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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0/04/27
    김예슬씨에게 보내는 한 청년의 편지(4)
    구르는돌
  2. 2010/02/04
    <영혼 없는 사회의 교육>에 대한 코멘트 한 가지 더.(1)
    구르는돌
  3. 2009/11/15
    학생회 운동(19)
    구르는돌
  4. 2008/11/07
    [발췌독] <잊혀진 것들에 대한 기억> 中(1)
    구르는돌

김예슬씨에게 보내는 한 청년의 편지

<김예슬 선언> 카페에 올리는 글.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안녕하세요, 김예슬씨. 저는 2003년에 대학에 입학해 2008년 여름에 졸업하고 지금은 고향에 내려와 있는 (무직)청년입니다. 저의 입학년도와 졸업년도가 말해주듯이, 5년반을 대학생으로 살아왔고, 딱 그 기간만큼 학생운동과 인연을 맺어왔습니다. 남들처럼 일찍 군대를 다녀왔다면 지금쯤 복학생 신분으로 학교 어디선가 동기, 후배들과 예슬씨의 선언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누고 있었겠지요.

 

하지만 지금 제 주변엔 그런 얘기를 함께 나눌 사람이 없어 답답해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그러다 얼마 전 서점에서 예슬씨가 낸 책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손바닥만한 작은 책 속에 담긴 당신의 작은 외침들 하나하나에, 많은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저도 많이 공감하고 또 가슴 속으로 한없이 울었습니다. 겨우 7,500원하는 그 책을 사들고 왔으면 좋았으련만 그 때 제 지갑엔 딸랑 5,000원 밖에 없어서 그냥 빈손으로 오고 말았네요. 그래도 책 속에 담긴 예슬씨의 몇 가지 의문들은 저를 향하고 있는 것만 같아, 그리고 그 의문들에 대답하는 것이 마치 제 의무인 것만 같은 알 수 없는 책임감이 생겨서 이렇게 당신께 편지를 씁니다.

 

 

 

91년 5월, 그리고 오늘

 

저는 요즘 <그러나 지난 밤 꿈 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1991년 5월>이라는 긴 제목의 책 한 권을 읽고 있습니다. 브레히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시 한 구절을 인용한 이 제목의 책은 91년 4월 26일 강경대 열사의 죽음으로부터 촉발된 5월 투쟁을 당시에 대학생 신분으로 이 투쟁을 경험한 이들이 10년이 지난 후 가슴 아픈 회고 속에서 기록하며 평가한 것입니다. 제 얘기를 하기 전에 이 책에 대한 저의 간단한 감상부터 전해야 겠네요.

 

이 책의 저자들은 자신들이 무대의 주인공이었던 이 투쟁을 4.19나 광주항쟁, 87년 민주화항쟁에 대해 흔히 그러듯이 그 역사를 자랑스럽게 포장하지도, 자신들을 역사의 피해자로 여기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한국 정치사에 있어 급격한 변곡점이라 할 수 있는 당시 상황에서 자신들은 무엇을 했는지, 그리고 그 실천들은 올바른 것이었는지 반성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87년 6월 항쟁이 직선제 쟁취라는 껍데기 뿐인 성과만을 얻은 채 봉합되고, 이후 벌어진 엄청난 수의 노동조합 결성과 투쟁으로 이어지지 못한 결과 소위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의 분리라는 것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또한 노태우 정권은 88올림픽 등을 거치면서 체제 갈등에 대한 봉합과 포섭 능력이 이전에 비해 훨씬 향상되어 있었고, 이는 이 둘의 분리와 전자에 대한 의도적인 고립, 탄압을 노골화 했습니다. 91년 5월은 어쩌면 이런 흐름에 쐐기를 박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강경대 열사로부터 시작된 죽음과 분신의 행렬은 13명이나 되는 노동자, 학생을 떠나보내게 했지만 노태우 정권은 강기훈씨 유서대필사건, 정원식총리 계란투척사건 등을 공안사건으로 조작해내면서, 운동권을 '패륜아'로 낙인찍는데 성공했습니다.

