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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토 마나부, 『교육개혁을 디자인한다』, 학이시습
훗카이도에 있는 어업이 중심인 한 작은 마을의 고등학교에서도 배움의 네트워크는 펼쳐지고 있다. 이 마을의 고교는 각 학년이 두 반밖에 없으며, 전교생을 다 합쳐도 200명이 안 되는 작은 학교다. 학생수가 더 줄게 되면 폐교로 내몰릴 위험 상황에 놓여 있다. 학교의 존속은 마으르이 사활이 걸린 문제다. 학교가 문을 닫아 젊은이들이 마을을 떠나버리면 어업에 종사할 사람이 없어지고, 결국 마을은 소멸한다. 이 위험에 맞서 교장과 교사들은 지역의 현재와 미래를 주제로 한 교육과정을 마련했다. 1학년은 지역학습, 2학년은 어업의 현재와 미래, 3학년은 학생 스스로 미래 삶의 방식을 디자인하는 학습이 그것이다. 지역 실정에 맞는 교육과정은 지역의 지지를 받았다. 지역 어업협동조합으로부터 경비를 지원받아 2학년 전원이 뉴질랜드 어촌을 방문해 바다의 환경을 지키며 어업을 영위하고 있는 젊은이들과 교류했다. 뉴질랜드의 어업은 글로컬리즘—세계적으로 사고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한다—이라는 환경보호 철학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업의 미래를 생각하기에는 더없이 멋진 장소인 것이다. 지역 실정에 맞는 교육과정을 실천하고 나서부터 인근의 마을에서 이 학교를 지망하는 학생이 늘어났다. 학교와 지역의 연대는 이런학교의 화려한 부활도 가능하게 해준다. (57-8pp)
배움을 중심으로 한 수업 개혁은 교실 커뮤니케이션의 변혁을 기초로 해야 한다. 아이들의 ‘자주성’이나 ‘주체성’이 강조되는 최근의 수업 개혁에서는 일반적으로 아이들의 발표력과 표현력이 중시되고 활발하게 의견을 서로 발표하는 교실 만들기를 지향하고 있다. 그러나 배움을 촉진하는 커뮤니케이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 들어주는 관계’이며, 말하기보다는 ‘듣기’가 배움에서는 더 결정적이다.
일본의 초등학교 교실에서 심각한 것은 늘 ‘밝고, 건강하게’ 활동하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닐까? 외국의 교육학자나 교사들을 데리고 초등학교를 방문해 교실 참관을 안내할 기뢰가 많은데, 일본의 초등학교 교실에 대한 그들의 첫인상을 물어보면 ‘noisy’(소란스럽다)라는 말이 되돌아온다. 참으로 그러하다. 일본의 유치원과 초등학교 교실은 서구 여러 나라의 교실과 비교하면 아이들도 교사도 목에 힘을 준 채 경직되어 큰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으며, 떠들썩한 공간이라는 것이 특징적이다. 교실 인원이 많은 것도 한 이유겠지만, 그 이상으로 ‘밝고, 건강한’ 아이(학교, 교실)가 좋다는 관념을 교사도 아이도 지니고 있기 때문일까? 어딘지 무리가 있는 ‘밝음’과 ‘활달함’이며, 스트레스가 강한 교실이라고 말해야 좋을 것이다. (93-4pp)
이와 아울러 시급히 재검토해야 하는 것이 바로 교과서 무상 배포 제도다. 교육내용이 크게 줄어들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가 예산의 부족으로 교과서는 점점 얇고 빈약한 것이 되고 있다. 유럽과 미국의 교과서에 견줘보면 분량 면에서도 5분의 1에서 10분의 1 정도의 빈약한 인쇄물이다. 현재 교과서는 학습 자료 기능은 거의 수행하지 못하며, 아이들에게도 매력있는 책이 아니다. 현재와 같이 아동 한 명 한 명에게 무상으로 배포하는 제도를 폐지하고 학교 도서실의 도서로 비치해 아이들에게 대출하는 방식으로 바꿀 것을 제창한다. 교과서를 5년마다 개정한다고 해도 무상공극ㅂ을 대출 방식으로 전환할 경우, 같은 예산으로 적어도 5배 분량의 교과서를 준비하는 것이 가능하다. 학습지도요령 개정 때마다 갱신한다면 10배 이상 분량의 교과서를 구비하는 일도 가능하다. 자녀들에게 자기 교과서를 갖게 해주고 싶은 부모에게는 시판을 통해 구입하게 하면 된다. (111p)
학교의 자주적인 개혁을 막는 최대의 장벽은 문부성의 통제도, 교육위원회의 통제도 아니다. 교사들을 분열, 고립시키고 있는 교실의 장벽이며 교과의 장벽이다. 이 장벽을 안에서부터 부수지 않고는 교내에서 동료성을 구축할 수 없다. 모든 교사가 1년에 적어도 한번은 동료에게 자신의 수업을 공개해 서로 비평하는 시간을 갖지 않고서는 교내에서 확실한 동료성을 구축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1년에 단 한번도 동료에게 자신의 수업을 공개하지 않는 교사는 엄밀히 말해 공교육 교사라고 부를 수 없을 것이다. 그런 교사는 교실과 수업을 사물화하고, 학교의 공공성을 진작하는 책임을 게을리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라도 교실을 개방하지 않는 교사가 교내에 존재하는 한 학교개혁을 내부에서 원활하게 추친하는 일은 곤란하다. (113-4pp)
교육개혁에 혼란을 가져오는 가장 큰 오류의 하나는, 인간성 좋고 정열만 있으면 누구나 교사의 일을 하 수 있다고 하는 교직에 대한 안이 한 생각에 있다. 그러기는커녕, 교직은 교육에 관한 전문적인 식견과 아이들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책임, 일본 사회으 lalfo에 대한 책임이라는 높은 지성과 윤리 의식에 기초한 고도의 전문직이다. 오늘날 교사는 교직의 전문직성에 부합하는 양성과 연수르 보장받지 못하고 있으며, 전문직에 적합한 자율성도 윤리도 미흡하다. (153p)
양육과 교육의 열린 네트워크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아이들이 겪고 있는 일련의 교육 위기의 기저에는 엄마 혼자서 아이를 기르는 ‘밀실 양육’이라는 현실이 있다. 엄마에게나 아이에게나 스트레스가 많은 ‘밀실 양육’은 핵가족이 정착된 30년 전에 일반화되었지만, 핵가족은 현재 해체 위기를 맞고 있다. 현재 도쿄의 35-39세 남성의 30% 이상(전국적으로는 20%)이 결혼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학령기의 아이가 잇는 세대는 전체 세대의 3분의 1까지 감소하고 있다. 거의 모든 사람이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키우는 시대는 이제 그 막을 내리고 있는 셈이다. 앞으로는 일본도 유럽이나 미국과 같이 한 번밖에 결혼하지 않는 사람, 몇 번이나 결혼한 사람, 한 번도 결혼하지 않는 사람으로 분할되는 사회가 되는 것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된다. 근대 가족의 붕괴와 재편 속에서 아이들을 보호하고 양육할 새로운 시스템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며, 여성의 사회 진출의 기회를 확대하는 것과 함께 양육을 지원하는 사회적인 네트워크의 형성이 요구된다. (156p)
3장. 조울증에 빠진 자본주의: 위기의 재발
- “대공황들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주기적으로 반복된다”(찰스 킨들버거). 자본주의 경제성장은 늘 그 체제 내부에 큰 고장을 일으킨다. 그 결과 자본주의는 마치 사람들이 들숨과 날숨을 쉬듯 호황과 침체를 번갈아 겪는다.
그 모든 대공황들 중에서 1930년대 대공황이 단연 으뜸. 이때야말로 글자 그대로 ‘글로벌 슬럼프’. 그러나 실제 데이터를 분석해보면 1930년대에도 상당한 경제성장이 있었음. 5%이상의 경제성장을 나타낸 분기가 무려 20차례나 됨. 이때마다 일부 지배층은 “이제 경기침체가 끝났다”는 것을 선전해 댐. 그러나 이런 경제성장의 분기들 사이사이에 13회의 경기위축기가 끼어있었음.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돌파구 없이는 자본주의적 번영이나 경기 회복은 불가능했음.
과잉 투자, 투기, 그리고 슬럼프: 1920년대로부터 얻는 교훈
1925년에서 1929년 사이에 미국 등 세계의 여러 나라 경제들은 확실히 호황기를 맞았다. 4년간 제조업 및 광업 생산고는 거의 20%나 증가함. 이런 경제의 성장은 강력한 수요 팽창이 뒷받침 되어야 가능함. 그러나 이 호황기 기간에도 미국인의 90%는 소득이 줄어들었음. 그러나 20세기 초 자본주의는 ‘빚을 내는 것’으로 단기적 응급조치를 취함. 소비자 신용의 증가로 부동산 시장의 과열이 형성. 1924~5년 사이에 주가가 무려 80% 이상 상승. 그러나 실물경제의 ‘기초 조건들’, 예컨대 수익성, 평균소득, 고용 등의 지표는 그런 성장을 정당화할 정도로 좋은 것이 전혀 없었음.
사람들은 만약 주가가 떨어질 경우 그 빚을 어떻게 갚을지에 대해선 하나도 걱정하지 않음. 이런 나쁜 상황에 대해선 누구도 생각하기조차 싫었기 때문. 그러나 그 생각하기 싫었던 일이 실제로 일어남. 1929년 10월 23일부로 주식시장은 그 직전 4개월동안 거두어들인 모든 이익을 물거품으로 만들면서 폭락함.
거품붕괴의 핵심 요인은 ‘과잉 투자’. 대공황 직전 4년간 미국의 제조업체 수는 무려 2만 3,000여개나 증가. 노동생산성도 급격히 상승되어 포드 T-모델 자동차 차대 하나를 만드는 시간이 12시간에서 90분으로 단축. 이러한 과잉투자의 위험은 잘 드러나지 않았는데, 그것은 고용증가와 은행융자 규모의 확장으로 인한 소비시장 확대 때문. 이것이 주식시장의 거품 증대로 이어지고 끝내 그 거품이 붕괴했을 때, 사람들은 거품이 모든 고통의 원인인 것처럼 보지만, 거품조차 과잉 투자가 만들어낸 고전적 순환의 결과물.
이윤 체제에 깃든 경제의 불안정성
주류 경제학은 개인의 소비를 자본주의 경제의 추축이라고 고집. 그러나 실제로는 투자 지출이 경기순환을 설명하는 핵심 변수. 케인스의 경우 자본 투자의 순환적 변동을 심리학적으로 설명. 자본가들은 미래에 대한 비합리적인 불안감 때문에, 부를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축장하는 것이라는 설명. 반면 맑스는 이윤 창출을 목적으로 하는 생산에 의해 추동되고 강제되는 경제체제 그 자체가 비합리적이라고 설명.
“US스틸은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이지 철강 자체를 만드는 게 목적이 아니다.”(US스틸 전임 최고경영자). 이러한 발언이 소비자 수요가 생산을 추동한다는 주류경제학의 발언보다 더 솔직한 것.
이윤 추구가 목표가 되기 때문에 재화들 간의 사용가치의 차이는 중요한 문제가 아님. 그것이 화폐로 환산되는 수량적 가치로 전환될 수 있는지의 여부만이 중요함. “당신이 무슨 상품을 사건 우리는 상관하지 않아요. 우리 눈에는 ‘곡물이나 석유나 서로 맞바꿀 수 잇는 칼로리로 보이죠. 어디 옥수수를 한번 봅시다. 그건 이제 난방이나 운송에도 쓰이는 연료가 되었죠. 게다가 석유로 플라스틱도 만들 수 있고 농사용 비료도 만들죠.”(Doug Sanders)
이윤 극대화를 위한 자본가의 열망은 노동강도 심화에 대한 노동자들의 반발과 생산성 향상과 시장점유율 확보를 위해 자본가들간에 벌어지는 신기술 도입 경쟁으로 인해 종종 좌절된다. 그럼에도 이런 무한 경쟁은 기업가들이 자유의지로 선택의 가부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체제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서 자본주의의 성장 과정은 자본주의의 토대 자체를 허물어뜨리게 되었는가? 맑스의 대답은 자본주의의 팽창 과정이 과잉 축적과 이윤율 하락을 초래하기 때문이라는 것.
과잉 축적 및 이윤 하락
기계화라는 것이 자동적이고 단선적인 방식으로 이윤율을 저하시킨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최소한 상대적인 의미에서 노동을 신기술로 대체해 나가면서 이윤에 하향 압박이 가해지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 과정에서 가장 비효율적인 기업가들은 갈수록 취약해지고 마침내 경쟁에서 탈락하거나 경제적 슬럼프에 빠진다. 그런데 상당한 기업들이 파산하는 현실 자체가 전체적으로 새로운 경기 회복의 기초가 되기도 한다. 물론 이 과정은 필연적으로 체제 전반의 경제적 위축이라는 고통과 역경을 수반한다.
