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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철학'을 묻는 질문을 접할 때마다 그것을 '철학한다는 것'에 대한 물음으로 바꾸곤 한다. 내게 철학은 '앎의 대상'이라기보다 '행함의 지혜'이고, 결국 '행함으로 드러나는 지혜'이기 때문이다. 철학은 앎이지만 또한 행함이다. (15)
우리는 수십 년을 살아왔지만 여전히 '사는 데 서툴다'는 느낌을 갖는다. 우리 딴에는 잘 살아보겠다고 한 일이 삶을 망치지 못해 안달하는 것처럼 나타나는 경우도 많다. '잘 살고 싶다'는 욕망과 '삶을 망치는' 현실 사이의 간극ㅇ서, 철학에 대한 욕망이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특히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서로의 기술, 서로의 경험에 대해서 들려주는 것이다. (17)
철학자는 '법대로 사는 자'가 아니라 '사는 법을 아는 자'이고, 사는 법에 맞지 않을 때 법을 고치라고 용기내서 말하며, 기꺼이 감옥에 가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다. (21)
어떻든 '철학하는 왕'의 현실적 실패 이후 플라톤이 동시대인과 미래의 학생들을 위해 던진 말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자기가 고민하는 주제에 대해 책을 쓰려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해두었다. "거기에 대한 내 저술은 있지도, 나오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학문들처럼 말로 옮길 수 있는게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는 철학의 지혜, 철학적 앎에 대한 참으로 중요한 비유를 남겼다. '앎'이란 오랜 사귐과 공동생활을 통해 "튀는 불꽃에서 댕겨진 불빛처럼 혼 안에서 생겨나 스스로를 길러낼 것"이라고 (28-9)
디오게네스의 철학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연대는 이런 이해관계 이전의 것이다. 그것은 사회계약에 우선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타인과의 관계 이전에 나 자신의 존재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 존재 자체가 타인들로 이루어졌다는 깨달음이다. 나는 언젠가 <전태일 평전>을 읽으며 그런 느낌을 가진 적이 있다. 전태일이 신문팔이, 여공 철거민들과 연대하기 이전에, 그런 존재들을 자기 안에 품고 있다는 느낌 말이다. 그의 존재 안에서 그들이 연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유서에서 우리에게 동일한 존재가 되어주기를 요청했다. '나를 아는 모든 나' 그리고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에게 부친 그의 유서는 '그대 영역의 일부'로서 자신을 받아들여 주기를 요청한다. 그를 이루는 어던 부분이 우리 안에 그렇게 자리함으로써, 다시 말해 우리가 자기 안에 그의 자리를 내줌으로써, 우리는 또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그와 연대하는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와 연대한다는 것은 그 존재를 우리 안에 품는 것이다.(37)
디오게네스에게 있어서 '길'의 두가지 의미. (38-41)
1) '모든 것을 모두에게 내보이는' 공적인 장소. (칸트적 의미에서 '계몽'을 실천하는 공간)
2) 길은 법으로는 한정할 수 없는 다양한 일들이 일어나고, 그 속에서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도록 하는 공간
대학인의 고백과 약속 professor의 진정한 의미 (55-57)
생각해보면 '앎을 매개로 한 삶의 공동체'였던 '우니베르시타스'역시 가르친 것은 '진리'(어떤 불변의 참된 지식으로서의 진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대학이 키워낸 것은 진리의 생산 조건으로서의 능력과 용기였을 것이다. 대학은 우리 삶에 필요한 모든 질문들을, 어떤 선험적 권위나 제약을 진정하지 앟는, 무조건성 속에서 던질 용기를 가르쳤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삶에 필요한 것이 바로 그것 아닌가. 앎이 구원해야 하는 것은 자본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삶이다. 우리 삶의 혁신을 위한 대담한 실험의 장. 그 배움의 공동체가 '우리베르시타스', 즉 대학이라는 이름의 합당한 상속자일 것이다. (65)
"포기에 맞서야 한다" - 랑시에르 말 인용. "지능이 열등할 때가 아니라, 의지가 꺾일 때 바보가 생겨난다" (79)
<교육 이전의 교육, 운동 이전의 운동> = 감히 알려고 하라 (칸트의 계몽) 지식이 아니라 욕망이 생기게 하라 ("밤에 열린 어느 장애인 학교")
우리에게 지금 '현실적 대안이 없음'을 말하지 못하게 하는 것, 또 대안이 없으며 낭예 말을 못하게 하는 것, 혹은 하나의 대안을 다른 대안으로 계속 바꿔치기하며 '대안 없음'에 대한 자각을 계속해서 늦추는 것. 바로 이것들이 체제의 근간, 이 시대의 비전, 이 시대의 지배 정신에 대해 문제제기하고 그것을 타파하련느 움직임을 가로막고 있는 건 아닌가.
