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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이집트 : 수도의 첫 집회를 성사시켜 승기를 잡은 혁명
1952년 나세르가 이끄는 자유장교단은 쿠데타를 일으켜 친영 이집트왕조를 무너뜨렸다, 나세르 체제는 토지를 재분배하고 기초 생필품에 대한 보조금, 무상교육, 공공부문 주도의 일자리 창출 등 재분배정책을 추진하면서 집권당(해방당-나중에 국민민주당NDP로 이름을 바꿈) 이외의 모든 정당을 금지하고 노동운동을 포함한 대중운동과 좌파를 철저히 억압하고 배제한 권위적이고 포퓰리즘적인 체제였다.1) 나세르는 1956년 스에즈 운하의 국유화와 뒤이은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의 보복전쟁에 승리함으로써 서방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아랍민중의 자존심을 대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절치부심하던 이스라엘은 1967년 기습적인 공격으로 이집트와 시리아, 요르단에 궤멸적인 타격을 가하고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 지구, 시나이반도, 골란 고원을 점령하였다. 이 전쟁이 준 패배감은 컸고 국가주도의 경제발전이 한계에 부딪치자 1970년대 초 이집트는 막대한 부채와 고물과, 고유가 등 경제위기에 처했다. 1970년 나세르가 죽자 권력을 이어받은 사다트는 사적 투자를 촉진하는 여러 조치와 사유화 등 개방정책(인피타)과 이스라엘과의 화해를 추진하였다. 1979년에는 미국의 주선으로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정(캠프 데이비드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제 이스라엘은 배후의 이집트의 군사력에 대한 불안없이 주변 아랍국들을 유린하고 팔레스타인을 억압할 수 있게 되었다.2) 이 사건은 이스라엘과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아랍민중의 대의를 배반한 것이었다. 이집트는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군사원조를 받았고3), 1993년과 2000년 미국이 일으킨 이라크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하였다. 심지어 이라크 포로들의 고문까지 대리하였다. 이때의 내무부 장관이 현재 과도정부를 이끌고 있는 술레이만이다.
“90년대 초반 감당할 수 없는 외채수준 때문에 야기된 경제위기는 세계은행과 경제개혁에 관한 협정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20년간 이집트 정부는 사회적 프로그램에 대한 지출을 삭감하고 무역과 상품가격, 이자율을 자유화하고, 오랫동안 시행되어 온 대졸자에 대한 정부고용을 보류하고, 수많은 공공부문 회사를 사유화하고, 많은 상품에 대한 보조금을 보류하는 일련의 구조조정 정책을 시행하였다. 국가 지출이 감소하자 교육, 의료, 교통을 포함하는 사회서비스에 대한 공적 지출이 정체되고 이들 서비스의 질이 악화되었다.4) 공장 노동자들, 무토지 농민들 그리고 수출이 아닌 내수시장을 위한 상품을 생산하는 사람들이 가장 큰 고통을 받았다. 그들은 정부의 서비스와 보조금 그리고 시장보호에 의존하였기에, 그들의 고통을 경제자유화의 결과로 보았다. 이와 동시에 새로운 경제 엘리트가 형성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경제개혁과 개방을 이용하여 정권이나 세계시장과의 계약으로 거대한 부를 이루었다. 이들 새로운 경제적 귀족들 아래에 중간계급 또한 발전하였다. 이렇게 해서 두 개의 층으로 이루어진 사회가 생겼다. 이집트 인구의 소수는 유례없는 번영을 하는 동안 다수는 점차로 주변화 되었다. 경제개혁과 자유화는 지배 엘리트와 경제 엘리트 간의 사악한 동맹으로 이끌었다. 집권당인 NDP와 밀접하게 동맹을 맺은 선택받은 소수는 공적 소유의 땅과 회사를 사는 특권과 국가 면허와 계약을 따는 지름길을 발견하였다.
지난 5년 동안 블루칼라 노동자들과 교육받은 전문직 노동자들은 파업과 항의를 조직하여 자신들에 대한 경제적 차별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였다. 이러한 항의는 파업이나 시위를 할 자유를 제약하는 법률에 의해 통제받는 노조의 통제 밖에서 일어났다. 2008년 재산세 수금원들은 1959년 이래 처음으로 독립노조를 결성하였다. 2010년에만 전국에서 노동자들의 파업과 시위가 700건이나 일어났다.
2010년 선거는 심하게 조작되었다. NDP는 97%의 의석을 얻었다. 2010년 선거는 2011년 무바라크(82)의 아들 가말에게 권력 승계를 보장하기 위한 사전작업이었다. 권력승계에 대해 야당만이 아니라 권력 내부의 군대와 관료들도 회의적이었다.”5)
이상으로 살펴보는 바와 같이 인구 8,300만 명의 이집트 경제는 197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그나마 있던 사회보장정책은 약화되었고, 극심한 빈부 격차와 실업, 권력의 부패와 야만적인 억압 그리고 2008년 이후 세계대공황의 위기와 석유가격과 식량가격의 폭등 등이 이집트 민중의 저항을 강요하고 있었다.
1월 14일 튀니지 민중이 벤 알리를 축출하자,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의 29년 장기집권과 독재에 대한 분노의 시위가 시작되고, 1월 18일 세 사람이 분신하고 반정부 시위가 격화되었다. ‘4.6 청년운동April 6 Youth Movement’은6) ‘경찰의 날’인 1월 25일에 대규모 봉기를 일으키자고 소셜 미디어를 통해 호소하였고, (네가지 요구. 첫째, 비상계엄령(1981년)의 해제와 사법부의 독립, 둘째, 고문과 인권탄압으로 악명 높은 내무부 장관의 해임, 셋째, 대통령 임기의 제한을 비롯한 정치개혁, 넷째, 지난해 11월 대규모 부정선거로 선출된 의회를 해산하고 새로운 선거를 실시할 것.) 며칠도 안 되어 9만 명이 넘는 젊은이들이 지지를 표명하고 이집트 전국에서 시위에 참가하였다.
