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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잊혀진 것들에 대한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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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1/07
    [발췌독] <잊혀진 것들에 대한 기억> 中(1)
    구르는돌

[발췌독] <잊혀진 것들에 대한 기억> 中

 

“광기의 복원을 위하여”, 『잊혀진 것들에 대한 기억』중

- 김원, (이후, 1999)



80년대 학생운동의 역사는 내일이라도 혁명이 일어날 듯한 혁명의 광기로 가득 찬 역사였다. 이들은 끓어오를 듯한 혁명 전야를 향해 내달렸고, 자신들의 미래보다는 노동자와 민중의 미래와 이들의 상상된 공동체를 지향했다. 이제 이 글을 매듭짓기 전에 앞에서의 내용을 다시 정리해보자.

먼저 80년대 학생운동의 지향은 상상된 민중의 상으로서 ‘민중 공동체’였다. 이는 하나의 조직적인 실체라기보다 유대의 관계에 입각한 것이었고, 향후 이들이 만들고자 하는 혁명의 상, 미래의 상이었다.

두 번째, 이러한 공동체의 다양한 요소를 활용하여 운동엘리트들은 학생회 조직, 자신들의 정치투쟁을 정당화화고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 대중과 이들의 일상을 민중과 노동계급의 것으로 통일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이는 결과적으로 대중을 규율화시켰으며, 대중의 일상에 근거하지 못하는 제도화된 실천과 전략을 낳았다.

세 번째로, 대중의 정서를 모아내는 역할을 한 것이 대학 내 하위문화였다. 이 글에서 분석한 하위문화는 대학 내 다양하게 존재하는 모든 하위문화가 아니라 운동문화라고 불릴 수 있는 지배적인 하위문화였다. 즉 80년대 대학생의 하위문화는 자신의 모문화로서 계급문화를 지니지는 못한 채, 군부독재의 구조적 억압이라는 조건 하에서 아직 정치사회와 시민사회에서 사회세력으로 가시화된 못한, 담론적 수준과 미래의 사회적 행위자의 수준에서 ‘민중’을 지향했으며, 이는 공동체의 구성과 재생산에 필수적인 요인이었다. 당시 이러한 하위문화로의 지향은 구체적인 노동 현장, 작업장의 현실로서의 노동계급이 대학생들에게 다가온 것이 아닌, 지식과 의례 그리고 운동엘리트가 재해석한 과거의 전통을 통해 가능했다. 결국 상상된 실체로서의 민중은 처음부터 대학생에게 과학적으로 규정된 것이 아니라 공동체 내의 실천 속에서 재구성되고 재발명된 것이다.



한국 학생운동의 위기, 그 탈출구는 없는가?


한편 나는 80년대 학생운동의 위기는 대중 이데올로기로서 민중적 공동체의 변질과 그 조직적 형태인 학생회의 관료화, 부르주아적 조직 시스템의 형성 등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대중의 밑으로부터의 실천인 대중정치는 스스로의 운동적 정체성에 근거하지 못하는 대리주의, 선거주의, 엘리트주의다. 애초 그들이 지향하던 탈제도화 전략과 거리의 정치에서 퇴각하여 학생운동 정치의 정체성을 스스로 해체시킨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다. 또한 운동문화로 상징되는 80년대 하위문화는 대중이 자발적으로 만들어 가는 실천의 과정으로서의 문화가 결여되었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대학생의 독자적인 물질적 기반에 근거한 운동이 아니라 민중․노동계급이라는 상상된 실체 혹은 공동체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한 나머지, ‘공통의 계급경험’이 부재했던 학생 대중을 대상화시킨 것이다. 또한 80년대 학생운동은 운동․민중문화를 자신들의 고급문화로 간주한 반면, 대중매체를 중심으로 하는 대중문화를 지배문화, 소비문화로 간주했다. 공동체 내 운동문화는 하나의  고급문화로 존재했으며, 오히려 밑으로부터 만들어진 자생적인 하위문화에 대한 천착이 간과된 채 운동문화가 공동체 내에서 고정화된 것이다.

