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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니지 : 지역적 고립을 이겨내고 가까스로 승리한 혁명

2-1. 튀니지 : 지역적 고립을 이겨내고 가까스로 승리한 혁명

2-1-1. 튀니지 혁명의 배경

튀니지(163,610 km²)는 남한(100,210 km²)보다 1.6배 정도 크고 남북으로 긴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북아프리카의 알제리와 리비아 사이에 있는 인구 1.038만 명의 작은 나라이다. 1881년부터 프랑스의 보호령으로 있다가 1956년 독립하였다. 1957년 대통령으로 선출된 부르기바Habib Bourguiba의 20년간의 독재에 뒤이어 1987년 벤 알리Ben Ali(82)의 독재가 시작되었다. 다음은 튀니지의 사정을 대강 알 수 있는 글들이다.

“1987년 튀니지가 81세의 부르기바 전제정부와 대중적인 이슬람주의 운동 간에 거의 내전상태에 있었던 때, 내무부 장관이자 총리였던 벤 알리는 부르기바를 밀어내고 정치적 경쟁과, 투명성, 그리고 의견과 표현의 자유 나아가 양심의 자유와 인권, 반대의사 표명권을 옹호하는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자로 행세하였다. 그러나 1989년 합법적 선거 후, 90년대의 시작과 함께 벤 알리는 이웃 알제리 내전에서 보여진 이슬람주의의 정치적 영향의 위험을 보면서 어려운 경제개혁과 함께 이슬람주의 운동을 막아야 했다. (튀니지의 주요 이슬람정당이었던 알 나흐다당Al-Nahda party을 포함하여-인용자 삽입) 이슬람주의자들은 합법적 정당이 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지만, 벤 알리는 10,000명 이상의 이슬람주의자들을 감옥에 보냈다. 정부에 대한 사소한 비판이나 불평도 이슬람주의자들을 돕고 선동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벤 알리는 국가기구와 집권당을 구분하지 않았고, 집권당인 RCD1)는 국가였고, 국가는 벤 알리에게 봉사했다. 국가가 정한 모호한 기준의 금지를 넘는 어떤 기사도 실릴 수 없었다. 기업가들도 대통령에게 충분한 충성을 보이지 않으면 허가를 얻을 수 없었다. 제복경찰과 사복경찰은 체제의 수호자가 되었고, 대통령과 내무부 장관의 지휘 하에 움직였다. 정부가 치안부대를 혜택받지 못한 지역에서 주로 충원한 것은 아이로니이다. 군대는 직업적이었지만 상대적으로 미약했다. 90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이슬람주의자들이 제거되고 어떠한 반대도 조직하지 못한 채 지하화 되자, 인권활동가와 언론인들이 목소리를 높였고, 사복경찰들의 폭력이나 마구잡이 연행과 고문이 회자되었다.

왜 봉기가 10년 전이 아닌 지금 일어났는가? 언론은 실업과 물가에 대한 불만을 강조해 왔다. 그러나 벤 알리의 튀니지가 높은 성장률을 보이고, 이웃 나라보다 더 많은 중산층과 높은 생활수준을 가졌다는 사실은 잊기 쉽다. 벤 알리는 과거보다는 더 많은 돈과 집과 아파트와 삶을 제공했다. 최근에야 유럽의존적인 튀니지 경제는 전 지구적인 경기후퇴를 겪었고, 이것이 대졸자들을 강타했다.”2)

“튀니지는 아랍세계에서는 가장 좋은 교육 시스템과 가장 큰 중산층 그리고 가장 강력한 노동운동을 가진 나라이다. 위키리크스는 최근 튀니지 주재 미국대사가 “튀니지에서는 경제계 상류층의 절반 이상이 벤 알리의 세 아들과 일곱 형제, 그리고 둘째부인의 열 명의 형제자매와 개인적으로 연관되어 있다”고 보고한 것을 폭로하였다. 최상류층의 부패의 규모는 숨이 막힐 지경이지만, 리비아나 그리고 보다 작은 규모이기는하지만 이집트처럼 소부족의 축적에 의존하지는 않았다.”3)

“벤 알리는 취임이후 사적 투자를 유치하는 시장지향개혁으로 마그레브(북아프리카 지역)에서 가장 건강한 경제라는 평판을 받았다. GDP 성장률은 연간 5%였고, 식민지 시절부터 튀니지 경제활동은 북부와 동부에 집중되었지만, 1956년 독립 이래 경제계획은 중부와 남부, 서부에 일자리를 창출하고 생활수준을 높이는데 맞춰졌다.

지역격차의 축소는 국민적 통합과 탈농(도시이주)의 속도를 늦출 것으로 기대되었다. 이 문제는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노조활동가와 학생들이 사회적 항의를 조직하고 이슬람주의자들이 성장하게 되는 중요한 문제였다.

