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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4/08
    이태경의 반론
    구르는돌
  2. 2010/03/24
    [이태경 비판] 이건희와 가신그룹만이 문제인가?(2)
    구르는돌

이태경의 반론

지행네트워크의 하승우씨와 네 글에 대한 이태경씨의 반론이 오늘 프레시안에 실렸다.

 

"언제까지 반자본·도덕적 엄격주의인가"

 

뒤의 '도덕적 엄격주의'라는 공격은 아마도 내 글을 향하고 있는 듯 하다. 솔직히 나도 지난번 기고가 게재된 이후에 좀 마음이 찝찝하긴 했다. 한나 아렌트의 아이히만에 대한 분석을 인용하면서, 사유는 인간의 '의무'라는 점을 분명히하는데까지는 좋았으나, 뒤에서는 약간 오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인간 이하의 존재'라는 표현을 쓸 필요가 있었을까 싶고... 나는 '인간'이라는 용어를 얼마간 철학적인 개념으로 사용한 건데, 읽는 사람 입장에선 그저 '저 놈은 인간도 아니야'라는 비난성 멘트랑 다를 바 없이 읽힐 수도 있었겠단 생각이 든다. (아, 그리고 나는 별 생각없이 '임직원'을 직원은 빼고 임원만을 지칭하는 단어로 사용했는데, 사전적 의미도 그렇고 다른 이들의 글에서도 그렇고, 그 단어에는 삼성의 일반 노동자들도 포함되는 것이었다. 오 마이 미스테이크!!! 혹여나 나의 글을 읽고 불편하셨던 삼성의 노동자들에게는 진심으로 사과드린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 글쓰기의 세밀함이 부족했던 문제였던 것이고, 그 표현이 단지 세밀함의 부족인지, 진심인지조차 구분 못하는 것은 전적으로 이태경씨의 '삐툴어진 사상' 덕분인 듯 하다. 그는 글 말미에서 "실존적인 인간 등에 대한 종합적이고 구체적인 이해가 진보ㆍ개혁진영에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라고 말하지만, 그는 겨우 내가 지향하는 인간이 되기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라는 식으로 빠져나가고 만다. 대체 이런 변명이 인간의 실존적 이해와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그냥 솔직히 말해서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이 하고 싶은건 아니고? 김용철의 책 <삼성을 생각한다>에도 그 놈의 "목구멍이 포도청"이어서 어쩔 수 없다고 말한 구조본 간부의 이야기가 실렸던 기억이 난다. 다들 그런식으로 자기 합리화를 하고 산다. 이태경씨는 혹시 '그러니 어쩔 수 없다, 걍 닥치고 살아라'라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닌지?

 

언제까지 반자본, 도덕적 엄격주의를 고집할꺼냐고 다그치는데, 오히려 나는 언제까지 그렇게 자기 편한대로만 문제를 선별해서 보고 근본적 문제를 우회하는 '사상적 기회주의'를 고수할거냐고 묻겠다. 사실 어떤 문제가 터졌을 때, 특정 개인을 찝어내어 "저 놈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것 만큼 속 편한게 어디있겠나? 그런 면에서 反MB나 反이건희나 다 똑같긴 매한가지다. 무노조 경영과 황제식 경영으로 대표되는 삼성식 글로벌 스탠다드를 이건희가 만들었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 군산복합체를 앞세운 전쟁기계 미국이라는 제국은 조지 부시 혼자 만들었나? 조지 부시 물러나고 나니 미국은 좀 살림살이 나아졌나?

 