 

'노태우정권=죽음과 폭력의 세력', '노동자와 학생=피해자'라는 명쾌한 논리로 지배세력을 공격했던 운동권은 어처구니없게도 "죽음을 사주하는 어둠의 세력"이라는 말로 이 논리가 자신들에게 돌아왔을 때 어찌할 줄 몰라 헤매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이 때부터가 우리 사회에서 운동권이 평범한 시민들로부터 고립되어 비주류가 되기 시작한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문민화'된 정권의 변화된 지배형태와 새롭게 만개한 소비문화와 한 몸이 된 시민들의 이데올로기를 제대로 이해하지도, 비판하지도 못한 채 어정쩡한 몸짓만을 보인 운동세력은 그저 앙상한 모습만으로 기억될 뿐이었습니다. 과잉된 도덕적 엄숙주의, 폐쇄주의적 문화, 유사 '군대'적이라고 할만한 권위주의적인 작태, 그리고 어정쩡한 대중추수주의. 91년 이후 지금까지 어찌어찌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학생운동의 문화는,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이런 모습의 집결체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런 학생운동 속에서 2000년대의 대학생활을 보냈습니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 2000년대 학생운동에 대해 말하기

 

제가 이렇게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는 이유는 당신이 책 속에서 했던 가슴 아픈 말 때문입니다. 당신이 "우리는 충분히 래디컬한가"라고 물었을 때, 선뜻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당신의 의문을 당신이 학생운동을 하던 선배들과 함께 할 수 없었던 '송구스러운 심정'을 통해 전할 땐, 솔직히 속상했습니다. 물론 저는 이미 졸업했지만, 학생운동을 하던 시절 가졌던 상처와 미련들 때문에 당신이 조심스럽게 던지는 그 말 한 마디도 야속하게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은 잠시 접어두고, 오늘만큼은 냉정해지고자 합니다.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저 스스로 '이걸 빼면 내 인생은 시체'라고 생각한 나의 지난 학생운동 시절에게 '충분히 래디컬했는지' 질문하고자 합니다. 이에 대답하는 과정은 당신이 기존에 스스로를 진보라고 외쳤던 이들에게 실망했던 이유를, 그것을 '거짓 희망'이라고 말해야 했던 이유를, 당신과는 다른 각도에서 조명해 보는 기회를 제공해 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에겐 이런 경험이 있습니다. 3,4학년 때 저는 주로 학생회 활동을 했고, 연말엔 학생회 선거 준비 때문에 '학고'를 각오하고 수업도 내팽개치며 살았습니다. 그 때 저는 90년대 중 후반 부터 선배들이 만들었던 선거 정책 자료집을 찾아보기도 했습니다. 정치적 입장을 담은 대자보를 붙이면 다음날 학우들 손에 북 북 뜯겨 나가던 때였으니, '자본주의 반대'니 '민중권력 쟁취'니 하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선거 자료집'에 가감없이 담아내는 선배들의 전설같은 이야기들이 마냥 멋있다고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 땐 잘 느끼지 못했지만)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대략 50페이지 안팎 되는 자료집의 뒷부분으로 갈수록 시퍼렇게 날이 섰던 힘있는 정치적 문장들은 점차 사라지고, 당의(糖衣)입힌 선물상자들이 똬리를 틀고 있었던 것이 말입니다. 등록금 인하, 매점과 식당 개선, 강의평가제 개선... 그러던 것이 몇 해 전부터 '시험기간 간식 배포' 같은 걸로 바뀌기 시작했고, 선본의 정치적 입장은 자료집 맨 뒤에 '정세'라는 코너를 따로 두어 성명서 같은 글을 집어넣는 걸로 대체되었습니다. 여전히 저는 그 자료집 안에서 '미국의 신자유주의 세계 재패전략'을 비판하는 것과 식당 밥 개선하는 것이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런 자료집을 맨날 끼고 살았던 저는 4학년때 정책국장을 맡아 치룬 선거에서 ‘신자유주의에 의해 가려진 ○○○의 새로운 가능성에 주목하자’(○○○은 학교이름)는 멋들어진 총기조를 뽑아놓고는(그래서 선본이름이 'Zoom In'이었습니다) ‘셔틀버스 무료화’라는 강력한 복지공약을 전면에 내거는 코메디를 연출했습니다. 이것은 누구의 말대로 지적 교조성과 조야한 대중성의 우스운 조합입니다. 스스로는 이를 '대중운동'이라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면 오히려 '대중운동'을 참칭하여 우리의 이념적 건강함마저 갉아먹는 짓이었습니다.