1월 25일 이집트에서는 수만 명의 사람들이 무바라크 정권에 맞서 시위하였다. 카이로에서만 1만 5천명 이상이 거리로 나왔고 알렉산드리아, 아수안, 만수라 그리고 이스마일리아 등 다른 도시들에서도 시위자들이 함께 거리를 점거하고 행진하였고, 다시 이슬람교도들이 합동예배를 드리는 안식일인 금요일(1월 28일)에 ‘분노의 날’을 갖자고 요청하였다. 최대 야당인 무슬림형제단을 포함한 모든 야당이 시위에 참가하였고, 시위에 참가한 즉시 수백 명의 지도자들은 체포 구금되었다. 1월 27일과 28일 시위로 62명 사망하였고, 1월 30일에는 노동자 계급이 이집트 독립노동조합연맹(FETU)을 건설하고 전국 총파업을 호소하였다. 2월 1일 이미 총 300명 이상 사망하였고, 이집트 군부는 시위대에 무력사용을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2월 2일에는 최대 반정부 시위인 ‘100만인 행진’에서 친정부시위대와의 충돌로 카이로 15명, 알렉산드리아 52명, 수에즈 13명이 살해되었다. 2월 4일 수십만 명이 시위하였고, 이날 5,000명이 부상하였다. 2월 5일 이집트 총리는 강제해산을 않겠다고 발표하였고, 2월 6일과 7일 야권은 ‘정권교체협의 25인 위원회’를 구성하고 개헌위원회 등의 설치에 합의했지만 시위주도단체는 정부와 협상을 거부하고 혁명방어위원회를 발의하였다. 2월 8일 두 번째 100만인 행진이 있었고 수에즈운하 노동자들이 파업하였다. 무바라크는 2월 11일 군에 권력이양을 발표하고 다음날 사임하였다. 2월 18일 승리의 행진이 있었고, 군부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독립노동조합연맹은 파업을 계속하였다. 군부는 양원을 해산하고 헌법개정위원회를 구성하고 6개월 내에 선거와 정권이양을 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이상은 외신보도를 종합한 항쟁의 흐름이다. 보다 상세한 사정을 알기 위해 당시에 현장에 있었던 주로 아랍출신 취재단들의 관찰기를 살펴보자.7)
“1월 25일은 ‘분노의 날’로 명명되었다. 이집트에서는 수백 명의 항의자를 수천 명의 검정제복의 진압 경찰로 압도해버리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이날 처음으로 시위대가 경찰의 수를 압도했다. 팔짱을 낀 시위대에 최루가스로 대응했다. 군중들은 과거와 달리 남자와 여자, 늙은이와 젊은이, 무슬림과 기독교인이 뒤섞여 있었다. 대학에 다니는 자녀들을 데리고 나온 50대의 한 여성은 “변화를 위해 평화롭게 시위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나왔다”고 말했다.
늦은 오후 타흐릴 광장으로 방향을 바꾸고 광장을 장악하려는 시위대에게 경찰은 물대포, 최루가스, 곤봉을 사용했지만, 이른 저녁 수천 명의 시위대는 광장으로 들어갔다. 무슬림형제단은 주초부터 회원들이 개별적으로 참가하는 것은 허용하지만, 조직적으로는 참가하지 않겠다고 밝혔다.”8)
“시위 초기에 경찰들은 매우 소극적으로 대응했다. 이는 정부가 튀니지에서와 같은 민중봉기를 피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많은 시위자들이 여러 곳에서 경찰저지선을 부수고 타흐릴 광장에 도착하자 경찰은 전술을 바꿨고 상황은 심각해졌다. 경찰은 방패와 곤봉 그리고 최루탄과 물대포로 시위자들을 해산시키고자 했다.
이집트 내무부 장관 하비브 알-아들리는 도심을 방어하기 위해 3만 명의 경찰을 소집했다. 특히 상당한 수의 경찰이 정부청사와 의회를 에워쌓았다. 그는 사전에 시위자들에 대해 정부재산이 파괴되고 경비대가 위협될 경우 ‘단호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선언했었다. … 외신의 현장 보도를 종합하면, 이집트 야당과 인권연합은 ‘혁명과 자유, 고문, 빈곤, 부패 그리고 실업에 맞선 혁명의 날’이라는 구호로 이날 시위를 제안했다.9) 트위터와 페이스북에서만 9만 명 이상이 시위 참가에 동의했다. 시위는 무엇보다 부패, 빈곤, 고문 그리고 실업을 문제화했다. 몇몇 조직들은 무바라크 대통령의 퇴진과 30년 동안 지속하고 있는 국가비상사태의 종식을 요구했다. 주최 측은 명백하게 튀니지에서의 저항이 빈곤과 억압에 맞서 거리로 나서도록 이집트인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었다고 분석했다.”10)
“2월 1일 밤 무바라크는 두 번째 연설에서 가을에 시작되는 6번째 임기를 포기하겠다고 밝혔다. 이날 밤에도 수천 명의 시위대는 ‘정권 타도’를 외치며 타흐릴 광장을 지켰다.”11)
“어제(2월 1일)부터 친무바라크 데모가 나타나 시위대와 가투가 벌어졌다. 2월 2일 점심때 인터넷 서비스가 회복되고 모두가 들떠 있었지만. 해질녘 타흐힐 광장은 부상당한 사람들로 가득 찼다. 주로 카이로 외곽의 관광객 호객꾼으로 보이는 말이나 낙타를 탄 1,000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우리는 무바라크를 사랑한다, 그는 떠나지 않는다” 등의 구호를 외치며 나타나, 돌과 시멘트 덩이를 던지면서 시위대를 유린하려 했다.12) 충돌이 있기 전 군 대변인은 시위대에게 귀가하여 일상에 복귀하라고 성명을 발표했다. 군인들은 시위대의 호소를 무표정하게 바라만 보고 있었다. 군인들에 대해 분노가 터져 나오기도 했지만, 군대를 자극하지 않으려고 신경쓰는 사람들도 있었다. 지난 며칠 동안 군대와 자원봉사대는 검색대를 세우고 광장 출입자들의 신분증과 무기검사를 하였는데, 2월 2일부터는 신분증을 등 뒤로 보이면서 몇 번이나 몸수색을 받아야 했다.”13)
“1월 28일부터 시위대는 타흐릴 광장을 고수하였다. 2월 3일 친무바라크 시위대는 광장으로 향하는 두 개의 다리를 장악하고, 음식과 의료품을 광장으로 반입하려는 사람들을 가로 막았다. 2월 4일 금요일 거대한 금속 바리케이드가 타흐릴 광장으로 향하는 모든 도로를 가로 막았다. 시위대는 공사장 두 곳을 확보하고 투석전을 위해 돌과 시멘트 덩이를 쌓았다. 친정부 시위대는 쫓겨났고, 시위대가 광장으로 향하는 다리 하나를 해방시켜 경찰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수천 명의 사람들이 합류할 수 있게 됐다. 광장 안에는 임시 치료소가 여러 개 설치되었다. 이날 최대한 많은 군중이 모여 행진했다. 친무바라크 시위대의 공격은 국제적으로 많은 비난을 받았고 실패했다. 시위대는 금요일까지만 버티면 거대한 지원자들이 합류할 것으로 판단했다.”14)
“(2월 4일) 광장에는 ‘대통령 사임,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 새로운 헌법’이라고 적힌 거대한 배너가 걸려 있었다.”15)
“1월 27일 고흐님Wael Ghonim(30)은 튀위터에 “#이집트를 위해 기도하자!16), 겁에 질진 정부는 내일 인민에 대한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올린 뒤 소식이 두절됐다. 다음날 수많은 사람들이 최루가스와 소방호스 고무탄 실탄을 무릅쓰고 수천 명의 진압부대를 압도하면서 광장으로 쇄도했다. 고흐님은 국제적인 석방운동 뒤 2월 7일 풀려났다. 고흐님은 두바이에 있는 구글 회사의 간부이다.