정부투자는 식수, 전기, 교통, 의료, 교육에 대한 용이한 접근이라는 점에서 시골지역을 변모시켰다. 그러나 정부는 급격한 인구증가 때문에 내륙지방에서 충분한 일자리를 만드는데 결코 성공할 수 없었다. 튀니지의 개발전략은 70년대 초반부터 수출과 사적투자에 의존하고 있었고, 빈약한 자원과 유럽과의 근접성은 관광과 유럽시장을 위한 저숙련 제조업 생산(의류와 농산물 생산)에 대한 강조로 이어졌고, 운송비용을 최소화할 필요는 상대적으로 많은 관광객이나 수출업자를 내륙으로 끌어당길 수 없었다. 국내 생산의 80%가 해안지방에 집중되었고, 나머지 20%가 인구의 40%가 사는 중서부와 남서부에서 이루어졌다.

교육에 대한 문화적 배경은 대학교육을 중시했지만, 대학교육은 관광과 의류제조의 저숙련기술에 의존하는 경제에 필요한 사람들을 생산하지는 않았다.

실업률이 13-16%였지만 시디 부지드의 실업률은 25-30%였다. 튀니지 노총UGTT : Tunisian General Labour Union은 90년대에 유일한 공식노조였지만, 최근에 몇몇 노조가 보다 독립적이고 투쟁적인 입장을 획득했다. 노조활동가들은 2008년과 2010년 초반 남부의 가스파Gafsa 광산에서 장기파업을 조직했다. 이러한 활동가들과 이들의 불만은 2010년 연말에 (시작된 이번 튀니지 혁명에서-인용자) 볼 수 있었던 것과 비슷하다. UGTT 내부에서 가장 독립적이고 전투적인 교육노조는 정부의 일자리 제공 실패와 부패, 진지한 대화의 거부에 항의하는 대부분 대졸 학력을 가진 실업노동자들을 조직하는 데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인권단체와 언론인, 변호사 그리고 야당들은 시위자들의 항의와 연행과 고문을 덮어버리는 정부의 언론규제를 비판하는 데에 합류했다. 이런 방식으로 시민사회단체는 먹고사는 문제인 일자리에 대한 고통을 기본적인 인권과 법치 문제에 연관시켰다. 시디 부지드Sidi Bouzid, 멘젤 부자이엔Menzel Bouzaiene, 레구엡Regueb의 청년실업자들과 모나스티르Monastir, 스팍스Sfax, 튀니스Tunis의 언론인에서 보듯 그들은 계급과 지역을 넘어 지지자들을 끌어 당겼다. 청년실업자들이 거리로 나섰다는 사실은 그들의 대의가 시민단체에 받아들여졌다는 사실보다 덜 중요하다.”4)

이상으로 살펴본 바와 같이 벤 알리의 튀니지는 RCD의 일당 장기독재를 위해 야당과 이슬람주의자 그리고 노동운동을 가혹하게 탄압하면서 한편으로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편승하여 경제개발정책을 추진하여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으나, 그 성과가 벨 알리 일족과 특권층에게만 돌아갔을 뿐 지역 격차와 실업이 심각하였고, 2008년 세계경제위기는 튀니지 민중에게 감내할 수 없는 고통을 준 것임을 알 수 있다.

 

2-1-2. 튀니지 혁명의 발단과 전개과정

2011년 초 아랍민중혁명의 발단이 된 모하메드 부아지지Mohamed Bouazizi(26)의 분신과 항쟁의 초기 양상은 상세히 서술할 가치가 있다.5)

튀니지 중부 내륙의 도시인 시디 부지드Sidi Bouzid(시디 부지드 도의 도청 소재지)에서 6남매의 맏아들로 태어난 부아지지는 대학까지 졸업하고도 직장을 구하지 못하여 시장근처에서 가판대를 놓고 청과물을 팔아 가정을 부양하는 처지였다. 그런데 2010년 12월 17일(토) 아침 뇌물을 요구하는 시청단속반인 여성은6) 부아지지의 수레를 부수고 과일을 압수하고 뺨을 때렸다.7)

이에 부아지지는 수치와 절망을 이기지 못하고 도청 청사 앞에서8) 온몸에 석유를 붓고 분신하였다.(분신 후 즉시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2011년 1월 4일 사망하였고 1월 5일 장례식이 치뤄졌다.) 이 소식은 즉시 시디 부지드 시 전역에 알려졌고, 사람들은 도청 청사에 몰려가 항의하였다. 경찰은 시민들을 해산시킬 수 없었고, 노골적인 항의시위로 변하였다. 시민들은 ‘당국은 수치를 알라!’, ‘너희들의 뇌물이 분신시켰다.’ ‘도적놈들로부터 정의를!’ 등의 구호를 외쳤다. 이날 하루 종일 시디 부지드는 대중시위가 계속되었고, 시 입구와 시내 주요지역에서 구호를 외치는 시민에게 최루가스를 뿌리는 경찰과 폭력적인 충돌이 있었다. 분노한 청년들과 경찰 간의 충돌로 밤늦게까지 50여명의 청년들이 연행되었다. 다음날 연행사실이 보도되자 시위는 오히려 확산되었다. 연행은 고문과 감옥행을 뜻한다는 것이 상식인 나라에서 이러한 시위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시민들은 주변 도시로부터 병력을 보강한 무장경찰과 폭력적으로 충돌하였고, 부지드 인근 도시와 마을에서도 충돌이 일어났다. 지방당국은 시위대를 겁주고 테러하기 위해 국가가 뒤를 봐주는 사병(용역깡패집단)들을 동원했고, 보안기관과 정보원들은 주모자를 잡으려고 혈안이 되었지만, 시민들은 ‘모든 연행자 석방!’, ‘인민은 배고프다! 도적놈들을 감옥으로!’, ‘일자리, 자유, 민족적 자존심!’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계속하였다.

