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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금요일 저녁, 출신 동아리의 1년 중 가장 큰 행사가 있어 갔다왔다.
뒷풀이에서 오랜만에 만난 후배들과 이런 저런 얘기를 많이 나눴는데, 그 때 한 얘기 중
혹시나 나중에 까먹으면 안될 것 같은 얘기가 있어 메모를 해둘까 한다.
나와 이야기를 나눈 S모 후배님은 올 해 총학생회 선거 대응에 대해 고민을 해 봤단다.
해야 한다고 말하는 얘들도 있었고,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얘들도 있었다는데,
전자의 주장을 뒷받침 한다고 내놓은 근거들이 대략 5년전에도 들어왔던,
너무나 해묵은 얘기들이라는 사실에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예 올 해 할 수 있고 없고를 떠나서,
더 이상 학생운동이 학생회운동으로는 생명유지 자체가 안 될 수밖에 없는
이유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아래 이야기들은 그 날 했던 얘기에 지금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합한 것이다.)
예전에 학생운동의 역사 같은 것을 공부하면서 90년대 초반에 쓰여진 글을 본 적이 있다.
거기서는 학생운동이 전체운동에서 가장 선진적인 부분이 될 수 있는 이유를 대략 이렇게 보고 있었다.
잘 기억은 안나는데 대략 "학생들은 젊음의 패기와 배움의 자리에 있다는 가능성...."
뭐 이런 거였다.
여기서 정의하는 학생운동은 '대학생' 자체일 수도 있겠지만
의미를 명확히 규정하자면 '20대'에 더 가까운 것 같다.
그러니까 예전부터 지금까지 학생운동 하면 20대 젊은이들이 하는 운동이라는 거다.
그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균열적인 방식으로' 형성하는 공간이 바로 대학이고,
그들의 '형성중인' 정체성과 대면하여 저항의 주체로 일으켜 세우기 위해
학생운동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아주 기본적인 전제가 오늘날에 이르러 완전히 뒤흔들리고 있다 생각한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내 '학생운동'의 경험 덕분인데,
난 07년 쯤에 평생교육 문제에 대해 고민할 기회가 있었다.
그 고민의 결과를 아주아주 거칠게 요약하자면 대한민국 국민 전체가 학생이라는 거다.
이미 대학과 대학이 아닌 곳의 경계가 무너진지는 오래이다.
직장 끝나고 영어회화 배우러 다니는 직장인은 90년대 개념으로 보자면 학생이 아니었지만
2000년대 개념으로는 분명 학생이다.
난 작년에 대학을 졸업했지만, 얼마전까지 방통대 경제학과에 편입해서 공부를 좀 다시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지금은 포기했지만) 그렇다면 나는 언제부터 언제까지가 학생신분이고 언제부터가
학생신분이 아닌가?
게다가 전통적인 의미의 대학생에 해당하는 연령대의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형성하고
정체성을 구축하는 공간은 어디인가? 학생회실, 학회실, 강의실? 더 이상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너도 알고 나도 안다.
마지막으로, 예전부터 존재해왔던 문제이지만 아무도 고민하지 않았던 문제로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 안가고 바로 취직하는 20대의 문제이다.
우석훈 박권일의 <88만원세대>에서는 그 중에서도 실업계고 졸업 후 취직하는 여성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파트가 있는데, 90년대 학생운동의 개념으로는 절대 이런 주체들의 문제를
사고할 수 없다.
90년대 학생운동의 자장안에 묶여있는 지금의 학생운동, 특히 학생회운동은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대학에 입학한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 하는 운동이다.
그것은 68혁명에서 그랬던 것처럼 대학생이 사회변혁의 주체라는 사고에 기대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이미 평생학습사회로 접어든 한국사회에서 이러한 학생운동의 상은 소멸이 예정되어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것은 80년대 말, 90년대 중반까지 대학생이 규모면에서나 질적인 면에서나 이 사회의 주축세력으로 성장하면서 나타났던 일시적인 현상이지 보편적인 모습은 아니라고 본다.
그래서 난 이 시점에서 '백 투 더 베이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곧 '학생'이라는 만들어진 정체성을 버리는 것이다.