대안 없이 두물머리를 지키고 있는 농부들, 대안이 없어 무작정 대한문을 차지한 쌍용자동차 노동자들, ........ (131-2)
단기투쟁은 '투쟁'이 곧발 '일상의 중단'을 의미하지만, 장기 투쟁의 경우에는 '일상의 삶'과 '투쟁'이 구별되지 않는다. 즉, 살아가는 방식으로 싸울 수밖에 없고, 싸우는 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나는 '장기투쟁 사업장'에서, 그 '장기'라는 말과 달리, 시간의 길이를 넘어선 문제, 즉 운동이 어떻게 시간적 '무한정성'을 다룰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느낀다. 우리는 그런 운동의 형식을 발명해야 한다. (147)
우리는 '살아가는 일'과 '착취당하는 일'이 수렴해가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런 사회이기에 '살아가기'와 '투쟁하기' 또한 수렴해가는지도 모르겠다. (149)
<생정치 시대, 지킴이의 개입과 실천> (152~ )
<밀양식 보수주의>
밀야의 노인들이 필사적으로 지키고 있는 그 '보상 불가능한 것'이란 무엇인가? 아마도 그것은 '무엇'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처분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다. 나는 나무를 부둥켜안고 울었다는 한 할머니의 말에서 그것의 정체를 느낄 수 있었다. "이 나무는 나보다 더 오래 살아왔다. 이것들 다 베어내고 나면 너희는 어디 기대고 살래?" (173)
<죽은자와의 약속>
"우리 시어른이 돌아가실 때 내게 그랬어. 고향을 지켜줄 거냐고. 그 양반이 돌아가실 때 시누이가 그러는 거야. 아버지가 언니 찾아요. 그래서 뭐 때문에 그럴까 하고 갔는데 나한테 그러는 거야. 모두들 ...고향을 지킬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다 떠날 궁리만 하고. 가만 보니 니가 고향을 지켜줘야겠다. 그래서 내가 그랬지. '고향 지키는 기 뭐 어렵습니꺼. 이것저것 심고 무덤에 풀이나 베어주고 하면 되지. 그러다 자식들한테 물려주면 되고. 걱정 마세요. 제가 지키겠심니더' 그랬지. 지금 이 일을 당하고 보니 내가 왜 그때 그리 쉽게 답해버렸을까, 왜 그렇게 말해버렸을까 후회도 되고. 어느 날은 너무 힘들어서 그랬어. '아버님, 너무 힘듭니더' 그리고 나서 한참 울었어. 내가 일흔에만 죽었어도 자식들한테 소임 넘겼으니 제 세상 아버님한테 편히 갔을 텐데. 인제는 별수가 없다. 나는 철탑이 세워지든 안 세워지든 싸우다가 그 아래 묻여야 해. 그래야 그 어른한테 할 말이 있지. 나는 하는 데까지 했다고 말야. 난 어디 안 가. 저기 묻혀야 해." (177)
나는 김주영 씨가 걸어온 저 삶의 모든 시도에서 그녀의 용익와 자유를 본다. 우리 사회가 부여한 '자애인'의 자리에 그녀는 그대로 주저안지 않았다. '장애인'이라는 자리는 그녀가 자유에 대해 끊임없이 시도하고 물었던 장소이고, 삶에 대한 포기할 수 없는 열망을 쉬지 않고 증명해왔더 장소였을 뿐이다. 그녀는 장애인을 장애인 안에 가두는 문턱들 중 가장 악랄한 감옥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역사의 모든 억압받는 자들은 '바깥으로 나가면 죽는다'는 협박 아래서, 그 두려움 아래서 노예적 삶을 강요받아왔다.