고흐님이 2월 7일 밤 방송(사영 채널)에 출연하여 “이것은 모든 이집트 청년들의 혁명이다. 나는 지도자가 아니다.”고 말하고, 희생자들의 영정을 보면서 “우리 모두의 잘못”이라고 흐느낀 것은 많은 이집트인들에게 감명을 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고흐님을 페이스북 페이지 ‘우리 모두가 칼레드 사이드다We Are All Khaled Said’의 운영자로 생각했다. 이 페이지는 2010년 6월 6일 당시 28세의 칼레드 사이드17)가 알렉산드리아의 인터넷 카페에서 경찰에게 심하게 폭행당해 죽은 날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고흐님을 유괴하고 억류하고 석방한 이 사건은 고흐님을 영웅으로 만들었다. 지난 일주일 동안 국영 TV에서는 시위대를 위험한 이슬람주의자나 이스라엘 첩자로 선전했다.
광장 그 자체를 운영하는 조직은 가끔 투쟁을 선동할 때 신뢰를 받았던 페이스북 그룹이나 정당 혹은 운동들과는 완전히 절연된 하나의 실체다. 1,000명이 넘는 타흐릴 운영위원회의 멤버의 한사람이 말한 바에 따르면, 소수의 자원봉사자들이 바리케이드를 만들고, 프락치를 색출하고, 임시 의료소를 운영하고 있고, 100명 정도인 조정위원회가 중요한 결정을 하는데, 이들은 대부분 1주일 전만해도 서로 몰랐던 사람들이고, 활동가들도 아니다. 임시 조직자들은 조정위원회의 내부 서클에 대표단을 만들려는 시도에 반대해 왔다.
청년 그룹 중엔 자칭 ‘현자Wise Men’-장년층들로 이루어진 위원회는 정부와의 중개를 자임했다-들과 연계를 맺고 있는 그룹도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청년그룹들이 광장에 모인 사람들을 대표하는 것도 아니고, 나와 대화한 사람들 중엔 아무도 술레이만을 만난 ‘1월 25일 청년들January 25 youth’이나, 일요일날 기자회견을 열어 협상에 대한 입장을 밝힌 ‘분노한 청년연합Coalition of Angry Youth’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주말이 지나자 군인들은 탱크로 시위대를 이집트 박물관 남쪽으로 밀어 붙이기 시작했고, 여기에 십여 명의 무슬림형제단의 청년회원들이 상급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탱크 아래로 몸을 던져 막았다.
타흐릴 광장 안에서는 점차 구역이 나뉘게 되고, 메가폰을 든 무슬림형제단은 광장 남쪽, 완전한 스피커 장비를 갖춘 죄파들은 광장 서쪽, 그리고 그보다 작은 그룹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18)
“2월 8일 수요일 거대한 군중이 무바라크의 축출과 근본적인 정치개혁을 외치며 타흐릴 광장으로 쇄도했다. 페이스북에서 고흐님을 이집트 혁명의 대변인이라고 지명하는 페이지가 만들어지자 거의 14만 명의 지지를 얻었다. 그러는 동안 새로운 혁명위원회는 단일전선과 합의된 요구사항을 만들려고 모였다. 오전엔 카이로 대학의 수백 명의 교수들이 무바라크 타도를 외치며 광장으로 들어왔다.”19)
“(2월 9일) 수십만 명의 이집트인들이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 등지에서 ‘인민은 정권의 퇴진을 요구한다’를 외치며 행진했다. 정부는 TV와 라디오를 통해 외국에 의해 사주된 음모라고 악선동을 하였고, 기자들을 포함한 외국인이나 관광객들이 억류되고 위협받았고, 알자지라 사무실을 급습하여 모사드(이스라엘 첩보기관) 스파이와의 관련자를 찾는다면서 장비를 압수하고 8명의 주재원을 억류하였다.
정보부는 전화망을 이용하여 모든 이동전화 가입자들에게 ‘군대는 이집트의 충성스런 사람들이 배반자와 범죄자에 대항하여 우리들의 가족과 명예와 소중한 이집트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문자를 전송하기도 하였다.”20)
“(2월 10일) 아침 9시 수만 명의 사람들이 광장을 가득 메웠다. 깃발을 든 젊은이들이 콩가 춤을 추면서 ‘오늘밤 호스니는 떠난다’는 구호를 외치기도 하였다. 다른 쪽의 젊은이들은 북을 치면서 ‘우리들이 인터넷의 젊은이다. 우리들이 자유의 젊은이다’는 구호를 외쳤다. 초저녁부터 대통령이 굴복할 것이라는 전망이 늘어갔다. 광장 한편엔 무바라크의 연설을 생방송하는 알자지라를 보여주는 프로젝터가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어떤 시위대들은 군대와 충돌을 일으킬 수도 있는 새로운 지역을 빼앗으려고 하고 있었고, 어떤 그룹들은 정보부를 포위하려고 이동하고 있었고, 다른 그룹은 대통령궁으로 가려고 결정한 것 같았다. 두 곳 모두 군대가 엄중하게 지키고 있는 곳이었고 그들의 행동을 군대가 허용할 것 같지 않았다.
