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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실상부한 합리적 세계, 또는 낙원의 회복은 가능한가?
우리가 그 결과가 불확실한 길고 어려운 이행과정을 겪는 중이라면, 우리 앞에는 두 개의 커다란 질문이 놓여 있다. 우리는 실제로 어떤 종류의 세계를 원하는가? 그리고 어떤 수단 혹은 경로를 통할 때 거기 도달할 가능성이 가장 클까? 나는 이에 대해 유토피스틱스 즉 역사적 대안에 대해 진지하게 평가하는 동시에 가능한 대안적인 역사적 체제들의 실질적 합리성에 대한 우리의 판단을 수행한다는 관점에서, 그리고 확실성의 종언(다시 말해 진보의 필연성이 아닌 가능성)의 관점에서 문제를 던지고자 한다.
1. 근대 세계체제 내의 역사적 사회주의
역사적 사회주의에 적용되는 주된 죄목은 다음 세 가지이다. ①국가 및 당 권력의 자의적 사용 또는 공포정치 ②노멘클라투라(Nomenklatura)에 베풀어진 온갖 특권 ③국가의 개입으로부터 기인하는 광범위한 경제적 비효율성. 그러나 이러한 특성은 이들 당의 휘하에 있지 않았던 체제의 경우에도 피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렇다면 실제로 자신의 원만한 작동을 위하여 이러한 종류의 정권을 필요로 했던 것은 바로 전체로서의 체제 그 자체 아닐까?
물론 혹자는 모든 국가체제가 이와 같지는 않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 나라들도 세계체제의 매우 좁은 한 구석(일부 부유한 지역)에서만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여기에는 매우 커다란 중간계층이 거주하고 있으며, 전지구의 파이 가운데 자신들의 몫에 대해 이들 집단이 상대적인 만족감을 느끼고, 이들을 보호해주는 ‘법치’가 제도화된 점을 꼽을 수 있다.
사회주의 국가들은 한번도 자율적인 전체였던 적이 없으며, 언제나 국가간체제의 작용에 의해 제한을 받아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틀 안에서 움직였을 분만 아니라 대안적 역사체제의 활동을 뜻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2. 민주적이고 평등주의적인 체제를 위하여
모든 사람에게 삶의 질을 극대화시켜주는 데 우선권을 주면서, 동시에 집단적인 폭력수단들을 제한하고 통제하여, 모든 사람이 대체로 그리고 평등하게 신변의 안전을 느끼고 타인들의 생존이나 평등권을 위협함이 없이 가장 폭넓은 범위의 개인적인 선택권을 누릴 수 있는 구조를 고안해내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이는 기만적이게도 민주적 체제라 불려온 수정되고 변형되고 은폐된 전제정치 대신에, 자유주의의 이상을 평등주의적 체제 혹은 이론 그대로의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세계적으로 실현하는 것이라 할 수도 있겠다.
이것만으로 민주적이고 평등주의적 체제라는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할 것이다. (어쩌구 저쩌구~~~)
3. 끊임없는 자본축적의 우선성의 극복을 위한 제언
일반적으로 금전적 보상은 질 높은 노동을 위한 유인책이라고 주장된다. 그러나 질 높은 공예품에 대해 장인에게 보상을 주는 것과 회사를 위해 특단의 이익을 올린 데 대해 경영자에게 보상을 주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일을 더 잘하게 되는 일차적 자극이, 상대적으로 조금 더 늘어나는 물질적 보상보다는 오히려 명예와 자신의 노동시간에 대한 통제력의 증대 등의 결합에서 오는 대학교수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전문직의 뚜렷한 예가 있다.
효율성은 바람직한 현상이지만, 이는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다. 자본의 축적을 증가시키는 데 따르는 보상은 주어지지 않고 다만 실질적인 필요를 충족시키고 분배를 확대하는 데 대해서만 보상을 받는 경우라고 해서, 그 주체가 덜 효율적으로 일할 것이라는 예상은 전적으로 타당한가? 결코 그렇지 않다. 오늘날 대기업가들이 소도시의 건축가나 정비공장 기술자보다 더 효율적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큰 조직은 작은 조직보다 효율적인가? 비영리기관들이 영리기관에 비해 항상 능률면에서 떨어지는가? 이와 같은 문제에서도 확실한 증거는 없다. 따라서 대안적 체제의 가능한 기초로서 내가 제안하는 첫 번째 구조적 요소는 체제 내 생산의 기초양식으로서 탈집중화된 비영리 단위들을 설립하는 일이다. 이것은 우리가 가가진 독점적으로 통제되는 세계시장이 아니라 진정한 시장, 즉 번잡한 도로의 신호등과 흡사한 종류의 규제를 갖춘 시장을 통해서 가능할 것이다.
