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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 : 제국주의와 기회주의자들에게 강간당한 타락한 혁명

2-3. 리비아 : 제국주의와 기회주의자들에게 강간당한 타락한 혁명

 

2-3-1. 리비아 항쟁의 배경-카다피 정권의 성격

“1969년 (친영 리비아왕국을 무너뜨린-인용자) 쿠데타로 집권한 카다피는 나세르의 아랍민족주의를 따라 국내외 정책을 추진했다. 영국군과 미군을 철수시키고 이탈리아인 3만 명의 자산을 동결하고 추방했고, 외국계 은행들과 석유기업의 60%를 국유화했다. 덕분에 카다피는 몇 년 뒤 1973-74년에 유가를 네 배나 끌어 올릴 수 있었다. 카다피는 늘어난 석유수입으로 야심찬 발전계획을 추진하고 몇몇 복지제도를 도입했다. 도로, 학교, 병원 등을 지었고, 문맹퇴치운동을 벌였고, 최저임금도 인상했다. … 1967년 6일 전쟁이 끝난 뒤 70년대 동안 아랍 정부들이 이집트를 선두로 점점 제국주의에 대한 적대 정책을 중단하고 실용주의적 길로 들어서면서 카다피는 점점 고립되어갔다. … 1972년 3월 트리폴리의 항만 노동자들이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이자 정부는 파업과 노동조합의 정치활동을 금지했다. … 혁명사령부위원회는 ‘정당을 건설하거나 참여하는 자는 누구나 사형에 처할 수 있다’는 법령을 공포했다. 1976년 카다피는 기초인민위원회를 도입하고 … 인민회의들과 인민위원회 안에 또 다른 정치권력기구인 혁명위원회를 설립한다. … 혁명위원회의 우두머리들은 경영자들과 고급관료들이었고, 카다피는 여기에 믿을만한 젊은 간부들을 포함시켰다. 혁명위원회들은 공장, 사무실, 학교, 대학, 도시지구, 군대 내 곳곳에 있었고, 거기서 정치경찰 노릇을 했다. … 리비아 경제는 1980년대 중엽 국제유가하락으로 어려움에 빠져 들었다. 국가수입의 75-90%가 석유에서 나올 정도로 석유 수출의존도가 높고 다른 산업이 취약한 상황에서 리비아 경제는 유가하락으로 큰 타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리비아는 석유 없는 주변국들보다 훨씬 부유했지만 카다피가 내세웠던 자립경제건설은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 1981년 시작된 대 리비아 경제제제는 경제적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1992년부터는 유엔제재가 추가되었고, 1996년부터는 ‘이란·리비아 제제법’으로 석유개발마저 봉쇄됐다. … 레이건은 1996년 트리폴리와 벵가지에 폭탄 60톤을 쏟아 부었다. 이 공습으로 무고한 리비아인 100여 명이 목숨을 잃거나 다쳤다. … 리비아는 말로는 계속 미국을 비난했지만 1991년 미국의 이라크 전쟁 때 중립을 취했고 1992년 유엔 제제 후에는 제3국을 통한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모색하기 시작했다.1) … 카다피는 1999년 서방이 팬암기 폭파사건으로 지목한 용의자 두 명을 넘겨줬다. … 2003년 카다피는 대량살상무기 포기 선언을 했고, 40년 만에 석유채굴권 공개입찰에 다국적 기업들도 참여하도록 허용했다. … 사실 이런 경제개방 정책은 이미 1990년대에 시작됐다. 공기업 특혜폐지와 사기업화, 외국인 투자유치 강화를 위한 법 개정, WTO가입 등을 추진했다. … 2000년대 동안 리비아와 서방과의 관계가 긴밀해지면서 리비아로 달려든 세계굴지의 석유기업들이 황금열매를 약속받는 한편 카다피 일가와 그 측근들은 엄청난 부를 쌓아 올렸다. 석유산업과 각종 이권에 관여하는 카다피 일가의 재산은 1,500억 달러(165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2) 카다피 일가는 해외 부동산과 기업에 공개적으로 투자하며. 한때 식민모국이었던 이탈리아의 정유회사와 통신사 등에 지분을 갖고 있다. … 반대로 경제개방 정책 속에 리비아 민중의 삶은 악화됐다. 1990년대부터 카다피 정권은 공공지출을 크게 줄였다. 보조금 제도와 실업수당을 폐지했다. 게다가 IMF 권고를 받아들인 결과 허약해진 통화 때문에 인플레이션마저 발생해 노동자들은 실질임금 하락으로 고통받았다. … 정부공식통계로는 실업률이 20%이지만 실제로는 35%는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리비아 인구의 70%를 차지하는 20세 이하 젊은 층이 극심한 실업난을 겪고 있다. 계속된 억압통치와 함께 이와 같은 빈곤이 리비아 민중이 목숨을 건 저항에 나선 이유였다.”3)

“불량국가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리비아는 2000년부터 유럽국가와 협력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가 특히 카다피 정권을 포용하는 선봉에 섰다. 2008년 베를루스코니는 카다피와 양국 간 우호 동반 협력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서 이탈리아는 50억불을 향후 20년 동안 주요 기반시설계획에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배상으로 기금을 마련할 것을 약속했다. 이 조약으로 카다피는 도덕적 승리를 얻었고 이탈리아에게는 분명한 전략적 경제적 이익을 주었다. 기반시설투자 계획은 이탈리아 계약자에 의해 수행될 뿐만 아니라 베를루스코니가 말했듯이 불법 이민자의 감소와 더 많은 석유를 보장할 것이다.

국제 엠네스티는 양국의 조약과 리비아가 구금하고 있는 이민자 수의 증가에는 직접적인 연관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이민자들이 EU국가에서 리비아로 추방되면 그들이 박해받아 도망나왔던 나라로 강제송환될 운명에 처해진다. 카다피의 관리들은 리비아의 목적은 이탈리아로부터 받은 모든 불법이민자들의 송환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리비아가 말타나 프랑스 등 EU 개별국가나 유럽위원회와 맺은 조약들은 이탈리아와 맺은 조약처럼 이민자들의 억류와 강제송환을 받아들이고 있다.”4)

“카다피는 그의 권력과 지배를 40년간에 걸쳐 친족과 종족에 대한 보호로 통합해왔다. 수년 동안 단순한 소비재에서부터 기초 의약품까지 인위적으로 결핍이 초래되자 광범위한 부패가 생겼다. 카다피 체제의 변덕스러운 잔인함은 광범위하고 깊은 불신을 낳았다. 정부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자 리비아인들은 종족과 가족의 위안에서 도피처를 찾았다. 리비아 사회는 균열되었고, 군대까지 포함한 모든 국가기구는 친족과 지역이라는 축을 따라 분열되었다. 리비아는 튀니지나 이집트와는 달리 어떠한 정치적 연대체나 경제단체의 연결망이나 어떤 종류의 국가기구도 없었다.5) 신뢰할만한 경찰을 포함한 어떤 종류의 공적관료체제가 없었기 때문에 안전과 안정 심지어 상품과 서비스의 접근까지 친족관계가 제공했다. 시위의 초반에 정권의 ‘분할과 지배’ 능력이 흐트러지기 시작하자 리비아 사회는 이러한 네트워크을 따라 균열되었다. 리비아는 민주화가 아니라 국가형성이라는 복잡한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6)

 

이상으로 살펴본 바와 같이 카다피는 집권 전반기에 석유수입을 바탕으로 일부 진보적인 분배정책을 실시하였지만, 야당과 노동자계급 등 반대세력은 철저하게 억압하면서 관료기구를 포함한 국가기구를 허구화하고 국가를 부족연합으로 재편하였다. 대외적으로는 반제의 수사를 남발하면서 고립에 처하자 제국주의자와 거래를 하면서 자기 일족만을 위한 도적질에 탐닉하였고, 민중들은 극심한 실업난과 생활고에 허덕이고 있었다. ‘국가는 부유하였지만 인민은 가난하였다.’ 카다피는 이에 불만을 품은 민중들을 정보경찰로 악랄하게 억압하는 거의 마피아 수준의 통치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2-3-2. 항쟁의 발단과 초기 양상

리비아(인구 640만 명)의 항쟁은 제2의 도시이자 주요항구인 동부지역(시레나이카)의 벵가지Benghazi(인구 65만 명)에서 시작되었다. 리비아는 남한의 18배에 달하는 큰 나라이지만, 자위야Al-Zawia, 트리폴리(인구 170만 명), 미스라타Misrata, 시르트Syrte, 벵가지, 바이다Al-Bayda, 토브룩Tobruk 등 주요도시가 모두 북쪽의 지중해를 따라 서에서 동으로 길게 늘어서 있는 나라이다. 리비아의 동부 사람들은 서부보다 더 차별받는다고 생각하였고 카다피에 대한 적개심과 두려움도 컸다. 리비아의 민중항쟁이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왜 내전과 제국주의 간섭전쟁으로 발전되었는가는 초미의 관심사이다.

“이웃 나라의 시위에 용기를 얻어 극심한 실업과 치솟는 물가, 고질적인 부패에 괴로워하면서 리비아 활동가들도 리비아의 개혁과 부패의 종식을 요구하는 페이스북 그룹을 만들었다. 대부분의 활동가들은 당연히 실명이 아닌 가명을 사용했다. 그들은 (카다피의 즉각 퇴진이 아닌-인용자 삽입) ‘개혁’이라는 우산을 쓰고 2월 17일을 봉기의 날로 정했다.7) 카다피는 2월 8일 트리폴리에서 활동가들과 만나 요구조건을 들어주겠다면서 그들의 페이스북 페이지를 닫아줄 것을 설득했다. 카다피의 요청은 무시되었고 수많은 페이스북 페이지는 우쭐했다.

리비아의 밖에서 소수가 진지하게 시위 제안을 하는 동안 벵가지에서 일어난 사건이 모두를 놀라게 했다. 벵가지와 동부지역은 오랫동안 카다피의 목의 가시였다.

