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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은 소비자로서의 삶을 원한다?

장애인은 소비자로서의 삶을 원한다?


인터넷 장애인 신문 <함께걸음>에서 충격적인(!) 글을 발견했다. 이름하여 "장애인들은 소비자로서의 삶을 원한다"

 

얼마전 전장연 주최 <장애해방학교>에서 활동보조서비스의 이용자 직접지불방식(일명 '다이렉트 페이먼트'. 장애인이용자에게 활동보조 이용 시간을 제공하는 게 아니라, 판정된 시간에 따른 현금을 직접 지급해 스스로 활동보조인을 고용하도록 하는 방식)에 대해 토론할 기회가 있었다. 위의 글이 바로 이 쟁점과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아서, 그 때 토론했던 내용을 정리해 볼 겸 몇 자 적어보려 한다.

 

일본과 유럽 여러나라에서는 장애인의 자기결정권의 확대라는 측면을 강조하며 직접지불방식을 도입하고 있지만,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사실 그 실체도 확인할 수 없는 '복지병'에 대한 우려 때문에 그러지 않고 있다. 활동보조서비스 제공을 직접지불방식으로 하면 이용자가 그 돈으로 서비스를 이용할지 말지, 이용하면 얼마나 이용할지의 결정권은 이용자 자신에게 있는 것이기에 오로지 '예산낭비'만을 걱정하는 정부 입장에서는 이 문제가 복지병에 대한 우려로 연결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다. 그러나 정부의 이런 신자유주의적인 '복지병' 운운에 대해 비판적인 거리를 둔다고 하더라도, 과연 직접지불방식이 도입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나를 당황케 했던 <함께걸음>의 이 글에서는 정부의 활동보조지원제도가 장애인 지원이 아닌, 저소득층 일자리 확대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그래서 필자는 사실상 정부의 4대강 정책과 활보의 목적은 같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이것은 장애인이 소비자로 사는 걸 끝끝내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미라고 단언한다. 장애인이 소비자로서의 삶을 살아야만 하냐 아니냐의 다소 '철학적인' 논점은 일단 제쳐두고서라도 , 필자는 뭔가 개념적인 혼동을 하고 있는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필자는 '껌 값 수준의' 장애연금과 임금이 20만원 수준에 불과한 장애인 일자리의 문제를 얘기하며, 이걸로는 장애인이 소비자로서의 삶을 영위할 수가 없다고 비판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분명히 할 것은 이것은 '장애인 소득보장'과 관련된 정책의 문제이고, 활동보조서비스는 소득보장 정책은 아니라는 것이다. 활동보조서비스는 말 그대로 혼자서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중증장애인들의 일상생활을 '보조'하기 위한 제도 아닌가? 전혀 다른 차원의 제도에다 대고 소득보장이 안된다고 불평을 하는 것은 아무래도 번지수를 잘못 짚은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그럼 여기서 바로 아까 제쳐두었던 다소 '철학적인' 논점으로 옮겨가보자. 장애인은 정말 '소비자'로서의 삶을 원하는가? 비장애인 활동보조인인 내가 함부로 얘기할 문제는 아니겠지만, 이건 장애인-비장애인을 떠나서 누구나 고민해 볼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우선 내 자신에게 이렇게 질문해 볼 수 있겠다. 내가 비장애인으로서 장애인이 누리지 못하는 것을 누리고 살고 있는 것이, 내가 '소비자'로서의 권리를 갖고 있기 때문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나는 토요일 빼고 일주일 내내 활동보조 일을 뛰어야 겨우 한달 100만원도 안되는 돈을 버는 저임금 노동자이다. 하지만 나의 활보 이용자분은 가족과 함께사는 꽤 좋은 아파트도 있고, 통장에 돈도 나보다 많다. 소비자로서의 권리를 가진걸로 따지자면 내 이용자분이 나보다 많은 걸 가졌다. 하지만 나는 비장애인이라는 이유로, 계단있는 건물을 쉽게 오를 수 있고 이렇게 혼자 컴퓨터로 글을 쓸 수 있고 혼자서 밥도 해먹는다. 하지만 우리 이용자분은 조그만 턱이 있는 1층 건물에도 들어갈 수 없고, 컴퓨터로 글을 쓰려면 옆에서 내가 타이핑을 해 줘야 하고, 뜨거운 국물이 있는 음식을 먹을 땐 내가 조그만 앞 접시에 덜어주어야 흘리지 않고 먹을 수 있다. 이런 장애인의 소소한 일상생활을 누리는 것은 소비자로서의 삶과는 사실 아무런 상관이 없다.