 

이것은 비록 저의 이야기이지만, '이념의 고수'와 '대중성'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2000년대 학생운동을 경험한 이들 모두의 것이기도 할 것입니다. 아무도 관심 갖지 않아 들어줄 이 없겠지만, 혹여나 2000년대 학생운동에 대해 누군가가 증언해야 한다면, 저의 이런 이야기도 한 꼭지 정도로는 들어갈 것입니다. 저의 경험에서 평가해 봤을 때, 2000년대 학생운동은 90년대로부터 단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나의 소중한 자산인 학생운동

 

그래서 저는 '스스로 진보라 말하는 사람들에게 진정성을 찾을 수 없다'는 당신의 말을 긍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대중지향성이라는 말을 마치 '대중이 선호하는 것에 맞게'라는 식으로, 마케팅 이론에나 나올 법한 방식으로 이해했고, 이 때문에 훼손된 우리의 진보성을 정서적 폐쇄성과 비장함으로 상쇄시키곤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당신의 선언과 이에 대한 많은 이들의 반응을 보고 저는 깨달았습니다. 가장 래디컬한 것이 가장 대중적이라는 사실을.

 

하지만 당신도 너무나 잘 아시겠지만, 모두가 다 그런 래디컬한 '대학거부'를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개인의 결단 차원이 아니라 대학과 사회를 변화시키고자하는 '운동'의 차원에서라면 더욱이 말입니다. 그래서 남겨진 자들, '대학거부'를 선택하진 않았지만 '다른 대학'을 꿈꾸는 남겨진 제2, 제3의 김예슬들에겐 당신의 선택이 또 다른 책임감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오히려 많은 이들에게 '대학거부'는 사실상 '대학포기'와 다르지 않기에 당신의 선택에 마냥 박수만 치고 있을 수도 없습니다. 대학을 거부하고 노동현장으로 달려가는 것이 당연스럽게 여겨지던 예전 대학과 학생운동의 모습을 생각할 때, 당신의 선언이 주목받는 것은 오히려 현재 학생운동 위기의 결과라는 생각에까지 다다르면 머릿속이 한 층 더 복잡해집니다.

 

그래서 당신께 바랍니다. 당신이 떠나온 대학이란 공간을 여전히 기억해 달라고. 여전히 구조조정을 막기 위해서 학생들이 타워크레인에 올라가야만 하는 전쟁터같은 대학을 기억해 달라고 말입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배움을 통해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배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이 평생학습사회에서, 저 또한 쉼 없이 대학을 생각할 것입니다. 솔직히 학생운동을 하는 동안 한번도 대학에 '래디컬'하게 맞서본 적 없지만, 앞으로 살아갈 나의 삶 속에서도 나를 끊임없이 '길러 낼' 이 엄청난 국가-학교-자본의 불결한 동맹에 제대로 맞서야 겠다고 다짐합니다. 당신도 (물론 그러시겠지만) '나눔 농사터에 세워질 진정한 삶의 대학'을 만들어 가시면서 함께 고민을 키워갔으면 합니다.

 

지금 저는 후회와 반성 속에서 저의 지난 학생시절을 돌아보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저의 삶의 기반은 학생운동의 경험입니다. 또한 여전히 대학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묵묵히 싸워나가고 있는 저의 후배들은 사회진보를 위해 노력하는 소중한 '씨알'들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그 경험을, 미우나 고우나 저의 소중한 자산으로 생각하며 살아가렵니다. 물론 나의 이 소중한 자산이 왜 당신께 진정성있게도, 래디컬하게도 보이지 못했는지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겠지요. 그 고민 속에서 언제나 당신과 나의 생각이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미약한 한 청년의 자기고백과 반성의 글을 이렇게 마칠까 합니다. 언제나 힘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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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없는 사회의 교육>에 대한 코멘트 한 가지 더.

구르는돌님의 [이계삼 저, <영혼 없는 사회의 교육>] 에 관련된 글.

