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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국내 학자, 평론가들이 각자의 입장을 담아 비평한 책.
그 중 서동진과 노정태의 글을 요약해서 옮겨 봄.
이 윤리적인 사회를 보라
신자유주의적 윤리로서의 정의
서동진
1) 신자유주의의 윤리적 글로벌 스탠더드, 정의
줄리언 어산지의 위키리크스에 대해 평가하며 미국의 보수적 경제잡지 『포브스』는 이른바 “비자발적 투명성”의 시대를 열었다고 평가. 이는 매우 신자유주의적 윤리에 입각한 표현인데, 투명성이란 신자유주의 사회의 부정적 효과를 제어하고 반성하며, 나아가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를 보호하기 위해 고안된 많은 윤리적 덕목에 속함.
이데올로기는 자신이 관련을 맺는 대상을 비호하거나 예찬하지 않음. 오히려 이데올로기는 자신을 유지하기 위한 힘 가운데 하나로서 비판을 동반함. 무엇보다 자유주의는 비판을 애호함. 자유주의는 합리적인 논증을 하는 자신들과 달리, 이를 부정하는 보수주의와 사회주의는 가장 이데올로기적인 이데올로기라며 규탄함. 그러나 이러한 이데올로기가 아닌 척 하는 몸짓이야말로 가장 순수한 이데올로기적 자취.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점은 자유주의가 자본주의를 비판되어야 하는 체제로 반성하면서도 동시에 절대로 근본적으로는 부정하지 못하게끔 하는 비판의 윤리를 어떻게 생산하고 동원해 왔는지를 분별하는 것.
2) 정의의 심판을 내리자구요? 네, 그럼 당장 감사를 합시다! 정의 사회, 감사 사회
자유주의자들은 “사회개선의 과정이란 현존하는 문제에 대해 전문가가 합리적으로 평가하고, 그 평가에 따라서 현명한 사회개혁을 도입하기 위해 정치 지도자가 계속 의시적인 노력을 쏟는 꾸준한 과정이나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보는 이들.
정의의 윤리는 변화된 자본주의 사회를 관리하기 위한 새로운 지도적인 프로그램, 즉 신자유주의를 보완하는 비판정신의 기획. 신자유주의적 전환을 통해 만들어진 변화된 자본주의 역시 자신을 위한 비판의 공간을 열어 놓음. 이에 가장 대표적인 윤리적 규범은 ‘감사’(audit).
감사사회란 책무성이라는 윤리적 규범을 통해 개인이나 기업, 공공부문 혹은 사회운동단체에 이르는 다양한 행위자들의 행동방식 혹은 행태를 관찰, 측정, 평가하고 그 결과에 기반하여 그들을 규제하고 관리하는 것.
신자유주의가 ‘탈규제’를 부르짖는 것은 오히려 규제로부터의 해방을 향한 것이 아니라 사회를 규제하기 위한 새로운 방식을 만들어내는 것. 즉 ‘감사’라는 신자유주의적인 윤리적 규제는, 착취나 불평등 같은 윤리적 규범과는 다른 방식에서 윤리적으로 따져봐야 할 현실을 만들어 냄.
‘책무성’이라는 표현은 노르만왕조의 최초의 토지대장이라 할 수 있는 둠즈데이북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이는 영토 내에 살고 있는 토지 소유자들에 대한 인구조사를 통해 마들어진 것으로, 토지 소유자들을 하나의 총계 즉 계정으로 파악해 재산을 등록시킴으로써 세금을 거두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음. 계정으로 파악된 신민은 집중화된 감사와 반년간의 장부 기재를 통해 왕정에 대한 윤리적인 의무를 다하도록 강제 됨. 즉 회계 활동을 통해 특정한 도덕 공동체가 성립되는 것.
1970년대 후반부터 본격화된 자본 축적의 위기를 경유하며 이런 회계적 실천의 비중이 증대됨. 관치금융을 통해 자본을 조달하던 국내 대자본이 점차 자본시장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자본시장을 지배하는 금융자본이나 주주의 이해관계를 보장해 주는 조치를 받아들임. 기존의 관치금융 등은 ‘정실자본주의’로 비난받음.
공공부문 또한 발생주의적 복식부기 회계를 통한 기장을 도입하고 이른바 ‘기업가적 예산’이라는 새로운 예산제도를 도입. ‘총액예산제도’가은 것은 예산을 사업 집행에 필요한 비용이 아니라 적극적인 관리를 통해 재무성과를 이뤄내야 하는 것으로 다룸. 공무원을 경영자와 동일시하고 공무원들의 비재무적인 자산, 즉 지식과 창의성을 활용하기 위해 정부조직을 학습조직으로 전환하는 것 등이 본격화 됨.
비정부기구(NGO) 또한 책무성의 윤리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 시민사회단체들이 지켜야 할 시민사회단체로서의 규범적인 정체성을 ‘시민사회지표’로 구체화하고, 이를 크게 정당성, 책무성, 투명성으로 구분. 한국의 대표적인 시민사회운동이 ‘정보공개’나 ‘소액주주운동’으로 나타났다는 것은 특이한 현상은 아님.