나도 잘 모르는 것이긴 하지만, 이것이 80년대 초반 학생운동,
그리고 광주항쟁에서의 들불야학 운동의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필요한 것도 바로 그런 베이직이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덧붙이고 싶은 점은 학생운동만 자신의 정체성을 버릴 것이 아니라
노동자 운동도 자신의 정체성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말이 아니라 이 평생학습사회체제에 적합한 저항주체로서의 노동자-시민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노동자운동은 전적으로 '학생운동'적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와 동시에 학생운동은 대학의 벽을 넘어서 대학 밖의 학교와 결합할 수 있어야 한다.
어제 서동진씨 논문을 여기저기서 찾아 놓고 오늘 읽고 있었는데,
그걸 읽고 있자니 나의 이런 생각이 조금 더 근거를 찾은 것 같다.
예전에 알라딘 블로거(??) 게슴츠레님이 <학생운동의 종언 혹은 부활의 기회>라는 글에서
학생회운동을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는 얘기를 했던 것 같은데,
나는 그것은 전적으로 '고려대'니까 가능한 얘기라고 생각한다.
그게 고려대에서도 언제까지 가능할지는 미지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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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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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정말 중요한 문제설정입니다그려. 덧붙여, 댓글로 어줍잖게 논쟁 아닌 논쟁을 시도해 죄송하구여.ㅋ; 완성된 글로 개입하기엔 여러가지로 상황이 녹록치 않은 알바형 백수살이이다 보니..ㅋㅋ;;부가 정보
구르는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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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랑 같은 처지이시네요. ㅋㅋㅋ어쨌든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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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슴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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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이라는 만들어진 정체성을 버"려야 한다는 데 시선이 꽂히는군요. 현재 '학생' 혹은 '청춘'이라는 말은 찬양이나 동정의 대상으로 간주되고 또 스스로를 그렇게 여기는 경우가 많은 것 같은데 두 경향들 모두 좀 의심스럽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그냥 그럴싸한 말들을 주워삼기는 걸 넘어서기 위해서는 '학생'이라는 위치를 설정하는 것 자체가 정당한지 문제를 제기해 볼 필요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리고 제가 말한 학생회를 중심으로 한 학생운동 전화의 제안이 '고려대'니까 가능하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적잖게 공감합니다. 사실 주석 하나에서 이 운동이 그냥 자족적인 학벌집단에 그칠 위험성에서 다루긴 했다만 충분하지가 못한 것 같군요..부가 정보
지나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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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랑은 생각이 좀 다르시네요.노동자 운동이 자기 정체성을 버려야 타 부분 운동과 연계가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것을 떠나서 노동자가 노동자 정체성 찾기가 운동의 주요한 과제였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흔히들 즉자적 계급 대자적 계급이라는 말로도 표현하는 것들 말입니다.
노동자 운동의 정체성을 흐리고 타 부분과 연계되어야 하는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영역구축속에서 서로 교류하는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학생운동 역시 현재 자본주의 사회에서 학생이라는 집단이 처한 상황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렇기 때문에 청년실업의 문제, 단순히 일자리 만들어주세요 가 아니라 자본주의가 강제하는 실업문제에 대해 인식하고 싸워나가야 할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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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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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다/ 구르는돌님의 요지는, 이른바 '정체성의 정치'가 일정한 유효성에도 불구하고 결국엔 처할 수밖에 없는 실천상의 딜레마를 지적하신 거 같어요. 당연한 얘기지만, 그만큼 지난 20여년 상간의 정세와 지형이 크게 바꼈단 거구요. 근까 님께서 말씀하신 '독자적인 영역' 구축이란 게, '실제로는' 노동자 중에서도 특정 노동자 신분을 배타적으로 독자화시키는 쪽으로 흘러가버리지 않았냔 거죠.민주노총 혹은 민주노조운동의 조직편제가 지금 전체 노동자 인구의 70%에 육박하는 (비정규직노동자이자, 여성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으며, 실업자와 취업자 경계를 쉽사리 넘나드는)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을 조직화하는 데 겪는 어려움을 보시란 거죠. 안타까운 얘기지만, 민주노총 조직편제론 이들 노동자들의 독자적인 영역구축에 도움이 안 될 뿐더러, 민주노총 조직편제에 포함된 노동자들을 소위 '선진/중심' 노동자로 간주할 조직구조상의 위험마저 안고 있단 얘기야 뭐, 저 아녀도 지적이 많이 된 걸 텐데요..
