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못난 사람아! 왜 먼저 죽어!" 

정운영 선생 추도사 

  

김수행(서울대교수)  

 

당신은 너무나 깨끗하고 완벽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당신의 병이었습니다. 이 어려운 세상에서 대강 이러쿵 저러쿵 하면서 살아 보지 왜 그렇게 칼날을 세웠습니까. 당신은 위암에도 걸렸는데 언제 또 신장병을 ‘지병’으로 가졌습니까.



내가 1977년 가족을 모두 데리고 루벵의 당신 집을 방문했지요. 나도 당신도 모두 박사논문 쓰느라고 정신이 없었는데, 당신 집의 책꽂이를 보고는 놀랐소이다. 나는 마르크스의 공황이론에 관해 논문을 쓰고 있었고 당신은 마르크스의 이윤율 저하 경향의 법칙이 최근 100년의 미국 역사에서 타당성을 가지고 있는가를 실증분석하고 있었소.



마르크스의 공황이론의 핵심이 이윤율 저하 경향의 법칙이기 때문에 당신과 나는 사실상 동일한 주제를 가지고 연구하고 있었던 것이요. 그날 나는 당신이 모아놓은 책이며 논문들을 보면서 정말 탄복했소. 당신은 지나치게 완벽하려고 노력했고 그렇기 때문에 남들에게 분노를 느끼고 남들로부터 욕도 먹은 것이요.



우리가 박영호 박사와 함께 유럽에서도 만나고 한신대학에 와서 한신경제과학연구소를 만들어 마르크스경제학을 보급하는 데 얼마나 노력하였소. 당신이 소장이 되어 한 달에 한번씩 우리가 마르크스경제학에 관한 논문을 발표함으로써 각 대학의 대학원생들이 우리 세미나에 많이 참석하고 한국경제학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 넣지 않았소.



이것이 해방 이후 마르크스경제학의 부활이었다는 것을 모두가 인정하고 있소. 그러나 그 바람에 당신과 나는 한신대학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오. 그리고 쫓겨난 덕택에 당신과 나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것이오.



당신은 경제학자보다는 신문기자에 더욱 적성과 소질이 맞다는 생각을 나는 계속하고 있었소. 실제로 당신은 한국일보와 중앙일보 기자 생활을 한 뒤에 박사학위를 받았던 것이오. 당신은 문학청년의 소질을 매우 많이 가지고 있어 쓰는 글마다 독자들을 감동시켰소.



감성이 풍부해 소련혁명사를 인간의 해방이란 관점에서 줄줄 외우고 있었죠. 그렇기에 스탈린을 그렇게 싫어했고 고르바초프에게 상당한 기대를 걸지 않았던가요. 그리고 당신이 한겨레신문이나 중앙일보에 쓰는 글마다 대학생들이 얼마나 즐겨했던가를 기억해 보세요. 모두가 당신의 문학적 상상력 덕택이었습니다.



당신은 중앙일보로 간 뒤부터 점점 한국사회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오. 나는 당신이 중앙일보의 압력 때문이 아니라 당신 스스로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보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어요. 그러나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멀어졌으며 나도 놀랐지만 금년도 나의 연락망에 당신의 전화번호는 사라져 버린 것이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당신이 아무리 중국을 다니고 세계를 누비더라도 우리의 민중을 잊어버리면 마르크스주의자로서는 자격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지요. 당신은 이런 것을 개의하지 않고 “나는 옳다”고 외치지만 민중은 당신이 삼성재벌에 포섭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의 키만큼이나 높은 인격을 존경합니다. 그리고 꼼꼼하고 정확하게 일을 처리하려는 정성을 높이 삽니다. 당신은 한국 마르크스경제학의 발전에 큰 공헌을 했습니다. 좀 더 살았더라면 당신의 현실적 경험을 중심으로 큰 토론을 벌릴 수 있었을 것인데, 이렇게 일찍 가버리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분명히 당신은 하늘에 있으면서도 우리를 향해 소리칠 것입니다. “바보들! 그것도 제대로 못해.” 죄송합니다. 우리 힘껏 노력하겠습니다. 당신이 마음 속 깊이 새기고 있던 ‘새로운 세상’ ‘참 세상’을 만들겠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나는 당신에게 외치네. 이 못난 사람아! 왜 먼저 죽고 야단이야!  

  

  

2005년09월25일 23시2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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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시 김수행 선생님 marishin /2005.09.26 09:47    

보통 분이 아니시군요. 이 땅에서 추모 글에 비판을 쓰는 건 금기처럼 되어있는데요. 여러 사람에게 애증을 남긴 정 선생님이 이제라도 편히 쉬시길 빕니다. 

 

2. 윤소영 교수 말하길... 데카르트 /2005.09.29 11:05    

김수행 교수처럼 정 선생을 추모한답시고 변절 운운하는 것은 김 교수의 생각(저는 김 교수가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이나 두 분의 관계(자신은 정통 마르크스주의자이고 정 선생은 저널리스트일 따름이라는 단정은 명예훼손급의 망언입니다)를 잘 알고 있는 저로서는 정말이지 어처구니 없는 짓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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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9/29 14:56 2005/09/29 14:56

子曰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배우고, 때때로 그 배운 것을 익히면 무척 기쁘지 않겠는가?)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위와 같이 배우는 모습에 탄복하여- 이 먼 데서 찾아온다면 또한 무척 즐겁지 않겠는가?)

 

人不知而不온(성낼 온) 不亦君子乎?

(-위와 같이 배우는 모습을 설사 - 남들이 알아 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는다면 또한 무척 군자답지 않겠는가?)

 

 

     # 성낼 온 字, windows가 지원을 안한다.#

 

 

많이들 알고 계시듯, 논어(論語)의 첫부분인데, 공부하는 자세는 동서고금을 통틀어 서로 통하는 무엇이 있는 것인가, 해서 한 번 적어 보았다. 별로 안그런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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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9/29 03:02 2005/09/29 03:02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부활을 위하여 

  정운영선생 추모…아카데미즘-저널리즘의 조화도

  2005-09-25 오후 5:46:01     


  추석 며칠 전날 한밤중에 정운영 선생의 전화를 받았는데, 느닷없이 자신의 책들을 내게 맡기겠다는 말씀이셨다. 어림잡아도 2만 권쯤 되는 장서는 선생이 유학 시절부터 모아오신 것으로 그 규모와 범위는 경제학계에서도 아주 유명한 것이었다. 그런데 애지중지하던 그 책들을 내게 맡기시겠다니….

 

  지난 봄에 뵐 때 신장에 이상이 생겨 고생하신다는 말씀은 들었지만, 그냥 잔병치레거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터에 갑자기 그런 말씀을 듣고 불안하기는 했지만, 추석쯤 퇴원할 수 있을 것이니 그 때 다시 의논하자는 말씀을 곧이곧대로 믿고 싶었다. 그러나 추석을 넘기고도 퇴원하지 못하신 선생을 찾아뵈니 힘겹게 단 두 마디 말씀만 하셨다. "돌아가야겠어", "이번 생에서 너와의 인연은 여기까진가봐". 내일쯤 다시 찾아뵈면 더 하실 말씀이 있겠거니 생각했는데, 무엇이 그리 급하셨는지 그만 오늘 아침 훌쩍 떠나버리셨다.