4. 인종․성․민족의 평등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능력주의(meritocracy)는 민주화의 압력을 대변하는 것도 사실이고, 동시에 현체제에서는 손에 쥔 팻장이 (인종․성․민족이라는 기준에 의해) 부당하게 조작되었다는 말도 맞다. 이에 우리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개인간의 능력차를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공평한 사회적 ‘자리’의 배분에 대한 방식을 생각해 볼 수 있다.1)
우리는 계급없는 사회를 맞이하게 될까? 양극화의 종식이 모든 사회적 편차를 종식시키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의문스럽지만, 인간적 필요에 관한 부분을 모두 비영리기구가 제공하고 그 비용을 집단적으로 부담하도록 하여 상품화의 외부에 놓는 것이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노멘클라투라의 형성을 막을 수 있을까? 교육과 의료 및 평생에 걸친 최소한의 임금에 대한 접근이 오로지 공직을 통해서만 보장받는 상황이 아니라면, 그리고 이윤추구적 경제구조를 위한 판로가 없다면, 노멘클라투라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여기에는 물론 보수세력을 견제할 수 있는 민주적 정치기구가 필요할 것이다.
생태계 보존에 있어서도 우리는 모든 생산조직으로 하여금 그들의 생산활동이 생태계 자원을 유지시키는데 필요한 비용을 내부화하도록 요구해야만 한다. 특정한 생산적 활동이 생태계에 미치는 결과에 대해서 서로 다른 견해들이 존재할 것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정치적 선택으로 귀결될 것이다. 근원적인 쟁점은 사회적 비용의 측정 평가를 둘러싼 것이며, 문제는 어떻게 그러한 결정이 진정으로 집단적인 것이 되도록 하느냐 하는 점이다. 우리가 결정의 장을 보통사람들의 참여와 통제로부터 분리시키지 않으면서도 세계적인 수준에서 이를 가장 잘 제도화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 점에서 한 가지 우리 편인 것은 인간의 창조성이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필연적인 지노라는 개념을 슬쩍 끌어넣고 싶지는 않은데, 왜냐하면 창조성이라는 것이 반드시 그리고 항상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떻게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갈 수 있을지에 대한 정치적 문제에 이르게 된다.
5. 디 람뻬두자 원칙 -- 변화를 통한 불변의 유지전략
이는 죽느냐 사느냐의 차원에서 진행되는 투쟁일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다음 500년간의 역사적 체제의 기초를 놓는 일에 대하여 논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로 살펴야 할 점은 현재 특권을 가진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반응할 것이며 실제로 헌재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이다. 그들은 현재 구조적인 어려움에 처해 있다. 특권층에게 가장 어려운 문제는 체제의 위기를 의식했을 때 일어난다. 즉 그들이 위기의식을 실제로 느끼고, 그들의 활동과정에 이러한 예상을 완전히 통합시킬 때 말이다. 그 시점에서 그들이 아무것도 변화히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변화시키고자 (아니면 그렇게 하려는 듯이 보이고자) ‘디 람뻬두자 원칙’2)(di Lampedusa principle)을 도입하려 할 가능성이 쾌 크다. 첫 번째 문제는 변화를 고안하는 일이다. 두 번째는 자기 진영의 대부분을 속이는 일이요, 세 번째는 적들을 속이는 일이다.