 

 

교사들은 대개 모범생입니다. 교직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지고, 임용고사 제도가 생긴 이후 그런 경향은 더욱 심해졌지만, 교사들은 다채로운 인생체험이 없고, 임용을 위해 몇년간 애써 터득한 기술 말고는 별로 가진 게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교사들의 신분에 대한 자긍심 -- 안도감이라 해야겠지만 -- 은 걱정스러울 만큼 높습니다. 그러니 아이들을 잘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른바 요즘 아이들은 얼마나 다양하고 난해한 존재입니까. 그래서일까요, 교무실에서는 교사의 지도에 고분고분하지 않는 이해할 수 없는 아이들을 탓하는 교사들의 이야기를 흔히 들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동병상련의 정들을 나누는가 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교사는 스스로가 이미 학교 교육이라는 폭력의 일부임을, 자신의 내면에도 폭력의 상처가 아로새겨져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 바탕에서 아이들과 세상을 응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중.고교시절에는 별로 드러나지 않는 '범생'이었지만, 대학 시절 4년 내내 열등생으로, 방황하는 영혼으로 살 수 있었음을 차라리 다행으로 여깁니다. 그리고 임용고사에 탈락하여 패배자의 자리에 서 본 기억에 가까운 이들의 죽음과 같은 시련을 겪었던 것에 감사합니다. 이들이 없었다면 이런 상황을 이미 겪었거나, 지금 겪고 잇는 아이들의 아픔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함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 50p

 

나는 어차피 교사도 아니고 앞으로 교사가 될 사람도 아니기에 위의 글이 나와는 하등 상관 없는 소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무슨 글을 읽든지간에 내 방식대로 해석하는 습관 때문에 그저 이게 남 얘기 같지는 않다. 이걸 보고 있자니 괜히 내 학생운동 경험이 생각났다.

 

사실 나 때도 그렇고 지금 학생운동이란 걸 하고 있는 이들은 (교사가 그런 것처럼) 대개가 다 모범생이다. 옛날에는 전문대에서도 학생운동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찾아볼 수 없고, 그나마 가끔 언론에 오르내리는 학생운동 집단들은 서울의 몇 개 '명문' 대학에 근거를 둔다. 간혹 지방대가 있다 하더라도 그 지역을 대표한다는 국립대일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좀 억지스럽게 해석해 보자면 지금의 학생운동은 고딩시절 선생님 말 가장 잘 들었었고 사교육도 받을만큼 받은 얘들이 자신이 받은 혜택을 부정하겠다고 나서는 행동이다.

 

그래서일까? 그런 모범생들이 모여 하는 운동이라는게 강의석처럼 튀는 행동을 하거나 아니면 작정하고 투쟁적으로 나가지 않는 이상, 마음맞는 얘들끼리 모여 쿵짝쿵짝 세미나 몇 번 하다가 끝나기 십상이다. 실제로 나는 내 자신이 그런 식의 활동을 해왔다고 생각하고 내 주변의 많은 친구들이 그런 경험을 '운동'의 경험으로 기억(또는 추억)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한번도 상처받아 본 적 없을 것처럼 한없이 밝기만 한 후배들을 대하는게 힘들었다. 나는 여태 한번도 내돈 주고 사 신어본적 없는 10만원이 넘는 신발을 예사로 생각하는(가끔 그런 신발을 모으는게 취미라는 얘도 있었다) 얘들도 있었는데, 그런 얘들은 우리의 운동을 이러저러한 소비활동의 하나 쯤으로 생각했던 것만 같다. 그런 아이들과 노동자 농민 철거민의 아픔과 고통에 연대하자고 말하는건 어쩌면 아이티 지진참사에 봉사활동 가자고 말하는 것 정도로 여겨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얘들 데리고 다니려면 가장 만만한게 그저 세미나 였다. 그러나 세미나에만 몰두하는 것만큼 자폐적인 짓도 없을 것이다. 그런 일에 몇명을 동원했는지로 내 활동을 자족했던 때가 있었다. 내가 무슨 영업사원도 아니고....

 

학생운동이 '모범생운동'을 넘어설 수 있는 길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 즈음에 활동을 빈곤아동 공부방 활동에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방향을 틀었던 무리들이 있었는데, 우리는 그들의 활동을 너무 평가절하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나와 나를 규정했던 집단의 정체성에 끊임없이 말을 걸 수 있도록 시선을 외부로 향했어야 했다. 그리고 그 외부가 나의 경계를 뚫고 들어오도록 문을 열었어야 했다. 한때 내 주변에 진보적인 운동을 함께 했던 이들이 대학원 진학을 많이 하는 걸 보는데, 이런 경향이 나타나는 것은 (그들이 무슨 공부를 하는지와는 상관없이) 얼마간 우리는 '모범생'이라는 정체성을 깨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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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회 운동

지난 금요일 저녁, 출신 동아리의 1년 중 가장 큰 행사가 있어 갔다왔다.