결론짓자면, 님께서 독자적 활동과 운신의 영역을 창출할 주체라 상정한 '노동자'는 과연 누구며, 어떻게 다시 정의할 수 있을지 논의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사실 노동운동 조직화상으로도 중심과 주변의 분할구도가 엄존하고, 노동과 실업을 아우르는 노동의제에 소홀한 건 이른바 급진좌파 계열이라 해서 별다르지 않잖나요? 선언적으로 "노동자는 하나다"라 하고만 말 게 아니라, 각기 다른 위치에서 있는 노동자들을, 자본이 갈라치는 분할선과는 구별되는 개별성들을 감안하면서 하나되게 할 그런 독자성은 뭔지 꼼꼼히 살펴봐야겠다는 거죠. '계급형성'과도 당근 맞닿아 있을 이 부분이, 제가 보기엔 노동자정치가 지닌 커다란 정치적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실천적인 공백 아닌가 싶어요.
이상이, 노동자정체성 강화와 노동계급 형성은 생각 이상으로 아주 다른 얘길 수 있다고 보는 까닭입니다. 달리 말해, 계급정치가 '부족적 정체성'을 강화하는 정치여선 곤란하겠다는 거죠. 헌데, 작금의 (특히 민주노총서 써먹는) '계급정치'란 말은 이런 뉘앙스가 자꾸 느껴져서 솔직히 거북할 때가 많아요 저는. '진정한 계급의식'을 말하는 쪽도 심정적으론 지지하면서도, 정작 형성의 기술에 실제론 굉장히 무심하거나, 실질적인 현실 개입을 안 하려는 거 같고요. 사실상의 실천적 방기랄 수도 있겠고. 계급정치가 때론 세속화한 정치신학이 되는 건, 그래서 한 끝 차인 건가 싶달까요.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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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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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사람/님이 말씀하신대로 노동자계급형성이 노동자내부의 특정 부분을 독자적으로 형성하는것이었다면 (그것이 사실여부를 떠나서) 그건 잘못된 조직화의 사례인것이지 그것때문에 노동자계급의 정체성을 찾으려고 하는것 자체가 부정당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가 태동하던 시기와는 달리 노동자의 직종 자체가 세분화되고 다양화된것은 사실이지만 저는 이것을 노동자계급의 독자성을 부정하는 근거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과거에는 노동자로 분류되지 않았던 사람들이 노동자로 분류된다면 그 자체가 노동자인거고 거기에 맞게 조직화 하면 됩니다. 물론 그것이 자율주의자들이 하는 무의미한 확장은 아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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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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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대 공장 노동자 블루칼라만이 노동자계급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던데, 직접 확인해보지는 않았지만 에릭 홉스봄이 이런 입장이라고 하더군요. 하여간 이런 입장은 잘못된것이라고 할수 있겠지요. 서비스직 노동자 만 하더라도 현재 한국 비정규노동운동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니까요.그리고 저는 노동자계급의 독자성과 연대는 배타적으로 대립하는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노동자계급의 독자성을 견지해나간다는 의미는 타계급을 부정하거나 배척하는것이 아니라 부르주아-시민사회 정치에 포섭되지 않는다는 의미로 알고 있습니다. 노동자계급이 영세농민이나 철거민 등과 동맹을 맺어야 하는것은 당연한것입니다.
정체성의 정치는 전가의 보도는 아니지만 이걸 버리고서 무엇을 할수 있을지 좀 의문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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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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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율주의자들이 하는 무의미한 확장"이야 당연히 경계하자 치고요, 그럼 한 가지 물어보죠.님이 말씀하신 영세농민이나 철거민은 '노동자'인가요 아닌가요? 피억압민중이지만 노동자는 아닌 계급인 거냐, 아님 일상화한 노자모순의 상이한 표현 형태로 봐줘야느냔 겁니다. 이런 표현형을 가진 (제가 보기엔 역시나) 노동자들을, 일단 기존의 노동자와는 다른 계급(?)으로 범주화한 후 적극적 연대대상으로 간주한다 한들, 이런 분류가 실천적으로 적절하냔 의문을 던진 셈인데요. 노동자 계급의 독자성 강화 후 연대 식의 단계론적 접근이 이뤄질 게 아니란 겁니다. 농민과 철거민과의 연대는, 노동자 계급 바깥이 아니라 내부에서 이뤄지는, 그야말로 단일한 노동자 계급형성에 필요한 연합 과정 아니겠냔 거죠. 전 노동자에 대한 재정의 필요를 이런 취지로 한 건데, 제 말을 뭔가 오해하신 듯싶네요.
