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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리 이글턴, [신을 옹호하다] (모멘토) 中에서...

 

기독교 신학에서 하느님은 초월적인 제작자가 아니다. 하느님은 사랑으로 만물을 지탱해 주는 존재이며, 세계에 처음이 없었더라도 이런 역할을 했을 존재다. 창조란 그저 사물이 시작되도록 하는 일이 아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지 않고 뭔가가 존재하는 이유 자체이며, 모든 실체의 가능성의 조건이다. 하지만 하느님 자신은 어떤 종류의 실체도 아니므로, 세상에 존재하는 실체들에 견주어 설명될 수 없다. 나의 질투심과 내 왼발이 하나의 짝을 이룰 수 없는 것과 같은 논리다. 하느님과 우주를 합한다고 둘이 되지는 않는다. 유대교에서는 하느님을 형상화하는 일을 금지한다. 하느님이 비실체일 뿐 아니라 하느님의 유일한 형상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조직화된 종교를 무산시키기 위해 하느님이 끊임없이 애썼음을 기록한 문헌이 있다. 바로 성경이다. 창조자 하느님은 연구지원금을 주는 기관을 깊이 감명시키기 위해 지극히 합리적인 설계에 따라 일하는 하늘의 공학자가 아니다. 어떤 의도가 담긴 기능적 목적에서가 아니라 창조하는 일 자체를 좋아하고 즐거워하기 때문에 세상을 만들어낸 예술가이자 탐미주의자다. (19쪽)

 

 

우리가 하느님의 피조물이라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하느님과 마찬가지로 순전히 존재 자체의 즐거움을 위해 존재하기(또는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급진적 낭만주의자들이--이 맥락에선 칼 마르크스까지 포함하여--제기하는 의문은 그 같은 존재방식을 현실화하려면 어떤 정치적 변혁이 필요하냐는 것이다. (22쪽)

 

 

여하튼 예수가 가르치는 도덕은 무모하고 비현실적이며 장래에 대비하지 않는, 상식을 벗어난 것이다. 따라서 보험설계사의 적이며 부동산 중개사의 장애물이다. 예수는 우리에게 원수를 용서하라, 겉옷만이 아니라 속옷까지 벗어 주라 하고, 왼뺨을 맞으면 오른뺨까지 내주어라, 너를 욕하는 사람을 사랑하라, 네 몫 이상으로 노력하고 내일 일을 미리 염려하지 말라고 가르치지 않는가.(26쪽)

 

 

니체가 빈정대며 지적했듯이, 초월적인 신(神) 즉 하느님을 전능한 인류로 대체한다 해도 어떤 의미에선 달라지는 게 거의 없다. 여전히 세상에는 고정된 형이상학적 중심이 존재하며, 그 중심이 이제는 신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라는 점만이 다르다. 우리는 스스로 부과한 제약 외에는 어떤 구속도 받지 않는 주권자이기 때문에, 새로이 찾아낸 신적 권리를 행사하는 가운데 황홀할 정도로 창조적인 희열을 주는 파괴에 탐닉하기도 한다. 니체의 관점에서 볼 때, 절대적인 힘이 신에게서 인간에게 그대로 옮겨지지 않으면 신의 죽음은 필연적으로 인간의 죽음을 불러온다. 다시 말해 주인처럼 뻐기면서 우쭐대던 유형의 인본주의까지 종언을 고하리라는 것이다. 아니면 인본주의는 은밀한 신학으로 남고 신은 교외 거주자들의 점잖은 도덕으로 형태만을 바꾸어 새로운 세월을 조용히 보내게 될 것이다. 요즘의 하느님이 바로 그런 모습이다. 인간의 무한성이 결국하느님의 영원성을 지탱해주는 셈이다. 파우스트 식으로 인간은 무한한 듯해 보이는 자신의 힘과 사랑에 빠진 것이다. 성육신(成肉神, Incarnation)의 교리에서는 육신을 지닌 연약하고 유한한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난다는 점을 망각한 채 말이다. 이처럼 자신의 무한함에 어리석게 도취한 인간은 너무나 빨리 앞으로 나아가다 도가 지나쳐 중심을 잃고 결국 무(無)로 떨어지는 위험에 끝없이 빠져든다. ‘인류의 타락’ 신화와 다를 바 없다.