 

  어느덧 나도 50줄에 접어들다 보니 사람이란 결코 단순치만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누구나 자신의 기질에 따라 나름대로 몇 가지 상이한 면모를 갖고 있겠지만, 선생의 경우처럼 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을 조화시킨 경우는 드문 것 같다. 일반 시민들은 <한겨레신문>이나 <중앙일보>에 실린 칼럼이나 선생이 사회를 보던 텔레비전 시사토론을 더 기억할 것이다. 하기야 1850년대의 마르크스에게도 저널리즘이 단지 호구지책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아무래도 마르크스나 정 선생이나 모두 경제학자로 기억해야 할 것 같다.

 

  1944년 아산에서 태어난 선생은 경북중학교와 온양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하셨다. 64학번으로 이른바 6·3 세대에 속하는 선생은 <상대신문>을 매개로 학생운동에 투신하셨고, 이 때문에 학부를 '5학년'까지 다니셨다. 석사 과정에 진학하신 후에도 선생은 학생운동을 정리하지 않으셨는데, 그 시절 상대와 문리대 후배들을 아우르는 한국사회연구회(한사)를 조직하신 것은 아주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아직도 노동자운동의 일각을 지키고 있는 김승호 선배는 선생이 아끼시던 한사 성원 중 하나였다.

 

  1972년 석사 과정을 수료하신 후에 선생은 한국일보사를 거쳐 중앙일보사에 입사하셨는데, 입사 동기생 중 한 분이 나중에 <이론> 동인으로 함께 활동하신 지기 정춘수 선생이었다. 가톨릭 노동사목이나 학생운동과도 관련이 깊었던 선생은 그런 인연으로 벨기에 루뱅대학교에서 장학금을 얻어 유학을 떠나시게 되었다. 유학을 떠나기 직전 피아노 전공의 박양선 여사와 결혼하신 선생은 곧 연년생으로 유경·유신 두 딸을 얻으셨다. 1973년 루뱅에 도착하신 선생은 학부 과정부터 경제학 공부를 새로 시작하여 1981년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핵심 중의 핵심인 이윤율 저하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셨다.

 

  학위를 끝낸 후 루뱅대학교 경제사회연구소에 남을 수도 있었던 선생은 귀국을 결심하셨다. 알다시피 5공 군부독재의 서슬이 시퍼렇던 80년대 초는 너도 나도 도피성 유학을 떠날 때였고 학위를 끝낸 사람은 망명객을 자임하면서 귀국을 꺼릴 때였다.

 

  그러나 1982년에 선생은 영국에서 학위를 끝낸 김수행 선생과 함께 한신대학교 경상학부 교수로 부임하셨다. 나와의 인연도 그때쯤 시작된 것인데, 1984년에 이영훈·강남훈 두 교수와 함께 교수진의 일원으로 선발된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창설된 한신대 경상학부는 남한에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부활을 상징하는 일대 사건이었다. 그러나 호사다마인가, 1986년 말 학내 민주화 투쟁에 연루되어 김수행·정운영 두 선생이 해임되면서 한신대 경상학부는 실질적으로 해체되고 말았다. 사실 김수행·정운영 두 선생이 한신대에서 해임된 것은 경상학부 교수 10명 전체가 연대로 져야 할 책임을 도맡으신 것이었다.

 

  그 후 김수행 선생은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로 초빙되어 해임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셈이었지만, 그런 행운이 없었던 선생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저널리즘에 몸을 담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경제학과 출신인 박현채 선생의 선례에 따라 경제평론가를 자처하신 선생은 1988년 창간 시절부터 1990년대 내내 <한겨레신문> 논설위원을 지내셨다. 그 때의 성과가 바로 1989년부터 매해 한 권씩 묶어낸 <광대의 경제학>, <저 낮은 경제학을 위하여>, <경제학을 위한 변명>인데, 2002년까지 거의 격년에 한 권씩 나온 경제평론집은 모두 8권에 이르렀다. 그리고 2001년에는 이른바 개혁·개방 이후 중국 사회주의의 자본주의적 변질을 고발하는 <중국경제 산책>을 쓰기도 하셨다.

 

  그러나 한신대학교에서 해임된 후에도 선생은 서울대학교와 고려대학교에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강의하셨는데, 강의실은 언제나 열정과 토론으로 후끈 달아오르곤 했다. 1987-89년에는 당시 학생들의 주요 관심사였던 한국사회 성격 논쟁의 이론적인 쟁점을 해명하기 위해 <국가독점자본주의 이론> 4권을 편역하셨다. 이는 1984년에 나온 2권의 편저 <한국자본주의론> 및 <세계자본주의론>의 후속작이라고도 할 수 있다.

 

  게다가 1992-93년에는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를 마르크스주의의 변화의 계기로 삼자는 동인지 <이론>의 초대 편집위원장으로 현실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혼란에 빠져 있던 이론 진영의 맏형 역할을 맡기도 하셨다. <노동가치이론 연구>가 출판된 것도 바로 1993년이었는데, 이윤율 저하를 통해 1929년 대공황 이후 미국 자본주의를 분석한 박사 논문을 중심으로 <자본> 전체의 이론적 구조를 설명한 이 책은 아직까지도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기본 문헌으로 남아 있다.

 

  1997년 <이론>이 폐간되고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게다가 서울대와 고대의 강의도 없어지면서 선생은 부쩍 쓸쓸해하시는 것 같았다. 텔레비전 덕분에 길거리나 산행길에서 아니면 심지어 목욕탕에서도 선생을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것이 속 모르는 이들 생각처럼 마냥 신나는 일일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1999년 경기대학교 교수로 임명되기도 하셨지만, 그것도 그리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그런 중에도 선생은 <노동가치이론 연구>의 후속작을 구상하여 2년 전쯤 원고를 거의 완성하셨다. 그러나 불의의 사고로 결국 출판이 미루어지고 말았는데, 아마 마지막까지도 못내 아쉬워하셨을 것이다.

 

  정운영 선생에 대한 평가는 물론 역사의 몫으로 남겨두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선생처럼 오해를 받아온 분도 그리 흔치만은 않기에 한두 마디 사족을 달고자 한다. 나도 처음에는 몰랐지만, 정운영 선생의 부친은 일제 강점기 대표적인 민족자본의 하나로 꼽히던 조흥은행 창업주의 동생이었다. 아산에서 태어난 선생이 경북중학교를 졸업한 것은 가족이 대구로 피난했던 때문인데, 그러나 일본 유학생 출신의 '한량'이신 부친은 곧 가산을 탕진하셨다.

 

  기울어진 가세를 상징하는 일화로 선생의 '식탐'을 들 수 있겠다. 한창 자랄 나이인 선생은 식은 밥이든 묵은 김치든 눈에 띠는 대로 입에 움켜 넣고 모친의 매를 피해 뒷간으로 달아나셨다고 한다. 선생의 집 여기저기에 사탕이나 과자 그릇이 널려 있는 것을 보고 놀려대곤 하던 나에게 변명 아닌 변명으로 그런 말씀을 하셨을 때 철없이 깔깔 웃었다.

 

  부친과 사별한 후 선생은 모친의 고향인 아산으로 돌아와 온양고등학교를 다니셨다. 그 시절 선생은 1등을 도맡긴 했지만 모범생은 결코 아니었고 오히려 온양역 근처에서 아주 유명하셨을 정도였다고 한다. 아마도 그 때문에 재수를 하셨던 것 같다.

