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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6/15
    리처드 르원틴, <DNA 독트린> (궁리)
    구르는돌

리처드 르원틴, <DNA 독트린> (궁리)

그러나 다윈 자신은 생존을 위한 투쟁에 대한 생각의 원천이 무엇인지 의식하고 있었다. 그는 자연선책에 의한 진화의 개념이라는 착상을 18세기 말의 경제학자인 토마스 맬서스의 유명한 저서 <인구론>을 읽으면서 얻었다고 말했다. 이 저서는 과거 영국에서 시행되던 빈민구제법(Poor Law)에 반대하는 내용이었다. 맬서스는 그 법이 지나치게 관대하다고 생각했고, 빈민들이 아이를 낳을 수 없도록 좀더 엄격하게 통재해서 사회적 불안을 일으키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자연선택을 기초로 한 다윈의 이론은 전체적으로 스코틀랜드 경제학자들에 의해 수립된 초기 자본주의의 정치경제학 이론과 놀랄 만큼 흡사하다.

다윈은 매일같이 신문을 읽으면서 주식투자로 생계를 꾸렸기 때문에 경제학적인 적자생존에 대해 얼마간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다윈이 한 일은 19세기 '정치' 경제학을 받아들여서 그것을 '자연이라는' 경제의 모든 것을 포괄하도록 확장시킨 것이었다. 나아가 그는 진화의 성선택 이론을 발전시켰느데, 여기에서 작용하는 주요한 힘은 수컷을 선택하는 암컷들에게 좀더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해 애쓰는 수컷들 사이의 경쟁이다. (25-26쪽)

 

 

 

서로 다른 인종들은 공격성이나 창조성, 그리고 음악성에서 유전적 차이를 갖는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문화 전체가 문화적 고물(古物)의 작은 부분들로 이루어진 것으로 간주되었다. 일부 사회생물학자들은 그것을 '문화유전자(culturgens)'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런 관점에 의하면 문화는 미학적 선호, 짝짓기 선호, 노동과 여가의 선호와 같은 파편과 조각을 그러모은 푸대 자루인 셈이다. 그 푸대를 쏟아놓으면 당신 앞에 문화가 펼쳐질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하나의 위계 체계가 완성된다.

유전자는 개인을 만들고 개인은 특정한 선호와 행위를 나타내고, 이러한 선호와 행위의 집적이 문화를 만든다. 따라서 결국 유전자가 문화를 만드는 것이다 .분자 유전학자들이 우리에게 인간의 DNA 배열을 찾아내는 데 들어가는 많은 돈을 내놓으라고 채근하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의 모든 유전자를 구성하는 분자들의 배열을 알아내면 인간의 본질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33-34쪽)

 

 

 

우리는 우리 유전자에 의해 영향을 받지만 결정되지는 않는다 .발생은 부모로부터 유전받은 물질에 --유전자, 그리고 정자와 난자-- 의존할 뿐 아니라 발생하는 개체에 영향을 주는 특정한 온도, 습도, 영양분, 냄새, 시각, 소리(우리가 교육이라고 부르는 것을 포함해서) 등에도 의존한다. 설령 내가 한 유기체 내의 모든 유전자의 완전한 분자적 세부사항을 남김없이 알고 있다 하더라도, 나는 그 유기체가 어떤 모습이 될지 예측할 수 없다. 물론 사자와 새끼양의 차이는 거의 전적으로 그들의 유전자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같은 종(種) 내의 개체 사이에서 나타나는 편차는 유전자와 발생환경 사이에서 일어나는 끊임없는 상호작용의 고유한 결과이다. 게다가, 매우 기이하게도, 설령 내가 발생하는 유기체의 유전자와 그 발생환경의 완전한 배열을 남김엇이 알고 있다 하더라도, 나는 그 유기체의 특성을 모두 예측할 수 없다.

거기에는 또 하나의 요인이 작동하고 있다.  가령 우리가 초파리 날개 아래쪽에 나 있는 털의 숫자를 센다고 하자. 그리고 왼쪽 날개와 오른쪽 날개에 나 있는 털의 숫자가 다르나든 사실을 발견했다고 하자. 어떤 파리는 왼쪽에 털이 더 많이 났고, 어떤 파리는 오른쪽에 더 많이 나 있고 평균적인 차이는 없다. 그렇다면거기에는 계속 변동하는 비대칭이 존재하는 셈이다. 그러나 초파리 개체는 몸의 왼쪽이나 오른쪽이나 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게다가 발생하는 초파리와 초파리가 발생하는 장소의 지극히 작은 크기로 미루어볼 때 초파리의 왼편과 오른편의 습도, 산소, 오도는 동일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왼족과 오른쪽의 차이는 유전적인 것도 환경적 차이에 의한 것도 아니며, 발생이 진행되는 동안 세포의 성장과 분화에서 나타난 임의적인 변이, 즉 발생 잡음(developmetal noise)에 의한 것이다.