시위 예정 이틀 전인 2월 15일 리비아 보안대(security forces, 일반적으로 진압경찰을 뜻하나 국내안전부ISA:Internal Secury Agency의 소행인 듯-인용자)가 테르빌Fathi Terbil을 연행했다. 그는 1996년 벵가지의 아부 살림 교도소에서 학살당한 1,200명의 죄수들의 가족을 대변해온 벵가지 출신의 유명한 변호사였다. 학살당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벵가지와 동부지역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테르빌의 구속은 벵가지의 주요 광장에서 광범위한 시위에 불을 붙였다. (테르빌은 다음날 석방되었다.-인용자 삽입) 그 당시 시위는 동부에서만 일어났고, 2월 20일 수도 트리폴리에 도달했다. 40년 동안 억눌려왔던 불안과 분노가 폭발했다. 해외에서도 리비아를 떠난 사람들이 리비아의 대사관과 영사관 앞에서 카다피의 억압적 지배를 비난했다. 카다피는 어떤 시위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부인했지만 수백 개의 동영상과 소식이 페이스북과 트위터에 올라왔다. 수많은 카다피의 위협적인 연설은 두려움도 자극했지만 앞으로 나아가야 하고 카다피를 끝장내야 한다는 결심을 굳게 만들었다. 지금 시점에서 후퇴란 시위 참가자들이나 온라인상에서 지지의 목소리를 낸 사람들과 그 가족들이 사형에 처해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군대와 정치 지도자들의 광범위한 이탈에 의해 반군은 카다피 군대에 대한 심각한 타격을 가하고 벵가지와 동부의 시레나이카로부터의 퇴각을 가져왔다. 반군은 이들 지역이 해방되었으며, 수백 명이 죽고 도시가 파괴되었음을 밝히면서 서부의 반란도 촉구했다. 그동안 카다피는 전열을 가다듬고 서부지역부터 반격에 들어갔다. 내전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뉴스는 트리폴리 시내를 지키는 수천 명의 용병의 등장부터 시작하여 시내에 검색대의 설치, 이동전화와 인터넷의 단절8)을 보도했다.”9)

“테르빌의 체포는 역효과를 내었다. 2월 15일 감옥에서 살해당한 사람들의 가족이 ‘벵가지여 일어나라! 기다렸던 날이 왔다!’를 외치며 테르빌의 체포에 항의하기 위하여 거리로 나섰다. 인민들이 항의하기 위하여 거리로 나섰다. 알 마지Al-Marj, 알 비다Al-Bida, 데르나Derna, 샤하트Shahat, 토브룩, 아즈다비야Ajdabiya 등 리비아 동부의 많은 지역에서 시위에 동참했다.

벵가지에 있는 군부대를 장악할 때까지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이것은 즉각적으로 상황을 내전의 방향으로 바꾸었다. 벵가지 인민들의 영웅적인 봉기는 1936년 거의 빈손으로 파시스트 군대를 공격한 바르셀로나 노동자들의 봉기와 비견될 수 있다. 비무장 시위대는 군부대에 던질 나무와 돌과 화염병으로 그들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시위대 중의 한 사람이 부엌용 가스 실린더를 차에 싣고 병영military barrack으로 돌진하여 두 개의 벽을 파괴했다.

봉기자들이 벵가지의 병영을 장악하는 데 며칠 걸렸다. 혁명적 인민의 압력으로 군대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유니스Abdul Fatah Younis 장군10)이 지휘하는 벵가지 부대는 봉기에 가담했고 병영의 붕괴를 가져왔다. 벵가지 인민들이 부대 건물로 들어섰을 때 자기 인민에게 총을 쏘라는 명령을 거부했기 때문에 사살된 많은 병사들의 시체를 발견되었다.11) 동부에서만 일어났던 혁명들은 결국 서부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자위야와 미스라타 그리고 수도의 몇몇 지역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12)

“2월 15일 저녁 테르빌의 연행 후에 500-600명의 시위대가 벵가지 경찰서 앞에서 시위하였다. 보안요원 10명을 포함한 38명이 부상당하는 충돌 끝에 시위는 경찰에 의해 폭력적으로 분쇄되었다. 바이다와 진탄Zintan에서는 시위대가 카다피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면서 경찰서와 보안기관 건물에 방화하였다. 진탄에서는 시위대가 도심에 텐트를 세웠다. 다음날(2월 16일) 벵가지와 진탄과 데르나에서는 무장시위가 계속되었고, 보안대는 치명적인 폭력으로 대응했다고 전해졌다. 벵가지의 중심지에 수백 명이 모였고, 경찰은 물대포로 시위대를 해산하려고 하였다. ‘분노의 날’인 2월 17일 벵가지와 아즈다비야 데르나, 진탄, 바이다에서 시위가 일어났고, 보안대는 무장한 시위대에 실탄을 쏘았다. 시위대는 정부 건물과 경찰서를 방화하였다. 트리폴리에서는 시위대가 보안기관 건물과 ‘인민의 전당’을 불태웠다. 2월 18일 경찰과 군대는 벵가지가 시위대에게 압도되자 (카티바 단지Katiba compound13)로-인용자 삽입) 철수하였다. 군인들 일부는 시위대에 가담했고 그들은 지역방송국을 장악했다.”14)

“2월 16일 카다피를 반대하는 평화로운 시위가 바이다에서 행진했다. 이틀간의 시위 후에 2월 17일 벵가지의 투쟁이 시작되었다. 보안대는 시위대에 발사하여 14명이 죽었다. 다음날 사망자 중의 한사람의 장례행렬이 카티바 단지를 지나갔다. 조문객들이 먼저 돌을 던졌는지 카티바의 군인들이 먼저 총을 쐈는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결국 24명이 죽었다. 학살이 일어난 후 시위대에 총을 쐈다고 지목된 두 명의 경찰관이 붙들려 교수형에 처해졌다. 경찰과 군인들은 도시가 시위대에 압도되자 도망갔다. 어떤 군인들은 시위대에 가담하고 국영 지방라디오방송국을 장악하는데 도움을 줬다. 바이다에서는 지역경찰과 반군이 통제하는 부대가 시위대에 합류했다는 확인되지 않은 보도도 있다. 이틀 전인 2월 16일 총을 가진 이슬람주의자들이 이탈한 육군대령의 도움으로 데르나의 군 보급창으로 쇄도하여 250개의 무기와 70대의 군용차량을 획득했다고 말했다. 이 습격으로 4명의 군인이 죽고 16명이 부상했다. 18일 밤 벵가지에서 카다피 충성파들이 모여 있는 유일한 지역은 카티바 단지 뿐이었다. 2월 19일 또 다른 장례행렬이 묘지로 가는 도중에 저항하는 행동으로 카티바 단지를 지나가다가 또다시 단지 안의 카다피 충성파들로부터 총격을 받았다. 2월 18일과 19일 반정부 세력들의 대대적인 반격이 있었다. 바이다에서는 50명의 용병15)이 시위대에 의해 처형되었다. 일부는 시위대가 경찰서를 잠그고 불을 질렀을 때 죽었고 15명은 법원 앞에서 맞아 죽었다. 시체들의 일부는 전시되었고 비디오에 찍혔다.

장례식에 대한 두 번째 공격에 뒤이어 반정부 시위대는 격심한 사격에 후퇴를 반복하면서도 불도저를 징발하여 카티바 단지의 벽을 부수려고 하였다. 싸움이 계속되자 한 무리의 군중은 벵가지 외곽의 군부대를 공격하여 군인들이 세대의 작은 탱크를 포함한 무기를 버리게 하였다. 반대파는 이들 탱크로 카티바 단지의 벽을 들이 받았다.

전투는 20일 아침에 끝났다. 하루 사이에 30명이 더 죽었다. 장례로 위장한 자살 폭탄차량이 단지의 입구를 공격하여 날려버렸다. 반정부 세력은 바이다와 데르나로 부터 보강을 받아 기지에 대한 공격을 재개했다. 기지에 대한 마지막 공격 동안 42명이 죽었다. 오후에 내무장관인 유니스가 포위된 보안대를 구출하기 위하여 ‘벼락thunderbolt’라고 부르는 특전여단을 데리고 나타났다. 시 외곽에 기지를 둔 그의 군대는 기관총과 대공화기를 장착한 트럭과 함께 카티바 반대편에 도착했다. 두 대의 탱크가 뒤따랐다. 어쨌든 유니스는 (발포를 하지 않도록 하고 반정부 시위대와 협상 끝에-인용자 삽입) 반군에 가담하고 카다피 충성파들이 도시를 안전하게 빠져나가도록 허용했다.”16)

 

이상으로 살펴본 바와 같이 테르빌의 연행으로 벵가지에서 시작된 2월 15일과 16일의 항의시위는 구타와 물대포 수준이었다. 그런데 2월 17일 보안대가 총을 쏘고 8명이 죽자 시위대는 경찰서와 관공서를 방화하였고, 다음날에는 총격에도 불구하고 친카다피 세력이 모여 있는 군부대를 포위하였다. 바이다를 비롯한 동부의 다른 곳에서도 경찰서를 공격하고 군인들의 이탈이 있었고, 일부 시위대는 탱크를 비롯하여 총으로 무장을 하게 되었다. 결국 지역경찰과 보안대 그리고 군부대는 무너지고, 내무장관이자 육군소장인 유니스까지 반란에 가담하였다. 2월 20일에는 트리폴리에서도 시위가 시작되고 혁명위원회와 내무부 건물 그리고 ‘인민의 전당’을 불태우는 봉기가 있었다.17) 그리고 2월 21일부터 법무장관 잘릴Mustafa Abdul Jalil18)을 비롯한 정권핵심부와 수많은 외교관과 군대의 이탈이 뒤따랐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리비아인들은 벤 알리와 무바라크의 몰락을 보면서 자신들도 카다피를 끝장낼 때가 왔다고 생각하였고, 카다피의 심복과 군인들도 카다피가 못 버틸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또한 리비아의 초기 항쟁이 경찰서와 군부대 그리고 카다피의 혁명위원회 건물을 방화하고 보안대를 처형하는 등 튀니지나 이집트보다 훨씬 과격한 양상을 보이는 것은 그만큼 억눌려왔던 불만이 컸기 때문이기도 하고, 악랄한 카다피와의 투쟁을 사생결단의 투쟁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동부는 대부분 해방되었고, 미스라타를 비롯한 서부도 봉기에 가담하였다. 이 기세를 몰아붙이면 카다피는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대중이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즉 민중주도의 혁명은 2월 20일이 지나면서 왜곡되기 시작하였다.