 

  그러나 선생은 경제학과 선배인 신영복 선생을 만나면서 인생의 행로를 크게 바꾸셨다. 그래서 철없을 시절 나는 이문열 씨의 <영웅시대>를 흉내내어 선생을 '회개한 부르주아'라고 놀려대곤 했다.

 

  선생의 생애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이 아마 말년에 <한겨레신문>에서 <중앙일보>로 옮기신 일일 것이다. 그러나 <한겨레신문> 논설위원을 사임하신 것은 결코 선생 자신의 선택이 아니었다. 국외자인 내가 자세히 알 수는 없겠지만, 창간 시절부터 복잡했던 <한겨레신문>의 내부사정이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더욱 악화되었던 것이 무시할 수만은 없는 요인이었다는 생각이다.

 

  왜 하필 <중앙일보>냐는 힐난에 대해서는 적어도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한겨레신문>과 <중앙일보>의 차이를 그리 과장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한겨레신문>에 그대로 계셨더라도 선생은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이나 이른바 386세대의 포퓰리즘적 행태에 대해 비판하셨을 것이다.

 

  물론 50대 말에도 전세집을 구해야만 했던 선생의 경제사정도 무시할 수만은 없다고 본다. <한겨레신문>을 그만두시고 나서 정춘수 선생을 비롯한 몇몇 지기들의 주선으로 <중앙일보>로 옮기시는 과정에서 이런저런 사유들을 짐작하고 있었던 나는 별다른 말씀을 드릴 수 없었고, 김승호 선배도 마찬가지였다.

 

  과거지사에 대해 가정을 세우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지만, <한겨레신문> 논설위원을 사임하면서 선생이 저널리즘을 아주 떠나실 수도 있었다. 신영복 선생을 중심으로 선생과 나를 성공회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 초빙하려는 시도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한신대, 성공회대, 상지대가 이른바 진보대학 네크워크를 구상하던 중이어서 세 대학 사이의 역학구도가 아주 미묘해졌고, 그 때문에 신영복 선생의 시도는 좌절되었다. 그렇지만 않았더라면, 한신대 경상학부에 걸었던 선생이나 나의 꿈이 성공회대 경제학과에서 실현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윤소영/한신대 국제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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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9/29 02:25 2005/09/29 02:25

치열했던 시기, 그에게 빚지지 않은 자 있는가

정운영 영면에 바치는 추도사


    장제형(berliner) 기자    


"솔직히 고백하건데 나는 알튀세르의 이론과 실천을 정리해내는 데에 결코 적임자가 아니지만…."


정운영이 90년 10월에 타계한 프랑스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에 대한 추도사를 <말>지 12월호에 발표한 것을 기억한다. 24일 오전, 이 경제평론가의 영면 소식을 듣고 하필이면 왜 제일 처음 그가 쓴 추도사가 생각났을까. 나 또한 고백하건데 정운영의 공과 과에 대해 정리해내는 데에 결코 적임자가 아니지만, 그가 알튀세르에게 그랬을 것이라고 헤아리듯이 그에 대한 과거 어느 한 순간의 애정과 존경의 념에 의거해서 이 추도사를 바친다.


 

정운영식의 글쓰기가 가져온 '변화'


1988년 5월 <한겨레신문>이 창간되었을 때, 당시 보도기관의 찌라시에 염증을 느끼던 사람들은 일종의 해갈의 느낌을 맛보았을 것이다. 그 해갈은 저 후안무치한 보도기관 종사자들에 의한 왜곡과 굴절이 아닌, '우리' 자신의 목소리를 문공부 허가필증을 득한 신문 지면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었다는 데에서 연유할 것이다.


하지만 반벙어리가 비로소 말을 그럭저럭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기쁨은 잠시일 뿐, 더 나아간 의문이 제기된다. 어떻게 하면 세련되고 정치한 사고와 언어를 구사할 것인가. 둔탁하고 건조한 투쟁의 언어도 아니고, 내면의 넋두리에만 머물러 있는 사적인 잠꼬대도 아닌, 비판적 사고가 결합된 문체의 고양된 에세이적 경지를 어떻게 마련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랬기에 바로 이 새로운 정운영식의 문체에 독자들을 열광하지 않았던가. 정운영의 '전망대'는 우리에게 독보적인 글쓰기의 경지를 통해 새로운 '전망'을 보여준 것이었다.


이 '전망대'에 카스트로와 체게바라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에서 우리는 생경한 즐거움을 맛보았고, 광주와 파리코뮌이라는 100여년 시차를 둔 사건의 세계사적 공통점을 충혈된 눈으로 배웠으며, 1500명의 교직원 노조원을 일거에 잘라버린 한 교수에게 선사한 학생들의 밀가루 달걀 반죽 메이크업이 결코 '패륜'이라는 한마디 말 따위로 치지도외될 수 있는 행위가 아니라는 것-69년 아도르노가 학생들에게 당한 "황홀한 봉변"이 '스승'에 대한 패륜이라는 말로 간단히 기각될 수 없는 것처럼-이 분명하게 되었다.


박재동의 만평, 고종석의 문학기사, 정성일의 영화평 등과 더불어 정운영의 '전망대' 칼럼은 90년대 초반까지 당시 <한겨레신문>을 집어들게 만드는 데에 일조했고, 우리 세대의 시대정신을 반영한 학술 문화적 대표 아이콘이었다. 그의 글은 메마르고 딱딱한 글이 칼럼인 것처럼 오해하게끔 했던 척박한 한국 언론역사의 풍토에서 고유한 문체 구사의 확립을 통한 칼럼쓰기의 첫 번째 사례로 기록될 것이다.

 

교수로서의 '정운영'


나의 경우 더더욱 행운이었던 것은 글뿐만 아니라 강의로도 그를 만날 수 있었다는 점이다.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에 대학을 다녔던 이들에게 당시 정운영 '교수'의 강의는 암묵적인 필수 과목이 되었다. 강의실에서는 애시당초 찾는 것이 불가능했고, 기껏해야 집회나 거리위에서나 보았던 얼굴들을 강의실에서도 서로 확인할 수 있게 했었던 거의 유일한 강좌였으며, 대형 강의실이 입추의 여지가 없이 꽉꽉 들어찼던 그의 '가치론'과 '공황론' 수업을 추억해 보자.


논전이 과열되어, 그의 말에 의하면 백묵이 날아다니고 멱살잡기 직전까지 가는 살벌한 상황이 빈번히 연출되었다지만, 그럼에도 그는 매우 행복한 선생이었으리라. 열띤 논쟁은 거의 매 수업시간마다 빼놓을 수 없는 백미였으며, 그는 수백명 학생들 앞에서 그들의 격렬한 이론적 반론과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거의 자신의 논점을 관철시켰다.


학기 마지막 시간은 항상 그의 '덕담'으로 마무리 되었다. 그중 하나.


"내가 젊었을 때는 20대 면장, 30대 시장, 40대 군수, 50대 장관… 뭐 이런 식으로 출세욕이 있었는데, 그걸 신영복 선생을 다시 만나면서 모두 깼어."


자신의 지나간 허욕 한 자락을 청중들 앞에서 털어놓을 수 있는 그 진솔함이 그에 대한 인간적 매력을 불러일으켰던 점 중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 '고엽'과 '인터내셔널'이 18번 레퍼토리로 동거하는 여유 또한 그 매력을 배가시키는 데에 일조한다.