부르주아-시민사회 정치에 포섭되지 않는 게 계급형성의 정치, 혹은 노동자정치의 요체인 거야 물론이죠. 물론인데, 그란 정치를 실제로 어떻게 해 나갈 거냔 그리 간단하지 않아 보여서요. 노동자를 어케 다시 정의하냔 질문 던진 건 그래서인 거죠. 형성의 기술이라는 게 일 터졌을 때 이거봐라 자본은 원래 이런 거야 하는 거 말고, 이걸 일부로 좀더 풍부해질 수 잇겠느냐. 이 얘기가 잘 되는 거 같진 않아요, 좀 거칠 게 말하면, 이런 기술에 대해 얘기해 볼라 치면 결벽증적으로 부르주아 정치로의 포섭 위험만 경고됐을 뿐. 이걸 경고하는 거랑, 실제로 어떤 형성의 정치를 할 거냔 다른 얘기 아니겠어요.
근데, '정체성의 정치'를 전가의 보돈 아녀도 그걸 버리구 뭘하냔 식이라시면, 정체성 정치의 원조격인 민족(해방)주의 운동은 어떻게 봐야 할까요 그럼. 그 정세적 유효성을 인정해야겠네요, 님 말씀대로면요? 어찌 생각하시는지 궁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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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는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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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실제 주장과는 상관없이 이야기가 샛길로 빠져드신것 같군요. 저는 분명 노동자 운동도 자신의 정체성을 버려야 한다고 말했지만 혹시나 하는 오해가 있을까봐 그 뒤에 '다른 말이 아니라' 평생학습사회체제에 적합한 저항주체로서 노동자-시민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그래야 한다는 것이었고, 그런 단서를 달았을때 버려야 하는 노동자운동의 정체성이라는 것은 지나가다님이 오해하신 것처럼 노동자운동 자체를 말하는 것은 아니지요. 그래서 제 글은 누가 노동자냐 아니냐를 따지는게 초점이 아니라 오히려 누가 학생이고 학생이 아니냐를 따지는 것입니다. 사실 저의 제한된 머리 용량으로는 노동자운동의 올바른 진로같은 것을 고민할 정신이 없어서요. ㅠ.ㅠ 굳이 따지자면 저는 노동자운동의 자기 정체성은 (지나가다님 말대로) 오히려 더 강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부가 정보
들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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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보기에, '정체성' 강화와, 형성된 '계급의식'의 강화는 어느 정도 겹치기야 하겠지만 아무래도 다른 것 같다는 생각여서요.. 민족(해방)주의가 탈식민/독립 이후 (실은 이전부터 안고 있는 것이 강화된 것이라 해야겠지만서도) 겪은 딜레마(혹은 반동화)도 그런 거였던 거 같고. 그래서 전 그 겹치지 않는 부분은 뭐겠으며, 그게 더 중요하겠다고 할까용. 뭐 그렇슴다.^^:제가 아는 학생 하나는, 자기가 지금 학교를 배우러 다니는지 공부라는 일을, 심지어 돈내가며, 하러 다니는 건지 헷갈릴 때가 있다는 얘길 해요. 학교서 배우는 전공은 자기 배우고 싶은 게 아니라, 실은 기업이 배우길 열망하는 내용 같다며..ㅋ 그 친구 전공은 경제학이라 더 그럴 텐데요..
