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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2/22
    근현대사 교과서 논쟁, 기대 이하다...
    구르는돌

근현대사 교과서 논쟁, 기대 이하다...

요즘 나는 넘쳐나는 시간을 이용해 그 동안 못했던 공부들을 차근차근 하고 있는 중이다. 그 중 요즘 가장 관심을 많이 두고 있는 분야가 바로 '한국 근현대사'다. 역사공부가 모든 운동에 있어서 기본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있고, 게다가 나는 대학을 다니면서 변변한 역사 세미나 한번 한 적이 없어서 더욱 역사 지식에 배가 고팠던 터였다.

 

그런데 요즘 서울시 교육청의 고3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현대사 특강, 교과부의 현대사 교과서 수정 지시 등을 보면서 내 공부에 가속도가 붙었다. 하긴 지금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 '공부' 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러다가 얼마 전, MBC 100분토론에서 했던 근현대사 교과서 수정 논란에 대한 토론을 인터넷 재방송을 통해 보게 되었다. 그런데... 100분토론을 통해 통쾌함과 환희를 느껴 본 적은 지난 광우병 논란 때 송기호 변호사, 우석균 정책실장 등의 달변을 통해서 받았던 것 외에는 한 번도 없었지만, 근현대사 교과서 관련 토론은 정말 기대 이하였다. 물론 미천한 지식이기는 하나 내가 최근에 공부한 현대사 지식으로 평가하자면, '기대 이하'라기 보다는 '수준 이하'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토론자로 나온 사람은 총 4명이었지만, 내 눈에는 거의 2명의 토론만 들어왔다. 한나라당의 신지호와 금성출판사 근현대사 교과서 책임지필자라는 교원대 교수.

 

당연히 내가 '기대 이하'라고 지목한 사람은 후자다. 물론 신지호야 골수 운동권 출신으로서 후일에 뉴라이트로 전향하고 삼성경제연구소에서도 이력이 있는, 좌우파의 논리를 다 꿰고 있는 자타가 공인하는 한나라당의 브레인에다 달변가이니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문제삼는 것은 신지호에게 밀린 '말빨'이 아니다. 토론의 구도 설정 자체가 틀려먹었다.

 

교수님은 줄곧 교과서 수정 지시의 비민주성, 절차 무시, 독단성만을 물고 늘어졌다. 이에 대해 신지호 (그리고 함께 나온 교과부 담당자)는 절차상 아무런 문제가 없을 뿐만 아니라, 참여정부 때에도 비슷한 수정 지시가  있었는데 그 때에는 왜 문제제기를 안하다가 이제와서 난리냐고 맞받아 쳤다.

 

아, 이 따구로 토론하는데 누가 관심을 가져주겠나? 교과서 수정 지시가 언제 부터 시작되었고, 공문을 몇차례를 보냈으며, 언론에서 처음으로 문제제기가 된 적은 언제이며, 이에 대한 각계의 반응은 어땠으며... 이런건 당사자 아니면 아무도 모르는 문제 아닌가? 또한 아무도 알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정부는 나름 정해진 절차에 따라서 수정 지시를 내렸을 것이다. 설령 그 과정에서 규정을 벗어난 행위를 했다고 한들, 뭐 문제 되겠는가? 2MB정권이 하는일이 다 그런데... 사실 이제 절차상의 비민주성에 대한 문제제기는 지난 광우병 사태 이후 정권 차원에서도 이골이 난 일이라 아주 내성이 생긴 것 같다. 그래서 이런 식의 문제제기는 백이면 백 헛수고로 돌아가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런데 여기서 신지호가 아주 민감한 문제를 본격적으로 치고 나오기 시작한다. "금성출판사 교과서는 헌법정신과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있다." 허나... 그런데...

