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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속산별노조, 이주노동자 품어야 한다"

"금속산별노조, 이주노동자 품어야 한다"
[기자의 눈] 잇따른 이주노동자 죽음과 산별노조의 역할
 
 
 

강원도 문막에 있는 깁스코리아라는 회사에 계약직으로 일하는 12명의 이주노동자들은 현재 월 평균 150만원 정도의 임금을 받으며 일하고 있다. 노동조합이 이주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회사의 하청업체에서 일하는 20명의 이주노동자들은 금속산업최저임금인 80∼90만원 수준의 임금을 받고 있다.

금속노조 깁스코리아지회 허병국 사무장은 "하청업체의 외국인 노동자들은 저임금에 폭행과 폭언이 여전한데 깁스에 와있는 이주노동자들은 임금도 두 배나 받고 폭언폭행이 전혀 없이 한국 노동자와 어울려 일하고 있다"며 "이주노동자들 사이에서 소문이 나서 이 회사 들어갈 수 없냐는 문의전화가 많다"고 말했다. 노동조합이 보호하는 이주노동자와 그렇지 않은 이주노동자의 처지는 하늘과 땅이다.

한국에서 가장 '강성노조'라 일컬어지는 금속노조 사업장에서 최근 2명의 이주노동자가 산업재해로 사망한 사건은 금속노조 내부에도 적잖은 충격을 주고 있다. 이주노동자들의 비참하고 참혹한 죽음 앞에 금속노조는 무엇을 했는지 자성하는 목소리가 일고 있다.

   
 
 

지난 달 25일 평택의 이젠텍 공장에서 프레스에 압착해 숨진 중국유학생의 산재사망사고는 사건이 발생한 지 5일이 지난 30일 금속노조 경기지부에 알려졌고, 금속노조 본조로는 2주후인 지난 6일 문서로 보고됐다. 이젠텍 회사와 하청업체는 30일 유족을 만나 신속히 합의했고 금속노조는 뒤늦게 대응에 나섰다.

금속노조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 숫자도 파악 안 돼

금속노조 소속 사업장에서 산재사고가 발생하면 간부들은 '작업중지권'을 발동해 기계를 멈추고 상급단체에 곧바로 보고한다. 이어 대책위원회를 구성해 책임자처벌과 보상, 재발방지대책을 요구하고 회사와 합의가 끝난 후 공장을 정상 가동한다. 세상에서 사람 목숨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현재 민주노총에서 가장 큰 조직인 금속산업연맹에는 250여개 회사 16만명의 노동자가 가입해있다. 이 회사에 상당수의 이주노동자가 일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정확한 인원이 얼마인지조차 파악되지 않고 있다. 금속노조 조합원으로 가입해있는 이주노동자는 아직 한 명도 없다.

지난 5년간 산별노조운동을 해 온 금속노조(위원장 김창한)은 비정규직과 이주노동자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금속노조 노사는 지난 7월 26일 19차 중앙교섭에서 금속산업최저임금 월 832,690원(시급 3,570원)을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비정규직과 이주노동자들까지 적용하기로 합의했다.

이주노동자 보호 위한 노력은 미약

이에 따라 금속노조 중앙교섭에 참가하는 100여개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비정규직과 이주노동자들은 9월 1일부터 월 83만원 이상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지난 2005년 중앙교섭에서 사용자들이 "최저임금 적용대상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은 빼달라"고 요구하기도 했으나 금속노조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 지난해에는 같은 공장에 있는 모든 노동자들을 조합원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내부 규칙을 개정하기도 했고, 대전충북지부의 한 사업장에서는 산업연수생을 조합원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같은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이주노동자의 권익을 지키려는 노력은 상대적으로 상당히 소홀했고, 실질적인 사업들이 진행되지 않았다.

한국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는 현재 40만명이 넘는다. 이주노동자들은 이미 한국 산업의 일부분을 담당하고 있고, 특히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맡아서 하고 있다. 이들이 노동조합에 가입해 권리를 찾아나가지 않는다면 노예와 같은 삶은 영원히 계속될 수밖에 없다.

지난 2004년 강제추방 반대운동을 해왔던 이주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려고 할 때 상급단체를 어디로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당시 금속노조는 "비정규직 문제도 풀지 못해 허덕이고 있고, 이주노동자의 투쟁을 책임질 능력이 되지 못한다"는 이유로 금속노조 가입에 대한 어려움을 호소했다. 대공장노조의 산별전환으로 금속노조가 10만명 이상으로 늘어나면 적극적으로 논의하겠다고 했다.

산별노조에 부여된 시대적 과제

오는 23일 드디어 14만 금속산별노조가 출범한다. 현재 14만 금속노조의 조직형식을 어떻게 할 것이냐에 대한 토론이 진행되고 있다. 한 공장의 모든 노동자는 같은 조직에 가입해 같이 싸워야 한다는 방향으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산별노조는 대공장과 중소공장, 정규직과 비정규직, 남성노동자와 여성노동자, 한국노동자와 이주노동자가 모두 같은 조합원이고 하나의 노동자다.

금속노조 이상우 미조직비정규사업국장은 "지난 해 스웨덴에 갔을 때 스웨덴에서는 이주노동자라는 이유로 그 어떤 차별도 받지 않았고, 도리어 더 많은 배려를 하고 있었다"며 "이주노동자들을 금속산별노조의 조합원으로 받아들이고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같이 싸우는 것이 진정한 노동자 정신"이라고 말했다.

'한 사람에 대한 부당한 대우는 우리 모두에 대한 부당한 대우다'(injury to one, injury to all) 남아공 노총인 코사투(COSATU)의 구호다. 가장 열악한 조건에서 일하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을 금속산별노조가 품고 함께 싸우는 것이 바로 산별노조에 부여된 시대적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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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죽음을 한국인들에게 알려 달라"
 
2006년 11월 08일 (수) 11:00:35 박점규 현장기자 bada995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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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집,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 위기에 서다"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 위기에 서다"
  [강연] 최장집 "권력 갖고도 '조중동 탓'은 알리바이일 뿐"
 
  2006-10-02 오전 11:38:13
 
   
 
 
  "냉전 반공 군부세대는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한국 사회에 지울수 없는 변화를 가져왔다. 그런데 민주화 세대는 무엇을 남기고 있는가"
  
  '권력화된 386' 혹은 '운동권 정치인'에 대한 최장집 고려대 교수의 비판은 통렬했다. "정부라는 권력을 갖고서도 아무 일도 해내지 못한 아쉬움"때문이라고 했다. "민주화 세력이 스스로 개혁을 이뤄낼 수 있었던 기회를 성과없이 소진해 버린 데 대한" 원망어린 질타이기도 했다.
  
  최 교수는 '운동에 의한 민주화'가 위기를 맞은 원인으로 "운동 중심에서 투쟁 해 왔던 이들이 삶의 현실에는 무감각한 면을 보인 것"을 꼽았다. 정치의 중심이 됐으나 민주주의를 통해 정책을 만들고 '인민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능력이 부족함을 보였다는 얘기다. 민주화 세력이 정권을 잡았다면서도 기존 관료와 전문가들에게 정책을 맡겨 두고 있는 답답한 현실을 두고서는 "이럴 거면 집권은 왜 했느냐"는 뼈아픈 질책도 나왔다.
  
  '정치인의 민주화'와 '인민의 민주화'가 괴리된 현실에 대해서는 "'87년 체제'를 추동해낸 운동세력이 정당으로 전화하지 못한 것이 우리 사회의 중층적 문제점들의 주요한 원인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짚었다. 기존 정당에 투신한 운동 엘리트들은 자신의 존재기반을 배신하고 기존의 틀에 너무 쉽게 녹아든 '변형주의'의 늪에 빠졌다는 진단이었다.
  
  현 집권세력이 이러한 자기성찰 없이 위기와 실패의 원인을 조중동으로 대변되는 기득권 탓에서 찾는 데 대해서는 "'알리바이 이론'일 뿐"이라는 반론이 돌아왔다. "'민주 대 반민주' 구도나 '보수의 재집권은 시민사회의 괴멸을 가져온다'는 두려움의 담론을 동원하는 것은 실질적 개혁을 방해하는 효과를 가져 올 것"이라며 여권 일각의 '민주 대 반민주' 필승구도의 부활 시도도 강력히 비판했다.
  
  최 교수는 이같은 위기를 타개할 경로로 '정당'을 강조했다. '인민의 문제', '삶의 현실의 문제'에 대한 비전을 가진 세력들이 조직화돼 담론을 만들고 이에 동의하는 투표자들의 표를 얻어 집권하는 민주주의 프로세스를 정상화해 나가야 한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대담에 나선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는 답답한 정치권 밖의 출구, 혹은 정치권 상위의 해법으로 '시민운동'을 제시했다. 노무현 정부에 대한 최 교수의 통렬한 비판을 두고도 조 교수는 기득권의 반발 등 현실적 제약을 전혀 무시할 수 없다는 반론을 펼쳤다.
  
  프레시안 창간 5주년을 맞아 준비한 연석 기획 강연의 두 번째 순서로 진행된 이번 강연은 지난 29일 서울 서대문 충정로의 한국노동사회연구소 회의실에서 2시간 30분 여에 걸쳐 진행됐다. 최 교수와 조 교수의 대담 이후에는 추첨을 통해 참석한 30여 명의 청중들이 이 열띤 토론에 가세했다.
  
  다음은 이날 진행된 강연과 토론의 전문이다. <편집자>
  
  
  
  
▲ 최장집 교수.ⓒ프레시안

  프레시안 창립 5주년을 축하하며, '한국사회의 민주주의'를 주제로 저를 초청해 준 데 대해 박인규 대표와 프레시안에 감사를 표하고 싶다. 평소 프레시안에 대해 여타 인터넷 언론매체와 달리 속보경쟁보다는 한국사회 중요 문제를 중심으로 풍부한 정보와 심도 깊은 분석을 제공해 준 점을 높이 평가해 왔다. 앞으로도 이런 방향으로 더욱 발전해 한국 언론에 하나의 전범이 되기를 바란다.
  
  개인적으로 강의 준비와 학회 발표 등 아주 바쁜 시점에서 박 대표가 부탁을 해 와 이 자리에 서게 됐다. 여유를 두고 좀 깊이 생각해서 좋은 얘기를 해야 할 텐데 별로 그렇지 못하면 어떡 하나 걱정이 앞선다. 평소 생각해 오던 것을 정리해서 말씀드리면, 조희연 교수가 논평자로서 좋은 논평을 해 줄 것으로 기대하고 대답을 하면서 또 미진한 내용을 얘기할 기회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대체로 세 가지 항목에서 얘기를 해 보려 한다. 첫째 운동에 의해 이뤄진 민주화를 성찰해 보고, 두 번째 운동에 의한 민주화의 유산을, 세 번째는 현재 민주주의가 대면하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려 한다. 오늘 말할 주제가 꼭 노무현 정부에 관한 것은 아니지만 노 정부 역시 87년 민주화 이후 경험하고 있는 최종 단계의 정부이기 때문에 결국 그 얘기도 하게 될 것 같다.
  
  오늘의 시점에서 한국의 민주화를 다시 성찰해 본다.
  
  오늘의 시점에서 과거 우리의 민주주의를 되돌아 봐야 현재 민주주의가 안고 있는 문제가 무엇이고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수 있겠다.
  
  한국 민주주의가 어떤 맥락에서 발생했는가 하는 발생의 기원과 조건을 먼저 살펴보려 한다. 우리나라 민주화를 생각하면 가장 인상적으로 생각되는 것 중 하나가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민중적 민주화 운동이 폭발했었다는 사실이다. 내가 지난주에 독일 베를린에 가서 전 세계의 민주화를 논할 기회가 있었는데 이를 정리하면서도 1980년대 우리가 경험했던 엄청난 운동의 폭발이 혁명에 가까운 변화였구나 하는 것을 새삼스레 느꼈다.
  
  또 다른 특징은 그렇게 어마어마한 운동이 굉장히 빠른 시간 내에 사그라졌다는 것이다. 그 큰 운동이 소멸되면서 무엇을 남기고 이루었나 하는 문제를 스스로 제기해 볼 때 민주화가 과연 한국사회를 변화시키고자 목표했던 일들을 다 이뤄냈는가 생각해 보면 별로 그렇지 않다는 답을 얻게 된다. 거대한 운동이 빨리, 폭발적으로 일어나고 또 빨리 소멸하면서 그 이후에 남긴 것이 별로 없다는 데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경험해 온 긴 역사적 과정을 볼 때 자율적인 근대화에 성공하지 못해 식민통치 경험을 갖게 됐고 해방 후 독립된 자주적 국민국가를 이뤄내는 데에도 실패했다고 할 수 있다. 냉전이 한반도에 밀어닥치면서 분단이 됐고 이 과정에서 냉전 반공주의를 경험하고 민주화와 산업화가 이뤄졌는데도 이런 상황들이 누적적으로 남겨놓은 문제점 위에서 민주화가 이뤄져 사회 발전 과정에서 잉태된 문제 속에서 함께 성장하고 발생한 것이다. 이것이 하나의 구질서를 형성했다고 할 수 있고 민주화 운동은 이에 대한 반체제 세력으로 성장하게 됐다.
  
  87년 체제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되는데 87년 6월 항쟁을 통해 나타난 민주주의 체제의 복합적 특성을 약칭해서 부르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이 체제는 민주화세력이 아래로부터의 운동을 통해 군부와 권위주의를 붕괴시킴으로써 만들어졌지만 한국의 민주화가 꼭 아래로부터의 민주화 세력에 의해서만 이뤄진 것은 아니다. 원래 있던 기존의 기득세력과 기존 한국 사회가 만들어 놓은 제도적 틀, 그리고 이것이 부여하는 제약들의 구조가 결합하면서 87년 체제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에 87년 체제를 어떤 고정되고 경직된 틀이 아니라 유동적 균형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한편으로 제약이 가해지지만 운동의 힘이 함께 가기 때문에 향후 사태의 전개에 따라서는 이것이 현상 유지로 복원되는 방향이 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운동의 힘이 기존의 제약을 극복하고 변화를 가져온다면 정치적 민주화뿐 아니라 사회경제적 민주화를 가져올 수도 있었던 가능성을 안았던 체제인 것이다.
  
  이것은 여러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한국사회의 민주화는 정치체제의 변화지만 여러 변화를 일괄할 수밖에 없는 커다란 사회 변화라 정당체제의 변화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생산 체제는 어떻게 변화했나, 또 노사관계는 어떠했나 등의 수준으로 나눠서 중요한 수준에 맞춰서 볼 수 있지 않나 싶다.
  
  일단 민주화가 된 이후는 격동과 변화의 시대라고 할 수 있으나 시간이 흐른 후 먼지가 좀 걷힌 후에 나타난 결과가 무엇인지 보이는 것들이 있다. 민주주의의 틀 속에서 현상유지의 복원이라는 것이 오히려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사태다. 이는 제도권 밖 운동 세력들이 집단적으로 조직되지 않고 분자적으로 흡수 통합되는 과정을 통해 나타난 현상이다.
  
  물론 87년 체제가 이와 같은 결과를 가져올 것으로 사전에 결정된 것은 전혀 아니다. 사이사이에 변화의 계기가 여러 번 있었다. 87년이 대표적이지만 97년 11월 IMF 위기 등 중요한 전환의 계기가 있었다. 그러나 현상복귀로 가는 경향에 있어 커다란 변화의 계기가 되지 못했다는 것은 돌아보면 알게 된다.
  
  이런 사태의 변화라고 하는 것이 민주화 운동 세력의 분해와 위기의 진원이 됐고 정당체제에 있어서는 지역 정당구조가 출현해 그 이후 민주주의 발전을 어렵게 한 장애 요인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현재 노무현 정부를 볼 때 집권 세력과 민주화 세력 간의 괴리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 가장 특징적인 현상으로 생각된다. 앞선 정부에서는 그리 큰 괴리가 느껴지지 않았는데 노 정부에서는 심리적으로 또 구체적으로 이런 현상이 두드러졌음을 확인하게 된다.
  