이렇게 보면 이른바 노학연대란 말에 대해서도 달리 생각할 정세가 됐단 얘기 같더라구요. 노동자와 따로 연대를 생각해야 할 (대)학생이라기보단, 그 자체로 이젠 학습노동자에 가까워지고 있는 건 아닌가 할 정도로요. 굳이 연대 대상이라고 여겨온 노동자와 구분 안 해도 되는 '당사자'에 가까워졌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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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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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고민하던 부분에 대해서 잘 정리 되어 있는거 같아서... 음... 문득 든 생각인데, 인간사는 디테일에서는 다를지라도 세부적으로 동류의 경험을 한 사람들은, 비슷한 고민을 하는 것 같아요; (구르는돌님 의견은 저보다 세련되게 정리되어 있지만...) 그건 그렇고, 같은 의미로 전혀 고민 안하는 사람도 도처에 있는 듯... 따로 의견 쓸건 없고 +_+ 퍼갑니다요 크크 ^^부가 정보
지나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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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정체성의 정치에 대한 질문을 해주셨는데 민족해방운동은 인정해야 하느냐? 정세적 유효성이 있느냐?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피억압민족의 민족해방은 무조건적으로 지지합니다. 그리고 저는 질문과 별개로 정체성의 정치가 민족단위라고 생각해본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계급단위라고 생각해왔습니다. 제가 정체성의 정치를 버려서는 안된다고 한 의미는 노동자계급의 정체성이란 말그대로 노동자계급이라는것일진데 그렇다면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계급적 요구를 내걸고 투쟁해야 한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이부분에 대해서는 서로 오해가 있는거 같습니다.그리고 철거민 영세농민에 대한 문제는 저는 동맹으로 풀어나갈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철거민이나 영세농민이나 철거민은 노동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위에서도 언급한걸 다시 반복하자면 노동자가 아니라고 하여 반자본주의적 요구를 가질수 없다거나 노동자가 배쳑해야 한다거나 하는것은 아닙니다. 노동자계급의 독자성 강화 이후의 연대라고 표현한 부분은 노동자계급이 일단은 자기 정체성을 세워놓고 세력을 재편한뒤에여 민중연대투쟁에 나설수있다는 그런 의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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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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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건부나 제한적인 지지도 아니고, 무조건 지지라고요. 하긴뭐, 그거야 포인트는 민족주의 거부냐 수용이냐가 아니라 어떻게 '길들일' 거냐라고 하는 주장도 있긴 하니.. 그래도 다른 데선 민족해방주의가 이미 집권세력화하기도 했던 마당에, 무조건 지지한다는 건, 뭐랄까 딱딱 맞아떨어진다는 인상을 주긴 합니디만, 솔직히 웬지 껄끄럽다는 생각을 피하긴 힘들어 보이느만요. ^^:헌데, 영세농민과 철거민이 어째서 노동자가 아닐까요? 영세농민들도 그렇지만 철거민들도 엄연히 소상품생산자로서 상품(화)연쇄의 주요한 마디를 이루고 있는 이들이자나요? 협의의 '사업장' 소속이야 노동과정의 성격상 없거나, 매우 불안정하다 쳐도요. 그런데도 이들을 노동자, 혹은 노동자계급이 아니라고 단언하실 수 있는 근거는 뭔가요. 정말 몰라서 여쭙는 거니, 성가셔 마시구 답해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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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는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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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사람/ 말씀하신 것처럼 노학연대 개념 자체를 바꿔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사실 노-학연대라고 하면 왠지 풍기는 뉘앙스가 기계적 연대라는 관념을 넘어서기 힘든 것 같아서요. 