삼성경제연구소는 괜히 있는게 아니다. 그리고 사회 곳곳에 암약하고 있는 삼성 장학생들도 허수아비는 아니다. 걔들이 이건희가 물러난다고 '좋은 시절은 다 갔구나'하면서 낙향해서 인생을 관조하며 살려고 할까? 정말 꿈같은 얘기일 뿐이다. 이건희의 황제식 경영이 없어지면 삼성은 좋은기업이 될 수 있을까? 그렇게 되면 지배구조의 문제는 얼마간 해결될지 모르겠으나, 삼성이 초일류 그룹으로 성장하려 하면서 빚어낸 '노동'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태경씨는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게 뭐 어쨌다구?" 지금까지 그가 프레시안에 기고한 글들만 보면 충분히 예상 가능한 대답이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이 이윤을 위해 노동력을 구매하여 잉여를 수취하는 활동은 지극히 정상적인 활동이기 때문에 문제될게 없다는 식으로 말한다. 혹여나 그 과정에서 부당한 문제들(이를테면 박지연씨 사례 같은 것)이 발생한다면 그건 부당한 지배구조의 문제일 뿐이다. 결국 노동과 자본과의 관계에선 처음부터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니 결국 그는 하승우의 '자본주의 너머를 꿈꾸자'는 주장도 탐탁치 않다는 고백을 하는 것이다. 일본에서 몇 십년동안 시장경제 자본주의를 맹신하던 일본의 경제학자가 최근 경제위기를 계기로 <자본주의는 왜 무너졌는가>라는 제목의 책까지 쓰는 마당에 자본주의 너머를 꿈꾸는게 무슨 쌍팔년도 구닥다리 유품 뒷다리 만지는 것이라도 되는냥 말하는 그의 확신에는, 확실히 21세기 자본주의 변화에 대한 '감각'이 결여되어 있다. 자신의 정세에 대한 둔한 감각 때문에 자기 상상력을 제한하는 거야 말릴 수 없지만, 남이야 자본주의 너머를 꿈꾸든 말든 제발 냅뒀으면 하는 바람이다.

 

더 웃긴건 "혹시 하 활동가가 자본주의 체제 하의 국가를 마르크스가 말한 "부르주아지들의 일상사를 처리하는 위원회"로 간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염려된다."라고 하는 부분이다. 그게 왜 염려되는가? 자기 말대로 자본주의 국가는 북구 유럽처럼 국민들의 집합적 의지에 의해 조직될 수 있는 것인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서? 그러면 그건 그냥 생각이 다른거지 염려될 이유가 되지 않는다. 가만 보면 이 양반은 마르크스의 주장과 비슷한 구절만 나와도 경기를 일으키는 것 같다. 부디 그대안의 색깔론을 성찰해 보시길 바라오.

 

게다가 "사익추구집단으로부터 권력을 탈환해 대한민국 국민들을 행복하게 만들 의무가 있는 진보ㆍ개혁 진영이 반(反)자본주의 혹은 포스트 자본주의라는 프레임에 갇혀 있는 한 집권은 요원한 일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여러 말 필요없이 이런 대답이 필요하다. "집권이 그렇게 좋으면 혼자 하세요." 사익추구집단으로부터 권력을 탈환한다고? 이 사람의 권력과 집권에 대한 상상력은 딱 구소련적이다. 그렇게 해서 누군가가 권력을 탈환한다면 그들은 또 다른 사익추구집단일 뿐이다.

 

반론 글을 또 보낼 생각은 없다. 프레시안 지면상에서 이태경씨가 너무 수차례 까여서 좀 불쌍하기도 하고, 지면상에 그의 이름이 수차례 거론되는것도 그닥 좋은 일은 아니란 생각도 든다.

 

끝으로 이태경씨 글에 대한 댓글 중에 완전 공감되는게 있어서 옮겨적는다.

 

 

"자본주의 역사에서 삼성만한 기업은 수없이 많았고 사라진 기업도 부지기수다. 불매운동과 상관없이 저물어가는 삼성이 보인다. 삼성의 정점은 이미 끝났다. 지금의 서프라이징은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환율조작, 납품가 압박을 통해 국민의 이익, 하청업체의 이익을 갈취한 것에 불과한 것이고 혁신에 의한 결과가 아닌것만 봐도 삼성은 이미 끝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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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경 비판] 이건희와 가신그룹만이 문제인가?

 

[이태경 비판] 이건희와 그의 가신그룹만이 문제인가?