이런 병폐를 치유하는 전통적인 방법이 있기는 하다. 이른바 비극(悲劇)예술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항암화학요법이 그렇듯이 비극이라는 치료법도 질병 자체만큼이나 파괴적일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비극 무대에서 벌어지는 무제한적 투쟁을 지켜보면서 인과응보에 대한 두려움으로 하늘을 우러르며 떨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창조된 것들이 감히 창조하려 들어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 이는 예술가에 대한 질책이 아니라 요즘 같으면 자기창출(self-origination)에 대한 부르주아의 위대한 신화 부를 만한 것을 경계하는 전형이다. 보다 근원적인 의존 관계의 맥락 속에서만 우리의 자유가 크고 든든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데서 숱한 역사적 재앙이 시작됐다. 이 같은 태도는 오늘날 서구의 신제국주의를 이끄는 원동력 중 하나이기도 하다.(28-30쪽)

 

 

가장 급진적인 형태의 자기부정은 금연이나 금주 따위가 아니라 자신의 몸을 포기하는 일, 전통적으로 '순교'라고 알려진 행위다. 순교자는 자기가 지닌 가장 소중한 것을 버리지만, 가능하다면 그러지 않아도 되기를 바란다. 반면에 자살자는 견디기 힘든 부담이 돼버린 삶을 기꺼이 내던진다. 예수가 만약 죽기를 바랐다면 그는 무수한 자살자 중 하나가 되고, 그의 죽음은 자살폭탄테러범의 흐트러진 종말만큼이나 덧없고 무가치했을 것이다. 자살자와 달리 순교자는 타인들을 위해 죽음을 택하는 사람이다. 그들에겐 죽는 것까지도 사랑의 행위다. 그 죽음은 다른 사람들의 삶에서 열매를 맺는다. 이는 타인을 살리기 위해 죽음을 택하는 사람, 예컨대 나치 독일의 가스실 앞에 남을 대신해 줄을 선 사람뿐 아니라 타인에게 생명이나 살아갈 힘을 줄 수 있는 원칙을 지키려고 죽음을 택한 사람에게도 해당되는말이다. '순교자(martyr)'라는 단어는 '증인'을 뜻하는 말에서 나왔다. 그들이 증언하는 것은 삶을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원칙이다. 이런 점에서 순교자의 죽음은 생명의 하찮음이 아니라 생명의 가치를 입증한다. 이슬람의 자살폭탄테러범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할 수 없다. (42쪽)

 

 

모든 증거가 불리해 보임에도 불구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끝내 이기리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패배자를 경멸하는 나라들에서는 말도 안 된다고 여기겠지만, 실패에 대한 충실성이라 부를 만한 믿음의 태도를 견지할 때만 인간의 힘은 창조적이고 지속적이 될 수 있다. 이처럼 믿기 어려울 정도로 냉정한 현실주의를 유지하면서, 인간을 십자가에 못 박는 극악하고 충격적이며 지긋지긋한 실재, 그 메두사의 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할 때에만 어떤 형태로든 부활이 가능해지지 않겠는가. 냉정한 현실주의를 최후의 보루로 받아들이고 다른 모든 것은 감상주의에 사로잡힌 허튼소리거나 이데올로기적 환상, 가짜 유토피아, 거짓된 위안, 혹은 지나치게 낙관적인 이상주의일 뿐임을 알아볼 때, 그제서야 최후의 보루가 결국은 최후의 것이 아니었음이 밝혀질 수 있다.

신약성경은 인간의 환상을 잔혹할 정도로 깨뜨린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 죽음을 맞지 않는다면 뭐가 잘못돼서 그런 건지 변명의 해야 할 정도다. 인간 조건의 적나라한 시니피앙은 사랑과 정의를 강력하게 옹호하다가 그 때문에 죽음을 당한 사람이다. 엉망으로 훼손된 시신이 인류 역사의 충격적 진실이다. (43-4쪽)

 

 

