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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에 대하여

  • 분류
    건설론
  • 등록일
    2005/03/17 17:13
  • 수정일
    2005/03/17 17:13
  • 글쓴이
    서른즈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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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너도 나도 사회주의를 얘기한다. 그러나 대안으로서의 사회주의를 얘기할 때, 그것이 얼마나 엄청난 과제이고 난문제인가를 생각할 때, 과연 그들이 얼마나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얘기하고 있는지 의심이 간다.

 

최근에 읽은 몇권의 책들-스위지와 베텔하임의 사회주의 이행논쟁과, 노브의 소련경제사, 노브의 실현가능한 사회주의라는 책을 읽은 독후감은 이렇다.

 

우리는 스탈린주의에 대한 극복없이는 사회주의를 얘기할 수 없다는 것.
소련과 동구가 왜 망했는지 규명하고 누구나 공감할만한 올바른 건설방도가 마련되지 않는 한 대중을 설득할 수 없다는 것.
절대다수의 대중이 사회주의를 갈구하지 않는데, 혹은 확신하지 않는데 사회주의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공염불이라는 것.- 이것은 이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이고 기본모순이 노자간의 모순이라고 했을 때, 필연적으로 pt혁명단계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맨날 주요모순이나 들먹이는 단계론이 아니라 모든 운동이 기본모순의 해결을 위한 사회주의 운동의 전면화에 나서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87년 이후 지나간 20년간 우리는 전면화에 실패한 혹은 전면화를 이루지 못한 것의 원인을 근본부터 반성하지 않으면 안된다.

 

스탈린 치하에서 공업을 위해 농민에 대한 악랄한 착취와 억압이 있었다는 것-소위 사회주의 원시적 축적문제-
혁명이 지주를 몰아내었을 뿐, 해방이 아니라, 소수의 pt당이 다수의 농민에 대한 독재로 변질되었다는 것.
계획경제가 명령경제가 되고, 민주주의와 법치의 소멸 뒤, 거대하고 무능하고 기생적인 당관료들의 채찍질에 의해 중공업이 발전되고 건설이 이루어졌다는 것.

 

이 체제를 어떻게 볼것이냐에 대하여, 혹자는 국가자본주의라고 얘기하지만, 우리가 고유의 의미로 쓰는 자본주의와 자본가라는 개념을 생각할 때, 결코 국가자본주의나 관료자본주의라고 얘기할 수는 없다.  물론 그들의 얘기를 좀 더 들어봐야 겠지만…
그렇다면 국가사회주의였는가? 사회주의가 생산수단의 사회화와 계획경제를 의미할 때, 확실히 그것은 사회주의였다.
그러나 사회주의가 모든 종류의 착취와 억압과 소외를 극복하는 운동이라고 할 때, 본건적 자본가적인 착취는 없었는지 몰라도, 노동자와 농민이 그들 운명의 주인은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변형된 노동자국가론이나 혹은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닌 변종으로 규정할 것인가?

 

자유와 민주주의는 부르주아 사회보다 더 발전해야만 한다. 결국 대중이 수동적으로 동원되고 억압되는 대상인 한 민주주의는 없다.
맑스는 사회주의를 어떻게 건설할 것인지에 대하여 남겨 놓은 게 없다. 다만 엥겔스와 함께 모든 악의 근원을 사적 자본주의적 소유로 보고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주장하고, 무정부주의적인 생산의 폐해를 극복하는 방안으로 계획화를 얘기하였을 뿐이다.

 

나의 지금까지의 결론은 이렇다.
국가가 사라져 갈 뿐이듯이 상품과 시장 또한 하루아침에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장기에 걸쳐 그 역할이 축소되고 사라져 갈 것이라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고도로 발달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압도적인 권력을 갖은 점령군이 아닌 이상 사회화 혹은 국유화가 단기에 이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과, 가치법칙은 폐절되면 재앙을 낳는다는 것. 중앙집권적인 계획은 다양한 사용가치를 갖는 품목을 계획하기에는 부적절하다는 것. 계획은 양적인 것에 가능하지 질적인 것에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전철에 타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의복과 신발을 보라. 각양의 재질과 디자인과 색상의 상품이다. 그것들은 개개의 생산단위에서 시장을 위해 결국 소비자의 기호를 위해 경쟁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것을 상의 몇벌 하의 몇벌로 합산하고 계획하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전력이나 철강, 곡물처럼 양으로만 규정해도 문제없는 것이 있다. 결국 질적인 것, 다양성, 기호는 가치로 표시하는 외에 수치로 표시한들 별 의미가 없고, 결국 계획과 소비자의 만족과는 괴리가 생기는 것이다.
나는 계획이란 가능한 한도내에서 끊임없이 넓혀가고 심화되는 것이지 모든 것이 국유화되었다고 일거에 실천해서는 안되는 문제로 본다. 이 문제는 개개 생산단위의 자율성과 거시경제적인 접근으로 해결되지 않을까 한다.
결론은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사회적인 긴박성이 있는 만큼 사회화와 계획화의 영역을 넓혀가는 과제이고, 그 긴 시간동안 시장과 가치법칙과 소생산자 혹은 부르주아까지 온존되는 것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노동자가 사회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피지배계급을 얼마나 수탈하고 억압할 것인지 혹은 관용을 베풀 것인지는 역관계와 전망에 따라 다를 것이다. 사회의 모든 중요한 결정에 노동계급의 이익과 입장이 관철되고, (여기까지는 경제주의라고 할 수 있다), 착취와 억압과 소외의 완전한 극복을 위해 프로그램을 전 사회적으로 공유하고 실천해 나가는 것 이것이 이행기의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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