현존 사회주의 붕괴 이후 "때로는 질 줄 알면서도 싸워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라는 비장한 하이네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론>지의 창간을 주도하던 그가 싸워야 할 대상은 유감스럽게도 남한의 천민자본주의와 분단 체제만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었다. 80년대 중반 "민중신학"의 아성 한신대에서 그가 김수행 교수와 함께 쫓겨났을 때, 그가 느꼈던 씁쓸함과 환멸의 정조는 그의 글에서나 스쳐지나가듯이 언급했던 말들에서나 누누이 확인된다. "운동권"에도 개념정리가 필요하다고.

 

 

편히 잠드소서

 

<한겨레신문> 창간멤버이자 비정규직 "비상임 논설위원" 정운영이 그곳을 떠났을 때, 눈 밝은 독자들은 정권교체 후 정부출연 언론기관의 최고책임자로 임명되어 간 그 신문 출신의 몇몇 소위 논설위원과 남은 이들을 명확히 구분해 판단했을 것이다. 당시 할 말은 많지만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다던 그가 영영 떠난 지금, 이제는 결코 하고 싶어도 말할 수가 없겠지만 그가 느꼈을 감정의 편린들을 그럭저럭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그러나 소위 일부 "운동권"들에 대한 환멸이 컸던 탓인지, 첫 직장으로의 30년만의 재취업의 차원인지 아니면 또 다른 무엇인지 분명치는 않지만, 2000년, 그가 <중앙일보>로 이직했을 때의 독자들의 어리둥절함이나 당혹감 또한 적지 않았으리라. 더구나 공론장의 영역에서 민망하게도 자신의 대학 동창이라는 사실을 인연으로 현직 공정거래위원장을 겨냥해 "나라 위해 우리 변절합시다"라며 마치 요정에서 정치꾼들이 의기투합하는 장면을 연상케 하는 요상한 제목을 단 칼럼은 충격이었다. 공정거래법 개정에 대한 힘겨루기가 한창일 때 나온 그 칼럼 내용의 문제적 성격을 고려하면 더더욱 독자들의 당혹감은 커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의 당혹감은 망자 앞에서 잠시 유보하도록 하고, 애초에 이 추도사를 쓰게끔 한 그에게 품었던 회억의 감정으로 돌아가 그에 충실하자. 그럴 만큼 우리는 어느새 지나가버렸는지도 몰랐던 그 시기, 그에게 빚진 것 또한 많았으니까.


91년 우리의 벗들이 맞아 죽고, 밟혀 죽고, 의문사 당하고, 자신의 몸에 불꽃을 달고는 그들의 곁으로 갔을 때, 정운영은 또한 어느 글에서 짤막한 추도문을 낭독한 일이 있다. 이제는 우리가 그를 위해 추도문을 짤막하게 읽을 차례이다.


'편히 잠드소서.'


Requiescant in pace 

 

 

  2005-09-25 16:50


ⓒ 2005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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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9/25 19:01 2005/09/25 19:01

[영화] 간장선생

2005/07/10 05:51

 

일본영화.

 

여기서 간장은 "샘표 간장" 할 때의 그 간장이 아니라, 우리 몸에 있는 필수 장기(organ)의 하나인 그 간장을 말한다. 2차대전 말기 일본의 한 바닷가 마을과, 그 마을의 한 내과 개업의, 곧 간장선생으로 불리는 의사 아카기氏가 주인공이다. 그는 그 마을 환자들의 대부분이 간염이라고 진단하고 다닌다. 아니, 물론, 그 마을이라기 보다, 총동원 시기 일본 사회 전체가 간염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피로, 곧, 몸의 과도한 혹사로 인해 걸리는 질병. 치료를 위해서는 다량의 영양제가 요구되지만, 밥그릇 숫가락까지 전쟁에 동원하던 시기에 제국의 본영이 그런 호사를 허락할 리 없다.

 

메이지 유신 이래 청일, 러일 전쟁의 극적 승리에 도취되어 20세기을 맞이하였고, 이 승리감으로 아시아를 침략하면서, 마침내는 자신들이 무슨 일을 저지르는지도 모른 채 전쟁의 도가니에 빠져 결국 패망하고 말았던 일본의 전전(戰前) 근대. 흥분으로 들떠서 위험한 이상을 향해 돌진해 가는 총동원기의 이 사회는 간염 환자로 득시글 거렸다. (그 변방 어디쯤에 식민지 조선이 있었고.)

 

공금을 횡령하여 성(性)에 탐닉하는 공무원, 몰핀에 탐닉하는 의사, 권력을 휘두르는 군부, 보잘 것 없는 권력욕과 영웅심으로 그 전쟁범죄자들을 닮아가는 촌부들이 모두 간염환자들이다. 게다가 간염 박멸을 위해 개업의(開業醫)의 소명을 잊고 현미경 속으로 빠져들어간 주인공 아가키 역시 '간염'에 도취된 것. 731부대(그 악명높은 세균전 부대) 군의관이던 그 아들도 간염 원인균을 찾기 위해 '간염'의 증세이기도 한 끔직한 짓들을 저지르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감염되어 돌진해 간 곳은 바로 '추상'(抽象, abstract)이었던 것인지도.

 

"개업의는 발이 생명이다." 뛰고 뛰고 또 뛰는 것, 그 구체성 속에 간염 예방의 유일한 길이 있다.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간장 선생(Kanzo Sensei / Dr. Akagi, 1998) / 감독 이마무라 쇼헤이 / 출연 에모토 아키라, 오소 구미코 등. / 개봉 2001-6-16 /120분 / 코미디, 드라마 / 15세 관람가

 

- 사진 및 정보는 naver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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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7/10 05:51 2005/07/10 05:51

문둥병, 나병, 한센병 그리고 소록도 그리고 서명운동!
araby [ 2005-07-05 오전 9:56:09 ]

문둥병, 나병, 한센병...
이 세단어는 모두 같은 말이다. 한센병이란 단어는 생소하고 낯설기만 하다. 이 병으로 고통 받아 일생을 굴곡지게 사신 어르신들의 낯빛이 생소하고 낯선것처럼 말이다.

사회는 한센병에 대해 많은 것을 잘 못 알고 있다.

첫째, 점염성이 매우 약하다는 것. 일평생을 같이 산 가족, 배우자에게도 점염이 되지 않는다.

둘째, 우리가 문둥이 혹은 나병 환자로 알고 있는 이분들이 사실은 환자가 아니라는 것. 많은 분들은 병을 앓았던 경력이 있는 병력자 일뿐이다. 병으로 인한 외상과 휴유증, 장애 등으로 고생을 하실뿐이다. 우리는 감기 걸렸던 사람에게 감기 환자라고 평생 꼬리표처럼 낙인을 찍지 않지만, 외상이 남는 이 병의 경우 평생 나병환자, 문둥이로 불리우고 만다.

일반인들의 두려움과 공포, 자기 생존 욕구, 이기심등이 적절히 결합되어 한센인들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혹독한 세월을 버티어오셨다. 때로 학살을 당해도 뭐라 말을 못하고, 가해자들은 집행유예로 풀려나는 부조리한 상황에서 이분들은 침묵하고 침묵당하며 '악'소리 조차 내지 못하고 살아오였다.

다행히도 요즘에는 이분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많이 일어나, 한센인의 인권과 관련된 여러가지 논의와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부끄러운 점 중의 하나는 이런 논의의 촉발점이 국내적 노력도 있지만 일본 변호사들의 노력이 컸다는 것이다.
일본 변호사들의 노력이 씨앗이 되어, 소록도에서 일제시대에 이루어졌던 강제격리, 수용  및 인권 침해에 대한 소송이 진행중이다.