김상봉 교수(이하 존칭 생략)의 제안 글 이후 이어진 기고들에서 쟁점은 주로 소비자운동으로서 ‘불매운동’과 궁극적 운동의 목표로서 ‘삼성해체’, 이 두 가지로 압축되는 듯 하다. 이 중 전자에 대해서는 나를 포함해 많은 이들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듯 하니 굳이 말을 보탤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이태경이 주되게 비판하고 있는 후자와 관련한 쟁점이다.(<삼성 해체가 답인가?>, <삼성 임직원 전체를 적으로 돌리지 말라">) 이태경은 삼성해체 주장에 대해 이건희와 그의 가신그룹만 문제 삼으면 될 것을 왜 삼성 전체의 문제로 부당하게 확대시키느냐고 불만을 표한다. 그는 ‘구좌파적 사고’라는 말까지 거론하며 김상봉의 제안을 평가절하하는데, 그러나 그의 ‘세련된’ 주장엔 함정이 너무 많아 보인다.



나쁜 기업은 해체되는게 맞다


나는 처음 김상봉의 삼성 불매운동 제안 글을 보고 그가 바람잡이 노릇을 자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이 글을 통해 자신의 경향신문 칼럼이 게재되지 못한 것을 오히려 전화위복으로 삼아 삼성문제를 전 사회적 논쟁의 공간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일단 ‘질렀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그래서 김상봉의 의중을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나는 그가 ‘삼성해체’라는 말을 논쟁의 멍석을 깔기 위한 일종의 자극적 수사로 이해했다. 그의 글에서도 삼성이 해체되어야 한다는 주장과 왜 그래야 하는지 근거는 있지만, 삼성을 어떻게 해체시키고 그래서 그 다음엔 어쩌자는 건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그러니 그의 제안에 대해 “하지만 정작 방법에 대한 문제는 적고, 삼성을 해묵은 비위 사실과 모순에 관한 철학자로서의 성찰이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불평하는 이들도 있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 하다. (<진알시 회원, ‘삼성 불매운동’에 할 말 있다>, 오마이뉴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삼성해체’를 주장하는 김상봉의 글은 단지 논쟁의 출발점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지극히 정당하다. 우리에게 상상을 초월하는 위법, 무법, 탈법, 초법적 행태들을 선보인 삼성, 어디로 보나 국내에서 가장 나쁜 기업 삼성은 해체되는 것이 맞다. 이것은 웬만한 기업들에게도 적용되어왔던 ‘관행’이고, 요새 유행하는대로 말하자면 ‘법치주의’에도 부합한다. 삼성이 아니라 다른 소규모 기업들이 이 정도였다면 이미 예전에 임직원들 줄줄이 소환되어 콩밥먹고, 기업은 다른 사람에게 조각조각 팔려져 나갔을 것이다.


이미 국가적 통제를 초월하여 국가위에 군림하게 된 삼성을 정상화시켜 국가와 사회의 통제아래 안착시키는 것이 목적이라면 해체시키는 것이 맞다. 그 이후 삼성의 지배구조를 어떻게 개편할 것이며, 사법권력을 비롯한 국가권력과의 관계를 어떻게 재구성 할지는 해체가 전제된 상황에서 논의되는 것이 옳다. 여기서 사람들이 우려하듯 ‘해체’를 ‘공중분해’라는 식으로 이해할 필요는 전혀 없다. 부당하게 독점된 권력과 자본은 해체되고 분산되어야 한다. 3%의 주식만을 소유하고도 회장 일가가 기업 전체를 쥐락펴락하는 상황은 이태경씨가 그리도 옹호한 ‘건강한 시장경제’에도 어울리지 않는다. 내 예상으로는 이태경씨가 말하는 ‘강하고 유능하고 정의로운 국가’가 등장한다면 ‘공정한 시장경제’와 ‘법치주의’에 입각해 삼성을 해체시킬 것 같다. ‘기업에 대한 불신과 적대감’ 때문이 아니라.



임직원의 침묵도 범죄다


나아가 이태경씨는 삼성문제에 대한 원인과 해결책에 대해 황당한 인식을 갖고 있다. 그는 “국가가 '이건희 일가 및 가신그룹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제 역할을 조금도 하고 있지 못한 현 시점에서 시민들이 '이건희 일가 및 가신그룹 문제'를 풀 수 있는 실마리는 소비자 운동(삼성 제품에 대한 불매운동)뿐”이라고 말한다. 왜 삼성의 문제가 이건희 일가와 가신그룹의 문제이며, 또 불매운동이 왜 그 문제만을 위한 해결책이 되어버렸는가? 김상봉도 첫 제안글에서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다.