월요일은 시디 부지드 도9)의 졸업생 임용시험이 시작되는 날이었고, 시디 부지드 도의 모든 도시와 마을의 수천 명에 달하는 졸업생들이 시디 부지드 시로 모였고, 지난 이틀간에 있었던 사건을 공유하면서 시디 부지드 도 전체로 확산되는 기회가 되었다. 경찰이 시디 부지드 시와 주요 지역, 도청과 집권당의 당사에 배치되어 삼엄한 상황이었지만, 화요일엔 시디 부지드 도의 모든 지역에서 강력한 저항과 투쟁의 대중행동이 일어났다. 지역노조는 시위와 점거 항의를 조직하였고, 청년들은 최루가스와 고무탄으로 무장한 경찰과 충돌을 계속하면서 주요도로를 점거하였다. 지역언론은 침묵하였고, 사람들은 ‘프랑스24’, ‘알자지라’, ‘알아라비아’ 등의 외국매체와 페이스북과 트위터 등에서 정보를 얻었다. 수요일에 부아지지를 뒤따라 후세인 나지가 분신하였고, 시위는 계속되었다.

12월 27일 항쟁의 두 번째 주가 시작되자 시디 부지드 도내에 있는 부자이엔, 메크나시Meknassy에서 격심한 충돌이 있었고, 경찰은 야만적 폭력과 실탄 그리고 마구잡이 연행, 활동가 가택의 습격 등으로 대응하였고, 여기에 대졸 실업자인 알 암마리Mohammad Al-Ammari가 희생되었다. 알 암마리의 ‘순교’소식은 대중의 저항과 투쟁에 다시 한 번 불을 붙였다. 중무장한 사병들과 경찰은 최루가스와 고무탄, 실탄, 경찰견을 사용하면서 전 도시들을 포위하였고, 전기와 인터넷을 끊었다. 시위는 시디 부지드와 인근한 중부의 다른 도인 케프Kef, 카세린Kasserine, 카이루안Kairouan, 가스파Gafsa, 케빌리Kebili로 옮겨 붙었다.

연말이 되자 사회적인 폭발의 징후가 나타나고, 수만 명이 거리로 진출한 카세린과 탈라Thala가 투쟁의 중심지가 되었다. 시위자들은 나중에 전 아랍의 주문이 된 ‘인민은 정권의 퇴진을 요구한다The people demand the downfall of the regime’10)는 슬로건을 이때부터 외치기 시작했다. 부아지지의 장례식이 있었던 1월 5일 인구 4만 명의 탈라 시의 청년들은 중무장한 보안부대와 맞서 시 입구에 ‘탈라는 북아프리카의 스탈린그라드다’라고 적고서 영웅적인 저항을 하였고, 이때부터 일개 지역의 고립된 투쟁이 아닌 전 튀니지의 정치투쟁이 되었고, 전 세계의 언론에 ‘대중 저항popular intifada’11)으로 표현되었다.

3주째 토요일인 1월 8일이 분수령이었다. 보안부대는 최루 가스와 뜨거운 물, 고무탄, 습격과 연행에 뒤이어 실탄을 사용하였다. 이날 카세린과 탈라에서 62명의 ‘순교자’가 나왔다. 이제 대중저항은 ‘인민의 혁명’으로 전환하였다. 일요일 아침 이들 도시는 최종적으로 살인자들의 즉각처벌을 요구하는 ‘혁명가들’에게 장악되었다. 그들은 국가기구를 장악하였고, 튀니지 내륙의 많은 도시들이 국가와 보안부대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여기엔 이들 지역의 지역노조와 전국변호사연합 그리고 ‘부분파업과 점거, 항의 시위를 조직하여 저항한다’고 선언한 교사노조의 뒷받침이 있었다.12)

혁명은 이제 수도 튀니스의 대중시위로 결정적인 순간에 달했다. 전국을 휩쓴 학생들의 시위가 있었던 1월 10일 수업은 취소되었다. 당국은 ‘사전 작전’에 따라 노조활동가와 변호사들을 폭행하고 집회를 금지하고, 지지를 조직하려는 모든 사람을 겁주고 위협하면서 수십 개 도시의 인터넷과 통신을 끊었다. 튀니지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내륙지방이 당국의 장악력으로부터 해방되었고, 구호는 정치적으로 변했다. ‘RCD 타도!, 인민의 살인자와 고문자 타도! 파시스트 배반자 타도!’ 1월 10일 벤 알리는 30만개의 일자리 창출을 약속했다.

체제의 마지막 순간은 수도 튀니스의 가장 큰 구역이자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타다몬Tadamon 지구의 젊은이들과 보안부대가 충돌한 1월 11일 밤이었다. 피와 폭력으로 얼룩진 이 싸움에서 고무탄과 최루가스는 사람들을 오히려 격앙시켰고, 타다몬의 승리가 알려지자 튀니스 시내의 수많은 인근 지구에서도 봉기가 일어났다. 정부는 야간통행금지를 실시하고 군대의 동원을 요청하였다.