 

2-3-3. 내전으로의 발전과 제국주의 개입전쟁

2-3-3-1. 제국주의의 개입을 이끌어낸 황색언론과 앞잡이들의 집요한 공작

바이다에서는 2월 16일부터 보안대에 의한 총격이 있었고, 벵가지에서는 2월 17일 보안대의 총격으로 8명이 죽었다. 2월 17일부터 19일까지 보안대의 총격에 분노한 시위대가 경찰서와 보안대와 군부대를 방화하고 공격하면서 일부 시위대는 화염병의 수준을 넘는 총기로 무장을 하고 있었다. 2월 20일 오후 시위대가 가스통을 싣고 군부대의 정문을 폭파시키자 친정부세력은 카티바 단지 안에 고립되었다. 이 상황에서 특전여단을 이끌고 현장에 급파된 유니스는 총기 사용을 금지하고 시위대와 협상하였다. 즉 이미 80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동부 전역은 물론 프리폴리와 미스라타까지 전국이 소요상태에 들어간 상황이었지만, 대화와 협상으로 마무리되었고 비록 트리폴리에서 시위대를 향한 보안대의 총질이 계속되고 있었기는 하지만, 군대를 동원한 유혈진압이 반드시 예정되어 있는 상황은 아니었던 것이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용병, 집단학살, 중무기, 비행기 등의 악선전이 알자지라를 비롯해서 서방 언론들이 집요하게 확대 재생산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카다피의 초기대응의 양상은 벤 알리의 무장경찰이 탈라를 탈환하기 위해 1주일 이상의 공방 끝에 62명의 사망자가 난 것과는 다르다. 카다피의 둘째 아들은 2월 20일 사실상의 내전을 경고하였고, 카다피는 2월 22일 시위대의 진압을 명령했다. 카다피 역시 무바라크처럼 시위의 초기에 과도한 진압이 역효과를 낼 것을 우려하여 보안대의 총질은 있었지만 소극적 대응을 하였고, 2월 하순부터 사실상의 내전상태에 있었음에도 유엔의 결의를 피하고자 혹은 서방 언론의 비난을 살만한 대응을 억제하였던 것이다. 즉 악마와 같은 카다피나 일선의 경찰과 군대는 동부가 반란상태에 빠질 때까지 적극적인 학살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색언론들은 용병과 중무기, 대량학살, 비행기 등을 운운하며 마치 카다피가 항쟁의 초기부터 대량학살을 자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도하였고, ‘인도주의적 개입’을 유도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카다피의 악마화는 3월 중순 카다피군이 벵가지 근처까지 진격하자 극에 달했고 좌파들도 이러한 왜곡보도에 세뇌되었던 것이다.

 

황색언론-

2월 20일부터 22일 사이에 트리폴리와 미스라타에서는 보안대에 의한 총격이 있었다. 그러나 무슨 전투기에 의한 공중 공격은 전혀 근거가 없고 트리폴리에서만 소방헬기가 뜬 적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알자지라의 보도를 살펴보자.

“(2월 21일) 7:56pm: 알자지라 아랍어방송은 지금 트리폴리의 활동가와 대화하고 있는데, 그는 지금 트리폴리 전체에 공중 공격이 행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거기에는 죽음과 두려움 그리고 여성들이 어디에서나 울고 있다. 공격은 도로 시위자들이 많이 나온 지역에 집중되어 있고, 사람들에게 총을 쏘는 외국인 전사로 가득 찬 차량들이 있다. 그는 지난 24시간 동안 최소한 250명이 죽었으며 국제적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고 말했다. 트리폴리는 외국인 전사들이 장악하고 있으며 물과 전기도 끊어졌고 음식과 의료품도 부족하다고 말했다. 이것은 집단학살이라고 그는 말했다.

트리폴리 동부의 미스라타는 가장 최근에 전투기에 의해 공격받았다. 탱크가 시내로 들어와 중화기가 빌딩을 초토화하고 있다고 목격자들이 알자지라에 말했다.

9:51pm: 트리폴리의 줌후리아 도로에 새로운 공중 공격이 가해지고 있다고 목격자들이 알자지라 아랍어 방송에 말했다.

10:49pm: 또 다른 공중공격이 트리폴리 서부의 자위야의 시민들을 지금 목표로 하고 있다고 목격자들이 알자지라에 말했다. 사망자나 부상자의 수에 대하여는 아직 보도가 없다.

(2월 22일)1:20am: 알자지라 아랍어 방송은 기니아와 니제리아에서 용병이 되면 하루에 2,000불을 주겠다는 광고가 나타났다고 보도했다.”19)

그러나 전투기에 의한 공중공격과 대량학살 주장은 3월 1일 게이츠 미국방장관이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의 추궁에 “우리도 언론보도를 보고 알았는데, 어떠한 확증도 없다”고 하여 날조라는 것이 들어났다.20) 결국 알자지라는 익명의 목격자를 빙자하여 무고한 시민들이 전투기와 탱크로 유린되고 있다고 참으로 악의적이고 고의적인 조작방송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황색보도를 BBC를 비롯한 반동언론들은 알자지라의 보도를 운운하며 전지구인들의 가슴을 졸이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앞잡이들-

2월 21일 유엔 주재 리비아 부대사는 “우리는 트리폴리에서 진정한 집단학살Genocide을 예상하고 있다. 항공기는 여전히 용병을 공항으로 실어 나르고 있다.”라고 주장하면서 카다피를 이탈하였다. 잘릴 또한 이미 군대가 총을 사용하지 않고 있고 카티바 협상이 마무리되던 시점에 카다피의 과도한 폭력의 사용을 비난하면서 사임하고 유니스도 군대가 인민의 정당한 요구에 부응해야한다고 반란을 선동하며 반란에 가담하였다. 이후 외교관들의 이탈이 줄을 이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리비아의 대다수의 민중들은 카다피를 증오하였지만 카다피는 트리폴리에서 친정부 시위대를 조직할 만큼 그리고 충성파 시민들에게 총을 나눠줄 만큼 나아가 나토의 9,600번에 달하는 지독한 공습에도 불구하고 내전을 8개월이나 끌만큼 충성파도 상당수에 달했다. 그런데 왜 이들은 그처럼 빨리 말을 바꿔 탔을까? 필자는 확증은 없지만 2월 중순부터 벵가지에서 파견된 CIA의 공작21)이 있었을 것으로 본다.

 

바람잡는 제국주의자들-

알자지라는 이제 마치 권위있는 당국자들도 확증을 가지고 얘기하는 것처럼 자신들의 조작극에 화답하는 제국주의자들의 흥분을 싣는다.

“(2월 22일) 12:15am: 미 국무장관 힐러리 클린턴은 “지금은 이처럼 받아들일 수 없는 피바다를 막을 때이다”고 말했다.

12:45am: 알자지라의 정규기고자인 마르크 린치는 리비아에 대한 외국개입의 장단점을 저울질하면서 “지금은 이미 피바다가 된 상황을 더 악화되지 않도록 미국과 나토, 유엔, 아랍 연합이 강력하게 행동에 나설 때이다.”라는 흥미있는 기사를 썼다.

1:40am: 유엔 부대사 다바쉬는 “비행금지구역No fly zone이 리비아에 설정되어야만 한다”고 유엔에 말했다.

1:42am: 반기문은 성명을 통해 리비아 당국이 전투기와 헬리콥터로 시위대에 사격했다는 보고에 분노했다면서 “그러한 공격은 국제인권법의 심각한 침해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22)

이제 제국주의자들은 한 술 더 뜬다.

“2월 24일 이슬람 공화국 방송은 국제형사재판소ICC:International Criminal Court가 사망자를 10,000명으로 평가했다고 보도했다. 3월 2일 WTO는 대략 2,000명이 죽은 것으로 평가했다. 반군은 6,500명이 죽었다고 주장하고, 반군 대변인은 사망자가 8,000명에 달한다고 주장했다."23)

“비아그라 얘기는 처음에 카타르 정권의 지원을 받는 알자지라가 반군과 협동하여 퍼뜨렸고, 거의 모든 주요 서방언론에서 재분배되었다. 국제형사재판소의 소장인 오캄포Luis Moreno-Ocampo는 서방 언론에 “카다피가 강간할 가능성을 높이기 위하여 그의 군대에게 비아그라를 나눠주고 수백 명의 여성을 강간하도록 명령한 증거가 있다”고 말했다. 라이스 유엔주재 미국 대사는 “카다피가 대량강간을 고무하기 위하여 비아그라를 나눠주고 있다”고 주장했다. 클린턴 미 국무장관은 카다피 군대가 리비아에서 광범한 강간에 참여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강간과 물리적 위협, 성희롱 심지어 처녀성 검사까지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24)

하지만 미군사당국과 정보당국은 강간설에 대한 어떠한 증거도 없다고 말했다는 것은 이미 NBC 뉴스에 밝히고 있었고, 비아그라 박스는 반군들이 카다피군의 불타버린 탱크에서 주웠다고 하는데 박스만 그을리지도 않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엠네스티는 3개월간의 현장조사보고서에서 “강간을 당했다는 단 한사람의 여성이나 강간당한 사람을 보았다는 단 한명의 의사도 발견할 수 없었고, 용병은 단 한사람도 확인할 수 없었다. 초기에 죽은 사람은 (만 명이 아니라-인용자 삽입) 벵가지 100-110명과 바이다 59-64명뿐이다”라고 밝혔다. 아프리카 연합African Union의 의장인 핑Jean Ping은 최근에 “NTC(과도국가위원회)는 흑인들을 용병과 혼동하는 것 같다. 모든 흑인들은 용병이라면 리비아 인구의 3분의 1인 흑인이 용병이라는 것을 뜻한다. 그들은 인간 즉 정상적인 노동자를 죽이고 있고 잘못 다루고 있다”고 주장하였다.25)

 

결국 아프리카 용병, 전투기, 공중공격, 대량학살, 강간 등등은 카다피 이탈파를 포함한 반군과 합작한 알자지라가 앞장서서 조작하고, 서방언론들이 집요하게 퍼뜨리고, 이런 뜬소문이 뻔한 거짓인줄 알면서도 반기문, 힐러리 클린턴, 수산 라이스, 오캄포 등 국제적으로 책임있는 당국자들이 자신들도 뭔가 증거가 있어서 믿는 것처럼 바람을 잡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목적은 소위 ‘인도주의적 개입’을 끌어내는 것이었다.