  정치학의 한 개념으로 '변형주의(trasformismo)'란 말을 썼는데 헤게모니적인 기본적 흐름이랄까, 지배적인 가치관의 경향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는 것을 본다. 민주화 세력이 집권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세력의 정책적 특징은 구 권위주의로부터 연속성을 갖고 내려온다는 것이다. IMF 이후 신자유주의적 정책이 정착됐고 또 FTA를 이 정부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현상은 민주화 운동이 전개될 때의 열망과 목표했던 경제 체제와는 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민주주의라고 하는 것은 정치인의 민주주의와 인민의 민주주의 간의 괴리가 큰 것 아닌가. 원래의 민주주의는 정치인들만의 민주주의가 아니었는데 갈수록 인민의 민주주의는 성격이 약해지는 특징을 볼 수 있다.
  
  
▲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왼쪽)와 최장집 교수(오른쪽)ⓒ프레시안

  운동에 의한 민주화와 그 유산

  
  한국의 민주화는 뭐니 뭐니 해도 운동에 의해 이뤄진 민주화다. 그렇다면 운동에 의한 민주화를 추동했던 중심적 민주화 운동 세력들이 생각했던 민주주의의 경향이나 태도는 어떤 것인가.
  
  모든 것과 아무 것도 아닌 것 사이, 양극적인 것을 동시에 포괄하는 것으로 요약해 볼 수 있겠다. 운동을 할 때 운동의 중심에 섰던 집단의 특징은 해방된 공동체를 추구하면서 이를 달성하기 위한 도덕적 열정과 혁명적 이상주의, 낭만주의, 공동체적 집단주의 등에 충만해 있어 이를 민주주의의 이상적인 가치로 이해하지 않았나 싶다. 이는 집단주의적 이념과 민주주의가 결합함으로써 나타난 특징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운동이 수반하는 경향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진다. 총체적 해결에 대한 충동,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려는 집단주의적 정향, 정치에 대한 도덕적 접근, 운동이 목표로 했던 대상에 대한 적대 의식, 공동체 전체의 대의나 가치를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특수이익이나 부분이익을 인정하지 않으려 드는 것 등이다.
  
  이런 태도와 정조가 민주주의는 '정치적인 것의 공간을 여는 것'이란 인식을 저해하고 있다. 다원주의, 부분 이익들이 서로 갈등하고 권력을 추구하는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운동에 의한 민주주의는 참여하고 실천하고 갈등과 타협에서 나오는 정치적 경향에 대해 관심이 적은 편이었다.
  
  또한 운동에 의한 민주주의는 반 정치적인 경향을 갖게 됐다. 정치를 도덕적으로 접근하려는 특성이 강화되고 이것이 정치와 정당에 대한 불신을 갖게 하는 동시에 시민운동의 효능을 상대적으로 강화하는 경향을 낳았다.
  
  아담 스미스의 자유주의적 이념을 생각할 때 자유주의의 근본이념은 정치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나라 운동권의 태도나 정향 역시 정치를 인정하지 않는 정조를 수반하게 됐고 결과적으로 정치의 부재, 축소 등으로 인해 관료주의, 엘리트주의가 강화되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민주화 이후는 정당과 정당체제의 메커니즘이 중요한데 권위주의에 대한 거울 이미지로만 민주주의가 발전하자 '민주와 반민주' 혹은 '개혁 대 보수' 등 단순 구분 주변을 맴돌게 되기도 했다.
  
  시민운동의 흥기와 정당의 쇠퇴가 맞물리는 경향도 있다. 정당 갖고 되겠느냐 하는 생각은 정당을 부패하고 타락한 집단으로 인식하는 데에서 발생했다.
  
  운동 주체였던 민주화 세대, 특히 현 정부와 의회에 있는 386 정치인에 대해 생각해 본다면 운동의 중심에서 투쟁했던 이들이라 운동에 대한 열정이 강한 데 비해 삶의 현실에는 무감각한 면을 보인다. 이들이 정치의 중심으로 나아간 후 정부 운용이나 민주주의를 통해 정책을 만들어 현실적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능력이 부족함을 보였다.
  
  운동권 세대란 기성세력에 편입되는 연령적 단위로도 정의될 수도 있다. 세대라는 말 자체가 '중산층적 현상'이다. 운동의 중심이 된 대학생들은 이미 좋은 대학을 다니고 엘리트 자질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으니 쉽게 엘리트 사회에 편입될 수 있었던 것 아닌가. 권력지향이 강했던 점도 더 빨리 기성질서에 편입되고 엘리트화하는 경향을 부추겼다. 청와대를 중심으로 정부 안에 들어가 있는 386 운동 세력들이 민주화 운동 당시 기대됐던 그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 못한 것도 기성 질서에 편입됐기 때문이다. 이것이 민중적 운동이 빨리 소멸한 이유가 아닌가 싶다. 한국사회를 변화시키려 했던 중심 세력이 오히려 헤게모니에 아주 유능하게 편입된 것이다.
  
  기술관료적 경영주의와 정서적 급진주의가 기묘하게 결합한 예는 노무현 정부 안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적 가치가 결합되고 이것이 아무런 비판의식 없이 쉽게 수용되는 모습을 본다. 386 세대를 통칭하는 데에는 어폐가 있을 수 있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386 세대는 권력화 된 386이다.
  
  민주화 운동 세력이 누구보다 투쟁을 많이 하고 희생도 많이 했는데도 불구하고 민주화를 통해 이뤄낸 흔적이 남지 않았다는 것은 설명돼야 할 부분이다. 산업화 주도 세대, 냉전 반공 군부세대는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한국 사회에 지울 수 없는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민주화 세대는 무엇을 남기고 있는가?
  
  
▲ ⓒ프레시안

  민주주의가 대면하고 있는 오늘의 문제

  
  선거가 다가오면서 현상유지를 보장하는 정치가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 쪽에서 '보수의 재집권'을 담론으로 얘기하는 데에 동의하지 않는다. '보수의 재집권'이란 담론은 권위주의 회귀에 대한 두려움을 반영하는 담론이다. 민주개혁세력이 대동단결해서 얻은 민주화를 강화된 보수세력이 되돌려 놓으려 하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민주-반민주 구도로는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 이는 노무현 정부의 국정운영 실패로 나타난 현상이 아닌가 생각한다.
  
  거시 역사적 수준에서 볼 때, 한국 사회는 집권 엘리트들에 의한 위로부터의 개혁만이 있어 왔다. 아래로부터의 대중적 요구에 대응해서 엘리트가 부분적, 보수적 개혁을 수행했을 뿐 민주화 운동세력이 직접 개혁을 주도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민주화 세력이 집권하면서 처음으로 스스로 개혁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음에도 내용적으로 이런 시도 없이 시간을 다 흘려보낸 셈이 됐다.
  
  앞으로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물어온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정치적인 것의 공간을 열고 정치적 자유주의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정치적 자유주의는 갈등하는 부분의 이익들을 잘 조직해서 보통 사람들의 삶의 경험과 삶의 문제를 잘 해결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민중들의 삶의 문제를 정책으로 조직하고 정당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앞장서는 구조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 위해서는 사전에 비전을 만드는 작업이 중요하다. 대선이 다가오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 채 사람들을 모으고 대충 이미지나 인상을 보고 투표하게 만드는데 이런 일을 되풀이해서는 변화가 생기지 않는다. 선거 이전에 전망을 갖고 있는 중심 세력들이 정치세력화하고 한국 사회를 어떤 사회로 만들 것인가에 대한 정책 방향을 갖고 선거에 나와 경쟁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경제정책도 전환의 계기가 있어야 한다. 민주정부가 들어섰다고 하더라도 정책결정은 관료나 전문가들이 다 한다. 그들이 국내 문제를 스스로 찾아 정책을 만들고 해결하려 하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거의 외부로부터 주어지고 문제에 대한 해결책까지도 거의 외부에서 주어지니 관료들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합리적인 정책이냐 여부를 성찰하기보다는 외부의 대안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결정해 온 것이 지금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의 원인이 됐다. 그래서 경제정책이 삶의 현실에서 나오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져야 하고 여기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중요하다.
  
  현재 경제정책은 성장 일변도의 정책이다. 권위주의 정부에서 산업화를 이뤄냈고 현재 민주정부에서 여러 가지 정책을 내놨지만 별로 달라지지 않은 기조가 '성장 일변도'다. 이에 대한 대안이 제시돼야 한다. 무엇을 향해 무조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속도를 줄여가면서 민주주의를 통해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대한 비전을 갖고 정당이 만들어지고 투표로 선택받는 과정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켜 나가야 한다.
  
  끝으로 첨언한다면 제도의 문제가 아주 중요하게 부각되고 있다. 레임덕이 빨리 오고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 간의 사이클이 맞지 않고 지방선거가 중간선거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 등이 제도적 결점으로 지적된다. 그러나 우리 실정에서 제도 문제라는 것이 당장 제일 중요한 아젠다도 아니려니와 이것 자체가 문제를 해결한다는 인식도 바람직하지 않다.
  
  더불어 정치나 정당의 역할이 과소평가 되는 것과 병행해서 대의 민주주의가 무시되고 직접 민주주의적 방법을 선호하는 경향이 일고 있다. 예를 들면 국민 소환제 같은 것인데. 대중적인 참여를 넓혀서 직접적인 대표가 가능하도록 하는 제도를 선호하고 이를 민주주의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하지 않나 싶다. 이에 열린우리당은 대선에 오픈 프라이머리 시스템을 도입해 후보를 미국식으로 선출하겠다고 얘기하는데 이런 것이 운동과 연결되는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선거를 통한 대의제 민주주의가 만족스럽지 못하니 직접 후보를 올리고, 또 마음에 안 들면 끌어내리고 하는 것을 강조하는데 다른 나라의 경험이나 이론으로 미뤄볼 때 직접 민주주의가 대의적 민주주의를 보충해 나가는 것은 긍정적이지만 이것이 대의적 민주주의를 대체하려고 하는 것은 문제가 많지 않나 생각한다.
  
▲ ⓒ프레시안

  "역사적, 제도적 장애를 차치하고 정부 탓만 할 수 있나"

  
  조희연: 최 선생을 오랫동안 학문적 선배로 모셨고 70~80% 정도는 생각이 비슷하다. 우리 둘 사이에 많은 쟁점들이 있지는 않은데 요즘 선생께서 말씀을 좀 많이 하시니까 사석에서라도 만나 최근 하시는 이야기들의 의미를 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 자리에서 뵙게 됐다.
  
  근본적으로 지금 우리는 민주정부의 위기, 그리고 넓은 의미에서는 민주진보세력의 위기라는 새로운 현상에 직면하고 있다. 왜 그런가? 그 의미는 무엇인가? 정확히 해석해야 하는데 오히려 그 위기는 해석의 위기이기도 하다. 무엇이 위기인가를 정확히 진단하지 않은 해석의 위기란 말이다. 우리가 직면해보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둘 생각이 거의 비슷한데 최근에 최 선생이 예각적으로 말씀하시니까, 그 예각적인 부분 말고 또 다른 지점을 강조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큰 틀에서 보면 독재시기가 있었고 민주화 시기가 있었고 포스트 민주화시기가 있는데 지금은 포스트 시대로 가는 전환적 이행기의 위기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포스트 민주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의 위기가 무엇인지를 구체화시키기 위한 프로젝트도 진행 중이다.
  
  최근에 참여정부, 386, 그리고 사회운동이 위기의 진원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하시는 것 같다. 그 속에서 노무현 정부 문제가 핵심인 것 같다. 물어보고 싶다. 노무현 정부가 개혁적이 아니어서 위기인가? 노 정부가 좀 더 개혁적이면 위기는 없어지는가? 내가 생각하기에 지금 위기의 원인은 훨씬 더 복합적이다.
  
  386의 문제점은 넓은 의미로 볼 때 우리 자신의 문제점이다. 책임을 같이 싸안자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담지하고 있는 진보적 인식과 실천의 한계 같은 것은 우리도 공유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를 지적하고 싶다.
  
  80년대가 그들 자신에게 강요했던 정치적 개혁주의에서 사회, 경제적 개혁주의로 혁신하지 못한 것이 386의 문제점이다. 그런데 그들이 90년대 이후 투명성, 정당개혁, 정치개혁이라고 하는 일련의 정치개혁에만 집중한 것은 정치적 개혁주의가 시대적으로 절박한 과제여서 그랬던 것이 아닌가? 60~70년대에 반독재 투쟁을 했지만 그게 해결된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리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핵심적 과제였기 때문이 아니었나? 그들에게도 비슷한 지점이 좀 있지 않겠냐는 생각을 가져봤다.
  
  나도 참여정부, 386을 비판하지만 선생과는 톤이라고 할까 문제의 지점이 달리 접근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그런 전제에서 볼 때, 민주진보진영이나 참여정부의 위기가 노 정권의 개혁성 부재 외에 다른 어떤 원인들이 있는지도 짚어봐야 한다. 이 점에 대해서 '민주화 세력 집권으로 망가진 대한민국'이라는 선생의 진단에 대해서는 백낙청 선생이 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
  
  백 선생은 민주화 세력의 집권으로 망가진 대한민국이라는 진단은 보수 세력의 그것과 동일한 것 아닌가. 진보진영은 좀 다른 진단을 해야 하는데 동일한 진단을 하고 있다는 문제제기를 했다. 백 선생은 분단체제가 부과하는 제약, 분단체제에 물어야 하는 책임을 정부에 다 돌리는 것이 아니냐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어쨌든 개혁성 부재 외에 내적, 외적으로 현 정부의 위기 요인을 말해주시면 좋겠다.
  

  "조중동 문제도 결국은 민주주의 오류의 결과물"
  
  
조희연 교수는 개인적으로 나와 인연이 많은 분이다. 내가 미국에서 돌아와 처음 만난 소장학자기도 하고 그 이후에 내가 자꾸 비판적인 글들을 쓰고 운동권 교수 비슷하게 됐는데 조 교수 책임이 크다.(웃음)
  
  현재의 집권 세력은 대체로 기득권세력, 기존의 보수적 지배질서에 의한 제약 조건을 많이 강조한다. 내가 생각하는 방향이나 특징 혹은 강조점 같은 것은 그런 환경적 제약요소보다 민주주의를 실제로 움직여 나가는 행위자들-개인이든 집단이든 세력이든 정당이든-그 주체들이 민주주의를 이해하고 다루는 방식이다. 민주주의가 제공하는 장 내에서 실행하는 능력과 범위에 초점을 맞춘다. 학문적으로 말하자면 행위자 중심의 관점과 비슷한 것이다.
  
  민주주의의 성격은, 지금의 민주주의는 민주화 이전의 권위주의 시대나 혹은 민주화 과정에서 권위주의 체제를 공격하던 투쟁의 전환기 때와는 다른 형태의 정치체제이고 정치의 틀이라서 이제 다시 지금의 민주주의에 대한 정확하고 냉철한 인식이 대단히 중요하다.
  
  일단 바깥에 민주주의를 소극적으로 지지하거나 보수적인 어떤 경쟁세력이 있다고 가정하면 이 세력을 너무 의식하게 된다. 그 세력에 책임을 묻기 이전에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역량을 어떻게 결집하고 한국사회와 민주주의 발전의 비전을 어떻게 세워낼 수 있는가를 모색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운동에 의한 민주주의의 지금까지의 궤적을 생각하면 이런 점이 너무 허약하다는 것이 아쉽다. 가능성과 힘이 여기저기 산재해 있는데 그 힘들이 너무나 무력하게 소모되고 없어져 버리고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좋지 않은 결과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한다.
  