지금까지 보았듯이 나 같은 사람과 디치킨스는 신학적 관점뿐 아니라 정치적 관점도 판이하다. 리처드 도킨스와 내가 가장 근본적으로 차이를 보이는 부분은 사실 하느님이다 과학, 미신, 진화, 그리고 우주의 기원 등에 대한 생각이 아닌 듯하다. 신학자들은 적어도 직업적으로는, 헨리 제임스처럼 절묘하게 복잡한 작가가 과연 진화라는 조잡하고 실수 많은 과정을 통해 탄생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조금의 관심도 없다. 내가 알기로 과학과 신학 간에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이 세상을 선물로 보느냐 아니냐 하는 데에 있다. 이는 세상을 엄밀하게 조사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도자기 꽃병을 아무리 자세히 뜯어보아도 그게 결혼 선물임을 알아낼 수는 없지 않은가. 디치킨스와 나 같은 급진주의자 간의 차이 역시 인간 조건의 궁극적인 시니피앙이 고문 받고 살해당한 정치범의 몸뚱이라는 말을 받아들이는지, 그것이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의미는 무엇이라고 보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54-5쪽)

 

 

무자비하게 실리만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에 내몰린 이른바 영적인 가치가 피난처로 삼은 곳의 하나가 뉴에이지(New Age)다. 하지만 뉴에이지는 영적인 것의 서툰 모방에 불과한데, 물질주의에 매몰된 문명에서 그 이상을 기대할 수는 없을 터이다. 마음이 냉혹한 사람들이 감상적인 노래를 들으며 훌쩍이곤 하듯이, 진정한 영적 가치가 품안에 굴러들어도 알아보지 못할 사람들이 유독 영성(靈性)을 뭔가 으스스하고 영묘하여 심원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을 띤다.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며, 마르크스가 종교를 “무정한 세계의 감정이고, 영혼 없는 상황의 영혼이다.”라고 했을 때, 염두에 두었던 게 바로 이런 상황이다. 마르크스의 말을 다시 풀이하면, 유머 감각 없는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종류의 우스개가 난처할 정도로 노골적인 유머이듯이, 무정한 세계에서 감정 혹은 정(情)의 원천으로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전통적인 종교뿐이라는 얘기다. 마르크스가 공격한 종교는 실리만을 추구하는 물질주의자들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종교, 즉 영적인 것을 현실에서 분리하여 감상적으로만 이해하는 유형의 종교였다. (59쪽)

 

 

 

이슬람 급진주의와 기독교 근본주의는 이와 사뭇 다르다. 낭만주의나 뉴에이지와 달리, 그것들은 불만을 품은 소수의 교리를 넘어선 대중운동이다. 여기서 종교는 인민의아편이라기보다 인민의 크랙 코카인이다. 근본주의는 단순히 세상으로부터 도피처를 찾지 않고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나선다. 근본주의는 근대성(modernity)이 내거는 가치들을 거부하지만, 근대의 과학기술과 조직 방식들은 그것이 화학적이건 미디어 기술이건 필요한 대로 기꺼이 받아들인다. 영국에서 이라크 침략을 지지한 좌파 인사들 혹은 이전에 좌파였던 사람들은 그 문제에 관한 성명에서 “우리는 근대성에 대한 두려움을 거부한다.”라고 했는데, 이들의 말은 두 가지 점에서 잘못됐다. 하나는 이슬람이 근대성을 덮어놓고 거부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근대성에는 거부할 만한 게 많다는 점이다. 화학전을 불안하게 생각한다고 해서 복고적인 반동세력이 되는 건 아니다. 화학전이 두렵지 않다면 도대체 뭐를 두려워해야 한단 말인가. (61-2쪽)

 

 

아퀴나스가 『이단논박대전』에서 말하듯이, 각 피조물의 궁극적인 완성은 행함에 있다. 아퀴나스의 생각에 존재란 실체라기보다 행위다. 그에겐 하느님조차 명사보다 동사에 가깝다. 우리의 몸 자체가 주체와 객체라는 이원성을 해체한다. 나는 안에서 눈구멍을 통해 밖의 세상을 냉정하게 응시하는 존재가 아니라. 이 세상에 참여하는 행위자로서 항상 세상 한가운데에 놓여 있다. 따라서 아퀴나스도 비트겐슈타인처럼 ‘외부 세계(the external world)’라는 일상적인 표현에 대해 곤혹스러워했을 법하다. 저 등나무가 내 옆에 있지 않고 내 ‘밖에’ 있다는 게 무슨 뜻일까? 저 나무가 내 ‘밖에’ 있다고 본다면, 실재의 나는 마치 크레인을 운전하는 사람처럼 나의 몸 안에 웅크리고 있어야 할 터이다. 그럼 그 실재의 나는 또 누가 움직이는 걸까? (109쪽)

