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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 우리시대의 새로운 지적 대안담론 자크 랑시에르 길, 2008 |
- 「옮긴이의 덧말」中 에서
가령 우리는 이런 상황을 상상할 수 있다. 전체는 몫 없는 자들과의 적대를 해결하기 위해 이렇게 요청한다. “너희들이 전체에 기여하는, 너희들만이 가진 탁월한 능력을 보여달라”고. 이에 대해 몫 없는 자들은 자신의 집단의 특수성이나 이해관계를 주장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 특수성이 거부되든, 관용되든 그것은 이미 전체와 맺는 ‘합의’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몫 없는 자들은 “우리는 공통 특성을 가지고 있다. 정치는 특정한 능력(competences)가 아니라, 말하는 존재들의 평등을 참조한다”고 주장해야 한다. 그래야만 몫 없는 자들은 그들의 집단을 공동체 전체와 같다고 주장할 수 있다. 전체와 스스로를 동일시하면서, 고유하지 않은 고유함을 내세우면서 데모스는 그들을 (방)해했던 것들, 즉 출생과 부의 질서를 공동체의 부분들에 대한 셈 바깥에 둔다. 아르케의 논리와 단절하는 한, 공동체의 셈에서 기존의 공동체를 분리해내는 한, 그러한 틈이 존재하는 한, 정치가 있다. (50-1pp)
-「정치의 종언 혹은 현실주의 유토피아」 中 에서
좋은 참주의 모델은 페이시스트라토스다. 『아테네의 정체(政體)』에서 언급되는 그의 통치수단들은 농촌의 좋은 민주정의 규칙들과 혼동하리만큼 유사하다. 그는 빈자들이 땅을 살 수 있도록 자신의 지갑에서 손수 돈을 꺼내 그들에게 주었다. 이는 두 가지 목적을 위한 것이었는데, 하나는 빈자들이 도시에서 어슬렁거리면서 시간을 보내지 않고 시골에 흩어져 살도록 하기 위함이었고, 다른 하나는 빈자들이 자기 수준에 맞는 부를 가지고 자신들의 사적인 사무들에 관심을 기울이게 함으로써, 그들이 공통된 것들에 종사할 욕망이나 여가를 갖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78p)
사실 평등의 고유함은 자연스럽다고 가정된 질서들을 결합하는 것이라기보다 그것을 흐트러뜨리고, 해체하여, 결국 그것을 분할의 논쟁적 형상들로 대체하는 것이다. (...) 근대 민주주의 시대에 흐트러뜨리는 분할은 한 가지 특권적인 형태를 취했던바, 그 이름은 이제 완전히 신망을 잃기는 했지만, 우리가 현재 발 딛고 있는 곳을 알기 위해서는 그것과 직면해야 한다. 사람들은 이 특권적인 형태를 계급투쟁이라고 불렀다. (...)