▲ ⓒ프레시안

  대중들이 실제로 아무리 운동을 많이 하고 투쟁을 많이 하고 열심히 투표하고 참여한다고 해도 중요한 문제들은 정치인들이 국회에서 결정한다는 것이 민주주의다. 중요한 문제를 그 사람들(정치인)이 잘 다룬다고 가정하면 많은 문제가 해결되고, 설사 해결이 안된다 하더라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힘이 성장하는 토양을 만들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해서 오히려 토양을 척박하게 만들고 민주주의의 기반을 훼손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예를 들면 민주화 이후 정치개혁을 할 때, 선거법이나 정당법 같은 정치개혁의 내용들을 제도화 시킬 때 실제 제도를 만드는 과정에 운동권 출신들도 많이 참여했는데 결과적으로 대중과 민중이 정치참여를 하고 그 의사가 반영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엘리트 중심의 구조를 만들어내 아주 나쁜 결과를 가져왔다. 선거법에서 지구당 철폐나 부패 방지를 굉장히 강조한 결과로 후보자와 투표자 간의 접촉을 차단하고 그 기회를 좁힌다든가 지방선거에서 정당 공천제를 없애려는 시도들. 이런 문제들은 민주주의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제도인데 이것은 결과적으로 좋지 않은 민주주의를 만들어 내는 것으로 연결된다. 좋은 정당으로 좋은 민주주의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함에도 왜 힘든 일들을 자초하는지 안타깝다.
  
  그런 점에서 노무현 정부의 개혁성을 따져보는 점이 굉장히 중요하다. '분단 체제 등 여러 가지 제약이 많아서 제대로 안 된다'는 말을 나는 수용하기 힘들다. 우리는 분단체제지만 다른 나라도 다 나름의 제약들이 있다. 모두 일국(一國) 차원에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분단체제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현 정부가 지금의 민주주의를 통해서 만들 수 있었던 성과와 현실적으로 만들어 놓은 결과 사이의 거리는 아주 멀다.
  
  현재의 문제가 잘 해결되지 않는 점에 대해 멀리서 요인을 불러들여 설명한다고 하는 것은 좀…. 이런 것을 알리바이 이론이라고 한다. 해야 할 것을 하지 않고 다른 데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고 해야 할 것을 회피하거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 아니냐?
  
  노무현 정부도 마찬가지다. '개혁을 안 한다'고 비판하면 '다 조중동 때문이다'고 답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정부의 책임을 모두 보수언론과 의회 내외의 보수세력 탓으로 돌리는 식이면 문제 해결이 될 수 없다. 조중동이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큰 것은 물론 조중동 자체의 원인적 요소도 있지만 민주 정부가 실행하는 민주주의가 잘 안 된 것의 결과물이다.
  
  나는 조중동이 완전히 독립적인 변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를 통해 국가권력이 제대로 잘 작동된다면 조중동의 비합리적 논조가 미치는 영향은 굉장히 축소될 수 있다고 본다. 민주주의가 잘 되면, 민주주의를 가이드 하는 정부의 정책이 좋으면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들의 중요한 고리인, 거시적 정치 수준에서 경쟁의 건강한 틀을 만들어 낼 수 있고 이것이 연쇄 반응을 일으켜 사회 미시구조의 갈등이 풀려나가는 틀을 만들 수 있다고 본다. 물론 중요한 고리가 풀린다고 모든 문제가 다 해결이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민주주의의 문제, 정치의 문제에 대해 이렇게 위계적이고 계통적으로 접근하지 않는 사람들은 문제 해결이 불가능하게 느껴질 것이다. 노무현 정부가 보이고 있는 문제점을 보는 방법론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이 쪽(행위자 중심의 관점)에서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는 사람들의 능력과 그들이 만들어낸 부정적 결과를 강조하는 입장에 있다.
  
"과연 정당 강화가 민주화 위기의 해법인가"
  
  조희연: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를 구성하는 요소 중에는 반독재 민주화 운동 출신의 통치 집단이 노출하고 있는 무능력이 있다. 그 부분은 나도 충분히 인정을 하고 있고 그들의 무능력도 여러 가지 지점이 있는데 그것하고 최 선생께서 발제에서 말씀하신 점, 정치에 있어 운동의 역할에 대한 부정적 견해는 좀 다른 차원일 수 있다고 본다.
  
  최 선생은 민주주의가 공고화 되는 과정에서 정당정치가 사회의 현실을 적절히 반영하는 쪽으로 민주화가 진행되는 것을 강조하셨다. 그런데 그것은 공고화의 한 측면일 수 있고 제도정치의 공고화를 위해서는 제도권 정치 외부의 사회운동의 역할이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강력하게 강조되어야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운동이 정당화(政黨化)되지 않았다. 그래서 정당을 강화한다'는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보자. 그런데 사실 4.15 총선이 남긴 것은 열린우리당이 과반 이상, 거기다 민주노동당까지 합치면 우리 의회는 진보다수당 질서다. 그런데도 정당정치 강화에서 해결책을 찾는 방식이 현재 직면하고 있는 문제를 과연 100% 해결할 수 있나? 중도개혁 반독재 여당과 노동당이 다수가 됐는데도 한국의 민주주의가 여전히 갈등으로 질척거리고 위기에 처했을 때는 다른 어떤 문제점이 분명히 있는 것이다.
  
  지금은 민주정부의 무능력을 계기로 보수 세력과 보수 세력의 중요 부분인 보수 언론이 의회와 행정부를 포위한 형국이란 생각이 든다. 최 선생은 정치학자지만 난 사회학자니까 사회를 강조해야 한다.(웃음)
  
  예컨대 부동산 정책, 8.31 정책 등이 무력화 되는 것을 보면 정치권 밖의 사회가 오히려 더 급진적으로 활성화되어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도 해본다. 물론 사회운동을 강조할 때 제도정치의 확장된 역할을 부정하면 안 되고 제도정치를 강조할 때는 사회운동을 더 강조해야 한다. 아까 발제에서 직접 민주주의에 의한 정치의 한계를 지적하셨지만 나는 우리 사회가 당연하게도 직접 민주주의를 더 강화해야 한다고 본다. 다만 정치엘리트들에 의한 제도의 정치를 창출하는 점이 부족할 수 있다는 문제점이 있긴 한데…하여튼 너무 한쪽(제도 정치)만 강조하면 또 다른 쪽의 문제점이 생기지 않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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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력 갖고도 개혁 못하면서 조중동 탓은 안 될 말"
  
  조 교수는 사회학 전공이고 NGO대학 학장이니까 당연히 사회문제를 강조해야지, 그런데 난 정당 이론이 전공이니까 이걸(제도, 정당정치) 강조하는 것 같다. (웃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일반론, 보편론을 못 펴는 것은 아니니까.
  
  그런데 사회의 진보, 합리적 공론의 장이 확대와 대안적 담론 창출을 위해 시민운동의 중요성이나 일반 민중들의 정치참여 확대가 많을수록 좋다는 것은 원론적으로는 맞는 이야기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한국 사회가 보수적 정치를 만들 수밖에 없는 나쁜 구조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물론 부정적 측면이 없지 않은데 나는 한국사회가 매우 다이내믹하고 진보적인 성격을 가진 사회라고 생각한다. 미국 같은 나라와 비교해보면 더 그렇다. 따라서 '뭐가 잘 안 되고 있다'는 지금의 현실은 바로 정치가 잘 안 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시민사회의 힘을 정치적으로 잘 제도화 하면 많은 변화의 모습을 볼 것이라고 기대한다. '있을 건 다 있다. 보수적 정당도 있고 민노당도 있고 그래도 안 되는 것 아니냐'는 말씀도 옳긴 하다.
  
  하지만 기존의 정당이 형식적인 틀을 갖추고 있다 하더라도 정당들이 가지고 있는 틀과 구조 자체가 한국사회의 현실을 정치현장에서 대변할 구조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미국과 한국을 대비시켜 볼 때, 클린턴이 의료개혁 같은 것을 관철시키진 못했지만 근년의 미국에선 상대적으로 다이내믹하고 진보적인 성향의 대통령인데 클린턴은 미국 사회가 보수적이니까 캠페인은 보수적으로 하고 당선 이후 통치는 더 진보적으로 했다는 말이 있다. 반면 한국은(노무현 대통령은) 캠페인은 진보적으로 하고 통치는 보수적으로 한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 정당의 정치인들을 보면 대통령이고 의원이고 당선되면 변한다. 앞서 발제에서 언급한 변형주의는 정치인들이 제도권에 들어가면 기존에 존재하던 틀에 맞추기 위해 행동이 변하는 이탈리아 정치의 특징을 표현한 말인데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많은 투쟁을 했던 정치인들이 있고 몇 차례에 걸쳐 민주정부가 수립됐는데도 불구하고….
  
  어쨌든 형식적으로 가질 것은 다 가졌다. 민주정부도 만들어놨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때 내가 특히 노무현 정부에 비판적인 것은, 이 정부의 외부적 상황은 이전 정부보다 훨씬 좋았다는 것이다. 이전 정부는 여소야대와 씨름해야 한다는 제약 때문에 (개혁을) 못한 측면도 있다. 그런데 노무현 정부가 그런 제약이 있나? 왜 4대 개혁법안을 통과시키지 못했나? 탄핵 파동 이후 우리당이 다수가 됐다. 민주정부로선 최초로 행정부도 장악하고 의회도 장악했다. 그런데 왜 개혁을 못하느냐는 말이다.
  
  한번은 프랑스 외교관을 만난 적이 있는데 이 사람이 왜 4대 개혁법안이 통과되지 못하느냐고 묻던데 이유를 설명하기가 어렵더라. 아주 복잡하게 조중동이 어쩌고 보수적 여론이 어쩌고 설명해야 하는데 민주화가 됐다면 의회의 다수 결정으로 법안이 통과돼야 하는 것이다. 의회 다수파가 결합해 정책을 추진해도 법안을 통과 못 시키는 것은 문제가 있다.
  
  외부적으로 좋은 조건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왜 개혁을 못하느냐, 이것은 행위 주체가 가진 문제가 가장 큰 것이지 조중동이나 사회로 문제를 돌릴 것이 아니다. 물론 완전히 외적 요인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개혁을) 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줬는데도 활용하지 않고 있는데 어떻게 보면 상당히 의도적인 것도 많다. 의회에서 뭘 좀 하려는데 대통령이 한 마디 툭하고 던지면 그나마 안 되는 것이다. 실제로 제안을 하고 실행을 해야 하는 사람이 중간에 무슨 맘이 들었는지 슬그머니 엉뚱한 소리나 하고…. 국가보안법 문제가 그런 것이 아니냐(편집자 주: 2005년 대통령이 TV에 출연해 국가보안법은 '박물관에 보내야 할 낡은 칼'이라고 말하자 우리당은 국보법 폐지에 매달렸지만 그해 겨울 다시 대통령이 '급하지 않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자 흐지부지 됐다.)
  
  (현 집권세력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도 많은데 실천을 하지 않는, 부작위에 대한 아쉬움이 참 많다.
  
  "87년 운동세력 정당 조직화 못해 민주주의 지지부진"
  
조희연: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은 보수 양당 체제를 해체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고 했는데 최 선생이 생각하는 보수 정당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아예 민주노동당같은 진보 정당이 중심이 돼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열린우리당의 발전을 요구하는 것인지 궁금하다.

  
▲ ⓒ프레시안

  정당 체제가 변한다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정당의 민주화는 나 역시 굉장히 강조하는 바이지만 외부에서 굉장한 충격이 가해지지 않는 한 정당은 스스로 변하기 어렵다. 과거 경험으로는 민주화 운동이나 IMF 사태 등이 일어나 유권자들의 요구나 행태가 바뀌었으나 이런 외적 환경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당 체제는 그다지 변화하지 못했다.
  
  우리나라 정당 체제는 87년 이후 '지역당' 구조를 유지해 왔다고 하지만 내용적으로 보자면 해방 이후 50년 선거부터 냉전적 또 보수적인 협애한 이념적 스펙트럼이 굳어졌고 이것이 정당으로 제도화돼 계속돼 왔다. 요즘 민노당이 안 되는 것도 내부적인 조건이 있겠지만 이미 보수 양당 체제가 유권자들의 선호를 장악하고 있어 구조가 허약한 정당이 이 틀을 바꾸기 어려운 현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는 외부적 충격이나 내부적인 발전을 거쳐 민노당 같은 군소 정당도 커질 수 있으나 지금 시점에서 미래를 뭐라고 장담하기는 어렵다.
  
  정치학의 입장에서는 전체의 틀과 가능성을 객관적으로 설명할 수 있으나 현실에서 민노당이 좀 더 강화돼서 이 틀을 상당한 정도로 변화시키는 게 가능하고 바람직한 것인지 아니면 열린우리당이 중앙에서부터 중도 좌파, 개혁 진영 쪽으로 변화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예측하기 어려운 문제다. 그 공간은 늘 열려 있다고밖에 볼 수 없다.
  
  다만, 우리 정당체제의 문제는 보편적으로 중간에서 왼쪽으로 모두 비어 있는데 이 넓은 공간을 왜 활용하지 않고 조직하려 하지 않는가는 의문이다. 이것은 정치인의 책임과도 관련된 문제다.
  
  현재 우리 사회 민주주의의 발전이 지지부진한 가장 큰 이유는 87년 이후 운동세력이 정당 조직으로 발전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현재의 정당체제가 공간적으로 많은 사회적 이슈를 대변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를 공략하고 개발하고 조직할 수 있는 공간이 충분히 열려 있다. 여기에 왜 손을 안 대는지에 대해 의문스럽고 관심을 가져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정치 상품을 공급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
  
조희연: 사회운동의 역량이 정당정치의 역량으로 가지 못했다는 것을 문제로 지적하시는데, 시민사회는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계, 또 시민사회 내 진보와 보수의 역관계 지형 속에서 다양하게 움직이는 것이다. 나는 오히려 한국의 사회 운동이 너무 충실하게 정당정치화 돼 있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제도 정치가 더 많은 역할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도 시민사회는 제도 정당의 상위적 공간을 만들어 내는 역할을 해야 한다. 국가보안법이 폐지되지 못한 것은 보수 세력에 폐지를 강제할 만큼 시민사회가 비판적으로 동원되지 못한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운동 세력이 정당제도로 들어가지 못한 것만을 강조할 수 있겠나?

  동전의 양면 같은 얘기다. 반대의 얘기도 가능하다.
  
  조 교수는 사회적으로 이런 공간을 개발하고 정치적으로 조건을 만들어 내는 것을 얘기하는데 그 방법으로 정당체제가 발전할 수도 있다. 사회적 균열이 정당으로 만들어진다고 하면 이는 수요자 중심의 이론이고, 정당의 조직이 투표자들에게 선택 여지를 준다고 하면 이는 공급자 중심 이론이다.
  
  우리나라에는 사회가 요구하는 사람들이 조직을 만들고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정책 상품을 공급하는 게 아니라 나쁜 상품을 공급하는 게 문제다. 그리고 이런 문제를 지속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정당체제가 갖고 있는 한계다.
  
  조 교수는 시민사회의 가능성을 강조하면서 건강한 민주적 가치와 시민 의식에 의해 계도되고 움직여지는 시민사회를 가정하는데 이는 규범적으로 상정하는 면도 많지 않나 싶다. 실제로 우리나라 시민사회가 그렇게 강력하지 못하다. 조중동이 가장 영향력을 많이 갖는 영역이 시민사회다. 시민사회가 합리적 담론의 장을 만들 수 없도록 파편화된 것도 보수 입김이 가장 많이 작용해 생긴 현상 아닌가.
  
  "개혁입법의 좌절, 엉거주춤하게 하니 실패하는 것"
  
조희연: 탄핵국면에서 궐기하고 활성화됐던 시민사회가 보수 세력들에게 포위당하고 있는 상황에 대한 질문이라 생각한다. 시민사회는 헤게모니 투쟁의 공간인데 민주화 이후 시대의 한국 진보세력이 시민사회를 진보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비전과 담론을 상실했던 것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 부분은 인정하더라도 정당정치를 강조하는 최 선생님께는 다시 사립학교법은 국회를 통과돼서 법이 됐지만 아직 시행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 질문 드리고 싶다.

  한국의 사학은 이른바 헤게모니 투쟁의 중심이 되는 보루라고 볼 수 있다. 이를 바꾸는 문제는 간단히 법 개정만으로는 될 수 없는 게 아니냐는 것이 조 교수의 지적인 것 같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좀 더 구체적으로 확실하게 접근해서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생각한다. 시행될 수 없는 법이 아니라 할 수 있는 법을 할 수 있는 만큼 했더라면 문제를 풀 수 있지 않았을까.
  