표면적으로 부각되는 삼성의 문제는 이건희와 그 가신그룹의 비자금과 사법권력과의 유착, 부당한 지배구조의 문제로 드러나겠지만, 실질적인 문제는 오히려 이런 문제를 낳을 수 밖에 없었던 ‘삼성식 글로벌 스탠다드’에 있다. 이건희 회장의 황제식 경영이 ‘CEO리더십’으로 칭송받고, 삼성의 무노조 경영원칙은 온 나라에 ‘노조포비아’를 유포시켰다. 이는 노동자의 무권리 상태를 오히려 당연하게 여기게끔 만들었다. 지금까지 삼성반도체에서 24명이 백혈병이 발병하고, 13명이 사망해도 업무상 재해가 아닌 개인 질병이라고 매도해 이들을 두 번 죽이는 행태를 보였던 것이 삼성이었다. 이 백혈병 노동자의 문제를 고발하고 해결을 위해 일하던 한 노무사는 엉뚱하게도 경찰에 끌려갔다. 나의 누나도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삼성 전기 공장에 취직해 일했는데, 제품 검사 라인에서 주야를 번갈아 가며 일하다가 눈에 이상이 생겨 퇴사했다. 하지만 누나는 돈 잘 주는 회사를 왜 그만뒀냐는 아버지의 질책을 받아야 했다. 이렇게 우리의 삶과 노동의 한 가운데로 들어와 버린 문제들이 이건희 일가와 가신그룹의 문제만 해결하면 되는 정도의 일인가?


또한 그는 삼성 불매운동이 삼성 임직원 전체를 적으로 만들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이쯤 되면 ‘미국의 이라크 침공 반대 운동이 미국 국민들의 반감을 살 수 있으니 신중해야 한다’는 말처럼 황당하게 들린다. 물론 우리는 삼성 임직원 전체를 매도해서도 안되고, 그럴 이유도 없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삼성의 임직원이 삼성의 부정한 행위에 대해 인식하고 이에 대해 정당한 목소리를 내는 것은, 그 일의 쉽고 어렵고를 떠나서, 인간으로서의 ‘의무’라는 사실이다. 나치 전범재판에 회부된 아이히만을 관찰하면서 한나 아렌트가 말했던 것처럼 인간에게 사유는 '능력'이 아니라 '의무'이다. ‘직장’에선 유태인 학살을 자행했던 아이히만도 집에 돌아가면 자상한 아버지요, 성실한 남편이었다. 처음부터 나쁜놈은 없다. 다만 그가 사유하고 실천하지 않는 순간 ‘인간 이하의 존재’가 될 뿐이다. 아마도 김용철은 삼성 임직원 중에서 유일하게 ‘인간 이하의 존재’이기를 거부한 사람, 인간의 의무를 다한 사람으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 (또한 2006년에 삼성 사내 게시판에 삼성 직원들을 ‘끓는 물속에 서 잠자는 개구리’라고 비유하며 삼성식 경영을 비판하며 사직한 모 신입사원도 김용철 변호사에 비해 사회적 파장은 작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소중한 실천의 기록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아래의 시를 이태경씨와 삼성의 임직원들에게 전해주고 싶다.




관료에게는 주인이 따로 없다!

봉급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다!

개에게 개밥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듯


일제 말기에 그는 면서기로 채용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근면했기 때문이다


미군정 시기에 그는 군주사로 승진했다

남달리 매사에 정직했기 때문이다


자유당 시절에 그는 도청과장이 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성실했기 때문이다


공화당 시절에 그는 서기관이 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공정했기 때문이다


민정당 시절에 그는 청백리상을 받았다

반평생을 국가에 충성하고 국민에게 봉사했기 때문이다


나는 확신하는 바이다


아프리칸가 어딘가에서 식인종이 쳐들어와서

우리나라를 지배한다 하더라도

한결같이 그는 관리생활을 계속할 것이다


국가에는 충성을 국민에게는 봉사를 일념으로 삼아

근면하고 정직하게!

성실하고 공정하게!


- 김남주의 “어떤 관료” 중에서 -


 

 

(프레시안에 실림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100324200059&section=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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