투쟁하는 계급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은 먼저 더는 열등한 서열의 구성원이 아님을 뜻할 뿐이다.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대립을 명명하는 것은 논쟁적 분할의 한 장소를 구성함으로써 모든 불평등한 배정의 면소(non-lieu)동물 종(種)들의 양상대로 사회적 종들을 고착시키는 모든 방식에 대한 면소를 주장하는 것이다. 또한 계급투쟁 선언은 우선 두 가지 분리된, 그렇지만 마찬가지로 대중들의 삶의 양식들 깊숙한 곳에 있는 비밀을 찾거나 노동자층을 의고적이거나 근대적인, 숙련3되었거나 비숙련된 것으로 구분하려는 동물학자들을 당황시키기에 적합한 다음의 두 분리된 형상들로 표현되었다. 첫째 형상의 정식은 계급이 없다는 단언을 투쟁의 깃발로 삼는 노동자 팸플릿의 ‘순진함’ 속에 나타나고, 둘째는 프롤레타리아트를 사회의 비-계급으로, 곧 모든 계급의 소멸로 포고하는 이론가의 정교화 속에 나타난다. 마르크스와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들의 힘겨운 마주침은 몹시 위태롭게 다음의역설적인 질문을 다루었다. 이 탈계급화 행위의 작인(作因)을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 계급이라는 이름이 아니라면 그것을 어떻게 이름 지을 것인가? 따라서 이 이름은 모순적인 두 가지 것을 의미했다. 한편으로, 그것은 계급들의 현실태적 소멸, 또한 노동자 계급의 그 자체에 의한 소멸, 다시 말해 조합의 동물성과 무리의 동물성으로부터 동시에 노동자 계급을 뽑아내는 자기에 대한 노동을 가리켰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것은 탈계급화를 작동시키는 계급을 그것의 실사성(substantivité)속에 고정시켰고, 그리하여 사회적 기능들을 잘 배정할 수 있다는 환상, 결국 잘 정렬된 일자에 대한 환상의 새로운 형상을 되살렸다. (95-7pp)
목적의 실현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사회의 진보주의에 뒤이어 순수한 진보주의(시간의 힘들에 대한 순수한 믿음)가 온 것과 마찬가지로, 잊혀진 마르크스주의에 뒤이어 온 것은 퇴화한 헤겔주의다. 그것은 곧 소비적이고 합의적인 미디어정치의 바탕 위에서 전문가들이 통치함으로써 이성을 평화적으로 실현하는 것이다. 중우정치는 전문가들의 통치 형태로 실현되며, 그것만이 증식된 향락의 온상들의 조화롭지 않은 조화를 관리하기에 적합하다. 포스트민주주의는 아마도 중우정치와 그것의 반대로 가정되는 지식정치(épistémocratie) ― 크고 작은 향락의 무한한 온상들에 대해 정확히 계산된 경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교육 제도의 규칙들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출현하는 가장 지적인 자들의 통치 ― 의 정확한 일치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그저 향락을 경영하는 자들의 한계는 양화하기 더 어렵고, 지수화하기 더 어려운 연결된 두세 가지 감정들(낙심, 공포, 그리고 증오)을 그들이 쉽사리 경영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이 무능함은 좋은 왕, 민주주의적 왕이라는 의고적인 형상의 개입을 불러낸다. 그 왕은 두 몸짓을 하나로 실행하는 데 능숙할 뿐 아니라, 무리의 정념들을 진정시키고, 데모스를 이원성의 체류로 보존하는 데 필요한 정의로운 일자의 특질을 표시하는 데 능숙하다. (98p)
- 「정치, 동일시, 주체화」中에서
주체화 과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soi)가 아니라, 자기 사이의 관계인 하나(un)를 형성하는 것이다. 우리는 ‘프롤레타리아’라는 겉보기에 정체성을 띤 이름을 그 본보기로 제시할 수 있다. 근대 프랑스에서 그 말이 처음 쓰인 사례 중 하나는 1832년 오귀스트 블랑키(Auguste Blanqui)에 대해 행해진 소송이다. 검사장이 그의 직업을 묻자, 블랑키는 “프롤레타리아”라고 대답한다. 검사장은 “그것은 직업이 아니잖아”라고 반박한다. 그러자 블랑키는 그에 이어 “프롤레타리아는 정치적 권리를 박탈당한 우리 인민 대다수의 직업이다”라고 응수한다. 치안의 관점에서 보면, 검사장이 옳았다. 프롤레타리아는 직업이 아니며, 블랑키도 우리가 흔히 노동자라고 부르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정치의 관점에서 보면, 블랑키가 옳았다. 프롤레타리아는 사회학적으로 지정할 수 있는 한 사회 집단의 이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셈-바깥을 가리키는 이름, 내쫓긴 자(outcast)의 이름인 것이다. 