1월 14일 아침 튀니지 전국에서 ‘인민은 정권의 퇴진을 요구한다’는 구호를 외쳤다. 특히 어떤 형태의 시위나 항의도 금지되어 온 수도의 중심도로인 부르기바에 50만 명의 대중들이 모여 내무부 청사로 향했고, 청사 앞에 연좌하여 벤 알리와 그의 처가인 트라벨시 집안이 튀니지에서 사라질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살인책임자들의 처벌과 모든 정치범의 석방도 요구하였다. 그리고 총탄이 발사되었고 혼란이 뒤따랐다.13) 이날 밤 벤 알리가 모처로 도망갔다는 공식적인 발표가 외신을 통해 전해졌다.

 

2-1-3. 튀니지 혁명의 분석과 평가

이상으로 살펴본 바와 같이 2010년 12월 17일 토요일 아침 부아지지의 분신은 즉각적으로 시디 부지드 시 전체의 항의 시위를 낳았고, 3일 뒤인 졸업생 임용시험을 계기로 시디 부지드 도 전체로 번졌으며, 10일 뒤엔 알 암마리가 총에 맞아 희생된 것을 계기로 연말부터 중부 내륙의 다른 도로 확산되어 카세린과 탈라에서 시위대가 충돌하였고, 열흘 가까운 기간 동안 고립된 투쟁을 하다가 1월 8일 62명이 학살되면서도 탈라를 최종적으로 방어한 이후인 1월 10일에야 튀니스가 움직이기 시작된 것임을 알 수 있고, 도시빈민이 많은 타다몬에서 1월 11일 밤 격렬하게 충돌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결국 시디 부지드에서 혹은 탈라에서 목숨을 걸고 투쟁하면서 학살당하고 있을 때 튀니스를 비롯한 튀니지 민중들은 숨을 죽이고 지켜만 보았던 것이다.

 

1980년 공수단의 만행에 분노한 광주시민들이 영웅적 투쟁을 통해 광주를 해방시켰지만, 1주일간의 고립 끝에 진압당한 역사를 생각할 때, 튀니지 당국의 언론통제가 있었지만 튀니지 민중들의 항쟁은 초반부터 알자지라를 비롯한 위성방송과 인터넷을 통해 튀니지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투쟁 상황이 공유되고 있었음에도 이 좁은 나라에서 항쟁이 시작된 지 무려 25일만에야 수도에 도달했다는 것은, 한편에선 시디 부지드 시나 시디 부지드 도나 탈라에서의 영웅적 항쟁이 고립될 수도 있었고 따라서 패배로 끝날 수도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도와 떨어진 많은 내륙지방에서 경찰력을 압도하자 비로소 튀니스의 시민들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이 숨을 죽이고 있었던 것은 그만큼 권력이 잔인했고, 항쟁에 나선다는 것은 잔인한 보복과 죽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는 내면화된 두려움과 자기검열이 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튀니지 민중들이 숨을 죽이고 있었던 것은 무슨 SNS의 선동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14), 본질적으로 수십 년간 지속된 폭력과 억압으로 내면화된 두려움 속에 있었던 튀니지 민중들이 절망만을 강요하는 권력에 의해 마지막 자존심까지 짓밟히자 싸워야만 되고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자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과 진압 그리고 시위 지역의 고립화와 분리 차단을 뚫고 노도처럼 일어나 체제를 압도한 것이었다.15) 일단 봉기에 나선 이상 주변이 아무리 침묵하더라도 절망만을 강요하는 그 권력에 대하여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것과, 더 이상 참고 고개를 숙이고 살 수 없다는 자각과 분노가 저항을 폭발시키고 확산시켰다. 따라서 항쟁의 고비였던 탈라 전투와 타다몬 전투에서 민중들이 권력에 의해 강요된 고립과 잔인한 공격에 맞서 목숨을 건 항전이 최종적인 승리를 가져온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결국 이 투쟁은 장기간의 고립을 간신히 극복하고 가까스로 승리를 쟁취한 혁명이었던 것이다.

 

항쟁의 참여자들은 학생, 교사, 변호사, 언론인, 인권운동가, 노조 활동가, 야당 정치인 등 다양하였지만,16) 권력과 맞대결한 투쟁은 탈라와 타다몬이 말해주듯 주로 가난한 지역의 청년들이었고 그들의 대부분은 교육받은 젊은 실업자였다. 그러나 그들의 전투력은 경험많고 전투적인 지역노조와 결합되었을 때 발휘되었다. “맨 처음 부아지지의 가족과 친척들이 도청 앞에 모였을 때 그들과 결합한 것은 지역노조의 리더들이었고, 그들은 대부분 초등학교와 중등학교의 교사 부문 소속이었으며, 이들은 UGTT 내에서 가장 숫자도 많을 뿐 아니라 기회주의적인 중앙집행부에 대립하는 사람들이었다. 튀니지 남부의 바신 광산Mining Basin 투쟁 때 지역노조의 리더들을 희생시킨 것도 중앙의 리더들이었다. 최근 2년간 지역노조들이 보다 더 저항적이고 강성이 된 것도 중앙의 유약함 때문이었다. 시위를 조직하고, 시위대의 불분명하고 머뭇거리는 요구를 보다 분명하게 정리하고, 정치적 사회적 요구를 보다 더 깊은 정치적 맥락에 뿌리내리게 하고,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고, 더 광범위한 대중들을 촉발시킨 것도 지역노조였다.”17) 이처럼 전투적인 지역노조는 청년들과 함께 이 투쟁을 승리로 이끈 핵심세력이었다. 또한 이 투쟁에서 눈에 띄는 것은 변호사와 같은 인권활동가들이다. 그 이유는 계급운동이 철저하게 억압당하고 있기 때문에18)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인권활동가들의 역할이 컸던 것이다.