2월 26일 유엔 안보리는 알자지라 등이 만들어낸 이런 황색선동을 근거로 ‘카다피 일가의 자산을 동결하고 국재형사재판소의 조사를 위한 혐의’를 회부했다. 그리고 카디피군이 벵가지 근처까지 진격하자 카다피가 들어오면 피바다가 될 것이라고 애원하는 NTC와 황색언론이 조성한 여론을 바탕으로 3월 17일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하는 유엔결의안 1973호를 의결하고, 이틀 뒤 프랑스를 필두로 나토와 미군이 공습에 나섰던 것이다.26)

결국 서방 언론들은 카다피가 전투기까지 동원하여 자국민을 학살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벵가지가 함락되면 피바다가 될 것처럼 바람을 잡았지만, 내란이 시작된 지 일주일이 지난 3월 1일까지 미국방부를 비롯한 아무도 카다피의 전투기가 시민을 무차별로 학살하는 것을 본 사람이 없는 것이다.27)

“엠네스티의 조사는 카다피 정권이 반대편을 야만적으로 억압해온 역사를 가지고 있을지라도 집단학살에 대한 어떠한 증거도 없다는 권위있는 국제위기그룹International Crisis Group의 최근 보고서를 확인시켜주고 있다. 보고서는 ‘많은 서방 언론들이 사건의 처음부터 시위 운동을 전적으로 평화적인 것으로 묘사하고 정권의 보안대가 안보에 대한 어떠한 도전도 보이지 않는 비무장한 시위대를 까닭도 없이 학살하고 있다는 아주 일방적인 시각을 보여 왔다고 덧붙였다.”28)

 

2-3-3-2. 카다피의 반격과 제국주의의 개입

2월 23일 이후 동부의 전 지역이 내전상태에 들어가자, 2월 26일 카다피는 충성파 시민들29)에게 무기를 지급하면서 반정부 시위 봉쇄에 나섰고, 3월 2일 벵가지에서는 유일합법정부를 자처하며 과도국가위원회(NTC : National Transitional Council)가 출범하였다. 3월 10일 프랑스가 NTC를 유일합법정부로 인정하였고, 3월 16일엔 정부군이 벵가지 근처까지 진격하였다. 3월 17일 유엔결의안 1973호가 중국과 소련, 독일 등이 기권한 가운데 통과되어 비행금지구역이 설정되고, 3월 19일 프랑스의 공습이 시작되었다. 3월 28일 미국주도의 연합군의 공군작전 지휘권을 나토로 이양하였고, 나토는 반군을 무장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4월 1일 반군은 전세가 불리해지자 유엔의 조건부 정전 조건을 수락하였고, 4월 5일엔 카다피가 그리스와 터키를 통해 중재를 요청하였다. 4월 10일 아프리카 연합(AU)이 리비아를 방문하여 쌍방의 적대행위 중지 등 중재에 나섰으나 반군이 거부하였다. 이후 나토의 적극적인 공습과 지원 아래 정부군과 반군은 공방을 거듭하다가 8월 20일 트리폴리에서 민중들의 무장반란이 일어나고 반군은 8월 22일 거의 무혈입성하여 8월 24일에는 트리폴리를 장악할 수 있었다. 카다피는 자신의 출신지인 시르트에서 10월 20일 생포되었다가 사살되었다. 그리고 서방의 지도자들과 독점자본들은 앞 다투어 과도국가위원회를 방문하여 전리품을 챙기고 있는 중이다.

 

2-3-3. 트리폴리의 봉기와 카다피의 패전

나토의 공습이 계속되었지만, 카다피의 잘 훈련되고 잘 무장된 정규군을 민간인과 이탈한 병사로 이루어진 반군이 이길 수는 없었다. 반군은 계속 몰리고 있었고 지상전은 교착상태였다. 그러다가 내전이 시작된 지 6개월이 지난 8월 20일 트리폴리에서 민중들의 무장봉기가 일어났고 8월 22일 반군들은 트리폴리에 무혈 입성하였다.

“8월 20일 일몰 후 신도들이 단식을 끝내자 많은 교외에서 모스크가 울린 경종에 반응하였지만, (트리폴리 교외인-인용자) 줌마Suq al-Juma 지역의 봉기의 조직과 규모가 제일 컸다. 몇 분도 안지나 전 지역이 낡은 냉장고나 불타버린 차량들, 전쟁의 잔해들로 바리케이드를 만들고 입구에 무장한 사람들을 배치했다. 트럭들이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집에서 만든 화염병과 젤라틴이라고 부르는 수류탄을 나누어줬고, 늦은 밤에는 6개월 전에 한 자루에 3,000디나르를 주고 샀던 총을 나눠줬다. 미리 작성한 블랙리스트에 따라 자경단이 100여명의 정권의 앞잡이 즉 정보원들의 집에 쳐들어가 무장을 해제하고 끌고 갔다.”30)

“나토가 트리폴리의 함락에 완전히 놀랐다는 사실은 이것을 상상도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패트릭 커크번이 보고하였듯이 ‘심지어 반군 지휘관들도 놀랐었다. 카다피 지지자들로 득실거릴 것으로 생각했던 아부 살림Abu Salim과 같은 지역에서도 전투는 거의 없었다. 지방 은행의 은행원인 칼리드는 저격용 총을 들고 말했다. 우리는 그들이 강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전투는 두어 시간도 안 걸렸지요.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 순간에 편을 바꾸었지요.’ … ‘전에 병사였던 어떤 사람은 나토의 비행기가 끊임없이 친카다피 방어지를 공격할 때 나푸사 산Nafusa Mountain에서 반군의 공격 즉 자위야의 봉기에 직면하여 후퇴명령을 받았을 때, 어떻게 그가 탱크를 버렸는지 말했다. 게임은 끝났고 탱크 안에서 불에 타기를 기다릴 만한 장소도 없다고 간단히 결정하고 옷을 벗고 도망쳤다.’ ‘트리폴리 안의 정권의 지지자들도 끝나버린 명분을 위해 죽을 이유가 없다고 간단히 결론지었다. 줌마Souq al-Jumaa 지역을 책임졌던 이슬람주의자이고 트럭 소유자인 이삼Issam은 그의 동료들은 처음에는 무기도 거의 없었지만, 친카다피 사람들을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무기를 넘기고 집에 있어라고 당부하여 무기를 갖게 됐는데 아무도 거절하지 않았다. 아부 살림의 칼리드는 초여름에 카다피가 미스라타를 장악하는데 실패하고 나토가 폭격을 강화하자 전쟁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 후 카다피측은 후퇴하였고 누가 최종 승리자를 선택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고 말했다.’ 마지막 순간에 정권은 마치 사상누각처럼 무너졌다. 트리폴리 방위군은 카다피의 병사들이 이미 잃어버린 대의를 위해서 싸우고 죽어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무너졌다.”31)

이처럼 카다피군은 반군의 전투나 나토의 공습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부의 사기저하에 의해서 무너졌고, 트리폴리의 봉기에서 보듯 민중의 힘에 의해 쫓겨났다.

 

2-3-4. 항쟁의 분석과 전망과 과제

내전으로 발전한 이유-

리비아 민중이 항쟁에 나선 이유도 다른 아랍 국가들과 비슷하다. 42년에 걸친 장기독재와 지독한 부패와 억압,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인한 생활고와 절망적인 실업 등등. 문제는 왜 다른 나라와는 달리 내전으로 발전되었고, 서방 제국주의국들의 개입전쟁으로 확대되었는가이다.

튀니지에서도 지방도시에서 시위가 시작되었을 때 경찰의 발포가 있었고, 시위대는 돌과 화염병 그리고 바리케이드로 저항하였다. 탈라 전투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싸움은 어쨌든 시민과 경찰의 싸움이다. 1980년 광주의 시민군이 아무리 무기를 들어도 그것은 정권에 대한 항쟁이었지 내란은 아니었다. 그런데 리비아에서는 2월 20일 시위가 수도에 도착하기 이전에 이미 벵가지를 비롯한 동부지역에서 방화와 군부대의 이탈과 그로 인한 적극적인 무장으로 소요수준을 넘는 상태에 있었다. 그들은 탈취한 탱크 위에 올라가 구 왕정의 3색기를 흔들었다. 이러한 행동은 4.19혁명 때 반정부 시위대가 독재자 퇴진이나 이승만 타도에 멈추지 않고 북한의 인공기를 흔드는 것과 비슷한 행위인 것이다.

정권의 부정과 체제의 부정 그리고 국가의 부정은 성격이 다르다. 체제의 부정이 혁명이라면 국가의 부정은 내란인 것이다. 영국 제국주의의 꼭두각시였던 구 왕정의 복귀는 대다수 리비아인의 정서나 의식에 부응한 것이 아니었고 결코 바람직하지도 않았다. 3색기는 카다피로 하여금 외부의 사주에 의한 내란이라고 비난할 수 있는 명분을 주었고, 군대를 사용할 명분을 줄 수 있었다. 순수한 내전일 경우 외국은 개입할 권리가 없다. 이런 점에서 보면 분노한 벵가지의 대중들이 군부대를 공격하여 무장을 한 것은 당연하지만 3색기를 흔든 것은 실로 잘못된 일이다. 사망자의 대부분은 15-35세의 청년들이었다. 42년에 걸친 카다피 집권 동안 이들은 태어나기도 전에 사용되었던 3색기를 본 적도 없고 향수도 없었다. 바로 이 점이 미스터리이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3색기를 흔들었고 결국은 대부분의 대중이 반카다피의 상징으로서 흔들게 되었지만 이것은 실로 잘못된 일이었다.