국제원자력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엘바라데이ElBaradei는 “이집트는 폭발할 것이다. 군대는 지금 국가를 구해야만 한다”고 트위터에 남겼다. 무바라크의 연설동안 어떤 시위 조직자는 분노한 군중의 감정을 가라앉히려 하였다. 어떤 사람은 “어떠한 도발이 있더라도 내일의 시위는 평화적이어야 합니다.”고 메가폰으로 외치고 있었다.”21)
“2월 2일 알자지라에서는 채찍과 단도와 체인과, 화염병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타흐릴 광장의 시위대를 몰아내려고 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줬다. 2월 4일은 낙관적으로 ‘퇴임의 날’로 정해졌지만, 인터넷이 차단되었다. 대여섯 대의 경찰 차량이 불에 탔다. 시위대 중에는 “나는 운전면허를 따려고 600 이집트 파운드를 뇌물로 줬다”는 사람도 있었다. 주말인 2월 5일 무슬림형제단을 포함한 자칭 현자들이 술레이만과 협상하려고 하였다. 그동안 300여 명이 죽었다. ‘순교자의 날’인 2월 6일 타흐릴 광장에는 거대한 영정이 걸렸고, 시위대는 무바라크의 퇴진 전에는 어떠한 협상도 거절하였다. 만약 변환점이 있다면 2월 7일 월요일 밤에 있었던 고흐님의 인터뷰였다. 2월 8일 가장 규모가 컸고, 2월 8일 이후 새로운 시민 그룹들이 혁명에 참여하였고, 시위와 파업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갑자기 전국의 수많은 교수와 판사와 의원들이 타흐릴 광장으로 행진하였다. 2월 9일 시위대는 의사당 앞 도로를 장악하고 텐트를 치고 연좌에 들어갔다. 2월 10일 무바라크의 사임예상이 비관으로 바뀌자 시위대는 국영TV빌딩을 봉쇄했다. 그리고 2월 11일 무바라크가 이집트는 아닐지라도 카이로를 떠났다는 소문이 나돌자 아마도 거의 전 국민이 거리로 나왔다.”22)
2-2-3. 이집트 혁명의 분석
무바라크에게 승리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 첫 번째 이유는 이집트 민중이 1월 14일 튀니지 민중의 승리에 고무되어 페이스북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1월 25일(화) 집회 선동에 적극 호응하였다는 점이다. 첫 집회가 경찰을 압도하지 못했다면 그리고 그 흐름을 1월 28일(금)로 이어가지 못했다면 승리는 없었을 것이다. 1월 27일과 28일에 경찰의 발포로 이미 62명이 사망하였고 2월 1일까지 300명이 희생되었다. 1월 28일부터 타흐릴 광장에 출동하였던 군부는 2월 1일 발포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2월 1일부터 3일간 경찰이 동원한 용역깡패들이 타흐릴 광장의 시위대를 유린하였고 많은 부상자가 나왔다. 시위대는 2월 4일까지만 버티면 된다고 생각하였다. 금요일은 무슬림들이 광장에 모여 기도하는 날이다. 따라서 1월 28일과 2월 4일, 2월 11일 등 금요일마다 더욱 확대된 시위대가 공권력을 압도할 수 있었던 것은 이집트 민중의 행운이다.23) 항쟁의 큰 흐름을 보면 1월 25일 시위가 시작되었고, 1월 28일부터 2월 1일까지 노골적인 진압으로 300명의 희생자가 나온 뒤 군부가 중립을 선언하고, 이후 2월 4일까지 용역깡패와 경찰과의 충돌은 5,000명의 부상자를 낳았고, 다음날 술레이만은 강제해산을 포기하고 야당과의 협상에 들어갔다.
외신들은 군부가 무바라크에게 등을 돌린 것은 미국의 적극적인 개입이었다고 보도하였다. 그것은 사실이다. 다만 현상적 사실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대중의 분노가 폭발할 때, 피지배계급이 노도와 같이 달려들 때, 더 이상 폭력으로 민중의 힘을 억압할 수 없을 때 지배계급들이 분노의 표적을 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현상을 규정하는 본질(현상과 본질의 변증법)이다. 폭발적인 대중의 봉기 앞에서 지배계급과 군부는 무바라크만 피신시킨 것이었다.
이집트 민중의 항쟁 역시 몇 번의 고비가 있었다. 첫 번째는 1월 25일 첫 집회가 대중의 압도적 참가로 성공한 것과, 1월 27일과 28일의 경찰의 발포에도 불구하고 1월 28일 집회를 성사시키고 타흐릴 광장을 사수한 것, 2월 1일부터 3일간 깡패들과의 싸움을 이겨낸 것 그리고 2월 4일 이후 지배계급-술레이만의 회유에 일부 야당인사들의 타협적 태도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고 단결을 유지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2월 1일부터의 깡패들과의 싸움은 많은 부상자가 난 치열한 싸움이기는 했지만 투석전으로도 해볼 만한 싸움이었고 2월 4일까지만 버티면 희망이 있다는 확신이 있었고, 무엇보다 군부가 2월 1일부터 무력사용을 않겠다고 발표한 직후였다. 그리고 1월 27일부터 5일간의 300여 명의 희생자는 군대가 진주한 타흐릴 광장이 아니라 카이로를 비롯한 다른 도시에서 경찰에 의해 발생했다. 무바라크는 시위대를 학살하면서도 항쟁의 상징인 타흐릴 광장을 점거하고 있는 농성자들을 살육할 수가 없었다. 승패는 여기에서 결정되었다. 결국 승리의 결정적인 요인은 1월 25일의 수도 집중집회를 성사시킨 것과 그 흐름을 깨지 않고 1월 28일부터 타흐릴을 끝까지 사수한 것이다. 결국 이집트 혁명이 승리한 것은 첫 집회의 압도적인 동원의 성공과 흐름을 깨지 않은 확산 때문이다. 그 이후 지배계급은 반격은 했지만 한 번도 전세를 역전시키지 못했다. 결국 이집트 민중의 승리는 1월 25일 카이로의 15,000명이라는 아주 많다고는 볼 수 없지만 이집트에서는 이례적으로 많은 대중이 경찰의 저지선을 뚫었을 때, 그리고 1월 28일부터 2월 1일까지 5일간 경찰의 학살에 굴하지 않고 이겨냈을 때 결정되었던 것이다.