라틴어로, proletarii는 단지 다음의 것을 의미한다. 번식하는 자들, 이름 없이 살고, 그 이름을 남기지도 않으며, 도시국가의 상징적 구성 속에서 하나의 부분으로 셈해지지 않는, 그저 살고 번식하는 자들.따라서 프롤레타리아는 아무나의 이름, 내쫓긴 자들의 이름으로서, 노동자들에게 어울리는 고유한 이름이었다. 우리는 그 단어를 천민들(parias)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계급 질서에 속하지 않는 자들, 따라서 이 질서의 잠재적인 소멸인 자들(마르크스가 말했던 모든 계급의 소멸인 계급)로 이해해야 한다. 주체화 과정은 이처럼 탈정체화 혹은 탈계급화 과정이다. (141-2pp)
정치적 주체화의 논리는 또한 타자론, 곧 타자성에 대한 세 가지 규정에 따른 타자의 논리이기도 하다. 첫째, 정치적 주체화의 논리는 결코 하나의 정체성에 대한 단순한 긍정이 아니다. 그것은 항상 동시에 치안 논리에 따라서 고착된, 타자가 부과하는 정체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사실 치안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자리와 그들의 일을 배정하는 것을 표시하는 ‘정확한’ 이름들을 원한다. 정치는 하나의 균열을 절합하고 하나의 피해를 현시하는 ‘고유하지 않은/적합하지 않은’ 이름들, 곧 잘못된 명칭들(misnomers)의 문제다. 둘째, 정치적 주체화의 논리는 하나의 증명인바, 이 증명은 언제나 그것의 전달 대상인 하나의 타자를 전제한다. 비록 이 타자가 그 정명 결과를 거부한다 할지라도 말이다. 비록 그것은 하버마스식의 대화 혹은 합의 추구의 장소가 아닐지라도, 하나의 공통 장소를 구성하는 것이다. 합의는 없으며, 손해 없는 소통이라는 것도 없고, (방)해의 해결이라는 것도 없다. (방)해를 다루고, 평등을 증명하기 위한논쟁적인 공통 장소는 있다. 셋째, 주체화의 논리는 언제나 불가능한 동일시를 내포한다. (143p)
- 「타자의 입장」 中 에서
역사가들의 작업은 최근 우리에게 알제리 전쟁 말기 대규모 시위의 출발점이 1961년 10월 17일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날 알제리인들은 알제리 민족해방전선(FLN)의 호소에 따라 파리에서 시위를 벌였다가 야만적인 방식으로 진압되었다. 프랑스는 진압 희생자 수에 대해 완전히 입을 다물었다. 그날은 사실 그것이 현시되고 은폐된 이중적 측면과 함께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그 순간에 나의 것과 타자의 관계에 대한 윤리적 아포리아들은 타자성을 포함하는 관계의 정치적 주체화로 전환되었다. 그렇지만 이날의 효과에서 중요했던 것은 억압의 가시성과 비가시성의 문제들이 문제가 되는 세 관계 ― 알제리 투사들과 프랑스 국가의 관계, 프랑스 국가와 우리의 관계, 알제리 투사들과 우리의 관계 ― 와 뒤얽히게 되었던 방식이다. 프랑스 국가의 관점에서, 이 시위는 투쟁하는 알제리인들이 프랑스의 공적 공간에 정치적으로 개입하는 자들로서, 모종의 방식으로 프랑스 시민들로서 출현했던 것이다. 이 용납할 수 없는 것의 결과는 우리가 알다시피 몽둥이질과 야만적인 수사형(水死形)이었다. 한마디로 치안은 공적 공간을 청소했고, 정보에 대해 완전히 입을 닫음으로써 그 작전의 가시성 자체를 제거했다. 우리에게 그것은 무언가가 우리나라에서 우리의 이름으로 일어났으며, 우리로부터 이중으로 제거되었음을 의미했다. 그때는 실종자 수를 산정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우리는 이 이중의 사라짐이 뜻했던 것을 어떤 의미에서 반대로(a contrario),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서문에 사르트르가 적었던 한 문자으로부터 이해할 수 있다. “오늘 고문의 눈부신 태양이 절정에 이르러 온 나라를 비춘다.” 하지만 사실 이 눈부신 태양은 아무것도 비추지 않았다. 두드려 맞고 수장당한 몸들은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다. 우리는 최근 보스니아, 르완다 혹은 그 밖의 곳에서 온 이미지들의 진열 앞에서도 그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도덕적 분개를 일으키기에 가장 알맞게 만들어진 이 전시, 타자에게 도래한 것에 대한 고통, 고문하는 자에 맞선 공허한 증오. 이는 더 비밀스럽게 자주 이 타자으 l입장에 있지 않다는 안도감을 만들고, 때때로 우리에게 고통 받는 존재를 조심성 없이 환기하는 자들에 대한 짜증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공포와 연민은 정치적 정서들이 아니다. (...)