그러나 80년대 후반부터 불거져 나온 학생운동의 위기에 대한 논쟁은 이러한 요인들을 결여한 채 진행되었다. 물론 여러 가지 현상으로 미루어 현재 상황이 ‘객관적인 학생운동의 ’위기' 임에는 분명하다. 이러한 학생운동 정치와 관련된 위기의 원인 분석은 ‘외인론’과 ‘내인론’으로 구분해 볼 수 있는데, 기존 대부분의 분석은 절차적 민주주의의 진전에 따른 학생운동의 정치적 역할 소멸 및 제도화, 노동자 운동을 포함한 계급운동의 성장에 따른 역할의 축소 그리고 1991년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권의 몰락으로 인한 급진화 자원의 소멸 및 내부적인 이데올로기적 혼란 등의 외부적인 요인을 위기의 원인을 사고했다. 또한 학생운동 위기의 ‘내인론적 접근’ 역시 학생운동 엘리트의 과도한 급진주의, 최대강령주의, 대중의 의식과 괴리된 이데올로기적 급진성과 그 대표적인 표현으로서 스탈린주의의 폐해 등을 지적했을 뿐, 학생운동 정치의 핵심적인 구성 요소인 운동엘리트, 대중, 운동문화와 학생회 간의 총제적인 관계로서 학생운동 정치의 ‘동학’에 대해서는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는 이 글을 통해 80년대 학생운동 정치의 형성과 위기를 ‘내인론’적인 관점에서 살피고, 더 나아가 학생운동 정치의 급진화의 기원에서 위기에 이르는 과정을 엘리트와 대중의 다양한 권력 관계를 통해 규명하려고 했다. 결론적으로 80년대 학생운동은 그 내부 동학으로 볼 때, 대중운동의 수전에서 그리고 대중정치라는 맥락에서 충분히 급진적이지 못했기에 실패와 위기의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말할 수 있다.



밑으로부터 살아있는 역사 찾기


이 글은 학생운동 엘리트의 정치․조직노선과 저항 이데올로기만을 연구 대상으로 하던 기존 학생운동 연구의 한계를 공동체 내 대중과 엘리트 간의 권력 관계의 분석을 통해 극복하려는 최초의 경험적 연구라고 생각한다. 또한 80년대 대중 저항의 동력을 정세적인 조건, 구조적인 억압 효과를 중심으로 사고하던 연구를 뛰어넘어, ‘구조-행위’간의 매개 변수로서 하위문화와 공동체개념을 도입한 연구였다.

아울러, 그간 너무나도 당연시되었던 80년대 대학 내 운동문화의 구체적인 양상과 이를 둘러싼 공동체의 내부 동학을 규명하고, 운동문화가 80년대 대중 저항, 학생운동의 형성에 미친 구체적인 영향에 대해 밝히고자 했다. 그리고 서두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기존의 사회과학에서 사용하지 않던 민족지 또는 정치인류학적, 문화인류학적 접근방법을 시도함으로써 역사와 정치현상을 밑으로부터의 살아있는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방법론적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모색해 보았다. 처음 있는 시도라 다소 어지럽고 거친 면이 없진 않지만, 나는 이러한 방법론 및 연구에 대한 태도가 많은 다른 연구에도 확산되어 ‘살아 숨쉬는 학문’, ‘뛰어 다니면서 당 시대를 재조명하는 연구방법’이 한국 지식사회에도 보편화되기를 희망한다.