"밖에 나가기 두려워 집 안에만 있으면 악순호나이 계속됩니다. 열악해도 용기를 내서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김주영) (198-9)
(최정은) 병에 대해서 이수영 선생이 책에 쓴 부분, 특히 거기를 다룰 때 반응이 컸죠. 많이 아파 본 사람은 그 삶이 더 나아지지는 않아도 심오해질 수 있다는 구절, 나만 제일 아프고 제일 불행했다고 아픈 것만 생각했는데, 이 책에서는 그 아픔이 그냥 아픈게 아니고 더 깊어지는 거고.... 아픔이란 게 그냥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도 계속 올 거라는 것. 하지만 과거에 자기가 아팠던 부분에 대해서 다른 해석을 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 지금까지 사회복지사들이 해준 것은 그냥 희망이엇죠. 희망을 가져라, 희망을 가져야 한다, 그런 식이었어요. (248)
(최정은) 그동안 우리가 쉼터에서 해왔떤 일들을 선생님과 함께 정리를 해보았죠. 그래서 '가족주의', 가족로망스, 게토, 연민.... 그런 것들을 발견한 거에요. '쉼터체제'라고 할까요? 그냥 연민의 주사만 놓는 거죠. 여기는 위안받아야 하고 쉬어야 하고 그런....
(이수영) 사실 제가 본 바로는, 쉼터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어요. 한쪽에는 아예 눌러앉는 친구들이 있고, 다른 쪽에는 뭔가 조금이라도 귀찮게 하면 다른 곳으로 옮겨버리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어느 쪽도 쉼터에서 뭘 해볼 수 있는 건 없습니다. 눌러앉는 것에 의해서도, 옮기는 것에 의해서도, 쉼터는 모두 무력화되고 맙니다. 그러니까 쉼터는 어느 쪽이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죠. 여기 있는 실무자들이 할 수 있는 건 봉사, 헌신, 인내밖에 없어요. (283)
다석은 죽음을 찬란한 육리라고 했지만, 감각적 물질문명에 깊이 빠진 오늘의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싫어하며, 외면하고 잊으려 한다. 그러나 죽음을 앞둔 사람이 죽음을 외면하려고 발버둥 치다가 지쳐서 죽는 것이 마땅한 일인가? 사람이라면 마땅히 죽음을 알고 다가오는 죽음을 맑은 정신으로 맞이해야 할 것이다. 중병에 걸린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 할 경우에 의학적 사망 선고를 내리는 일은 매우 신중하고 주의 깊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사람이 숨을 쉬는 동안에는 삶의 희망이 있는 것이고 삶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이 힘차고 빛나려면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죽을 때는 사람답고 품위 있게 죽을 권리와 의무가 사람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94)
다석이 밥을 ‘나누어 먹는 것’으로 보고 그것을 자신의 삶의 기본 정신으로 본 것은 그의 기독교 이해, 예수 이해에서 나온 것이다. 예수 자신이 하느님 나라 운동으로서 밥상 공동체 운동을 펼쳤고 죽음을 앞두고는 ‘빵과 포도주’를 자신의 살과 피로 알고 먹으라고 하였다. “예수는 음식을 나눔으로써 삶을 나누었고, 삶을 나눔으로써 사랑과 평화의 깊은 일치를 이루었다. 참으로 하느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했다.”