금융, 신용, 그리고 위기
기업들이 경쟁에서 버티기 위해 필요한 투자를 제대로 하려면 은행 등에서 돈을 빌려야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이유로 현대 자본주의는 고도로 발전된 신용 체제 없이는 제대로 돌아가지 못한다. 그런데 기업이 돈을 빌리려면 당장 필요한 투자 자금을 빌려 가는 대신 장래 벌어들일 이윤의 일부를 주겠노라 약속을 해야 함. 은행과 같은 채권자가 돈을 빌려 주면서 받는 건 기업이 나중에 돈을 주겠다는 약속 뿐. 일종의 가공자본.
우리의 현실은 가공자본의 거래가 왕성하게 성장한 상황. 실제로 2000년 초 시스코시스템즈의 주가는 그 회사가 정작 벌어들이는 수준에 비해 160배나 높게 팔렸음. 이는 즉 이 회사의 주식을 구입한 뒤 그 기업의 실제 배당금을 받아 애초 투자한 본전을 찾으려면 무려 160년이나 걸린다는 뜻. 그런데 주식시장에 거품이 많이 끼어 ‘비합리적인 과열’이 발생하면 이런 투자가 만연하게 됨.
엔론의 경우 : 이 회사 주식의 거품이 한창일 때 주당 90달러였으나 거품이 터지자 주당 36센트로 폭락. 2001년 그 회사가 무너져 내리는 동안, 주주들이 소유했던 가공자본 600억 달러가 순식간에 사라짐.
체제의 전반적인 위기가 얼핏 보면 단순히 금융 및 화폐 공황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본주의 체제 전체의 이윤율 하락의 위기. 그러나 어느 자본주의의 위기도 영원하지는 않음. 우리의 시급한 학습과제는 자본주의가 공황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어떤 메커니즘을 동원하는가를 설명하는 것.
‘창조적 파괴’: 자본주의가 사람들을 빠뜨려 배를 바로 세우는 방식
자본주의의 위기는 공장, 사무실, 광산, 제철소 같은 것을 폐쇄함으로써 과잉자본을 청소함. 금융위기는 그런 자본의 파괴가 일어나도록 돕는 데 매우 핵심적인 역할을 함. 어떤 기업의 주가가 극단적으로 폭락하면 그 기업은 오히려 쉽게 망하거나 팔릴 가능성이 높아짐.
기업이나 은행이 더욱 대형화될수록 자신의 죽음을 예방하기 위한 수단을 더 많이 동원함. 사업의 확장을 통해 적자를 모면하기 위한 시간을 버는 것, 경쟁업체와의 인수합병, 은행 빚 돌려막기 등. 이에 더해 파산 직전의 기업과 은행을 국가가 구제하기도 함. 이들이 망하면 전체 경제에 대파국이 올 것이라는 논리. 그러나 이런 개입의 결과 전체 체제가 다시금 팽창하는 데 필요한 ‘창조적 파괴’를 못하게 가로막음. 이것은 “위기로부터 불경기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일종의 혈전증을 유발”(프레오브라젠스키). 자본의 파괴를 방지함으로써 불경기가 덜 잔인해진 대신, 파괴를 통해 새로운 자본 증식의 조건을 재창조 할 수 없게 됨. 결과적으로 제2차대전을 불러오게 됨. 2차대전을 통해 새로운 자본축적의 조건을 형성할 수 있게 됨.
4장. 금융 대혼란: 후기 자본주의에서의 화폐, 신용, 불안정성
금융 부문, 특히 이윤 획득을 위한 부채의 창조는 최근 수십 년 사이에 돈벌이 되는 사업으로 떠올랐다. 1973년 당시 미국 경제에서 금융 수익은 전체 이윤의 16%에 불과했지만, 2007년에 41%로 증가함. 그 때문에 이윤 급상승이란 경제 전반에 걸쳐 오히려 총부채가 상승했다는 것을 의미. 일례로 앨런 그린스펀이 연준 의장으로 재직하던 동안(1987~2005), 미국의 부채 총액은 10조 달러 수준에서 43조 달러로 증가. 이를 두고 주류 학자들은 소비자들의 과소비를 탓하지만, 같은 기간 소비자 부채는 두 배가 증가한 반면, 금융 부문 부채는 5배 증가. 채무에 기반한 경제가 경제성장의 새로운 동력이라는 생각이 차용 경쟁에 불을 붙인 것.
이를 두고 ‘금융화’가 진전되었다는 평가를 하기도 하지만, 이 중대한 경제구조 변화를 설명할 때 금속, 철강, 석유화학과 같은 전통적인 경성 상품들보다는 지식, 정보, 상징적 자산 등에 기반한 신경제의 탄생이라는 측면만 부각시킴. “파이프라인이나 전선, 발전 설비 같은 것에 의존하지 않을 것이다. 그 대신 지적 자본에 의존하게 될 것이다.”(제프리 스킬링, 엔론 회장). 그러면서 엔론은 다른 사업자들이 깔아 놓은 통신망에 대한 접근권만 구매함으로써 실제 인프라 구축의 진전을 가로막음.
뒤메닐, 레비 등은 1970년대 말 ‘금융 쿠데타’가 발생하여 은행가들이 정부나 사회보다 우위에 서게 되어 금융 규칙들을 다시 작성했다고 평가. 그러나 자본주의는 마치 프랑켄슈타인이 만들어 낸 괴물처럼 더 이상 통제가 불가능해진 하나의 소외된 체제. 어느 누구도 자본주의를 실제로 통제할 수 없음. 공황이 한 번 닥치면 은행이나 증권시장은 순식간에 수십조를 날리는데 그런 위기를 유발하는 체제를 은행가들이라고 일부러 불러들일 이유는 무엇인가?
후기 자본주의를 지배하는 것이 은행이라는 견해를 갖고 있다면, 진보 진영의 경제적 시야는 금융을 길들이고 통제하는 데로 좁혀질 것. (기생계급과 생산계급 사이의 투쟁?) 반대로 금융화를 여전히 일터에서 노동력의 착취에 의존하고 있는 자본주의 경제 안에서 발생한 하나의 변형된 형태라고 묘사한다면, 은행에 대한 저항 투쟁은 자본주의적인 착취 공간을 문제 삼고 비판하는 정치 활동의 한 부분. 우리는 금융이라는 회로와 노동 착취 사이의 상호 연관성을 설득력있게 설명해야 함.
세계 금융이 영원히 변화한 날
화폐의 안정성은 투자가들이 장래의 투자를 경정하는 데 있어 가격 변동을 예측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중요. 1870년대에 대부분의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은 영국의 선례를 따라 금 본위제를 채택. 이후 대공황과 2차대전을 겪으면서 주요 강대국들은 새로운 달러-금 본위제를 만드는데 합의. 2차 대전 이후 미국 경제는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아 다른 강대국에 비해 막강한 경제력을 확보. 다른 나라들은 미국 상품을 구매하기 위해 달러가 필요했고, 이것이 달러의 기축통화로서의 지위를 보장.
수십년 만에 북반구 다른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경제는 미국에 대적할 만큼 성장. 독일과 일본의 성장이 두드러짐. 미국의 해외직접투자의 급증과 해외 미군기지 및 무기 구입 등 국방비 지출의 증가로 인한 미 달러의 지속적이 유출은 구조적인 국제수지 불균형 초래. 미국은 달러가 기축통화라는 점을 이용해 달러 발행을 늘림으로써 무역적자를 해소하려 했으나 역부족.
이제 각국으로 유입되어 넘쳐흐르게 된 미 달러는 유러달러 시장의 탄생을 촉발시킴. 유러달러 시장은 미국 혹은 다른 어떤 국가의 규제도 받지 않고 미 달러를 대출하고 빌릴 수 있는 공간. 이런 역외 금융거래의 팽창으로 미국은 금융시장에 대한 효과적인 통제력 상실.
이런 역외 금융시장과 탈규제화된 통화시장의 성장이 선행한 후, 정부의 금융 탈규제가 뒤이어짐. 정부의 규제 철폐는 당국의 관할 바깥으로 도피해 버린 금융회사들의 자금을 다시 관할지로 끌어들이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일 뿐. 닉슨 대통령의 금-태환 중지선언은 사실상 예정된 수순이었을 뿐.
불안정한 화폐, 휘발성이 높은 금융
금-태환 중지선언으로 인해 통화 불안정성 심화. 여러 나라 통화를 사용해야 하는 사업가들 입장에서는 투자비용 또는 영업수익의 규모를 예측하는 것이 더 어려워짐.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다양한 ‘위험 관리’ 기법이 등장. 한 국가의 통화가치의 급격한 하락은 다국적기업의 투자를 수포로 돌릴 수 있는 것이기에, 이런 통화 변동으로부터 투자자를 보호할 울타리, 즉 헤지hedge가 등장.
외환거래자들은 어떤 통화가 약세이고, 어떤 통화가 강세인지를 정확히 예측만 할 수 있다면 실질 투자의 위험을 감수할 필요 없이 막대한 이윤을 챙길 수 있게 됨. 통화시장이란 말 그대로 돈이 돈을 버는 자본주의 유토피아를 구현.
파생상품 거래는 본래 미국 농업분야에서 먼저 시작된 것. 곡물상이 곡물수요 증가를 예측하여 농부에게 내년도 특정 시점에 곡물거래를 하겠다는 약정을 미리 하는 것. 이러한 선물계약을 통해 농부 입장에서는 미리 안정된 소득을 확보할 수 있고, 곡물상 입장에서는 추수 이후 곡물가가 상승한다면 그만큼 이득을 볼 수 있는 것. 이를 통해 농부는 재해에 따르는 농사의 위험성, 곡물상은 일정한 가격선 확보라는 면에서 서로의 위험을 상쇄한 것. 금융불안정의 심화는 이런 시스템을 금융시장에도 적용시킴. 미국에 들어온 다국적기업이 달러가치 급락에 대비한 파생상품을 미리 구입해 놓으면, 달러가치가 하락해도 미리 정해놓은 환율로 달러를 자국 화폐로 교환이 가능해지는 것. 달러가치가 오른다고 해도 계약 비용만 지불하고 오른 가치대로 팔 수 있어 어차피 이득이 되는 셈.
은행 금리 변동에 대비한 스왑 상품도 등장. 이런 파생상품 시장의 규모는 순식간에 주식시장, 채권시장의 규모를 초과해버림. 주요 은행가들이나 경제학자들은 이 모든 것이 세계시장의 효율성이 증대한 것이라고 평가.
부채, 증권화, 그리고 금융 공황
금융 폭발의 두 가지 결정적 국면: ①미국 바깥에서 유통되는 달러량의 지속적인 증가 ②주기적으로 경기침체에 빠진 경제를 구제하기 위해 정부가 취한 경기부양책으로 인해 전세계적 통화 공급 증가. 이 증대된 통화의 대부분은 은행으로 흘러들었는데, 경기후퇴로 인해 대출 수요는 통화 증대에 미치지 못함.
오일 쇼크로 인해 제3세계 국가들이 급하게 돈을 빌리려 함. 이에 서방 은행들은 제3세계를 향해 대출잔치를 벌임. 그런데 미 연준의 폴 볼커가 1979년 인플레를 잡겠다는 명목으로 금리를 20%로 인상시켜 제3세계 ‘부채위기’를 유발. 이에 IMF, 세계은행 등이 구제금융을 앞세워 이들 나라에 구조조정 프로그램 강제. 볼커 충격을 통해 인플레가 진정되자 점자 금리도 하락하게 됨. 이에 글로벌 부자들은 다양한 파생금융상품에 대한 투자를 통해 새로운 수익 창출에 뛰어 듦.
이제 은행들은 대출이자와 예금이자의 차액을 통해 수익을 올리는 전통적 기법에서 탈피하여 대출을 담보로 한 증권을 만들어 파는 것을 통해 수익을 창출. 이를테면, 주택융자를 판매한 즉시 그 대출 기록을 회계장부에서 뻬버리고, 이를 다른 투자은행 등에 판매. 채무자의 채무불이행에 따르는 위험은 이 투자은행에 넘기고 단지 수수료만 챙기게 됨. 이런 방식은 주택 뿐만 아니라 신용카드, 부채, 자동차 등으로 번져감. 은행들이 채무불이행 위험을 떠맡지 않는다는 것은 은행들이 자기들이 판매한 융자대출채권을 다시 구매하지 않을 때에는 그렇겠지만, 어리석게도 꽤 많은 은행들이 그러한 실수를 범함.
이전 같았으면 금융위기의 징후가 강하게 드러날 때에는 중앙은행등이 나서 이를 수리하지만, 금융 팽창의 시기에는 이런 통제가 작동하지 못함. 전산화된 통화 거래체계는 정기적으로 자산 거품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위기에 대응.
2000년대 초반 닷컴 기업의 거품 붕괴에 대응하겠다고 연준 의장 앨런 그린스펀은 수 차례 이자율을 낮춰 부동산 분야의 거품을 키움. 2003년에는 이자율이 1%대로 낮아졌고, 이에 힘입어 주택융자 증권화의 규모는 천문학적으로 증대. 이를 통한 수익 증대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가난한 흑인, 남미 출신 등에게까지 주택융자를 팔게 됨. 이후 이자율이 솟구치면서 위기 도래. 그러나 대다수의 은행들은 근거 없는 수학적 모델에 현혹되어 자신들이 팔고 있는 악성 채권을 맹신함. 주류 논평가들은 빈곤층이 자신들의 자산능력을 넘어선 대출을 했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매도했지만, 오히려 문제는 은행들의 공격적인 대출판매. 이 과정의 태반이 속임수와 조작.