그 관련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리고, 이 소송을 위해 대한 변협은 서명운동을 실시하고 있다. 일본 정부 대상의 소송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그리고 대한민국이 애써 외면해오고 잊으며 침묵시켜온 이들을 위해 우리는 적어도 서명이라도 해야되지 않을까?

서명 주소는
http://www.koreanbar.or.kr/online_sign/20041201/signer_list.asp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한센병, 그 지난한 역사를 이제 바꿀 때가 되었습니다.

한센병 환자와 병력자들(이를 통칭 한센인이라 부름)은 지금도 이 사회에서 극심한 차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전국 88개 정착촌에서 그들만의 공동체를 형성하여 육지 속의 소록도를 만들며 지난 40년을 살아 왔습니다. 이제 이들도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야 할 때입니다.

한센인들의 차별의 원류를 찾다 보면 수백 년을 거슬러 올라가야겠지만 현대사적 입장에서 보면 일제에 의한 소록도갱생원의 설립과 강제수용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제는 한센병을 근절하겠다는 미명하에 수천, 수만의 한센인들을 육지에서 소록도로 연행하여 강제노역, 단종수술 및 비인간적인 감금 등 필설로 표현할 수 없는 인권유린 행위를 가하였습니다.

너무도 늦었지만 일제의 그러한 비인권성을 규명하고 피해 한센인들에게 최소한의 보상을 요구하는 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2004년 8월 소록도의 한센인 117명은 일본정부를 상대로 한센병소록도보상청구소송을 시작하였습니다. 한국과 일본의 뜻있는 변호사들이 힘을 합해 일제시대 소록도에서 일어난 인권유린의 실상을 고발하고 이에 대한 일본사법부의 심판을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재판은 과거의 전후보상재판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전후보상소송에서 일본정부는 1965년의 한일청구권협약을 들이대면서 모든 청구권은 그 협약으로 정리되었다며 책임을 회피하였고 일본사법부는 이러한 일본정부의 주장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이번 재판은 지난 2001년 일본 스스로 만든 한센병보상법에 입각한 소송으로 전후보상소송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일본정부는 동법을 제정하면서 국적이나 영토 등의 제한을 전혀 하지 않고 오로지 일본이 만든 요양시설에서 강제격리되었던 한센인들에게 보상을 해 주도록 법률을 만들었습니다. 우리의 주장은 이 시설에 소록도도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이 주장은 한국의 법률가가 아닌 일본의 법률가들 사이에서 먼저 시작된 것입니다.



소록도보상청구소송에 이르게 된 일본의 상황

일본은 1907년 ‘나예방에관한건’의 제정과 함께 한센병 환자에 대한 격리정책이 취해졌고 이것은 1996년 ‘라이(나)예방법’이 폐지될 때까지 지속되었습니다. 한센병 환자를 요양소에 강제수용하고 종신 격리한다고 하는 이른바 강제격리 정책이 취해졌던 것입니다. 이 정책은 한센병 환자의 인간성을 완전히 부정하고 사회로부터 이들을 말살하고 근절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극단적인 비인도적 정책이었습니다.

1996년 격리정책의 근거법이었던 라이예방법은 폐지되었으나 국가가 잘못된 강제격리정책을 수행해 온 책임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책임에 근거한 보상 등의 조치도 없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1998년 구마모토재판소를 필두로 동경 및 오카야마재판소에 과거의 격리정책의 피해자인 한센병력자들의 국가배상소송이 제기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중 구마모토재판소는 2001년 5월 11일 국가의 한센병 정책과 그 법적 근거였던 ‘라이예방법’을 일본국 헌법에 위반하는 위헌적인 것이라고 판단하고 원고들에 대하여 그 입소기간에 대응하여 1인당 800-1400만 엔의 손해배상을 인정하는 원고 전면승소의 판결을 선고하였습니다.

위 판결이 있게 되자 일본정부는 항소를 준비하였습니다. 그러나 원고단과 일본 전국의 한센병관련단체(예, 전국한센병요양소입소자협의회, 약칭 전요협) 그리고 이들을 지원하는 시민인권단체들은 후생노동성과 수상관저에 연좌하여 정부가 항소방침을 포기할 것을 결사적으로 요구하였습니다. 이러한 운동에 힘입어 일본정부는 항소 마감일인 2001년 5월 23일 마침내 구마모토지방재판소의 판결에 대한 항소를 단념하는 공식발표를 하고 향후 위 판결의 원고단에 포함되지 않았던 전국의 한센병 환자 및 병력자들에 대해서도 통일적인 처우를 할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위 약속에 따라 일본정부는 2001년 6월 ‘한센병요양소입소자등에대한보상금의지급등에관한법률’을 국회에서 통과시켰습니다(2001. 6. 22. 법률 제63호). 이 법률에 의하여 격리정책에 의해 요양소에 강제격리되었던 한센병 입소자들은 그들의 입소기간에 따라 800-1400만 엔의 보상금을 받을 수 있게 되었고, 나아가 정부는 이들에 대한 명예회복 및 복지증진을 위한 조치를 취함과 동시에 사망자들에 대한 추도를 위해서도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을 법문상에 약속하였습니다.

이러한 법률의 제정에 의해 일본정부는 이미 한센병 요양소 입소자들 1만 명 이상에게 보상금을 지급하였고, 이들 중 요양소를 떠나 사회정착을 원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정착금 지급 등의 조치를 취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한센병 입소자 대표들과 협의체를 만들어 명예회복 및 복지증진을 위한 방법을 협의해 나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소록도 보상 소송의 경위

위와 같은 괄목한 성과를 거둔 일본의 한센병소송 변호인단은 일본에서의 소송과 특별법 제정 등이 일단락되자 식민지시대에 일본정부가 만든 요양소이었던 소록도갱생원에 눈을 돌렸습니다. 2003년 말 소록도에는 일제시대 때 입소한 한센병력자가 120여 명이 있고, 기타 정착촌에 200여 명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바, 이들이 바로 위 특별법상의 보상청구신청인이 될 수 있다고 일본의 변호사들은 믿고 있습니다.

일본변호단은 소록도 입소자 117명으로부터 2003년 말 보상신청 위임을 받고 후생노동성에 보상신청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후생노동성의 기각결정을 예상하여 소송(기각결정처분의 취소송)을 준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소록도를 수시로 찾아 원고단을 면담하며 그들의 일제시대 입소상황과 입소 후 강제노동 등의 인권침해사례를 청취하였습니다.

일본변호단의 활동에 자극을 받은 한국의 변호사들은 대한변협인권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2004년 5월 한센병인권소위원회를 결성하였고 이 소위원회는 일본의 변호단과 결합하여 본격적인 공동작업에 들어갔습니다. 한국에서도 대한변협한센병인권소위원회가 주축이 되어 변호단(소록도소송지원단)이 결성되었고(2004년 11월 현재 39명) 이들 변호인단은 일본변호인단(현재 약 60명)과 지난 5월 이후 거의 매달 소록도에서 만나 원고들에 대한 진술서를 작성하고 있습니다.

