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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에 대하여 (2013.02.10)

용서와 사과.

요즘 나는 기독청년아카데미에서 하는 누가복음 강의를 듣는다. 한번도 성경을 접해보지 않은 나이지만, 여인과 사마리아인의 편에서, '하나님 나라'를 설하시는 예수의 모습이 경이롭다.

그런데 엊그제 했던 강의 중에 나온 이야기가 계속 머릿속에 남아 날 괴롭히는데, 그것은 바로 용서에 대한 것이다.

강의하시는 김재흥 목사님이 잘 아시는 한 목사님은 평소 개량한복을 즐겨 입으시고 수염을 기르고 다녀서 산에서 내려온 '도사님'으로 종종 오해받는다고 한다. 어느날 이 도사님 같은 목사님이 지방에 일정이 있어서 한 여관에 묵게 되었는데, 역시 이번에도 목사님을 어느 산에서 내려온 도사님이라고 생각한 여관 주인이 방에 쫓아와 묻더란다. "도사님, 제가 정말 잘 살고 싶은데, 그러려면 어찌해야할까요?" ...이 목사님이 순간, 직관적으로 판단키로, 이 작은 시골마을에서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것 같은 여관 주인을 하고 있는 여인의 삶에 제일 큰 문제는 뭐니뭐니해도 남자 문제일 것이라 판단하시고 한마디를 던지셨단다.

"그 놈을 용서해"

그랬더니, 갑자기 이 여관주인의 얼굴색이 변하면서 정색을 하고 말하더라는거다.

"절대 그럴 수 없어요!"

이 대답을 듣고 도사님, 아니 목사님은 무엇을 느끼셨을까? 나의 짧은 생각으로는 목사님의 말씀이 다소 경솔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문득 그날 낮에 한겨레 신문에서 봤던 '법륜스님의 쾌도상담' 코너가 생각났다.

http://m.hani.co.kr/arti/society/women/573322.html

상담의뢰자는 어릴적에 아버지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경험이 있고, 이로 인한 가족에 대한 미움이 쌓여 있는 여성이다. 이런 상처 때문에 타인과의 관계를 맺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에 대한 법륜스님의 쾌도상담?은 이런 식이다.

"‘아버지가 나를 성추행했다’는 생각도 사실은 하나의 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내 손을 잡았던 그 순간에 그는 내 아버지가 아니라 그냥 한 남자였을 뿐입니다. 그러니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어머니 아버지 감사합니다. 낳아주시고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매일매일 어머니한테 108배, 아버지한테 108배, 오직 감사하다는 기도만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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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화가 난다. 종교인들은 가끔 이렇게 너무 쉽게 용서를 말한다. 하도 이상해서 노들야학 학생이시고 토요일마다 내가 활동보조하는 호식이형한테 물어봤다. 형은 형의 형님을 용서할 수 있냐고. 어릴적부터 자신을 병신이라고 무시하고 때리던 형을, 그래서 5분도 안되는 거리에 살면서도 얼굴도 안보고 산다는 형을 용서할 수 있겠냐고. 그런데, 호식이형은 내 질문 자체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는지, 엉뚱한 대답만 늘어놨다. 내 질문은, 그냥 우스워졌다.

어느 날 문득, 아버지 집에 불을 질러 버리겠다고 하던 ●●●형에게 용서는 대체 무슨 의미인가? 나는 납득할 수 없었다.

종교인들은 그렇게 입이 닳도록 용서를 외치면서, 왜 '사과'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는가. 요새 힐링타령 해대는 유명인사들도 상처를 내려놓으라면서 용서를 말하지만, 누구도 '사과'를 말하지 않는다. 용서는 피해자를 향한 요구이지만, 사과는 가해자를 향한 요구이다.

다음 누가복음 강의 때는 이 이야기를 꼭 해야겠다. 용서가 아니라 사과가 먼저라고. 이렇게 써놓고 보니 예전에 김상봉선생이 경향신문에 썼던 칼럼의 첫구절이 생각난다.

"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친 뒤에 제자들이 행여 오해할까봐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 생각하지 말라.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덧붙였다. 우주적 평화에 대한 간절한 소망과 그 평화를 짓밟는 불의에 대한 깊은 분노는 동전의 앞뒷면처럼 이어져 있는 것이어서 결코 분리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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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 그것은 억눌린 자들이 가진 유일한 권력이다. 함부로 용서하지 말자. <레 미제라블>이 (김재흥 목사님 말대로) 사랑의 혁명일 수 있는 것은 장발장이 자베르를 죽일 수도 있는 위치에 섰기 때문에 (그러나 죽이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장발장이 부랑인 수용소에서 매번 쫓겨나고 굶주릴 때, 자베르를 용서한다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가능했다고 해도 결국 장발장의 삶을 갈기갈기 찢어놨을 것이다.

영화 <밀양>에서 자기 아들을 살해한 남자가 태연하게 자신은 이미 용서받았다고 말했을 때, 전도연의 삶을 짖밟은 것처럼.

ㅡ 법륜스님이 던져준 불편한 화두에 대한 나의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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