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르는돌님의 <삼성을 생각한다> 관련 글 "삼성 임직원의 침묵은 범죄다."

김진호 목사님의 <삼성을 생각한다> 관련 글 "삼성왕국, 포스트민주화 시대의 우울한 초상"

 

 

이태경 토지정의시민연대 사무처장이란 분이 <삼성을 생각한다> 관련 <프레시안> 투고글들에 대한 반박글을 계속해 보내던데.. 요지인즉슨,


시장경제의 정상화와 이를 때론 뒷받침하고 때론 견제하는 선한 법치국가 건설이야말로 삼성 문제 해결의 관건이란 얘기더라고요. 삼성 문제의 본질은 삼성이란 대기업조직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이건희 일가의 전근대적이고 부당한 전횡이라면서요. 그야말로 건전한 '시민적 상식'들의 엑기스, 결정판이라고 할까..

 

그러는 와중에 자신은 (맑스가 정식화한) 잉여가치론을 전혀 지지하지 않는다고 밝혀요. 다른 한편으론 매우 적절하게도, 자본주의 생산양식하에서 기업조직이 노동력으로부터 잉여가치를 수취해 이윤을 창출하지 않은 적이 있냐면서요. 아마도 잉여가치나 이윤의 발생이 여러 형태의 착취의 발생과 불가결하게 연루돼 있음을 인정하기 싫거나, 최소한 모든 이윤이 착취(를 전제한 권력)에서 비롯될 리는 없다고 믿고 싶단 거겠지만..

 

결국 삼성그룹이 이건희일가 및 이학수 등 친위그룹 같은 인적 종양을 떼고서 어떡함 (더) 잘 나갈 수 있을지 고민해야지, 삼성이나 기업법인의 조직 원리 자체를 문제 삼는 건 현실적 해법도 아니며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거예요.

가히 경의를 표할 만한 이태경씨의 저 시민(운동)적 소신이, 김진호 샘 목회글에서 인용된 코헬렛 옹이 갈파한 바, "헛되고 헛되다.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라는 말과 자꾸 오버랩이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지 싶대요. 이태경씨의 꿈, 근까 토지정의를 실현하는 '시민사회'의 상이 이 시민(운동)적 소신과 별개일 리도 분명 없을 테고요. 그러니까, 이태경씨의 토지정의가 다다를 곳이, 아마도 땅으로 부당한 지대를 추구하는 '전근대적' 폐단을 일소하고, 근대 시장경제의 미덕과 은총을 저마다 누릴 민주적 정의사회 내지 선진조국을 구현하는, '시민'들의 공동체라면 말예여.

웬지, 이런 자신의 소신을 당당히 드러냄으로써,
'시민'운동계 일반의 밑바닥 내지 물적 토대를 그야말로 본의 아니게 보여주는구나 싶달까요.

그래서 차라리 문제는 이태경씨가 진심으로 바라 마지 않을, 시장경제-민주정의사회-선진조국 구현이 삼위일체를 이루는 그런 공동체는 언제나 '특권화된 일부 시민'들의 공동체로서만 굴러가고 지속가능하다는 점일 텐데..  

 

달리 말해 명목상 영토국가의 주민 모두가 아무리 '시민'이라 한들, 이런 시민적 이상을 구현, 유지하자고 (대)다수 주민은 체계적으로 배제된 자로서만 공존해야 하는 '시장천국 불신지옥의 공동체'를 뭣 때메 추구해야 하느냐는 거겠죠.

그래섭니다. 이런 공동체의 구현에 어떻게든 매달리려 하는 쪽이 되려 참으로 기이해 보이는 까닭은요.
이런 식이라면, 가히 세속화된 종교적 집착이라 해도 좋을 시민사회의 맹목-통상 시민적 합리성이라고 하는-이 되려 문제겠다고 할까요.

 

더 나아가 한국인이라는 특정 시민으로서의 자격을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그로 인한 자긍심에 뿌듯해한다 한들, 특권화된 세계-시민이 되는 것뿐 대다수 국내외 주민들의 체계적 주변화는 여전한 걸로도 모자라 더 악화될 판인데, 그게 도대체 뭐 그리 뿌듯해할 일이겠냐는 얘깁니다.

 

더군다나, 그런 시민과는 다른 사람이 됐으면 좋겠고, 기왕이면 이런 사람들이 살기 좋은 사회편제로의 실질적이고도 근본적인 전환에 전력해야겠다는 사람들한테다, 니가 삼성그룹을 총괄해 보라느니 그런들 이건희의 발톱만큼이나 할 수 있겠냐느니 배알이 그렇게 꼴렸냐느니 삼성그룹 아니었으면 니가 그렇게 입이나 놀릴 수 있었을 줄 아느냐느니 하는 건..;;

 

왜 니들은 멀쩡한 망치 갖고 사람은 안 잡고 집을 지으려 드냐며, 때론 정말 잡아먹을 듯이 달려드는 격이져 이쯤 되면.

