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강님의 블로그에서 알게 된 베땅이님의 블로그에다 원래 남기려 했던 글.
첨에는 전문을 올리려 했더니 어쩐 이유인지 접근불가하다는 창이 자꾸 떠서,
첫 번째 단락만 올리고 말았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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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강님 블로그에 가보니, 제가 하고 싶은 말을 공교롭게도 다 해주신 것 같아 따로 또 얘긴 안 하겠슴다. 다만 저로선, 김강님께 배우시든 질의-응답을 하시든, 지금껏 저와 님 사이에 오고간 “이런 논의”가 과연 논점을 흐렸던 건지도 곱씹어보셨음 좋겠네요. 언짢아서가 아니라, 거듭 말씀드리지만, 앞으로 목회자로서 크리스챤으로서 직접적이지 않아도 계속 맞닥뜨리게 될 질문이겠다는 점만큼은 분명하겠다 싶어서요.
우주-만물을 주재하는 궁극적인 힘을 굳이 ‘인격’신으로 상정하는 데서 종교를 참칭한 세속의 비극이 만연해온 셈이라고 보는 저 같은 이로선, 사실 그렇죠. 이를테면 1980년 5.18 민중항쟁 당시, 광주 주민들이 스스로 시민군(=조직된 反폭력의 힘?)과 좀더 적극적인 자기해방의 장이라 할 꼬뮌을 한시적이나마 형성했던 사건에 관해, 성서의 ‘지원사격’을 못 받는대서 딱히 아쉬울 건 없겠다. 그러니까, 기왕이면 다홍치마 아니겠냐는 정도? 설사 성경에서 그러지 말랬다고 그러지 말았어야 하는 게 어차피 아니라면 더더욱 그럴 텐데요.ㅎ 그래도 비인격화된 신 내지 영성의 실재를 수긍할 의향은 있는 터라 그런지, 김강님께서 펼치는 예수 이야기의 행방에 제 나름대로 지속적 관심이 생기는 것 같슴다. 적어도 제 눈엔, 김강님께서 “비가시적인 것, 혹은 영적인 것의 유물론적 존재론”을 탐구하고 있기 때문이겠다고 할까요.ㅎ
다소 억측을 하자면, 베땅이님께서 입장을 얼마나 달리 하시든 간에 그 ‘대표성’을 좋든 싫든 인정해야 할 제도화된 주류기독교는 물론이고 여타 종교들도, 앞으로 ‘존속가능한 자기쇄신’을 이루려면 국지적 보편주의에서 보편적 보편주의로의 ‘도약’이 불가피해지겠다는 생각이거든요. 이 와중에 서로 다른 종교적 내지 영적인 실천들이란, 아마 생성하는 차이들의 관계적 네트워크, 바꿔 말해 ‘신’의 속성을 표현한 양태들로 받아들여지지 않겠냐는 거죠. 이런 제 주장에 대한 동의 여하를 떠나, 적어도 제가 김강님의 폭력론이 모쪼록 성취를 이루길 바라는 맘 속에는, 예수가 했다는 말씀에서 폭력을 둘러싼 ‘초월적 도덕학’이 아니라 ‘상황적 개입의 윤리학’에 관한 통찰이 우려지면 좋겠다는 바램이 겹쳐 있습니다. 이 바램이 (새롭게 번역된) 성경의 내용과 맞아떨어질지 여부는, 말씀하신 대로 신뢰할 만한 비교문헌학적· 비교문명사적 검토를 거쳐야 하는 것으로, 물론 별개의 사안일 수 있겠지만요. 뭐, 그렇다는 말씀이고요..^^
그럼, 모쪼록 하시는 공부나 직장일이 매순간 생동하는 영혼을 느끼는 과정이길 빌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