공권력의 노골적인 폭력에는 자위무장이 등장하지 않을 수 없다. 폭압에 맞서 화염병과 돌멩이라도 들고 뚫고 나가느냐 아니면 위축되어 집으로 돌아가느냐 혹은 투쟁파가 소수가 되어 고립되느냐는 당시의 상황과 대중의 의지와 감정에 좌우되겠지만, 이집트 혁명은 대중이 힘을 자각하고 있을 때 즉 압도적인 숫자로 공권력을 압도하고 있고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신하고 있을 때 항쟁의 의지는 꺾일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혹자는 현상만을 보면서 ‘페이스북 혁명’이라는 말을 지어내기도 하고, 혹자는 승리의 요인을 무바라크의 사임 이틀 전 수에즈 운하와 알렉산드리아 등지에서 있었던 강력한 노동자 계급의 총파업이 결정적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 노동자들의 총파업이 승패가 거의 결정난 1월말 이후인 2월 8일부터였다는 점과 항쟁의 초점이 타흐릴 광장이었다는 점에서24) 지방도시의 총파업만으로 승리의 결정적 요인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승리는 타흐릴 광장의 시민들(주로 카이로의 도시빈민들과 청년들)이 목숨을 걸고 쟁취한 것이다. 따라서 이 투쟁에서 절반의 승리를 확보한 1월 25일 집회의 동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25)
“1990년대 이슬람주의자들에 대한 국가의 격심한 탄압 후26)에 젊은 활동가들은 어떠한 이데올로기적인 배경에도 열려 있고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전혀 갖지 않은 사람에게도 열려 있는 항의 운동의 새로운 세대를 통해 그들의 불만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운동 중의 하나가 수많은 비정치적인 젊은이들을 끌어당긴 '케파야Kefaya'(이제 그만)27)이다. 2004년과 2005년에 케파야는 대통령의 임기와 비상조치법의 끝낼 것을 요구하는 주목받는 항의를 조직했다.”28) 2004년 무바라크가 5번째 임기에 도전하기 위해 국민투표를 발의했다. 이 시점은 무슬림형제단을 비롯한 야당은 물론 노동운동과 대중운동이 내무부와 정보경찰에 의해 거의 질식당한 상태였다. 이때에 정치적인 색깔이나 종교적인 색깔에 개방적인 즉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최우선으로 하는 청년활동가들을 중심으로 ‘케파야’라는 연대체가 꾸려졌고,29) 이들은 주로 200-300명 정도의 기습시위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이에 이들을 모방하는 많은 조직들이 생겨났고 서로 연대하였다. 2005년 총선결과를 승인하기를 거부하고 100명이 넘는 판사들이 항거하자 이들의 징계재판에 많은 사람들이 연대하고 시위하였다. 이 투쟁으로 250명 이상이 구속되자 2006년 5월 무슬림형제단이 대중집회에 동참하여 카이로 시내를 마비시켰고 격심한 탄압을 받았다.30) 2006년부터 노동자들의 투쟁이 터져 나왔다.
“2008년 초 마할라El-Mahalla el-Kubra에 있는 국영 섬유공장 노동자들은 높은 식품가격과 낮은 임금에 항의하기 위해 4월 첫 일요일(6일)에 파업할 것이라고 밝혔다. 여기에 관심을 보인 젊은이들이 제분 노동자들과 연대하여 4월 6일 항의와 파업을 조직하는 페이스북 그룹을 만들었고, 7만 명의 지지를 받았다. 경찰은 공장을 점령하고 파업을 막았다. 시위대는 건물에 불을 질렀고, 경찰이 발포하면서 두 명이 죽었다. 이집트 전역의 연대 시위는 경찰에 막혀 흐지부지 되었다. 페이스북 조직자들은 뭔가를 해야 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집에 있어야 할지 거리로 나아가야 할지 결코 합의할 수 없었다. 대실패로 끝난 4월 6일 항의는 민주주의 혁명의 도구로서 사회적 네트워크의 한계를 알으켜 주었다. 페이스북은 수만 명의 지지자들 모을 수 있지만, 그들이 로그아웃을 하면 조직할 방법이 없다.”31)
“2008년 초 2005년 대통령 선거에서 강력한 무바라크 반대운동을 벌인 케파야 운동의 젊은 멤버였던 살라Ahmed Salah와 마헤르Ahmed Maher는 '4.6 청년운동'을 조직하였다. 파업을 고무하기 위해서 그들은 페이스북과 트위터, 블로그 등을 사용하여 사건을 알리고, 참가자들에게 위험상항을 알리고, 보안부대에 둘러싸인 사람들에게 합법적인 도움을 주었다. 이들은 2010년 11월의 국회의원 선거에도 개입하였다. 2009년 말에는 지지자가 7만 명에 달했다.”32)
케파야나 4.6 청년운동은 기층노동운동에도 연대하고 때로는 자유주의자인 엘마라데이에게 지지를 보내기도 하는 한마디로 민주화를 열망하는 활동가들이 주축이 된 광범한 네트워크이고, 페이스북과 인터넷을 활용하는데도 익숙한 청년들이었다. 또한 그들의 핵심에는 다양한 조직이 참여하고 있는 느슨한 연대체였다.33)
결국 케파야와 4.6 청년운동은 이미 대중에게 알려지고 신뢰를 얻은 집단이자 페이스북 모임이었고, 1월 14일 튀니지의 승리가 전해지자 1월 25일 집회를 제안한 것이고,34) 여기에 많은 단체들이 인터넷상에서 호응하자 야당을 비롯한 여러 단체들도 호응한 것이다. 이들은 집회를 제안한 뒤 일체의 인터넷 접속을 자제하고 지하로 숨은 뒤 중요활동가들이 전술을 논의하였다. “조직자들은 오래전부터 경찰을 오도하기 위해 내무부 외곽에서 모일 것이라고 밝혔지만, 점심 직후 페이스북과 트위터를 통해 집결장소를 바꾸었다. 인터넷에서는 ‘#jan25’라는 태그를 사용했고, 대오는 150명부터 1,000명이 넘는 경우까지 다양했다.35) NDP 건물 앞에서는 ‘무바라크, 너를 위한 비행기가 기다린다’고 외쳤다. 알렉산드리아와 마할라에서도 같은 시위가 이루어졌다. 구호는 무바라크 퇴진, 대통령 임기제한, 비상사태법 폐지 등이었다.”36)
이상으로 살펴본 바와 같이 1월 25일의 동원은 단순히 페이스북에서 집회의 제안과 선동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핵심활동가들의 긴밀하고 치밀한 작업에 의해 성사된 것이다. 인터넷상에서 9만 명이 넘는 호응을 얻고, 거짓정보를 흘리며 경찰을 혼란시키면서 여러 곳에서 모여 대중을 타흐릴로 인도한 것이 결정적이었고, 여기에 체제의 변화를 갈망하는 도시빈민과 청년들이 합류하여 전투력을 형성한 것이다. 따라서 무슨 페이스북 혁명을 운운하며 동원의 현상적 형태를 물신화하는 것도 우스운 얘기지만, 그렇다고 현대인의 문화적 조건인 인터넷 공간이나 소셜 미디어의 역할을 너무 폄하하는 것도 잘못이다.(이점에 대하여는 ‘3-4. SNS와 대중의 존재 양식’에서 상론할 것이다)
2-2-4. 이집트 혁명의 전망
“‘1월 25일 청년연합Coalition of January 25 Youth’37)의 요구조건은 대통령의 사임, 비상조치법 종식, 모든 정치범 석방, 국회 해산, 독립적인 전문가로 정부 구성, 새 헌법 초안 작성, 폭력 책임자 처벌이었다. 이집트의 젊은 활동가들은 1월 29일 총리로 선임된 술레이만Omar Suleiman과의 협상을 거부하였다.