기존에 가지고 있던 학생과 노동자의 정체성 자체가 서로 유연하게 뒤섞이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래요...지나가다/ 하시고 싶은 말씀이 많은건 알겠는데, 하실 말씀은 하시더라도, 제 글에 대한 오해는 좀 풀리셨나요? 계속 제 글과는 상관없는 말씀을 하시길래 묻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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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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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해방운동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지는 민족주의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지는 아닙니다. 되묻도 싶습니다. 과거 식민지로 세계가 분할되었던 시기에 그럼 우리는 어떤 주장을 해야 합니까? 각 민족의 자결권을 인정해야 하는거 아닐까요? 다만 민족해방이후에 대해서 저는 사회주의 혁명의 단계로 접어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두번재 영세농민이나 철거민은 노동자가 아니냐? 노동자에 대한 저의 정의는 맑스주의의 그것과 완전히 동일합니다. 그런 정의 하에 "농민"을 노동자라고 하지 않는것이고 다만 농민 중에 대농에게 고용된 농민이 있다면 그러한 농민에 한해서 농업노동자라고 할수 있겠습니다. 철거민은 좀 복잡한문제인데 용산같은 경우에는 자영업자였지만 다른 철거민들은 걔중에 노동자도 있는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철거민이라고 개념을 정의할때는 그 사람들이 자영업자든 노동자든 백수든간에 철거-철거반대 의 영역에서 싸우는 사람들이라는 의미기에 노동자와는 차이가 있다고 한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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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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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판단으로, 그 말씀은 1917년 이후 식민화 지역의 피억압 인민들에 대해 레닌이 취했던 노선(혹은 이른바 NLPDR론?)을 거의 그대로 추인하는 말씀 같네요. 아시다시피, 윌슨주의에 대한 일종의 견제로서 선제적으로 취한 이 노선이 이후 과연 적절한 것이었는지에 대해선 로자 룩셈부르크가 잘 지적한 바 있죠. 인민의 자결이 아닌, 민족의 자결을 전술적으로 지지하면서부터, 러시아 혁명은 이내 자본제적인 동시에 부르주아적 '회귀' 압력에 두텁게 포위당할 거라구요. 말하자면 1917년 10월이란 사건이 지닌 사회혁명적 잠재력이 민족자결=국가독립 노선으로 귀결됐을 때 초래될 수 있는 문제점에 대해 날카롭게 지적한 셈이랄 수 있을 겁니다.(요즘 프랑스령 과들루프에서 진행중인 프랑스 정부에 대한 노동계급의 저항이 기본적으로 독립이 아닌 사회적 해결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 것도, 어쩜 민족자결=독립이란 반체제 노선에 대한 로자의 경고를 오늘에 잘 살리고 있는 경우랄 수 있잖나 싶구요.)
물론, 로자의 지적이 그 놀라운 통찰과는 별개로 그 당시 정세에서 얼마나 먹힐 수 있었는지는, 저 역시 옳고 그르고를 떠나 갸우뚱해지곤 해요. 하지만 전 '민족자결권' 인정이, 근대 자본주의 발흥기에 이어 '2차로' 진행된 세계경제의 식민주의적 팽창 국면에서 (서유럽/일본 식민주의자들로부터 '민족'이라 불리게 된) 피억압 인민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경로였다 할 수 있는지도 사실 의문이거든요. 민족이라 불렸다 해도, 이 인민들의 반체제적 움직임이 적어도 '민족(해방)주의'로 환원될 수 없는 건 분명한 듯합니다. 근까, 그렇다고 코민테른식 사회주의로도 환원될 수 없는, 인민들의 '자율지대'에 (재)주목해야 한달까요..
제 생각에, 님이 말씀하시는 '단계론'에선 이런 지대들에서 활동한 역사적 행위자들은 처리, 분류 곤란을 이유로 누락되거나 지엽적으로 취급되기 십상일 것 같은데요. 오히려 전, 이런 행위자들에 대한 기억을 (좌파적 시각에서) 오늘에 되살려야 한다고 보는 쪽임다. 민족(해방)주의 운동을 '현상'으로 이해하는 것과, 그 움직임을 (어떤 식으로든) 지지하는 건 별개라고 보는 까닭이기도 하구요.
님의 노동자에 대한 정의는 "맑스주의의 그것과 완전히 동일"하시다구요. 맑스주의를 정통과 이단들이라는 기독교식 이분법으로 갈라치지 않는다면, 대체 '어떤' 맑스주의를 말씀하시는 건지 말씀만으론 파악하기가 어려운데요?ㅋ 맑스도 자기 스스로 자긴 맑스주의자가 아니라 했던 걸 반추해본다면, 전 사실 맑스주의에 대한 이런 설명(?)은 사실상의 동어반복이라 생각하거든요.