알제리 전쟁은 공식적으로 전쟁이 아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대규모 치안 작전이었다. 따라서 정치적 답변은 해방 전쟁의 역사적 타당성을 평가하는 것이 아닌, 전쟁의 이 치안적 본성에 대한 답변이었다. (221-3pp)
- 「민주주의의 용법들」 中 에서
1830년 프랑스 혁명 직후, 출판물과 팸플릿, 노동자 신문들이 만개했던바, 거기에서 제기된 공통된 질문은 이것이었다. 프랑스인들은 과연 평등한가 평등하지 않은가? 흔히 파업 운동이나 정치적 갈등과 함께 가던 이 텍스트들은 다소 어떤 삼단논법의 전개로 표현되었다.
삼단논법의 대전제는 간단하다. 1830년에 막 공포된 헌장 전문에는 모든 프랑스인이 법 앞에 평등하다고 적혀 있다. 이 평등이 삼단논법의 대전제가 된다. 삼단논법의 소전제는 즉각적인 경험에서 끌어 온 것이다. 예를 들어, 1833년에 파리의 재단사들은 양복점 주인들이 급료, 노동 시간, 일부 노동 조건들에 대한 자신들의 요구에 응답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업을 시작했다. 따라서 삼단논법의 소전제는 대략 다음과 같이 전개될 것이다. 그렇지만 양복점 주인 협회장인 슈바르츠씨는 우리의 근거들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실 그에게 급료를 재검토해야 할 근거들을 제시하고 있다. 이 근거들을 그는 검증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그것들을 검증하기를 거부한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를 그와 평등한 자들로 대하고 있지 않다. 그는 헌장에 기입된 평등에 위배된다.
동일한 삼단논법의 다른 형태도 있다. 바로 그 슈바르츠씨는 그의 동료들과 모여서, 노동자들의 요구에 저항하기로 뜻을 모은다. 그래서 그는 사장들 간의 협회를 조직한다. 그렇지만 법에는 주인들 간의 협회는 노동자들의 협회와 같은 이유로 처벌 가능하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노동자들만 기소되었다. 거기에서 또다시 평등은 위배된다. (...)
삼단논법은 간단하다. 대전제에는 법이 말하는 바가 있다. 소전제에는 다른 관점에서 말해진 것과 행해진 것, 즉 평등에 대한 기본적인 법-정치적 주장에 위배되는 사실이나 문장이 있다. 그렇지만 대전제와 소전제 간의 모순을 사고할 수 있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첫째는 우리에게 익숙한 방식이다. 그것은 단순히 법-정치적 문장이 환영에 지나지 않으며, 그 문장이 주장하는 평등은 불평등의 현실을 가리기 위해서만 거기에 있을 뿐인 외양이라고 결론짓는 것이다.