채권 투자에 대한 위험을 상쇄시키기 위해 신용부도스왑CDS 등장. CDS를 판매한 금융 회사는 고객이 투자한 회사가 부도가 나는 경우 투자한 돈에서 하나도 손해를 보지 않게 모두 보상해 주겠다고 약속. 이는 회사가 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을 때나 가능. 은행들은 이런 금융상품을 자격심사도 하지 않고 대량으로 판매. 사람들은 끊임없이 투자한 회사 또는 채무자가 채무불이행 상태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는 내기를 하게 되는 상황. CDS는 이 내기에 대한 일종의 보험.
1995년 이전까지 미국 주택가격은 물가 상승률과 비례. 그러나 그 이후로는 소비자물가지수보다 주택가격이 70%나 빨리 상승. 이는 기존의 역사적 패턴과도 다를 뿐만 아니라 명백히 지속 불가능한 것. 그럼에도 투자 회사는 신용도가 좋지 않은 사람들에게까지 강요하다시피 주택융자를 판매함.
은행들의 고전적인 딜레마는 이윤율의 저하. 수많은 은행들이 똑같은 상품들을 많이 만들어 내다 보니 이윤 마진도 낮아지는 것. 이에 대한 일반적인 대응은 재무 레버리지 비율(자기자본에 대한 대부자본의 비율)을 높이는 것. 2001년 메릴린치의 레버리지 비율은 16대 1이었으나 2007년에는 32대 1로 증가. 모건스탠리와 베어스턴스도 33대 1. 이는 만약 채권자들이 대부 자금의 3%만 되돌려 달라고 요구해도 그 기업은 금방 망한다는 것. 이런 일은 2008년에 실제 일어났음. 문제는 금융권 전체의 이윤 마진을 줄이도록 압박하는 체제 전반의 문제.
“사기꾼보다 멍텅구리가 더 많아”: 위험, 숫자 물신주의, 범지구적 대폭락
시티은행 등은 그들이 판매하는 주택담보부증권을 맹신한 나머지 상품 계약 내용 속에 ‘유동성 판매 조항’까지 포함시켰다. 이것은 주택담보부증권 시장이 얼어붙는 등 비상 상황이 닥치는 경우, 판매한 은행이 그 증권을 도로 사주겠다는 약속이다. 결국 시티은행은 자기 덫에 걸려 결국 250억 달러에 이르는 쓰레기 악성 증권을 되사야 했다. 이렇게 시장 상황이 악화되는 것이 뻔한데도 파생금융상품에 목을 메는 은행들의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파생금융상품에 활용된 현대적인 수학적 위험 관리 기법은 투자 위험을 줄이는 데만 사용된 게 아니라 아주 공격적인 투기 전략을 구사하는데도 활용. 이러한 투기 전략은 오히려 위험을 극도로 증가시키는 결과를 낳음. 현대 재무금융 이론은 효율적 시장 가설을 바탕으로 작고 임의적인 가격 운동은 그 중심을 향해 운동하여 실제 가치를 합리적으로 반영한다고 본다. 즉 이들은 자연 세계에 기초한 모델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다. 이런 주류 경제학은 균형이 완전히 무너지는 경우를 설명한 이론적 능력이 없다. 실제로 1987년 미국 주식시장이 폭락했을 때, 금융기법 전문가 두 명은 그 폭락은 ‘통계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라고 증언. 이 것이 주류 학자들이 할 수 있는 설명의 전부.
파생금융상품은 질적으로 서로 다른 현실의 모든 위험을 단일한 측정 단위를 사용하여 가격을 표시하고자 한다. 기후변화가 플로리다 오렌지 수확에 미치는 영향, 볼리비아 모랄레스 정부가 탄화수소 산업을 국유화할 가능성, 미국의 주택경기 추락 가능성은 모두 질적으로 다르지만 금융권은 이를 모두 동일한 숫자로 압축한다. 또한 모든 시점들이 본질적으로 동일하다고 보는데, 즉 내일은 어제나 오늘과 동일한 것으로 본다. 그래서 위험 가치 측정은 길어야 몇 주를 넘기지 못한다. 이들의 ‘장기적 시각’에 의한 평가조차 1~2년 전부터의 데이터를 사용할 뿐.
그러나 주류 경제학 이론의 붕괴는 실상 그 이상의 것이 붕괴했음을 의미. 왜냐하면 사람들이 그 동안 평생 저축한 것, 일자리, 희망, 꿈 등이 모두 같이 붕괴했기 때문. 금융 도표 및 그래프의 등락 속에는 사람들이 실제로 느끼는 고통이 잠복해 있는 것.
3. 생명정치, 벌거벗은 생명, 페미니스트 윤리
1. 문제제기
국가 권력의 성격을 분석한 아감벤에 따르면, 국가의 주권은 폭력과 법을 정확하게 구분할 수 없는 지점, 즉 폭력이 법 안으로 들어가고 법이 폭력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위치한다. 국가 권력의 본질이 법과 규칙의 실천보다는 법과 규칙이 적용될 수 없는 예외 조항을 만들고 그 예외 조항에서부터 다시 법칙을 만들어 내는 것일 때, 우리 모두는 잠재적으로 법이 적용되지 않는 예외에 속하는, 이른바 주권에서 배제된 벌거벗은 생명일 수 있다.
지구화 과정에서 폭력의 새로운 징후는 바로 사회적 생명(비오스)과 벌거벗은 생명(조에)이 분리됨으로써 일어난다. 페미니스트 윤리는 개인 안에 그리고 사회 집단들 간에 분리된 사회적 생명과 벌거벗은 생명을 통합하려는 데 있다. 내 안에 존재하는 벌거벗은 생명의 잔여적 생명을 직시하고 사회적 생명과 벌거벗은 생명이 통합된 나를 인정하는 것, 타인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사회 집단 간의 관계에서 사회적 생명과 벌거벗은 생명의 구분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사회적 생명과 벌거벗은 생명의 통합을 위한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이 생명정치시대에 페미니스트 윤리의 지향점이다.
2. 생명정치와 벌거벗은 생명
아감벤은 푸코의 생명정치에 대한 논의를 발전시켜 국가권력이 예외의 공간을 갈수록 확장함으로써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벌거벗은 생명으로 환원될까 봐 두려워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누구라도 언제라도 예외적인 공간에 놓일 수 있고, 벌거벗은 생명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불안을 갖는다는 것이다.
아감벤은 오늘날 국가 권력과 대칭되는 위치에 있으면서 절대적인 기본권으로 간주되는 생명의 신성함이란 것이 사실상 생명이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버림받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생명정치는 규범적 시민과 벌거벗은 생명으로 생명을 구획한 후 벌거벗은 생명에 대한 포함적 배제에 근거해 권력을 행사한다. 벌거벗은 생명의 존재는 규범적 시민이 존재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국가 폭력의 대상으로 국가 안에 포섭된다. 촛불 시위는 국가 주권의 생명정치에 대항하여 규범적 시민(비오스)과 벌거벗은 생명(조에)의 통합을 실현하는 운동이었다.
정부가 촛불 시위 기간에 통치권의 위기를 맞게 된 것은 대부분의 규범적 시민들을 벌거벗은 생명으로 범주화하는 정책을 보였기 때문. 미국산 쇠고기를 안 사 먹는 선택을 할 수 있는 시민들은 규범적 시민의 범주에서도 소수 집단에 불과함. 이 과정에서 시민들은 스스로가 벌거벗은 생명의 범주에 들어갈 위험에 처했다는 것을 알게 됨.
3. 벌거벗은 생명과 여성
지구화 과정에서 젠더 배열은 국민 국가 내의 생명정치와 상호 교차해 벌거벗은 생명의 여성화를 가져온다. 국가의 예외적 공간의 설정이 젠더와 인종 배열에 따라 진행될 뿐 아니라, 지역 내 위계적인 사회 체계들과의 상호 교차를 통한 확산 역시 젠더 배열에 따라 진행되기 때문이다.
1) 포함적 배제 공간의 확산
2004년 밀양 고교생 집단 강간 사건의 상홍은 한국 사회의 위계 체계들이 어떻게 상호 교차하면서 배제적 포함의 영역을 설정하고 그 영역에 속한 개인을 벌거벗은 생명으로 환원하는지를 잘 보여 줌. 이 때 적용 범주의 기준은 지역, 계급, 가족, 젠더, 섹슈얼리티 체계 등이다.
①지역체계: 밀양지역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는 집단 강간당한 여중생의 섹슈얼리티가 비정상적인 것임을 부각해야하고, 그런 비정상적인 섹슈얼리티를 지닌 여학생이 밀양 출신아 아니라는 것을 강조. 한편 누리꾼들 사이에서는 밀양 촌동네에서 벌어진 사건이라는 것을 강조하여 서울과 지역의 구분을 강조. ②섹슈얼리티 체계: 정상적인 성의 범주를 ‘순결’한 이성애로 규정하고 피해 여학생의 성을 비정상적 성으로 배제할 때, 이 섹슈얼리티 체계는 밀양을 도덕과 예의 고장으로 타 지역과 차별화하려는 구도를 지원하는 형태로 작용. ③계급 체계: 경찰은 수사과정에서 41명의 남학생을 세워 놓고 이름을 말하면 손가락으로 누군지를 가리키라고 하고, 한 명 한 명을 마주하면서 “넣었냐, 안 넣었냐”를 묻기도 함. 언론과 경찰이 피해자에게 이렇게 폭력적이어도 된다고 생각한 것은 저소득 계층의 인권과 사생활은 보호의 대상이기보다 개입의 대상으로 간주되기 때문. 기타 등등....
2) 이미지 유통의 정치화 무관심의 확산
이미지 홍수의 시대에 우리는 이미 온갖 혐오물에 익숙해져, 현실 속의 고통의 이미지에 대해 점차 무감감해지고 있다. 타인의 고통의 이미지를 단지 구경할지 말지를 선택하는, 뉴스 소비자의 마음으로 전환되고 있는 것이다.
타인의 극한적 고통의 이미지들을 읽을 때의 주된 반응(수전 손택) : ①평화주의자의 태도(‘우리’는 충돌과 직접 관계가 없는, 원거리에 있는 제3자의 위치에 있고, 특정 국가/집단의 역사와 정치를 제거한 추상적 시선으로 평화를 촉구) ②옳고 그름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갖고 있는 ‘우리’(고통의 이미지는 ‘정체성’을 뜻함. ‘우리’는 고통의 이미지를 읽으면서 오히려 전의를 불태우고 복수와 정의를 실현할 것은 주장) ③무서운 이미지에 ‘넋이 나간 상태’(전쟁/충돌에 대해 순진함과 피상성, 무지를 드러냄)
손택은 이러한 반응이 사실상 전쟁과테러와 충돌을 지속시키는 기제라고 지적. 우리는 주어진 고통의 이미지에서 누구의 이미지가 보이지 않는지, 누구의 잔인함이 보이지 않는지, 누구의 죽음이 보이지 않는지 질문하는 것이 중요함.
벌거벗은 생명의 고통의 이미지들을 보고 동정심을 느끼는 한 우리는 적어도 고통을 야기한 동조자는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그 고통에 대해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우리의 무능력을 말해 주기도 한다.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될 때 우리는 지겨워지고, 빈정대고, 무감각해지기 시작한다. 손택은 벌거벗은 생명의 이미지에 대해 그 고통과 상상적 유사성을 느끼면서 타자와 연결되려는 것은 현실의 권력관계를 단지 신비화할 뿐이라고 말한다. 벌거벗은 생명의 이미지가 진정으로 우리를 자극하는 경우는 그들의 고통과 우리의 특권이 같은 국면에 놓여 있을 뿐 아니라 연결되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할 때다.
한편 이라크의 아부그라이브 수용소에서의 포로 고문 사진은 벌거벗은 생명의 고통의 모습을 무제한으로 드러낸다. 아부그라이브 수용소의 고문의 내용은 여성의 몸을 가리는 것을 규범으로 하고 있는 이슬람 여성에게는 나체로 있게 하는 고문을, 이슬람 남성에게는 여성의 팬티를 머리에 씌우고 동성 간의 성교를 강요하는 고문을 한 것이다. 이들은 이미 개인의 정체성이 지워진 ‘벌거벗은 생명’으로 환원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고문은 포르노적 성격을 띠고 있다.