  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그 내용이 공지돼야 한다고 보는데 정치인들이 자신들만의 폐쇄적 공간에서 개혁법이라고 할 수 있는 내용을 불완전하게 만들어 버린 데서 문제가 발생했다. 대통령이 강하게 발언하고 힘 있게 밀어 붙여도 될까 말까인데 엉거주춤하게 하고 그래서 안 되게 된 것 아니냐.
  
  실제로 법이란 그에 근거한 집행력이 작동해서 제재가 가해질 때 반응하는 것이지 법만 제정해 둔다고 해서 효력을 발휘하지는 않는 것 아니냐. 사학법도 그런 점에서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노 정권의 실패는 인적역량 구축하지 못한 탓"
  
조희연: 최 선생은 성장 일변도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사회 이슈를 회피하려 한다는 것을 노무현 정부의 실책으로 꼽고 계시는데 그게 꼭 노 정부의 탓으로 돌릴 수 있는가는 의문이다. 물론 나도 원칙적인 대안과 방향은 갖고 있다. 나는 사회적 완충 국가로 역할 전환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정책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한국 사회는 배울 데가 없다. 베네수엘라 차베스 대통령처럼 반미적 저항과 에너지 동맹으로 모델을 만들어 나갈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회적 대안과 정책을 만드는 현장이 바로 대한민국이란 생각을 한다.
  
  이 세계화 시대에 박정희와는 다른 방식으로 국민들을 먹고 살게 해 줘야 한다고 본다. 골목 경제가 유지되게 해야 한다. 그러나 이 문제는 노 정부에 돌을 던짐으로서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다. 그것이 진보 진영의 한계라고도 할 수 있다. 배울 수 없으니 창조적으로 고민을 해야 한다.
  
  전 사회적 역관계를 어떻게 형성하는가가 그 다음 문제다. 정책을 펴려고 해도 자본과 권력의 저항으로 국민들의 의식이 바뀌어 버렸다. 부동산에 8.31을 뛰어넘는 정책을 구사할 수 있을까. 없다고 본다. 오히려 강남사회는 계급의식이 투철한데 강북사회는 계급의식이 없는 현실이 대안 사회를 실현하는 공간을 줄이고 있는 것 아닌가. 대중들은 냉전 반공 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면이 크고 조중동은 또 그런 식으로 대중을 교육하고 있다.

  
▲ ⓒ프레시안

  너무나 지당한 말씀이다. 보수적인 사람들이 비전을 갖고 만드는 것은 쉽다. 기존 틀의 연장선에서 합리적으로 이끌어 가면 되지 않나. 그러나 기존 질서에 대응하고 사회 현상을 바꾸는 개혁은 굉장히 강조해야 할 부분이 많다. '민주화 이후'가 실패한 것은 이런 점을 잘 조직하고 형성하지 못한 탓이다.
  
  노무현 정부에 모든 책임을 안기자는 것은 아니지만, 이 정부에 대해 비판적일 수밖에 없는 까닭은 정부는 엄청난 자원과 능력을 활용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얼마나 노력을 했냐는 것이다. 정부를 만들어 줬는데 아무 것도 안하니 너무나 허무하다. 기대된 방향과 실행이 너무 다르지 않냐. 민주화 정부라고 해 놓고 경제 장관은 기존 관료에서 임명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니 허무한 것이다. 그러려면 민주화는 왜 했나. 세계화 시대에도 권위주의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사회경제적인 정책을 펴고 보통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있는 경제 활성화를 할 수 있고 해야 한다. 이런 내용들이 선거 전에 비전으로 만들어져야 하고 선거에서 언표되고 이를 대중이 선택하는 과정을 거쳐야 실제로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경험을 노무현 정부를 통해 배운 셈이다.
  
  노 정권도 인적 역량을 구축했었다면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굉장히 어려운 것은 우리나라 대학 교육이 상당히 보수화 돼 이 안에서 대안적 역량을 구축하는 것이 또한 어려운 일이 됐다는 것이다. 이런 것도 교육 정책을 어떻게 해서 변화를 도모할 수 있었는데, 지금 교육부 장관이 누군지 달라진 게 없지 않냐.
  
  "시민사회 리더십, 이념을 실현할 여유를 제공해야"
  
  사회자: 이만 청중들의 질의를 받아보겠다.
  
청중1: 안양에서 논술학원을 하는, 안양지역 모 시민 단체의 총무도 맡고 있는 사람이다. 우리 지역만 그런지 모르겠지만 시민운동이 참 침체돼 있다. 희망도 별로 없다. 활동을 하면서 느끼는 것인데, 집권을 지향하는 민주세력이나 운동세력이나 다 마찬가지인 것이 자신들이 내세우는 이념은 민주주의인데 막상 그 내부에는 민주주의가 별로 작동하지 않는다. 목표만 앞세우고 내부의 문제는 다 묻어버린다.
  
  바로 이런 문제로 현 집권세력이 내적 역량을 강화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신뢰집단 형성에 실패한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 내부의 시민혁명을 거치지 못했기 때문에, 진정한 개인주의나 합리주의를 완성하지 못한 탓 아닌가?
  
  청중2: 민주노동당에서 일하고 있다. 정당에서 일하고 있지만 사회운동이 상당히 중요하다고 느끼는 것은, 민노당이 소수 정당이기 때문에 대중운동으로 특화되지 않으면 어떤 좁은 법안 발의도 다 묻혀버리는 뼈저린 경험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대중운동이 중요하다는 것에 백퍼센트 동의한다.
  
  그런데 지금 시민운동의 주류인 대부분의 NGO를 보면 역동적인 시민사회 운동을 동원해 낼 수 있는 담론이 제시되더라도 현재 시스템과 구조로서는 그런 것이 담보되기 힘든 것 같다. 그 분들이 민노당도 많이 비판하지만 어떨 때 보면 일종의 로비집단 같기도 하고, 할 수 있는 담론이 제시되더라고 현재 시스템과 구조로서 그런 것이 담보될 수 있겠는가. 최장집 선생이 말씀하신 정당정치의 강화, 거기에 플러스 되는 역동적 사회운동의 모습은 지금 어떤 그 무엇으로도 이뤄지기 힘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 ⓒ프레시안

  최장집: 두 질의를 묶어서 답하겠다. 지금 시민운동이나 민주 진영 내부의 문제점을 지적하셨다. 그런데 민주화 이후 우리 사회라는 것이 신자유주의적 시장중심사회, 이는 개인의 이익추구를 시장자율성이라는 이름으로 무제한적으로 풀어놓고 중심적 규범과 가치로 삼는 상황이 민주화와 맞물리고 있는 것인데….
  
  어떻게 보면 80년대에는 민주화라는 대의를 통해 공동의 투쟁목표로 결집했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에는 각자의 이해관계를 추구하는 일상적 삶의 세계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데 이런 흐름이 상당히 가속적이었다. 공동선, 공공성을 가지고 공동으로 조직을 하고 운동을 하며 문제를 풀어나가는 것이 굉장히 어려워졌다. 민주화 정부들의 정책수행에서 실망을 거듭하는 것에서 민주주의 자체를 불신하게 되고 회의와 냉소가 상당히 팽만하다시피 한 것이 오늘의 현실이 아닌가 싶다. 이런 조건에서 시민운동을 하는 것이 쉽겠는가. 나는 시민운동에 직접 몸담고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상상이 된다. '안 되겠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공동의 이익을 위해 조직하고 운영하는 것은 리더십 문제와도 관계되는 것으로 본다.
  
  지금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민주주의라는 것이 정치체제의 민주화에다가 민주적 가치가 사회적으로 확대되고 실천되는 과정에서 사회가 실제로 변화는 것으로 볼 때 리더십의 형성 문제가 민주주의의 구현과 어떻게 맞닿을 수 있느냐는 것에 대해서다.
  
  나의 관점에서 볼 때는 작은 조직 내의 리더십의 원리는 좀 다르다. 예컨대 노동운동 내의 리더십은 기존 정치체제에서 대통령 뽑듯이 많은 사람들이 투표로 지도자를 선출해서 리더십을 형성하는 것과 다르다. 서구 민주주의 국가를 보면 리더 중심의 운동이 많다. 스페인, 독일, 이탈리아, 미국의 경우 누구 누구라는 사람으로 운동이 대표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민주화 이후 사회의 하부구조, 생산자들의 노동조합이나 시민운동 집단에서 민주적 리더십을 제대로 형성하지 못한 것이 중요한 문제란 말이다. 그런 리더십은 꼭 선거를 통해서만 형성되는 것도 아니다. 민노당이나 민주노총에서 만일 나한테 '한 가지를 제안해보라'고 하면 '선거를 너무 자주해선 안 된다. 지도부의 임기를 너무 짧게 둬선 안된다'고 말해주고 싶다.
  
  대중들이 따르고 지도부의 이념이 관철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지 못하면 오히려 민주주의를 망치고 내부의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조희연: (두번째 질의에 대해) 시민운동이 정치의 역할을 간과하는 것은 아니지만 정치 정상화보다 사회운동을 강조하는 입장인데 현 사회운동이 노동운동이나 민중운동, 시민운동으로 나뉘어 있다고 볼 때 최 선생이 말씀하신 386의 문제점, 정치적 개혁주의의 한계를 다 동일하게 갖고 있다고 본다. 정치적 개혁주의는 '쇼'가 될 수 있다. 민주노동당을 보면 당원 투표를 해서 의사결정을 한다고 하는데 그런 것이 꼭 중요한 게 아니다. 공공성의 강화, 시민운동이 급진주의를 되찾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민노당은 나름대로 제도 정치의 장에서 복합적 경쟁 공간에 뛰어들었으니 시민운동과 함께 헤게모니를 틀어잡을 수 있는 실천을 같이 해야 하지 않겠나.
  
  "권력화된 386, 통일된 힘 없으니 정체성도 잃어버린 것"
  
청중3: 미국 조지메이슨 대학의 갈등분석해결연구소에서 공부하고 있다. 최장집 선생께서는 1987년 당시 운동권이 정당으로 조직되지 못했다는 것을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하셨다. 집권엘리트가 된 386들 말고 지금도 자기 현장에서 묵묵하게 살고 있는 운동권이 정당으로 조직화되지 못한 점을 지적하신 것일 테고 그 결과 시민사회의 불신도 나타난 것일 텐데, 이런 세력들을 정당으로 조직화하기 위한 구체적 대안이 있는가?

  
▲ ⓒ프레시안

  최장집: 현실적이고도 어려운 질문이다. 1987년의 결과물은 비판적 지지, 후보 단일화, 독자후보의 세 흐름의 조직화였다. 지금도 이 흐름과 조직화의 표현이 상당 부분 유지되며 골간을 이루고 있다. 그 와중에 지역당 구조로 흘러가면서 정착됐다. 우리나라의 운동권은 지적 자원이 상당히 부족했던 상태에서 운동을 통해 (권위주의) 체제를 바꿨다. 지금의 현실은 이런 과거가 만들어낸 필연적 결과물이다.
  
  운동에서 상당히 중요한 지위를 점했던 젊은 리더들이 있었는데 이 사람들이 공동의 이해 관계를 모아서 느슨한 연대라도 해서 정당을 만들었으면 구 질서 내의 정당을 대체할 수 있는 정당이 될 수 있지 않았겠나? 아니면 기존 정당에 그룹을 지어 들어가 이념을 구체화 시키든가. 그런데 지금 열린우리당 같은 곳에 그룹을 지어 들어가 있지만 이 사람들이 너무 자기 정체성을 버리고, 과거에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운동을 했었는지 모르겠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기존 질서를 맹목적으로 따라가고 있다. 개별적으로 보면 중간보스 정도까지는 올라가긴 하는데 결합된 힘으로 통일을 못하기 때문에 별 힘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
  
  권력화된 386이라고 표현했지만, 우리당 안에도 당장 운동의 중심이었던 386들이 있는데 뭘 하고 있냐는 질문을 할 수 있다. 보통 사람보다 더 빨리 현상유지적 질서에 적응하고 기성질서에 순응하는 엘리트가 돼버리면 보는 사람들이 허무해진다.
  
청중4: 프레시안 기자다. 이른바 민주화 이후 우리 사회에서 민중의 역량이 독립적이고 폭발적으로 분출 된 것은 세 차례 정도로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1987년 6월 항쟁, 대학생 중심이었고 당시 정원식 교육부 장관 폭행 논란으로 기세가 꺾였던 한계를 갖고 있긴 하지만 1990년 3당 합당 반대 운동, 그리고 1996년 말 신한국당의 노동법 안기부법 날치기 처리에 대한 총파업을 비롯한 반대운동이 그것이다. 그런데 그 분출이 어떻게 종결되었던가 돌아보자.
  
  1987년에는 집권 민정당과 YS계, DJ계 야당 의원들이 8인 수임기구를 꾸려 직선제 헌법을 만들었다. 당시 투쟁을 이끌었던 범국본은 관여도 못했고 학생운동 일부에서 제헌의회 소집 그룹이 있었을 뿐, 직선제 쟁취 투쟁에는 열심이었던 국민들도 개헌 문제에 끼어들지 못한 것에 관심도 없었다. 1990년에는 3당 합당으로 인해 완전히 포위되었던 평민당이 결과적으로 그 과실을 가져갔다. 합당 이전에 4당 중의 하나에 불과했고 합당으로 가장 위기에 처했던 DJ당이 거대 민자당에 당당히 맞서는 야당으로 우뚝 서게 됐다. 1996년 겨울도 비슷하다. 김영삼 정권은 결국 물러섰지만 야당이었던 DJ 정당과 여당이던 신한국당과의 협상으로 노동자, 민중들의 요구 사항과 아주 거리가 먼 누더기 노동법이 통과됐고 집권의 길을 열수 있었다.
  
  세 경우가 다 비슷한 것이, 대중들이 나서서 정치의 장을 확장시켰지만 그 과정에 별 기여도 못했던 제도 야당이 그들을 대신해 협상에 나서서 자신들의 힘만 키웠다. 그리고 사후적으로 문제 인식은 있었지만 야당이 제 잇속만 차리는 동안 대중들은 별 불만도 없었다. 물론 그런 과정을 거쳐서 사회가 조금씩 진보하고 정권 교체도 되고 민주정부도 수립됐다.
  
  지금 한미FTA에 대한 반대 운동이 거센데 이 세 차례와 비슷하게 전개되지 않을까 싶다. 오히려 지금은 그 반대 여론의 과실을 여권이 가져갈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 다를까? 보수 진영에서 이른바 'FTA 음모론'을 제기하고 있는데 그 골자는 이렇다. 모 장관이 협상 진행과정에서 계속 문제점을 제기하고 여론의 호응을 얻어내고 결정적인 순간에 자리를 던지며 한미FTA 협상을 중지시키든지, 아니면 반대 세력의 대표주자로 나서며 정권 재창출을 노린다는 것이다.
  
  황당한 이야기긴 한데 과거 역사를 보면 이 플롯이 그다지 터무니없지만도 않다. 앞으로 또 다시 정부가 견디기 힘든 일을 대중들에게 강제해서 대중들이 직접 일어서도 근본적 변혁적 상황이 발생하게 하지 않는 이상 그 과실은 기존 정치권 내의 반대세력이 다 가져가고 대중들은 다시 실망하고…. 그러면서 조금 나아지는 면이 있겠지만 신자유주의는 더욱 강화되는 그런 역사가 반복되지 않을까 싶다.
  
  나는 비관적 인식을 갖고 있어 그런지 몰라도 이런 악순환의 고리가 내다보이는데 이 고리를 끊어낼 방도가 있을까?

  
▲ ⓒ프레시안

  최장집: 사실만 떼놓고 설명하고 분석을 할 때와 자신의 가치 방향이나 희망사항을 녹여서 분석할 때는 내용이 좀 다르지 않나? 내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만 해도 분석도 있지만 내 주장도 포함된 것이다. 현실만 분석하면 기자가 지금 말한 것처럼 비관적 모습이 보인다.
  
  사태 악순환의 되풀이…. 문제를 제기하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기존의 정치 세력이 득을 보고 그러는 과정에 사회는 조금 발전은 하긴 하고 그런 순환의 고리를 어떻게 차단할 것인가, 바로 그것이 논의의 초점이 될 것이다.
  