 

2-1-4. 튀니지 혁명의 전망과 과제

1월 14일 이미 70명을 학살하고 117명이 희생되었음에도 거세어지는 민중의 투쟁을 더 이상 억압할 수 없게 되자, 미국과 군부를 비롯한 지배계급은 이용가치가 없어진 벤 알리를 버렸다.19) 그리고 벤 알리의 심복이자 공군장성 출신인 모하메드 간누치를 수반으로 하는 여야통합 ‘과도정부’인 임시정부(국가통일정부)를 구성하고 6개월 내에 새로운 입법부와 대통령을 선출할 것이라고 밝혔다.

“1월 17일 모하메드 간누치 총리는 23인의 새 내각 구성안을 발표하였는데, 새로운 장관들 대부분은 은행과 사기업의 전 경영자, 임원 그리고 매니저 등 신자유주의적인 ‘골든 보이즈’들이었고, 벤 알리 시절의 구정부에 있던 6명의 장관이 포함되었다. 이에 내각에 들어간 UGTT 소속 3명의 장관은 헌법개정, 집권당(RCD) 해체 등을 요구하며 과도내각에 반발해 사퇴하였다.20)

프랑스의 르 쿼티디엥Le Quotidien 신문은 1월 25일 마’사케니스(M’sakenis)의 시민들이 일시적으로 권력을 수취했다고 보도했다! … ‘그들은 며칠 동안 국가권력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으로 생활했다. 마’사케니스의 사람들은 그들 운명을 자신의 손으로 쥐었고 심지어 자신의 시민경찰을 구성했다. 공식 경찰이 그들 자신의 건물로부터 내몰린 후 어떠한 경찰도 다시 도시로 돌아가고자 하지 않았다고 한다. … 이들 시민의 유일한 목표는 매일의 과제를 챙기고 도시의 평화와 안전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 모두는 서로를 매우 존경했고, 협동과 연대가 지배했다. 구정권의 민병대와 약탈자들을 몰아내는 데에도 성공했다.’

며칠 후 이 신문은 도시 벤자가 유례없는 파업운동으로 마비됐다고 보도했다. 노동자, 교사, 사무원, 여성, 남성, 청소년, 노인과 은퇴자들이 있었다. ‘도시 전체가 거리에 있었다.’ … 설탕공장의 5백 명의 노동자들은 회사경영자와 그의 부패한 직원을 쫒아냈고 ‘행복위원회’를 세웠다.

다음 날 탈라에서는 시장이 도시에서 도망쳤다. 자칭 청사를 대표한 나머지들은 그들의 자리를 떠났고 그들 자신의 운명을 구하기 위해 도시를 떠났다. … 지역 관리들의 도주 이후 주민들은 권력을 잡았고 탁월한 종류와 방식으로 도시의 용무에 관한 행정을 이행했다고 말해져야 한다. … 주민들은 ‘민중위원회’로 공공적이며 사적인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모였다.21)

튀니지 통신사 TAP에 따르면 2월 5일 약 1천명의 사람들이 다시 거리로 나왔으며 권력남용을 이유로 지역 경찰청장 크핼레드 카초우아니의 파면을 요구했다. 이때 시위자들에 대한 경찰 발포로 4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17명이 부상당했다. 시위의 직접적인 원인은 한 여성에 대한 지역경찰청장의 폭력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6개의 행정구역에서 총파업이 진행되었고, 주로 가난한 지역 출신의 수많은 사람들이 정부청사 앞에서 낡은 정권의 모든 잔재의 청산을 요구하면서 5일 동안 농성하였다. 2월 7일 집권여당이던 RCD의 활동 정지와 해산이 발표되었고, 2월 20일 수천 명의 시위자들이 과도정부 해산을 요구하며 시위하였다. 이들은 정부청사 방향으로 행진했고 경찰들은 시위대를 해산시키기 위해 경고사격하였다.”22)

“현 정부는 최근 정부청사 밖의 수백 명의 사람들을 폭력적으로 해산하면서 자신의 진실한 얼굴을 드러냈다. 이 사람들을 격리하고 포기하도록 하는 모든 종류의 시도 후 (지지자들이 농성장으로 음식물을 제공하지 못하게 하며) 경찰력은 봉기퇴치를 위해 단합해 공동으로 잔인하게 이 공간을 정리했고 농성하는 사람들의 야영지를 파괴했다. 이들은 거리를 가로질러 시위자들을 사냥했고 최루탄을 사용했으며 이때 적어도 15명이 부상당했다.