예수의 살과 피를 나누어 먹고 예수의 삶과 정신으로 사는 것을 다석은 기독교 신앙으로 이해했다. 다석은 날마다 밥 먹고 물 마실 때마다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려고 했으며 이것이 신앙의 근본 행위라고 보았다. 다석이 밥에 대해 관심을 집중하고 바 먹는 일을 삶과 신앙의 근본 행위로 본 것은 예수의 삶과 정신을 이어받은 것이다. 날마다 밥을 먹고 물을 마실 때 예수의 살과 피로 알고 먹고 마시는 것은 기독교 정신과 신앙의 핵심이고 다석의 삶과 정신의 중심에 속한다. (117)
날마다 먹는 밥은 다른 생명체가 제 생명을 ‘나’에게 바친 것이고, ‘나’를 살리기 위해 드려진 희생 제물이다. 그러나 밥은 ‘나’에게 머물지 않고 ‘나’를 넘어서 ‘나’ 속에 계신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며, ‘내’가 먹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먹는 것이다. 따라서 “밥 먹는다는 것은 예배다. ..... 내가 먹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제물을 도적질하는 것이다.” 다석에 따르면 인생의 목적은 예수처럼 하느님과 이웃에게 밥과 제물이 되는 것이다. “우리도 성숙하여 밥이 될 수 있도록 태초부터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쌀이 익어야 밥이 될 수 있듯이, 인생도 무르익어야 밥이 된다. 성숙해져서 밥이 되려고 밥을 먹는 것이다. 밥이 될 수 있는 사람만이 밥을 먹을 자격이 있다. 사람이 밥이 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가? 다석은 “인생뿐 아니라 일체가 하느님께 바쳐지지 위한 제물.....밥”이라고 한다. 그러나 인생은 짐승처럼 자기의 육체를 바치는 아니라, 말씀을 바치는 밥이다. “인생이란 밥을 통해서 우주와 인생이 얻는 영양은 무엇일까. 그것은 말씀이다. .....밥에는 말씀이 있다. ..... 온 인류를 살리는 우주의 힘이 되는 성령의 말씀이 있다. 인생은 하느님의 말씀을 바칠 수 있는 밥이다.” 다석은 여기서 밥과 육체와 말씀을 결합한다. “인생은 밥을 먹고 육체를 기르고 이 육체 속에는 다시 성령의 말씀이 영글어 정신적인 밥 말씀을 내놓을 수 있는 존재다. .... 목숨은 껍데기요 말씀이 속알이다.” (119-120)
생각을 삶의 행위로 본 다석은 삶의 주체인 ‘나’를 ‘생각의 끝머리’, ‘생각의 불꽃’이라고 했다. 생각과 ‘나’를 일치시킨 다석은 생각을 ‘정신의 불꽃’이라 했고, 이 정신의 불꽃에서 ‘내’가 나온다고 하였다. 데카르트에게서 생각이 존재를 인식하는 행위라면 다석에게는 생각이 존재를 생성하는 행위다. 따라서 다석은 “내가 생각하니까 내가 나온다. 생각의 불이 붙어 내가 나온다. 생각에서 내가 나온다.”했다. (...)
다석에게 “내가 생각한다.”는 데카르트의 명제는 인식론적 원리일 뿐 아니라 삶과 믿음의 원리이고 존재의 원리였다. 생각하는 것이 사물을 인식하는 것만이 아니라 나의 주체적인 행위이고 나의 존재를 형성하고 실현하는 행위, 삶의 행위이다. 다석에 의하면 인간의 속알맹이는 “솟구쳐 올라가는 앞으로 나가는 창조적 지성”이며, 생각은 “생명의 빛을 밝히는 것”이다. (164)
다석에게 생각은 순수한 논리적 추론이 아니라 “사랑이 있을 때 피어나는 하나의 정신의 불꽃”이다. 생각은 정신의 불꽃인데 정신이 불이 붙으려면 정신이 깨어나야 한다. 그리고 “정신은 거저 깨나지 않고 (삶 속에서) 간난고초를 겪은 끝에만 깨어난다.” 또한 “(나의) 정신이 통일되어야 (생각의) 불이 붙는다. 분열된 정신은 생각의 불꽃이 일어나지 않고 연기만 난다.” 정신은 지성적 계몽보다는 인생의 각난고초를 겪음으로써 깨어나고, 자기를 넘어서서 ‘하나(님)’을 향해 위로 솟아오름으로써 통일에 이른다. (169)
윌슨은 유전 공학의 지식과 원리에 기초하여 유전자와 문화의 공동 진화를 말하고, 예술과 종교를 설명하려 한다. 그는 지식 대통합의 개념으로서 ‘부합, 일치’를 뜻하는 consilience란 개념을 쓰는데 이 말은 ‘함께(con)’, ‘뛰어오르다, 도약하다(salire)’에서 온 말이며, ‘함께 도약함, 도약해서 일치에 이름’을 뜻한다.