케파야, 변화를 위한 전국연합National Association for Change, 민주전선당Democratic Front Party, 내일당Tomorrow Party, 신와프드당New Wafd Party은 시위에 참가하였고, 이들은 무바라크가 물러날 날 때까지 정권과의 협상을 거부했지만, 무슬림형제단과 타감무 좌파당Leftist Tagammu Party은 1월 28일까지 공식적으로 시위에 참가하지 않았다. (이들 조직의 청년 회원들의 많은 사람들은 1월 25일 시위에 참가하였다.) 후자는 술레이만과 협상에 나섰다.
무슬림형제단은 누구보다 시위에 열심이었지만, 눈에 띄지 않으려고 하였다. 청년회원들은 항의를 조직하는 연합의 핵심이었고, 어떤 조직가에 따르면 무슬림형제 지지자들이 타흐릴 광장을 점거한 군중의 3분의 1이었다. 무슬림형제단은 자신들의 세력이 강했던 알렉산드리아와 만수라에서 시위대의 큰 부분을 차지했다. 그들은 시위에서 종교적인 슬로건이나 시위를 추동하고 있는 세속적인 혹은 친 민주적인 활동가들을 압도하려고 하지 않았다.
처음 2주 동안 노동운동과 전문가 그룹은 눈에 띄는 역할은 하지 않았지만, 마지막 주에는 파업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무바라크의 사임 이틀 전 운송, 통신의 총파업과 함께 이집트는 총체적인 시민불복종의 상황에 이르렀고, 산업부문, 판사, 의사, 대학 교수, 언론인 그리고 예술가들까지 시위를 조직했다.
이슬람주의자와 세속주의자, 자유주의자와 좌파는 과거에 경쟁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일부 정파가 정권과 거래할 위기감이 있었지만, 무바라크 정부가 어떤 양보도 거부하고 폭력을 사용할 의지가 분명했기 때문에 사태의 전환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군부로 하여금 무바라크를 몰아내게 한 것은 반대세력의 단결과 광범위한 대중동원이었다.
무바라크를 몰아낸 혁명은 정권의 일부만 해체했다. 무바라크의 가족과 그들과 연계된 경제인 그리고 국가 관료제와 NDP의 중요인사, 국가보안기구의 많은 사람들과 정권의 기본 구조는 그대로이고 군부와 국가 관료제는 국가를 강력하게 통제하고 있고 과도기간의 이행과정을 지배하는 위치에 있다.”38)
이상으로 살펴보는 바와 같이 4.6 청년운동 등의 청년활동가들은 초기 동원에는 성공하였지만, 무슬림형제단을 비롯한 특정 세력이 주도하거나 혹은 기왕의 운동세력이나 활동가들이 이후의 투쟁을 주도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무바라크가 떠난 뒤 군사최고위원회가 권력을 장악하고, “자유롭고 민주적이며 시민적인 당국에 권력을 넘겨주는 작업을 계속할 것이다. 군부는 모든 지역적 국제적 협정은 존중될 것이라고 밝혔다. 가자지구의 하마스 지도자는 시위대를 찬양하면서 무바라크가 봉쇄한 가자지구를 개방해야한다고 요청했다.”39) 최근 무슬림과의 참사로 이끌었던 콥트교 시위40)의 무력진압, 새 정부 구성 지연, 국가비상조치법 재가동 등 잇따른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이집트 군사최고위원회가 최근 외환보유고 하락 때문에 IMF 대출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고 이집트 민중들은 반대하고 있다는 외신보도가 있었다.41) 이것은 미국에 의해 매수된 군부가 이집트 민중의 혁명에 최대의 장애인 것을 의미한다. 이 사실은 항쟁의 절정기 때 혹은 무바라크가 사임한 직후에 단지 RCD나 부패인사의 청산만이 아니라 군부지도자의 축출과 무력화를 전면에 내걸고 싸워야 했음을 의미한다. 이집트 혁명은 튀니지처럼 단지 독재자만 몰아냈을 뿐 혁명운동의 주도권을 군부에 빼앗겨 버리고 말았다. 물론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노동계급의 경제투쟁을 결집하여 군부와의 대립화를 첨예화하면서 전면적 대결로 나아가야 하나 기회주의적인 노조 상층부의 문제 등 이집트 노동계급의 총체적 역량은 부족한 듯하다.
선거 일정이 잡혀있고42) 수많은 급조된 정당들이 난립하는 현 상태라면 무슬림형제단이 가장 많은 수혜를 볼 것이고, 그들은 범아랍 민족주의적인 정서 하에 이스라엘에 반대하고 팔레스타인에는 우호적인 입장이겠지만, 이슬람 극단주의나 여성차별을 고집하지 않는 터키형의 세속적인 친자본의 자유주의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일반인의 시위에는 폭력의 사용을 자제하면서도 노동자들의 파업에는 적대적인 ‘무바라크 없는 무바라크 체제’에서 지배계급의 반민중적이고 기만적인 민주화 책동을 막기 위해서는 계급운동을 재정비하고 체계적인 투쟁을 준비할 필요가 있다.
1) 이러한 체제를 국가자본주의로 보는 시각도 있고, 일종의 지배협상이나 코포라티즘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50년대와 60년대의 권위적이고 대중적인 나세르 체제는 노동자계급과 중간계급과 지배협상을 낳았다. 모든 정당은 금지되고 노조를 포함한 시민사회기구는 정권의 직접적 통제 하에 들어왔다. 그 대가로 국가는 정부 고용의 형태로 식량과 에너지와 주택 대중교통, 자유 교육, 의료와 같은 사회 복지 서비스를 제공하였다.”-Dina Shehata, "The Fall of the Pharaoh : How Hosni Mubarak’s Reign Came to an End" in Foreign Affairs, (may / june 2011 volume 90, number 3), p. 27.-든지, “1956년 프랑스의 식민통치로부터 독립한 튀니지의 하비브 부르기바 정권은 1970년대 코포라티즘에 기반한 수출주도 경제정책을 추진하였다. …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이 본격화하면서 부르기바 정권의 코포라티즘은 그 기반이 붕괴한다.”(임월산·조은석, “북아프리카 민주화 운동과 노동자 운동의 역할”, 『사회운동』, (2011.5·6)는 서술이 그것이다. 그러나 서구적 의미의 코포라티즘은 국가와 자본과 노동의 3자간 힘의 균형 속에서 이루어진 협약이라고 볼 때, 2차 대전 후 제국주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아랍민중들의 열망과 무상교육과 무상의료 등 사회주의 체제의 우월성이 힘을 발휘하던 시기, 아랍의 권력집단이 대중운동을 철저히 억압하면서 대중의 열망을 일정 정도 수용한 이러한 형태를 지배협상이나 코포라티즘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런데 국가자본주란 개념은 국가나 엘리트집단인 당이나 관료조직이 자본가를 대신하다는 것으로 이러한 틀로는 하나의 사회구성체의 내의 계급모순과 그에 따르는 운동을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비과학적 개념이다.