역사는 되돌릴 수 없는 것이지만, 혁명은 수도에서 결판이 나는 것이다. 만약 수도에서 광범한 대중의 진출로 저항이 시작되었다면 설령 카다피가 무차별 사격으로 잔인한 진압을 시도하고 대중도 무장하여 싸웠다면 그것은 반란이 아니라 항쟁이었을 것이고, 제국주의의 개입없이 카다피를 타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방도시가 아닌 수도는 폭격의 대상이 될 수 없고, 총으로 시가전을 하더라도 시위대와 일반시민에 대해 중무장한 군사작전은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카다피의 무장대가 아무리 총질을 하더라도 벵가지나 바이다나 미스라타에서 보는 것처럼 대중들이 폭발하면 공권력을 몰아내고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있다. 이것은 8월 20일 트리폴리의 봉기에서도 확인될 수 있다.

불과 2-3일도 안되어 동부 전역을 포함한 폭발적인 대중항쟁의 시기에 리비아 인민들은 무엇을 해야 했을까? 각 지역 세력의 연결․연합과 수도로의 집중 그리고 항쟁의 중심을 만드는 것이었다. 공권력을 몰아내거나 무력화시킨 공간에서는 파리코뮌이나 소비에트처럼 자발적인 대중의 투쟁조직과 자치조직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런 자생적인 대중의 투쟁체가 서로 연대하여 항쟁의 중심부나 지도부를 만들고 카다피를 몰아내었어야 했을 것이다.32) 그 중심부는 임시정부를 자칭할 것이 아니라 이집트에서 보았듯이 혁명방어위원회나 민중위원회 혹은 카다피퇴진운동본부 정도면 충분했다. 임시정부를 자칭하는 순간 내전이 된다는 것을 법무장관이나 내무장관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내전으로 인정되는 순간 카다피에게 군대와 중화기를 사용할 명분을 주게 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일반 민중은 오직 카다피의 퇴진만 바라고 투쟁하고 있을 때 NTC는 카다피의 유혈진압을 유도하여 제국주의자들이 개입할 명분을 주기 위해 유일합법정부를 자칭하면서 나토의 충실한 도구가 되었던 것이다.

“2월 24일 반정부 정치인, 이탈한 군 간부, 부족 지도자, 학자, 경제인들은 바이다에서 회합을 가졌다. 며칠 전 정부에서 사임한 잘릴이 의장이 된 이 회의에서 대표자들은 리비아 국가의 통일성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트리폴리를 수도로 삼는다고 말했다. 그들은 리비아에 대한 유엔 개입을 요청할 많은 대표자들로 이루어진 과도정부에 대한 제안을 토의하였다. 회의장에는 구왕정의 깃발이 놓여 있었다. … 대체정부를 구성하려는 노력은 유엔주재 리비아 대사의 지지를 받았다. 부대사 다바쉬도 원칙상 새로운 대체정부를 지지한다고 말했다”33)

이처럼 NTC는 리비아 민중이 주도하는 혁명이 아니라 잘릴을 비롯한 카다피 정권의 낡은 지배계급들이 그 출발부터 제국주의자들의 개입을 애원하기 위해 그리하여 민중이 주도하는 혁명을 낡은 지배계급이 주도하는 더러운 거래가 되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대중의 정당한 투쟁은 조작이 필요없다. 하지만 앞서 보았듯이 NTC는 대량 강간설을 유포하고자 알자지라와 함께 비아그라 박스 사건을 조작했다. 혁명은 정의라고 할 때 그들은 결코 정의에 기반한 투쟁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더러운 인종주의에 기반하여 정규군과 흑인을 아프리카 용병으로 둔갑시켜 수많은 흑인 동족과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인들을 살육하는 진정한 집단학살을 해왔다.34)

지난 10월 제국주의 세력의 적극적인 공습과 개입으로 카다피가 무너지기는 했지만, 3월 중순 카다피군의 벵가지 진격에서 보는 것처럼 제국주의 세력의 도움이 없었다면 무장반란은 한 달도 못되어 진압당할 운명에 있었다. 모름지기 현대 국가에서는 혹은 아무리 무도한 학살정권이라고 하더라도 군사력과 시민의 무장력 간에는 뛰어남을 수 없는 비대칭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군대가 개입할 명분을 안주고 중립화시키고 민중의 편으로 끌어당기려는 고려 즉 목적과 수단의 정당성을 확보하면서 광범한 대중의 지지와 참여로 권력을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카다피의 군대가 와해되고 패배한 것은 혹은 보안대나 군대가 총을 버리고 도망가는 것은 대중의 무장력이 그들을 군사력으로 압도했기 때문이 아니다. 공권력이란 최종적으로 민중의 투쟁이 갖는 압도적인 정당성 앞에서 무너지는 것이다.35) 현대국가의 공권력은 무장력으로 우월을 다투는 내전이 아니라 대중의 투쟁과 분노가 갖는 압도적인 정당성으로 무장한 혁명으로 무너지는 것이다.36)

NTC는 민중의 편에선 정의의 투쟁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제국주의자들이 개입할 여건을 만들어주기 위해 임시정부를 자칭하고 온갖 조작질을 일삼았던 것이다. 진정 NTC와 나토가 피바다를 두려워하고 피하려고 하였다면 카다피가 진지하게 정전과 중재를 제안했을 때 받아들였으면 된다. 하지만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음에도 제국주의에 기대기 위해서 휴전을 거부했던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이 항쟁은 기회주의 세력들에 의해 첫 단추가 잘못 꿰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잘못이 끝내 제국주의의 개입으로까지 발전하게 된 것이다.

 

제국주의자들의 개입 이유-

왜 알자지라와 서방 언론과 제국주의자들은 이런 악선동을 조작해내었던 것일까? 서방이 왜 개입하였는가에 대하여는 많은 사람들이 석유이권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카다피도 석유이권은 충분히 보장하여 주었기 때문에 사실 서방 제국주의자들과 독점자본은 카다피 체제에 대하여 전혀 불만이 없었다. 아프리카인들의 불법이민에 대해서도 카다피는 철저하게 이탈리아와 EU를 만족시켜 왔다. 튀니지와 이집트 등에서 친제국주의적이 아닌 자주적 정부 혹은 민중의 눈치를 보아야 하기 때문에 노골적으로 제국주의를 편들 수 없는 정부가 들어설 가능성이 있는 상황에서 리비아만이라도 서방 특히 미국의 군사동맹으로 만들거나 군사기지로 사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37) 또한 카다피를 지원하여 이 지역에서 반미나 반제 감정을 악화시키는 것보다는 분노의 표적을 버림으로써 친서방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훨씬 더 나은 선택이기 때문에, 그리고 카다피는 언제든지 중국이나 인도, 소련 등과도 거래를 할 수 있기 때문에, 미국과 서방은 석유와 군사적 영향력의 배타적 확보를 위해, 바레인이나 예멘의 학살에는 눈을 감으면서도 ‘인도주의적 개입’38)을 운운하며 또 다른 꼭두각시 정권의 창출에 나선 것이다.39)

제국주의자들은 벤 알리와 무바라크의 몰락으로 중동의 질서가 흔들리고 있을 때 개입할 수 없었다. 패권이 흔들릴 때 반드시 무력을 시위해야만 하는 제국주의자들은 카다피를 버리기로 하고 그를 제물로 삼았지만 주권국가 내의 항쟁에 개입하는 데에는 명분이 필요했다. 지상전이 부담스러우니까 '비행금지구역' 설정을 목표로, ‘비행기를 동원한 공중공격’과 ‘아프리카 용병을 나르는 비행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잘 짜여진 각본처럼 2월 21일 알자지라는 비행기 한 대 떠 있지 않던 그 시각에 전투기에 의해 트리폴리가 피바다가 되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유엔 부대사는 용병을 나르는 비행기와 집단학살을 운운하며 비행금지구역의 설정을 주장했다. 잘릴 또한 시민에 대한 과도한 폭력을 운운하고 재빠르게 과도국가위원회를 만들어 피바다가 될 것이라면서 국제사회의 개입을 호소하였던 것이다. 전 세계를 상대로 벌인 이번 조작극은 인류 역사상 최대의 사기극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제국주의 개입을 둘러싼 좌파의 분열-

제국주의의 군사개입이 시도되고 있을 때 많은 논쟁들이 벌어졌다. 전투기까지 동원하여 민중을 학살하고 있는 상황에서 서방의 군사개입은 필요하다는 주장과, 제국주의의 군사개입은 또 다른 예속과 비극을 낳을 것이기 때문에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있었다. 어떤 좌파들은 비행금지구역 설정은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어떤 좌파는 비행금지구역이 아니라 ‘리비아 인민을 무장시켜라’는 구호를 내세우기도 하였다.40)