윌슨이 지식의 대통합을 위해 도입한 자연 과학적 환원의 원리는 그가 사용한 대통합의 개념인 consilience와 배치(背馳)된다. consilience는 ‘위로 올라가서 일치에 이름’, 곧 상향 일치(上向一致)를 뜻한다. 그러나 윌슨의 자연 과학적 환원론은 정신과 영의 존재를 물질과 육체의 존재의 지평으로 환원시키는 하향 일치이다. 물질-생명-정신-영은 존재의 위계가 다르다. 물질에 없는 존재의 차원이 생명에 있고, 생명에 없는 존재의 차원이 정신에 있으며, 정신에 없는 존재의 차원이 영에 있다. 큰 존재를 작은 존재의 지평으로 끌어내려서 일치시키려는 것은 존재론적 폭력이다. 큰 존재에서 작은 존재들이 포괄되고 통합되어야 한다. 다석이 말하듯이, 물질에서 영으로, 존재의 낮은 차원에서 높은 차원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만물의 이치가 함께 드러난다. (176-177)
참된 생각, 거룩한 생각은 하느님과 연락된 것일 뿐 아니라 하느님과 뗄 수 없이 결합되어 있다. 그러므로 다석은 “생각하는 곳에 하느님이 계신다.(念在神在)”고 말한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명제가 뒤집혀졌다. 생각과 존재의 주체인 인간의 ‘나’ 대신에 신이 존재의 주체로 나온다. 생각하는 주체는 사람만이 아니라 하느님(神)이기도 하다. 다석에게서는 생각하는 행위에서 입증되는 것은 인간인 ‘나’의 존재가 아니라 신의 존재이다 .생각하는 데서 신의 존재가 확인되고 입증된다. 생각은 하느님의 뜻을 밝히는 것이다. “아버지의 참 뜻 그것이 나의 본체다. ..... 참 뜻이 우주의 뿌리다. 뜻만은 영원이 죽지 않는다. ..... 하느님의 뜻과 내 뜻이 하나가 되어 영원한 참 뜻을 이루어 가다.” (182)
20세기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디트리히 본회퍼는 『성경』의 이러한 가르침을 잘 이해했다. “오직 믿고 복종하라.”는 본회퍼의 신학은 개신교 신학의 핵심을 드러낸 것인데 한국 선불교의 가르침과 통한다. 본회퍼에 따르면 선악에 대한 지식은 사변적 가능성에 머물과 자기 정당화와 이웃에 대한 비판과 정죄, 논쟁과 분열로 이끈다. 이런 지식과 사변을 끊어 버리고 오직 믿음으로써 살림의 행동에 이를 수 있다. 선악에 대한 지식과 바리사이파의 율법 지식은 하느님(의 말씀과 뜻)에게서 분리되는 것을 뜻하며, 자기 자신 및 이웃과의 분열을 나타낸다. 바리새파의 율법 행위는 하느님에게서의 분리, 자신과 이웃과의 분열을 나타낼 뿐이다. 선악에 대한 지식은 인간을 지식과 관념의 사변적‧감정적 가능성으로 이끌며, 믿음은 하느님의 말씀과 뜻에 대한 단순한 복종, 현실적인 삶의 행동으로 이끈다. 본회퍼도 오직 행위에서만 삶의 자유가 있다고 한다. “가능성에서 동요하지 말고, 현실적인 것을 담대히 붙잡으라. 사고의 세계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행위에만 자유가 존재한다.” (197)
읗로 오름 삶의 오름 올(早‧當年) 사리가 올바른 삶
알몸 맦여 버리는 날 얼ᄆᆞᆷ 돼서 뵈오리
거룩다 그리스도록 이에 숨을 쉬는 이
이 시의 듯은 다음과 같다. “위로 올라가서 삶이 올라가는 삶, 일찍 주어진 시간을 옹글게 사는 삶이 올바른 삶이다. 알몸을 맡겨 버리는 날은 결혼하는 날이거나 죽어서 장사 지내는 날인데 이날에는 얼ᄆᆞᆷ이 되어서 얼ᄆᆞᆷ을 보게 해야 한다. 거룩하다. 그리스도의 자리에 서서 예수를 이어 숨을 쉬는 사람.”