뒷풀이에서 오랜만에 만난 후배들과 이런 저런 얘기를 많이 나눴는데, 그 때 한 얘기 중

혹시나 나중에 까먹으면 안될 것 같은 얘기가 있어 메모를 해둘까 한다.

 

나와 이야기를 나눈 S모 후배님은 올 해 총학생회 선거 대응에 대해 고민을 해 봤단다.

해야 한다고 말하는 얘들도 있었고,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얘들도 있었다는데,

전자의 주장을 뒷받침 한다고 내놓은 근거들이 대략 5년전에도 들어왔던,

너무나 해묵은 얘기들이라는 사실에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예 올 해 할 수 있고 없고를 떠나서,

더 이상 학생운동이 학생회운동으로는 생명유지 자체가 안 될 수밖에 없는

이유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아래 이야기들은 그 날 했던 얘기에 지금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합한 것이다.)

 

 

예전에 학생운동의 역사 같은 것을 공부하면서 90년대 초반에 쓰여진 글을 본 적이 있다.

거기서는 학생운동이 전체운동에서 가장 선진적인 부분이 될 수 있는 이유를 대략 이렇게 보고 있었다.

잘 기억은 안나는데 대략 "학생들은 젊음의 패기와 배움의 자리에 있다는 가능성...."

뭐 이런 거였다.

 

여기서 정의하는 학생운동은 '대학생' 자체일 수도 있겠지만

의미를 명확히 규정하자면 '20대'에 더 가까운 것 같다.

그러니까 예전부터 지금까지 학생운동 하면 20대 젊은이들이 하는 운동이라는 거다.

그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균열적인 방식으로' 형성하는 공간이 바로 대학이고,

그들의 '형성중인' 정체성과 대면하여 저항의 주체로 일으켜 세우기 위해

학생운동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아주 기본적인 전제가 오늘날에 이르러 완전히 뒤흔들리고 있다 생각한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내 '학생운동'의 경험 덕분인데,

난 07년 쯤에 평생교육 문제에 대해 고민할 기회가 있었다.

그 고민의 결과를 아주아주 거칠게 요약하자면 대한민국 국민 전체가 학생이라는 거다.

 

이미 대학과 대학이 아닌 곳의 경계가 무너진지는 오래이다.

직장 끝나고 영어회화 배우러 다니는 직장인은 90년대 개념으로 보자면 학생이 아니었지만

2000년대 개념으로는 분명 학생이다.

난 작년에 대학을 졸업했지만, 얼마전까지 방통대 경제학과에 편입해서 공부를 좀 다시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지금은 포기했지만) 그렇다면 나는 언제부터 언제까지가 학생신분이고 언제부터가

학생신분이 아닌가?

게다가 전통적인 의미의 대학생에 해당하는 연령대의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형성하고

정체성을 구축하는 공간은 어디인가? 학생회실, 학회실, 강의실? 더 이상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너도 알고 나도 안다.

마지막으로, 예전부터 존재해왔던 문제이지만 아무도 고민하지 않았던 문제로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 안가고 바로 취직하는 20대의 문제이다.

우석훈 박권일의 <88만원세대>에서는 그 중에서도 실업계고 졸업 후 취직하는 여성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파트가 있는데, 90년대 학생운동의 개념으로는 절대 이런 주체들의 문제를

사고할 수 없다.

 

90년대 학생운동의 자장안에 묶여있는 지금의 학생운동, 특히 학생회운동은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대학에 입학한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 하는 운동이다.

그것은 68혁명에서 그랬던 것처럼 대학생이 사회변혁의 주체라는 사고에 기대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이미 평생학습사회로 접어든 한국사회에서 이러한 학생운동의 상은 소멸이 예정되어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것은 80년대 말, 90년대 중반까지 대학생이 규모면에서나 질적인 면에서나 이 사회의 주축세력으로 성장하면서 나타났던 일시적인 현상이지 보편적인 모습은 아니라고 본다.