 

아닌 게 아니라, 이런 감각적 도착자들 덕분에 막상, 망치를 그저 집 짓는 데만 쓰는 게 과연, 정말로 온당한 일인가 하는 생각이 이따금 들긴 해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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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26 11:50 2010/03/26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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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피뇨 2010/03/28 00: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태경씨는 장석준씨의 "진보의 미래" 독후감에도 반론을 썼었죠.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100105073720§ion=02

    그는 "구좌파적 상상력"에 굉장한 반감을 가지고 있나봅니다. 말이 '구좌파적 상상력'이지, 실은 "아직도 정신 못차리고 맑스를 추종하는 낡고 꽉막힌 꼴통 교조주의자 색휘들" 이라고 말한 걸로 읽어야겠죠. '사민주의'를 주창하는 사람들 중 일부도 장석준과 김상봉, 그리고 '전진'을 무척 혐오하고요.

    "국가의 역할은 시장이 건강하고 공정하게 작동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일이다. 불로소득의 근절, 독과점의 방지, 공정한 거래의 확보, 균등한 기회의 제공, 특권과 반칙의 폐절, 법치주의의 확립 등이 바로 그것이다. 국가권력이 부당하게 행사되는 자본의 지배권을 차단하고 제어하는 것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이나 부당한 '자본의 지배권'행사가 자본의 본성인 것처럼 묘사하는 것은 현실을 왜곡하는 것이기 쉽다."

    대체 누가 유토피아적이고 순진하고 교조적인건지.

    • 들사람 2010/03/28 01: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네, 그러고 보니 그때도 그랬네요..ㅎ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이라는 시민적 주술을 성실히 섭렵해 오셔서 그런지, 막상 근대국가는 정말 어떻게 굴러먹어온 초국적 제도며, 근대적 부의 창출기제인 자본축적 과정이 어떤 속성을 가진 지구적 권력 메커니즘였는지는 정작 알고 싶지 않으신 모양이예요. 그저 구미권 사회과학계에서 잘 뽑아놓은 이론적 마네킨, 근까 유토피아적이고 나르시시즘적인 근대성 담화양식에 한껏 들려 있으시다고 할까.. 아마, '1991년 이후' 게임은 다 끝났다는 판단이겠져.ㅎ

      그런 시민적 소신 내지 학식이야 그 전부터 강화돼오던 것이었겠지만, 그런 와중에 좌파임을 자처하는 분들한테 엄청 데였던 경험이 작용했을 가능성도 배제하긴 어려운 듯 싶고요. 구체적으로 어떻게 데였길래 그런 건지야 그분만이 아는 거겠지만요.ㅋ

      근데, 제가 보기엔 외려 이태경씨 같은 입론으로 '남부럽잖은 시민사회'를 꿈 꾸시는 분들의 입지는 갈수록 더 좁아지지 않을까 싶던데.. 이 분들야말로 이젠 게임 끝났다고까진 단언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제 발등 찍거나 아까징끼 발라주고 중병 나게 만드는 식의 오락가락 행보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체의 논리 탓에 보기 민망할 정도로 잦아질 것 같거든요. 인용해주신 그 지향, 모범적인 시민들의 세속화된 신앙이라고 할 바로 그런 지향 때문에 말이죠.

      소위 선진국들에서 그나마 구현됐다고 하는 아름다운 이상들도 따지고 보면 저 시민사회적 유토피아를 지속시키겠다며, 아프리카나 라틴 아메리카, 아시아 지역 쪽을 노폐물 하치장 삼아 디스토피아로 맴돌이하게 만든 결과들인 건데,, 한국 같은 반주변부 국가에선 지금대로라면 지배적 자본의 대외 경쟁력 강화와 '브랜드 가치'(=시민적 자부심) 제고를 이유로 대내적 양극화/헐벗음의 추세는 더 심해지고, '글로벌씨티' 서울 이외 지역의 내부 식민지화 정도도 한층 더 강화되는 양상을 띨 테고요. 이런 정황이 자꾸 드러나면 날수록 이태경씨 같은 시민운동가들께선 외려 인용하신 교리만 주문 외듯 주문할 공산이 크겠다는 건데.. 제 맘이야 물론 아니 그랬음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별로 그렇지가 않을 듯싶어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