탈신비화의 양식(良識)은 위와 같은 방식으로 추론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결코 노동자들의추론이 선택한 길이 아니다. 노동자들의 추론이 끌어낸 결론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다. 대전제와 소전제를 일치시켜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 대전제나 소전제를 바꿔야 한다. 만일 페르실 씨나 슈바르츠 씨가 말하는 것을 말할 근거가 있고, 또 그들이 하는 것을 행할 근거가 있다면, 헌장 전문을 삭제해야 한다. 그리고 프랑스인들은 평등하지 않다고 말해야 한다. 반대로 만일 대전제, 즉 헌장 전문을 유지하고자 한다면, 페르실 씨나 슈바르츠 씨가 다르게 말하거나 행동해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추론하는 것이 갖는 이점은 그것이 문장을 행적과 대립시키지 않고, 형식을 현실과 대립시키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문장과 문장을 대립시키고, 행적을 행적과 대립시킨다. 보통 틈 혹은 비-장소로 사고되는 것으로부터, 그것은 정확히 이중적인 의미―근거 체계 그리고 논쟁 공간―에서 하나의 장소를 만들어낸다. 평등을 말하는 문장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다. 하나의 문장은 우리가 그것에 부여하는 힘을 갖고 있다. 이 힘은 우선 평등이 그 자체를 표방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어디엔가 평등이 있다. 이것은 말해졌고, 씌어졌다. 따라서 이것은 입증될 수 있어야 한다. 하나의 실천은 바로 거기에 바탕을 둘 수 있으며, 이 평등을 입증하는 것을 자신의 과제로 삼을 수 있다. (109-112pp)
아렌트는 권리들을 가질 권리를 첫 번째 권리로 설정한다. 우리는 거기에 다음의 것을 덧붙일 수 있다. 타인에게 자신의 권리를 인정하도록 할 수 있는 합리적인 강제를 부과할 수 있는 자가 권리를 가진다고 말이다. 타인이 매우 자주 그것을 인정하기를 회피한다는 사실은 전혀 근본적으로 문제를 바꾸지 않는다. 원리상 타인이 알아듣지 못할 것이며, 공통의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자는 자기 자신의 권리를 인정하도록 만들 수 있는 토대마저 잃어버린다. 반대로 마치 타인이 언제나 자신의 담론을 알아들을 수 있는 듯 행동하는 자는 비단 담론의 구도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역량을 증대시키는 것이다. (115p)
민주주의적 학교는 사회 비판의 이중의 놀이에 따라 끊임없이 기대에 어긋난 약속, 끊임없이 기대를 저버린 약속의 장소로 생각된다. 한편으로 사람들은 실패를 비판하고 이 실패에 대한 교육학적·심리학적·사회학적 치료법들을 제안한다. 그렇지만 곧바로 증명은 둘로 나뉜다. 실패를 증명하는 것은 또한 그리고 특히 민주주의가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만일 민주주의가 그것이 주장하는 평등에 잘 들어맞지 않는다면, 이는 그것이 은밀하게 숨기는 불평등에 완전히 맞춰진 것이며, 불평등이야말로 그것의 근본적인 원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학교에 대한 부르디외와 파세롱의 작업들은 사회학자와 사회 비판가는 매번 이기고 민주주의는 매번 지는 이러한 논리를 예시한다. 그들이 사실 보이고자 하는 것은, 만일 학교가 그 평등의 약속들을 실현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수단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것의 존재 방식 자체 때문에, 그것을 정초하는 상징적 논리 때문에 그러하다는 것이다. 『상속자들』같은 책은 내가 의혹의 삼단논법이라고 부를 것을 완벽하게 실행한다. 그것은 사실 대전제(모두를 위한 평등한 학교)와 소전제(서민 계층 아이들의 학업 실패)를 대립시킴으로써 그에 대한 고발을 끌어내는 데 만족하지 않는다. 그것은 학교가 정확히 대문자 평등을 믿게 만들면서 불평등을 만들고 있음을 보이려고 한다. 빈자들의 아이들에게 학교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며, 오로지 재능에 따라서만, 곧 각자의 지능에 따라서만 학생들에게 점수를 주고, 그들을 분류하며, 선별한다고 믿게 만들면서, 학교는 빈자들의 아이들로 하여금 만일 그들이 성공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들에게 재능이 없거나, 그들이 지적이지 않기 때문이므로, 따라서 다른 곳에 가는 게 낫다는 것을 인정하도록 강제한다. 학교는 이렇듯 평등에 대한 환영에 지나지 않는 근본적인 상징 폭력의 장소로 나타난다. 성공은 오로지 학생의 재능과 관련 된다고 믿게 만들기 위해서, 학교는 단순한 지식 전달을 넘어서는 모든 것, 학생의 인격과 독창성에 호소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모든 것을 특권화 한다. 그러면서 학교는 존재 방식 ― 사실 학교에서는 배울 수 없는 상속자들의 문화 수용 방식과 삶의 방식 ― 을 선별한다. 따라서 학교는 자신의 약속에 대해서는 거짓말을 하고, 자신의 숨겨진 본질에 대해서는 충실한 것으로 드러난다. 학교에 그 이름을 부여했던 그리스어 스콜레는 먼저 여가를 가진 자들, 여가를 가진 자들인 한에서 평등한 자들, 그리고 때에 따라서는 이 사회적 특권을 공부라는 훌륭한 쾌락에 할애하는 사람들의 조건을 뜻한다.