지난 수 주 동안 모나스티르, 가프나, 벤자 그리고 소우쎄 등 여러 지역 노동조합 건물은 매일 공격받았다. 일요일 아침에는 ‘알려지지 않은’ 한 조직이 레 케프에 있는 UGTT의 지역 사무실을 방화했다.

마찬가지로 몇몇 노동조합 활동가들과 좌파에 대한 공격도 보도됐다. 1월 26일 튀니스의 부르기바 도로에서 삐라 유통을 조직했던 ‘튀니지 애국적 민주주의 노동자당’의 한 동료는 단순하게도 경찰에 의해 체포돼 경찰서로 연행됐으며 그곳에서 두들겨 맞았다. 1월 28일 여성들의 권리를 위했던 3백 명의 시위자들은 무장한 깡패들의 곤봉으로 공격받았다.

지난 수요일 관광청 앞에는 수십 명의 시위자들이 모였고 자신들의 노동권과 노동조합적 대표를 가질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이날 이후 튀니스의 부르기바 도로에는 수백 명의 듣거나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모였고 자신들을 위한 특별 학교와 공공기관을 요구했다. 초등학교 그리고 중등학교 그리고 다른 학교들에서도 학생파업이 벌어졌고 인간적인 일자리를 위해 청년 실업자들도 시위에 나섰다.

튀니스 지역 쓰레기 운반업체에서처럼 노동자들이 전투적인 파업을 관철시킨 경우 외에 비참한 임금은 인상되지 않았다. 많은 수의 파업과 시위 후에 이들은 무기한 노동계약과 240(약 19만원)에서 420 디나로 거의 두 배에 달하는 임금 인상을 쟁취했다.

투쟁 증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간누치 정부는 이 상태를 안정시키고자 보다 작은 몇몇 일들에 양보했다. 여기에는 무엇보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봉기에 참여했던 시디 부지드, 카세린 그리고 가프사 등 ‘우선적’이던 몇몇 지방들에 할당된 위기기금 지원을 위한 5억 디나가 속한다. 이외에도 경찰에 의해 살해된 이들의 가정에 대한 재정적 보상이 이뤄질 계획이다. 손상된 기업도 마찬가지로 보상된다. 부분적인 (노예노동으로 일컬어질 수 있는 일자리에 상응하는) 공공부문 일자리에 동의한 실업상태의 대졸자는 매달 150 디나를 받게 된다.”23)

 

벤 알리 퇴진 이후의 이러한 노동자계급과 민중의 삶을 위한 투쟁은 87년 6월항쟁 때 기만적인 직선제 개헌안을 지도부가 받아들이고 많은 시민들은 집으로 돌아간 후 7월부터 9월까지 노동자 대투쟁이 일어난 것과 비슷하다. 로자 룩셈베르크의 말처럼 정치혁명은 그때까지 억눌려왔던 경제투쟁의 기름진 토양을 제공하는 것이다. 군부와 민병대와 온갖 정치적 경제적 엘리트를 포함한 구 지배계급은 벤 알리를 도피시키고 집권당의 당명을 바꾸고 몇몇 학살책임자들을 희생시키면서 그대로 온존해있다. 단지 성난 민심을 달래기 위해 몇 가지 양보를 했을 뿐 지역노조를 비롯한 노동자계급과 반정부 시위대에 대해 총질을 하는 등 단호하게 억압하고 있다. 7월 24일로 예정되었던 제헌의회 선거는 10월 23일로 연기되었다.24)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라는 미명하에 낡은 지배세력은 그대로 둔 채 노동자계급 등 기층 민중은 배제하면서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와 연합하여 형식적인 부르주아민주주의의 틀을 갖추는 것이다. 투쟁은 더 전진해야 하고 항쟁의 과정 속에서 건설되었던 대중의 자주적 투쟁조직인 지역위원회나 혁명방어위원회는 더욱 발전되어야만 하지만, 좌파의 헤게모니는 미약한 듯하다.25)


1) RCD: The Rally for Constitutional Democracy 입헌민주연합


2) Christopher Alexander, "The Rise and Fall of Ben Ali" in Revolution in the arab world-A Special Report from Foreign Policy, Foreign Policy, 2011, pp. 50-52. “튀니지는 상대적으로 높은 생활수준을 누렸고, 1인당 소득은 모로코와 이집트의 거의 두배에 달했다. 튀니지는 빈곤퇴치와 문맹퇴치, 교육, 대중통제, 여성의 지위에 있어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Eric Goldstein, "A Middle-Class Revolution" in Revolution in the arab world-A Special Report from Foreign Policy, Foreign Policy, 2011, pp. 66-67.


3) Lisa Anderson. "Demystifying the Arab Spring" in Foreign Affairs, (may / june 2011. volume 90, number 3), p. 3.


4) Christopher Alexander, "A Month Made for Drama", op. cit., pp. 46-48.