2) 이스라엘은 이집트와의 평화협상으로 군사비 부담을 GDP의 25%에서 7%로 줄일 수 있었다. 최근 한국의 경우 보편적 복지와 재원부담을 둘러 싼 논쟁이 많다. 그런데 남북이 서로 적대하지 않고 평화협정을 체결하여 GDP의 30% 달하는 군사비를 절약할 수 있다면 재원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군사적 긴장과 대립이란 이처럼 양측 민중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다.
3) “1979년 이후 미국은 해마다 이집트에 군사원조 13억 달러, 군사원조 8억 1,500만 달러씩을 제공했다. 1975년 이후 이집트가 미국에서 받은 돈은 모두 합쳐 500억 달러가 넘는다”-Chales Levinson, "$50 billion later, taking stock of U.S. aid to Egypt", Christian Science Monitor, (April 12, 2004.) 에릭 루더, “나세르에서 무바라크까지”, 『마르크스21』, 책갈피, (2011년 봄), p. 214.에서 재인용.
4) “이집트에서는 모든 것이 공식적으로는 매우 싸지만 운전면허부터 교육까지 뇌물이 오고간다. 정부는 교사들에게 매우 낮은 임금을 지급하고 교사들은 학교시험을 준비하는데 필수적인 과외학습으로 그들의 급여를 보충한다. 경찰은 오래 전부터 전국적으로 삥땅 뜯기(보호비 뜯기)로 악명이 높다. 이집트인들은 경찰이 걸핏하면 면허를 압수하거나 폭력을 휘두르기 때문에 뇌물을 받쳐야만 한다.”-Lisa Anderson. op. cit., p. 5.
5) Dina Shehata, op. cit., p. 27.
6) 처음 제안을 ‘케파야’가 했다는 글도 많은데, ‘케파야’나 ‘4.6 청년운동’이나 서로 활동가들이 겹치고, 여러 사정을 살펴볼 때 특정단체가 주도한 것이 아니라 여러 단체들도 거의 동시적으로 함께 했다고 본다. 이에 대해서는 후술한다.
7) 이 부분은 주로 Foreign Policy지에 실린 카이로 주재원들의 현장 관찰기들을 발췌한 것이다. Revolution in the arab world-A Special Report from Foreign Policy, Foreign Policy, 2011.
8) Ashraf Khalil, "January 25: Tear Gas on the Day of Rage" in Revolution in the arab world-A Special Report from Foreign Policy, Foreign Policy, 2011, pp. 73-74.
9) 바로 앞의 Ashraf Khalil의 묘사에서 보듯, 야당과 인권연합이 제안한 것이 아니라 페이스북 등 인터넷상의 제안을 이들이 호응한 것이다.
10) 정은희, “튀니지 혁명, 이집트와 북아프리카로 혁명의 물결 확산”, <참세상>, 2011.1.26.에서 재인용
11) Ashraf Khalil, "February 1: A Wounded Father Figure", op. cit., p. 76.
12) “2000년 수천 명의 학생들이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처사를 비난하는 시위를 한 적이 있었다. 10년 전 나일 뎉타 지역에서는 부유한 지주가 용역 깡패를 동원하여 소농들을 쫒아냈고, 농민들은 경찰에 호소했지만, 경찰은 농민들을 습격하고, 곡식을 불태우고, 재물을 강탈했다. 농민들이 카이로에 있는 인권단체의 도움을 받으려하자 군대가 다시 마을을 습격하고 주모자의 아내를 발가벗겨 마을로 끌고 다녔다. 2005년 5월 25일 경찰은 군중통제의 방법으로 용역깡패의 사용을 확대하는 결정을 했다. 2006년엔 케파야(이제 그만) 활동가인 샤르카위Mohamad al-Sharqawi가 비밀경찰에게 고문당하고 빗자루로 (항문을-인용자 삽입. 항문공격은 이슬람 사회에서 엄청난 모욕에 해당한다. 카다피도 생포된 후 이런 공격을 받았다.) 강간당한 사건도 있었다. 이날(2월 2일) 시위 현장에서 시위대를 괴롭히다가 붙들린 사람 중엔 전날 소매치기를 하다가 유치장에 갇혔던 사람도 있었다. 경찰은 이들 범죄자들을 풀어주고 통닭을 대접했다. 어떤 폭력배는 경찰이 보고 있는 가운데 여성 시위자의 옷을 찢고 더듬는 경우도 있었다.”-Amil Khan, February 2: With Eyes Red from Rage" in Revolution in the arab world-A Special Report from Foreign Policy, Foreign Policy, 2011, pp. 78-81.
13) Ashraf Khalil, "Later February 2: Day of the Thugs", op. cit., pp. 83-85.
14) Ashraf Khalil, “February 4: Fortress Tahrir" op. cit., pp. 89-91.
15) Blake Hounshell, "February 4: Two Cups of Tea" in Revolution in the arab world-A Special Report from Foreign Policy, Foreign Policy, 2011, p. 95.
16) ‘Pray for #Egypt’, 이집트 앞에 해쉬태그인 #을 붙였다. 촛불항쟁 때 인터넷 포탈 다음 Daum의 토론방에서 글의 제목 앞에 [명박타도]와 같은 말머리를 붙인 것과 비슷하다.
17) 칼레드 사이드는 경찰의 마약거래를 폭로하는 동영상을 인터넷에 올렸다가 사복경찰에게 보복을 당해 죽었다. ‘우리 모두가 칼레드 사이드다’는 페이스북 그룹은 지지자가 47만 명에 달했다.
18) Blake Hounshell, "February 7: A New Leader for Egypt’s Protesters", op. cit., pp. 96-99.
19) Blake Hounshell, "February 8: The Revolution Is Not Over", op. cit., p. 100.
20) Peter Bouckaert, "February 9: Egypt’s Foreigner Blame Game", op. cit., pp. 104-105.
21) Ashraf Khalil, "February 10: ‘We Need to Drag Him from His Palace", op. cit., pp. 107-109.
22) Blake Hounshell, "February 11: Pharaoh Is Dead, Long Live Pharaoh?", op. cit., pp. 110-113.