일본정부는 예상대로 2004년 8월 16일 위 보상신청을 기각하였습니다. 이에 변호단은 같은 달 23일 보상신청기각처분취소소송을 동경지방재판소에 제기하였습니다. 이 소송은, 10월 25일 제1회 변론기일이 열렸으며 향후 2개월에 한 번씩 재판이 열릴 것으로 봅니다.

이 소송의 쟁점은 아주 선명합니다. 과연 소록도입소자들이 위 특별법 제2조에서 말하는 ‘국립한센병요양소 기타 후생노동대신이 정하는 한센병요양소’에 들어갈 것이냐입니다. 변호단은 어떤 해석에 의해도 소록도는 적용대상이 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서명운동의 필요성에 대하여

양국의 변호단은 지난 1차 변론기일이었던 10월 25일 동경에서 만나 신속 공정한 재판을 촉구하는 시민서명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이 날 양국의 변호인단은 한일 양국에서 100만 인의 시민서명을 받아 이 사건 재판부에 전달하자고 결의하고 저녁시간 마이니찌 신문사 홀에서 열린 시민집회에서 서명운동의 시작을 선언하고 현장에서 바로 서명에 돌입하였습니다. 양국 변호인단은 이 사건의 원고들의 평균 연령이 80세에 가까운 고령인 점을 강조하며 재판부에 신속한 재판을 주문해 왔으며, 이 사건을 과거 일본사법부가 부정적으로 보아 온 전후보상 관점에서 보기보다는 최근 일본국회가 제정한 한센병보상법에 입각하여 순수한 인권적 관점에서 판결하여 줄 것을 요구하여 왔습니다. 이 서명운동은 그러한 양국 변호단의 입장을 시민들이 지지하는 의미로서 재판부에 상당한 심리적 압박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변호단의 서명운동은 이미 대한변협 인권위원회의 승인을 얻어 변협 차원에서 전국의 변호사회에 협조를 구하기로 하였고, 종교단체 및 인권단체 등의 협조를 얻어 최대한 많은 수의 서명을 받아 재판부에 전달할 예정입니다.


*서명운동과 관련된 자세한 사항은 대한변협 인권과 (02-3476-4003)로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2004. 11.
한센병소록도보상청구소송한국변호단
박 영 립 (겸 대한변협 인권위원회 위원장)
총괄간사 박 찬 운 (겸 대한변협 한센병인권소위원회 위원장)단 장
서 울 : 강 창 재 구 충 서 김 주 원 박 순 덕 *박 종 강
  박 형 상 방 희 선 손 명 숙 안 원 모 안 재 석
  양 정 숙 오 은 정 이 덕 우 이 성 문 이 영 기
  李 廷 一 李 正 一 이 종 오 *장 철 우 조 순 제
  조 영 선 조 재 현 차 규 근 한 석 종 황 진 호
수 원 : 김 보 람 *장 완 익      
인 천 : 김 동 섭        
광 주 : 강 신 영 *민 경 한 *이 상 갑   이 승 채 최 국 신
김 도 형
(순천지원)
김 도 형
(광주본원)
김 용 채 김 정 호 김 상 훈
김 현 류 인 상 박 승 옥 양 시 복 이 건 영
이 현 재 임 선 숙 임 태 호 장 광 수 정 채 웅
최 성 진        
전 주 : 김 광 삼 박 재 오      
부 산 : 안 승 군        
* 대한변협 한센병인권소위원회 위원


▶다음은 귀하의 서명과 함께 일본 재판부에 제출할 공정판결을 요구하는
요청서의 내용입니다.
동경지방재판소 제3민사부 귀중 2004년 월 일
<주관>
한센병소록도갱생원ㆍ대만낙생원보상청구소송일본변호단
한센병소록도보상청구소송대한민국변호단
한센병보상금부지급결정취소소송의 조기 공정판결을 요구하는 요청서
2001년 5월 11일 일본의 구마모토지방재판소는 ‘나예방법’에 의한 한센병환자 강제격리정책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에 기해 ‘한센병요양소입소자등에대한보상금의지급등에관한법률’이 제정되었고 한센병요양소에 입소경력이 있는 모든 사람들이 보상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일본의 식민지하, 한국, 대만에 존재하였던 한센병요양소 입소자들에게는 아무런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한국의 국립한센병요양소소록도갱생원에 입소하였던 117명이 2004년 3월까지 보상금을 청구하였지만 일본국은 동년 8월 16일 위법에서 말하는 한센병요양소 입소자등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하여 청구를 기각하였다.

그러나 소록도갱생원 입소자들은 일본국이 한센병을 이유로 환자를 강제적으로 격리수용하는 법과 정책에 의해 강제 수용됨으로써 피해를 받았던 것이므로, 그 피해가 동법에 의해 보상되어야 하는 것은 명확하다. 일본국은 즉시 소록도갱생원 입소자들에 대하여 보상금을 지급할 의무가 있다.
원고들은 평균 연령이 80세를 넘고 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동안 조기해결이 강력히 요구된다. 이런 이유로 귀 재판소가 하루라도 빨리 공정한 판결을 내려 줄 것을 요구하는 바이다.

요 청 사 항
귀 재판소가 본건에 대해 신속하고도 공정한 판결을 내려 줄 것을 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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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7/05 15:10 2005/07/05 15:10

현세(現世)의 사랑...

2005/07/03 12:48

Assume man to be man and his relationship to the world to be a human one: then you can exchange love only for love, trust for trust, etc. If you want to enjoy art, you must be an artistically cultivated person; if you want to exercise influence over other people, you must be a person with a stimulating and encouraging effect on other people. Every one of your relations to man and to nature must be a specific expression, corresponding to the object of your will, of your real individual life. If you love without evoking love in return ? - that is, if your loving as loving does not produce reciprocal love; if through a living expression of yourself as a loving person you do not make yourself a beloved one, then your love is impotent - a misfortune.

 

               - K. Marx, <the power of money> (부분),

                 <<Manuscripts of 1844>>, MECW. Vol.3 (www.marxists.org)

 

인간은 인간이고, 세계에 대한 인간의 관계가 인간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당신은 오직 사랑에 대해서는 사랑으로만, 신뢰에 대해서는 신뢰로써만 서로 맞바꿈할 수 있다. 예술을 향유하고 싶다면 당신은 예술적 소양을 갖추어야 한다. 당신이 타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한다면 타인을 자극하고 용기를 북돋울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인간과 자연에 대한 당신의 모든 관계는, 당신의 의지와 실제 일상 생활로부터 나온 대상에 조응하는 특정한 표현이어야 한다. 당신의 사랑이 아무런 사랑의 반응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면? - 다시말해서, 당신의 사랑이 연애로 귀결되지 못하는 짝사랑이라면, 즉, 당신이 사랑에 빠진 사람으로서 스스로 구사한 살아 있는 표현을 통해 당신을 사랑받는 이가 되도록 하지 못한다면, 그렇다면 당신의 사랑은 무기력한 것이다. - 불행하지만,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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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7/03 12:48 2005/07/03 12:48

 

제목이 시사하듯, 춤영화이다. 곧, 춤(댄스, 댄스 스포츠)이 소재인 영화다. 주인공은 "춤꾼"이고, 춤과 관련한 다양한 조연들이 등장하고, “춤 업계”에서 주로 협찬했다. 영화를 보고 나니 무척이나 춤이 배우고 싶어진다.