버틀러는 이를 지구화 과정에서 권력이 작동하는 새로운 방식에 성 정치가 복무하게 된 것으로 분석한다. 그동안 성 정치는 남녀평등을 주장하고 강압적 이성애성을 비판함으로써 진보 정치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되었고, 여기서 ‘진보’란 근대성의 역사, 즉 진보와 합리, 이성의 역사성에 위치한 것으로 상징되었다. 그러나 버틀러는 최근의 지구화 과정에서 성정치의 진보성이 근대적 시간대를 상징하는 위치에 놓이면서 근대적 시간대 밖에 놓여 있는 대부분의 공간을 미성숙한 전근대의 시간대에 놓는 데 전유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말하지면 여성의 사회 진출과 동성애의 인정을 진보와 근대를 상징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그 상징을 무기로 하여 타 시간대를 타자화 한다는 것이다.
4. 벌거벗은 생명과 페미니스트 윤리
근대 국가는 생명정치의 구도에서 생명에 형식을 부여해 사회적 생명과 벌거벗은 생명으로 구분한 후 전자를 시민의 자격으로 국가의 기획에 포함하고 후자를 벌거벗은 생명으로 배제적 포함의 영역에 포획한다. 이 때 우리에게는 완전한 시민으로 국가의 보호 아래 놓이거나, 벌거벗은 생명으로 환원되거나, 생명정치의 구도 자체에서 탈주하는 세 가지 길이 주어진다.
이 세가지 길을 넘어서는 대안적 전망. 첫째로는 애국주의와 대척점에 있는 세계 시민주의를 추구하는 것(너스범). 둘째로는 문화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시작과 끝을 폭력적으로 설정하는 목적론 바깥에 있는 시간대를 사유할 수 있어야 함(버틀러). 즉 글로벌 주체로 ‘소수자’범주를 제안하면서 시민과 비시민을 가로지르고자 함. 셋째로는 권리 개념을 수정하여 신자유주의 지구화에 맞서는 기획을 하고(사적 소유권을 부수적인 권리로, 언론과 표현의 자유 및 공유물과 식량 안보에 대한 권리를 우선적인 것으로), 소수자들의 연대만이 아니라 기존 체제 내의 비판적 분석도 이와 결합하는 것(하비).
이 세가지 전략은 입장의 충돌을 보여주기보다는 대응 전략의 순서의 문제. 생명정치의 억압성에 대한 미시적 분석(버틀러) -> 체제 내에서의 보편적 인권개념에 기반을 두고 국민국가의 억압성 견제(너스범) -> 체제 내외의 모든 저항 운동간의 연대를 통한 체제 자체의 재구성(하비).
페미니스트 정치학에 걸맞는 페미니스트 윤리는 어떤 특징을 갖는가? ①푸코의 윤리적 주체성: 화자와 청자 사이에 위계적 관계를 형성하지 않고 오히려 청자가 화자를 선정하며, 청자는 화자의 주장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청자와 화자가 어떤 규범이나 정상화의 권위를 통해서가아니라 서로 함께 진실함을 추구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 권위를 만들어 가는 것. ②버틀러의 윤리적 주체성: 언어화 되지 않은 타자의 ‘얼굴’을 통해 타자가 놓인 극도의 위태로움을 알아차리는 것. 우리가 해야 할 작업은 이러한 ‘얼굴’을 비인간적인 것으로 만들거나 아예 삭제함으로써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만드는 규범적 권력을 바꾸어 내는 일.
버틀러는 우리가 폭력을 경험했을 때 즉각적인 보복의 자세를 취하는 대신 우선 그 폭력에 애도를 표함으로써 인간성을 찾아내는 노력을 기울일 것을 제안한다. 즉각적인 보복은 폭력에 따른 상실을 비현실화함으로써 오히려 이간의 고통과 죽음에 무감각하게 하며, 그를 통해 비인간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5. 맺음말
생명정치가 젠더와 인종 배열에 따라 재편되고 있는 지구화 회로와 만날 때 벌거벗은 생명의 여성화가 일어난다. 국가의 예외 공간의 설정이 젠더와 인종 배열에 따라 진행될 뿐 아니라, 위계적인 사회 체계들과의 상호 교차를 통한 확산 역시 젠더 배열에 의해 진행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과제는 일상의 삶에서 규범으로 규정되지 않은 벌거벗은 생명의 경험 세계를 드러내고 드러나지 않은 ‘얼굴’을 보고 들을 수 있게 하는 것, 그리고 시민권과 인권의 긴장 관계를 통해 ‘시민’의 자기 성찰을 고양시킴으로써 시민과 벌거벗은 생명의 경계를 조정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되는 것, 마지막으로 체제의 안과 밖을 가로지르는 연대의 구성을 모색하는 것임.
4. 지구화와 공공성의 변화
1. 문제제기
우리는 지구화 과정에서 폭력성의 새로운 징후를 목격한다. 9.11사태 이후 아부그라이브 포로수용소 고문 사건, 김선일 씨의 죽음, 여수 외국인보호소 화재 사건 등에서 볼 수 있듯이 국가의 주권이 미치지 않는 새로운 정치적공간의 확산과 거기서 파생되는 폭력은 우리에게 지구화 과정에서 근대 국가와 폭력의 관계에 대해, 그리고 여성은 이폭력성과 어떻게 직면하는지에 대해 새로운 의문을 갖게 함.
공공성 변화의 주요한 두 측면: ①국민 국가 단위의 근대적 공/사 구분이 약화되고 젠더, 계급, 인종, 국가가 상호 교차하는 상황에서 계급 정체성을 형성하기는 더욱 어려워진 반면, 여성 경제인구 증가와 함께 부상한 여성 비정규직화의 문제 ②정치적으로 국가 권력은 국가의 주권이 적용되지 않는 배제의 공간을 확장함으로써 배제의 공간을 지배하는 생명정치가 확산.
여성운동은 국지적 장에서 공/사 구분을 넘어선 여성들의 삶의 방식을 반영하는 공공성의 새로운 기준을 주장하는 한편으로, 공공성의 영역을 잠식하는 배제의 공간이 확산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성해야 함.
2. 공공성 변화 논의의 배경과 의미
페미니즘은 공/사 구분의 논리가 젠더 체계를 고착화한다고 비판함. 이에 대한 대안으로 페미니스트들은 사적 영역과 여성이 짝을 이루는 것을 해체하고자 함(여성의 정치적 시민권 강화 운동). 그러나 이것은 공/사 영역 구분 자체를 문제 삼지 않고, 더 많은 여성이 공적 영역에 진출하는 것을 목표로 삼음. 대다수 여성들의 공적 영역 진출은 충분한 사회권과 시민권 획득으로 연결되지 않으며, 이들의 공적 영역 진출은 여성 대다수의 삶에서 사적 영역과 단절된 형태의 공적 영역 체험이 아니다.
두 번째 페미니스트적 대안은 여성들의 체험을 반영해 공/사 영역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것은 여성들이 그간 사적 영역에서 수행한 돌봄노동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으로 구체화된다. 이 대안은 주류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최근 지구화와 함께 ‘생존의 여성화’가 가속화되면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지구화는 금융, 생산, 무역, 통신이 통합된 세계를 구축하는 ‘기술 근육 자본주의’와 대부분 여성 이주 노동자가 제공하는 돌봄 노동의 ‘노동 친밀성 체제’라는 두 과정으로 구분한다. 이 과정에서 국가는 기술 근육 자본주의화에 대해서는 국가의 역할을 축소할지 모르나, 노동 친밀성 체제화 과정에서는 국가의 역할을 강화한다. 노동 친밀성 체제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통해 생물학적 생명을 감시, 관리하는 역할이 국가의 목적으로 부상하는 것이다.
아감벤은 현대에 들어올수록 예외 상황은 점점 더 전면으로 부상해 예외 상황이 근본적인 정치 구조가 되고 궁극적으로 예외 상황이 법칙이 되기 시작했다고 주장. 이렇게 예외상황의 특수성이 상실된 조건에서 법칙은 특수성을 상실하지만, 국가는 이 ‘의미 없는 법률’을 여전히 강요하는데, 이에 대응하는 개념이 바로 ‘벌거벗은 생명’이다. 사회적 존재인 인간이 개념상 ‘자연 그대로’의 정체성 혹은 ‘동물적’ 정체성으로 격하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초월적 의미는 사상되고 인간이 가진 것이라곤 오직 생명뿐인 존재로 환원되는 것을 말한다.
3. 공공성 변화의 두 방향
지구화는 전 지구적으로 ‘핵심 지역’을 연결하면서 이들 지역 간의 공통점이 각 국가 내부의 지역 간 공통점보다 더 많아지는 현상을 초래한다. 이 핵심 지역 연결망에 포함되지 않은 ‘죽은 땅’은 제3세계뿐 아니라 서구 세계에도 등장하며, 따라서 영토에 근거한 국가 단위 주도의 냉전 정치는 무력화될 것으로 전망한다.
1) 기술 근육 자본주의와 노동 친밀성 체제
제3세계 여성의 시선으로 봤을 때 지구화에는 세계적 거점 도시들 안에서 백인 남성 중심으로 전개되는 기술 근육 자본주의과정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와 짝을 이루는 것으로 지구적 차원에서 돌봄 노동을 담당하는 노동 친밀성 체제의 과정이 상존한다. 노동 친밀성 체제는 아시아 여성들을 ‘서비스를 체현한’ 사람들로 인식하게 하고 있지만, 글로벌 계급과는 달리 이들 여성들의 주체성은 표현할 언어, 수사, 담론 목소리까지 없어지면서 침묵된다.
필리핀의 경우 1992년도에 전체 외화 획득의 25%를 주로 여성으로 구성된 이주노동자들로부터 거두어들이고 있다. 이들은 필리핀의 필수적인 수출상품이다. 한편 이주 여성을 받아들이는 국가 역시 노동 친밀성 체제의 유지, 강화에 공모하는데, 홍콩 정부는 외국인 가정부가 최소 2년간 한 고용주에게 고용되어야 하며 상시 재택근무할 것을 의무화한다.
이주여성의 행위성의 차별화 : 조선족 기혼 여성들은 유입국인 한국 사회와 고향인 조선족 사회 양쪽에서 느끼는 차별과 편견에 저항하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형성. 자신들을 전근대적인 존재로 인식하는 한국 사회의 시선에 대응하기 위해 중국으로 돌아가면 자신들이 소속될 부유 계층으로 스스로를 규정함으로써 행위성을 확보. 또한 모성과 아내로서의 섹슈얼리티를 지키기 위해 자녀의 모든 교육비와 장래에 대한 투자를 전담. 홍콩에서 상주 가정부직에종사하는 필리핀 여성들도 성적으로 문란하다는 인식을 불식시키기 위해 성당에 다니며 도덕적 정체성을 확보하고, 여성 간의 동성애를 발전시킴으로써 오랜 외국 체류에 따른 외로움을 해소하면서 동시에 홍콩 사회와 필리핀 사회 양쪽이 갖고 있는 자신들에 대한 성적 의심을 벗어나려고 함. 차이점이라면 필리핀 여성이 조국에서 애국자로 의미화하는데 비해 조선족 여성은 중국 내에서도 소수민족인 조선족의 해체로 여겨지는 차이점이 있음.
(기타 다양한 이주 여성의 사례 소개)
이러한 지구적 재편에 따라 이주 여성들은 노동자 정체성이 구성되기보다는 자신과 가족, 이웃의 생존을 위해 기존의 생산과 재생산 노동의 경계를 넘나들 뿐 아니라 노동/성/가족의 경계를 넘나드는, 새로운 형태의 여성 주체의 탄생을 보여준다. 여기서 여성운동의 과제는 지구적 차원의 젠더 배열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한편으로, 지구적 젠더 배열과 지역에서 여성들의 삶의 조건을 연결할 수 있는 문화 번역의 책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
2) 국가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
2007년 2월 여수 화재 참사 사건에서 나타난 이주노동자들의 실태는 이들이 전적으로 벌거벗은 생명, 오로지 생물학적 생명만을 유지한 비시민으로 여겨졌음을 보여줌.
이라크 아부그라이브 포로수용소에서 발생한 고문 사건은 한편으로 성 정치를 내포하고 있었음. 미국 여군이 나체의 아랍 남성 포로의 목을 묶은 가죽끈을 잡고 웃고 잇는 이미지는 이 사건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음. 이 사건의 형상화에 여성 인물을 배치함으로써 이 사건의 주범이 ‘여성’이기 때문에 문제라는 식으로 몰아갔으며, 이로 인해 미국 정부의 행동을 사사로운 것으로 만드는 효과를 낳았음.
국가의 본질이 이와 같은 법이 적용되지 않는 예외 집단을 상정하는 것이라고 할 때 국가에게 이들을 보호해 줄 것을 요구하는 것이 과연 현실적인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됨. 이에 따라 국제적 수준에서 수용소 내 체류민의 보호는 시민이 아닌 인간의 보호라는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그러나 이렇게 인식이 전환되려면 국민 국가와 전 지구적 공동체 사이의 갈등과 충돌을 직시하고 공존 방식을 구체화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래서 구긴 국가의 폭력성에 대한 여성운동의 접근은 지역적 차원과 지구적 차원을 연결할 수 있는 ‘인권’개념의 번역 가능성에 있으며 이 번역 과제에 젠더 배열을 반영시키는 데 놓여 있다고 말할 수 있다.