 

그래서 난 이 시점에서 '백 투 더 베이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곧 '학생'이라는 만들어진 정체성을 버리는 것이다.

나도 잘 모르는 것이긴 하지만, 이것이 80년대 초반 학생운동,

그리고 광주항쟁에서의 들불야학 운동의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필요한 것도 바로 그런 베이직이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덧붙이고 싶은 점은 학생운동만 자신의 정체성을 버릴 것이 아니라

노동자 운동도 자신의 정체성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말이 아니라 이 평생학습사회체제에 적합한 저항주체로서의 노동자-시민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노동자운동은 전적으로 '학생운동'적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와 동시에 학생운동은 대학의 벽을 넘어서 대학 밖의 학교와 결합할 수 있어야 한다.

 

 

어제 서동진씨 논문을 여기저기서 찾아 놓고 오늘 읽고 있었는데,

그걸 읽고 있자니 나의 이런 생각이 조금 더 근거를 찾은 것 같다.

예전에 알라딘 블로거(??) 게슴츠레님이 <학생운동의 종언 혹은 부활의 기회>라는 글에서

학생회운동을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는 얘기를 했던 것 같은데,

나는 그것은 전적으로 '고려대'니까 가능한 얘기라고 생각한다.

그게 고려대에서도 언제까지 가능할지는 미지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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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독] <잊혀진 것들에 대한 기억> 中

 

“광기의 복원을 위하여”, 『잊혀진 것들에 대한 기억』중

- 김원, (이후, 1999)



80년대 학생운동의 역사는 내일이라도 혁명이 일어날 듯한 혁명의 광기로 가득 찬 역사였다. 이들은 끓어오를 듯한 혁명 전야를 향해 내달렸고, 자신들의 미래보다는 노동자와 민중의 미래와 이들의 상상된 공동체를 지향했다. 이제 이 글을 매듭짓기 전에 앞에서의 내용을 다시 정리해보자.

먼저 80년대 학생운동의 지향은 상상된 민중의 상으로서 ‘민중 공동체’였다. 이는 하나의 조직적인 실체라기보다 유대의 관계에 입각한 것이었고, 향후 이들이 만들고자 하는 혁명의 상, 미래의 상이었다.

두 번째, 이러한 공동체의 다양한 요소를 활용하여 운동엘리트들은 학생회 조직, 자신들의 정치투쟁을 정당화화고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 대중과 이들의 일상을 민중과 노동계급의 것으로 통일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이는 결과적으로 대중을 규율화시켰으며, 대중의 일상에 근거하지 못하는 제도화된 실천과 전략을 낳았다.

세 번째로, 대중의 정서를 모아내는 역할을 한 것이 대학 내 하위문화였다. 이 글에서 분석한 하위문화는 대학 내 다양하게 존재하는 모든 하위문화가 아니라 운동문화라고 불릴 수 있는 지배적인 하위문화였다. 즉 80년대 대학생의 하위문화는 자신의 모문화로서 계급문화를 지니지는 못한 채, 군부독재의 구조적 억압이라는 조건 하에서 아직 정치사회와 시민사회에서 사회세력으로 가시화된 못한, 담론적 수준과 미래의 사회적 행위자의 수준에서 ‘민중’을 지향했으며, 이는 공동체의 구성과 재생산에 필수적인 요인이었다. 당시 이러한 하위문화로의 지향은 구체적인 노동 현장, 작업장의 현실로서의 노동계급이 대학생들에게 다가온 것이 아닌, 지식과 의례 그리고 운동엘리트가 재해석한 과거의 전통을 통해 가능했다. 결국 상상된 실체로서의 민중은 처음부터 대학생에게 과학적으로 규정된 것이 아니라 공동체 내의 실천 속에서 재구성되고 재발명된 것이다.



한국 학생운동의 위기, 그 탈출구는 없는가?


