리고 있다.

“어제는 밀린 거 이틀 치 쓰는데 정말 졸려가지고, 자판 두드리는데 눈이 감기더라고.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다시 봤어요. 횡설수설한 거 같아서. 보니까 문장은 되더라고. 그래서 놔뒀어.”

그의 세심함. 그의 자상함. 그의 겸손함. 그의 굳건함. 70년대 긴급조치 9호 세대인 그가 노동운동과 진보정당에 투신한지 30년이 흘렀다. 하지만 그의 이력과 성품으로 봐서는 여전히 그에게 한국사회와 부산은 애증의 교착점이며 변화의 대상이다.

하지만 그는 오랜 세월을 탓하지 않는다. 무릇 우공에게 산을 옮기는 일은 단시간에 끝날 일이 아니었다. 그에게 한국 사회의 변화는 애초부터 자신의 평생의 과업이었다. 업보다. 그 업보를 모두가 함께 나누어 짊어지는 것, 세대를 이어 해 나가는 것, 이것이 우공의 꿈이 아닐까? 더 많은 우공들, 젊은 우공들을 그와 내가, 우리 모두가 기대해 본다.

 
2006년 05월 22일 (월) 09:26:35 양솔규 / 영남노동운동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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