 

내가 재미없어서 중간도 채 보지 않고 꺼버려서 못봤는지는 몰라도, 이 교수님... 이 문제에 대해서는 자신있는 답변 한마디를 못하신다. 계속 반복하는 것이, 이명박 정권의 비민주성, 정권의 입맛에 맞는 교과서 왜곡... 역사교과서 논쟁에서도 반MB전선을 만들고 싶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혹시 이 교수님은 정말로 대한민국의 헌법정신과 정통성을 부정하시는 것일까? 그럴리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이 양반을 좋게 봐서 좌파라고 한다해도 학교에서 쓰는 교과서 만드는 일에 사회주의자 또는 아나키스트를 고용하진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이 교수님이 노무현 정권과 궤를 같이한 사람이라면 기껏해야 자유주의자 아니겠는가? 사상이 다른 사람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만약 내가 그 자리에 앉았었더라면 아래와 같이 말했을 것 같다.

 

 

뉴라이트는 그 긍정의 대상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뉴라이트의 도식에 따르면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긍정은 이승만에서 박정희로 이어지는 대한민국 전 정권들에 대한 긍정으로 나타나야만 한다. 어쩌면 이것이 더 핵심적이다. 아무리 추상적인 수준에서 “나는 자유민주주의자요”라고 해도 뉴라이트에게는 그것만으로는 성에 안 찬다. 반드시 ‘국부’ 이승만, ‘중흥조’ 박정희에 대한 입장이 따라붙어야 한다. 그들을 존숭해야 한다. 그래야만 대한민국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

 
역사 속에서 어떤 기원적 사건을 찾고 그것으로부터 정통성의 계보를 작성하는 것은 전형적인 주자학자들의 역사관이다. 주자학자들에게 지금 이 시대의 올바름은 과거 역사 속 올바름의 계보의 연장선 위에 있다. 그 계보와의 연관성 속에서만 이 시대의 올바름도 판가름할 수 있다.
 
(...)

 
이승만-박정희 전 정권의 계보와 대한민국 역사를 동일시하고 전자에 대한 긍정만이 대한민국의 현재에 대한 긍정이라는 뉴라이트의 역사관은 과연 이러한 17세기 조선 주자학자들의 역사관과 얼마나 다른가? 뉴라이트 역시 이승만의 건국 행위라는 기원적 사건을 출발점으로 삼아 박정희의 산업화, 작금의 세계화로 이어지는 어떤 정통성의 계보를 그리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 이 계보의 연장선 위에 서 있음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단으로, 즉 대한민국 안의 반(反)대한민국 분자(‘친북좌익’)로 몰아붙이고 있지 않은가? 300년의 세월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의 정신적 근친성은 참으로 놀랄만하다.

- 장석준, "진보좌파에게 대한민국은 무엇인가", <시민과 세계> 2008년 겨울호 中

 

 

대한민국 60년 역사동안, 헌법은 얼마나 많이 바뀌었으며, 또 그 배 이상으로 사람들의 생각은 얼마나 많이 바뀌었는가? 그렇게 대한민국은 '지배계급의 통치단위로서의 국가'라는 생각을 잠시 가려놓고 생각하면 얼마나 변화무쌍한 조직이던가? 또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그 변화를 위해 몸을 바쳤던가? 그렇다면 그런 몸부림들, 어떻게든 통일된 해방국가를 만들어 보겠다고 몸부림 쳤던 김구, 여운형 등을 암살하고 잘려진 나라를 만들었던 이승만은 얼마나 대한민국적인가? (허술하고 급조된 형태로 만들어진 것이긴 하지만) 노동자/농민의 권리와 민주적인 국가운영을 얼마간 보장했던 제헌헌법을 허물어 뜨리고 개발독재를 위한 헌법을 만들었던 이승만, 박정희의 행위는 또 얼마나 대한민국적인가?

 

대한민국이란 나라는 1948년 정부 수립과 함께 정적으로 굳어진 유일한 형태가 아니라 대중의 열망과 투쟁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하고, 또 그래야 하는 체제라고 말하면 안되는 것이었나? 우리는 그러는 한에서 대한민국을 긍정한다고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쉽기만 한 토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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