  차이를 갖는 정당의 조직이 중요하다. 대안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대안을 갖는 것이 쉽지 않지만 신자유주의 헤게모니에 대응하는 어떤 대안을 만드느냐가 문제다. 이는 두 가지 수준에서 봐야 할 것 같다. 현실로서의 신자유주의가 한 측면이고 신자유주의라는 독트린이 가져오는 어떤 사회적 가치관이나 정향들에 우리가 반대하는 것이 또 한 측면이다.
  
  새로운 대안은 신자유주의 현실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고 본다. 신자유주의라는 가치를 반대하느냐 찬성하느냐 수준이 아니다. 현실을 반대해버리면 경제를 운영할 수도 없기 때문에 신자유주의 현실을 수용하면서 그 부정적 효과를 어떻게 최소화 할 것이냐의 문제다. 이런 문제들이 (대안 마련에) 어려움을 주고 있다.
  
  지금이야 말로 아이디어의 중요성이 굉장히 크다. 사회가 보수화 되어 있는 것은 확실히 확인할 수 있는 변화라고 생각한다. 대학도 마찬가지고. 많은 경우 대안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지배적 헤게모니의 일방적 영향 하에 놓여서 그런 것이다. 어떻게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지고 새로운 상황에 대한 설득력 있는, 실현 가능한 대안을 제시하느냐로 첫 출발하는 아이디어가 중요하다. 우리가 그 구체적인 아이디어에 대해 대답할 만큼 뭔가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87년 '반독재' 같은 저항적 담론 없어 위기"
  
청중5: 잡지사에서 근무하고 있다. 강남 사람들은 계급의식을 갖고 있는데 강북 사람들은 계급의식이 없다는 말이 있다. 내 주변만 봐도 계층이나 이해관계를 따지자면 진보적이고 노동자 계급 중심의 생각을 가져야 할 것 같은 영세 상인이나 노동자들이 가진 생각이 너무 보수적인 경우가 많다. 정부를 비판하면서 한나라당을 대안으로 삼는 생각이 만연해 있는 것 같다.
  
  왜 정부에 대한 비판의식이 자신의 이해관계나 계층관계에 따라 시민운동 등으로 결집되지 않고 보수적인 쪽으로 분산될까? 이러니까 시민과 무관하게 시민운동이 움직인다는 말을 듣는데 이런 현상이 꼭 조중동에 속아서만은 아닐 것 같다.

  조희연: 87년 6월 항쟁은 시민사회 저항의 활성화의 한 정점이었는데 독재라는 구체적 대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소멸이 됐다. 다시 시민사회의 저항적 활성화나 급진화를 이야기 하려면 구체적 시대적 상황에 맞는 쟁점을 가져야 한다고 본다. 여러 시민사회 운동이 저항적 활성화를 촉진할 수 있는 비전과 담론을 못 만들고 있다는 것이 질의에 대한 답변의 한 중요한 단서일 것이다.
  
  또 하나의 측면은 최 선생의 제자이기도 한 후마니타스 출판사의 박상훈 주간이 말한 것인데 신자유주의는 자본의 새로운 혁명이라는 성격이 있다는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대중들을 자본의 질서, 경쟁력 강화 질서, 새로운 시장의 질서에 복속하게 만드는 혁명적 성격이 있다는 말이다. 신자유주의가 내포하는 힘이 시민사회의 비판적 활성화를 제약하고 있다.
  
  역설적으로 신자유주의의 파괴적 결과에 올바로 조응하고 고통 받는 대중들의 절망을 분석해서 나오는 어떤 적극적 대중운동을 통해서 시민운동이 재활성화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신자유주의 반대라는 공허한 이야기만이 아니라 대중투쟁과 삶의 문제로 연결시키는 우리들의 능력이 있어야 한다. 물론 시간이 좀 걸릴 것으로 본다. 정권교체가 어느 쪽으로 되느냐 문제와 관련 없이. 신자유주의 파괴적 질서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적극적 의지로 전화(轉化)되기 위해 노력해야한다. 좀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청중6: 대학생이다. 최장집 선생께서 정당정치의 강화를 줄곧 말씀하셨는데 그 방향을 잘 모르겠다. 민노당 형식의 진성정당 방향으로 생각하시는 것인지 묻고 싶다. 사실 대학생만 봐도 보수화, 무정형화되고 자기 개인 생활에만 매몰되어 있는 학생이 대부분이다. 민노당 처럼 노동이라는 부분으로 특화된다면 정당과 시민들은 더 멀어지지 않을까?

  
▲ ⓒ프레시안

  최장집: 우리나라의 노동문제가 중심적 대안을 담당할 만큼 전체적인 문제라는 생각은 안 든다. 현재 노동의 문제나 계층 문제는 과거 노동자계급으로 대표되던 계급적인 관점에서 대안을 내놓아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보편성을 갖는 중산층을 아우르는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본다. 질의 중에 '노동으로 특화되는'이라는 표현이 있었는데 '나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답하겠다. 좀 더 넓은 범위에서 진보적 자유주의나 사민주의의 넓은 대안 속에서 노동문제를 포괄하는 대안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정리=이지윤,윤태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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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석학 아탈리와 쓸쓸한 만남 | 손석춘의 편지 2006/11/06 07:42

프랑스 석학 아탈리와 쓸쓸한 만남 | 손석춘의 편지 2006/11/06 07:42

 

 

 

자크 아탈리. 프랑스 지성인을 대표하는 석학으로 꼽힙니다. 1943년 생으로 경제학과 정치학 박사입니다. 서른두 살 때, 당시 프랑스 사회당 총재였던 미테랑의 경제고문으로 발탁됩니다. 미테랑이 대통령에 당선 된 뒤에도 ‘핵심참모’로 보좌했습니다. 그의 저서는 전 세계에 27개국 말로 옮겨져 500만권이 팔려 나갔다고 합니다. 앨빈 토플러도 그를 일러 “재기와 상상력 추진력을 겸비한, 세계에서 찾아볼 수 없는 지성인”이라고 극찬했습니다.

  그가 최근 서울에 왔습니다. ‘세계지식포럼’에 참석한 아탈리와 한국방송(KBS)를 매개로 만났습니다. 한국방송의 ‘TV, 책을 말하다’에서 그의 유토피아 저서 <인간적인 길>을 두고 대담했습니다. 아탈리는 강조했습니다.

  “한 사회의 궁극적 목표는 영리추구가 아닙니다. 사회의 목표는 시민을 위한 복지의 실현입니다. 성장은 하나의 방법이죠. 성장 자체가 목표가 되어버리면, 시민의 복지는 망각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성장이라고 하는 것은 이윤의 성장만이 됩니다. <인간적인 길>이라는 책은 어떻게 유토피아를 실현할 것인지에 대한 책입니다.”

  성장과 분배를 언제나 선택의 문제로 바라보는 한국의 윤똑똑이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말입니다. 아탈리는 <인간적인 길>에서 시장의 힘이 무한으로 확장될 때 인류는 인간 자체가 상품이 되는 사회로 전락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대담에서도 아탈리는 강조했습니다.

  “오늘날 시장은 스스로의 승리에 도취해 있습니다. 계속 도취의 양태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시장은 자연을 파괴합니다. 사람을 로봇으로, 복제인간으로, 물질로, 상품으로 차츰 변화시켜가고 있습니다. 만약에 인간이 이 상황에 저항하지 않는다면 스스로 상품화가 될 위험이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무시무시한 위험입니다.”

  여기까지 아탈리와 저는 전적으로 생각이 같았습니다. 아탈리에게 한국에서 신자유주의 대안을 모색하고 있는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을 소개한 까닭입니다. 하지만 정확히 거기까지였습니다. 아탈리와 저의 생각 차이는 대화할수록 점점 더 벌어졌습니다. 상품사회를 어떻게 벗어날 것인지가 차이의 핵심이었습니다.

  아탈리는 “시간을 의미 있게 사용하는 것”이 ‘인간적인 길’의 고갱이라고 주장하더군요. 그와의 대담은 이미 방영됐습니다만, 방송시간의 제약으로 편집에서 빠진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는 아탈리의 저서들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문제점을 지적했습니다.

  유토피아를 실현하는 책이라는 아탈리 자신의 주장과 달리 상품사회를 벗어나는 방법이 지나치게 두루뭉수리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인간적인 길>에서 변화의 주체를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어디에 살고 있든 이웃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그 전부를 결집시켜야 할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이어 덧붙입니다. “모두가 같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랍니다. 그가 미래 사회의 희망을 ‘형제애’에 두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가요. 과연 “모두가 같은 사람들”이기에 모두가 ‘형제애’를 지니면 유토피아가 이뤄질까요? 공자에 대한 모욕일지 모르지만 ‘공자님 말씀만 한다’는 생각이 든 까닭입니다. 아탈리가 <인간적인 길>에서 무능한 좌파를 ‘어설픈 좌파’라고 비판한 사실이 떠올라 되물었습니다.

  “이 책에서 프랑스 좌파들을 ‘어설픈 좌파’로 비판한 당신에게 그 말이 혹 부메랑으로 돌아오지는 않았는가요?”

  아탈리는 독자들의 반응이 좋으며 자신의 제언을 많이 받아들이고 있다고 답하더군요. 하지만 저는 대담의 끝자락에서 결국 아탈리와 얼굴을 붉히고 말았습니다. 그가 <인간적인 길>에서 “핵무기를 통한 (전쟁)억제력”을 강조하고 있기에 북핵문제를 물었습니다.

  아탈리의 대답은 뜻밖이었습니다. 프랑스처럼 핵무기를 정당하게 갖게 되면 문제가 없지만 북핵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어 그는 “북한 정권의 붕괴가 북핵 문제를 해결할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며 “북한으로 들어가는 모든 물자를 통제하면 어렵지 않게 (북한 정권을) 붕괴시킬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입니다. 물었습니다.

  “아탈리 박사의 저서들을 읽으며 프랑스에서만 살아온 지식인 일반이 지니는 한계를 느꼈는데 오늘 대담을 통해 그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핵을 가질 정당성이 있는 나라 가 따로 있고 없는 나라가 따로 있다는 생각이나, 북쪽 정권을 붕괴시키는 게 당위라는 생각이 그것인데요. 그런 논리와 제국주의자들의 논리는 얼마나 다르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는 유엔 안전보상이사회 국가들이 지닌 핵무기는 정당하다면서 사뭇 결연히 말했습니다.

  “한 나라의 정권을 붕괴시킬 권리는 그 나라의 국민에게만 있다는 손 박사의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어 저에게 반문하더군요.

  “히틀러를 보세요. 그렇다면 우리가 히틀러를 패배시키지 말아야 했나요?”

  황당했지만 되물었지요.

  “그게 어떻게 같습니까? 히틀러는 다른 나라들을 침략한 전범이지 않습니까?”

  그러자 그는 엉뚱한 대답을 했습니다.

  “미국은 침략 당하지 않았지만 참전했습니다.”

  방송 녹화 중이었고 사회자의 만류로 다른 주제로 넘어갔습니다만,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미국의 이라크 침략을 정당하다고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아탈리는 끝내 답하지 않았습니다. “국제 문제에 미국과 프랑스는 대체로 견해를 같이 한다”고 말을 흐렸을 뿐입니다.

   그랬습니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좌파지성인 아탈리조차도 북미핵문제를 둘러싼 미국의 책임에 전혀 무지했습니다. 그가 ‘형제애’를 강조하며 상품사회를 벗어나자고 제의한 게 단순히 순진함에서 오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아탈리와의 만남이 쓸쓸한 추억으로 남아 있지만, 제가 유럽이 아닌 분단조국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에 새삼 빚진 마음이 들었습니다. 자크 아탈리가 차라리 고마운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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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90’ 중고등학생운동을 말한다 기획 - 청소년인권운동, 길을 묻다 ⑤]

[기획 - 청소년인권운동, 길을 묻다 ⑤] ‘8090’ 중고등학생운동을 말한다
중고등학생운동의 역사를 되짚고 정리하는 좌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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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고근예 
•일시: 2006년 9월 13일 •장소: 인권운동사랑방
•참가자
강주성 (80년대말 90년대초 KSCM(한국고등학생기독교총연맹) 지도간사, 푸른나무 무크지 기획, 푸른나무이야기모임)
구정인 (88-90 미림여고 직선제 활동, 90년대 참배움일꾼청소년회 활동)
권혜진 (87-88 석관중 직선제 활동, 흥사단 아카데미 활동)
손영호 (87-91 고등학생지도)
유윤종 (현재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전누리 (현재 민주노동당 청소년위원회)

사회 : 양돌규 (88년 벗사랑, 88-91 KSCM 활동)
정리 : 고근예

*87년부터 90년대 중반까지, 중고등학생운동의 역사를 되짚고 정리하는 좌담회를 가졌다.



양돌규) 우선 87년을 전후로 학교를 중심으로 학생들의 분위기가 어땠는지 궁금하다.

구정인) 87년에 중3이었고 상도여중에 다니고 있었다. 상도여중은 숭실대 바로 옆이었는데 87년 6월에 한 달 동안 데모를 내내 하니까 도저히 수업을 할 수 없었다. 선생님들도 수업만 들어오면 어떻게 좀 그 이야기를 해볼까 했던 것 같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상도여중에 전교조 선생님이 많았고, 이런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 같다. 한편으로 입시에 대한 부담도 컸다. 권위적이고 아주 억압적인 학교 분위기, 그리고 성적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는 분위기에 대항해 수업거부를 했던 기억도 있다.

권혜진) 87년 6월 항쟁이나 이런 과정들이 과연 고등학생운동에 영향을 미쳤는가? 그런 게 핵심인데, 분명 영향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당시 “군정종식”이라는 포스터가 있었는데, 이런 것들이 나한텐 사실 영향이 있었다. 우리가 군부독재였구나 하는 것을 알게 해주는 선동적 포스터라고 생각이 드는데, 그런 것들 보면서 참 반했었다. 대통령도 직선제 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졌고 그럼 학생회장은 누구지 이런 생각이 들었었다.

강주성) 그때 노동운동이라든지 학생운동은 명확하게 계급계층운동으로 자리를 잡았는데. 고등학생운동이 독자적으로 전체 사회에서 운동세력의 하나로서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처음 시작을 했다. 그런데 이런 고민은 이전에, “고등학생들이 어리다.” “청소년은 주변인이다,” 이런 걸 많이 배운데서 비롯된 것이다. 실제 이러한 개념규정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교육이 집단적 교육체제로 시작되면서 기인한 것이다. 그런 교육들이 내 머리 속이나 당사자들 머릿속이나 누구나 다 있었던 때다. 이러한 대상을 가지고 과연 이게 운동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이 집단이 스스로 자기 운동 논리와 운동 힘들을 조직화해서 전체 운동의 한 부분운동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한 것이다.

손영호) 87년 같은 경우는 내 기억에 두 가지였던 거 같다. 그때 가장 큰 이슈가 사회민주화라거나 운동의 폭발적 성장과 고등학생 관련해서는 그 당시 연세대에서 있었던 86년 그 의식화편지 사건이다. 그게 의외로 좀 대학 내에서는 파장이 컸다. 이유는 대상이었다. 그전까지는 의식화 대상이라고 하면 대학생, 농민, 노동자, 뭐 시민. 그렇게 생각하다가 고등학생한테 넓혀졌던 것. 그 당시 내용은 별게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런 것을 시도한 자체가 신선했다. 그걸 겪으면서, 사회민주화운동 흐름에서는 청소년들을 의식화대상을 보는 그런 경향들이 하나 있었다.
또 하나는 그 당시에 교육민주화 운동이 가장 활발할 때였다. 대중운동 전 단계에서 소규모 운동이라든지 학내 교사 중심의 그런 것들이 기억에 많다. 85년-87년 오면서 급격히 늘었던 거 같고 교육민주화운동 측면에서는 교육모순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 측면에서 교사들이 많이 고민했던 거 같고, 또 한 측면에서는 당사자인 학생들도 거기에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

권혜진) 강주성씨나 손영호씨는 당시에 지도하러 들어오신 건데, 과연 고등학생들 삶의 문제로만 들어왔는가? 고등학생을 지도하러 들어왔던 사람들이 운동의 재생산을 위한 의도는 전혀 없었던 것인지 묻고 싶다.