 

 

행위에서의 주체성과 사물에 대한 지배력, 그리고 자율성 등은 바람직한 미덕이지만, 위협적이리만큼 이질적으로 느껴지게 된 세계를 정복하고 지배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주권은 고독과 불가분한 것임이 드러난다. 계몽정신으로 무장한 인간은 확신의 정점에 이르렀을 때 자신이 이 우주에 홀로 서 있으며 그의 진가를 증명해 줄 것도 자기 자신뿐이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그는 세계를 지배한다면서도 거기에 개재된 자의성과 불확실성을 진저리 칠 정도로 의식하게 되며, 이런 상황은 근대가 진행됨에 따라 더욱 심각해진다. 자신이 한 손으로 방금 세상에 끼워 넣은 가치를 다른 손으로 끄집어내어 이것 보라며 제시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인간 주체가 딛고 선 토대가 자기 자신뿐이라는 점은 또 어떻게 봐야 하는가? (112-3쪽)

 

 

얄궂게도 진보라는 개념에는 종교적인 여운이 있다. 찰스 테일러는 『세속의 시대』에서 진보의 개념을 ‘신의 섭리의 대체물’이라고 했다. 하지만 기독교 종말론은 무한한 발전이라는 생각과 거리가 멀다. 하느님의 나라는 역사라는 상승하는 곡조의 절정에서 힘차게 울려퍼지는 소리처럼 도래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장엄한 역사적 진화의 완성이 아니라, 인간이 정의를 위해 투쟁하는 가운데 보편적 평화와 정의가 살아 숨 쉬는 하느님의 통치 시대를 예시한 모든 역사적 발화점들의 마무리다. 이처럼 기독교 신학은 진보라는 오만한 관념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역사를 바꾸어 갈 수 있다고 믿는다. 발터 벤야민도 인식했듯이, 하느님의 통치란 다른 무엇이 아니라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한 산발적이고 자주 불운했던 투쟁들, 영원의 관점이라 할 것에 따라 ‘지금시간’이라는 하나의 순간에 모여 일관된 이야기로 구현됨으로써 구원에 이르는 투쟁들을 이른다. 근대적인 사고에서는 이른바 거대담론을 믿는 반면 포스트모던한 사고에서는 이를 믿지 않는데, 그와는 별도로 유대인과 기독교인에게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거대담론이 하나 있으며 그것은 미래뿐 아니라 과거에까지도 소급해 작용하리라고 본다. 벤야민이 말했듯이 “구원된 인류에게 비로소 그들의 과거가 완전히 주어지게 되기” 때문이다.(124-6쪽)

 

 

철저하게 합리적인 미래라는 꿈은 얼만큼이나 천국의 대체물 역할을 하는 걸까? 절대화된 ‘진보’는 자유주의적 합리주의자들 나름의 ‘내세(來世)’인가? 자유주의적 합리주의는 정말 종교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났을까?(128쪽)

 

 

상상해보건대, 하느님이 갑자기 소설가 토머스 하디의 외양간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더라도 하디는 그다지 감격하지 않았을 듯하다. 충실한 진화론자인 하디는 하느님을 순수하게 인간적인 모든 관점들이 수렴되는 가공의 지점으로 보았으며, 그 자리에 어떤 초월적 존재가 있을 가능성을 원칙적으로 인정한다 해도 본디 불완전하고 관점에 얽매인 인간의 삶에 그런 존재가 실질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디의 생각에는 하느님이 정말 존재하더라도 우리에게 특별히 흥미로운 말을 해줄 게 없다. 그는 어느 시에서 하느님이 실제로 세상을 창조하긴 했지만 세상에 관심을 끊은 지 이미 오래라고 했다. 비트겐슈타인의 어구를 약간 바꾸어 말한다면, 하느님이 말을 할 수 있다 해도 우리는 그의 말에 신경 쓰지 않을 터이다.(150-1쪽)

 

 