매일 쌀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창피해…


이 글에 마침표를 찍기 전에 마지막으로 나의 민중, 노동자의 역사에 관한 간단한 편린을 적고자 한다. 앞서 본 바와 같이 80년대 학생운동의 실천은 엘리트와 대중이 발명한 ‘혁명에 대한 열정’의 기제로서 운동문화에 의한 것이었다. 이들의 문화는 단지 생활양식, 스타일, 규범으로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대중과 대학 내의 여러 공간을 규정하는 상식이었으며 내일이라도 혁명이 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던, 광기(狂氣)로 가득찬 열정 그 자체였다. 졸버그의 표현대로, 광기의 순간은 근대적 인간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및는 정치적 열정으로 가득 찬 시기이다. 불과 며칠 사이에 여러 단체의 폭발적인 등장과 소멸, 흥분과 설레임, 집단적 철야, 폭포와 같은연설, 구름과 같은 집회와 인파, 수많은 노선과 쟁투(爭鬪)가 연달아 일어난다. 바로 이 모든 것들이 80년대 광기를 규정하는 것이었다. 집회와 투쟁, 자유, 행복, 정치적 충만감의 경험, 슬로건과 노래, 말의 격류 ― 나는 이들이 그 때 혁명의 마법에 취해 있었다고 본다. 적들에 그리고 역사에 의해 갇혀 있던 이들의 육체와 정신의 억압이 해방되고,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이 통일되는 상상된 공동체가 구현된 광기의 시대는 또 다른 해방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역사의 주체로 상상했던 노동자․민중에 대한 사회의 관심은 극히 비뚤어진 것이었고, 노동자․민중이 시민사회 내에서 최소한의 정당성을 얻기에는 또 10년의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80년대 학생운동의 희망과는 달리 한국 노동자들에게 사회주의 혹은 맑스주의라는 요소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도 있었다. 다만 그들은 자신들이 처한 모순적 구조가 너무나 고통스러웠고, 왜 자신들의 노동력과 한 시민으로서의 존재가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가에 대해 심사숙고한 끝에 약자의 무기로서 정권과 산업화에 대항하는 투쟁을 선택한 것이다. 이들은 다닥다닥 붙은 두세 평짜리 방에서, 숨쉬기조차 힘든 다락방에서 고통스러워 했고 ‘공돌이, 공순이’로 사회적 차별과 무시를 받으면서도 이를 운명으로 받아들여 왔었다. 그러나 공정한 법의 중개자라고 믿어오던 국가와 자본가로 대표되는 가진 자들이 자신들에게 퍼붓는 저주스러운 욕설과 폭력 앞에서 그들은 노동계급으로서의 집단적 계급 정체성을 알아 나아가고, 시민사회 내 사회세력으로 역사 앞에 등장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광기의 시대를 경험한 세대 중 다수는, 이제 그 때 그들이 그렇게도 되고자 했던 민중을 잊고 사는 듯하다. 전국단위 산업별노동조합의 대표가 국가기구의 대표를 압박하는 현재의 시점에서, 이제 과거의 주인공들은 그들에 대한 관심을 거두어 버린 것일까? 아니면 이제 다시 광기의 시대는 오지 않을 것이라는 자기부정 속에서 일상으로 함몰해 것일까? 역사가 반복된다면 금언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여전히 이러한 질문들이 자기반성의 계기로 작용할 것이라고 나는 믿고 싶다.

이 글을 마치면서 몇 년 전 TV 드라마 「모래시계」에 등장한 한 여대생이 동일방직 노동자의 투쟁을 보고, 술에 취해 쌀 한 봉지를 흔들며 흐느끼던 대사가 머리를 스쳐간다. “저기 노동자들은 목숨을 걸고 단식하며 싸우고 있는데 나는 이렇게 매일 쌀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창피해.” 이는 1970년대와 1980년대 다수의 지식인들이 공감하던 시대적 정서의 한 단면일 것이다. 그러나 10여 년이 지난 지금 한국의 지식인들은 너무 일찍 노동계급에 대한 부끄러움을 거두어 버린 것 같다. 아니, 어쩌면 그 부끄러움은 한때 그들의 위선이었을런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거친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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