따라서 학교 형태는 완벽한 고리가 될 것이다. 사회-경제적 자본을 문화 자본으로 전환하는 고리, 그리고 이 전환을 현실적으로 은폐함으로써 이 전환 수단을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 사이를 보이지 않는 만큼 효과적으로 분리하는 고리. 그러므로 민주주의의 형태는 더 넓게는 평등에 대한 화영과 근본적인 불평등 ― 스콜레를 가진 인간들과 필요에 매달린 인간들 사이의 불평등, 상징적인 것의 사치를 지불할 수 있는 자와 할 수 없는 자의 불평등 ― 에 대한 몰이해를 동시에 유지하게 된다. 민주주의는 빈자들이 사치스러운 투자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전제하는 기만적 체제일 것이다. 이런 분석은 이처럼 극단적으로 민주주의적 인간을 분할을 은폐하면서 영속하게 하는 형태들에 속아 넘어간 인간으로 만드는 의혹의 사유를 품고 있다.
사실 의혹의 사유의 이런 허무주의적 해석에 대해 ‘불평등의 축소’라고 하는 실증적 해석이 응답한다. 부르디외와 파세롱의 비판에서 교육자들과 개혁 정치가들은 주로 다음의 세 가지 관념을 채택했다. 암묵적인 불평등 요인들을 명시할 필요, 대규모 학생들을 일률적으로 교육하는 형식주의에 맞서 싸워야 할 필요, 사회적인 것의 무게, 곧 빈곤 계급에 고유한 아비투스(habitus), 사회화 방식을 고려할 필요. 적어도 프랑스에서는 이 정책들의 결과에 더는 발론이 제기되지 않았으며, 결국 불평등을 명시한다고 주장하면서, 그 불평등을 견고하게 만들어버린 꼴이 되었다. 한편으로, 사회문화적 차이의 해명은 그 차이를 운명으로 전환하고, 학교 제도를 보조 제도의 의미로 바꾸곤 했다. 특히 그것은 이민자 자녀들을 학업 실패의 위험이 없는 하급 직업 전문 과정 쪽으로 진로 지도하고 그에 맞게 학급을 다시 편성하는 과 함께 간다. 다른 한편, ‘암묵적인’ 기준들의 색출은 가장 명시적인 기준들의 무게를 더했다. 즉 유치원 때부터 시작되는 아이들에게 내면화된 미친 경쟁, 그것은 좋은 초등학교 가도록 만들고, 또다시 좋은 중학교에 갈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며, 마침내 수도 파리의 좋은 구역에 위치한 좋은 사회문화적 환경 속에 있는 좋은 고등학교의 좋은 학급에 갈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따라서 학교를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형태로 보는 허무주의적 시각 그리고 학교를 불평등 축소하는 도구로 보는 진보주의적 시각은 그것들의 원리에서난 효과에서나 서로 만난다. 둘 모두 불평등에서 출발해서, 불평등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노동자들의 필요에 맞춰진 학교를 요구하면사, 위 두 시각은 사회주의적 탈신비화에 대한 민주주의의 반혁명적 비판으로부터 물려받은 이 투박한 전제, 즉 사회정치적 체제를 구성하는 형태들 사이의 불일치는 악 혹은 근본적인 속임수의 징표라는 관념을 재확인한다. 그렇지만 바로 그것이 근대 경제·국가 체계에 대한 민주주의의 표시다. 그것의 형태들의 이질발생성, 특히 교육 논리와 생산 논리의 수렴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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