“리비아에 대한 국제적인 군사개입은 특히 좌파진영을 둘로 분열시켰다. 개입찬성론자들은 이러한 개입이 없다면 봉기가 궤멸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개입반대론자들은 이러한 개입을 이라크 전쟁과 똑같은 군사적 공격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분열의 한 가운데에는 독재에 반대하는 인민의 혁명을 지지한다는 것과 서방의 위선을 비방하는 반제국주의적 입장 사이의 명백한 모순이 있다. 나는 한사람의 리비아인으로서 인민의 혁명을 위한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과 그것(인민의 혁명-인용자 삽입)을 지탱해 온 개입에 반대하는 것에서 어떤 논리도 찾을 수 없다. … 개입반대론자들이 가장 즐겨 드는 것은 서방측의 두 개의 잣대에서 보이는 위선이다. 똑같이 살인적 폭력에 시달리고 있는 예멘이나 바레인이 아니라 왜 리비아냐는 것이다. … 리비아 인민들이 자신들의 역사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지식을 무시하고 있다는 개입찬성론자들에 대한 비난은, 개입에 대한 반대를 위해 리비아 시민들에게 카다피가 저지른 죄악을 간과하거나 최소화하여 어떠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입장을 정당화하려는 개입반대론자들에 의해 악화되고 있다. … 우리는 새로 태어난 혁명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혁명은 지구상에서 깨끗이 청소될 운명에 있기 때문이다. …‘외국간섭 반대, 리비아 인민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는 벵가지에 걸려있는 현수막에는 외국개입 반대는 전면적인 지상군과 리비아 점령을 반대한다는 의미에서 비행금지구역과 국제공동체로부터의 지원 요청이 함께 있었다.41) … 리비아 사람들이 보다나은 미래를 위해 서방의 개입을 받아들이기보다 최근까지 서방에 의해 옹호되었던 야만적인 체제에 의해 그들의 순수한 혁명이 박살이 나도록 허용해야 한다는 생각은 망각이 심한 것 같다. 몇몇 좌파들은 서방은 그들 자신의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경고하면서 많은 서방국가들이 카다피 체제를 도와왔다고 지적한다. 명백하게 그들의 사악한 이해관계는 개입과 함께 마법처럼 나타난 것이 아니고 그것들은 개입 후에도 마법처럼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개입에 의하여 이들 국가들은 그들 자신의 전략적 이해관계들 속에서 행동하고 있고, 새로운 거래를 하고 있지만 진실은 많은 서방 정부들이 쉽게 다른 길을 찾을 수 있었고, 카다피와의 거래를 통해 계속 이득을 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 혁명을 망치는 것은 분열이고, 리비아에 대한 (외국의) 개입은 ‘아랍의 봄’을 망칠 수 있다는 관념 속에 나타나고 있는 바로 그 언사가 분열을 조장하고 있다. 이 언사는 다음 문제를 회피하고 있다. 만약에 카다피가 리비아의 봉기를 짓밟는데 성공한다면 그것은 아랍의 봄에 어떤 영향을 가져올까? 보다 더 큰 자유를 위한 그들 인민의 커져가는 요구에 대처하는 방법을 찾고 있는 아랍의 독재자들은 카다피의 미친 행동 속에서 몇 가지 방법을 찾을 것이다. … 아무도 미래를 예측할 수 없지만, 만약 포스트 카다피에 대한 걱정이 중요하다면, 그것은 42년간에 걸친 억압적이고 권위적인 체제의 후의 민주적인 사회를 건설하는 길고도 어려운 과정일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나약한 사람들의 노력을 지지하는 것을 반대하는 주장이어서는 안 된다.”42)

결국 이 주장의 요지는 서방 제국주의자들은 그들의 사악한 이익에 따라 개입하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리고 과거에도 그래왔고 미래에도 그러할 것이지만, 당장 인민의 혁명이 카다피에 의해 짓밟힌다면 그 결과는 어떤 선택보다 참혹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혁명의 궤멸을 막을 수 있는 국제사회의의 개입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비록 그 개입이 비행금지구역의 설정에 멈추지 않고 공습으로까지 이어졌지만 이것은 카다피를 저지하기 위해 개입한 이상 필연적인 수순이었다. 카다피 체제는 결코 반제국주의적 입장에 충실한 무슨 진보적인 사회가 아니라 참으로 악랄하고 잔인한 체제였다. 그 체제는 동정할 가치도 없다. 그러나 그 때문에 개입을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결국 타스님 퀴테트Tasnim Qutait의 주장은 일국의 혁명이 제국주의에 의해 간섭받지 않아야 한다는 이상은 봉기에 나선 인민이 학살당하는 현실 앞에서, 어떠한 경우에도 혁명이 압살되는 것은 막아야 한다는 당위 앞에 무릎을 꿇어야 된다는 것이다. 제국주의의 개입없이 혹은 프랑스와 미국의 무자비한 공습이 없었다면 반군은 결코 승리할 수 없었고 궤멸되고 보복을 당했을 것임은 분명하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유엔결의안을 빙자한 ‘인도주의적 개입’은 날조된 이유에 기반한 것이고, 그 날조마저도 내전인 이상 결의안을 통과시킬 명분이 못되는 것이지만, 설령 서방 언론이 퍼뜨린 카다피의 학살만행이 사실이고, 현지의 리비아인들이 집단학살의 두려움을 느꼈다고 할지라도, 제국주의자의 개입을 요청하고 지지할 수는 없는 것이다. 혁명은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다. 하지만 혁명이란 민중들이 외세의 힘을 빌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카다피가 아무리 악랄하고 무자비하다고 하여도 지구상의 어떤 민중도 학살을 그냥 당하고만 있지 않는다. 민중은 창조적인 지혜와 단결된 힘으로 끝내는 극복할 수 있다. 비록 NTC가 민중이 주도하는 혁명을 낡은 지배계급이 주도하는 내전으로 그 성격을 바꿔버렸지만, 총 군사력이 5만 명인 나라에서 이미 상당수의 군대가 이탈하여 민중이 무장을 한 상태에서 분산되고 고립되지만 않는다면 트리폴리 봉기에서 보듯 풀뿌리 대중에 기반한 혁명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이처럼 혁명이 위기에 처했을 때 좌파가 해야 할 일은 카다피의 악랄한 심성을 걱정하여 제국주의의 개입을 지지할 것인가 말 것인가로 논쟁할 것이 아니라, 카다피의 충성파보다 압도적인 대중에 기반한 투쟁을 만들기 위해 총을 들고 리비아 민중들과 함께 싸우는 것이다. 퀴테트가 제기한 지적은 어려운 문제이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대중노선의 관점이 결여되어 있다. 만약 잔인한 학살자 때문에 제국주의의 개입이 없어서는 안된다면 수천 명이 학살당하고 있는 시리아나 예멘의 대중은 스스로의 힘으로 해방될 수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국지적인 학살은 대중을 겁주고 잠재울 수 있을지 몰라도 수도에 집중한 수만 명의 대중은 학살과 총질을 넘어설 수 있다.

 

항쟁의 주체-

리비아 항쟁의 주체는 누구였을까? 벵가지를 비롯한 동부지역에서 시위에 나서고 투쟁에 앞장 선 것은 리비아 민중들이다. 8개월이 넘는 내전에서 카다피의 정규군과 일선에서 싸운 사람들도 바로 그들이다. 반군이 진격하기 전에 스스로를 해방시킨 자위야나 트리폴리의 무장봉기도 리비아 민중들이 일으킨 것이다. 혁명의 주체와 반군의 대부분은 분명 민중들이지만, 이들의 상층부는 카다피군에서 이탈한 군지휘관들과 부족세력들이 장악하고 있고, 여기에 구정권에 충성하다가 말을 바꿔 탄 기회주의 세력들이 뭉쳐 제국주의자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과도국가위원회NTC가 있다.43)

 

NTC-

내란이 시작된 지 1주일도 안되어 임시정부를 자처하여 내전으로서의 성격을 분명히 하고 그리하여 카다피에게 내전을 진압하는 군대의 사용과 제국주의의 개입을 정당화시켜준 NTC의 실체는 무엇인가?

"벵가지의 NTC는 나토의 개입을 촉구하였다.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모든 혁명적 봉기에서 제국주의자들은 개입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상황에 개입할 기회가 왔다는 것을 알아 차렸다. 미국과 프랑스, 영국은 NTC와의 접촉에 들어갔고, 그들은 카다피 정권의 부르주아적 분자들과 전 장관들의 연합체였다. 이러한 행동은 완전히 반동적인 이 조직의 성격을 보여준다. 하지만 NTC의 역할을 과장하거나 완전한 통제권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면 잘못이다. NTC는 그들을 초기에는 의심스럽고 적대적으로 간주했던 반군세력에 대한 어떠한 장악력도 없다. 이것은 지난 3월 영국의 첩보부대가 NTC의 지도자들과 접촉하기 위해 벵가지로 들어가려다가 반군에 의해 체포된 사실에 의해서도 알 수 있다. 반군의 태도를 바꾼 것은 카다피의 끝장 공격이라는 즉각적인 위협이었다. 카다피의 아들 사이프는 항쟁의 초반 ‘리비아는 튀니지나 이집트가 아니다. 거리는 피로 물들 것이다’고 말했다. 카다피 자신도 집집마다 골목마다 반군을 쥐새끼처럼 쫓을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카다피의 연설로 인한 학살의 두려움 때문에 대중들과 처음에는 반대했던 사람들도 NTC가 요청한 제국주의의 무장개입에 반응을 보이게 된 것이다."44)

NTC가 얼마나 허접한 조직인가는 지난 8월 22일 트리폴리 민중들의 무장반란으로 반군들의 입성이 이루어진지 두 달이 넘도록 자신들의 본거지인 벵가지를 떠나지 못하고, 심지어 카다피가 죽은 뒤에도 리비아 해방을 공식선언하면서도 한 달 후에나 트리폴리로 옮기겠다고 말하는 데서도 알 수 있다. 그들이 그동안 카다피와 전투를 벌여온 반군들에 대한 아무런 통제력이 없다는 사실은 카다피의 시신을 둘러싼 갈등에서도 확인된다.45) 결국 NTC는 리비아 민중들이나 반군과 결합한 실체가 아니라 카다피 체제의 핵심이었던 사람들이 재빨리 말을 바꿔 탄 기회주의 세력들로써 제국주의 세력과 반군 간에 뚜쟁이 노릇을 하고 있는 반동세력들의 결집체인 것이다. 이들이 바로 나토의 도구로 기능하면서 온갖 악선동과 조작극을 벌여 제국주의의 개입을 이끌어내었던 것이다.

 

반군과 자경단-

리비아의 반군은 처음부터 반정부 시위에 적극 결합한 일반 민중들만이 아니라, 카다피에게서 이탈한 보안대와 경찰과 군인들이 상당한 수에 달한다. 카다피의 악랄한 분열정책 때문에 부족별로 반군을 구성하고 그 상층부에 부족 지도자들과 카다피를 이탈한 군고위급 간부들이 있다.46) 반군이 장악한 다른 지역들도 마찬가지지만 벵가지에도 주로 이탈한 경찰과 보안대로 구성된 수십 개의 자경단이 있다. 이들이 중화기로 무장한 픽업 트럭을 몰고 다니면서 혁명을 전복한다는 이유로 카다피 충성파나 무고한 흑인들을 색출하여 ‘카다피의 개’나 ‘용병’으로 비난하면서 살인행위와 사적 린치와 약탈을 저지르고 있다는 수많은 보고가 있다.47) 이들의 사적 테러는 이승만의 졸개였던 서북청년단과 비슷하다. 혁명은 불의에 분노하고 보다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열망으로 하는 것이다. 반군 속에는 분명 정의감에 불타는 민중들도 있겠지만, 참으로 비겁하고 타락한 기회주의적 반동세력들도 많고 그들이 반군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다.