4. 지구/지역 번역으로서의 여성운동
생명정치의 폭력성을 인식하는 여성운동의 틀을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지구화 과정에서 서구 중심의 단일한 규범 체계로 재편되기를 거부하고 문화적, 지역적 다양성이 공존할 수 있는 규범과 윤리의 설정을 모색해야 함. 여기서 지역의 여성운동을 지구적 질서와 소통시키는데 층위가 다른 두 차원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의 문제, 즉 번역의 문제가 쟁점으로 떠오른다.
문화 번역은 “타자의 언어, 행동 양식, 가치관 등에 내재화된 문화적 의미를 파악하여, ‘맥락’에 맞게 의미를 만들어 내는 행위‘를 말함. 이 과정에서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따라 언어들 간의 권력 차이를 좁힐 수도 넓힐 수도 있다는 점에서 그 자체가 권력행위가 됨.
인권은 종교와 민족성에 근거한 지역의 의미망 안으로 번역되어야 하며 합법적이고 호소력있게 설정되어야 한다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운동가들은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인권 용어들을 차용함으로써 후원자들을 만족시켜야 하는 딜레마가 존재. 그럼에도 여성운동이 지구/지역 번역의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 이유는 인권이 그 기원과 암시라는 면에서 유럽 중심적인 개념이지만, 동시에 인권은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도구이기 때문.
5. 맺음말
여성운동은 이 같은 정치 경제적 상황에서 지역적 경험과 지구적 질서를 연결하는 지역/지구 문화 번역의 과제를 향해 나아가야 함. 지구적 차원의 젠더 배열의 중요성을 인식해 지구적 젠더 배열과 지역 여성들의 삶의 조건을 연결하고, 국가의 주권 개념과 무관한 보호의 개념을 제안할 수 있기 위해서는 지역적 경험과 지구적 질서의 상호 소통이 필수적이기 때문.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국내 학자, 평론가들이 각자의 입장을 담아 비평한 책.
그 중 서동진과 노정태의 글을 요약해서 옮겨 봄.
이 윤리적인 사회를 보라
신자유주의적 윤리로서의 정의
서동진
1) 신자유주의의 윤리적 글로벌 스탠더드, 정의
줄리언 어산지의 위키리크스에 대해 평가하며 미국의 보수적 경제잡지 『포브스』는 이른바 “비자발적 투명성”의 시대를 열었다고 평가. 이는 매우 신자유주의적 윤리에 입각한 표현인데, 투명성이란 신자유주의 사회의 부정적 효과를 제어하고 반성하며, 나아가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를 보호하기 위해 고안된 많은 윤리적 덕목에 속함.
이데올로기는 자신이 관련을 맺는 대상을 비호하거나 예찬하지 않음. 오히려 이데올로기는 자신을 유지하기 위한 힘 가운데 하나로서 비판을 동반함. 무엇보다 자유주의는 비판을 애호함. 자유주의는 합리적인 논증을 하는 자신들과 달리, 이를 부정하는 보수주의와 사회주의는 가장 이데올로기적인 이데올로기라며 규탄함. 그러나 이러한 이데올로기가 아닌 척 하는 몸짓이야말로 가장 순수한 이데올로기적 자취.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점은 자유주의가 자본주의를 비판되어야 하는 체제로 반성하면서도 동시에 절대로 근본적으로는 부정하지 못하게끔 하는 비판의 윤리를 어떻게 생산하고 동원해 왔는지를 분별하는 것.
2) 정의의 심판을 내리자구요? 네, 그럼 당장 감사를 합시다! 정의 사회, 감사 사회
자유주의자들은 “사회개선의 과정이란 현존하는 문제에 대해 전문가가 합리적으로 평가하고, 그 평가에 따라서 현명한 사회개혁을 도입하기 위해 정치 지도자가 계속 의시적인 노력을 쏟는 꾸준한 과정이나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보는 이들.
정의의 윤리는 변화된 자본주의 사회를 관리하기 위한 새로운 지도적인 프로그램, 즉 신자유주의를 보완하는 비판정신의 기획. 신자유주의적 전환을 통해 만들어진 변화된 자본주의 역시 자신을 위한 비판의 공간을 열어 놓음. 이에 가장 대표적인 윤리적 규범은 ‘감사’(audit).
감사사회란 책무성이라는 윤리적 규범을 통해 개인이나 기업, 공공부문 혹은 사회운동단체에 이르는 다양한 행위자들의 행동방식 혹은 행태를 관찰, 측정, 평가하고 그 결과에 기반하여 그들을 규제하고 관리하는 것.
신자유주의가 ‘탈규제’를 부르짖는 것은 오히려 규제로부터의 해방을 향한 것이 아니라 사회를 규제하기 위한 새로운 방식을 만들어내는 것. 즉 ‘감사’라는 신자유주의적인 윤리적 규제는, 착취나 불평등 같은 윤리적 규범과는 다른 방식에서 윤리적으로 따져봐야 할 현실을 만들어 냄.
‘책무성’이라는 표현은 노르만왕조의 최초의 토지대장이라 할 수 있는 둠즈데이북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이는 영토 내에 살고 있는 토지 소유자들에 대한 인구조사를 통해 마들어진 것으로, 토지 소유자들을 하나의 총계 즉 계정으로 파악해 재산을 등록시킴으로써 세금을 거두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음. 계정으로 파악된 신민은 집중화된 감사와 반년간의 장부 기재를 통해 왕정에 대한 윤리적인 의무를 다하도록 강제 됨. 즉 회계 활동을 통해 특정한 도덕 공동체가 성립되는 것.
1970년대 후반부터 본격화된 자본 축적의 위기를 경유하며 이런 회계적 실천의 비중이 증대됨. 관치금융을 통해 자본을 조달하던 국내 대자본이 점차 자본시장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자본시장을 지배하는 금융자본이나 주주의 이해관계를 보장해 주는 조치를 받아들임. 기존의 관치금융 등은 ‘정실자본주의’로 비난받음.
공공부문 또한 발생주의적 복식부기 회계를 통한 기장을 도입하고 이른바 ‘기업가적 예산’이라는 새로운 예산제도를 도입. ‘총액예산제도’가은 것은 예산을 사업 집행에 필요한 비용이 아니라 적극적인 관리를 통해 재무성과를 이뤄내야 하는 것으로 다룸. 공무원을 경영자와 동일시하고 공무원들의 비재무적인 자산, 즉 지식과 창의성을 활용하기 위해 정부조직을 학습조직으로 전환하는 것 등이 본격화 됨.
비정부기구(NGO) 또한 책무성의 윤리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 시민사회단체들이 지켜야 할 시민사회단체로서의 규범적인 정체성을 ‘시민사회지표’로 구체화하고, 이를 크게 정당성, 책무성, 투명성으로 구분. 한국의 대표적인 시민사회운동이 ‘정보공개’나 ‘소액주주운동’으로 나타났다는 것은 특이한 현상은 아님.
3) 정의의 윤리인가, 해방의 윤리인가
자크 동즐로에 따르면 주권이 막다른 길에 이르렀을 때 발명한 것이 바로 ‘사회’(the social)임. 이는 출생, 나이, 성별, 직업, 지역사회 같은 다양한 틀을 통해 자신의 삶을 규제하는 법칙을 발견하고 반성하는 개인이 상상하는 사회로서 루소적인 의미의 정치공동체와는 다름. 이에 기반해 사회국가 혹은 복지국가는 공리주의적 개인주의란 이름으로 기존의 자유주의를 비판하며 새로운 윤리적인 모델을 만들어냄. 그것이 바로 ‘연대’로서, 정의의 윤리는 집합적인 책임을 나눠 가짐으로써 이를 통해 탐욕스러운 이기적 개인들이 초래할 수 있는 불의로부터 자본주의를 방어하고자 함.
어떻게 정의의 윤리를 넘어설 수 있을까? 그것은 정의의 윤리가 기반하고 있는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길 뿐. 그러나 그것을 가능케 하는 일은 윤리 자체와 대면하는 것을 통해서는 성취될 수 없음. 윤리는 바로 그 자본주의 자체를 변혁하기 위한 투쟁의 부산물일 뿐.
정의의 딜레마, 딜레마의 정의
노정태
1) 누구를 죽이는 것이 더 공정한가?
우리는 윤리적인 삶을 사는 것을 즐기지 않지만, 윤리적인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 토론하는 것은 좋아한다. 『정의란 무엇인가』가 수십만 부 이상 팔린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된 것에는 다른 점 보다도 사람들이 ‘윤리적 딜레마’ 자체를 즐긴다는 것에 그 이유가 있다.
샌델이 책에서 제시한 첫 번째 윤리적 딜레마(전차 딜레마)에서 공리주의자라면 당연히 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편을 택한다. 칸트적 자유주의자라면 선로를 바꾸거나 뚱뚱한 사람을 밀어버리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여기서 샌델은 갑자기 이 추상적인 비유를 현실(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 은신처를 찾아다니는 미군 사례) 속으로 과감하게 옮겨 놓음. 이 예에서 민간인을 풀어준 것이 미군에게 피해를 주어, 이에 대해 후회한다.
샌델이 말하는 내용, 공동체주의 자체가 아니라, 그가 그 말을 하기 위해 꺼내드는 사례가 이 책을 진정 문제적인 것으로 만든다. 철로에서 누구를 희생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 혹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민간인을 죽여야 하는 가에 관한 문제를 윤리적 토론을 위한 화두로 꺼내드는 것 자체가 하나의 윤리적 판단이다. 칸트가 예리하게 지적했듯이 우리는 이미 그 순간 ‘누구를 죽이는 것이 더 공정한가’를 놓고 고민하며, 그 과정을 즐기고 있음.
2) 권력의 눈높이에 맞춰진 정의의 딜레마
샌델의 딜레마를 대하며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는, 딜레마에 직접적으로 대답하기 보다는 딜레마가 전제하고 있는 상황의 맥락을 가늠해 보는 것. 이를테면 플라톤의 『국가』에서 플라톤의 대변자로 등장하는 소크라테스가 제시하고 있는 ‘정신이 오락가락하여 난폭한 행위를 일삼는 친구에게 그가 내게 맡겨놓은 무기를 돌려 줄 것인가’라는 문제를 대할 때에는 고대 그리스 사회가 현대 사회와는 다르게 전쟁이 나면 자신이 소유한 무기를 들고 폴리스를 위해 전쟁에 나서는 ‘시민’들로 구성된 사회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즉 이들은 다름아닌 ‘시민’의 눈높이에서 딜레마를 사고하는 것이다.
그러나 샌델의 눈높이는 결코 시민에게 맞춰져 있지 않다. 그는 미군의 시각으로, 자신과 비교했을 대 철저히 약자일 수밖에 없는 민간인들의 생사여탈권을 거머쥔 채 그들을 죽일지 살릴지를 고민한다. 더욱 섬뜩한 것은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는 독자들이 그 딜레마를 고민하며 즐기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민간인을 향해 히죽거리며 발포하는 민군 혹은 역사상 존재한 모든 점령군들의 공범이 된다.
3) 우리 공동체와 다른 공동체 사이의 정의
점령군의 딜레마에서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어떤 선택이 더 ‘전략적으로’ 타당한가에 있을 뿐이다. 윤리적 책임과 도의적 갈등은 부차적으로 따라오는 판단의 요인으로 전락.
당신이 이라크에서 태어난 한 청년이라고 가정해 보자. 나 한사람의 목숨과 더불어 미국인 수십 명을 죽임으로써 ‘우리 편’에게 더 큰 이익을 가져올 수 있다면 과연 어떤 선택을 해야 올바른 것일까? 샌델이 제시하는 논리로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위해 스스로를 포함하여 몇 사람쯤 희생시키겠다는 자살테러범을 설득할 수가 없다.
칸트는 『영구평화론』에서 국경과 문화를 넘어서 통용될 수 있는 도덕적 판단의 기준을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인 철학자의 말에 정치가들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함. 『정의란 무엇인가』에는 이런 초월적 관점을 통한 보편성 추구가 결여되어 있음.