반평등주의적 결과를, 그것도 많은 경우 바로 같은 계층에게, 적어도 처음 몇 백년 동안 보장해준 결정적 성과를 빼놓으면 거의 모든 면에서 봉건체제와는 다른 것이 자본주의체제인 것이다. 앞으로 특권층은 현재 불만을 가진 자들의 어법을 많이 끌어들여 자본주의로의 이행과정에서 했던 것과 같은 행위를 할 것이다. 그것은 환경이라든가 다문화주의 혹은 여성의 권리라는 명목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운동 자체가 흡수를 거부하는 경우에도 수사법은 흡수 가능하다. 그런데 여기서 세 가지 문제가 나타난다.3) 첫째는 세계적인 차원의 집단 전체에는 이득이 되는 일이 특권층 내의 하위집단들에게는 전혀 좋은 일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손해를 보는 하위집단들은 물론 동조하려 하지 않을 것이고, 그리하여 그 조치의 정치적 생존가능성을 뒤흔들어놓을 것이다. 둘째는 특권층 가운데 일부가 생각해 낸 ‘디 람뻬두자’ 전략이 있다고 할 때, 특권층의 다른 일부는 현재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해 이를 정치적으로 지지하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전략의 옹호자들은 모든 것을 낱낱이 까발려버릴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디 람뻬두자 저략의 목적 자체를 짓밟는 것이 된다. 이는 세 번째 문제로 직결된다. ‘디 람뻬두자’ 전략의 핵심 요소는 실제 전략에 대해서는 결코 너무 공개적으로 선포하지 않으면서 표면적 전략만을 고수하는 것이다. 즉 자신들 쪽에 인력을 동원하기에는 충분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대편에게 맹렬한 반대의 증거나 동기를 제공하지는 않을 만큼의 설명만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 반대편에서, 억압받는 사람들의 행동은 어떠할 것인가? 그들의 내부는 특권층보다 이질적이며 무정형적이기 때문에 더욱 예측하기 힘들다. 나는 이들이 택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어떤 강령이 아니라 단지 강령에 대한 토론이 포함해야 할 몇가지 요소들, 즉 실질적으로 더욱 합리적인 역사적 체제를 어떻게 제도화할 것인가, 그리고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서 어떻게 이행의 시기를 헤쳐나갈 것인가 하는 점들을 제시했다.
6. 새로운 질서의 성격은 우리의 선택과 행동에 달렸다.
체제의 마지막 시기 즉 이행기는 예측 불가능하지만 또한 특히나 개인과 집단의 참여에 좌우되는데, 이를 나는 자유의지 요소의 증대라 부른 바 있다. 우리는 당면한 구조적 위기의 성격과 나아가 21세기를 위한 우리의 역사적 선택을 이해할 수 있도록, 지식의 틀을 재구축해야 한다. 일단 우리가 선택의 여지들에 대해 이해하고 난 후, 우리는 승리하리라는 아무런 보장 없이도 투쟁에 참가할 태세가 되어야 한다. 이는 긴요하다. 왜냐하면 환상은 오직 환멸을 낳을 뿐이며, 그에 따라 탈정치화를 낳기 때문이다.
현존 세계를 지배하는 자본의 끊임없는 축적과정에 구조적인 한계가 존재하며, 이러한 한계들이 체제의 작동을 막는 제동장치로서 현재 전면에 부각되고 있다. 내가 작동 메커니즘의 점근선이라 부른 이러한 구조적 한계들은 겪어내기에 불쾌하며 그 궤적을 결코 예측할 수 없는 구조적인 혼돈의 상황을 창출하고 있다. 이러한 혼돈으로부터 약 50년간에 걸쳐 새로운 질서가 떠오를 것이며, 이 새로운 질서는 그 사이 모두가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형성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 결과가 더 나아질지 더 나빠질지를 예측하지도 않으며 또 할 수도 없다는 의미에서 나의 분석은 낙관적인 것도 비관적인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는 실제로 우리 모두에게 훨씬 더 이로운 종류의 구조와, 그러한 방향으로 우리를 움직여줄 종류의 전략에 대한 논의를 고무하려 노력한다는 점에서 현실적이다. 그러므로 동아프리카에서 쓰는 말대로 하람비(harambee)!4)
1) ex) 100명에게 시험을 치게 해서 50명에게 자리를 나눠준다고 했을 때, 상위 10명에게는 일단 자리를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하위 10명은 고려 대상에서 제외시킬 수 있다. 그러면 가운데 80명은? 사실 이 80명이 그야말로 ‘중간’의 실력을 갖췄다고 할 수 있다. 그 내부에서도 차이가 있겠지만, 이들은 대개 100명 중에 평균적 능력을 갖춘 이들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면 나머지 40개의 자리는 80명의 추첨을 통해서 배정하는 것은 어떨까? 물론 하나의 가정일 뿐이다. (월러스틴)
2) 『살쾡이』(1958)의 작가인 이탈리아의 소설가 주제뻬 디 람뻬두자에서 따온 것으로, 19세기 중엽 씨칠리아를 배경으로 한 이 소설에서 한 귀족이 다른 귀적에게 “만사를 전과 같이 유지하려면 모든 것을 바꾸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한다.
3) 책에는 두 가지라 말하지만, 첫 번째 문제가 두 개로 나뉘기 때문에 실제로는 세 가지.
4) 1950~60년대 케냐 민족운동의 구호로서, “힘을 모아 해보자”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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