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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7/30
    [옛날 글] 한형식의 북한 3대세습 문제에 대한 언급에 관해. (2010.10)(6)
    구르는돌

[옛날 글] 한형식의 북한 3대세습 문제에 대한 언급에 관해. (2010.10)

요것은 2010년 10월 경 북한 3대세습 문제를 비판하지 않는 민주노동당에 대해 강하게 비판한 경향신문의 논조에 대해 한형식씨의 논평을 보면서 들었던 생각을 정리한 것. 예전 글들 정리하다가 발견한 것이어서 블로그에 저장용으로 옮겨 옴.

 

아래는 (한형식씨의 글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고) 유창선씨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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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북한을 비판하고 있는데 당신들은 왜 그러지 않나. 당신들 이상한 것 아닌가.”

 

<조선일보>가 한 말이 아니다. 진보언론을 표방하는 <경향신문>이 민주노동당을 향해 던진 질문이다. 이윽고 민주노동당에게는 북한의 3대 권력세습을 옹호했다는 돌팔매질이 이어진다.

 

이 글은 ‘진보언론’이 만들어낸 이 해괴한 상황에 대한 관찰보고서이다. 먼저 불필요한 오해를 막기 위해 몇가지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가자.

 

첫째, 민주노동당은 북한의 권력세습을 옹호한 바 없다. 입장을 대외적으로 밝히지 않았을 뿐이다. <경향신문>이 문제삼고 있는 지난 달 29일 대변인 성명에서 북한의 후계구도와 관련된 부분은 “북한 후계구도와 관련하여 우리 국민들의 눈높이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다 하더라도 북한의 문제는 북한이 결정할 문제라고 보는 것이 남북관계를 위해서도 바람직하다 할 것이다” 가 전부였다. 이에 대해 이정희 대표는 “말하지 않는 것이 나와 민주노동당의 판단이며 선택”이라고 부연했다. 민주노동당이 북한의 권력세습을 옹호했다는 일부의 해석은 마타도어이다.

둘째, 민주노동당 울산시당이 <경향신문> 절독을 선언한 것은 <경향>이 북을 비판해서가 아니라, 권력세습을 비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민주노동당을 비판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경향>은 이와 관련된 기사의 제목을 “민노당 일각 ‘북 3대세습 비판’ 경향신문 절독 선언”이라고 달아버렸다. 엄청난 오해를 낳을 사실왜곡의 제목이었다. 역시 <조선일보>가 진보진영을 공격할 때 흔히 쓰던 방식이었다.

셋째. 필자에 관한 얘기이다. 나는 북한의 3대 세습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의 이런 개인적 입장표명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다. 우리가 아무리 비판의 목소리를 낸다 해도 북한의 후계구도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할 뿐 아니라, 북한은 내부결속을 위해 다시 대화의 창을 닫아버릴 것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지금 나는 이런 입장표명을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민주노동당을 옹호하려는 당신도 종북주의‘ 아니냐는 비판을 <경향>으로부터 받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현실에 대해 참담함과 자괴감을 감출 수가 없다. 명색이 한 지식인이 ’진보언론‘으로부터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사상적 커밍아웃을 해야 하는 현실. 차라리 상대가 <조선일보>였을 때가 마음이 편했다.

 

나는 이번 <경향>의 민주노동당에 대한 비판을 ‘진보판 색깔론’이라고 규정한다. 민주노동당이 북한의 3대 세습을 옹호했던 것도 아니고, 단지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는 이유로 ‘종북주의 ’취급을 당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

물론 정당은 주요 사안들에 대해 자신의 의견과 입장을 밝힐 책임을 갖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전략적 고려 하에 자신의 입장을 밝히지 않을 권리도 갖고 있다. 더구나 그 전략적 고려가 당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남북관계의 앞날에 대한 진지한 고민 속에서 나온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고 존중해줄 필요가 있다.

그러나 <경향>은 그런 민주노동당을 강압하고 나섰다. 표현만 달랐지, 다들 북한의 3대 세습을 비판하고 있는데 당신들은 왜 안그러느냐, 당신들은 권력세습을 지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그런 식의 얘기였다. 결국 민주노동당은 수많은 독자들과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상적 돌팔매질을 당해야 했다. 주체만 <조선일보>가 <경향신문>으로 바뀐 것이었을 뿐, 행태의 속성은 크게 다를 바가 없어보였다.

북한의 3대 세습에 대해서는 반대입장을 표명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옹호한다고 생각하는 이분법적 사고가 빚은 일종의 폭력이었다. 북한의 권력세습에 대한 거국적 비판이 그렇게까지 급선무였다면 차라리 청와대 대변인의 비판성명을 요구하는 것이 빠른 길 아니었을까.