바디우에 따르면 믿음의 행위에 관련된 지리는명제적 진리와 전혀 무관하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명제적 진리로 환원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바디우에게 믿음이란 그가 ‘사건(event)'이라고 부르는 것 -- 역사의 평탄한 흐름에서 훌쩍 벗어나 발생했기에 기존의 맥락에서는 이름 붙일 수도 없고 의미를 파악할 수도 없는 지극히 독창적인 일 -- 에 대한 끈질긴 충실성에 있다. 진리는 세상의 결을 거슬러 옛 체제와 단절하고 완전히 새로운 현실의 토대를 놓는 것이다. (...) 예를 들어, 사람들을 움직여 인종차별이 없는 사회의 가능성을 믿게 만드는 것은 일련의 명제들이 아니라 일련의 헌신이다. 그들이 피부색 때문에 일자리를 얻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음이 움직여 행동에 나서려면 그에 앞서 이미 정의라는 개념과 정의의 실현 가능성에 어느 정도 헌신하고 있어야 한다. 사실에 대한 인식만으로는 정의 실현을 위한 행동을 유발하기에 충분치 않다. (155-8쪽)

 

 

근본주의는 천박한 기술적 합리성 -- 중요한 영적 문제들을 냉소적으로 일체 외면함으로써 편협한 사람들의 그것을 독점하도록 허용하는 합리성 --의 압박에 내몰려 광신에 까지 이른 사람들의 믿음이라 할 수 있다. (193쪽)

 

 

문명이 실용주의와 물질주의에 젖어갈수록 그것이 감당 못하는 정서적이고 심리적인 욕구들을 채울 임무가 문화에 더 많이 주어지고, 문명과 문화 간의 반목은 한층 깊어진다. 보편적인 가치를 특정한 시대, 특정한 공간에서 구현해야 할 문화가 결국은 보편적 가치를 공격하게 된다. 요컨대 문화는 억압된 것의 격렬한 회구라 할 수 있다. 문화는 문명보다 국지적이고 직접적, 자연발생적이며 합리성과 무관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둘 중에서 더 미학적인 개념이다. 자기네 고유의 문화를 기리고 지키려는 유형의 민족주의는 언제나 가장 시적(詩的)인 종류의 정치로, 전에 누군가 말했듯이 ‘문학인들의 발명품’이다. 하기는 아일랜드의 위대한 민족주의자이며 시인이었던 파드릭 피어스를 위생위원회에 배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201-2쪽)

 

 

 

죽음보다 강한 것은 이성이 아니라 사랑이며, 오직 사랑에서만 문명의 아름다움이 샘솟을 수 있다고. 이성은 너무 추상적이고 비인격적인 힘이어서 죽음을 이겨낼 수 없다. 하지만 그 사랑이 진정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피의 제물을 항상 묵묵히 인정하는” 사랑이어야 한다. 우리는 아름다움과 이상주의, 그리고 진보를 향한 열망을 높이 평가해야하지만, 그 뿌리에는 많은 피와 비참함이 있었다는 사실 또한 마르크스나 니체 식으로 시인해야 한다. 한데 얼핏 보기에 ‘진보’의 사도들은 이런 지혜에 이르지 못한 듯하다.(210-1쪽)

 

 

비극적 인본주의도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와 마찬가지로 인류의 자유로운 번영을 염원하되, 그 같은 이상은 우리가 최악의 것들을 직시할 때에만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에 대한 긍정이 궁극적으로 가치 있으려면, 왕정복고 이후 미몽에서 깨어난 밀턴처럼 인간이 애당초 구원할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조너선 스위프트의 소설에서 거인국의 왕이 무슨 생각으로 인간을 구역질나는 해충이라고 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그런 긍정이어야 한다. 비극적 인본주의는 사회주의적인 것이든 기독교나 정신분석학의 관점에 선 것이든 간에, 인간은 자기 비우기와 근본적인 개조를 통해서만 바로 설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변화된 사회가 미래에 반드시 태어나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교조적 자유주의자, ‘진보’의 광신자들, 이슬람 공포증에 사로잡힌 지식인들이 변화의 길을 끈질기게 방해하지 않는다면 그런 미래가 조금은 떠 빨리 찾아올지 모른다. (2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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