5) 여기서는 Malek Sghiri(25세 대학 3학년 재학 중인 학생활동가)의 증언을 기본으로 여러 자료를 종합하여 재구성하였다. Malek Sghiri, “Heroic Resolve in the Face of the Omnipresent Machine of Oppression: Recounting the Events of the Tunisian Revolution”, Political analysis and commentary from the Middle East, Perspectives, (#2 May 2011, Special Issue) pp. 202-207.


6) Malek Sghiri는 city police라 하고 policewoman이라고 표현한 사람도 있으나, 여러 증언을 종합하면 시청단속반인 여성이 맞다. wikipedia에도 a municipal official and her aides라는 표현이 있다.


7) 극단적인 남성우월 사회인 이슬람 사회에서 남성이 여성으로부터 뺨을 맞는다는 것은 죽음으로도 이기지 못할 수치스러운 일이다.


8) Sghiri은 도청 안이라고 하나, 부아지지의 어머니의 인터뷰 등을 볼 때 도청 앞이 맞다. “부아지지는 6남매의 장남이고 결코 자기 운명을 불평하지 않았어요. 부아지지의 아버지는 리비아에서 힘든 일을 하다가 부아지지가 3살 때 심장병으로 돌아가셨어요. 12살 때부터 파트타임 일을 했고, 낮에는 학교에 다니고 밤에는 거리에서 과일을 팔았지요. 17살 때엔 동생들이 고등학교에 다니고 여동생이 대학에 다닐 수 있도록 학업을 중단하고 돈을 벌었지요. 시청 단속반인 여성이 5 디나르(약 3달라)의 뇌물을 요구하면서 과일을 압수했어요. 부아지지가 빼앗긴 걸 되돌려 받으려고 하자 그녀가 뺨을 때렸지요. 그 때 옆에 있었던 부아지지의 친구가 전해줬는데, 부아지지는 절망을 느끼고 울면서 ‘제가 도적이 되어야 합니까? 제가 죽어야 합니까?’라고 외쳤데요.” 그리고 부아지지는 빈 수레를 이끌고 도청 앞으로 가서 1.5리터의 석유를 몸에 부었다. 그가 성냥을 그어 불을 붙인 것은 그 자신 만이 아니라 아랍의 모든 청년들의 좌절에 불을 붙인 것이었다.”-Ellen Knickmeyer, "The Arab World’s Youth Army" in Revolution in the arab world-A Special Report from Foreign Policy, Foreign Policy, 2011, pp. 125-126.


9) 면적 6,994 km², 인구 396,000명(2004년)


10) 이 구호가 아랍어로 어떤 뉘앙스를 갖는가에 대하여 확신할 수 없지만, ‘정권 타도’라기 보다는 ‘정권 퇴진’인 듯하다.


11) 인티파다는 원래 봉기, 반란, 각성을 뜻하는 아랍어인데, 2000년과 2003년 팔레스타인 민중들의 이스라엘 점령을 반대하는 비무장 시민운동을 의미했다.


12) 항쟁의 초기에 부아지지의 가족과 인권단체와 지역노조가 정부의 회유와 압력에 단호한 입장을 견지한 것이 투쟁에 큰 도움을 주었다. 부아지지의 병세는 튀니지 민중의 초미의 관심사였고, 벤 알리도 문병하면서 지역의 우발적 사건으로 만들려고 하였다. 장례식 후 시위가 확산되자 정부가 공세에 나선 것이 탈라 학살이다.


13) “저는 금요일(1월 14일) 낮 12시 반에 튀니지에 도착했습니다. 저는 도착하자마자 바로 부르커바 거리의 시위에 참가했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누군가 6만 5천 명이 참가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날 시위는 이전 시위에서 경찰의 공격으로 머리에 총을 맞아 뇌수가 터지고 두개골이 박살난 사람의 모습을 담은 충격적인 사진과 동영상이 인터넷에 유포된 직후에 벌어진 것이었습니다. 이 충격적 사실을 접하고 사람들은 거리로 나왔습니다. 우리는 내무부 청사 앞으로 갔습니다. 시위대는 매우 평화로웠습니다. 주된 구호는 ‘떠나라, 떠나라’였고 ‘벤 알리에게 과녁을 안겨 줘라’ 하고 외치기도 했습니다. 4시가 되자 경찰이 갑자기 공격했습니다. 그때 전날 살해된 시위 참가자의 장례식 행렬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경찰은 그것을 빌미로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을 공격했습니다. 그들은 최루가스를 뿌렸고 저는 총성을 들었습니다. “이건 최루탄이 아니라 실탄이다” 하고 사람들은 소리쳤습니다. … 정권 핵심 인사들이 소유한 집들은 모두 불탔습니다. 거의 모든 쇼핑센터와 경찰서도 불탔습니다. 튀니지의 다른 곳들처럼 우리는 지역위원회를 만들어 대통령 보안군의 잔당인 무장 민병대 공격에 대비했습니다. 민병대는 도시를 활보하면서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구를 이용해 차단막을 만들어 도로를 봉쇄했습니다. 또, 인근 지역을 정찰하고 통행금지 시간 이후 이동하는 모든 차량을 의심했습니다.”-모하메드가 <소셜리스트 워커>에 말한 경험담, <레프트21> http://www.left21.com/article/9130에서 재인용


14) “그리고 거기에 소셜 미디어가 있었다. 활동가들은 체제가 통제할 수 없는 사이버 공간에서 페이스북을 이용하여 조직했다. 얼마 전만 하더라도 탈라나 카세린과 같은 벽지에서의 시위자나 장례행렬에 대한 발포는 누군가가 숙덕거리는 지역적인 사안이었겠지만, 페이스북은 탈라의 사건을 튀니스로 날랐고 정부가 깰 수 없는 연대를 만드는데 일조했다.” Christopher Alexander, "The Rise and Fall of Ben Ali", op. cit., p. 52.