결국 <경향>의 민주노동당 비판은 진보정당의 분열을 낳았던 소모적인 종북주의 논쟁을 재연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인터넷과 트위터 상에서는 이를 둘러싼 뜨거운 논쟁이 재연되었고, 논쟁의 구도는 진보정당이 분열될 때의 종북주의 논쟁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이제는 당시의 소모적인 논쟁을 접고 2012년 정권교체를 위해 진보정당도 다시 통합의 길을 찾자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는 이 시기에, 그래서 두 진보정당이 통합해도 시원치않을 판에 <경향>은 왜 이런 문제를 들쑤셔놓았을까. 나는, 당사자들에게는 무례한 표현이 될지 모르지만, <경향>의 생각이 짧음을 탓하지 않을 수 없다. <경향>은 진보정당의 앞길에 대해, 그리고 남북관계의 앞길에 대해 하나는 생각했지만, 둘은 생각하지 못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경향>에게는 북한의 권력세습을 당장 비판해야 한다는 급한 마음만 있었지, 남북관계의 앞날을 헤아리는 심모원려(深謀遠慮)의 모습은 없었던 것이다. 정말로 서울광장에서 ‘북한의 3대 세습 규탄 궐기대회’라도 열리고 거기에 진보정당들까지 손잡고 나서는 광경이 보고 싶었던 것일까.

이번에 있었던 <경향>의 민주노동당 비판은 진보 안에서의 색깔 덧씌우기였다는 점에서 더욱 수치스러운 장면이었다. 북한의 권력세습에 대해 민주노동당이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에 대해 아무런 관심조차 없던 사람들도, <경향>의 일련의 보도 이후 민주노동당이 그에 동조했다는 오해를 갖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민주노동당은 적지않은 상처를 입게 된 것으로 보인다.

나는 이제라도 <경향신문>이 사실왜곡의 기사제목을 단데 대해서는 사과하고, 자신의 입장을 강압한데 대해서는 (사과는 안하더라도) 스스로 성찰하는 과정을 갖기를 주문한다. 명색이 진보 내부에서 색깔 덧씌우기가 활보하는 것을 두고 보는 일은 너무도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후기> 오해를 피하기 위해 한 가지만 더 밝혀두자. 나는 민주노동당 지지자가 아니다. 나는 민주노동당의 노선과는 거리가 있는 그냥 중도개혁론자 정도이다. 다만 우리 사회가 다원적 가치과 사고, 그리고 판단을 보장해야 한다는 믿음에서 이 글을 쓴 것이다. 구차하게 이런 사족을 달아햐 하는 것이 참 싫다. 그래서 색깔 덧씌우기는 막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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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한 나의 의견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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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주의 역사 강의>를 재밌게 읽은 독자입니다. 책을 읽고 유익한 점을 많이 느꼈던 독자로서 드리는 의견이라 생각하고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맑스주의 역사 강의>가 세간에 주목을 받은 주요 요인은 스탈린주의에 대한 '내재적 접근법' 때문인 듯 한데(언론에 소개된 서평들에서 대부분 이 점을 장점이라고 지적하더군요), 저도 일견 필요한 접근법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현실에 존재하는 '사회주의 국가권력' 북한에 대한 '정치적 판단' 지점에 까지 끌어오는 저자분의 입장은 참 거시기 하네요... ㅠ.ㅠ

 

지난번 레디앙에 실린 민경우씨의 서평을 보고 저는 그의 입장이 책의 내용을 악용한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의 입장이 저자분의 입장과 부합한다는 사실을 이 홈페이지를 보고 알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무리 그런 '내재적 접근법'을 용인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현실에 존재하는 국가권력에 대한 정치적 판단이 필요한 시점에서는 그런 접근을 보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압박, 지정학적 요인 등 현실의 북한을 제약하는 여러 요소가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옳은 정치적 선택을 했어야 할 책임이 북한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런 책임을 북한에게 요구하는 것도 과도한 것일까요?

 

민노당은 자신들의 '침묵'의 이유로 정보의 제약으로 인해 3대세습을 있는 그대로 판단할 수 없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3대세습의 정치적 올바름은 언제쯤에서야 판단내릴 수 있을까요? 북한이 망하고 나서? 사회주의 조국방위, 또는 약소국의 현실적 지위 등을 핑계로 이런 문제들을 덮어두기만 한다면 진보세력에게 한반도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사고를 할 가능성을 봉쇄하고 오로지 '미국 책임'만을 부르짖는 지적 무능력의 알리바이만을 제공할 뿐입니다.

