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들어 한국이란 데선 이런저런 죽음의 의미를 둘러싼 해석투쟁이 한창입니다.
도심 재개발지구에서 계속 살고 싶어 했다고 화마에 휩쓸려 가야 했던 세입자 6명의 죽음, 그저 열심히 일했는데도 정리해고 대상이 되고 만 쌍용자동차 평택공장 노동자들과 가족들의 죽음, 깨끗하다는 글로벌 일류기업에서 백혈병이 생긴 뒤에야 발암성 공정의 ‘더러운 비밀’을 알게 된 삼성전자 노동자들의 죽음, 황당한 이유로 수몰됐건만 주류 부자신문들이 뿜어대는 각종 유언비어의 홍수 탓으로 거듭 수몰될 처지에 내몰린 천안함 사병들의 죽음, 이들을 구하려다 함께 수몰됐는데도 영웅은 커녕 애물이 됐던 어업노동자들의 죽음을 둘러싸고서 말이죠.
요컨대, 이들 죽음이 죽음인지, 아니면 사실상 ‘죽임’인지를 둘러싼 투쟁인 셈입니다. 따지고 보면 이런 투쟁은 자본주의적인 발상이 안타깝게도 지속적인 하나의 사회체제로서 등장한 이래 이어져온, 매번 새로우면서도 참으로 익숙한 것이겠지만요.
지금 이곳 한국에서 진행중인 상황의 새로움이란 그럼 뭐라 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그건, 이곳 건설노조가 며칠 전 서울에서 벌인파업 때도 나온 얘깁니다만, 이런 죽음이 사실 더는 요란한 사건·사고가 아니라 소리 없는 일상이 된 지 오래라는 데 있을 겁니다. 익히 알고 계신지 몰라도, 대한민국이란 데서 벌어지는 ‘자발적 죽음’, 즉 자살 충동의 강도와 증가 추세는 특히 2003년 이후 세계의 첨단을 달릴 정도라니까요. 이쯤 되면 자본주의 경제란, 특히 한국 같은 국민경제 단위에선 이미, 끝도 없는 ‘성장’과 ‘발전’ 같은 합리적 주술로 죽음 충동이나 성장시키는 불합리한 희생제의와 대체 뭐가 다르냐고 할 만한 지경이죠. 정말, 대단합니다.
저간의 사정이 이런 줄을, ‘글로벌브랜드’화됐다는 대한민국의 VIP들도 직감적이나마 알고 있어설까요, 아니면 자기 본연의 욕망에 그저 충실해설까요. 앞서 점잖게 해석투쟁이라곤 했지만, 실상은 이렇습니다. 그런 투쟁의 틈새 따위 아예 메워버리겠다는, 명망 높으신 대한민국 권세가들의 일견 화려한 듯 우악스런 돈지랄에 때론 눈이 부시고, 때론 기가 막힐 지경이죠. 바로 그래서일 겁니다. 이 지경을 아무래도 유쾌·상쾌·통쾌하게 반전시킬 지속가능한 정신적·육체적·문화적 스테미나 내지근성을 우리가 어디서부터, 어떻게 키워야 할지 조용히, 그러나 결연하게 궁리해가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은요.
한국 쪽 사정이 요즘 어떤지만 줄창 떠들었지만, 그 뿌리가 한국 쪽에서만 굵직한 건 아니리라고 믿습니다. 이쪽 사정을 전하고픈 것 이상으로 프리타노조 여러분을 비롯한 일본 쪽 사정에 대해 귀기울이고 싶은 건 아마도, 이런 뿌리가 바싹 말라죽도록, 국적이나 국민정서 같은 유무형의 장벽들에 발목 잡히지 않고 형성돼야 할 ‘또다른 우리’의 잠재력 때문일 텐데요. 물론 쉽지 않겠죠. 때론 불가능한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에 시달릴지도 모르고요. 국적에 대한 귀속감이 아무리 상상된 집단기억의 산물이라곤 해도, 그런 기억을 지속시키는 현실적인 힘들은 자본주의가 지속하려 드는 한, 그리 만만치 않을 테니까요.
하지만 바로 그럴수록, 그야말로 어쩌다 보니 속하게 된 개별국가 단위에 우리가 갇혀 있어서야 될 일이냐는 질문의 끈을 놓쳐선 안 될 일이라 믿습니다. 각국 사정은 아마 앞으로 갈수록 더 음울해질 듯한데, 그럴수록 앞서의 질문을 단지 끈이 아니라 서로의 처지를 엮어주고 이어보는 질긴 동앗줄로 만들어가자는 요청인 셈인데요. 단언컨대 그럴 때만이, ‘또다른 우리’의 잠재력을 현실화할 스테미나와 유머감각은 한층 더 튼실해질 수 있지 않을까요?
비록 제언에 머물지만, 이번 제언이 향후 지속적이고 생동하는 교류와 진정한 글로벌 연대의 불씨일 수 있다면 지금으로선 그걸로 충분하지 싶습니다. 양국의 ‘프레카리아트’들이 어떻게 ‘하나인 여럿이자 여럿인 하나’로서 또다른 우리가 될 수 있을지 계속 교류하다 보면, 예컨대 “만국의 프롤레타리아트여, 단결하라”라는 슬로건은 지리적 규모와는 별개로, 각자 선 자리에서 이뤄지는 우리의 실천 속에서 이미 생동하는 현실이 돼 있지 않을까요?
우리가 더는 자본주의적 잉여 따위로 취급받길 그치고, 이같은 현실을 긍정하고 살찌우는 소중한 잉여들이 되길 함께 꿈꿔 보자는 제안과 더불어, 프리타 노조의 2010년 메이데이 행사에 설레이는 지지와 연대의 마음을 전합니다.
서울서부비정규노동센터(준) 회원 겸 운영위원
삐리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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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첫 번째 단락과 끝에서 세 번째 단락에서 원래 썼던 '어부'와 '근성'이란 단어를 각각 '어업노동자'와 '유머감각'으로 바꿈.
_2010년 5월 2일 프리타일반노조의 메이데이 행사에서 낭독됐다고.
_올해 8월 15일을 전후한 시기에 교류 행사 열기로 함.
한국의 경우는 굵고 크게 발발했다면 일본의 경우는 80년대부터 드러나기 시작하더니 90년대 인위적인 버블로 2000년대 오면서 걷잡을 수 없이 고착화되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뭐 기껏해야 10년정도 차이이기는 해도. 일본의 과정과 한국의 진행과정의 차이를 보면 시간의 차이일까. 굉장히 다르다고 느꼈어요. 이런부분에서 일본을 앞선다는게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ㅜ_ㅜ
똥꼬에 털이 무성해질 지경이져 뭐..ㅋ; 암튼, 9월 경에 프리타일반노조 조합원을 초청해 얘기를 나눌 것 같은데, 그때 함께하셔도 좋을 듯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