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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총련의 씨앗은 고등학생 운동”
고졸뒤 노동운동하다 늦깍이 공부
고교운동 경험 20여명 면접·구술91년 5월 투쟁 중추적 역할 밝혀 안수찬 기자
‘고교생운동’ 처음으로 주목한 양돌규씨
격동의 근현대사를 거친 한국에서 ‘운동사’가 차지하는 학문적 위치는 작지 않다. 여러 학자들의 노력으로 이제 어지간한 역사적 사건 대부분이 학문적 분석·검토를 거쳤다. 그러나 좀체 ‘학문적 시민권’을 얻지 못하는 운동사의 한 영역이 있다. 고등학생 운동이다.
양돌규 성공회대 석사(사회학)는 지난 7월 학위논문으로 ‘민주주의 이행기 고등학생운동의 전개과정과 성격에 관한 연구’를 썼다. 박사도 아닌 석사학위논문이지만, 그 의미는 허투루 지나칠 게 아니다. 선행연구가 사실상 전무했던 분야를 개척했기 때문이다. 단행본이나 자료집의 형태로 청소년의 일탈·저항, 전교조 지지운동 등을 거론한 경우는 있었지만, 이 시기 고등학생들의 조직적·의식적 운동을 집중적으로 분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논문에서 그는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중반에 이르는 시기의 전국적 고등학생 운동의 실상을 조사·분석했다. 서울·부산·광주·대구 등에서 ‘고등학생협의회’ 등 크고 작은 고등학생 모임들이 만들어져 민주화 운동의 한 구석자리를 점했던 시기다. 양씨는 전국의 고등학생 운동 경험자 20여명을 만나 구술을 듣고 관련 자료를 섭렵하면서 논문을 썼다.
그는 <한겨레> 인터뷰에서 “당시 활동가들을 만나보니, 각자의 응어리가 너무 커서 그때의 기억을 돌이키지 않으려는 경우가 많았다”며 “구술을 녹취하는 과정이 자연스레 그들의 응어리를 풀어주는 역할도 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 응어리는 무엇일까. “1991년 5월 투쟁을 보세요. 당시 민주주의를 외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6명의 학생 가운데 3명이 고등학생 운동 출신자고 1명은 고등학생이었습니다. 제가 보기엔 당시 투쟁의 핵심은 ‘고등학생 운동 세대’가 죽음으로 항거했던 데 있습니다.”
그는 한총련을 고등학생운동 세대와 연결시켜 해석했다. “조직적 고등학생운동의 세례를 받은 친구들이 대학에 입학하던 시기와 그 세대의 마지막이 대학을 졸업하는 시기가 한총련의 탄생 및 쇠퇴와 일치합니다. 이 세대의 순환과 학생운동·민주화운동의 순환이 맞물렸던 것이죠.”
1973년 출생인 양씨 스스로가 고등학생운동 세대다. “아버지는 <동아일보> 해직기자 출신이고 어머니는 노동소설을 쓰시는 분이라 자연스레 ‘물들었다’”며 웃는 그는 “함께 운동했던 친구들 절반이 그랬던 것처럼” 고교 졸업 직후 울산 지역의 공장에 들어가 노동자 생활을 시작했다. “너무 힘들어서” 1년여만에 공장을 나온 그는 그제야 대학을 들어갔고 지금껏 뒤늦은 공부와 시민사회단체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사회과학 출판사, 전태일기념사업회 등에서 일했던 그는 현재 민주노총 정책실에서 ‘민주노총 10년사’ 작업을 돕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앞으로의 학문적 목표를 궁리중이다.
그는 한국 노동운동사를 본격적으로 공부해나갈 생각이지만, 고등학생 운동에 대한 관심의 끈도 놓지 않을 결심이다. 양씨는 “조직적 고등학생 운동 세대의 구술을 더 수집하는 동시에, 민주화 담론이 아닌 인권담론을 중심으로 삼고 있는 90년대 후반 이후의 청소년인권운동에 대해서도 계속 연구하겠다”고 말했다.
글 안수찬, 사진 이종근 기자 ahn@hani.co.kr
» 1990년 6월24일 경북대 소강당에서 고등학생, 교사, 대학생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김수경 열사 추모결의대회. 당시 경화여고 3학년이었던 김수경은 학생회 탄압 등에 항의하며 90년 6월5일 영남대 인문관 옥상에서 투신 자살했다. 같은해 9월에는 충북 충주고 2학년 심광보, 다음해 5월에는 전남 보성고 3학년 김철수가 각각 교육민주화 등을 주장하며 투신·분신 자살했다. 사진제공 양돌규·김수경열사추모사업회.
기사등록 : 2006-08-25 오후 08:52:39 기사수정 : 2006-08-25 오후 09: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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