 

어제 책을 다시 보니 저자께서는 서구 맑스주의자들이 소련에 대한 반감을 모티브로 갖는 것은 냉전의식의 유산이라고 하신 부분이 눈에 띄던데, 최근의 북한논쟁을 접하고 나서 이 부분을 보니 참 머리가 띵해 오더군요. 저자의 우려가 뭔지는 알겠으나 좀 심하게 오버하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오히려 맑스주의 역사 속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사회주의 본국' 소련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과 교조화 아닌가요? 그 교조화를 벗어나기 위한 노력의 과정에서 감정적인 반감도 섞여 있을 수 있으나, 이걸 무턱대고 유럽중심주의나 오리엔탈리즘이라고 규정짓는 것은 과도한 일반화이며, 좌파 이론의 쇄신에 별 도움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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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의견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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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민경우씨의 서평과 이에 대한 저자의 코멘트를 보고 제가 얼마전에 메모식으로 적었던 글이 있어서 올려볼까 합니다. 이것 또한 독자 한사람의 의견 정도로 생각하고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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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라면 자신이 이 사회에서 누리는 갖가지 특권들 중에 과연 얼마나 포기할 용기가 있는지를 먼저 물어봐야 할 것입니다." ==> 이런 발언에 대해 '그렇다면 당신은 어떤 특권을 포기하고 사십니까'라는, 동일한 방식의 도덕주의적 질문을 돌려주는 것은 일단 제껴두자. 그것보다는 오히려 가라타니 고진이 <윤리21>의 "비전향 공산당원의 '정치적 책임'"이라는 글에서 주장한 바를 환기시키면서 이 문제를 생각해 볼까 한다.

 

전후 일본에서 공산당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도덕적 우위를 점하는 집단이었다. 그 이유는 공산당원들 중 상당수가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 비전향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비전향=선, 전향=악이라는 도식이 생겼다. 하지만 고진은 당시 문학계 논쟁을 인용하며 이런 도식 자체를 부정한다. 공산당의 비전향이라는 것은 사실 전향의 한 형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공산당의 비전향이라는 것은 "현실적 동향 및 대중적 동향과 접촉 없이 이데올로기의 논리적 사이클을 바꾼 것에 지나지 않은"것이기 때문이다. 요시모토 다카아키에 따르면 자신을 포함해 "당시 대학생 대부분은 대동아공영권을 믿은 파시스트"였는데, 사실상 공산당의 현실인식은 이런 보편화된 인식을 깰 수 있는 수준이 못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우리는 몰랐다, 속았다 등으로 변명할 수 있겠지만, 요시모토 다카아키는 '무지에도 책임이 있다'는 태도를 취했다. 감옥가서 겪는 고통을 감수하는 등의 '도덕적 책임'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자신을 포함한 세계를 철저하게 인식하는 책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민주화된 한국에서 현실 운동에 크게 개입하지는 않되 관념적으로는 과격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몽상적인 교수들을 감옥에 보낼 이유는 별로 없다. 이것이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절 사회주의를 외치는 교수들은 버젓이 교직을 유지하면서도 범민련이나 한총련 등 자주파와 ‘다함께’가 감옥을 메웠던 이유이다."(민경우씨의 서평 中)

 

민경우씨가 이런 발언을 하기 전에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것이 있다. 많은 대학생들이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와 함께 변혁의 가능성에 대해 회의하기 시작하고, 이들을 지지하던 대중들도 점차 등을 돌리던 시기에, 민경우씨를 포함한 자주파들은 얼마나 자신의 '인식하는 책임'을 다했는가? 여전히 북의 변혁가능성에만 기대어 남한의 사정을 판단하는 비주체적 몰인식을 보여오지 않았나? 그래서 나는 공안기관의 가혹성과는 별개로, 그들의 몰인식이 탄압을 자초한 면이 아주아주 많다고 생각한다. 냉전이 사라진 90년대 이후에도 여전히 남한 국가기구는 대중을 이데올로기적으로 통제할 수단이 필요한 상황에서, 민중운동의 중심축들이 개구리 뒷다리 긁는 소리나 하고 있었으니 국가는 이들을 대중 앞에서 신나게 난타질했고 그게 또 대중에게 먹혔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오로지 자신의 사상적 순결성만을 강조하던 자주파를 상종못할 괴물로 보는 것은 그리 정당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전혀 이해못할 것도 없는 것이다.

 

좌파들이 강단에서 확보한 시민권에 만족해 안위를 누리는 동안 범민련 한총련등이 감옥을 채웠다는 말도 내가 보기엔 도덕적 자뻑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 강단 맑스주의자들이 누군지 나는 잘 모르겠지만 있다 하더라도 소수에 불과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주파들이 전혀 관심갖지 않는 현장에서 싸우다 고통을 받은 좌파들이 숱하게 깔렸다. 하다못해 작년 용산참사투쟁으로 옥고를 치른 박래군, 이종회는 자주파인가 다함께인가? 요즘 기륭, 재능 등 장투사업장 투쟁에 연대했다는 이유로 세번째 소환장을 받았다는 송경동 시인은?

 

민경우씨는 아무래도 (<맑스주의 역사 강의>에 실린 스탈린주의의 진실에 대한 역사적 해명을 빌어) 민족해방노선에 대한 악마화에 대한 반론을 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그것이 되려 자기 무의식중에 잠재하던 자주파 스스로에 대한 도덕적 신비화로 빠져든 것 같다. 내가 안타까운 것은 그나마 재밌게 읽었던 <맑스주의 역사 강의>의 저자 한형식도 이에 대해 전혀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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