강주성) 있었다. 여하간 운동은 영역과 지평이 넓어야 하는 거다. 그런 점에서 고등학생들을 사회변혁의 한 세력이라고 본 거다. 그런데 그전 선배들은 고등학생들을 조기교육의 장으로 봤다. 그들의 기본적 관점은 고등학생운동을 하는 게 아니라, 활동가의 재생산구조로서의 고등학생운동, 그런 관점이 많았다. 나와 손영호 씨는 그것은 결과적인 것이고 나는 그것을 중요한 목적으로 설정한 것은 아니었다. 고등학생들이 학내민주화라거나 자기 권리, 그리고 일련의 활동을 통해 사회에 대한 의식이라거나 인권에 대한 의식이라거나, 자생적인 운동적 자생력을 갖고 독자적인 운동으로 발전하기 바랬었다.

권혜진) 그때는 대학에 진학하면 용서가 되었는데, 안 가면 노동운동을 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문화운동을 하고 싶었는데 배신자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도저히 소통이 안 되는 그런 부분들이 있었다. 그런 관점을 가진 선배들에 의해 고등학생운동이 그 자체로 발전하는 데 저해되는 부분이 있지 않았을까?

강주성) 그건 선배의 한계라기보다는 그 시기 운동적 한계였다. 그때는 모든 운동판이 그랬다. 그것으로부터 자유롭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그나마 진일보했다고 보는 건 그전에 고등학생운동한다는 고등학생을 보면, ‘대학생2’였다. 그건 고등학생운동이 아니라 대학생에게 영향을 받은 고등학생 몇몇이 그룹화되어서 운동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그 전에는 소홀하게 봤던 직선제, 학내민주화, 보충자율학습 철폐, 문제교사에 대한 항의, 이런 것들은 대학생에게 교육받은 친구들이 관심이 없는 거였는데 그런 것들을 중심으로 해서 운동을 끌어가고자 했던 것들은 일정한 발전이라고 생각한다.

서고련, 고등학생운동이 있음을 알리다

양돌규) 87년 대선 이후 구로구청에서 투표함을 가지고 농성을 하게 되는 상황에서 서고련이 결성이 되었고 명동성당에서 대통령선거가 부정선거라며 농성을 시작했다. 서고련 활동의 의의와 한계를 평가한다면?

권혜진) 사실상 서고련이 무엇을 외쳤는지가 많이 알려지거나 하진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서고련이라고 하지만 서고련에 맞는 대표성을 갖고 모인 것이라기보다는 소모임 대표들이었고 서고련이라는 명칭에 걸 맞는 조직구성은 아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하지만 그때 당시에 이러한 모형 같은 것들이 있을 수 있겠구나 하는 것, 그리고 당시 고등학생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각자 개별적으로 운동을 하던 과정에서 한곳에 모일 수 있던 최초의 시도가 아니었는가 싶다.

강주성) 연합체, 그런 간판을 걸 만한 조직 내용은 아니었고 이후 많은 친구들이 서고련이 갖는 운동 행태나 사고방식에 대해 여러 가지 비판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집단이 공식적으로 간판을 걸고 사회적으로 움직였다는 것은 고등학생운동사에서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구정인
구정인) 세상에 고등학생운동이라는 게 있다는 것을 선포한 듯했다. 물론 대학생이 지도하는 너무나 대학생스러운 그런 거, 굉장히 낯설고 굉장히 운동권 같은 느낌을 많이 줬지만 그때 고등학생운동하던 친구들에게는 '꿈의 서고련'이었다. 우리도 저런 걸 만들어야겠다는 이야기를 90년대 초반까지도 했었다. 서고련은 명동성당에 잠깐 모여서 그 이후 실체를 확인할 수 없었던 게, 여러 평가가 부정적이었던 원인인 듯했다.

양돌규) 서고련의 문제가 서고련의 한계였나 고등학생운동의 한계였나?

강주성) 둘 다다. 서고련의 한계란 게 전체 운동의 한계가 나타나는 건데 고등학생운동이 그런 간판을 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대학생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손영호) 87년 대학로에서 가졌던 학생의 날 행사와 홍대에서 한 자살학생 위령제가 기억에 남는데, 고등학생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동료들과 함께 해결해 나가고 만들어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서고련에 대한 기억이 많진 않은데 명동성당이라는 당시 상징적인 시위장소에 고등학생까지 왔구나하는 정도의 생각이었다.

왼쪽부터 양돌규, 유윤종
양돌규) 최근에 서고련 활동했던 사람들은 만났을 때 하는 이야기가 서고련 깨지고 나서 88년초에 어디로 갈 것이냐, 서고련 맴버들 안에서 논란이 있었다고 한다. 서고련을 가져가자는 쪽과 서고련을 가져갈 필요 없이 학교로 들어가자는 쪽이었다고 하는데, 계속 서고련을 이어가자는 쪽이 아까 말한 88년 7월 17일 자살학생 위령제를 주최한 그쪽이었다. 이런 것을 보면 어떤 면에서 서고련이 전과 같은 선도적인 정치투쟁에서 방향을 선회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대중운동의 길목

유윤종) “대통령부터 반장까지 직선제로..”라는 구호도 있었고, 당시는 학생회 직선제 요구가 굉장히 대중적이었던 것으로 아는데, 직선제 학생회에 대해 학생들의 호응은 어떠했나? 요즘은 학생회 법제화를 하자고 해도 학생들 대다수가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는 분위기다. “맞는 말이야” 싶어 하면서도 적극적으로 나서는 분위기는 아니다. 학생회 직선제는 과거엔 어땠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그리고 간선제랑 직선제랑 차이가 궁극적으로 무엇이었는가? 당시 직선제 학생회가 제기된 게 그냥 대통령도 직선제니까 우리도 하자고 제기되었던 것인가 아니면 정말로 직선제가 필요하다고 느껴서 제기가 되었는가?

구정인) 딱히 직선제라기보다는 일단 대학교도 그렇고 80년대 중반에 학생회가 학도호국단에서 바뀌면서 학생회에 대한 의미가 부상된 것이 고등학교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일단 직선제를 하면 유세를 해야 하고 공약도 있어야 한다. 당시 학교에서는 써클도 못 만들었고 학생들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는데 직선제를 하면서 유세를 하고 교문 앞에서 인사를 하고, 어떤 학생회를 만들겠습니다, 공약을 내걸고 유세하는 것 자체가 큰 파장이었다. 대통령 선거의 영향으로 직선제와 간선제를 인식하는 건 민주냐 반민주냐의 느낌이 강했다.

권혜진) 학생회 직선제는 제일 싸우기 좋은 명분이었던 것 같고 당위적인 것이었다. 지금에 와서 직선제 학생회가 어떤 의의를 갖느냐고 평가하는 것은 최근에 주장되는 학생회 법제화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보는데 실제 간선제 학생회장과 직선제 학생회장의 권한 자이는 별로 없다. 그런데 지금 만약 학생회 법제화를 통해 학생회가 예산권을 갖고 운영위원회 참여해서 의견을 발표할 수 있고 권한을 가져서 공약이 헛공약이 아니라 실현 가능한 공약들이라고 한다면, 다시 한 번 민주적 학생회 건설이라는 것이 이루어질 수 있을 듯하다. 사실상 우리는 직선제는 이뤄냈지만 내용은 이뤄내지 못했던 면이 있다.

오른쪽부터 손영호, 강주성, 권혜진


강주성) 개별 학교의 상황에 따라 많이 다를 수 있을 거 같다. 어쨌든 간에 88년도에 직선제 공청회를 KSCM에서 했는데 그때도 학생들이 많이 왔다. 그 이후에 직선제 학생회가 실제 이뤄진 학교가 상당히 많았다. 그런 것들은 어쨌든 일단 고등학생운동이 운동으로서, 대중운동으로서 발전해 나가는 데 있어서, 대중들의 권리의식들을 함양하고 하는 데 중요한 요소였다.

손영호) 현재 직선제가 별로 효용성이 없다는 건 권익을 위한 활동들이 활발하지 않아서 나오는 이야기 같다. 사실 당시 직선제가 이슈화된 것은 뭔가 주장하고 권리를 찾으려고 보니까 대표가 필요했고 대표를 어떻게 만들 것이냐 생각하게 된 것이다.

구정인) 학생회 법제화를 갖추는 것과 학생회를 잘 운영할 수 있는 주체들이 준비되어 있는가의 문제와는 좀 상관없는 별개의 문제라 생각한다. 그냥 자기의 이해를 대변할 수 있는 대표가 있어야 하고 그 사람은 당연히 존중 받아야 하고, 그 과정에서 결국 그런 민주적인 훈련 과정에서 주체들을 생성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유윤종) 나는 학교 다닐 때 생각을 좀 다르게 했다. 소모임에서 학생회장과 접촉을 해서 이야기를 해보니까 이 학생이 꼴통이었다. 그럼 우리가 학생회보다 학생 여론을 더 받아버리겠다, 그러면서 전단지 뿌리고 학생회보다 우리가 힘 센 조직이 되면 되는 거 아니냐. 좀 뭐랄까, 꼭 우리가 제도적 대표성을 가질 필요가 있느냐, 지지라는 것은 투표해서 뽑힌 것과는 상관없다, 지지는 그때그때 받아내면 된다는 식으로 생각을 했다.

양돌규) 시간의 흐름 만큼이나 학생회나 운동의 모델에 대한 생각은 좀 다른 거 같다. 대의나 대표성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조직화를 역동적으로 해나가는, 운동과 흐름들을 중심으로 조직화의 상들을 가져 나가는 것 역시도 괜찮은 게 여기는데, 과거라면 그런 상상이 잘 안 되었지만 그게 요즘의 그것, 몸으로 짝짝 달라붙는 조직화의 상이 아닐까 한다.

구정인) 시대의 변화라고 생각한다. 처음 서고련 만든 것도, 당시 최고 조직은 전대협이었다. 학생회를 만들어야겠다는 것은 아마 그런 상이 있지 않나. 학생회라고 하면 당연히 생각하는 게 학생들 요구를 대변하는 훌륭한 조직이라는 상이었다. 지금은 대학 학생회도 전혀 그렇지 않다. 지금은 모든 학생회가 학생의 의견을 대변하는 훌륭한 조직이라는 개념이 아니다. 그때는 모든 운동하는 사람들이 학생회를 많이 해서 그런 상이 나왔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학생회에 과도하게 당시만큼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 같다.

89년 전교조 투쟁

양돌규) 89년에 이제 그야말로 기록적인 47만여 명 학생들이 전교조 사수를 위해 싸움을 대중적으로 벌였다. 그 당시 분위기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

구정인) 88년도 말에 학교 소모임을 처음 만들어 직선제 투쟁을 시작했고, 동시에 전교조 선생님 사수투쟁도 함께 했다. 직선제 투표가 89년 7월이었는데 전교조가 출범하고 탄압받던 때라서 학급에 유세를 들어가면 나오는 질문이 ‘선생님 해직되면 데모를 할 거냐 안 할 거냐’가 핵심이었다. 민주파냐 아니냐를 구분하는 식이었다.

양돌규) 학교가 입시교육에 찌든 상황에서 전교조의 출범이 학생들에게는 다른 의미를 가졌던 것 같다. 현실을 바꿀 수 있는 기회로 여긴 것은 운동하는 고등학생만의 생각이 아니었을 것 같다.

구정인) 전교조에서 말하는 '참교육'이 얼마나 눈물 나게 다가왔는지 모른다. 콩나물이 아니라 콩나무를 키우는 교육을 하고 싶다라고 했던 구호가 기억난다. 사회적으로 노동조합이라고 지탄도 받았지만 전교조가 학생들한테 지지를 많이 받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

강주성) 학생들의 그런 지지와 참교육에 대한 호응, 이런 것은 전교조가 간판을 달고 한국사회에서 할 수 있었던 아주 중요한 요소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걸 운동적으로 소화하지 못했다는 건 전교조가 가지고 있는 한계다.

손영호) 교육이라는 것도 현장을 놓고 보면 어쨌든 교사하고 학생하고 학부모가 해결해야할 목표가 있다. 그 목표를 학교 단위의 모순들이 첨예화되었을 때는 오히려 대처하기가 좋았다. 분명히 학생들과 교사들도 동일한 입장, 동일한 현상을 갖고 논할 수 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학생들은 교육의 주체로서 진정 인정한다면 권리나 그런 것에 대해 더 자각을 했어야 하는데, 학생들의 자율적 움직임이나 권리 확보 이런 것들이 중요하다는 것을 간과한 것은 있다.

90년대 초반 고등학생운동의 숨고르기

양돌규) 91년으로 넘어간다. 91년 공안정국 후 고등학생운동의 하강, 소멸. 이렇게 이야기하면 좀 그렇지만 92년 93년 이때 분위기를 이야기해 보자.

권혜진
권혜진) 개괄적으로 90년대 초반의 운동을 정의하자면 90년대 아이들을 가지고 80년대 방식으로 운동했다. 그래서 하향곡선을 그렸던 것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90년대 초반부터 또 다른 고등학생운동의 흐름이 그 이면에 자리잡고 있었지 않았나 싶다. 학생복지회 같은, 그런 학생 생활에 관련된 문제, 문화 이런 것들에 대한 제기가 조금씩 살아나면서 한바퀴 바뀌는 과도기적 상황이 아니었는가.

양돌규) 세대의 변화라고 한다면 91년 5월 투쟁 이후 92년이 되었을 때 고등학생운동의 바뀐 분위기라는 것도 한편 생각해보면 89년 전교조 사수 투쟁을 경험한 학년이 모두 졸업한 상황이라고 하는 것도 일정한 영향을 끼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든다.

권혜진) 그런 요인도 분명 있겠지만 사회전체가 바뀌는 흐름도 무시할 순 없다. 결국 89년 전교조를 겪었던 그 세대들이 마지막 불꽃을 피웠던 91년도 그 열정과 감동 그리고 패배. 그러면서 사실 그것을 더 연장시키고 싶고, 그 열정들을 더 다듬어서 운동을 활발하게 하고 싶던 게 오히려 더 발목을 잡는 시기였다. 실질적으로 그때 당시 고등학생운동을 지도하던 사람들이 그걸 겪고 나서 이제 고등학생운동에 전망이 없다고 다 떠나버리는 시기도 그때부터였다.

강주성
강주성) 그것은 기존의 운동이 갖고 있는 본질적인 한계였다. 운동을 밑에서부터 가져 온 것이 아니라 멀리서부터 가져 왔기 때문이다. 실제 사람이 변화가 되는 과정도 의식이 변화가 되면 생활도 변화가 될 것이라고 봤던 게 많은데, 오히려 지금에 보면 운동이라는 게 삶에 천착해서 삶의 모든 부분에서 변화가 되고 그 변화되는 과정에서 생각들이 변화가 되고 오히려 이러한 과정에서 더 큰 집단으로 발전이 되고 대중운동도 된다고 본다. 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그때 많은 선배나 사회운동했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대중들 속에서 대중들이 요구하는 바에 의한 대중운동을 한다고 했지만 실제적으로는 대중운동을 거의 한 사람들이 없었다. 그래서 의식이 무너지고 이념이 무너지면서 모든 운동권이 쇠퇴하는 과정에서 고등학생운동도 역시 쇠퇴한 것이다.

권혜진) 학교에서 사실은 중요하게 기반을 갖고 있어야 하는 게 학내 소모임인데, 소모임 활동이란 것도 졸업하면 사라지는 것이다.

강주성) 제일 큰 문제는 사실 학교별로 재생산 구조가 없던 거다. 너무 그 운동의 경험이 짧고 내용도 없는 상황에서 선배들이 떠나가면 선배들을 대체할 수 있는 후배 리더 그룹들이 나와야 하는데 그런 구조가 없었다.