 

사실 이런 상황에서 1급 중증장애인에게 한달에 몇 억씩 준다고 한들 장애인의 권리보장은 이뤄지지 않는다. 툭 까놓고 말해서 내가 오줌이 마려울 때 화장실에 가고, 졸릴 때 이불깔고 잠을 자고, 심심할때 책꽂이에 꽂혀있는 소설책을 읽고, 답답할 때 외출해서 바람을 쐬는, 이 모든 행위들이 내가 소비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가? 나는 화장실 한 번 갈때마다 누군가에게 100원씩내고 가며, 잠을 잘때 1시간에 만원씩 지불하고 뭐 그러고 사는 건 아니지 않는가? 장애인에게도 당연히 주어져야 할 이런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상생활은 절대 돈 얼마로 환산되어 이해되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 글의 필자는 '작금의 장애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활동보조인지원제도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논쟁은 장애인의 삶에 별다른 도움을 줄 수 없는 소모성 논쟁'이라고 일축하는데, 실상은 젼혀 그렇지 않다. 내가 주말에 활동보조를 하는 한 장애인은 정부가 이번에 통과시킨 방식으로 활동보조제도가 시행되면(자부담을 15%로 인상시킨 안) 활동보조서비스 이용을 안하겠다고 말한다. 그러면 혼자서 거동과 신체 유지등이 가능한 그 분이야 크게 문제가 없을 수도 있지만, 그 분과 같이 사는 형(전동휠체어를 타고 다니며, 혼자 기어서 이동하는 것 조차 불가능한)은 내가 볼땐 그냥 다시 시설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

 

필자는 "정부가 중증장애인들에게 1인당 80여만원의 급여를 직접 지원하면 장애인이 주체적으로 활동보조인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권리도 확보할 수 있고, 나아가 절약한 급여로 턱없이 부족하긴 하지만, 최소한의 소비자로서의 삶을 살 수 있는 여지도 확보할 수 있게 된다"라고 말한다. 내가 볼 땐 여기서 딱 한 단어, 즉 '주체적으로'만 빼면 맞는 말이다. 역설적으로 활동보조서비스 시간이 돈으로 지급된 상황에선 장애인 당사자가 주체적으로 행동할 여지가 확실히 줄어든다. 가족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활동보조지원을 무슨 기초생활보장급여처럼 생각해 버리는 것이다. 직접지불방식이 실시되지 않고 있는 지금도 이런 비슷한 사례는 부지기수다.

 

마지막으로 이 글의 문제점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필자가 활동보조인의 노동권 문제에 대해서는 완전히 백지상태라는 것이다. 내가 장애해방학교에서 이 문제에 대해 공부할 때 가장 눈이 번쩍 했던 내용이 이건데, 사실상 활동보조서비스를 직접지불로 해버리게되면 활동보조인의 노동과정에서 벌어지는 여러 문제들은 노동법의 적용을 받는게 아니라, 장애인 당사자와 개인적인 송사로 일어난 문제 즉 민사상의 사건이 되어버린다. 즉 일하다 다쳐도 산재적용을 받는게 아니라 개인적인 계약관계를 맺은 장애인당사자에게 손해배상 청구를 해야되는 것이고, 임금을 못받는 상황이 벌어지면 사기죄로 고소를 해야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상황들은 가정이긴 하지만, 직접지불방식에 따른 이용자의 활동보조인 직접고용(=개별고용)이라는 상황이 벌어지면, 활동보조인은 사실 노동자로서의 지위를 상실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게 장애인에게는 좋은 일일까? 장애인의 일상생활을 보조해 주는 활동보조인의 지위가 불안정해지면 장애인의 일상생활도 불안정해 질 수밖에 없다.

 

이건 정말, 장애인에게 소득보장을 얼마를 더 해주고, 소비자로서의 권리를 얼마를 더 주고 하는 문제와는 전혀 다른 질과 차원을 갖는 것이다. 그래서 활동보조서비스는 너무너무나 중요하다. "중요한 건 활동보조인 지원이 아니라 장애인이 소비자로서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복지제도를 마련하는 일"이라는 필자의 말은, 아 정말 못본걸로 하고 싶은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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