이처럼 발생에 개입되는 우연이라는 요소가 변이의 중요한 원천이 된다. 실제로 초파리의 날개털의 경우 유전적, 환경적 변이만큼이나 많은 발생 잡음에 의한 변이가 있다. 사람의 경우에는 개인 사이에서 얼마나 많은 차이가 배아(胚芽) 시기와 유아 시절의 신경세포의 성장 과정에서 나타난 임의적인 차이에 기인하는지 알지 못한다. (...)   (54-56쪽)

 

 

 

현대의 과학적 의학이 이익을 가져단준다는 증거는 무엇인가? 분명 우리는 우리의 선조들에 비해 훨씬 오래 산다. 1800년대에 북아메리카 지역에서 태어난 백인 아동의 평균 기대 수명은 45세에 불과했지만 오늘날에는 75세로 늘어났다. 그러나 그 이유가 현대 의학이 성인과 환자들의 수명을 연장시켜 주었기 때문은 아니다. 평균 기대 수명의 변화를 일으킨 가장 큰 요인은 유아 사망률의 급격한 감소이다.

20세기 이전, 특히 19세기 전반기와 중반기까지 신생아가 첫 돌이 되기 저에 죽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1860년대에 미국의 유아 사망률은 무려 13퍼센트나 되었다 .따라서 이처럼 높은 유아 사망률로 인해 인구 전체의 평균 수명이 크게 낮아진 것이다. 19세기 중엽에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묘비는 그들 중 괄목할 정도로 많은 숫자가 아주 오래 살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실제로 과학적 의학은 이미 성년에 도달한 사람들의 수명을 늘리는 데에는 거의 기여하지 못한다. 지난 50년 동안 이미 60세가 된 사람들의 기대 수명은 고작 몇 개월이 늘어났을 뿐이다.  (79-80쪽)

 

 

 

실제로 개인들의 단백질을 구성하는 아미노산 배열은 정상적인 개인과 다른 정상적인 개인 사이에서도 엄청난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특정 단백질이 그 기능에 아무런 손상도 가져오지 않으면서 다양한 아미노산 구성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리고 가령 3천 개의 뉴클레오티드로 이루어진 평균적인 유전자 하나에서 보통의 성인 두 사람이 약 20개의 다른 뉴클레오티드를 갖는다. 그렇다면 보통 사람의 뉴클레오티드 배열을 위한 카탈로그를 만들기 위해서 누구의 게놈을 이용해야 하는 것인가?

나아가 모든 정상인들은 한쪽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 속에 많은 슛자의 결함을 가진 유전자를 보유하고 있다. 이 결함 유전자들은 다른 쪽 부모에게서 받은 정상적인 유전자에 의해 가려져서 드러나지 않는다. 따라서 염기서열이 해석된 DNA의 모든 부분들은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결함을 가진 특정 숫자의 유전자들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결함이 결국 카탈로그에 포함되는 셈이다. 질병을 가진 사람의 DNA와 정상적인 DNA 염기서열을 비교했을 대, 두 DNA 사이에 여러 가지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중 어느 것이 질병을 일으키는 원인인지 판단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따라서 DNA 사이에서 나타나는 공통된 차이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정산인과 질병을 가진 사람들로 이루어진 상당히 큰 집단을 조사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더욱이 문제의 질병이 복수의 유전적 원인을 가지고 있어서 사람들마다 그 질병을 일으키는 원인이 다른 경우에는 그런 방법으로도 효과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설령 그런 원인들이 유전자 변화의 결과라 할지라도 말이다.  (92-94쪽)

 

 

 

그러나 불행하게도 살아있는 유기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DNA보다 훨씬 많은 것이 필요하다. 언젠가 나는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분자유전학자 중 한 사람이 과학학술회의의 개막 연설에서 만약 자신이 충분한 용량의 컴퓨터와 어떤 생물의 완전한 DNA 염기서열을 가지고 있다면 그 생물을 계산(compute)할 수 있다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여기에서 '계산한다'는 말의 의미는 그 생물의 해부학, 생리학, 그리고 행동을 완전히 기술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틀린 것이다. 그 생물조차도 자신의 DNA를 통해 스스로를 계산하지 않는다. 살아가는 동안 특정 시기의 유기체는 내부적인 힘과 외부적인 힘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상호작용과 결정의 결과로 이루어지는 발생적인 역사의 고유한 결과이다. 여기에서 외부적인 힘들 자체도 -- 흔히 '환경'이라고 생각되어지는 것들 -- 부분적으로는 그 생물이 자신의 존재 조건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과정에서 수행하는 활동의 결과이다. 생물은 자신이 그 속에서 발생하는 세계를 발견하지 않는다. 그들이 그 세계를 만드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내부적 힘들도 자율적인 것이 아니며, 외부에 상응한다. 세포 내부의 화학적 기구들 중 일부는 외부 조건들이 그것을 필요로 할 때에만 만들어진다.  (...)