 

전망과 과제-

이제 카다피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개입으로 몰락하였다. NTC는 8개월 후에 민주정부 수립 구상을 밝혔다. 카다피 치하에서는 대중운동이나 사회운동 세력이 성장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온갖 기회주의적이고 반동적인 세력이 NTC와 반군의 상층부를 장악하고 있다. 그리고 하층마저도 결코 정의롭거나 도덕적이지 않은 전직 경찰이나 보안대원 출신들이 무고한 살인과 린치와 약탈을 하면서 설치고 있다. 카다피에서 이탈한 고위 관료와 군장성, 서로 헤게모니를 다투는 반동적인 부족 상층부 등은 친 민중적이라기보다는 본질적으로 기회주의적이고 친제국주의적이며, 서방과 긴밀히 협조하고 그들의 개입을 이끌어내고 이권을 약속하였다. 이처럼 타락한 세력들이 설칠 때에는 대중의 자발성은 급속하게 쇠퇴하고 만다. 대중의 자발성과 투쟁성이 한껏 고양되던 2월 하순 조금만 더 밀어 붙였으면 카다피를 몰아 낼 수 있었을 텐데도, 민중이 주도하는 혁명을 두려워한 제국주의와 기회주의 세력들이 이 혁명을 왜곡하고자 온갖 모략질과 황색선동을 일삼으면서 혁명이 아닌 내전으로 성격을 바꾼 뒤 끝내 제국주의의 개입전쟁으로 발전시켰다. 리비아 내전의 승자는 리비아 민중이 아니라 제국주의자와 기회주의 세력들이다. 결국 리비아 혁명은 낡은 지배계급과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강간당하고 타락한 혁명이 되어 버렸다. 리비아 민중은 이들 기회주의적 친제국주의 반동세력과 싸워 진정으로 자주적이고 민주적이고 민중적인 사회를 건설할 과제가 남아있다. 하지만 그 과제는 요원한 듯하다.

 

 


1) "카다피는 오래전에 그의 혁명적 유산(1969-1988)을 포기했고, 최소한 2003년에는(사실상 1990년대 후반부터) 미국이 이끈 테러와의 전쟁에 그 자신을 받쳤다. 카다피의 감옥은 CIA와 유럽 정보기관과 이집트 정보부가 이용한 중요한 고문 센터였다."-Vijay Prashad, “NATO's Agenda for Libya : Qaddafi, From Beginning to End”, at http://www.counterpunch.org/2011/10/21/qaddafi-from-beginning-to-end/ (Weekend Edition October 21-23, 2011)


2) 위키리크스에는 페트로-캐나다가 30년간의 석유체굴권을 얻은 대가로 카다피 일당에게 10억 달러를 주기로 한 사실이 폭로되기도 했다.-John Riddell, “How Can We Aid Libya’s Freedom Movement?” at http://www.socialistvoice.ca/?p=1443 (February 28, 2011)에서 재인용


3) 김하영, “리비아혁명, 어떻게 볼 것인가?”,『마르크스21』, 책갈피, (2011년 봄), pp.148-158.


4) Urs Fruehauf, “EU-Libya Agreements on Refugees and Asylum Seekers : The Need for a Reassessment" in Political analysis and commentary from the Middle East, Perspectives, (#2 May 2011, Special Issue), pp. 244-245.


5) 내전이 시작된 이후 리비아는 계급이나 계층 혹은 정당으로 분열한 것이 아니라, 친카다피 부족과 반카다피 부족으로 분열하였고 카다피 군대의 반군으로의 이탈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또한 리비아의 군대는 현대국가의 국군이라기보다는 개인에 대해 충성하는 친위대나 사병에 가까웠다. 그들은 국가와 국민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는 집단이 아니라 부대 이름부터 카다피 아들의 이름을 붙이고 카다피 일족에게 충성했다.


6) Lisa Anderson. op. cit., p. 6.


7) “2006년 2월 17일 벵가지에서 정치변화를 요구한 것이 아니라 단지 유럽에서 인쇄된 선지자 무하마드의 만화에 분노를 표시하는 시위가 일어나자 보안대는 12명을 죽였다. 2007년 트리폴리에서 10여명의 활동가들이 이 비극적인 사건을 기념하기 위하여 평화적 시위를 계획하였다가, ‘정치체제를 전복하려고 시도하고, 리비아 정권에 대한 헛소문을 퍼뜨리고, 적들과 교류하였다’는 죄목으로 6-25년의 징역형에 처해졌다.”-Amnesty International, "The battle for Libya : Killings, disappearances and torture", (September 2011. Index: MDE 19/025/2011) p. 13. at http://www.amnesty.org/en/library/asset/MDE19/025/2011/en/8f2e1c49-8f43-46d3-917d-383c17d36377/mde190252011en.pdf


8) “카다피 정권은 2월 18일부터 페이북과 트위터의 접속을 봉쇄하고 뒤이어 인터넷 접속을 방해했다. 2월 3주째엔 전화통신도 극심하게 방해했다. 트리폴리와 카다피 장악지역에서는 당국이 대화를 감시하는 위성전화를 이용할 수 있었다.”-Amnesty International, op. cit., p. 19.


9) Nahla Daoud, “Fear and Revolution in Libya" in Political analysis and commentary from the Middle East, Perspectives, (#2 May 2011, Special Issue), pp. 209-210.


10) 유니스 소장은 내무장관을 겸하고 있는 서열 제2위의 실력자로 2월 20일부터 벵가지를 수습하려고 왔다가 2월 22일 “군대는 인민들의 정당한 요구에 응해야 한다”면서 반정부 시위대에 가담했다. 이후 반군 사령관으로 활동하다가 7월 29일 암살당했는데, NTC는 친카다피 측의 암살이라고 발표했지만, NTC의 대표인 잘릴이 유니스를 억류한 정황 등으로 보아 잘릴 측이 죽인 것 같다.


11) 이 주장은 데르나에서 있었던 사건을 착각한 것 같다. “(데르나에서 찍힌-인용자) 리비아 반군의 웹사이트에 올라온 동영상은 일부 군복을 입고 손이 뒤로 묶인 채로 죽음을 당한 사람들을 시위대에 대한 발포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사살된 군인들이라고 주장하는데, 다른 동영상을 보면 시위대에 붙잡혀 심문받는 군인들과 똑 같은 사람들이었다.”-Amnesty International, op. cit., p. 71. 즉 시위대에 대한 발포를 거부하여 사살된 군인들이라는 주장은 반군측이 조작한 것이다. “아마추어들이 찍은 비디오는 포로가 된 카다피 지지자들이 사살되고 있는 장면과 심하게 불에 탄 8구의 시체가 벵가지 군 사령부의 잔해에서 발견되었는데 그들은 아마도 당시에 그 지역에서 실종된 지역의 소년들일 것이다. 비행기나 대공 중화기가 군중들에게 사용되었다는 증거는 없다. 시위대가 총에 맞은 뒤 수거된 빈 탄창은 (중화기가 아니라) 칼라쉬니코프나 혹은 그와 비슷한 캘리버 소총에서 나온 것이다.”-Patrick Cockburn, “Amnesty questions claim that Gaddafi ordered rape as weapon of war”, (Friday, 24 June 2011) at http://www.independent.co.uk/news/world/africa/amnesty-questions-claim-that-gaddafi-ordered-rape-as-weapon-of-war-2302037.html에서 재인용.


12) Alan Woods, “After the death of Gaddafi: Revolution and counterrevolution in Libya”, (21 October 2011) at http://www.marxist.com/gaddafi-dead-revolution-and-counter-revolution-in-libya.htm


13) 카티바 단지는 카다피 충성파들이 한 때 2,000명이 모여 살던 군부대가 있는 곳이다.


14) Wikipedia, “Libyan_Civil_War” at http://en.wikipedia.org/wiki/Libyan_Civil_War 위키피디아의 자료는 심하게 오염되어 있다.


15) 이들은 용병이 아니라 포로가 된 리비아 정규군이었는데,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자경단에 의해 학살당했다.-Amnesty International, op. cit., p. 71.


16) Wikipedia, “First_Battle_of_Benghazi” at http://en.wikipedia.org/wiki/First_Battle_of_Benghazi 


17) International Crisis Group, Popular Protest in North Africa and the Middle East (V): Making Sense of Libya, (North Africa Report N°107, 6 June 2011) at http://www.crisisgroup.org/~/media/Files/Middle%20East%20North%20Africa/North%20Africa/107%20-%20Popular%20Protest%20in%20North%20Africa%20and%20the%20Middle%20East%20V%20-%20Making%20Sense%20of%20Libya.pdf. p. 4. 트리폴리에서도 2월 17일부터 시위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미미했고, 2월 20일 녹색광장Green sqare을 둘러싼 공방전으로 비로소 의미있는 반정부시위가 폭발했다. 이날 보안대는 광장에 접근하는 시위대에 실탄을 쏘았다. 시위대는 경찰서와 인민의 전당 건물 일부를 불태웠다. 시위는 대략 2월 25일까지 진압되었다.-Wikipedia, “2011 Libyan civil war”at http://en.wikipedia.org/wiki/Libyan_Civil_War 참조


18) 잘릴 역시 카티바 구출협상을 위해 벵가지에 왔다가 '카다피의 과도한 폭력의 사용'을 비난하면서 2월 21일 사임하고, NTC를 만들어 그 대표가 되었다.


19) Aljazeera, op. cit.


20) Maximilian C. Forte, “A Victory for the Libyan People? : The Top Ten Myths in the War Against Libya”, (August 31, 2011) at http://www.counterpunch.org/2011/08/31/the-top-ten-myths-in-the-war-against-libya/


21) “3월 30일 뉴욕 타임즈는 수 주 동안 CIA 작업팀이 리비아 내부에서 활동하였고, 이것은 2월 중순 즉 시위가 시작된 때부터 거기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수십 명의 영국 특수부대와 M16(영국 정보기관-인용자) 정보원들과 함께 작업하였다는 것을 보도하였다. NYT는 같은 기사에서 수 주 전에(2월 중순경) 오바마 대통령이 가능한 비밀공작을 위한 다른 지원과 함께 CIA가 리비아인들에게 무기와 다른 지원을 제공할 수 있도록 하는 첩보활동에 서명하였다고 보도하였다.”-Maximilian C. Forte, op. cit.