2년간의 암울했던 공익근무요원 시절에, 내 삶의 유일한 빛이 되주었던 김상봉 선생의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 다시 읽으니 그 맛이 아주 쏠쏠하구나~~~
"만약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 단순히 그를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인식하는 주체 앞에서 다른 사람의 운명이 내 앞의 술잔의 운명과 다를 수가 없습니다. 그 때 타인을 이해하다는 것은 타인을 해부한다는 것과 다른 일이 아닙니다. 그리하여 내가 개념적 사유를 통해 타인을 모두 규정할 수 있다면, 나는 누더기가 된 타인의 시신 앞에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 것을 두고 이성의 신봉자들은 타자를 이해하는 것이라 부르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요? 그것은 내가 나 속에 타인을 받아들이는 것, 타인이 내 속에 들어와 머물고 쉴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 그리하여 때로는 내가 곧 네가 되어버리는 것, 그런 것이 아니던가요? 그러나 타인은 언제 내 속에 들어와 머무를 수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오직 타인의 슬픔이 내 속에 쉴 때뿐입니다. 오직 내가 타인의 슬픔이 내 속에서 머무를 수 있는 자리를 만드는 한에서 타인은 내 속에 들어와 고요히 쉴 수 있습니다. 내가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내 속에서 타인의 슬픔이 고요히 움직이는 것을 느낄 때인 것입니다." (260쪽)
"오랫동안 나는 세상에 왜 이토록 받아들일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이 널려 있는지 묻고 또 물어왔습니다. 지금 나는 나를 여기까지 이끌어왔던 그 오랜 물음에 대해 이렇게 대답하려 합니다. -- 오직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 그 많은 슬픔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사랑은 만남에 존립합니다. 그리하여 신은 만남과 사랑을 완성하라고 인간에게 이 ㅁ낳은 슬픔을 넘치도록 허락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단지 고통을 핑계로 우리가 삶을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에피쿠로스의 신들이 아무리 완전하 행복을 누리고 산다 하더라도 내가 그들의 삶을 조금도 부러워하지 않는 것은, 만남 없는 삶의 행복이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내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인간의 삶에 널려 있는 슬픔과 고통 앞에 몸서리치면서도 인간의 가난한 삶의 가치를 부정하지 않는 것은 오직 고통과 슬픔 속에서만 우리는 서로에게 손내밀고 서로에게 말건네며 서로서로 온전히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그대, 우리에게 삶은 얼마나 신비한 선물인지요? 푹풍우치는 이 깊은 고통의 바다 위에서도 삶은 깃털처럼 가볍고, 마음은 파랑새처럼 명랑할 수 있으니...." (313쪽)
한나라당이 반값 등록금을 한댄다. 시민사회진영은 미심쩍지만 일단 환영을 한댄다. 오, 그러나 이게 솜씨 좋은 낚시꾼의 밑밥이면 어쩌려구!? 신문을 봐라. 보수 언론에서 맨날 때려대는 얘기가 뭐냐? 국민세금으로 부실대학에 돈 퍼준다고 난리다. 사실 따지고 보면 맞는말 아닌가?
며칠전에 지하철 타고 가는데 옆 사람이 보고 있던 중앙일보를 힐끗 봤다. "이대 757억, 홍대 752억" 대학들이 적립금을 이렇게 남겨먹는데, 세금으로 등록금 대주는게 옳은거냐고 핏대를 올린다. 이거 내가 알기로는 적어도 한 3년 전쯤에는 등록금투쟁하는 학생운동단체 자료집에나 나올법한 내용이다. 근데 이런 내용이 보수언론에 실린다. 그러면서 하는 얘기가 "반값 등록금을 말하기 전에 부실대학 구조조정부터 해야 된다"는 거다. 국가가 학벌경쟁을 부추겨서 우후죽순처럼 생긴 부실대학을 반값등록금 때문에 청소해야 한댄다. 이말은 즉슨, 쉽게말하면 일류대학 중심으로 재정지원 해야 된다는 얘기 아닌가? 이런 공격에 대한 진보진영의 대응은 얼마나 옹색한가? 프레시안 기사인가를 보니까 한다는 소리가 "대학 구조조정의 필요성에는 동의하지만..."으로 시작한다. 이건 완전 놀아나도 제대로, 아주 댄스를 추고 계신다.
반값 등록금, (아니지... 한나라당 표현대로라면 장학금!!!) 하자면 못할 것도 없다. 그리고 그런 정책이 지금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지금도 4년제 산업대나 전문대 등에서는 산업체랑 계약 맺어서 등록금 50%로 퉁치는 곳은 많이 있다. 그런데 이게 완전 노예 계약이라는 거다. 이런 계약학과 다니는 중에 회사에서 짤리거나 사표내면 학교에서도 바로 짤리는 거다. 이런 식으로 하자면 반값 등록금이 아니라 무상 교육도 얼마든지 하고 남는다.
반값 등록금, 이게 민생정책이면 히틀러도 휴머니스트다.
장애인운동에 연대하는 이유로 '우리도 언젠가 장애인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드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장애인운동에 '연대'하는 이유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비장애인이 장애인이 될 수 있는 확률이 문제라면, 사고를 예방해서 그럴 확률을 줄이면 되는 것이다(불조심, 차조심, 건강조심 등등). 이것은 건강한 삶을 살고 싶어하는 인간의 당연한 욕구인데, 그러지 못할 가능성에 대한 불안이 장애인운동에 대한 연대로 이어진다는 것은 과도한 결론이다. 또한 자기 자식이 장애인이 될 수도 있다는 '걱정'도 비슷한 심리일텐데, 그 중 뱃속의 태아가 '기형아'일 수 있다는 우려는 많은 경우 '낙태'로 이어져 사실상 장애인의 존재 가능성을 부정하는 꼴이 된다. 의도와는 다르게 장애인운동의 존재가치와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는 입장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신체적 손상이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권력의 자의적 기준에 의해 얼마든지 우리의 신체가 장애라는 울타리 안으로 밀려들어가 배제와 억압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다. 얼마 전 경찰인가 검찰인가가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의 DNA를 채취하겠다고 한 사태를 보자. 이들은 '해고자'라는 낙인을 무슨 유전적 질병으로 취급 하려는 것 아닌가. 그래서 어쩌면 멀지 않은 미래에 장애인 수용시설처럼 '해고자 수용시설'이 만들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 수 없게 만드는 무수한 턱들, 속도들, 노동의 장벽들 때문에 장애인이 수용시설로 내몰릴 수밖에 없는 것처럼 말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의 신체 자체가 아니라 그 신체를 분류하는 권력의 기준이다. 비장애인이 장애인운동에 연대해야 하는 이유를 말하고자 한다면, 우리가 언제든지 그 권력에 의해서 (조르조 아감벤이 [호모 사케르]에서 말한 것처럼) 희생제물로 바쳐질 수는 없지만, 누군가가 죽여도 처벌받지 않는 '날것의 삶', '벌거벗은 생명'으로 내몰릴 수 있다는 점, 그래서 그 권력의 기준을 갈갈이 찢어내 버려야만 온전한 '연대적 삶'을 누릴 수 있다는 점 뿐일 것이다.
기독교 신학에서 하느님은 초월적인 제작자가 아니다. 하느님은 사랑으로 만물을 지탱해 주는 존재이며, 세계에 처음이 없었더라도 이런 역할을 했을 존재다. 창조란 그저 사물이 시작되도록 하는 일이 아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지 않고 뭔가가 존재하는 이유 자체이며, 모든 실체의 가능성의 조건이다. 하지만 하느님 자신은 어떤 종류의 실체도 아니므로, 세상에 존재하는 실체들에 견주어 설명될 수 없다. 나의 질투심과 내 왼발이 하나의 짝을 이룰 수 없는 것과 같은 논리다. 하느님과 우주를 합한다고 둘이 되지는 않는다. 유대교에서는 하느님을 형상화하는 일을 금지한다. 하느님이 비실체일 뿐 아니라 하느님의 유일한 형상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조직화된 종교를 무산시키기 위해 하느님이 끊임없이 애썼음을 기록한 문헌이 있다. 바로 성경이다. 창조자 하느님은 연구지원금을 주는 기관을 깊이 감명시키기 위해 지극히 합리적인 설계에 따라 일하는 하늘의 공학자가 아니다. 어떤 의도가 담긴 기능적 목적에서가 아니라 창조하는 일 자체를 좋아하고 즐거워하기 때문에 세상을 만들어낸 예술가이자 탐미주의자다. (19쪽)
우리가 하느님의 피조물이라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하느님과 마찬가지로 순전히 존재 자체의 즐거움을 위해 존재하기(또는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급진적 낭만주의자들이--이 맥락에선 칼 마르크스까지 포함하여--제기하는 의문은 그 같은 존재방식을 현실화하려면 어떤 정치적 변혁이 필요하냐는 것이다. (22쪽)
여하튼 예수가 가르치는 도덕은 무모하고 비현실적이며 장래에 대비하지 않는, 상식을 벗어난 것이다. 따라서 보험설계사의 적이며 부동산 중개사의 장애물이다. 예수는 우리에게 원수를 용서하라, 겉옷만이 아니라 속옷까지 벗어 주라 하고, 왼뺨을 맞으면 오른뺨까지 내주어라, 너를 욕하는 사람을 사랑하라, 네 몫 이상으로 노력하고 내일 일을 미리 염려하지 말라고 가르치지 않는가.(26쪽)
니체가 빈정대며 지적했듯이, 초월적인 신(神) 즉 하느님을 전능한 인류로 대체한다 해도 어떤 의미에선 달라지는 게 거의 없다. 여전히 세상에는 고정된 형이상학적 중심이 존재하며, 그 중심이 이제는 신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라는 점만이 다르다. 우리는 스스로 부과한 제약 외에는 어떤 구속도 받지 않는 주권자이기 때문에, 새로이 찾아낸 신적 권리를 행사하는 가운데 황홀할 정도로 창조적인 희열을 주는 파괴에 탐닉하기도 한다. 니체의 관점에서 볼 때, 절대적인 힘이 신에게서 인간에게 그대로 옮겨지지 않으면 신의 죽음은 필연적으로 인간의 죽음을 불러온다. 다시 말해 주인처럼 뻐기면서 우쭐대던 유형의 인본주의까지 종언을 고하리라는 것이다. 아니면 인본주의는 은밀한 신학으로 남고 신은 교외 거주자들의 점잖은 도덕으로 형태만을 바꾸어 새로운 세월을 조용히 보내게 될 것이다. 요즘의 하느님이 바로 그런 모습이다. 인간의 무한성이 결국하느님의 영원성을 지탱해주는 셈이다. 파우스트 식으로 인간은 무한한 듯해 보이는 자신의 힘과 사랑에 빠진 것이다. 성육신(成肉神, Incarnation)의 교리에서는 육신을 지닌 연약하고 유한한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난다는 점을 망각한 채 말이다. 이처럼 자신의 무한함에 어리석게 도취한 인간은 너무나 빨리 앞으로 나아가다 도가 지나쳐 중심을 잃고 결국 무(無)로 떨어지는 위험에 끝없이 빠져든다. ‘인류의 타락’ 신화와 다를 바 없다.
이런 병폐를 치유하는 전통적인 방법이 있기는 하다. 이른바 비극(悲劇)예술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항암화학요법이 그렇듯이 비극이라는 치료법도 질병 자체만큼이나 파괴적일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비극 무대에서 벌어지는 무제한적 투쟁을 지켜보면서 인과응보에 대한 두려움으로 하늘을 우러르며 떨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창조된 것들이 감히 창조하려 들어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 이는 예술가에 대한 질책이 아니라 요즘 같으면 자기창출(self-origination)에 대한 부르주아의 위대한 신화 부를 만한 것을 경계하는 전형이다. 보다 근원적인 의존 관계의 맥락 속에서만 우리의 자유가 크고 든든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데서 숱한 역사적 재앙이 시작됐다. 이 같은 태도는 오늘날 서구의 신제국주의를 이끄는 원동력 중 하나이기도 하다.(28-30쪽)
가장 급진적인 형태의 자기부정은 금연이나 금주 따위가 아니라 자신의 몸을 포기하는 일, 전통적으로 '순교'라고 알려진 행위다. 순교자는 자기가 지닌 가장 소중한 것을 버리지만, 가능하다면 그러지 않아도 되기를 바란다. 반면에 자살자는 견디기 힘든 부담이 돼버린 삶을 기꺼이 내던진다. 예수가 만약 죽기를 바랐다면 그는 무수한 자살자 중 하나가 되고, 그의 죽음은 자살폭탄테러범의 흐트러진 종말만큼이나 덧없고 무가치했을 것이다. 자살자와 달리 순교자는 타인들을 위해 죽음을 택하는 사람이다. 그들에겐 죽는 것까지도 사랑의 행위다. 그 죽음은 다른 사람들의 삶에서 열매를 맺는다. 이는 타인을 살리기 위해 죽음을 택하는 사람, 예컨대 나치 독일의 가스실 앞에 남을 대신해 줄을 선 사람뿐 아니라 타인에게 생명이나 살아갈 힘을 줄 수 있는 원칙을 지키려고 죽음을 택한 사람에게도 해당되는말이다. '순교자(martyr)'라는 단어는 '증인'을 뜻하는 말에서 나왔다. 그들이 증언하는 것은 삶을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원칙이다. 이런 점에서 순교자의 죽음은 생명의 하찮음이 아니라 생명의 가치를 입증한다. 이슬람의 자살폭탄테러범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할 수 없다. (42쪽)
모든 증거가 불리해 보임에도 불구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끝내 이기리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패배자를 경멸하는 나라들에서는 말도 안 된다고 여기겠지만, 실패에 대한 충실성이라 부를 만한 믿음의 태도를 견지할 때만 인간의 힘은 창조적이고 지속적이 될 수 있다. 이처럼 믿기 어려울 정도로 냉정한 현실주의를 유지하면서, 인간을 십자가에 못 박는 극악하고 충격적이며 지긋지긋한 실재, 그 메두사의 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할 때에만 어떤 형태로든 부활이 가능해지지 않겠는가. 냉정한 현실주의를 최후의 보루로 받아들이고 다른 모든 것은 감상주의에 사로잡힌 허튼소리거나 이데올로기적 환상, 가짜 유토피아, 거짓된 위안, 혹은 지나치게 낙관적인 이상주의일 뿐임을 알아볼 때, 그제서야 최후의 보루가 결국은 최후의 것이 아니었음이 밝혀질 수 있다.