우리 사회는 유독 이 ‘춤’이라는 것, 그러니까 ‘사교춤’이라는 것에 대해 냉혹했었다. 60년대 정비석의 「자유부인」으로부터, 80년대의 엄혹한 캬바레 단속에 이르기까지, 가위 춤의 수난사였다 하겠다. 그런데 사교춤이 요즘은 ‘댄스 스포츠’라는 이름을 달고 점차 양지로 나오는 분위기이다. 양지로 나와서 스포츠가 되고 예술이 되어 간다. 정녕 그것은 외설인가 예술인가? 그렇다면 과연 주인공(박풍식, 이성재)은 제비인가, 예술가인가? 풍식이는 아줌마들한테서 돈을 “후려낸” 것인가, 아니면 진심이 담긴 선물을 받은 것인가? 풍식이의 진실은 과연 무엇인가? 진실과 거짓의 경계는 무엇인가? 예술과 외설의 경계는?


이 냉혹한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질문이 다음과 같이 전환된다. 진정한 우리 삶의 목적은 무엇이며, 그것을 규정하는 준거는? 행복이란 무엇인가? 당신은 행복한가? 영화를 보시라.


p.s 일본영화 「셸 위 댄스」보다 훨씬 재미있다. “이 영화가 흥행에 실패한 이유를 모르겠다. 평론가들이 망쳐버린 것인가?”라고 옆방의 H군이 말했다. 영화를 보게 해 준 S씨에게도 감사. 그리고, 혹시나 했더니, 영화 원작이 성석제 소설이다.(「소설 쓰는 인간」, 『흡혈』, 문학과지성사, 1999) 왠지 ‘성석제틱’하다 했다.


감독: 박정우 / 출연: 이성재, 박솔미, 김수로, 이칸희, 문정희 등/ 2004-04-09 / 132분 / 드라마, 코미디, 멜로, 애정, 로맨스 / 15세 관람가   

- 사진 및 정보 : 네이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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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7/01 02:12 2005/07/01 02:12

축구괴담 (蹴球怪談)
--- 이 류 / 자유기고가

축구괴담 첫 번째
- 엘리트스포츠와 헝그리정신에 보내는 만가

86,87,88,89,90,91,92,93,94,95,96,97,98,99,00,01,02?

월드컵 개막식과 개막전이 열릴 한국의 서울 상암동축구
장. 새벽까지 개막전 리허설을 하던 여고생에 의해 축구장 화장
실에서 자살한 변사체 발견. 그러나 한일 월드컵 조직위원회는
월드컵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이 사건을 일체 비밀에 부치기로
결정. 이윽고 다음날 개막전. A조에 속한 전대회 우승국 프랑스
와 월드컵 공동개최국 일본의 대결. 전대회 우승국 프랑스의 졸
전 끝에 무승부. 자국여론의 집중포화를 받던 프랑스대표팀 감
독 자살. 같은 시각, 일본에서 벌어진 B조 브라질과 한국의 대
결. 결사항전의 각오로 게임에 임한 한국대표팀의 승리. 한국은
축제분위기. 그러나 그 날 한국대표팀감독 돌연 죽음. 월드컵
조직위원회와 사건 수사를 맡은 검찰은 우승부담으로 인한 자
살로 추정. 한국 대표팀 감독은 4년 내내 여론과 국민으로부터
의 압력에 괴로워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감독의 수첩에는, "한
국대표팀의 수준은 잘해야 16강에 턱걸이 할 수 있는 수준이다.
그러나 모든 여론과 국민들은 한국대표팀의 우승을 바라고 있
다. 우리는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 그라운드에서 죽어야 한
다..."라고 씌어져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검찰측에서는 부인
하고 있다.
프랑스와 한국대표팀감독의 자살로 추정되는 죽음으로 인해 월
드컵 일정이 일주일간 연기되고, 애초 개막전 전에 발견된 변
사체에 대해서도 두 대표팀감독의 죽음과 관계있을 것으로 보
고 재수사에 들어갔다.
한편, 한국 대표팀의 새로운 감독으로 부임한 차범근감독은
부임전 죽은 전감독으로부터 수상한 전화를 받았다. "김진주가
살아있어..." 김진주선수는 도시 빈민가정에서 태어나 라면만 먹
고 죽을 각오로 공을 차, 고졸로 프로에 입단한 입지전적 인물
로, 1986년에 멕시코월드컵 국가대표로 발탁될 예정이었으나 각
프로구단과 한국축구협회의 이해관계로 발탁직전에서 탈락했으
며, 탈락의 충격과, 발탁되기 위해 실시한 무리한 훈련의 후유증
(그는 끝까지 라면만 먹고 그라운드에서 죽을 각오로 뛰었다)
이 겹쳐 죽은 것으로 알려진 선수다. 중국 프로구단에서 활동하
면서 국내 축구계에 대해 다소간 정보가 어두웠던 차범근 감독
은 지난 몇 년간의 대표팀 상비군에서 김진주선수와 같은 얼굴
의 선수를 발견. 그 선수는 계속 상비군에서 대표팀 발탁 직전
에서 탈락했다. 차범근은 김진주의 실체에 접근해 가던 중. 한
국의 최고 스트라이커로 성장한 이동국과 함께 상암동 그라운
드에서 김진주를 만난다. 경기장 라이트가 모두 터지고, 골대가
쓰러지고 그라운드가 피바다가 된다. 차범근이 김진주에게 말
한다.
"네가 이런다고 바뀌는 게 아니야. 모든 대표팀의 감독이
죽어도, 월드컵은 벌어질 거고, 한국축구협회는 계속 건재할 거
야. 피파가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진주야 네가 할 일은 없어.
이제 네 갈 길을 가. 이제 축구도 바뀔 거야. 축구는 축구일
뿐이야. 제일 잘하는 선수가 공정하게 대우받고, 축구선수들이
모두 좋은 조건에서 축구를 할 수 있게 될 거야. 내가 잘 할게.
제발 너의 길을 가."
그러나 김진주는 조용하고 음산한 목소리로 말한다.
"나는 다만 공을 차고 싶었을 뿐이야.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
는 그라운드에서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공을 차고 싶었을 뿐이
야. 내가 할 줄 아는 것은 공을 차는 것 밖에 없었어. 나는 말
을 배우는 것보다 먼저 공을 찼으니까. 내가 어렸을 때 할 수
있는 놀이는 공을 차는 것 밖에는 없었어. 아버지는 공사판에
나가고, 엄마는 파출부로 나가면 나는 할 게 아무것도 없었지.
동네 형들은 본드 불고, 패싸움하고…. 나는 그 지긋지긋한 동
네, 그 지긋지긋한 가난을 벗어나고 싶었어. 하지만 공부는 과
외를 하는 애들한테 당할 수 없었고, 내 머리도 좋지 못했어.
하지만, 내가 남들보다 좀 더 공을 잘 찬다는 사실을 알고는 더
죽기살기로 공을 찼지. 그래서 난 성공했어. 하지만, 대표는 마
지막에 축구협회 농간으로 탈락했고, 내 축구에도 자신감이 없
어졌지. 그래, 라면먹고 마구잡이로 배운 축구가 도저히 유럽의
축구를, 남미의 축구를 당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거야.
내가 은퇴하면 뭘 하지? 서른만 되어도 새로 축구를 배운 애들
한테 당할 수 없을 거고, 대표팀이 될 가능성도 없고…. 뭘 하
지? 내가 할 줄 아는 건 공차는 것밖에 없는데?… 아아, 한 번
만이라도 태극기를 달고 월드컵에서 뛸 수 있었다면 달라질 수
도 있었겠지…. 하지만 난 이제 대표선수가 되지 못한, 그리고
아무한테도 주목받지 못하고 쓸쓸하게 그라운드를 떠났던 많은
축구선수들을 알고 있어…. 난 지난 몇 년간을 계속 상비군과
실업팀을 전전했지만, 나를 알아본 사람은 한 명도 없었어….
난 그렇게 해서라도 공을 계속 차고 싶었을 뿐이야…."
김진주는 이 말과 함께 그가 소중히 간직하던 축구공 하
나만을 남기고 이승을 떠난다.