다석은 이 시 가운데 “알몸 맦여 버리는 날 얼ᄆᆞᆷ 돼서 뵈오리”를 풀이하면서 젊은 부부가 알몸만 서로 맡기지 말고 서로 얼과 ᄆᆞᆷ을 새롭게 드러내 보임으로써 늘 새롭고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다석이 결혼을 부정하는 듯한 말도 자주 하고, 몸과 정신을 분리하여 몸을 비하하고 정신만을 높이는 듯한 말도 여러 차례 하였지만 여기서는 분명히 결혼하는 젊은 부부를 축복하고 격려하는 말을 하고 있다. 알몸을 맡기면서 얼ᄆᆞᆷ을 드러내 뵈라고 함으로써 알몸과 얼ᄆᆞᆷ을 결합하고 있다. (...)
몸을 ‘영혼의 그릇’으로 보는 관점을 넘어서서 다석은 건강한 몸을 “건강한 정신을 낳는 모체”라고 하였다. 다석에 따르면 “4백조의 세포가 하나로 모일 때에 여기 살알(세포)을 넘어서는 인격이 생긴다.” 그런 의미에서 “건강한 육체는 단순한 그릇이 아니라 건강한 정신을 낳는 모체”이다. 더 나아가서 다석은 “내 육체의 세포 하나하나가 산 것처럼 우주 만물은 하나하나가 산 것이며 이 우주에는 절대 의식, 절대 인격이 있는 것처런 느껴진다.”고 하였다. (201-203)
우주의 캄캄한 허공에 비하면 물질세계와 물질이 타는 빛은 아주 작은 것이다. 따라서 무한한 허공을 드러내고 그 허공 속에 잠기는 어두운 저녁은 영원하고, 태양은 우주의 한 작은 화로에 지나지 않으며, 밝은 낮은 하루살이의 빛에 불과하다고 다석은 말한다. 더 나아가 햇빛과 물질은 영적인 세계를 가리고 그 세계와의 소통을 가로 막는다. “대낮에 영원과 사귀겠다는 것은 허영이다. ..... 한낮의 밝음은 우주의 신비와 영혼의 속삭임을 방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빛들음’은 ‘비뚤어짐’으로 숨길을 막는 요인이 된다. 숨길은 밤중에야 잘 뚫린다.” (215)
다석의 제자 함석헌은 「흰 손」이라는 시에서 미신적 속죄론을 비판하고, 믿는 이가 예수의 고난과 죽음에 참여함을 강조하였다. 예수의 피가 구원의 효력이 있으려면 믿는 사람의 피 속에 살아 있어야 한다.
네 만일 그 피 마셨다면이야,
(왜, 내 살 먹어라, 내 피 마셔라 않더냐?)
그러면야 지금 그 피 네 피 속에 있을 것 아니냐?
네 살에, 뼈에, 혼에, 얼에 뱄을 것 아니냐?
함석헌에게 예수는 2천년 전에 죽은 예수가 아니라 ‘믿음’ 안에서 ‘오늘 나의 삶, 나의 몸과 뼈와 살 속에, 나의 피 속에’, ‘나의 얼과 혼’ 속에 살아 있는 예수다. (259-260)
다석에게 신앙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삶에 참여하는 것이다. “한우님의 고디는 우리 때믄 비르샤 우리로 ᄒᆞ야금 늘 삶(그리스도)에 들어가게 합소서.”(1955.12.11.) 그리스도가 곧 늘 삶, 영원한 삶이다. 믿음은 예수의 ‘늘 삶’에 참여함이다. (265)
고난받는 민중을 대속자라고 한 것은 자속과 대속을 통합한 것이다. 오늘 고난받는 민중이 자신들의 고난을 통해 속죄한다는 점에서는 자속이고 우리 모두의 죄를 씻어 준다는 점에서는 대속이다. 또한 민중을 오늘의 예수로 본다는 점에서는 자속이고 예수의 십자가를 중심에 놓고 생각한다는 점에서는 대속이다.