신약성경은 인간의 환상을 잔혹할 정도로 깨뜨린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 죽음을 맞지 않는다면 뭐가 잘못돼서 그런 건지 변명의 해야 할 정도다. 인간 조건의 적나라한 시니피앙은 사랑과 정의를 강력하게 옹호하다가 그 때문에 죽음을 당한 사람이다. 엉망으로 훼손된 시신이 인류 역사의 충격적 진실이다. (43-4쪽)
지금까지 보았듯이 나 같은 사람과 디치킨스는 신학적 관점뿐 아니라 정치적 관점도 판이하다. 리처드 도킨스와 내가 가장 근본적으로 차이를 보이는 부분은 사실 하느님이다 과학, 미신, 진화, 그리고 우주의 기원 등에 대한 생각이 아닌 듯하다. 신학자들은 적어도 직업적으로는, 헨리 제임스처럼 절묘하게 복잡한 작가가 과연 진화라는 조잡하고 실수 많은 과정을 통해 탄생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조금의 관심도 없다. 내가 알기로 과학과 신학 간에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이 세상을 선물로 보느냐 아니냐 하는 데에 있다. 이는 세상을 엄밀하게 조사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도자기 꽃병을 아무리 자세히 뜯어보아도 그게 결혼 선물임을 알아낼 수는 없지 않은가. 디치킨스와 나 같은 급진주의자 간의 차이 역시 인간 조건의 궁극적인 시니피앙이 고문 받고 살해당한 정치범의 몸뚱이라는 말을 받아들이는지, 그것이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의미는 무엇이라고 보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54-5쪽)
무자비하게 실리만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에 내몰린 이른바 영적인 가치가 피난처로 삼은 곳의 하나가 뉴에이지(New Age)다. 하지만 뉴에이지는 영적인 것의 서툰 모방에 불과한데, 물질주의에 매몰된 문명에서 그 이상을 기대할 수는 없을 터이다. 마음이 냉혹한 사람들이 감상적인 노래를 들으며 훌쩍이곤 하듯이, 진정한 영적 가치가 품안에 굴러들어도 알아보지 못할 사람들이 유독 영성(靈性)을 뭔가 으스스하고 영묘하여 심원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을 띤다.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며, 마르크스가 종교를 “무정한 세계의 감정이고, 영혼 없는 상황의 영혼이다.”라고 했을 때, 염두에 두었던 게 바로 이런 상황이다. 마르크스의 말을 다시 풀이하면, 유머 감각 없는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종류의 우스개가 난처할 정도로 노골적인 유머이듯이, 무정한 세계에서 감정 혹은 정(情)의 원천으로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전통적인 종교뿐이라는 얘기다. 마르크스가 공격한 종교는 실리만을 추구하는 물질주의자들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종교, 즉 영적인 것을 현실에서 분리하여 감상적으로만 이해하는 유형의 종교였다. (59쪽)
이슬람 급진주의와 기독교 근본주의는 이와 사뭇 다르다. 낭만주의나 뉴에이지와 달리, 그것들은 불만을 품은 소수의 교리를 넘어선 대중운동이다. 여기서 종교는 인민의아편이라기보다 인민의 크랙 코카인이다. 근본주의는 단순히 세상으로부터 도피처를 찾지 않고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나선다. 근본주의는 근대성(modernity)이 내거는 가치들을 거부하지만, 근대의 과학기술과 조직 방식들은 그것이 화학적이건 미디어 기술이건 필요한 대로 기꺼이 받아들인다. 영국에서 이라크 침략을 지지한 좌파 인사들 혹은 이전에 좌파였던 사람들은 그 문제에 관한 성명에서 “우리는 근대성에 대한 두려움을 거부한다.”라고 했는데, 이들의 말은 두 가지 점에서 잘못됐다. 하나는 이슬람이 근대성을 덮어놓고 거부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근대성에는 거부할 만한 게 많다는 점이다. 화학전을 불안하게 생각한다고 해서 복고적인 반동세력이 되는 건 아니다. 화학전이 두렵지 않다면 도대체 뭐를 두려워해야 한단 말인가. (61-2쪽)
아퀴나스가 『이단논박대전』에서 말하듯이, 각 피조물의 궁극적인 완성은 행함에 있다. 아퀴나스의 생각에 존재란 실체라기보다 행위다. 그에겐 하느님조차 명사보다 동사에 가깝다. 우리의 몸 자체가 주체와 객체라는 이원성을 해체한다. 나는 안에서 눈구멍을 통해 밖의 세상을 냉정하게 응시하는 존재가 아니라. 이 세상에 참여하는 행위자로서 항상 세상 한가운데에 놓여 있다. 따라서 아퀴나스도 비트겐슈타인처럼 ‘외부 세계(the external world)’라는 일상적인 표현에 대해 곤혹스러워했을 법하다. 저 등나무가 내 옆에 있지 않고 내 ‘밖에’ 있다는 게 무슨 뜻일까? 저 나무가 내 ‘밖에’ 있다고 본다면, 실재의 나는 마치 크레인을 운전하는 사람처럼 나의 몸 안에 웅크리고 있어야 할 터이다. 그럼 그 실재의 나는 또 누가 움직이는 걸까? (109쪽)
행위에서의 주체성과 사물에 대한 지배력, 그리고 자율성 등은 바람직한 미덕이지만, 위협적이리만큼 이질적으로 느껴지게 된 세계를 정복하고 지배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주권은 고독과 불가분한 것임이 드러난다. 계몽정신으로 무장한 인간은 확신의 정점에 이르렀을 때 자신이 이 우주에 홀로 서 있으며 그의 진가를 증명해 줄 것도 자기 자신뿐이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그는 세계를 지배한다면서도 거기에 개재된 자의성과 불확실성을 진저리 칠 정도로 의식하게 되며, 이런 상황은 근대가 진행됨에 따라 더욱 심각해진다. 자신이 한 손으로 방금 세상에 끼워 넣은 가치를 다른 손으로 끄집어내어 이것 보라며 제시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인간 주체가 딛고 선 토대가 자기 자신뿐이라는 점은 또 어떻게 봐야 하는가? (112-3쪽)
얄궂게도 진보라는 개념에는 종교적인 여운이 있다. 찰스 테일러는 『세속의 시대』에서 진보의 개념을 ‘신의 섭리의 대체물’이라고 했다. 하지만 기독교 종말론은 무한한 발전이라는 생각과 거리가 멀다. 하느님의 나라는 역사라는 상승하는 곡조의 절정에서 힘차게 울려퍼지는 소리처럼 도래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장엄한 역사적 진화의 완성이 아니라, 인간이 정의를 위해 투쟁하는 가운데 보편적 평화와 정의가 살아 숨 쉬는 하느님의 통치 시대를 예시한 모든 역사적 발화점들의 마무리다. 이처럼 기독교 신학은 진보라는 오만한 관념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역사를 바꾸어 갈 수 있다고 믿는다. 발터 벤야민도 인식했듯이, 하느님의 통치란 다른 무엇이 아니라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한 산발적이고 자주 불운했던 투쟁들, 영원의 관점이라 할 것에 따라 ‘지금시간’이라는 하나의 순간에 모여 일관된 이야기로 구현됨으로써 구원에 이르는 투쟁들을 이른다. 근대적인 사고에서는 이른바 거대담론을 믿는 반면 포스트모던한 사고에서는 이를 믿지 않는데, 그와는 별도로 유대인과 기독교인에게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거대담론이 하나 있으며 그것은 미래뿐 아니라 과거에까지도 소급해 작용하리라고 본다. 벤야민이 말했듯이 “구원된 인류에게 비로소 그들의 과거가 완전히 주어지게 되기” 때문이다.(124-6쪽)
철저하게 합리적인 미래라는 꿈은 얼만큼이나 천국의 대체물 역할을 하는 걸까? 절대화된 ‘진보’는 자유주의적 합리주의자들 나름의 ‘내세(來世)’인가? 자유주의적 합리주의는 정말 종교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났을까?(128쪽)
상상해보건대, 하느님이 갑자기 소설가 토머스 하디의 외양간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더라도 하디는 그다지 감격하지 않았을 듯하다. 충실한 진화론자인 하디는 하느님을 순수하게 인간적인 모든 관점들이 수렴되는 가공의 지점으로 보았으며, 그 자리에 어떤 초월적 존재가 있을 가능성을 원칙적으로 인정한다 해도 본디 불완전하고 관점에 얽매인 인간의 삶에 그런 존재가 실질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디의 생각에는 하느님이 정말 존재하더라도 우리에게 특별히 흥미로운 말을 해줄 게 없다. 그는 어느 시에서 하느님이 실제로 세상을 창조하긴 했지만 세상에 관심을 끊은 지 이미 오래라고 했다. 비트겐슈타인의 어구를 약간 바꾸어 말한다면, 하느님이 말을 할 수 있다 해도 우리는 그의 말에 신경 쓰지 않을 터이다.(150-1쪽)
바디우에 따르면 믿음의 행위에 관련된 지리는명제적 진리와 전혀 무관하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명제적 진리로 환원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바디우에게 믿음이란 그가 ‘사건(event)'이라고 부르는 것 -- 역사의 평탄한 흐름에서 훌쩍 벗어나 발생했기에 기존의 맥락에서는 이름 붙일 수도 없고 의미를 파악할 수도 없는 지극히 독창적인 일 -- 에 대한 끈질긴 충실성에 있다. 진리는 세상의 결을 거슬러 옛 체제와 단절하고 완전히 새로운 현실의 토대를 놓는 것이다. (...) 예를 들어, 사람들을 움직여 인종차별이 없는 사회의 가능성을 믿게 만드는 것은 일련의 명제들이 아니라 일련의 헌신이다. 그들이 피부색 때문에 일자리를 얻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음이 움직여 행동에 나서려면 그에 앞서 이미 정의라는 개념과 정의의 실현 가능성에 어느 정도 헌신하고 있어야 한다. 사실에 대한 인식만으로는 정의 실현을 위한 행동을 유발하기에 충분치 않다. (155-8쪽)
근본주의는 천박한 기술적 합리성 -- 중요한 영적 문제들을 냉소적으로 일체 외면함으로써 편협한 사람들의 그것을 독점하도록 허용하는 합리성 --의 압박에 내몰려 광신에 까지 이른 사람들의 믿음이라 할 수 있다. (193쪽)
문명이 실용주의와 물질주의에 젖어갈수록 그것이 감당 못하는 정서적이고 심리적인 욕구들을 채울 임무가 문화에 더 많이 주어지고, 문명과 문화 간의 반목은 한층 깊어진다. 보편적인 가치를 특정한 시대, 특정한 공간에서 구현해야 할 문화가 결국은 보편적 가치를 공격하게 된다. 요컨대 문화는 억압된 것의 격렬한 회구라 할 수 있다. 문화는 문명보다 국지적이고 직접적, 자연발생적이며 합리성과 무관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둘 중에서 더 미학적인 개념이다. 자기네 고유의 문화를 기리고 지키려는 유형의 민족주의는 언제나 가장 시적(詩的)인 종류의 정치로, 전에 누군가 말했듯이 ‘문학인들의 발명품’이다. 하기는 아일랜드의 위대한 민족주의자이며 시인이었던 파드릭 피어스를 위생위원회에 배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201-2쪽)
죽음보다 강한 것은 이성이 아니라 사랑이며, 오직 사랑에서만 문명의 아름다움이 샘솟을 수 있다고. 이성은 너무 추상적이고 비인격적인 힘이어서 죽음을 이겨낼 수 없다. 하지만 그 사랑이 진정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피의 제물을 항상 묵묵히 인정하는” 사랑이어야 한다. 우리는 아름다움과 이상주의, 그리고 진보를 향한 열망을 높이 평가해야하지만, 그 뿌리에는 많은 피와 비참함이 있었다는 사실 또한 마르크스나 니체 식으로 시인해야 한다. 한데 얼핏 보기에 ‘진보’의 사도들은 이런 지혜에 이르지 못한 듯하다.(210-1쪽)
비극적 인본주의도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와 마찬가지로 인류의 자유로운 번영을 염원하되, 그 같은 이상은 우리가 최악의 것들을 직시할 때에만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에 대한 긍정이 궁극적으로 가치 있으려면, 왕정복고 이후 미몽에서 깨어난 밀턴처럼 인간이 애당초 구원할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조너선 스위프트의 소설에서 거인국의 왕이 무슨 생각으로 인간을 구역질나는 해충이라고 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그런 긍정이어야 한다. 비극적 인본주의는 사회주의적인 것이든 기독교나 정신분석학의 관점에 선 것이든 간에, 인간은 자기 비우기와 근본적인 개조를 통해서만 바로 설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변화된 사회가 미래에 반드시 태어나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교조적 자유주의자, ‘진보’의 광신자들, 이슬람 공포증에 사로잡힌 지식인들이 변화의 길을 끈질기게 방해하지 않는다면 그런 미래가 조금은 떠 빨리 찾아올지 모른다. (217쪽)
'나는 가수다' 전편을 어제 몰아서 봤다. 하도 여기저기서 말도 많고 하길래 일단 내 눈으로 확인하고 끼어들 겸 해서... 1회는 예전에 보긴 했는데, 매니저로 나온 개그맨들이 계속 호들갑 떨어대는 것도 보기 싫고, 왠지 가수들끼리 서로 자화자찬 하는 분위기도 맘에 안들고 해서 볼 생각을 접었는데... 노래 하나는 끝내준다는 소문에 귀가 간지러워서 저녁내내 다 보고 말았다.