22) Aljazeera, op. cit.


23) http://en.wikipedia.org/wiki/Libyan_Civil_War에서 재인용


24) Patrick Cockburn, op. cit.


25) Maximilian C. Forte, op. cit.에서 재인용


26) “카다피는 그의 군대가 벵가지에 진입할 것이며, 저항하는 사람들에게 어떠한 관용도 보이지 않을 것이라고 리비아 반군들에게 경고했다.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말고 더 이상 망설이지 마라 진실의 순간이 왔다’고 선언했다. 동시에 그는 벵가지 주민들에게 ‘군대는 도시의 모든 집들을 수색할 것이다. (그러나) 무기를 갖지 않은 인민들은 두려워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Guardian, "Libya crisis: Britain, France and US prepare for air strikes against Gaddafi",  (2011.3.17.) at http://www.guardian.co.uk/world/2011/mar/17/libya-no-fly-zone-united-nations?INTCMP=SRCH


27) 3월 초부터 반격에 나선 카다피는 미스라타 등을 장악한 탱크와 로켓포로 중무장한 반군과의 전투에서 전투기와 탱크를 사용했다. 당시 카다피는 미스라타의 3면을 포위한 상황에서 시민들의 유일한 탈출구이자 생필품 획득 통로인 북쪽의 항구를 폭격하여 비인도적 처사라는 비난을 받았다.


28) Patrick Cockburn, op. cit.에서 재인용.


29) 카다피는 모든 동네와 직장과 학교에 혁명위원회를 구성하고 이들을 충성파로 만들었다. 이들과 보안대(정보경찰 혹은 국내안보국:ISA, Internal Security Agency)가 분노의 표적이 되었고, 벵가지를 비롯하여 반군이 장악한 지역에서는 이들에 대한 납치와 살인이 엄청나게 벌어졌다.


30) Alan Woods, op. cit.


31) ibid.


32) 하지만 이러한 자생적인 투쟁조직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카다피의 악랄한 분할통치로 인하여 시민사회보다 부족적 질서가 강하게 작용한데다, 행정 경험이 있는 전직 경찰이나 보안대 등 카다피 이탈파들이 반군에 대거 합류하여 골간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33) http://en.wikipedia.org/wiki/Mustafa_Abdel-Jalil에서 재인용


34) 650만 명의 리비아 인구 중 흑인은 3분의 1에 달하며, 이주노동자들은 150-250만 명에 달한다. 이들 수많은 흑인들은 단지 피부색 때문에 용병으로 몰려 반군과 자경단에게 살해당하고 있다.-Amnesty International, op. cit., pp. 70-75., “승굽타Kim Sengupta는 인디펜던트Independent지 기사에서 트리폴리에 있는 30구의 시체에 대해 보고했다. 카다피의 용병이라고 말해진 사람들의 절대 다수는 흑인이었다. 그들은 임시 병원이나 들 것이나 구급차에서 죽었다. 흑인의 연행에 대해 한 민병대원은 “리비아인들은 검은 피부를 가진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아요”라고 말했다. 이 일의 뿌리에는 항쟁 초기 퍼진 아프리카 용병들이 반대파를 자극하고 있다는 루머가 있다. 엠네스티의 로베라는 이러한 주장을 조사하고 아무런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 인권감시단의 부커트Peter Bouckaert도 연행되어 언론에 의하여 딱지 붙여진 수많은 사람 중에 단 한사람의 용병도 확인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이러한 행동의 뒤에 인종주의가 있다. 리비아는 여하튼 아프리카 국가이지만, 리비아에서 ‘아프리카인’이라는 말은 이 나라의 흑인 소수자들을 뜻한다. 엠네스티 조사관 Diana Eltahawy은 리비아를 장악한 반군들은 실제로 외국인 혐오증으로 다가가고 있다고 말했다. The New York Times는 인종주의적 색채를 얘기하지만 때때로 인종주의는 명백하다. 미스라타에서의 반군의 슬로간은 “노예들, 검은 피부를 숙청하는 여단”이라고 페인트 되어 있다. 이러한 인종주의의 결과로 인권기구가 비난하는 반군이 저지른 잔혹한 행위 중의 일부인 많은 흑인들이 대량 연행과 끔직한 살인이 있어 왔다. 이러한 갈등의 인종주의화는 아프리카인에 대한 증오로 끝나지 않는다. 반군의 낙서는 카다피를 유대인 악마로 묘사하고 있다.”-Richard Seymour, “Libya's spectacular revolution has been disgraced by racism”, Guardian, (Tuesday 30 August 2011), at http://www.guardian.co.uk/world/libya?page=29


35) "2월 17일 벵가지에서 시위가 일어나자 비무장한 시위대에 발포하여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했다. 경찰들 대부분은 발포를 억제하고 일부는 시위대에 가담하였다. 보안대는 도망가거나 탈영하여 시위대에 가담했다. 일부는 그들의 총구를 군인들 쪽으로 돌렸다."-Amnesty International, op. cit., p. 37.


36) 이점에서 일부 한국의 골방 사회주의자들 혹은 자칭 혁명가들이 무장봉기나 무력양성론을 운운하면서 혁명을 무력이나 폭력의 대립으로 보는 관점은 권력의 타도와 장악을 중심에 놓고 사고하는 맑스주의적 방법론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다. 투쟁이 고양되고 격화되는 과정의 특수한 상황에서 나타나는 무장 등의 특정 투쟁형태에 대한 집착은 그러한 형태로 발전하게 하는 힘과 조건에 대한 고려가 없는 본질의 우월성이 아닌 현상에 매몰되고, 내용의 우월성이 아닌 형식에 대한 집착으로 유물변증법적 사고방식과는 거리가 멀다.


37) James Petras and Robin E. Abaya, “The Euro-US War on Libya: Official Lies and Misconceptions of Critics” at http://petras.lahaine.org/?p=1847 참조


38) 이들의 인도주의적 수사의 허구성은 엠네스티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유럽 쪽으로 탈출하려는 리비아 난민을 거부하여 1,500명 이상이 지중해에서 빠져 죽게 만든 사실에서도 잘 알 수 있다.-Amnesty International, op. cit., p. 9.


39) 리비아의 석유는 고품질이고 주로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수출되며, 일반 석유와는 달리 별도의 정유시설이 필요하기 때문에 특히 석유수입의 50% 이상을 리비아로부터 수입하는 프랑스는 리비아에 사활적 이해관계가 있다.


40) internationalviewpoint 홈페이지의 <Libya, the resistance, the no-fly zone>라는 토론방에서 진행된 여러 논쟁들 (http://www.internationalviewpoint.org/spip.php?rubrique169). 국내의 관련글로는, 임필수, “리비아 공격을 둘러 싼 국제좌파의 분열에 대한 우리의 시각”, 『사회운동 』(2011, 5·6, 통권 100호), 김하영, 앞의 책, pp.143-164, 등을 참고하라.


41) 이 해석은 Qutait의 주관적인 해석인 것 같다. “중요한 것은 군사개입의 요청이 리비아에서는 거의 들리지 않고 있는데, 이것은 민족적 주권을 보호할 필요에 가득찬 반정부 운동에 대한 제국주의적 영향력이 결여를 보여준다.”-John Riddell, op. cit.


42) Tasnim Qutait, “The Price of the Divide on Libya : Why I support the No Fly Zone” in Political analysis and commentary from the Middle East, Perspectives, (#2 May 2011, Special Issue), pp. 248-250.


43) “리비아 과도국가위원회는 그동안 ‘카다피 제거’라는 목적 아래 일시적으로 단합돼 있었지만 목적을 달성한 후에는 극심한 분열을 겪을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실제 과도국가위는 반정부 인사와 해외 망명자, 아랍민족주의 세력과 카다피 체제에서 이탈한 인사, 여러 부족의 전사 등 다양한 계층과 부족이 결합돼 있다. 이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강력한 구심점이 생기지 않을 경우 카다피 정권 붕괴 후 더 큰 혼란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또 과도국가위 내에는 친서방세력과 반미세력이 얽혀 있는 데다, 알카에다 지부까지 반군의 일원으로 포함돼 있는 것으로 관측된다.”-<경향신문>, “리비아 과도정부 구심점 약화로 ‘제2 아프간’ 우려”, (2011.10.20.), 국제면.


44) Alan Woods, op. cit.


45) “일각에서는 서부 시민군이 내전에서 얻은 최고의 전리품으로 인식되는 카다피의 시신을 NTC와의 협의 없이 미스라타로 옮겼고, 이 시신이 시민군 간 주도권 싸움에 이용될 수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수도 트리폴리, 동부 시민군 거점인 벵가지, 서부 시민군 거점인 미스라타 등 세 도시가 전후 정국 주도권을 두고 치열한 다툼을 벌일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현재 시신을 지키고 있는 서부 시민군이 시신 처리와 관련된 협상 과정에서 영향력을 넓히려 할 수 있다는 것이다.”-<경향신문>, “카다피 시신 유족에 인계될 듯…매장 여부 불투명”, (2011.10.23.), 국제면.


46) “무장그룹들은 크게 동부 벵가지, 중부 미스라타, 서부 트리폴리와 젠탄 출신 등 3대 주요 세력으로 나뉜다. 지난 8월 트리폴리 함락은 서부 세력이 앞장선 반면, 이번 카다피 제거는 미스라타 세력이 중심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때 미스라타 세력은 벵가지 출신 중심의 과도국가평의회를 겨냥해 총리가 미스라타에서 나와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들은 카다피 체제에 대한 평가와 리비아의 미래상에 대한 생각이 엇갈린다. 다른 군소 무장그룹들도 새 리비아에서 나름의 대표성을 주장한다. 이같은 분열은 지리적인 차이 뿐 아니라, 이슬람주의 대 세속주의, 베르베르인 대 아랍족 등 정파와 종파, 민족 갈등이 중첩돼 있다.”-“무장세력 난립·분열 ‘재건 걸림돌’ 과도정부 리더십 취약…말 안먹혀”, <한겨레신문>, “리비아 혼란 계속”, (2011.10.23.), 국제면.


47) Amnesty International, op. cit., pp. 70-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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