한편 나는 80년대 학생운동의 위기는 대중 이데올로기로서 민중적 공동체의 변질과 그 조직적 형태인 학생회의 관료화, 부르주아적 조직 시스템의 형성 등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대중의 밑으로부터의 실천인 대중정치는 스스로의 운동적 정체성에 근거하지 못하는 대리주의, 선거주의, 엘리트주의다. 애초 그들이 지향하던 탈제도화 전략과 거리의 정치에서 퇴각하여 학생운동 정치의 정체성을 스스로 해체시킨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다. 또한 운동문화로 상징되는 80년대 하위문화는 대중이 자발적으로 만들어 가는 실천의 과정으로서의 문화가 결여되었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대학생의 독자적인 물질적 기반에 근거한 운동이 아니라 민중․노동계급이라는 상상된 실체 혹은 공동체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한 나머지, ‘공통의 계급경험’이 부재했던 학생 대중을 대상화시킨 것이다. 또한 80년대 학생운동은 운동․민중문화를 자신들의 고급문화로 간주한 반면, 대중매체를 중심으로 하는 대중문화를 지배문화, 소비문화로 간주했다. 공동체 내 운동문화는 하나의  고급문화로 존재했으며, 오히려 밑으로부터 만들어진 자생적인 하위문화에 대한 천착이 간과된 채 운동문화가 공동체 내에서 고정화된 것이다.

그러나 80년대 후반부터 불거져 나온 학생운동의 위기에 대한 논쟁은 이러한 요인들을 결여한 채 진행되었다. 물론 여러 가지 현상으로 미루어 현재 상황이 ‘객관적인 학생운동의 ’위기' 임에는 분명하다. 이러한 학생운동 정치와 관련된 위기의 원인 분석은 ‘외인론’과 ‘내인론’으로 구분해 볼 수 있는데, 기존 대부분의 분석은 절차적 민주주의의 진전에 따른 학생운동의 정치적 역할 소멸 및 제도화, 노동자 운동을 포함한 계급운동의 성장에 따른 역할의 축소 그리고 1991년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권의 몰락으로 인한 급진화 자원의 소멸 및 내부적인 이데올로기적 혼란 등의 외부적인 요인을 위기의 원인을 사고했다. 또한 학생운동 위기의 ‘내인론적 접근’ 역시 학생운동 엘리트의 과도한 급진주의, 최대강령주의, 대중의 의식과 괴리된 이데올로기적 급진성과 그 대표적인 표현으로서 스탈린주의의 폐해 등을 지적했을 뿐, 학생운동 정치의 핵심적인 구성 요소인 운동엘리트, 대중, 운동문화와 학생회 간의 총제적인 관계로서 학생운동 정치의 ‘동학’에 대해서는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는 이 글을 통해 80년대 학생운동 정치의 형성과 위기를 ‘내인론’적인 관점에서 살피고, 더 나아가 학생운동 정치의 급진화의 기원에서 위기에 이르는 과정을 엘리트와 대중의 다양한 권력 관계를 통해 규명하려고 했다. 결론적으로 80년대 학생운동은 그 내부 동학으로 볼 때, 대중운동의 수전에서 그리고 대중정치라는 맥락에서 충분히 급진적이지 못했기에 실패와 위기의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말할 수 있다.



밑으로부터 살아있는 역사 찾기


이 글은 학생운동 엘리트의 정치․조직노선과 저항 이데올로기만을 연구 대상으로 하던 기존 학생운동 연구의 한계를 공동체 내 대중과 엘리트 간의 권력 관계의 분석을 통해 극복하려는 최초의 경험적 연구라고 생각한다. 또한 80년대 대중 저항의 동력을 정세적인 조건, 구조적인 억압 효과를 중심으로 사고하던 연구를 뛰어넘어, ‘구조-행위’간의 매개 변수로서 하위문화와 공동체개념을 도입한 연구였다.

아울러, 그간 너무나도 당연시되었던 80년대 대학 내 운동문화의 구체적인 양상과 이를 둘러싼 공동체의 내부 동학을 규명하고, 운동문화가 80년대 대중 저항, 학생운동의 형성에 미친 구체적인 영향에 대해 밝히고자 했다. 그리고 서두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기존의 사회과학에서 사용하지 않던 민족지 또는 정치인류학적, 문화인류학적 접근방법을 시도함으로써 역사와 정치현상을 밑으로부터의 살아있는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방법론적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모색해 보았다. 처음 있는 시도라 다소 어지럽고 거친 면이 없진 않지만, 나는 이러한 방법론 및 연구에 대한 태도가 많은 다른 연구에도 확산되어 ‘살아 숨쉬는 학문’, ‘뛰어 다니면서 당 시대를 재조명하는 연구방법’이 한국 지식사회에도 보편화되기를 희망한다.