밥먹고, 씻고, 설거지 하고 어쩌구 하는 시간 다 포함해서 5시간을 이거 보는데 투자한 것 같은데,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은 안들었던 걸 생각하면 노래하나는 정말 끝내줬다. 우선 이소라, 김범수는 어떤 노래를 부르던 입이 쩍쩍 벌어지게 만들었다. 백지영은 너무 대중적이고 유행타는 노래를 잘 부르는 가수라 가창력을 별로 기대하지 않았는데, 웬걸 “백지영이 원래 노래를 이렇게 잘 불렀나” 싶을 정도로 훌륭했다. 음악의 질적인 면으로 보자면 우리나라 공중파에서 할 수 있는 최대치를 해내지 않았나 싶을 정도다.
문제는 이것이 전적으로 가수들의 실력이 이뤄낸 성과라는 점이고, 제작진이 이렇게 훌륭한 뮤지션들을 모아놓고 겨우 ‘서바이벌’이라는 저질스런 컨셉밖에 생각해내지 못했다는 점에 있다. 게다가 이 서바이벌이 실제 탈락자 1인을 향해 화살을 날렸을 때, 제작진이 보인 엉성함이란... 이 문제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찧고 까불고 있는 중이니 나까지 말을 보탤 필요는 없겠다.
나를 제일 어이없게 한 것은 김건모가 떨어지고 나서 한 발언이었다. 김건모는 자기가 떨어진 이유가 ‘립스틱 퍼포먼스’ 때문이라고 계속 중얼거렸다. 재도전을 제안한 김제동도 그 발언에 사실상 동의하며 ‘음악 외적인 부분’ 때문에 7위를 한 것이니 재도전의 기회를 줘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들이 너무 쉽게 무시한 것은 김건모가 7위라는 판정을 내린 것은 김건모 자신도 아니고 김제동도 아니고 500명의 일반인 평가단이었다는 사실이다. 왜 김건모는 자신이 ‘음악’ 때문에 7위를 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은 것일까? 왜 500명의 ‘일반인’들이 그의 음악성을 가지고 7위를 줬을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일까? 누가 그에게 그렇게 오만할 권리를 줬단 말인가? 김건모의 립스틱 퍼포먼스가 전체적인 공연의 분위기와 안 어울렸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게 500명의 평가단의 ‘감상’에 미쳤을 효과는 다 제각각인 것이다. 게 중에는 퍼포먼스가 기발하고 독특하다고 생각한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건모는 7위를 했을 수 있다. 제작진, 그리고 가수 도전자, 개그맨 매니저들 모두 그럴 가능성을 배제해버리는 엄청난 오만함을 보여준 것이다.
이런 태도를 굳이 규정하자면 일종의 ‘전문가주의’라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에서 ‘전문가주의’가 제일 빈번히 출현하여 대중과 마찰을 일으키는 분야는 단연 ‘과학’이다. 광우병, 조류독감, 천안함, 그리고 최근 일본 핵발전소 사고까지... ‘전문가’를 자청하는 과학자들을 등에 업은 정부와 언론은 자신들이 믿는 ‘가정’이 유일한 ‘진리’임을 강조하고, 이것이 대중의 불안에 기반한 정서와 끊임없이 마찰을 일으킨다. 그 과정에서 이들은 권력을 기반에 두고 끊임없이 지식인과 무지자를 갈라놓는데 여념이 없다.
이런 과학의 영역이야 ‘패러다임의 전환’과 같은 한계적 조건이 있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그 학문적 성격 자체가 ‘진리’를 추구한다는 성격이 강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그나마’ 이해해줄 수 있다(상대적으로). 하지만, 음악이 진리를 추구하는 영역인가? 오로지 뮤지션들만이 알 수 있는 독특한 심미적 세계가, 나같은 문외한은 알 턱이 없는 그런 오묘한 세계에 똬리를 트고 있기라도 한단 말인가? 나가수는 프로그램의 흥행을 위해서 일반인을 평가단으로 500명이나 불러들여놓고, 그 평가가 자신들의 ‘전문가적’ 잣대와 맞지 않으니 손바닥 뒤집듯이 결과를 뒤집어 버린 것이다. 그것도 평가단의 평가는 자신의 음악성과는 전혀 상관없는 부분에서 이루어졌다는, 아주 오만한 자신감을 근거로.
데뷔 20년차 가수를 데려다놓고 서바이벌이라는 형식을 선택한다는게, 국사를 영어로 가르치는 것만큼 황당하고 어처구니 없지만, 어쨌든 그 서바이벌 과정에서 드러난 제작진과 가수들의 오만한 전문가주의에 더 화가났던 어젯밤이다.
뱀발) 어제 우연히 한겨레 [왜냐면]에 신동일이라는 사람이 쓴 글을 보니, 나가수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평가방식을 다음과 같이 바꿔야 했다고 말한다.
“누가 어떻게 심사할 것인지 참가 가수들과도 협의를 하고, 심사단을 엄밀하게 선정한 뒤 심사자 교육 과정을 참가자들과 시청자들에게 보여주기도 하며, 심지어 참가 가수나 시청자들도 평가 과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심사 권한을 위임한다. 탈락한 가수가 심사자로 참가할 수도 있으며, 동료끼리 또 각자 자신을 평가한 점수도 최종심사에 반영한다. 가수들 쪽에서 평가방식에 대해서 제작진이나 심사단에게 물어볼 수 있도록 대화창구가 있으며, 신뢰감을 서로가 가질 수 있도록 여러 행사도 준비한다. 그리고 결과는 당일에 깜짝 발표되기보다는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게 한다.”
교원평가에서 그렇게 하듯이 다면평가를 도입하자는 얘기인데, 아무리 좋은 평가도 평가는 평가다. 그리고 7명의 가수들이 평가방식에 문제를 제기한 것도 아니지 않는가? 패자부활전을 100번을 한다고 한들 어쨌든 꼴찌는 나오게 되어 있다. 가수들은 누구든 1명은 탈락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실제 결과가 나오니까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평가 ‘방식’이 아니라, 평가 ‘자체’에 있는 것이다. 교원평가든 일제고사든 다 그렇다....
바로 어제 장애학 세미나 발제에 썼던, 아주 갑작스럽고 엉뚱한(?) 고민...
박경석 대표님이 예전에 하셨다는 그 말, “장애인들의 문제가 백분토론에 한번 나와 봤으면 좋겠다”라는 얘기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정말 과연, 장애문제가 이 사회에서 ‘토론’ 가능한 문제일까?
난 이런 질문 앞에서 예전에 학생운동단체에서 활동할 때, 어린이대공원으로 ‘소풍’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동물들은 우리 안에 갇혀서 사실상 하루 종일 ‘멍’ 때리고 있는데, 우리들은 그걸 보고 신기해하고, 가끔 사진도 찍고 하는 게 나는 영 불편했다. 그러다가 나는 마지막에 동물원을 나오면서 ‘꼭지가 확 돌아버렸다’. 왜냐면 산만한 크기의 코끼리의 한 쪽 발이 쇠자물쇠에 묶여있는 모습을 보고 말았기 때문이다. 난 그 모습이 너무 화가 나서 돌아오는 내내 같이 갔던 사람들에게 ‘동물해방’ 투쟁이 필요한 것 같다고 말했는데, 그 날 나의 이야기는 두고두고 사람들 사이에서 농담거리가 되고 말았다.
물론 완전히 같은 문제라 할 수는 없겠지만, 나는 우리 사회가 장애문제를 인식하는 수준은 어느 정도 동물원의 동물을 바라보는 태도와 닮았다고 생각한다. 동물원과 장애인 시설의 존재 목적은 다르지만 사회적으로 기능하는 바는 사실상 같은 게 아닐까? 동물원은 우리 속에 갇혀진 그들의 (우리는 무감각하게 ‘울음’이라고 부르는) ‘비명’ 소리로 인간들에게 ‘오락’을 제공하여 이들의 안락을 유지한다. 인간의 경계 ‘내부’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은 그 ‘내부’에서 동물들의 존엄성에 대해 토론할 필요 같은 것을 느끼지 못한다. 꼭 동물원에 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야생동물들이 그 ‘우리’ 안에 갇혀 있음으로 해서 자신들의 지금의 안락한 삶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가끔 TV를 통해 들려오는 멸종위기 생물들에 대한 남획에 분노할 수는 있어도, 우리 중에 누구라도 뒷산에서 일주일에 한번씩 맷돼지가 내려오는 것을 참으며 살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사람이 있을까? 그건 근대적 인간의 삶의 방식으로는 도저히 용납 불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조건에서 무슨 동물보호단체라는 데서 나온 사람들이 토론프로그램에서 할 수 있는 말은 대개가 의학적, 생물학적 지식을 동원해야만 말이 이어지는 것들이다. 이런 말이라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게 다행이긴 하지만, 나는 그게 생명체들의 보편적인 자기 삶의 권리를 누리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라 생각한다.
한편 장애인 시설은 비장애인의 삶의 방식에 ‘불편한’ 존재일 (뿐이라 여겨지는) 장애인들을 시설로 몰아넣으면서 비장애인들의 안락을 유지한다. 비장애인들은 그렇게 장애인들을 시설로 몰아넣고는 가끔씩 ‘봉사활동’이란 명목으로 찾아가 자기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 내가 고등학교 때 근로복지공단에서 산재노동자 자녀들을 데리고 꽃동네 봉사활동 하는데에 간 적이 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거기서 비장애인들이 취했던 태도는 동물원에서 사람들이 취하는 태도랑 다르지 않은 것 같다. ①우르르 몰려간다. ②잠깐 있다 나온다. ③먹을 것을 준다. ④가까이 오면 무서워한다. (+알파, 베타, 오메가....)
이런 상황에서 장애인의 삶에 대한 토론이 가능할까? 그것도 백분토론 같은데서? 내 생각은 토론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게 아니라, 토론을 할 수도 있고 해서 나쁠 것도 없지만, 사실상 토론 불가능의 영역으로 비장애인 중심의 사회가 끌어안고 있는 어떤 신체의 ‘무결성’과 그들의 ‘안락함’이라는 개념을 깨버리지 않은 상황에서 그 토론이 핵심적인 문제를 다룰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한번 느끼는 것이지만, 아직은 장애문제를 둘러싸고는 ‘말’로 하는 토론보다는 ‘몸’으로 하는 싸움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사회를 더 없이 불편하게 해야 한다. 이 사회의 안락함이라는 것은 장애인을 ‘비(非)인간’의 영역으로 몰아넣는 시설의 위선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는 것을 깨우치는 것은, (안타깝게도) 아직까진 ‘말’보다는 ‘공격’인 것 같다. 학교 다닐 때, 동아리에 들어온 새내기가 장애인 시설에 봉사활동 다녀서 동아리 활동을 소홀히 한다길래 (그 전부터 노들에서 교사활동을 하던 선배와 함께) 술자리에서 그 친구를 앉혀놓고 그런 거 다니지 말라고 몰아세워서는 결국 울려버린 적이 있다. 내가 살면서 여러 사람 눈에 눈물 흘리게 한 것 참 반성을 많이 하지만, 그 때만큼은 참 잘한 것 같다.
(계속 논점이 삼천포로 빠지는 감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생각난 김에 말해보자면) 우리 인간에게 어떤 권리가 있음을 밝히는 것이 근대사회를 열어젖히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앞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투쟁을 하는데 있어서는 오히려 인간에게 ‘어떠한 권리가 없음’을 밝히는 것이 더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다른 어떤 인간을 (예를들면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평생토록 시설에 가둬놓을 권리가 ‘없다’. 그것이 특정한 인간집단의 안락과 편안함을 위해 더 이로운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같은 이유로 인간은 인간이 아닌 동물들을 특정한 공간에 가둬놓고 그것을 보며 즐거워할 권리가 ‘없다’. 어떠한 생명도 자신을 감금된 상태로 희생하며 다른 생명에게 유희를 제공할 의무 따위는 없다. 예전에 지율스님의 도롱뇽 소송 같은게 이런 의미를 가진 싸움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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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폭탄테러"범"은 아마도 suicide bomber일텐데, 번역자가 왜 굳이 "범"자까지 붙여주면서 친절히 번역했는지 모르겠네요.. 근데 왜 말할 수 없는지에 대한 설명은 있나요?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