구정인) 사실 그때 운동이 쇠퇴한 결정적 원인은 89년도 대중적 운동이 많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탄압이 있었다는 것이다. 전교조 교사들 해직 후, 집중적으로 학생들 징계가 정말 많았었고 동아리실이며 동아리를 아예 없앴다. 우리는 이런 징계를 철회시킬 수 없었고 또 무기력했다. 그래도 이후에 90년, 91년에는 어쨌든 학교활동을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했다. 전교조는 계기였던 것 같다. 계기를 통해서 그냥 일시적인 분위기가 좋았던 것 같고 오히려 그게 조직화되어 있거나 의식적인 활동으로, 운동으로 정립되지 못하니까 결국 버티지 못하는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현실에 발 딛은 청소년 운동으로

권혜진) 결국은 자발적이고 자기 현장의 문제를 고민하지 않으면 운동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자기 생활에 기반하지 않은 운동은 운동이 아니다. 예를 들면 고등학생이 통일운동을 해야 되느냐 말아야 되느냐 이런 게 있었다. 현재도 복지의 문제나 삶의 질 문제로 다가서야지 그렇지 않으면 고등학생운동이 유지되기 힘들다고 본다. 결국 자기 문제로 출발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강주성) 모든 개인이나 집단이나 경험하고 실천하는 속에서 의식과 실천의 수준이 죽 높아질 거다. 그런데 이게 어디까지 높아질 것인가. 자연스러운 과정은 높아지는 게 아니라 높아지다가 평면으로 가는 것이다. 이거는 운동이 아니다. 운동은 이렇게 평면으로 가는 과정에서 계기가 목적의식적으로 주어져서 터닝포인트로 전화가 되어야 한다. 질적 전화. 그것이 운동이다. 그런데 뭐, 복지나 이런 어떤 현장의 요구를 중심으로 하는 건 맞다. 운동으로서 맞다. 그게 기본이라고 본다. 과연 그럼 언제 통일 운동을 할 것인가? 발전하다가 어떤 적당한 기점에서, 잘 보고 통일운동을 해야 하는 것이다. 안 그러면 자기 계급의 이해에 그냥 빠져서 다른 모든 운동들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는, 지금과 같은... 노동조합 운동이 환경운동에 관심이 있나? 노동조합 운동이 의료운동에 관심 있나? 그렇게 되었을 때 집단주의, 계급 이기주의적 운동이 되는 거다. 그런 면에서 고등학생들도 이후에 통일운동도 해야 되는데 문제는 지금의 수준이 그렇게 되지 않기 때문에 일단 기본과 현실에 천착해서 운동하는 것은 맞다.

구정인) 정리를 하자면 그 시대가 확실히 남긴 게 있다면 세상을 바꾸는데도 청소년이 사회적 역할을 하게 되면 그것이 사회를 발전시키는 데 더 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신념이다. 그리고 청소년도 행복할 권리가 있다. 청소년 시기에도 참고 기다리는 게 아니라 행복하고 자기 주장을 하고 자기 삶을 개척할 권리가 있다고 하는 확고한 신념을 갖게 된 게 그때 운동의 힘이고 지금까지 남아 활동하게 하는 동력이기도 하다.

손영호) 학생으로서 인권이 있다. 행복할 권리가 있다. 이게 가장 중요한, 쟁취해야 할 목표이다. 나도 아들이 있고 자라는 애들이 있지만, '왜 학생은 20년 동안 불행해야 해?' 이것이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다. 어떻게 보면 그것이 학벌사회를 위한 희생이고, 사회적으로 계급을 무리 없이 편제하기 위한 교묘한 술책이기도 한데, 그 문제를 어떻게 극복하는 것이 가장 본질적인 이슈이다. 학생으로서의, 청소년으로서의 인권, 행복할 권리. 우리는 미래를 존재하는 인내해야 할 유보해야 할 삶이 아니다. 이거를 가장 중심적으로 봐야 할 거 같다.
인권오름 제 22 호 [입력] 2006년09월20일 3:4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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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교내문제 기고로 재임용 탈락한 이명원 서울디지털대 교수

“칼럼니스트에게 글 쓰지 말라니…”

[인터뷰] 교내문제 기고로 재임용 탈락한 이명원 서울디지털대 교수

 

 

2006년 08월 30일 (수) 18:31:35   김상만 기자 ( hermes@mediatoday.co.kr)

이해가 되지 않았다. 최근 학교로부터 재임용 해지 통보를 받은 이명원 서울디지털대 교수(문예창작학부 학장·사진)는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했지만 명쾌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학생들의 강의평가 점수도 좋았고, 1년 동안 논문 5편에 연구보고서 1편, 1권의 저서까지 냈다. 1년에 논문 1편인 재임용 기준을 상회하는 실적이다. 이런 그에게 학교가 준 답은 ‘평소 행동의 부적절함’과 ‘일간지 등에 외부기고를 실어 학교명예를 훼손했다’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는 지난 7월 교육부의 ‘원격대학 제도개선 계획’ 발표 앞뒤로 정기적으로 글을 기고하고 있는 한겨레와 시민기자로 활동하고 있는 시민의신문에 ‘총장 불신임’ 등으로 분쟁을 겪고 있는 학내 문제를 비판한 글을 썼던 일이 기억났다.

두 신문에서 자신이 재직하고 있는 학교의 교직원이 농성 중인 학생을 폭행한 사건을 고발했고, 교비횡령과 유용사실이 드러난 2005년 교육인적자원부 원격대학 감사 결과를 근거로 엄격한 관리감독을 주장했고, 동료 교수의 재임용 탈락의 부당함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솔직히 미운 털이 박힐 만도 했다. 이제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이 교수가 교수직을 박탈당할 위기에 처한 건 침묵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교수는 “건강한 대학이라면 누구라도 자유롭게 학내 문제를 얘기하고 잘못된 것은 개선하면 된다”며 “재임용을 내세워 비판적인 교수를 잘라내고 칼럼니스트에게 글을 쓰지 말라는 것은 대학의 정신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라고 꼬집었 다.

이 교수는 “동료 오문성 교수(재경회계학부)도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로 재임용 해지를 당했다”고 덧붙였다. 오 교수가 교수협의회 부회장으로 활동하면서 학교에 비판적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오 교수는 재판에서 승소했지만 학교에서 강의를 내주지 않는 등 불이익을 받고 있다.

그는 이번 재임용 해지결정이 부당하다며 법원에 낸 소송에 희망을 걸고 있다. 9월5일이 첫 공판이다. 이 소송에서 승소하면 학교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등을 제기할 계획이다. 이 교수는 “원격대학의 경우 고등교육법에 근거한 제도적 견제와 감시장치가 전무해 그 피해가 교수와 학생들에게 고스란히 돌아오는 구조”라며 “이런 폐해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이번 국회에서 원격대학도 고등교육법에 의한 관리, 감독을 받도록 체계를 고쳐야 한다”고 밝혔다.

 

최초입력 : 2006-08-30 18:3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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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동 시인이여 힘을 내시라-민주노총 대의원동지들의 대오각성을 촉구한다

세상을 거꾸로 돌리려는 자들에게 경고함
-송경동 시인이여 힘을 내시라-민주노총 대의원동지들의 대오각성을 촉구한다-
이해삼 
 
세상을 거꾸로 돌리려는 자들에게 경고함

민족문학작가회의 소속 송경동 시인(당원)에게 경찰로부터 출두요구서가 날아왔습니다.

지난 8월 4일 포항에서 있었던 포스코 건설노조 하중근 씨 사망에 항의하는 민주노총결의대회에 참석해서 아래와 같은 시를 마무리 집회에서 낭송했다는 이유입니다.
낭송된 장소는 바로 하중근 열사가 폭력 경찰에 의해 죽임을 당한 곳이었습니다.

하중근 열사는 뒷머리에 3곳의 상처가 있고 얼마나 세게 맞았으면 앞머리로 밀려와서 뇌출혈 증상으로 사망한 것이 직접적 원인입니다.
갈비뼈가 두개가 부러졌고 온몸이 피멍으로 짓이겨졌습니다.

이런 야만적 폭력앞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포항건설노조의 투쟁을 승리한다는 것, 어쩌면 과거로 세상을 돌리려는 자들과의 싸움입니다.

이라크 양민을 학살하고 미제의 꼬붕인 이스라엘을 시켜 중동전쟁을 획책하고 무기 팔아 먹는 부시정권이나 삼성의 국민소득 이만불 이데올로기에 젖어 개혁나부랑이 거둬 치우고 제국의 논리대로 전 민중 다 죽이고 사회양극화 확대하는 한미fta 관철하려는 매판 정권과 관료들이 그들입니다.

재벌독재의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노무현이 집권하고 있다는 것 사실이 아닙니다.
쓸모없는 대통령입니다. 이제 레임덕이 아니라 있으나마나한 대통령입니다.
아니, 국민의 세금이 아까운 직에 있는 자입니다.

자본독재의 시대, 재벌공화국의 시대 국제투기자본의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노동부, 행정자치부를 비롯한 모든 관료들은 헌법상의 노동3권조차 지키지 않는 것으로 가고 있습니다.
비정규 날치기 법안은 법사위에 계류중입니다.
모든 정규직 노동자를 비정규직으로 하향 평준화 한다는 생각으로 이상수 노동부 장관은 마치 비정규직 노동자를 보호할 수 있는 양 언급하면서 전체 국회의원에게 서한을 보낸 바 있습니다.
공무원의 노동3권은 커녕 노동2권 조차 용납할 수 없다고 탄압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문화일보의 모기자는 경남도 지사인 42세 김태호가 소신있는 태도로 불법 공무원노조를 일관되게 정리해 나가고 있다고 칭찬을 다하고 있습니다.
조중동은 공무원노조와 전국교직원노조을 죽이려고 칼날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비상한 시기입니다.

민주노총은 최은민부위원장이 열사대책위 활동으로 구속되었고 조준호 위원장도 포항 경찰서로 부터 출두요구서를 3차례 이상 받고 있고 포항건설노조를 지원하는 주변의 동지들에게 까지 10여명 더 체포영장이 발부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아에 이 기회에 민주노조의 씨를 말리는 의도가 엿보입니다.

정권과 자본에 순응하는 노조가 참다운 노조라고 그들은 생각합니다.
김근태씨가 파시즘의 부활을 이야기 했지만 그가 속한 정권이 노동3권조차 용납하지 않으면서 그렇게 파시즘으로 가고 있습니다.

우리 내부에 조합원들의 실리추구 경향이 그렇게 상황을 만든다고 이야기 하는 분도 있습니다. 연대도 안되고 간부들이 민주노총 대대 가는 일보다 사소한 신변의 일이 우선순위에 놓이게 되는 지경까지 와 있다고도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실리도 일정한 힘이 없다면 가능하지 않습니다.
내년 복수노조 시대를 맞이 하여 순응하는 노조에게 더 많은 떡고물이 돌아 가는 양 정세를 조성해 놓고 2007년을 맞아하려고 자본은 총체적인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한가하게 앉아서 난국을 돌파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송경동의 양심적인 시 한편이 우리의 갈길을 알려 줍니다.
포항건설노조의 싸움의 중요함을 알려 줍니다.
하중근 열사를 가슴에 묻지 맙시다. 아직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없는데 ....

전체 노동진영의 힘을 집중해야 합니다.
민주노총의 대대가 정족수 부족으로 열리지 못했다는 것은 정말 치용입니다.
지난 시절 피와 땀과 눈물이 묻어 있고 민주노조와 민주노총이 여기까지 오는데 수많은 열사가 돌아 가신 것을 생각하면 정말 민주노총의 치욕입니다.

민주노조운동의 역사상 가장 중대한 기로입니다.

만주노총 대의원 동지 여러분 그리고 민주노총 조합원 여러분
그리고 특히 민주노총에서 불철주야 노력하시는 당원 동지여러분!!

진정어린 마음으로 호소합니다.

민주노조운동의 기강을 다시 세웁시다.
산별노조 전환 투표를 성공시켰듯이 정규직과 비정규직, 원청과 하청 노동자의 벽을 허물고 드넓은 노동의 바다에 함께 합시다.
정규직 우리 처지가 조금 나아졌다고 생각하십니까?
마음 한구석 편치 못한 마음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 않습니까?

노동운동의 진정성은 사회적 휴머니즘의 기초로 부터 시작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정파 분파는 이 움직임에 모범이어야지 다 죽는데 소속의 이익이란 없습니다.

동지들에게 송경동 시인의 시를 드립니다.

힘내시기 바랍니다.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라 - 故 하중근 동지 영전에 바침

송경동

그간 우리는
전국팔도를 떠돌며
너희의 집을 만들어주었다
너희들의 더럽혀진 영혼을 버릴 하수구를 만들어주었고
학교와 공장과 교회를 만들어주었다

너희는 우리가 만들어준 배관을 타고 앉아서야
먹고 싸고 따뜻할 수 있었다
너희는 우리가 연결해준 전선을 통해서야
말하고 듣고 소통할 수 있었다
우리는 너희를 위해 결코 무너지지 않을
세상의 모든 천장과 벽과
계단과 다리를 놓아주었다
아무말없이, 불평도 없이

하지만 너희는 그런 우리에게
착취와 모멸만을 주었다
불법다단계 하청인생
일용할 양식조차 구하지 못하던
일용공의 날들
우리의 밥은 늘 흙먼지 쇳가루 땡볕에 섞여졌고
우리들의 국은 늘 새벽진흙탕이거나 공업용기름끼였다

우리는 사회적으로도 늘 개차반
쓰미끼리1) 인생이었다
나중에 나중에 줘도 되는 근로기준법의 마지막 사각지대
못나고 공부 못하면 저렇게 되는 불량표지판
말 안 듣고 버릇없는 것들이 가는 인생 종착역
죽지못해 사는 인생이 우리의 자리였다

그런 우리의 요구는 소박했다
옷 갈아입을 곳이라도 있다면
점심시간 몸 누일 곳이라도 있다면
일주일에 하루만이라도 쉴 수 있다면
일한 돈 떼이지 않을 약속이라도 받을 수 있다면
원청사용자들과 이야기라도 해볼 수 있다면
너희의 노예로 더 열심히 일하고
충성하겠다는 약속이었다

하지만 너희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못배우고 더러운 노가다들이 감히
신성한 우리 자본의 왕국 포스코를 점거하다니
밀어버려, 끌어내, 목줄을 짤라 버려
58명 구속에 가담자 전원 사법처리
그리고 시범케이스로
하중근 동지의 머리를 깨부셔놓았다

그래서 우리도 이젠 다르게 생각한다
전면전을 선포한 너희에게 맞서
우리가 그간 해왔던 건설과는
전혀 다른 건설을 꿈꾼다
더 이상 너희의 재생산에 봉사하는 건설이 아니라
일하지 않는 너희의 비정상적인 비만을 위한 건설이 아니라
진정한 사회의 주인으로 우리가 서는
새로운 세계를 설계한다

그것은 더 이상
우리가 너희의 하청이 아니라
우리가 너희의 원청이 되는 투쟁이다
우리의 노동에 빌붙어 과실만을 따먹는
너희 인간거머리들, 인간기생충들을 박멸하는 투쟁
진정한 사회의 주인
건설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명백히 하는 투쟁이다

비켜라
비키지 않으면
이 망치로 너희들의 썩고 굳은 머리를 깨부술 것이다
물러서라
물러서지 않으면
이 그라인더로 너희의 이름을
역사의 페이지에서 영원히 지워버리고 말 것이다
사죄하라
사죄하지 않으면
우리 가슴에 박힌 대못을 빼내
너희의 정수리를 뚫어놓을 것이다
이 성스런 건설노동자의 투쟁 앞에
돌이켜라. 썩은 시대여
항복하라. 낡은 시대여

 
 
 
2006-08-28 05:4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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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고교생운동’ 처음으로 주목한 양돌규씨

“한총련의 씨앗은 고등학생 운동”
고졸뒤 노동운동하다 늦깍이 공부
고교운동 경험 20여명 면접·구술
91년 5월 투쟁 중추적 역할 밝혀

안수찬 기자

‘고교생운동’ 처음으로 주목한 양돌규씨

격동의 근현대사를 거친 한국에서 ‘운동사’가 차지하는 학문적 위치는 작지 않다. 여러 학자들의 노력으로 이제 어지간한 역사적 사건 대부분이 학문적 분석·검토를 거쳤다. 그러나 좀체 ‘학문적 시민권’을 얻지 못하는 운동사의 한 영역이 있다. 고등학생 운동이다.