23) 시리아에서 3,000명이 넘게 학살당하면서도 저항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은 수도의 중심광장에서 금요예배를 빙자하여 사람들이 계속 모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술적으로 볼 때에 금요일마다 충돌을 반복하면서 해산할 것이 아니라 압도적인 군중이 모였을 때 해산하지 않고 끝장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2008년 촛불항쟁도 주말집회가 반복되었지만 5만이나 10만 이상이 모였을 때 끝장을 보았으면 이길 수 있었을 텐데 대책회의의 기회주의적 상층부 때문에 음악감상회나 하고 집으로 돌아간 것이 승리를 가로 막았다. 박석삼, 앞의 책 참조
24) 나중에 독립노총을 만드는 노조 간부들이 1월말부터 타흐릴 광장에 결합하기는 했지만 그들의 존재는 미약했다.
25) 2008년 촛불항쟁 역시 첫 집회부터 성공적인 동원이 이루어졌지만, 특히 대책회의의 상층부의 기회주의적 태도가 끊임없이 투쟁의 고양을 가로막았기 때문에 분노를 고양시키지 못했고 결국은 패퇴하고 말았다. 그들은 투쟁의 집행위원장이 아니라 투쟁의 관리위원장들이었다.-박석삼, 앞의 책, pp. 77-81.
26) 이집트의 대통령 선거는 찬반투표였지만, 국회는 형식적으로 다당제였다. 장기집권 등에 대한 불만으로 무슬림형제단이 약진하자, 경찰은 2010년 선거에 노골적으로 개입하고 선거결과를 조작하였다.
27) 케파야를 흔히 ‘충분하다Enough’고 번역하는데, '이제 그만'이라는 뜻이다.
28) Dina Shehata, op. cit., p. 28.
29) “2004년 민주화 운동에서 케파야는 수천 명의 중간계급 전문직, 학생, 교사, 판사, 언론인을 동원했다. 그들은 비상조치법 폐지, 정치범 석방, 고문 종식, 무바라크의 임기 종식 등을 요구했다. 팔레스타인 연대를 위한 대중위원회의 행동 위에 직접적으로 건설된 이러한 운동은 전통적인 야당과는 다른 대중세력과 작업하는 것을 선택하고 지도부로부터 홍보하는 것이 아니라 거리 속에서 캠페인을 하고 단순히 국제적인 요구보다 지역적 이슈에 집중했다.”-Asef Bayat, "A New Arab Street in Post-Islamist Times" in Political analysis and commentary from the Middle East, Perspectives, (#2 May 2011, Special Issue), p. 51. “2003년 이라크 침략 직전에는 5만 명 이상이 카이로 도심 광장을 점거하고 반전 시위를 벌였다. 나중에 ‘타흐리르 인티파다’라고 불린 이 시위는 이집트 사회에 가득한 [무바라크 독재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게 만들었고 키파야[아랍어로 ‘이제 그만’] 운동이 탄생하는 계기가 됐다.”- 호쌈 엘하말라위, "이집트의 반제국주의·민주화 투쟁", 『이집트 혁명과 중동의 민중 반란』, 책갈피, 2011. p. 69.에서 재인용
30) 라밥 엘 마흐디, “이집트 민주화 운동”, 『마르크스21』, 책갈피, (2011년 봄), pp. 244-245.
31) Tina Rosenberg, "Revolution U" in Revolution in the arab world-A Special Report from Foreign Policy, Foreign Policy, 2011, p. 127.
32) Maryam Ishani, "The Hopeful Network" in Revolution in the arab world-A Special Report from Foreign Policy, Foreign Policy, 2011, pp. 143-144.
33) “2004년 12월 12일 키파야는 첫 (침묵)집회를 열었다. 이 집회는 마르크스주의자, 나세르주의자, 이슬람주의자, 자유주의자 등 고참활동가 일곱명이 저녁모임에서 대중운동 단체에 관한 생각과 ‘키파야’라는 구호를 처음 논의하고 난 뒤 석 달도 안 되어 성사됐다.”-키파야 사무국장인 조지 이사크와 한 인터뷰 2006년 8월 9일 카이로- 라밥 엘 마흐디, 앞의 글에서 재인용
34) 1월 25일 이전에도 이집트에서는 3명이나 분신을 한다든지 산발적인 시위가 있었다.
35) 즉 애초의 제안에는 날짜만 있었고 장소가 없었다. 그리고 1월 25일 정오에 내무부 건물로 모인다는 소문을 흘린 뒤 인터넷과 문자 등을 통하여 집결장소를 분산하였고, 각 집결장소에는 적게는 100명 많게는 1,000명 정도가 모였다. 이들은 끊임없이 이동하였고 오후 6시쯤 각본에 따라 일제히 타흐릴 광장으로 쇄도한 것이었다. 따라서 각 집결장소에는 활동가들이 리더를 맡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6) Ashraf Khalil, "January 25: Tear Gas on the Day of Rage", op. cit., p. 74.
37) ‘1월 25일 청년연합’은 케파야와 4.6 청년운동 등이 만든 임시 공투체(공동투쟁체)이다.
38) Dina Shehata, op. cit., pp. 30-32.
39) Ashraf Khalil, “February 12: After the Party”, op. cit., pp. 117-118.
40) 2011년 10월 9일 카이로에서 이집트인구의 10%를 차지하는 콥트교도와 이슬람교도와의 충돌로 24명이 사망하고 200여명이 부상당하는 유혈 충돌이 있었다. 2011년 1월 1일에도 이슬람교도의 콥트교도에 대한 폭탄 공격으로 인한 충돌이 있었다.
41) <비지니스위크>, <로이터>와 이집트 언론 <알마스리 알리오움> 등을 인용한 “IMF가 이집트 혁명을 흔드나?”<참세상>, (2011.10.13.)에서 재인용
42) “이집트에서는 지난달 27일 군 최고위원회가 무바라크 퇴진 이후 첫 하원의원 선거를 오는 11월 28일에, 상원선거는 내년 1월 29일에 실시한다고 밝힌 이후 야권이 반발하면서 정정불안이 계속되고 있다. 야권은 특히 군부가 총선에서 전체 의석 중 정당별 비례대표제로 3분의 2를, 개인 후보제로 3분의 1을 선출한다고 발표하자 무바라크 정권인사들에게 정계복귀기회를 줄 수 있다며 반발하고 있다. 지난 달 30일에는 야당과 시민단체 회원 3,000여명이 타흐릴 광장에 모여 개혁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였다.”-<경향신문>, “콥트교 - 무슬림 충돌…이집트 또 유혈사태”, (2011.10.11.),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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