여기서 다석은 “일체가 대속이다.” 하고 선언한다. 다석에게는 예수의 피만이 속죄 능력을 가진 것이 아니라 모든 의인의 피가 속죄 능력을 가졌고, 의인의 피만이 아니라 남을 위해 고통당하는 모든 인간의 고통과 애씀이 속죄 능력을 가졌다. 더 나아가서 자기의 목숨을 밥으로 내어 주는 자연 만물 일체가 속죄를 하고 있다. 서로 밥이 되는 “일체가 대속이다. ..... 야채, 고기 다 말 못하고 죽는 대속물(代贖物)”이라고 한다. 밥(먹이)이 ‘나의 생존’을 위한 희생 제물이고 ‘나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대신 바치는 대속물이다. (266-267)
인생은 영속 개혁의 길을 가는 존재이다. 일시 개혁으로 부귀영달하리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삶은 “들어박히는 것이 아니라 박힌 데서 트고 나감이며 ..... 인간을 크게 열어서 참 살 길을 걷는 것”이다. 일시적‧일회적 개혁으로는 삶이 바로 될 수 없다. 그리스도가 일회적으로 세상을 구속(救贖)했다고 하지만, 인간의 삶은 바뀌지 않났다. 인간들이 “세상에서 밥을 알맞게 먹고 옷을 알맞게 입고 자미 보며 놀게 된 것”이 아니다. 인간들은 여전히 삶을 바르게 살지 못한다. 인생은 “머리카락 발톱 끝까지 개혁(改革)--영속개혁(永續改革)--에 들어가는 길이다.” (273-274)
“예수는 음식을 나눔으로써 삶을 나누었고, 삶을 나눔으로써 사랑과 평화의 깊은 일치를 이루었다. 참으로 하느님의 임재(臨在)를 경험하게 했다.” 성만찬은 예수를 기념하는 종교 의식이 아니라 ‘예수의 밥상 공동체 운동’의 연장이며, “가장 물질적이고 일상적인 밥을 나누어 먹는 데서 부활한 예수를 만난다.”고 하였다. 더 나아가서 교회를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서 예수의 살과 피로써 하나로 된 공동체로 이해했다. 나는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밥상 공동체적인 의미로 이해된다. 예수의 몸은 함께 나누어 먹는 밥이며, 예수의 피는 함께 나누어 마시는 포도주다. ..... 예수의 존재 자체가 밥상 공동체(운동)로 육화(肉化)된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밥을 나누어 먹는 자리에서 부활한 예수를 만난다고 하였다. ”부활한 예수는 사상이나 정신 속에서 만날 수 있는 게 아니라, 구체적인 삶 속에서 밥을 나누어 먹는 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가장 물질적이고 일상적인 밥을 나누어 먹는 자리에서 부활한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다.“ (...) 다석은 밥과 예수를 동일시하면서도 식사를 하늘제사로 보고 영적인 차원을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다석은 식사를 ‘사랑의 나눔(割愛)’으로 보고, 천지 만물의 조화와 농민의 수고로 이루어진 것을 말했다는 점에서 밥의 공동체성과 민중성과 생태학적 차원을 주목했다. (277-278)
몇 년 전, 한 결손 가정 아이의 집에 가정 방문을 갔던 기억이 있다. 엄마도 아빠도 없는 집, 안팎으로 발 디딤 틈도 없이 쓰레기와 옷가지로 가득 찬 방에서 새우잠을 자고 학교로 오는 아이가 있었다. 우리는 그 아이의 '빈곤'을 '풍요'로 바꿔어줄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그 아이의 '빈곤'을 '가난'으로, 보살핌과 우정으로 견딜 만한 조건으로 만들어주는 일이다.
모든 교육적 상황은 백 가지 문제에 대한 백 가지 답을 가진, 근원적으로 무정부적인 것이다. 그러나 문제를 풀려는 노력은 '법과 제도'라는 시스템의 그릇 속으로 옮겨 담아 누군가에게 떠넘기는 방향으로 흐른다. 이것을 사람들은 '개혁'이라 부른다.
감각적이고, 질감이 있으며, 육체성을 가진 교육이 사라지면 인간적인 상호 접촉의 중요한 형식 하나가 사라진다. 오늘날의 교육개혁이란 이 살아 있는 대면 관계의 '황무지'를 구축하고자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것이 바로 '안락'에 대한 편집증이 낳은 비극이다. 교사에게, 그리고 전교조에게 필요한 것은 '자동차'가 아닌 '걸음'걸이의 교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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