어떤 파리는 왼쪽에 털이 많고, 다른 파리는 오른쪽에 더 많다. 게다가 파리 몸체의 양편에서 나타나는 변이는 파리 개체들 사이의 평균적인 변이보다도 더 크다. 그러나 파리의 몸 양쪽은 모두 동일한 유전자를 가지며, 동일한 환경에서 발생 과정을 거쳤다. 몸 양쪽의 변이는 임의적인 세포 운동의 결과이며, 이른바 '발생잡음(developmental noise)'이라 불리는 발생 과정에서 세포 속에서 일어나는 우연한 분자적 사건들의 산물이다. 일란성 쌍둥이의 지문이 서로 다르고, 모든 사람들의 왼손과 오른손의 지문이 다른 까닭도 이러한 발생 잡음에 의해 설명된다. 발생중인 생물과 마찬가지로 실내 온도에 민감하고 내부 회로에 잡음의 여지가 있는 컴퓨터가 모든 것을 계산할 수 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113-115쪽)

 

 

 

DNA 메시지로부터 인과적 정보를 어더내기가 어려운 깊은 이유는 동일한 '단어(word)'들이 문맥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지며, 주어진 문맥에서도 복수의 기능을 갖기 때문이다. 그것은 복잡한 언어의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영어에서 어떤 단어도 'do'처럼 행위를 강력하게 함축하는 말은 없을 것이다. 가령 "지금 당장 해!(Do it Now!)"와 같은 경우가 그런 예이다. 그러나 "나는 모른다(I do not know)"의 사례처럼 대부분의 문맥에서 'do'는 조동사로서 기능할 뿐 그 자체로서는 아무른 의미도 갖지 않는다. 조동사 'do'는 스스로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지만 문장의 배열에서 일정한 자리를 지키고 간격을 띄워주는 어간 요소로서 언어적 기능을 한다는 점에서 의문의 여지가 없다. 만약 이런 기능이 없었다면 'do'는 원래 영국 중부에서 기원한 16세기 일반적인 영어 용법 속으로 스며들어가서 도처에서 "나는 알지 않는다(I know not)"와  같은 고어체를 대체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유전자 메시지 속에 들어있는 요소들은 스스로 의미를 가질 수도 있고 조동사와 같은 기능을 할 수도 있다. 유전부호의 염기서열 GTAAGT는 때로는 세포에 의해 단백질 속에 아미노산 발린(valine)과 세린(serine)을 삽입시키라는 명령으로 읽히기도 하지만, 때로는 세포기구가 그 부분을 잘라 메시지를 편집하라는 장소라는 신호를 뜻하기도 하며, 때로는 조동사 'do'처럼 단순한 사이띄개의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애석하게도 우리는 세포가 가능한 여러가지 해석 중에서 어떤 쪽을 선택하는지 알지 못한다. 이따금씩 사람의 건가을 위해 인간게놈의 염기서열을 밝히는 프로젝트가 중요하다는 주장이 생물학적 성서의 해석학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기 위한 교묘한 광고전략이 아닌지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120-121쪽)

 

 

 

최근 이른바 '은밀한 우생학(back-door eugenics)'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기 이루어지면서, 개인들에게 강요된 선택으로 인한 뜻밖의 결과로 우생학이 새롭게 등장하게 될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 하는 것은 히틀러와 같은 독재자가 나타나거나 특정 정부가 소수민족이나 특정 집단을 미래 세대의 대열에서 배제시키려는 정책을 수립하는 것과 같은 실현 불가능한 사태가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아이들의 류를 스스로 선택하는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리고 아무도 명시적으로 우생학적 지침을 제시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미래 세대를 선별(select)하게 되는 사태에 대한 것이다. 이 새로운 우생학은 복수(複數)의 자발적인 결정에 의한 결과이며, 표면적으로는 어떤 외부적인 강제나 정책도 개입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132쪽 주석)

 

 

 

DNA에 대한 지식의 집중은 결정론적 이데올로기를 형성하는 정도를 넘어 도로시 넬킨과 로렌스 탄크레디가 '생물정보의 사회적 권력'이라고 부른 보다 직접적인 실천적,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결과를 야기시키고 있다. 자신들의 소망을 성취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스스로의 장미빛 환상을 부채질하고 있는 지식인들은 이러한 지식이 힘일하고 말하지만, 오히려 지식은 그 지식을 가진 자, 그리고 그 지식을 사용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자에게만 권력을 부여할 뿐이라는 것이 진실에 가깝다. (...)

한 여성이 자신의 태아가 낭포성 섬유증에 걸릴 확률이 50퍼센트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대, 또는 남편이 간절히 아들을 원하는데 태아가 딸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대, 그녀가 그 사실을 안다고 해서 그 이전보다 더 많은 힘을 얻지는 못한다.

오히려 그 지식 때문에 그녀가 국가나 남편과 맺고 있는 관계가 행사하는 제약의 볌위 내에서 어떤 결정을 내리고 그에 따라 행동하도록 강요받을 뿐이다. 그녀의 남편은 낙태를 허용할 것인가, 또는 요구할 것인가? 국가는 낙태 비용을 대 줄 것인가? 그녀의 의사는 낙태 수술을 시술할 것인가?  (138-1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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