3) 정의의 윤리인가, 해방의 윤리인가
자크 동즐로에 따르면 주권이 막다른 길에 이르렀을 때 발명한 것이 바로 ‘사회’(the social)임. 이는 출생, 나이, 성별, 직업, 지역사회 같은 다양한 틀을 통해 자신의 삶을 규제하는 법칙을 발견하고 반성하는 개인이 상상하는 사회로서 루소적인 의미의 정치공동체와는 다름. 이에 기반해 사회국가 혹은 복지국가는 공리주의적 개인주의란 이름으로 기존의 자유주의를 비판하며 새로운 윤리적인 모델을 만들어냄. 그것이 바로 ‘연대’로서, 정의의 윤리는 집합적인 책임을 나눠 가짐으로써 이를 통해 탐욕스러운 이기적 개인들이 초래할 수 있는 불의로부터 자본주의를 방어하고자 함.
어떻게 정의의 윤리를 넘어설 수 있을까? 그것은 정의의 윤리가 기반하고 있는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길 뿐. 그러나 그것을 가능케 하는 일은 윤리 자체와 대면하는 것을 통해서는 성취될 수 없음. 윤리는 바로 그 자본주의 자체를 변혁하기 위한 투쟁의 부산물일 뿐.
정의의 딜레마, 딜레마의 정의
노정태
1) 누구를 죽이는 것이 더 공정한가?
우리는 윤리적인 삶을 사는 것을 즐기지 않지만, 윤리적인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 토론하는 것은 좋아한다. 『정의란 무엇인가』가 수십만 부 이상 팔린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된 것에는 다른 점 보다도 사람들이 ‘윤리적 딜레마’ 자체를 즐긴다는 것에 그 이유가 있다.
샌델이 책에서 제시한 첫 번째 윤리적 딜레마(전차 딜레마)에서 공리주의자라면 당연히 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편을 택한다. 칸트적 자유주의자라면 선로를 바꾸거나 뚱뚱한 사람을 밀어버리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여기서 샌델은 갑자기 이 추상적인 비유를 현실(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 은신처를 찾아다니는 미군 사례) 속으로 과감하게 옮겨 놓음. 이 예에서 민간인을 풀어준 것이 미군에게 피해를 주어, 이에 대해 후회한다.
샌델이 말하는 내용, 공동체주의 자체가 아니라, 그가 그 말을 하기 위해 꺼내드는 사례가 이 책을 진정 문제적인 것으로 만든다. 철로에서 누구를 희생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 혹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민간인을 죽여야 하는 가에 관한 문제를 윤리적 토론을 위한 화두로 꺼내드는 것 자체가 하나의 윤리적 판단이다. 칸트가 예리하게 지적했듯이 우리는 이미 그 순간 ‘누구를 죽이는 것이 더 공정한가’를 놓고 고민하며, 그 과정을 즐기고 있음.
2) 권력의 눈높이에 맞춰진 정의의 딜레마
샌델의 딜레마를 대하며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는, 딜레마에 직접적으로 대답하기 보다는 딜레마가 전제하고 있는 상황의 맥락을 가늠해 보는 것. 이를테면 플라톤의 『국가』에서 플라톤의 대변자로 등장하는 소크라테스가 제시하고 있는 ‘정신이 오락가락하여 난폭한 행위를 일삼는 친구에게 그가 내게 맡겨놓은 무기를 돌려 줄 것인가’라는 문제를 대할 때에는 고대 그리스 사회가 현대 사회와는 다르게 전쟁이 나면 자신이 소유한 무기를 들고 폴리스를 위해 전쟁에 나서는 ‘시민’들로 구성된 사회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즉 이들은 다름아닌 ‘시민’의 눈높이에서 딜레마를 사고하는 것이다.
그러나 샌델의 눈높이는 결코 시민에게 맞춰져 있지 않다. 그는 미군의 시각으로, 자신과 비교했을 대 철저히 약자일 수밖에 없는 민간인들의 생사여탈권을 거머쥔 채 그들을 죽일지 살릴지를 고민한다. 더욱 섬뜩한 것은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는 독자들이 그 딜레마를 고민하며 즐기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민간인을 향해 히죽거리며 발포하는 민군 혹은 역사상 존재한 모든 점령군들의 공범이 된다.
3) 우리 공동체와 다른 공동체 사이의 정의
점령군의 딜레마에서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어떤 선택이 더 ‘전략적으로’ 타당한가에 있을 뿐이다. 윤리적 책임과 도의적 갈등은 부차적으로 따라오는 판단의 요인으로 전락.
당신이 이라크에서 태어난 한 청년이라고 가정해 보자. 나 한사람의 목숨과 더불어 미국인 수십 명을 죽임으로써 ‘우리 편’에게 더 큰 이익을 가져올 수 있다면 과연 어떤 선택을 해야 올바른 것일까? 샌델이 제시하는 논리로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위해 스스로를 포함하여 몇 사람쯤 희생시키겠다는 자살테러범을 설득할 수가 없다.
칸트는 『영구평화론』에서 국경과 문화를 넘어서 통용될 수 있는 도덕적 판단의 기준을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인 철학자의 말에 정치가들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함. 『정의란 무엇인가』에는 이런 초월적 관점을 통한 보편성 추구가 결여되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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