축구괴담 두 번째
- 넌 내가 아직도 축구공으로 보이니?

검찰은 2002월드컵 시작과 함께 벌어진 세 건의 사건을 상호
관계없는 개인적 문제로 인한 자살로 매듭짓고, 조직위원회는
일주일동안 중단되었던 대회를 다시 시작한다. 다소 대회의 열
기가 식은 상태에서 대회가 다시 시작되었지만, 개최국인 한국,
일본의 선전과 월드컵 최초출전 중국팀의 선전, 축구 제 3세
계국가들의 돌풍이 이어지면서 대회는 다시 열기를 띄어갔다.
아프리카팀의 절대강세 속에서 유럽팀의 약화, 남미의 현상유지,
아시아의 돌풍이 중단되었던 대회를 다시 열광의 도가니로 몰
아넣었다. 결국 나이지리아와 잉글랜드가 맞붙은 결승전에서
나이지리아가 최초의 비남미, 비유럽우승국, 아프리카우승국이
되었다. 중국은 처음 출전한 월드컵에서 4위에 오르는 이변을
연출함으로써 전대회 크로아티아의 1회 출전국 돌풍을 이어나
갔으며, 한국은 브라질을 꺾는 선전을 보였음에도 16강에 만족
해야 했다.
그런데, 대회가 끝나고 월드컵에 출전했던 각 팀의 선수들이
하나씩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최초의 희생자는
이번 대회에서 야신상을 받은 잉글랜드의 골키퍼였다. 그는
전 시합을 통해 신기에 가까운 골문 방어를 보여줘 최고의 수
문장으로서 평가받은 선수였다. 하지만 대회가 끝나고 귀국 직
후 자신의 집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사인은 내장파열. 검시
한 의사는 빠른 속도의 축구공으로 인한 충격으로 인한 내장
파열로 추정했다. 그 다음의 희생자는 중국팀의 수비수였다. 그
의 사인 역시 축구공의 충격으로 인한 내장파열. 그러나 세 번
째의 희생자는 의외로 피파회장이었다. 그의 사인은 두부타격으
로 인한 뇌진탕이었다. 대회 경기를 다시 모니터한 협회와 경
찰에 의하면, 피파회장은 한국과 중국의 경기 관전 중 경기장
바깥으로 튀어나온 볼을 머리에 맞은 것으로 알려졌으나, 뇌
진탕을 일으킬 정도의 속도와 강도는 아니었다고 발표했다. 네
번째의 희생자는 미국의 공격수였다. 그는 사망직전 발견돼 목
숨을 건졌으나 발이 심하게 썩어들어가는 병에 걸린 것으로 알
려졌다. 사태가 이렇게 심각하게 진행되자, 월드컵 참가국은
모두 선수들에 대해 정밀한 종합검진을 실시했다. 실시결과 놀
라운 결과가 발표되었는데, 경기에 한 번도 뛰지 않은 후보선수
들을 제외한 선수단 전원의 에이즈감염이었다.
그러자, 피파는 한국과 일본의 경기장에 문제가 있었다는
주장을 하고 한국과 일본은 선수단이 묵었던 숙소, 경기장과 모
든 물품에 대해 정밀한 검사를 했으나 어떠한 문제도 발견하
지 못했다는 발표를 했다. 그러나 동남아에서 처음으로 참가권
을 획득해 예선에서 탈락한 말레이지아에서 축구공에 문제가
있다는 주장을 제기해 그에 대한 면밀한 조사에 들어갔다.
2002월드컵의 공인구는 아디다스가 제작한 '아리랑'과 '가미
가제'. 전대회에 비해 탄력을 높인 최초의 64조각 공인구였다.
막판까지 아디다스와 나이키, 낫소와 미즈노가 공인구를 따내
기 위해 경합을 벌였으나 아디다스의 승리로 돌아갔고, 공인구
의 이름은 대회개최국과 관련시켜 작명하는 전통에 의해 '아리
랑'과 '가미가제'가 되었다.
한편, 밤늦게까지 한국의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축구공을
앞에 두고 실험과 조사를 계속하던 이박사는 깜박 잠이 들어
혼자 연구실에 갇히게 된다. 그런데 잠이 깨 보니 충격실험을
하고 있던 축구공에서 빨간 피가 흘러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는
검사기의 공을 다른 것으로 바꾸어 보았으나 마찬가지였다. 그
는 축구공의 가죽을 모두 벗겨보았다. 그런데 그 속에는 놀랍게
도 동남아인으로 보이는 어린 아이의 머리가 들어있었다. 그는
도망치려 했지만, 연구소의 모든 문이 잠겨 있었다. 실험실 안
의 모든 축구공의 가죽이 벗겨지고, 그 속에서는 어린아이들의
머리가 나와서 소리를 맞춰 노래한다. 이박사는 그 날 이후 죽
을 때까지 이런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고 한다.
"우리들은 노동자. 다섯 살부터 노동을 했네. 난 돈도 못받고
축구공을 붙였지. 먼지나는 작업장, 숨도 쉬기 어려웠어. 아침부
터 밤까지. 아침부터 밤까지. 우린 축구를 못해. 우린 축구가 싫
어. 우린 축구를 발로 하지 않고, 손으로 하니까. 밤새 축구를
보는 어른들, 밤새 축구공을 만드는 아이들. 너는 아직도 이게
축구공으로 보이니? 아니야 이건 우리들의 피고 우리들의 살
이야. 아직도 호나우두의 가슴에서 빛나는 승리의 마크 나이키
가, 독일 축구팀의 가슴에서 빛나는 환호의 삼선 아디다스가 멋
지게 보이니? 그 속에서 무슨 냄새가 나는 것 같지 않아? 피냄
새가 말이야. 이제 우리의 복수는 시작일 뿐이야…."
축구공에서도 어떤 이상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축구공은
더 이상 팔리지 않았고, 동남아의 아동노동을 착취해서 생산했
던 아디다스, 나이키 등 다국적 기업들의 축구공 공장은 모두
동남아에서 철수되었다.
하지만, 배구공에서도, 농구공에서도, 축구화에서도, 유니폼
에서도 피는 다시 조금씩 흘러내리고 있었다.

* 이류님은 서울대를 졸업, 자유기고가로 일하고 있다.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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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27 02:12 2005/06/27 02:12

이나영

2005/06/27 01:45

이나영은 참 예쁘다. 젊은 사람으로 하여금 판단을 흐리게 한다.

 

 

이런 이미지는 마치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리고 그 말의 저 너머에 기대감이 한껏 부풀어 오른 표정이다.

 

 

 

그런가 하면 이런 이미지는 뭔가에 몰두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모두 어떤 환상 속에서 살기 때문에 그것을 완전히 벗어났다고 선언하는 오만은 부려서는 안될 것이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는 차원에서 이나영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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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27 01:45 2005/06/27 01: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