매일 쌀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창피해…


이 글에 마침표를 찍기 전에 마지막으로 나의 민중, 노동자의 역사에 관한 간단한 편린을 적고자 한다. 앞서 본 바와 같이 80년대 학생운동의 실천은 엘리트와 대중이 발명한 ‘혁명에 대한 열정’의 기제로서 운동문화에 의한 것이었다. 이들의 문화는 단지 생활양식, 스타일, 규범으로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대중과 대학 내의 여러 공간을 규정하는 상식이었으며 내일이라도 혁명이 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던, 광기(狂氣)로 가득찬 열정 그 자체였다. 졸버그의 표현대로, 광기의 순간은 근대적 인간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및는 정치적 열정으로 가득 찬 시기이다. 불과 며칠 사이에 여러 단체의 폭발적인 등장과 소멸, 흥분과 설레임, 집단적 철야, 폭포와 같은연설, 구름과 같은 집회와 인파, 수많은 노선과 쟁투(爭鬪)가 연달아 일어난다. 바로 이 모든 것들이 80년대 광기를 규정하는 것이었다. 집회와 투쟁, 자유, 행복, 정치적 충만감의 경험, 슬로건과 노래, 말의 격류 ― 나는 이들이 그 때 혁명의 마법에 취해 있었다고 본다. 적들에 그리고 역사에 의해 갇혀 있던 이들의 육체와 정신의 억압이 해방되고,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이 통일되는 상상된 공동체가 구현된 광기의 시대는 또 다른 해방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역사의 주체로 상상했던 노동자․민중에 대한 사회의 관심은 극히 비뚤어진 것이었고, 노동자․민중이 시민사회 내에서 최소한의 정당성을 얻기에는 또 10년의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80년대 학생운동의 희망과는 달리 한국 노동자들에게 사회주의 혹은 맑스주의라는 요소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도 있었다. 다만 그들은 자신들이 처한 모순적 구조가 너무나 고통스러웠고, 왜 자신들의 노동력과 한 시민으로서의 존재가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가에 대해 심사숙고한 끝에 약자의 무기로서 정권과 산업화에 대항하는 투쟁을 선택한 것이다. 이들은 다닥다닥 붙은 두세 평짜리 방에서, 숨쉬기조차 힘든 다락방에서 고통스러워 했고 ‘공돌이, 공순이’로 사회적 차별과 무시를 받으면서도 이를 운명으로 받아들여 왔었다. 그러나 공정한 법의 중개자라고 믿어오던 국가와 자본가로 대표되는 가진 자들이 자신들에게 퍼붓는 저주스러운 욕설과 폭력 앞에서 그들은 노동계급으로서의 집단적 계급 정체성을 알아 나아가고, 시민사회 내 사회세력으로 역사 앞에 등장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광기의 시대를 경험한 세대 중 다수는, 이제 그 때 그들이 그렇게도 되고자 했던 민중을 잊고 사는 듯하다. 전국단위 산업별노동조합의 대표가 국가기구의 대표를 압박하는 현재의 시점에서, 이제 과거의 주인공들은 그들에 대한 관심을 거두어 버린 것일까? 아니면 이제 다시 광기의 시대는 오지 않을 것이라는 자기부정 속에서 일상으로 함몰해 것일까? 역사가 반복된다면 금언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여전히 이러한 질문들이 자기반성의 계기로 작용할 것이라고 나는 믿고 싶다.

이 글을 마치면서 몇 년 전 TV 드라마 「모래시계」에 등장한 한 여대생이 동일방직 노동자의 투쟁을 보고, 술에 취해 쌀 한 봉지를 흔들며 흐느끼던 대사가 머리를 스쳐간다. “저기 노동자들은 목숨을 걸고 단식하며 싸우고 있는데 나는 이렇게 매일 쌀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창피해.” 이는 1970년대와 1980년대 다수의 지식인들이 공감하던 시대적 정서의 한 단면일 것이다. 그러나 10여 년이 지난 지금 한국의 지식인들은 너무 일찍 노동계급에 대한 부끄러움을 거두어 버린 것 같다. 아니, 어쩌면 그 부끄러움은 한때 그들의 위선이었을런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거친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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