양돌규 성공회대 석사(사회학)는 지난 7월 학위논문으로 ‘민주주의 이행기 고등학생운동의 전개과정과 성격에 관한 연구’를 썼다. 박사도 아닌 석사학위논문이지만, 그 의미는 허투루 지나칠 게 아니다. 선행연구가 사실상 전무했던 분야를 개척했기 때문이다. 단행본이나 자료집의 형태로 청소년의 일탈·저항, 전교조 지지운동 등을 거론한 경우는 있었지만, 이 시기 고등학생들의 조직적·의식적 운동을 집중적으로 분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논문에서 그는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중반에 이르는 시기의 전국적 고등학생 운동의 실상을 조사·분석했다. 서울·부산·광주·대구 등에서 ‘고등학생협의회’ 등 크고 작은 고등학생 모임들이 만들어져 민주화 운동의 한 구석자리를 점했던 시기다. 양씨는 전국의 고등학생 운동 경험자 20여명을 만나 구술을 듣고 관련 자료를 섭렵하면서 논문을 썼다.

그는 <한겨레> 인터뷰에서 “당시 활동가들을 만나보니, 각자의 응어리가 너무 커서 그때의 기억을 돌이키지 않으려는 경우가 많았다”며 “구술을 녹취하는 과정이 자연스레 그들의 응어리를 풀어주는 역할도 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 응어리는 무엇일까. “1991년 5월 투쟁을 보세요. 당시 민주주의를 외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6명의 학생 가운데 3명이 고등학생 운동 출신자고 1명은 고등학생이었습니다. 제가 보기엔 당시 투쟁의 핵심은 ‘고등학생 운동 세대’가 죽음으로 항거했던 데 있습니다.”

그는 한총련을 고등학생운동 세대와 연결시켜 해석했다. “조직적 고등학생운동의 세례를 받은 친구들이 대학에 입학하던 시기와 그 세대의 마지막이 대학을 졸업하는 시기가 한총련의 탄생 및 쇠퇴와 일치합니다. 이 세대의 순환과 학생운동·민주화운동의 순환이 맞물렸던 것이죠.”

1973년 출생인 양씨 스스로가 고등학생운동 세대다. “아버지는 <동아일보> 해직기자 출신이고 어머니는 노동소설을 쓰시는 분이라 자연스레 ‘물들었다’”며 웃는 그는 “함께 운동했던 친구들 절반이 그랬던 것처럼” 고교 졸업 직후 울산 지역의 공장에 들어가 노동자 생활을 시작했다. “너무 힘들어서” 1년여만에 공장을 나온 그는 그제야 대학을 들어갔고 지금껏 뒤늦은 공부와 시민사회단체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사회과학 출판사, 전태일기념사업회 등에서 일했던 그는 현재 민주노총 정책실에서 ‘민주노총 10년사’ 작업을 돕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앞으로의 학문적 목표를 궁리중이다.

그는 한국 노동운동사를 본격적으로 공부해나갈 생각이지만, 고등학생 운동에 대한 관심의 끈도 놓지 않을 결심이다. 양씨는 “조직적 고등학생 운동 세대의 구술을 더 수집하는 동시에, 민주화 담론이 아닌 인권담론을 중심으로 삼고 있는 90년대 후반 이후의 청소년인권운동에 대해서도 계속 연구하겠다”고 말했다.

글 안수찬, 사진 이종근 기자 ahn@hani.co.kr



» 1990년 6월24일 경북대 소강당에서 고등학생, 교사, 대학생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김수경 열사 추모결의대회. 당시 경화여고 3학년이었던 김수경은 학생회 탄압 등에 항의하며 90년 6월5일 영남대 인문관 옥상에서 투신 자살했다. 같은해 9월에는 충북 충주고 2학년 심광보, 다음해 5월에는 전남 보성고 3학년 김철수가 각각 교육민주화 등을 주장하며 투신·분신 자살했다. 사진제공 양돌규·김수경열사추모사업회.

기사등록 : 2006-08-25 오후 08:52:39 기사수정 : 2006-08-25 오후 09: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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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혜규]폐가, 시간에 갇힌 기억의 공간

폐가, 시간에 갇힌 기억의 공간

 

인천 부둣가 작가의 외할머니집
무너진 천장·벗겨진 벽 그대로
“고민하는 관객과 교감하고파“

 
 
한겨레 노형석 기자
 
 
유럽파 설치작가 양혜규씨 첫 개인전 ‘사동 30번지’

젊은 설치작가 양혜규(35·왼쪽)씨의 전시장은 곳곳이 부서지고 무너진 옛 왜식 집이다. 삭을 대로 삭은 천장의 나무 이음매 곳곳에 구멍이 뚫려 햇살이 들어온다. 벽에는 벗겨진 벽지가 너덜거렸다. 먼지와 폐자재가 깔린 다다미 방들의 폐허 같은 바닥 위에 방울등과 사이키델릭 조명등이 깜빡거린다.

유럽에서 호평받으며 활동해온 이 유학파 작가의 첫 국내 개인전은 항도 인천의 부둣가 부근 폐가에서 열리고 있다. 지난 19일 시작한 전시 ‘사동 30번지’는 으레 하는 개막 행사도 없었다. 서울에서 1시간 이상 전철을 타고 동인천역에 내린 뒤 물어물어 사동 주택가에 파묻힌 폐가를 찾은 관객들은 좁은 실내에서 또다른 시간을 경험하게 된다. 이곳을 찾느라 발품 들였던 일상의 시간들이 폐가 속에서 숨쉬어온 또다른 심연의 시간 속으로 잠기는 듯한 환각이다.


 

“이 폐가는 고인이 되신 외할머니가 8년 전까지 살던 집입니다. 어릴 적 크고 풍성하게 보였던 이 집이 이제는 왜소하게 보이더군요. 신기하지 않아요. 시간 속에서 기억이 변질된 거죠. 그 신비스런 변화를 머금은 공간 속에서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시간의 흐름과 기억의 굴절을 이야기해보려고 한 겁니다. ”

작가는 지난겨울 유년의 기억이 깃든 폐가를 답사한 뒤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관계를 담은 일종의 판타지아를 만들겠다고 구상했다. ‘새로 만드는 작업이 아니라 산더미처럼 쌓인 폐가 안팎의 쓰레기를 치워내면서 만들었다’는 이 역설적 설치작업은 그래서 이젠 살 수 없는 곳이 되어버린 폐가 곳곳에 넘실거리는 결핍을 조용히 일깨워준다.

부서지고 벗겨진 벽들로 이어지는 폐가의 이미지는 거칠고 남루하지만, 조형물과 조명등의 배치는 뜻밖에도 매우 섬세하고 치밀하다. 낮게 내려온 백열등이 비추는 문간방 바닥의 스프레이 칠한 나뭇조각들, 마루와 건넌방에 흩어진 기하학적 모양의 색종이 조형물과 방울등, 사물을 정지사진처럼 비추는 스트로보 조명, 관객들의 모습을 비춰주는 거울 등이 작가의 의도를 연출하는 적절한 소품이 되고 있다.



특히 눈에 띄는 건 자칫 진부한 향수로 덧입혀질 수 있는 집에 얽힌 구체적인 사연을 일부러 비워내고, 다분히 추상화한 조형물들을 배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버린 옷장과 소파에 천으로 감싼 건조대를 놓은 안방, 숫자가 뒤죽박죽된 시계, 거울 등이 등장하는 마루와 건넌방 등의 모습들을 통해 작가는 시간의 질곡을 피할 수 없는 인간존재와 공간의 함수관계를 차분하게 되짚어 보고 있다.

일상 사물, 현상의 뒤안에 도사린 보이지 않는 구조와 힘들 사이의 간극은 작가 양씨가 유학시절부터 패션, 음성 등의 다른 영역을 아우른 개념적 설치작업에서 일관되게 추구했던 관심사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보이지 않는 소우주를 지니고 있으며, 시간은 바로 그들 소우주들을 은연중 소통시키는 매개체라는 사실을 작가는 폐가란 매체를 빌려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네덜란드에서 같이 활동한 기획자 김현진씨와 의기투합한 이 전시를 두고 작가는 “관객들이 쇼핑하듯 작품 이미지들을 소비하는 전시장 대신, 발품 들이더라도 고민하고 숙고하는 관객들과 교감하는 전시를 하고 싶었다”고 털어놓았다.

인천/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기사등록 : 2006-08-22 오후 07:35:28 기사수정 : 2006-08-22 오후 07:4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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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서 고교생운동 과정 분석(성공회대 양돌규씨) / 경남도민일보

 

“학교 안바뀌면 고교생운동 부활”

성공회대 사회학과 양돌규씨, 논문서 고교생운동 과정 분석

 

김성찬 기자 kim@idomin.com

 

지금의 청소년 인권 상황이 80~90년대 상황과 다를 바 없으며, 이를 그대로 방치할 경우 무더기 퇴학과 구속, 심지어 항의자살 사태까지 낳았던 80년대 고교생 운동이 다시 불붙을 것이라는 경고가 나왔다. 그리고 2000년대의 고교생 운동은 80·90년대에 비해 새로운 프레임을 가진, 즉 ‘인권담론을 근간으로 한 운동’으로 전환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1980년대 중반에서 1990년대 중반까지 10여년 동안 국내 고등학생운동의 전개과정과 그 성격을 연구한 논문을 쓴 성공회대학교 사회학과 양돌규씨는 자신의 석사학위 논문을 통해 “지금 한국의 학교 현장이 19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반처럼 다시금 기로에 서 있다”면서 “학교 현장이 학생들의 인권을 중심으로 새롭게 재편돼야 하는 숙제 앞에 놓여 있다”고 주장했다.

양씨는 더불어 지난 민주화 이행기에 학교 체제에 항의하는 유인물을 배포하고, 자신의 사상과 견해를 밝혔다는 이유만으로 부당하게 징계를 받거나, 학교로부터 추방당했던 학생들에 대한 학교 당국의 사과와 징계 취소 조치 또한 뒤따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논문은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지난 6월 경남도민일보가 보도한 ‘마산공고 사태’전 과정을 상세하게 소개했다.

양씨는 “마산공고 사례를 주목해야만 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지금의 청소년 인권 상황이 80~90년대 상황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이라면서 “또 다른 마산공고 학생들이 90년대를 넘어 지금까지도 춘천고, 대광고, 동성고에서 양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즉, 입시경쟁과 학교규율로부터 조금이라도 벗어나려는 학생들의 시도(두발규정 폐지, 비상식적인 징계 금지, 강제 0교시와 보충·자율학습 폐지 등)에 대해 가해지는 학교의 탄압 양상은 지금도 여전하다는 설명이다.


“마산공고 퇴학 사례 아직 여전…경직된 분위기 유지 방증”

논문은 ‘이처럼 과거 고등학생운동이 현재 청소년 인권운동과 맞닿아 있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한국의 교육현장이 그만큼 경직된 채 스스로를 유지해왔다는 것을 방증한다’고 꼬집었다.

이 밖에도 논문은 고등학생운동을 태동기, 발전기, 심화기, 하강기, 전환기 등 다섯 시기로 구분해 고찰하고 있다.

△첫 번째 1985~1987년 6월민주항쟁 이전까지의 태동기에는 중고등학교에 광범위하게 소모임이 조직되는 한편으로 파주여자종합고등학교와 같이 자발적인 대중투쟁이 존재했었다. △두 번째 6월민주항쟁 이후부터 1987년 12월 서울지역고등학생연합회(서고련)의 명당성당 농성까지의 발전기에는 학생회 직선제 등 학내민주화투쟁이 벌어지는 한편 서고련은 명동성당에서 대통령 선거 부정선거 규탄 농성도 펼친다.

△세 번째는 심화기로 1988년부터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사수와 학생탄압분쇄 투쟁까지다. 심화기에는 정치적 성격으로부터 학내민주화투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투쟁이 벌어지는데 특히 전교조가 출범하던 1989년 고등학생들은 연인원 50만 명에 이르는 폭발적인 대중투쟁력을 보여줬다.

△1990년부터 다음해 5월투쟁까지의 하강기에 이르자 학교뿐만 아니라 교육당국 경찰 등까지 고등학생들에 대한 탄압에 나섰고, 이 가운데 김수경, 심광보, 김철수 등 학생들이 희생되는 사건들이 있었다. △1992년부터 1994년 조직사건에 이르는 마지막 전환기를 거치면서 학생운동은 점차 소멸해가지만 다른 한편 인권담론이 떠오르면서 청소년 인권운동으로의 전환을 준비하게 된다.

덧붙여 양씨는 80~90년대 고등학생운동의 성격을 “교육민주화를 위한 운동이자 병영적 통제 아래서 감옥과 같은 규율체제 속에 있던 학생들 스스로의 인권을 찾고,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이었다고 평가했다.

 

2006년 08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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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ot;통일협약 강요는 현장이 모두 죽는 꼴...&quot;

  "통일협약 강요는 현장이 모두 죽는 꼴..."
동아대의료원노조, 25일부터 조직형태변경 조합원 찬반투표
정연우 기자 adsjyw@jinbo.net
동아대의료원노조가 25일 동아대의료원 입구에서 조합원 찬반투표를 진행하고 있다

부산 동아대학교의료원노조가 25일 조직형태변경을 위한 조합원 찬반투표에 들어갔다.

 

동아대의료원노조는 이번 투표결과에 따라 공공연맹으로의 조직전환이 가능하게 된다. 동아대의료원노조에 소속된 조합원수는 880여 명으로 25일 현재 50% 이상의 조합원들이 찬반투표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미 동아대의료원노조는 지난 6월 8일 열린 제5차 임시대위원대회에서 참석 대의원 만장일치로 '조직형태변경(보건의료노조 탈퇴)'를 결의한 바 있다.

 

동아대의료원노조가 적극적으로 조직전환에 나서게 된 이유는 지난 2004년 보건의료노조 산별협약 10장 2조의 문제점과 2005년 직권중재를 사실상 받아드린 중앙지도부의 지도력 부재도 문제지만, 현장의 구조조정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중앙집권식의 투쟁방식으로 일관하는 보건의료노조에 대한 불만이 무엇보다 컸기 때문이다.

 

동아대의료원노조, 25일부터 조직형태변경 조합원 찬반투표 들어가

 

전혜정 동아대의료원노조 지도위원
이에대해 동아대의료원노조는 "보건의료노조가 중앙교섭에서 임금 등 조합원들에게 적용되는 근로조건을 세세하게 다루는 것도 문제가 있는데 전 지부를 동일하게 적용, 대입시키는 통입협약을 강요하고 있다"며 "이는 중앙은 강화되는데 현장은 모두 죽는 꼴로 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상무집행회의에서 조직형태변경을 결의했다"고 전했다.

 

전혜정 동아대의료원노조 지도위원은 25일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지금의 상황에서는 우리들도 미래에 다가올 구조조정에 대응할 수 없다"며 "그래서 보건노조를 탈퇴하고 지역 노동자들과 함께 현장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함께 투쟁하기 위해 찬반투표를 진행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전혜정 지도위원은 부산 서구 암남동 고신대병원을 예로 들며 "고신대의료원의 경우 중앙이 산별교섭 중인데도 노조지부가 정년을 60세에서 54세로 낮추고 임금피크제를 도입하고 30명 내에서 구조조정을 합의했다"며 이 때문에 조합원 한명이 5월경 자살했지만, 보건의료노조나 고신대의료원지부에는 아무런 입장발표가 없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동아대의료원노조, "보건의료노조부산본부 관계자 조합원 분열유도하는 선전물 배포해"

 

한편 동아대의료원노조는 "보건의료노조부산지역본부 관계자들이 2차례에 걸쳐 기습적으로 병원에 들어와 현장조합원들의 분열을 유도하는 선전물을 배포했다"며 "이들이 동아대의료원노조 찬반투표를 실시하는 이유에 대해 2005년 부산지역본부장 선거후유증의 문제로 왜곡축소시키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에대해 25일 동아대의료원을 방문한 이승현 보건의료노조부산본부 조직부장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물리적인 충돌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며 "다만 동아대의료원노조 집행부가 일방적인 입장을 전달했기 때문에 우리의 입장도 전달하기 위해 왔다"고 해명했다.

 

조합원 찬반투표는 오는 27일 오후 7시까지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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