15) 이번 아랍항쟁에서 ‘고개를 들어라’가 가장 사랑받는 슬로건이 된 것은 내면화된 굴종을 벗어버리는 것이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고개를 들어라 오 튀니지인이여’, ‘고개를 들어라 오 이집트인이여’, ‘고개를 들어라 오 예멘인이여’-Mohammed Ali Atassi, "What the people want…" in Political analysis and commentary from the Middle East, Perspectives, (#2 May 2011, Special Issue), p. 32.


16) Christopher Alexander, "A Month Made for Drama", op. cit., p. 45.


17) Mehdi Mabrouk, "The Youth Revolution : A First Reading of the Social and Cultural Conditions Surrounding the Tunisian Revolution" in Political analysis and commentary from the Middle East Perspectives, (#2 May 2011, Special Issue), p. 144.


18) “사람들은 튀니지를 ‘단식투쟁의 수도the capital of hunger strike’라고 불렀다. 정치범과 활동가, 정당원들의 단식투쟁의 물결이 있었고, 가장 유명한 것은 2005년 튀니지에서 ‘열린 정보사회를 위한 세계 정상 회의WSIS : World Summit on the Information Society’ 때 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좌파당과 나흐다 운동Al-Nahda movement에 호의적인 이슬람주의자와 샬라비Ahmad Najib al-Shalabi, 한지Lutfi Hajji, 타리피Mukhtar al-Tarifi, 후마니Ayyash al-Humami, 누리Mohammad al-Nouri 등 독자파간에 ‘10월 18일 연합October 18th Coalition’이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었다.”-Mehdi Mabrouk, op. cit., p. 140. 이처럼 대중투쟁이 아닌 단식투쟁이나 점거투쟁이 투쟁의 주된 형태가 되는 것도 권력의 철저한 폭압 때문이다.


19)프랑스의 르 쿼티디엥Le Quotidien은 벤 알리의 도주 전에 “워싱턴에 사회적 봉기가 실제 혁명으로, 다른 말로 하면, 이 체제에 진정한 위험으로 변하기 전에 소모된 독재자를 포기하고 그의 후계자를 조직해야 하는 순간이 왔다고 보고됐다”고 1월 25일 보도했다.-정은희, “기로에 선 튀니지 혁명” <참세상>, 2011.2.5.에서 재인용


20) 노조 상층부가 간누치와 타협하려하자, 기층에서 강하게 반발하여 과도내각에 들어간 노조대표들이 사퇴한 것이다.


21) 벤자의 설탕공장의 행복위원회는 평의회에 가깝고, 탈라의 민중위원회는 코뮌에 가깝다. 이러한 대중의 자주적 저항조직과 자치조직은 러시아 혁명 때 병사 소비에트나 노동자 소비에트에서 보는 것처럼 대중의 봉기가 절정에 달하거나 공권력을 몰아낸 뒤에 조성되는 (준)이중권력 상황 속에서 전형적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권력의 공백기에 출현하는 대중의 자치조직은 궁극적으로 권력을 타도하지 않는 한 소멸될 수밖에 없다.


22) <사회주의적 대안>의 튀니지 통신원, 앞의 글에서 재인용


23) <사회주의적 대안>의 튀니지 통신원, 앞의 글에서 재인용


24) 이 선거에서 세속적 이슬람주의 정당인 엔 나흐다 당이 40%의 득표를 얻어 제1당이 되었다.


25) 어느 정도의 세력인지는 모르지만 이런 자료도 있다. “‘1월 14일 전선January 14 Front’은 혁명적인 세력과 급진적 세력이 모인 것이다. 하지만 그 강령은 정부 형태 문제에 있어서 아주 분명한 것은 아니다. 혁명적 세력은 미약하지만 노동자 민중정부를 향한 사회적 세력을 결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회혁명 단계 이전에 민주적 단계를 실현시켜야 할 필요성 때문에 전선 내에서 슬로건이었던 것은 아니다. 전선은 실질적인 힘은 가지고 있지 않은 민족주의자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 상태는 혁명방어위원회를 대치한 ‘혁명의 방어와 민주적 이행을 위한 법정’ 때문에 그리고 제헌의회를 준비하기 위한 동맹 때문에 전선은 깨져버렸다. ‘노동자 좌파연합 Workers’ Left League’은 혁명과정에서 어디서나 볼 수 있었다. 카스바Casbah 지역의 동원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고, 노동조합 수준에서는 아주 괜찮다. 좌파연합은 헌법에 대한 환상을 깨기 위해 제헌의회 선거에 참가하기로 결정했다.”-Ahlem Belhadj, “What type of revolution?” in IV Online magazine : IV440, (September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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