철거-철거반대의 영역도 따지고 보면, 사회적 관계인 자본(=삼성건설과 한국 행정부)의 내적 모순이 계급적 분할을 만들어내는 곳일진대, 그게 철거민을 '노동자가 아닌' 차이의 근거라 하시는 것도 저로선 좀체 납득하기 힘듭니다. 이게 다, (하나의) '계급'을 구성(내지 형성)하는 상이한 성분들에 대해 님께서 과도한 도식화에 빠져있어서인 건 아닐까요? 적어도 그런 조짐이거나요. 사실 소위 유물론적인 의미에서 봐도, 그 도식은 어디까지나 (시간성과 결부된 실천을 통해) 변화하는 정세의 함수일 뿐인데도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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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는돌/네 죄송합니다. 제가 말했던 의미와 구르는돌님의 말했던 의미, 정체성을 버려야 한다는 의미가 다른거 같습니다. 그런데 아직 평생학습사회체제는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잘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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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이야기하면 문국현식 체제라고 생각하시면 편할 것 같습니다. 문국현이 4조 3교대 근무방식인가? 그것을 도입하면서 근무외 인력들을 인력개발과정에 투입되도록했죠. 기업 자체에서 노동자에게 자기계발을 하도록 여건을 만들어 준 것인데, 이것이 문국현의 전매특허이긴 하지만 사실상 노무현 정부 이래로 국내 교육정책의 주요 코드로 자리매김했죠. 노정권 말에 제시된 미래교육 비전 2030인가 하는 정책플랜이 있었는데, 그것의 캐치프레이즈가 '평생학습사회로 나아가는...'이었습니다. 여기에 담긴 내용은 사실상 이명박 교육정책에도 거의 그대로 들어가있죠. 당시 교육정책을 주도적으로 마련한 이주호 의원(지금 교과부 차관인가?)의 홈페이지에 가 보면 관련 자료가 많습니다.저는 이게 단순히 교육정책 차원의 문제만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흔히 말하는 '스펙쌓기경쟁'을 단순히 '갈수록 경쟁이 심화된다'는 정도로 생각할 문제가 아니고, 대중들의 이데올로기적 조건을 변화시키면서 결과적으로 전통적인 '학생'개념을 뒤흔든다고 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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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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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일한 주체로서 '학생'을 호명할 수 없는데, 그것을 억지로 호명하려니까 '학생'운동이 길을 못찾고 있다는 생각을 해요. '학생'의 사회적 성격을 이리저리 규정해보려 해도, 과거만큼 정체성이 균일하지 않으니까요.(과거에는 어떤 정체성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또 따로 점검해볼 문제인 것 같아요. 어쩌다 보니 20대 중반이 훌쩍 넘도록 학교에 남아있지만, 여지껏 '학생'의 사회적 규정에 대한 심도있는 논의를 겪어보질 못했거든요. 제 모자람 탓일 수도 있겠지만, 어쨋든 그게 학생운동 안에서 일반적인 주제는 아니었다는 겁니다. 당위적이고 다분히 근거가 부족한 존재론적인 규정으로 '학생'을 묶어내왔던 것 같은데, 2000년대 이후에는 그런 규정이 자기근거를 찾지 못하면서 심각한 공회전을 시작했다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학생'을 규정하려는 노력을 포기한다면 '학생운동'의 존재기반이 사라지는 것이니, 진퇴양난이에요.애써 묶어내본다면, 배운다는 것보다는 예비취업자로서 정체성이 더 강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보다도 오히려 그 안의 여러 집단들이 다른 관계에서 공유하는 정체성이 더 뚜렷할 것 같아요.(이를테면 여성으로서 등등. '여성' 보다 '학생'의 정체성이 더 모호해 보인다는 뜻입니다.) 글쓴이님이 언급하신 평생학습체제가 이런 스펙쌓기를 지칭하는 것으로 읽었는데, 노동자든 학생이든 일자리를 얻기(지키기) 위한 스펙쌓기에 맞닥뜨릴 수 밖에 없지만, 그것이 그 둘을 묶어내 저항에 나서게 할 수 있는 경험인지에 대해서는 희의적이에요. 이것은 끊임없이 경쟁해야한다는 자본주의의 속성이 자본가 계급에게도 적용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거든요. 집단을 저항주체화 하기 위해서는 모두가 경험하는 사회적 특성이 아니라(이건 이를테면, '사람은 숨을 쉬어야 한다'와 비슷한 언명이잖아요), 특정한 집단이 공유하게 되는 경험을 발굴해내야 할 것 같아요.(평생학습체제를 글쓴 분의 뜻대로 이해한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중간부분에, '대학생이 사회변혁의 주체라는 사고'는 '학생'의 존재적 성격 때문에 선도적일 수 있다는 게 아니라, '학생운동'이 선도적이어야 한다는 당위/자기과제였을텐데, 그렇게 봤을 때 글쓴 분의 맥락과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 같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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